북한이 24일 풍계리 핵실험장을 폐기했다. 폭약을 사용해 핵실험장의 모든 갱도를 무너뜨리고 입구를 폐쇄했다. 향후 핵 관련 지상시설과 인력을 철수하면 폐기가 완료된다. 북한이 유일한 핵실험장을 폐기한 것은 미래 핵을 포기한 대담한 선제적 조치다.

그러나 미국은 6월12일로 예정된 북·미 정상회담을 취소했다. 도널드 트럼프 미국 대통령은 이날 김정은 북한 국무위원장 앞으로 쓴 이런 내용의 서한을 공개했다. 이는 국제관례에 어긋나는 것은 물론 상식적으로 도저히 이해할 수 없는 처사다.

문재인 대통령이 25일 0시 부터 한시간 동안 트럼프 대통령의 북미정상회담 취소 발표와 관련해 국가안전보장회의(NSC) 상임위원 긴급회의를 주재하고 있다.청와대 제공

북한은 이전에도 여러 차례 무조건적 선제조치를 취해왔다. 6개월째 핵실험 및 미사일 시험발사를 중지하고, 억류 미국인 3명을 석방했다. 그러나 미국은 그에 상응하는 행동을 보인 적이 없다. 오히려 존 볼턴 백악관 국가안보보좌관 등 고위 인사들이 북한이 거부하는 리비아식 비핵화 모델을 거론하며 북한을 자극했다. 북한 입장에서는 압박을 넘어서 위협과 굴욕으로 다가올 것이다. 체제안전 보장 확신이 없다면 위기감을 느낄 수밖에 없다.

트럼프 대통령은 “김정은 위원장의 발언에서 보인 엄청난 분노와 열렬한 적대감에 기반해 슬프게도 오랫동안 준비해온 이번 회담이 열리기에는 부적절한 시기라고 느낀다”고 말했지만 앞뒤가 맞지 않는다. 김정은 위원장은 최근 북·미 정상회담에 대해 직접적으로 발언한 바 없다. 물론 최선희 북한 외무성 부상이 마이크 펜스 부통령이 리비아 모델 발언으로 자극하자 북·미 정상회담 재고려 발언으로 맞선 적이 있다. 앞서 김계관 외무성 부상도 볼턴 보좌관의 도를 넘는 발언에 같은 취지로 대응한 바 있다. 그러나 이는 김정은 위원장의 직접 발언이 아닐뿐더러 판을 깨자는 것도 아님은 누가 봐도 분명하다. 이를 이유로 회담을 취소하는 것은 트럼프 대통령의 지도력도 훼손하는 일이 될 것이다.

북·미처럼 신뢰가 없는 국가 사이에서는 신뢰를 쌓아가며 협상하는 길밖에 없다. 어느 한쪽이 구체적인 조치로 신뢰를 쌓은 뒤 그것을 바탕으로 다음 단계로 넘어가도록 해야 한다. 그러지 않고 상대가 수용하기 어려운 조건을 내세워 압박하는 것은 회담의 모멘텀을 약화시키게 된다. 북한의 핵실험장 폐기 조치에 미국도 선의를 보여야 한다.

회담이 취소되고 북·미관계와 한반도 정세가 다시 경색되는 상황으로 돌아가서는 절대 안된다. 마침 트럼프 대통령이 서한에서 향후 김정은 위원장의 마음이 바뀔 것을 전제로 회담에 임할 것을 시사한 만큼 아직 여지는 있다. 북·미가 함께 노력해 다시 한반도 평화를 구축하기 위한 노력을 제개하기 바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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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계 각지의 표준시는 영국 그리니치 천문대를 기준으로 정한다. 만국지도회의는 1884년 그리니치 천문대를 지나는 경선(經線)을 본초자오선으로 삼아 경도 15도를 벗어날 때마다 한 시간씩 시차를 뒀다. 대부분의 나라에서는 지역이 다르더라도 같은 표준시를 사용한다. 하지만 미국·캐나다·러시아와 같이 국토가 동서 방향으로 이어진 국가에선 여러 개의 표준시를 쓰고 있다. 표준시는 정치적 목적으로 바뀌기도 한다. 중국은 1949년 공산혁명 이전까지 지역별로 5개의 시간대가 있었지만 마오쩌둥이 집권한 이후 베이징 시간을 표준시로 정하고 시차를 없앴다. 우크라이나에 속했던 크림반도는 2014년 러시아에 병합된 이후 러시아 표준시를 사용하고 있다.

4·27 남북정상회담에서 김정은 북한 국무위원장이 찬 손목시계(왼쪽)의 시각이 김여정 노동당 중앙위원회 제1부부장의 손목시계(오른쪽)의 시각보다 30분 늦었다. 김 부부장이 평양 표준시보다 30분 빠른 한국시간에 시곗바늘을 맞춘 것으로 보인다. 판문점 _ 공동사진기자단

한국의 표준시는 대한제국 시절인 1908년 제정됐다. 한반도의 중심인 동경 127.5도를 기준으로 세계 표준시와 8시간30분 차이였다. 일제강점기인 1912년에는 동경 135도(9시간 차이)로 변경됐다. 총독부가 일본 도쿄 기준으로 표준시를 바꿨기 때문이다. 그러다 이승만 정부 때인 1954년 주권 회복 차원에서 대한제국 표준시로 바꿨지만 박정희 정권은 1961년 도쿄 표준시로 재변경했다. 북한의 표준시는 남한과 같은 동경 135도를 기준으로 삼아오다 2015년 8월15일부터 대한제국 표준시로 바꿨다. 남한보다 표준시를 30분 늦춘 것이다. 당시 북한은 “간악한 일본 제국주의자들은 표준시까지 빼앗는 범죄행위를 감행했다”며 “동경 127.5도를 기준으로 하는 시간을 표준시로 정하고 ‘평양시간’으로 명명한다”고 발표했다. 이른바 ‘평양시간’이 등장한 이후 개성공단 출입경과 남북 민간 교류 등에서 일부 혼선이 빚어지기도 했다.

김정은 북한 국무위원장이 4·27 남북정상회담에서 ‘평양 표준시’를 ‘서울 표준시’에 맞추겠다고 했다. 김 위원장은 “평화의집 대기실에 서울과 평양 시간을 가리키는 시계 2개가 걸려 있는 것을 보고 가슴이 아팠다”며 북한의 표준시를 30분 앞당기겠다고 문 대통령에게 약속한 것이다. 북한은 5월5일부터 ‘평양 표준시’를 ‘서울 표준시’로 바꾸기로 했다. 조선중앙통신은 30일 “최고인민회의 상임위원회가 ‘평양시간을 고침에 대하여’라는 정령을 채택하고, 평양시간을 동경 135도를 기준자오선으로 하는 9경대시(현재보다 30분 앞당긴 시간)로 고쳐 주체107(2018)년 5월5일부터 적용하기로 했다”고 보도했다. ‘평양시간’이 3년 만에 역사 속으로 사라지면서 남북은 같은 시간 속에서 동행(同行)할 수 있게 됐다. 한반도의 평화와 번영이란 먼 길은 혼자가 아닌 함께 가야 다다를 수 있다.

<박구재 논설위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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