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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 2017.10.25 [공감]나옥분 할머니는 누구와 연대하는가

스물한 살인 딸은 “나도 그렇다(#Me Too)”를 보며 생각이 복잡하다고 했다. 할리우드의 유력한 영화제작자 하비 와인스타인의 수십년에 걸친 성폭력 범죄행각이 폭로된 뒤 여배우 알리사 밀라노가 “성폭력을 당해 본 경험이 있는 사람이라면 누구든 ‘나도 그렇다(Me Too)’라고 써 달라”고 제안해 시작된 운동이 사회관계망서비스 공간에서 물결처럼 퍼져나가던 와중이었다. 평소 여성 문제에 관해 적극적으로 자기 의견을 밝히던 아이였기에 당연히 해시태그 달기에 동참했으리라 생각했는데, 의외였다. “언제까지 여자들만 자기 상처를 드러내가면서 고발해야 하는 거죠? 도대체 세상이 달라지기 위해 얼마만큼의 피해자가 더 필요한 거예요?”

영화 <아이 캔 스피크> 스틸 이미지

“#Me Too”를 달 참이었던 나는 딸의 질문에 멈칫했다.

그러게. 왜 여자들만 상처를 증거자료로 내밀면서 폭력을 고발해야 하는 거지? 이걸 멈추려면 얼마나 더 많은 여자들이 ‘증거’가 되어야 하는 거지?

만삭일 때 지하철에서 겪었던 성추행, 일하는 과정에서 겪었던 성희롱 등 기억나는 것만 꼽아보아도 나 역시 “#Me Too”의 예외가 아니다. 나이 오십을 넘겼지만, 인적이 드문 공공화장실에 들어설 때면 여전히 머리끝이 쭈뼛해진다. 밤길에 낯모르는 사람과 동행이 되면 한사코 뒤에 선다. 언제 어디서든 벌어질 수 있는 성폭력에 대한 두려움이 여자로 사는 내내 내면화된 결과다. 강남역 살인사건 때 딸 또래의 여성들이 10번 출구에 빼곡히 써 붙였던 메모처럼, 나도 이 나이까지 “우연히 살아남았다.”

딸과 이런 얘기를 나눌 때면 한 살 아래의 남동생은 민감하게 반응한다. 모든 남자를 가해자로 보는 거냐고. 아니 그렇지 않다. “#Me Too”가 여자들만의 절규로 끝나지 않기 위해 절대적으로 필요한 것은 ‘내가 가해자일 수 있다’ ‘내가 가해의 암묵적 동조자일 수 있다’는 사실을 각성한 남자들의 연대다.

여성의 증언과 남성의 연대가 결합하는 순간의 전복적 힘을 나는 최근 위안부 피해자 할머니의 삶을 그린 영화 <아이 캔 스피크>에서 보았다. 영화 속에서 위안부 피해자인 나옥분 할머니는 “#Me Too”의 생존자들이 그랬던 것처럼, 미국 의회의 의원들에게 일본군이 자신의 몸에 칼로 새겨놓은 상처들을 보여주고서야 ‘정당한 피해자 자격’을 인정받을 수 있었다. 자신이 피해자인 사실을 밝히지 않고 싶어 했던 옥분 할머니의 마음을 돌린 것은 친구와의 우정이었다. 수치심과 고통을 견딜 수 없어 목숨을 끊으려 했던 어린 옥분을 구해내고 “네가 없으면 나는 어떻게 살아” 하며 껴안았던 우정이 치매에 걸린 친구를 대신해 그를 증언대에 서게 했다. 그러나 옥분 할머니가 세상을 향해 성폭력 범죄를 증언하는 데는 친구와의 우정, 자신의 결연한 용기를 넘어 마지막 1%의 연대가 필요했다. 벽안의 의원들 앞에서 어떻게 이야기를 시작해야 할지 몰라 망연자실해 있을 때 할머니의 바깥에서 들려온 목소리, 할머니의 증언을 돕기 위해 영어를 가르쳤던 손자뻘 구청 직원 박민재의 “안녕하세요(How are you?)”에 답하며 할머니는 비로소 입을 뗄 수 있었다. 할머니가 살아온 날들을 도무지 알지 못할, 그러나 할머니의 편에 서겠다고 결심한 한 젊은 남성의 지지가 할머니의 증언을 완성한 것이다.

“나도 그렇다(#Me Too)”가 시작된 며칠 뒤 호주의 게이 작가 벤저민 로는 “이제 남성들 차례”라며 “#나는 어떻게 바꿀 것인가(How I Will Change)”라는 해시태그 달기 운동을 시작했다. 로는 “내가 아는 모든 여자들이 성희롱, 성추행, 혹은 성폭력을 당했다면, 내가 가해자를 알고 있거나 혹은 내 자신이 그 가해자라는 것을 인정하자”고 적었다. 이 해시태그에 동참한 남성들의 다짐은 단순하지만 핵심적인 것이다. “나는 성추행이 벌어질 때 결코 침묵하지 않겠다.” “(성폭력의) 피해자들을 비난하지 않겠다.” “여성들에게 나를 이해시키라고 요구하지 않고, 그들의 말에 귀 기울이겠다.”

연대는 해시태그 바깥의 세상에서 이루어져야 한다.

<정은령 언론학 박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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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osted by KHross