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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 2018.02.14 [공감]성폭력 폭로에 재갈 물리는 알고리듬

성폭력 피해자가 폭로 이후 겪는 과정을 보면 한국 사회의 조직 어디에나 적용할 수 있는 범용의 알고리듬이 있는 것 같다. 피해자의 입을 틀어막는 솔루션이 제공되는 알고리듬 말이다.

피해자가 젊은 여성일 경우, 솔루션은 ‘꽃뱀’이다. ‘꽃뱀’이란 솔루션을 써 먹기엔 피해자가 내성적인 사람이라면, 취할 수 있는 솔루션은 ‘조직생활 부적응자’다. 조직생활 부적응자라고 몰아가기엔 피해자가 평소 활달하고 업무성취도도 높았을 경우라고 해도 답이 없는 것은 아니다. ‘딴 야심이 있어서’거나 ‘인사를 뒤집으려고’ 폭로를 한 교활한 모사꾼으로 피해자에 대한 구설을 만들면 된다.

한 시민단체 회원이 1일 대구지방검찰청 앞에서 성폭력 피해 고발 캠페인 ‘미투’를 상징하는 흰 장미를 들고 검찰 내 성폭력 사건 진상규명을 촉구하고 있다. 연합뉴스

결정타는 가해자가 청구하는 민형사상의 명예훼손 소송이다. 한국에서 “나도 당했다(Me too)”라고 성폭력 사실을 알리며 가해자를 지목한다는 것은 곧바로 피해자가 명예훼손에 피소될 가능성을 의미한다. 맞은 사람이 때린 사람을 지목하는 게 죄가 될 수도 있는가? 한국의 성폭력 사건을 둘러싼 법의 풍경은 그렇다. 혼자 벽을 보고 가슴을 쥐어뜯는 것이 아니라 공개적으로 말하면(公然性), 그것이 사실이라 하더라도 명예훼손의 요건이 된다. 적반하장을 감당해야 하는 피해자의 억울함은 하늘에 닿는다. 끊임없이 “말하지 말라”고 피해자의 입을 틀어막는 이 모든 조롱과 음해와 협박을 거치고도 간신히 버텨낸 사람은, 그래서 피해자가 아니라 ‘생존자’로 불린다.

과장해서 지어낸 얘기 같은가? 당신이 15년간 다닌 회사에 두 달간 병가를 냈다고 하자. 병가의 와중에 회사로부터 “당신 책상을 치웠다”는 통보를 받는다면 당신과 동료들은 이 조치의 의미를 무엇이라고 해석하겠는가? 아무리 눈치 없는 신입사원이라도 ‘공간이 부족해서 병가 기간 동안 책상을 치웠나보다’라고 생각하지는 않을 것이다.

이것이 서지현 검사가 안태근 전 법무부 검찰국장의 성추행 사실을 폭로한 뒤에 통영지청에서 벌어진 일이다. 서 검사의 폭로가 공론화된 것이 1월29일. MBC 보도에 따르면 1월22일 작성된 검사 배치표에는 서 검사의 이름이 들어 있었지만 2월5일자로 작성된 배치표에는 이름이 빠져 있었다. 2월5일은 문재인 대통령이 청와대 수석·보좌관 회의에서 “성희롱, 성폭력은 한 개인의 일탈 행위가 아니라 성차별적인 사회구조와 문화 때문에 발생한다는 점에서 위계 문화가 강한 정부와 공공기관부터 먼저 달라지고 모범을 보여야 할 것”이라고 강조했던 날이다.

검찰이 정부 수반의 뜻도 못 알아차리는 어리석은 행보를 한 것일까? 그렇지 않다. 검찰의 서 검사에 대한 조치는 성폭력 피해자에게 재갈을 물려온 알고리듬이 얼마나 끄떡없이 작동할 수 있는지 ‘모범을 보여야 하는 공공기관’에서 제시해준 역설적인 본보기다. 서 검사를 응원하는 꽃바구니가 전국에서 몰려들어도, 통영지청의 설명대로 “통상적인 절차에 따라” 휴직 중인 서 검사의 책상을 치우고 짐을 빼는 일은 가능했다.

이 본보기는, 골치 아픈 사내 성폭력 사건을 다뤄야 하는 조직의 장들에게는 엎어져 있는 피해자의 등을 한 번 더 밟고 지나가면서도 없었던 일처럼 만드는 것이 합법적인 규칙의 이름으로 얼마든지 가능하다는 것을 다시 한번 확인해준 것이며, 말문을 열려던 피해자들에게는 “그래봐야 입 연 사람만 괴롭다”는 위협의 시그널을 준 것이다. 검찰이 꾸린 성추행 진상조사단이 서 검사에 대한 음해성 소문이 끊이지 않자 근원을 찾아 처벌하겠다고 했지만 소문의 근원은 몇 사람의 입에 있는 것이 아니다. ‘그래도 우리 조직은 안 바뀌어’ ‘그래도 나는 안 다쳐’라고 가해자들이 자신할 수 있도록 만드는 이런 피해자 재갈 물리기의 알고리듬이 건재하기 때문이다.

시스템의 설계자들은 코드가 결코 깨지지 않을 것이라고 생각한다. 그러나 코드를 읽을 줄 아는 사람들은 반드시 나타난다. 불의한 코드에 의해 상처 입으며 그 본질을 속속들이 알아낸 생존자들이 이제 곳곳에서 입을 열고 있다. 자신의 온몸을 부딪쳐 부패한 시스템의 질서를 허물고 있다. 이 비열한 알고리듬은 해체될 것이다.

<정은령 | 언론학 박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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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osted by KHross