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두려워 마십시오. 저희 의사들이 당신을 돕고 당신의 아이를 지킬 것입니다.”

2009년 12월, 프로라이트 의사회가 출범했다. 불법적이고 비윤리적인 낙태 시술 근절을 목표로 만들어진 이 단체는 이듬해 2월, 불법 낙태 수술을 하는 병원 3곳과 의사 8명을 검찰에 고발한다. 산부인과 의사가 동료의사를 고발하는 일은 매우 이례적이었지만, 그로 인한 파장은 컸다. 그간 암암리에 낙태를 해오던 산부인과들이 시술을 중단한 것이다. 낙태를 하러 온 여성들은 “안 한다”는 말을 듣고 쓸쓸히 발길을 돌려야 했다.

그렇다고 그들이 낙태를 포기할 리는 만무했다. 미혼모가 되는 게 두려워서, 원하지 않는 성관계로 인해 임신이 됐을 때, 한 명을 더 낳아 키우는 게 경제적으로 부담이 되는 기혼자 등등 다들 낙태를 해야 할 절실한 이유가 있었으니 말이다. 그래서 이들은 단속이 상대적으로 덜한 지방병원으로 가기도 했고, 아예 중국으로 원정을 가서 낙태를 하기도 했다. 낙태기피에 따른 비용 상승은 저소득층이나 저연령층 등 사회적 약자에게 더 큰 타격을 줬는데, 이들은 위험을 감수하고 무허가 시설에 몸을 맡겼다가 마취사고나 세균감염 등으로 목숨을 잃어야 했다. 출산한 산모 10만명당 사망하는 여성의 수를 나타내는 모성사망률이 2009년 13.5에서 2010년 15.7, 2011년 17.2로 증가한 것은 이와 무관하지 않다.

일러스트_김상민 기자

이런 현상이 비단 우리나라만의 일은 아니었다. 루마니아는 낙태가 전면 금지됐던 20여년 동안 모성사망률이 21에서 128로 증가했지만, 1989년 낙태금지법이 철폐되자 한 해 만에 이 수치가 절반으로 뚝 떨어졌다. 지금도 낙태가 금지된 나라에서는 여성들이 뜨개바늘이나 막대기 또는 옷걸이로 자가 낙태를 하다가 큰 상처를 입고, 또 목숨을 잃는다. 옷을 거는 도구인 옷걸이가 엉뚱하게도 낙태합법화 운동의 상징적인 도구가 된 것은 이 때문이다.

사정이 이렇다면 우리나라도 이제 낙태금지법에 대해 재고해 볼 필요가 있다. 새로운 생명을 죽이지 않기 위해 만든 이 법이 오히려 산모의 목숨을 앗아간다니, 이거 문제가 있지 않은가? 대부분의 선진국들은 사회경제적 이유로 낙태하는 것을 허용하고, 덕분에 그 나라 여성들은 안전한 곳에서 낙태 수술을 받는 게 가능하다. 뿐만 아니라 먹는 낙태약 ‘미프진’도 의사 처방만 있으면 얼마든지 복용할 수 있다. 임신 초기에 효과가 좋은 미프진은 선진국은 물론 잠비아, 에티오피아, 우간다, 콜롬비아, 심지어 북한 등등 웬만한 나라에선 죄다 허가를 받은 상태지만, 낙태가 허용되지 않는 우리나라에선 원칙적으로 불법이다. 그래서 여성들은 브로커가 추천하는, 성분이 뭔지도 모르는 가짜 약을 비싼 돈을 주고 사먹고 있으니, 낙태금지법이 도대체 누구를 위한 법인지 의문이 든다.

고무적인 점은 남성들이 댓글을 다는 비율이 압도적으로 높은 네이버에서도 낙태합법화에 대한 지지가 더 많다는 사실이다. 낙태에 관한 기사마다 추천수가 가장 많은 베스트댓글은 대개 이런 식이다. “낙태합법화 적극 지지함.” “나도 남자인데 낙태는 여자 인권 문제인 것 같다. 낙태금지는 아직 태어나지 않은 생명보다 지금 있는 산모의 인권을 무시한다.” “싸튀충 (사정하고 도망가는 남성을 지칭함) 처벌법부터 만들던가. 애는 뭐 혼자 만들었냐?” “낙태 반대하는 놈들 실명을 밝혀라. 그놈들에게 강제 입양하면 된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보건복지부는 지난 8월17일 낙태 수술을 한 의사의 자격을 1개월 정지하는 행정규칙을 공포해 논란을 일으켰다. 산부인과 의사들은 더 이상 낙태 수술을 하지 않겠다고 선언했다. 8년 전 그랬던 것처럼 낙태를 하러 간 여성들은 “안 한다”는 말에 쓸쓸히 발길을 돌린다. 그들이 이대로 포기하지 않을 거라는 건 다들 알고 있다. 혹시 낙태금지를 강화하는 게 출산율을 높이려는 계략이라면, 이건 번지수가 틀렸다. 프랑스 등 낙태를 합법화한 나라의 출산율이 우리보다 훨씬 높으니 말이다.

1879년 여섯 번째 아이로 태어난 마거릿 생어는 열한 명의 자녀를 낳고, 그것도 부족해 여러 차례 유산을 거듭하던 어머니가 한창 나이에 죽는 걸 보고 피임에 관해 생각한다. 생어는 “어머니가 될지 아닐지를 여성이 결정할 수 있어야 한다”고 주장하며 1916년 미국 최초로 산아제한 클리닉을 연다. 그를 불편해한 권력자들 때문에 한 달 동안 옥살이를 해야 했지만, 생어는 그래도 포기하지 않고 세상과 싸웠다. 그 결과 지금은 피임을 안 한다고 뭐라고 할지언정, 피임을 부도덕한 일로 보는 사람은 거의 없다.

낙태가 여성의 당연한 권리로 여겨지는 것도 그리 오랜 시간이 걸리지 않을 것 같다. 2018년 5월, 아일랜드에서는 낙태 허용을 위한 헌법 개정을 놓고 국민투표를 실시했는데, 68%가 낙태금지법 폐지에 투표했다. 놀라운 점은 아일랜드가 보수적인 가톨릭이 지배하는 나라라는 사실이다. 갑자기 걱정이 된다. 우리가 1등은 못할지라도 꼴찌는 하지 말아야 할 텐데, 우리 정부는 왜 자꾸 뒤로 가는지.

<서민 | 단국대 의대 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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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럴딘은 10년 전 친구의 소개로 한 남성을 만났다. 필리핀인 제럴딘은 어학원 영어교사였고, 남성은 한국에서 필리핀으로 와 수학 교사로 일했다. 두 사람은 연인이 됐다. 하지만 제럴딘이 임신을 하면서 두 사람의 관계는 끝났다. 임신 소식을 알게되자, 남성은 한국으로 떠났다. 아들 제라드는 아버지 없이 여덟 살까지 자랐다. “아빠는 왜 없을까”라는 의문은 제라드의 정체성에 큰 구멍으로 남았다. 모자는 한국으로 왔다. 낯선 나라의 국회 앞에 서서 피켓을 들었다. “코피노에게 행복을 찾아주세요.” 지난해 한국일보에 소개된 사연이다.

제라드는 ‘코피노(Kopino)’다. 한국인 아버지와 필리핀인 어머니 사이에 태어난 아이를 일컫는 코피노는 4만명에 달하는 것으로 추산된다. ‘코피노 아이들이 아빠를 찾습니다’란 사이트에선 공개적으로 아이의 아빠를 찾고 있고, 현재 32명이 친부를 찾았다. 

  

낙태 합법화를 지지하는 아일랜드 시민들이 26일(현지시간) 더블린성 앞에서 국민투표를 통해 ‘낙태 금지 헌법 조항 폐지’가 결정되자 손을 들어 환호하고 있다. 더블린 _ AP연합뉴스

최근 한국에서 벌어지고 있는 두 개의 법에 대한 논란을 보자니, 코피노가 떠올랐다. 하나는 청와대 청원에 올라온 ‘히트앤드런방지법’이다. 국민청원에 21만명 이상이 참여했다. 아이를 혼자 키우는 비혼모에게 친부가 양육비를 보내지 않는 경우가 많아, 정부에서 우선 지급하고 당사자에게 원천징수하는 법을 만들어달라는 청원이었다. 정부는 실효성 있는 대책을 마련할 방안이라고 밝혔다.

또 하나는 낙태죄다. 헌법재판소에서 열린 ‘낙태죄’의 위헌 여부를 가리는 헌법소원의 공개변론에 법무부가 낙태죄를 폐지하자는 것은 “성교하되 책임을 지지 않겠다는 것”이라는 의견을 내 논란이 됐다. SNS에선 ‘#법무부장관_경질’ 해시태그 운동이 일었다.

‘성교에 대한 책임을 지는 것’은 무엇인가? 코피노가 떠오른 건 바로 이 대목에서다. 필리핀은 엄격한 가톨릭 국가로 낙태뿐 아니라 이혼도 금지돼 있다. 그 결과 비혼모 비율이 높고, 불법 낙태에 의한 여성 사망률도 높다고 한다. ‘성교의 책임을 진’ 여성들은 홀로 아이를 키우고, 아이들은 아버지가 누구인지도 모른 채 자라난다. 4만명 코피노는 ‘성교에 책임을 진’ 행위의 결과인가, 그렇지 않은가. ‘히트앤드런방지법’도 마찬가지다. ‘성교의 책임을 진’ 비혼모들은 사회의 편견과 차별 속에 어렵게 아이를 키운다. 한부모가족 가운데 77.5%는 법적으로 양육비를 받을 권리인 ‘양육비 채권’을 갖지 못한 것으로 드러났다.

우리 사회에서 ‘성교에 책임을 진다’는 것은 어떤 의미인가. 왜 그 책임은 여성에게만 요구되며, 남성은 자유로운가. 정상가족 밖의 임신과 출산, 양육에 대해서는 어떤 사회적 안전망도 제공하지 않으면서 그 책임만 여성에게 묻는 것, 이 지점에 여성들이 분노했다. 조국 청와대 민정수석도 “현행 법제는 모든 책임을 여성에게만 묻고 국가와 남성의 책임은 완전히 빠져 있다”고 지적했다.

헌법재판소 공개변론에서 법무부 측 참고인으로 정현미 이화여대 젠더법학연구소 교수가 나와 해프닝을 연출했다. 정 교수는 “출산·낙태는 국가가 강요할 수 없다”며 법무부 입장에 반하는 취지의 발언을 했다. 정 교수는 스스로도 “낙태에 대해 제가 연구한 결과들이 알려져 있는데도 법무부 참고인으로 선정돼 놀랐다”고 말했다.

지난 주말, 보수적 가톨릭 국가인 아일랜드에서 국민투표가 이뤄져 66%의 지지로 낙태금지 헌법조항이 폐지됐다. 전 세계에 흩어져 있던 여성들이 귀국해 투표를 했고, 그 결과에 환호했다.

세상은 변하고 있다. 2년 전 강남역 살인사건 이후 여성들은 여성에 대해 폭력적인 사회 구조가 변해야 한다고 목소리를 내기 시작했다, 미투 운동, 그리고 ‘몰카 범죄’에 대한 공정한 처벌을 요구하는 ‘붉은 시위’는 거스를 수 없는 시대의 흐름이다. 낙태죄 폐지에 대해 해묵은 논리를 반복하고 자신의 대리인으로 ‘반대 입장’을 지닌 학자를 내세우며 자기분열적인 모습마저 보이는 법무부는 보수적이기 이전에 게을러 보인다.

<이영경 토요판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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