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남영동 대공분실'에 해당되는 글 2건

  1. 2018.01.17 [공감]악은 어떻게 기억되어야 하는가
  2. 2015.05.25 남영동 대공분실의 ‘흰 대문’

학살된 유대인을 기리기 위해 미국 워싱턴 DC에 세워진 홀로코스트 박물관은 일 년에 딱 이틀, 유대교가 정한 속죄일인 욤 키푸르와 기독교의 축일인 크리스마스에만 문을 닫는다.

이곳을 방문한 사람들이 유난히 깊은 침묵에 빠져 걸음을 옮기지 못하는 공간이 있다. 4000켤레의 낡은 신발이 뒤죽박죽으로 켜켜이 쌓여 벽을 이룬 곳. 성인 남자의 출근용 구두, 젊은 여성이 신었을 법한 펌프스, 소년의 운동화, 아장아장 걸음마를 뗄 아이가 신었을 법한 꼬까신…. 폴란드 마자넥 강제수용소에 끌려간 유대인들이 도착하자마자 벗어 나치 군인에게 압수당했던 것들이다. 신발 더미에서는 신발 주인의 체취 같기도 한 고무냄새가 스며 나와 관람객을 몸서리치게 만든다. 멍해진 관람객들을 돕는 것은 홀로코스트에서 살아남은 노년의 자원봉사자들이다. 그들은 신발의 주인들이 어떻게 하루아침에 세상에서 사라져 갔으며 어떻게 자신들은 살아남았는지를 담담하게 증언한다.

이철성 청장을 비롯한 경찰 지휘부가 박종철 열사 31주기를 하루 앞둔 13일 오전 서울 용산구 옛 남영동 대공분실(현 경찰청 인권센터)을 찾아 박 열사가 숨진 인권센터 509호에 헌화와 묵념을 하고 있다. 연합뉴스

2일부터 청와대 국민 청원 페이지에는 ‘경찰이 운용하는 옛 남영동 대공분실을 시민사회가 운영하는 인권기념관으로 바꿔달라’(https://www1.president.go.kr/petitions/78392)는 국민 청원이 진행 중이다. 1987년 스물두 살 청년 박종철이 경찰의 물고문 도중에 살해당한 치안본부 남영동 대공분실은 ‘남영동 인권센터’로 이름이 바뀌었을 뿐 여전히 경찰이 운영하는 기관이다. 박종철기념사업회 등 인권단체들이 시민들을 위한 탐방 프로그램을 진행하고 있기는 하지만, 여전히 이곳을 찾는 시민들 대다수는 경찰의 안내를 받는다. 시민들이 찾을 수 있는 주말에는 문을 열지 않다가 그나마 2017년 7월부터 토요일 개방이 이뤄지고 있다.

인권경찰로 거듭나겠다는 경찰의 다짐을 부정하지는 않는다. 그러나 가해자가 자신이 저지른 죄를 온전히 실토할 수 없다는 것을 지금의 ‘남영동 인권센터’는 여실히 보여준다. 경찰 스스로 ‘인권의 메카’로 부르는 인권센터의 1층 홍보 전시물은 1985년 이곳으로 끌려와 물고문, 전기고문을 당했던 김근태 전 열린우리당 의장을 이렇게 소개한다. “1985년 민청련 김근태 의장이 서울대 민주화추진위 배후조종 혐의로 23일 동안 조사(고문)받은 것이 세계 언론에 알려져 큰 파문을 일으켰다. 2011.12.30 타계 소식이 있자 추모하기 위해 그가 고문을 당했던 5층 515호실 앞에 인권센터 소속 경찰관들이 올려놓은 조화가 화제가 된 바 있다.”

23일간의 고문과 경찰이 사후에 올려놓은 조화를 등가로 연결하는 이 두 문장 속에서 “이런 잔인한 고문이 아니라면 정말 죽음에 처넣어지는 것, 고문 없이 살해되는 것조차 받아들이겠다”(김근태 저 <남영동> 중)는 피해자 김근태의 비명은 말끔히 소거된다.

박종철 열사가 죽어간 509호실은 그나마 원형에 가깝게 보존되었다고 하지만, 깔끔하게 정돈된 침대와 세면대, 변기가 놓여 고시원 방 한 칸을 연상시키는 이런 방으로 끌려왔던 사람들이 ‘칠성판’이라고 불리는 고문대 위에 올랐다는 사실을 관람객들은 알 수 없다. 누우면 세면대 위로 얼굴이 바로 떨어지도록 설계된 이 칠성판 위에서, 두들겨 맞아도 맞은 흔적이 남지 않도록 담요로 꽁꽁 묶인 사람들이 얼굴에 수건이 덮인 채 샤워기로 쏟아지는 물이 입과 코를 막는 물고문을 당했다.

고문은 은유가 아니다. 피해자의 고통도 은유가 아니다. 워싱턴 DC 홀로코스트 박물관의 신발 무덤과 그 역겨운 고무냄새가 관람객들로 하여금 범죄의 잔혹함에 토할 것 같은 실감을 갖게 만드는 것처럼, 한국의 공권력이 독재 권력의 손발이 되어 저지른 잔혹한 고문도 피해자의 시선으로 세세하게 기록되고 보존되어야 한다. 경찰의 안내가 아닌 살아남은 고문 피해자들의 증언을 통해 지난 시대 한국 땅 곳곳에 존재했던 ‘남영동 대공분실’에서 어떤 폭력이 저질러졌는지 지금의 관람객들에게 증언되어야 한다.

남영동 대공분실에 끌려간 사람들이 머리조차 들지 못하고 5층의 조사실로 끌려 올라갔을 때 밟았던 좁은 나선 계단은 72개다. 악은 구체적으로 기억되어야 한다.

<정은령 | 언론학 박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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남영동 대공분실은 건축가 김수근의 작품이다. 한낮에도 짙은 어둠을 느끼게 하며 사람들을 위축시킨다. 피조사자들이 처음 맞닥뜨리는 건, 육중한 군청색 철문이다. 그곳의 대문은 여닫이와 미닫이 두 개의 구조로 되어 있다. 내부는 들여다볼 수 없다. 문을 보는 순간 숨이 막히는 것 같은 위축을 경험하게 된다. 5층 조사실로만 통하는 원형 계단은 사람의 공간감각을 빼앗아 길을 잃을 때의 느낌과 비슷한 공포감을 준다. 한여름에도 서늘함을 느끼게 하는 복도를 거쳐 들어가야 하는 조사실에는 침대와 욕조, 방음벽에다 폐쇄회로(CC)TV 카메라까지 설치되어 있다. 남영동의 조사실은 하나의 공간이 인간을 얼마나 초라한 존재로 전락시킬 수 있는지 보여준다. 남영동 대공분실은 문짝부터 조사실까지 전체 건물이 유기적으로 배치되어 있다. 비록 고문이 자행된 악명 높은 현장이지만, 역설적으로 하나의 예술작품이기도 하다. 예술작품이 사람을 파괴할 수도 있다는 것을 보여주는 상징적인 건물이다.

남영동 대공분실은 2005년 폐쇄되었다. 경찰의 애초 계획은 대공분실을 헐고 웨딩홀이 들어간 빌딩을 지을 작정이었다. 남영역 바로 옆, 확실한 역세권이다. 게다가 보기 싫은 과거를 지워버릴 수 있다는 속셈도 있었을 거다. 악명 높은 3대 고문 시설 중에서 두 곳은 이미 사라져버렸다. 보안사 서빙고 분실 자리엔 아파트가 들어섰고, 남산 안기부는 유스호스텔과 서울시 부서들이 들어오면서 껍데기만 남게 되었다. 겨우 남영동 대공분실만 남았다. 박종철 열사의 부친과 박형규 목사, 김성수 주교 같은 분들이 남영동 대공분실의 폐쇄와 인권기념관으로의 전환을 요구하며 나섰다. 다행히 경찰은 이분들의 요청을 받아들였다.

남영동 대공분실은 인권기념관으로 거듭났다. 경찰청 인권센터가 입주했고, 조사실 등 고문의 현장은 원형 그대로 보존하고 시민에게 개방했다. 경찰청 인권위원회도 이곳을 기반으로 활동하고 있다. 경찰은 지난 10년 동안 크게 변하지 않았지만, 그래도 남영동의 변모는 어두운 과거와 단절하고 미래로 가는 경찰, 시민의 친근한 벗으로 거듭나는 경찰의 변화를 보여주는 가장 강력하고도 극적인 상징이 되었다. 얼마 전, 남영동 대공분실을 찾았다 깜짝 놀랄 광경을 보았다. 남영동의 상징과도 같았던 철제 대문이 바뀐 것이다. 안쪽 미닫이문은 아예 담 옆에 고정시켜놓았고, 바깥쪽 여닫이문은 바꿔 버린 것이다. 예전의 철문은 온데간데없고, 놀이동산에나 어울릴 하얀색 문짝을 달아 두었다. 예전 것과 달리, 새로 단 것은 안쪽이 훤히 들여다보이는 것이었다. 담벼락이나 기둥과도 전혀 어울리지 않는 뜬금없는 문짝이었다. 무엇보다 남영동 대공분실의 이미지가 문짝 하나로 훼손되어 버렸다. 존재만으로도 위압감과 공포감을 주던 건물이, 갑자기 조잡해보였다. 건물 전체가 하나의 작품이었는데, 문짝 하나만으로 작품이 엉망이 되었다. 왜 이리 했느냐고 물으니 문짝이 오래되고 고장 나서 아예 바꿨단다. 원래 있던 문짝은 어디 뒀냐고 물으니 답이 없다.

역사의 현장은 원형 보존이 제일 원칙이다. 그게 관리를 맡은 사람들의 첫 번째 책무다. 문짝이 고장 나면 고쳐서라도 원형을 보존하기 위해 애써야 했다. 겨우 40년 된 철제 문짝을 내다버릴 만큼 관리능력이 없다면, 전문가의 도움이라도 받아야 한다.

김근태 민주통합당 상임고문이 1985년 고문받은 서울 남영동 옛 대공분실(현 경찰청 인권보호센터) 복도에 조화가 놓여 있다. (출처 : 경향DB)


남영동 대공분실은 단순한 경찰관서가 아니다. 고문의 현장이었다. 이곳에서 국가폭력이 자행됐고, 자유와 민주주의가 압살당했다. 당연히 대한민국의 아픈 역사를 일깨우는 생생한 교육현장이어야 한다. 다시는 추악한 과거로 돌아가지 않겠다고 다짐하는 상징적인 공간이어야 한다. 그러니 문짝 하나, 벽돌 한 장이라도 원형 그대로 보존돼야 한다. 온전히 보존하며, 온전히 기억해야 할 곳이다. 바로 예전의 그 육중한 철문이 원상 복구돼야 하는 까닭이다.


오창익 | 인권연대 사무국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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