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년 전 한 비정규직 여직원이 약속된 정규직 전환 대신 해고통보를 받고 자살한 사건이 있었다. 공개된 유서에 따르면 그녀는 정규직 전환을 위해 중년 남성들의 성희롱을 참아왔다고 한다. 같은 해 단독주택 지하 1층에 살던 세 모녀가 생활고로 고생하다 자살을 선택한 ‘송파 세 모녀 사건’이 있었다. 이들은 자살하기 몇 년 전부터 복지급여를 지원받으려 했으나 대상조건을 만족시키지 못했다.

2015년에는 롯데호텔에서 일하던 청년의 쪼개기 계약 실상이 드러났는데, 이 청년은 3개월 19일간 하루도 빠짐없이 매일 근로계약서를 작성하고 계약을 갱신하다가 어느 날 해고당했다. 지난 6월에는 서울 지하철 구의역에서 스크린도어 수리를 하던 19세 청년이 근무 중 사고로 사망했다. 미숙련의 비정규직 계약직인 이 청년은 밥 먹을 시간도 없이 뛰어다니며 위험천만한 일을 소화해야 했다. 또 올여름에는 유명한 베스트셀러 작가였던 한 시인이 생계가 어려워져 저소득층 지원대상이 되었다. 최근에는 대학가의 동아리 회장 선거가 속속 무산됐다. 후보자로 나서는 학생들이 부족했기 때문이다. 스펙 쌓기, 그리고 아르바이트로 바쁜 학생들에게 이제 동아리 활동은 꿈같은 이야기인지도 모른다.

성추행 같은 모멸의 강요, 자신의 빈곤에 대한 증명의 강요, 매일 다음날의 계약서를 쓰며 느꼈을 굴욕의 강요, 위험한 일의 강요, 예술가의 작품에 대한 ‘쓸모’의 강요, 그리고 꿈꾸던 대학생활을 시작해도 곧바로 시장에서의 ‘가격매김’을 준비하도록 하는 강요가 판치는 지금의 한국 사회가 우리가 원하는 사회일까. 안전하게 일할 권리, 남성과 여성이 동등한 대우를 받을 권리, 예술을 생산하고 취미활동을 즐길 권리, 어느 정도 먹고살 권리, 그리고 무엇보다 더 나은 내일을 꿈꿀 수 있는 권리를 누가 모조리 납치해갔는가? ‘생산적인 일’ ‘쓸모’ ‘높은 가격매김’ 등 반복되는 강요에 길들여져, 우리는 소중한 것들이 모래가루마냥 손가락 사이로 흘러내리는 것을 보고만 있을 뿐 반문도 못하고 있다.

우리는 일, 노동, 인정, 쓸모에 대한 새로운 패러다임을 보다 적극적으로 구상해야 한다. 삶의 영위를 위한 다양한 인간의 활동이 그 자체로 평가될 때 노동, 일, 활동은 근본적인 인간의 욕구이자, 필수적인 사회 유대, 미덕 및 타인에 대한 존중의 근원으로 여겨질 수도 있다. 그런데 이렇게 자연스럽게 다중활동을 하는 사람들로 구성된 사회를 만들기 위한 중요한 전제조건은 먼저 어느 정도 수준의 무조건적 소득 보장이다. 여기서 ‘무조건성’은 소득, 근로 이력과 무관하게 권리로서 급여를 지급받는 것이다. 사실 현재 법과 제도로 규정될 수 있는 ‘근로’의 경계가 모호해지고, 비전형적 일들이 늘어가고 있는 상황이어서 ‘조건’을 정의하고 부여하는 것 자체가 어려워지고 있다. 특히 한국 노동시장에 어떤 고용형태들이 존재하고 있는지 실태파악조차 제대로 되지 않고 있다. 새로운 고용관계가 청년들을 중심으로 등장하고 있다.

최근 한국에서도 기본소득제가 활발하게 논의되고 있다. 청년 노동시장의 변화들을 고려했을 때 ‘청년기본소득’은 보다 적극적으로 검토할 필요가 있다. 새로운 패러다임의 제도가 제한된 시간 내에 전면적으로 도입될 경우 부작용이 있을 수 있기 때문에, 기본소득제의 단계적 도입을 위해 먼저 청년과 같이 기존 소득보장제의 사각지대에 있는 대상부터 시작해볼 수 있다.

일, 노동, 인정, 쓸모의 의미가 변화하면 개인들의 삶의 방식이 변화하고 사회의 모습도 달라질 것이다. 그런데 일, 노동, 인정, 쓸모의 의미가 바뀌기 위해서는 강요가 지배하는 작금의 시스템에 제동을 걸어야 한다. 모든 개인들이 다양한 활동을 할 수 있는 자유가 조금씩 더 주어진다면, 그리고 이러한 과정을 통해 노동과 일이 실험, 탐험, 자원봉사, 다양한 문화적·예술적 활동들과 조화를 이룰 수 있게 된다면, 시장에서의 일은 일생의 다양한 활동 중 하나로 오히려 자연스럽게 받아들여질 수 있다. 그런 사회에서는 궁극적으로 어떤 일이 시장에 기여하더라도 그 과정에서 생산성과 쓸모에 대한 강요는 사라질 수 있다.

이승윤 이화여대 교수·사회복지학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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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osted by KHross

대기업 비정규직의 증가가 몰고 올 암울한 미래상을 보여주는 지표들이 잇따라 발표되고 있다. 지난 29일 한국은행은 65세 이상 고령층을 제외한 생산가능인구가 2017년부터 감소세로 돌아서 2020년부터 취업자도 줄어들 것으로 전망했다. 또 정규· 비정규직 간 극심한 격차가 지속될 경우 청년층의 경제참여를 위축시켜 고용여건은 더욱 나빠진다고 진단했다.

30일 고용노동부의 상시고용 300인 이상 대기업의 고용형태 공시 결과 발표도 이 한은의 경고를 뒷받침하고 있다. 사내하청 등 간접고용 노동자 비율이 20%로 지난해보다 0.1%포인트 높아졌고 기간제 비율까지 합치면 대기업 노동자 10명 중 4명은 비정규직이었다. 기아차 모닝 생산공장이나 롯데 영등포역 백화점처럼 운영 인력이 100% 간접고용이지만 정규직이 워낙 적어 공시에서 제외된 기업까지 포함하면 이미 비정규직 비율은 절반을 넘어섰다고 봐야 한다. 한은 조사에 따르면 정규직 대비 비정규직 급여는 49% 수준이다. 청년들의 구직 욕구가 갈수록 떨어질 수밖에 없다. 이대로 가면 청년실업이 아니라 일시 취업과 해고를 반복하며 숙련 형성 기회에서 영구적으로 배제되는 ‘청년 낭인’의 문제를 고민해야 할지도 모른다.

영화 <카트>의 실제 주인공들인 비정규직 당사자들이 12일 서울 중구 민주노총 회의실에서 긴급 기자회견을 열고 비정규직을 양산하는 정부의 대책을 반대하며 행동계획을 발표하고 있다._경향DB

 


하지만 대기업들은 비정규직 비중을 낮추고 고용 안정과 최저임금 인상을 통해 청년들의 취업 욕구를 높이기 위한 사회적 책임과는 정반대로 가고 있다. 전경련 이승철 부회장은 “ ‘베이비부머 세대’는 자녀세대에게 안정된 미래를 물려줄 책임이 있다”며 청년실업 문제를 세대갈등의 문제로 접근했다. 기업의 책임은 외면한 것이다. 대한상의도 ‘청년실업 전망과 대책’ 보고서에서 20년 전 ‘대학정원 자율화’를 원망할 뿐 고학력 실업을 위기가 아닌 기회로 활용하는 기업의 노력에 대해서는 언급하지 않았다. 최저임금위원회에서도 사용자위원들은 시종 ‘최저임금을 동결하지 않으면 고용을 줄일 수밖에 없다’는 태도로 일관했다. 급기야 법정활동 마감시한인 지난 29일에는 최저임금을 시급·월급제로 병행 표기하자는 제안에 불만을 표시하면서 회의를 거부했다.

인구고령화는 당장 어쩔 수 없다 하더라도 대기업의 저임·비정규직 남용은 막아야 한다. 이대로 방치하면 심각한 고용지체의 굴레에서 벗어날 수 없기 때문이다. 그런데도 정부는 계속 대기업들의 ‘이기적 고용’에 끌려다닐 것인지 묻지 않을 수 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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