역대 대통령치고 애견인 아닌 경우가 드물다. 박정희 전 대통령은 백구와 황구, 스피츠, 치와와 등 다양한 품종의 반려견을 키웠다. 당시 ‘큰영애’로 불린 박근혜 전 대통령은 이중 스피츠 ‘방울이’와 진돗개 ‘진도’를 좋아했다. 전두환 전 대통령이 키우던 진돗개 2마리는 재산압류 때 경매에 부쳐져 40만원에 팔렸다. 다행히 개를 산 낙찰자가 되돌려줬다고 한다. 노무현 전 대통령과 반려견 ‘누리’의 사연은 슬프고 애잔하다. 노 전 대통령이 생전 자택을 찾은 방문객들에게 잊지 않고 소개하던 반려견은 노 전 대통령 서거 후 집을 떠나 실종돼 주변을 안타깝게 했다. 주인이 심장마비로 죽은 줄도 모르고 눈이 오나 바람이 부나 10년을 전철 역 앞에서 기다리다 숨을 거둔 개의 이야기를 그린 영화 ‘하찌’를 연상케 한다. 이명박 전 대통령은 함께 선글라스를 끼며 각별한 애정을 쏟은 반려견 ‘청돌이’의 사진을 퇴임 후에도 자주 공개했다.

박근혜 대통령이 청와대 관저에서 키우는 진돗개 '평화', '통일', '금강', '백두', '한라'

대통령들이 반려견을 키우는 이유는 일반 애견가와 다르지 않을 터이다. 반려견과의 교감은 사람에게 심리적인 위안과 정서적 안정감을 준다. 경쟁·비교 사회에 지친 현대인을 보듬는 데 반려견만 한 존재도 없다. 돈과 권력, 사회적 지위, 나이 등의 편견 없이 한결같이 주인을 따르기 때문이다. 나아가 대통령들에게 반려견은 인간적 면모를 홍보하는 정치적 수단이기도 하다.

박근혜 전 대통령 역시 반려견을 정치에 자주 활용했다. 대통령 취임 때 자택 인근 주민에게서 선물받은 진돗개 한 쌍이 새끼 5마리를 낳자 청와대 홈페이지에 사진을 올리고 페이스북을 통해 이름을 공모했다. 새해 업무보고에서 “한 번 물면 놓지 않는 진돗개 정신’을 강조했고 비선 실세 의혹 당시에는 “청와대 실세는 진돗개”라고 말했다.

이랬던 박 대통령이 파면당한 뒤 진돗개들을 청와대에 둔 채 자택으로 돌아가 유기 논란이 일고 있다. 청와대는 “분양할 예정”이라고 말했지만 동물보호단체는 동물보호법 위반으로 고발했다. 자칫 박 전 대통령의 법 위반 항목이 하나 더 늘어 14개가 될지도 모를 일이다. 배신을 싫어한다는 대통령이 배신을 모르는 반려견을 배신하는 그 지독한 모순과 이기심이 무섭다.

조호연 논설위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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청와대가 대통령의 독서목록을 공개한 것은 김대중 정부 때부터였다. 책 읽는 대통령을 부각시키려는 뜻도 있었겠지만 실제로 김대중 전 대통령은 폭넓은 독서편력으로 유명했다. 3만여권의 장서를 보유했던 그는 “책을 맘껏 읽을 수 있다면 감옥에라도 가고 싶다”고 말할 정도였다. 책을 읽을 때 밑줄을 긋고, 모퉁이에 글을 적었다는 김 전 대통령은 평생을 두고 읽어야 할 책으로 갤브레이스의 <불확실성의 시대>, 피터 드러커의 <단절의 시대>, 박경리의 <토지>, 변형윤의 <한국경제의 진단과 반성> 등을 꼽았다.

다독가였던 노무현 전 대통령은 공직사회 분위기를 바꾸고 싶을 때 책을 활용해 보수언론에게 “‘독서정치’를 한다”는 비판을 받기도 했다. 그는 감명 깊게 읽은 책의 저자를 발탁해 중용하기도 했다. <변화를 두려워하면 1등은 없다>를 쓴 오영교 전 행정자치부 장관, <드골의 리더십과 지도자론>을 펴낸 이주흠 전 리더십비서관이 대표적인 경우다.

2016년 5월 1일 일반인들에게 첫 공개된 경남 김해시 진영읍 본산리 봉하마을 고 노무현 전 대통령 사저에서 관광객들이 창밖에서 서재 내부를 구경하고 있다. 연합뉴스

이명박 전 대통령은 대기업 최고경영자 출신답게 독서스타일도 실용적이었다. 종이책보다는 ‘e북’(전자책)을 즐겨 읽었던 그는 마이클 샌델의 <정의란 무엇인가>와 피터 언더우드의 <퍼스트 무버> 를 청와대 참모진에게 추천하기도 했다.

미국 역대 대통령 중에선 잠자기 전 책 한 권을 읽었다는 존 F 케네디가 독서광의 반열에 올라 있다. 20일 퇴임하는 오바마 대통령도 케네디에 버금가는 애독가로 알려져 있다. 오바마는 뉴욕타임스와의 인터뷰에서 “8년간의 백악관 생활에서 생존한 비밀은 독서에 있다”고 했다. 그는 “연대감을 느끼고 싶을 땐 링컨, 마틴 루서 킹, 마하트마 간디, 넬슨 만델라의 책을 읽었다”고 밝혔다.

그렇다면 ‘관저 유폐’ 중인 박근혜 대통령은 어떤 책을 읽으며 ‘생존’하고 있을까. 박 대통령의 독서목록을 단 한 번도 공개하지 않았던 청와대가 지난 10일 “클라우스 슈밥의 <제4차 산업혁명>을 읽고 있다”고 밝혔다. 그러자 유승민 바른정당 의원이 “4차 산업혁명에 대해서는 서울대 공대 교수들이 펴낸 <축적의 시간>이 낫다”고 넌지시 조언하기도 했다. 하긴 평소 책 읽기보다는 TV시청을 즐겼다는 박 대통령에게 제대로 된 독서목록이 있을까 싶기도 하다.

박구재 논설위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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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한민국은 왜 임기가 끝난 후 국민들로부터 환송을 받으면서 물러나는 대통령다운 대통령을 가질 수 없을까? 자신과 측근의 이익에만 충실한 지도자 말고 먼 미래를 내다보는 혜안을 지닌 지도자를 왜 대한민국은 가질 수 없는 것일까?

대한민국 건국 이래 모든 대통령이 18세기 이탈리아 정치가 마키아벨리의 <군주론>은 한번쯤 읽었을 것이다. 우리 대통령들은 비난 따위는 개의치 말고 이익에 근거해 권력을 확보하고 유지하라는 마키아벨리의 조언은 충실히 따르고 있는 것 같다. 그러나 우리의 대통령들은 마키아벨리의 군주론을 한번만 읽었든지 아니면 누가 정리해 준 요약본만 읽었음에 틀림이 없는 것 같다.

마키아벨리가 지도자라면 비난은 받더라도 국민의 미움을 받아서는 절대로 안된다고 그토록 경고하고 있건만 우리의 대통령들은 자신에 대한 비난이 미움으로 발전하는 것을 통제하지 못했다. 미국의 버락 오바마 대통령도 공동체 활동가로 활약하던 젊은 시절 마키아벨리를 읽고 가르친 적이 있다. 그렇다고 멋지게 물러나는 오바마를 이익만 추구했던 현실주의자로 기억하는 미국인은 아마 없을 것이다. 대통령에게는 균형이 중요하다. 다양한 국민들의 의견을 들어보고 최선의 판단을 하는 것은 대통령의 몫이다. 이는 그 누구에게도 맡길 수 없는 것이다. 그러라고 국민들이 뽑아준 자리가 아니던가?

세상에는 다양한 대통령의 모습이 존재하지만 이들이 정권을 잡은 후 제일 먼저 하는 고민은 국민들과의 관계를 어떻게 설정하고 어떻게 협치를 이룰 것인가이다. 사람들은 대부분 사랑과 두려움에 민감하게 반응한다. 즉 사랑과 두려움을 잘 활용하면 국민은 대개 정부가 원하는 방향으로 행동하게 된다. 마키아벨리는 이와 같은 질문을 국민의 사랑을 받는 대통령이 좋은가, 아니면 두려움의 대상이 되는 대통령이 좋은가로 대신한다. 우리는 상황에 따라서는 사랑도 사용하고 두려움도 사용할 수 있는 대통령을 원한다. 마키아벨리가 조언한 대로 어중간한 태도를 피하라는 말을 오직 두려움으로만 국민을 옥죄라는 말로 대치해서는 좋은 대통령이 나올 수가 없다.

우리가 이해하는 현실주의자들은 이익이 중요하다고 보고, 이상주의자들은 명예가 조금 더 중요하다고 생각한다. 일반인들에 있어서도 이익과 명예는 둘 다 소중하다. 그러나 지도자라면 소중한 정도가 일반인들과는 분명 다르고 달라야만 한다. 왜냐하면 실패한 지도자는 국민들에게 쓰라린 아픔을 주기 때문이다.

성공한 지도자와 실패한 지도자의 차이는 이익과 명예 사이에서 어떻게 균형을 잡았느냐가 결정한다. 사실 사랑과 두려움을 균형 있게 활용한다고 좋은 지도자가 될 수는 없다. 될 수 있다면 얼마나 좋겠는가? 그렇게 쉬운 것은 아닐 것이다. 마키아벨리 역시 사랑을 사용하는 지도자는 경멸을 받게 되면 파멸하고, 두려움을 사용하는 지도자는 미움을 받게 되면 파멸한다고 <군주론>에서 언급했다.

다른 사람의 사랑을 받는 것은 내 맘대로 안되는 일이지만 두려움을 느끼게 하는 것은 얼마든지 내 맘대로 할 수 있는 일이다. 대한민국의 지도자들은 당선 후 내 맘대로 할 수 있는 쪽을 택했다. 현실주의에서는 사람들은 최고의 이익을 추구하는 존재이기 때문에 아무리 사랑을 베풀어도 이해관계가 어긋나면 손바닥 뒤집듯이 배신한다고 한다.

결국 마키아벨리를 대충 읽은 한국의 지도자들은 사랑과 두려움 사이의 균형을 잃고 두려움만을 쓰는 쪽을 택한 데에 문제가 있는 것이다. 여태껏 대한민국은 한번도 미움을 받지 않으면서도 두려움을 느끼게 하는 지도자를 만나 본 적이 없다.

예정된 19대 대통령 선거일은 2017년 12월20일이다. 선거가 앞당겨질지 예정된 날짜에 진행될지는 아직 결정된 바 없다. 문제는 사랑받지 못하는 지도자로부터 국민들이 느끼는 배신감과 피로감이다. 한때 국민과 영광을 같이했던 조선소 128m 골리앗 크레인이 해체되어 고철값으로 루마니아로 팔려갔다. 한국판 ‘말뫼의 눈물’이 현실화된 것이다. 지금으로서는 어떤 두려움을 주는 지도자도 이를 해결할 수 없다. 대한민국이 제자리를 찾으려면 우선은 사랑받는 지도자가 나와야 한다.

이종서 중원대 인문사회연구소 연구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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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밥상 이야기’라는 메뉴를 운영하는 인터넷 사이트(www.jirisan.com)가 있다. 사이트 주인장을 비롯한 다양한 사람들이 자신의 밥상 사진을 올린다. 반찬과 식재료에 관한 간단한 코멘트와 음식에 대한 기억이나 소소한 이야기가 함께 올라온다. 식당에서 사 먹는 밥이 아니라 집밥 사진이다. 아침, 점심, 저녁 대중없고 세계를 넘나드는 사람들의 밥상을 구경하는 것만으로도 재미가 쏠쏠하다. 사실 남의 집 밥상 구경보다 더 좋아하는 것은 누군가와 함께 먹는 밥이다. 아무리 서먹한 사이라 해도 먹을 것을 앞에 두고 이야기를 시작하면 분위기가 부드러워지기 마련이다. 뭘 먹느냐에 따라 회의석상에서 나올 일 없는 이야기도, 숟가락을 놓고 컵에 물을 따르며 음식을 기다리고 있노라면 풀려나온다. 그 사람과의 새로운 기억이 생긴 만큼 ‘밥이라도 한 번 먹은’ 관계는 이전과 다른 질감을 갖게 된다.

“그녀는 생각난 듯이 앉은뱅이 의자를 밥상 앞에 당겨놓고 벽에 걸린 밀짚모자를 내려 자신이 앉은 맞은편에 내려놓는다. 혼자 밥 먹기 싫을 때마다 하는 행동이다. 앉은뱅이 의자를 맞은편에 두고 밀짚모자를 내려놓고 있으면 누군가와 마주 앉아 있다는 생각이 든다.” 신경숙 소설 <바이올렛>에 나오는 구절이다. 예전에 읽었지만 ‘혼밥’이 싫은 주인공의 심정과 의지할 사람 없는 외로운 주인공의 처지를 잘 보여주는 장면이라 인상에 남아있었다. 이 대목을 호출한 건 바로 대통령의 ‘지극한 혼밥 사랑’이었다. 대통령 탄핵이 가결되기까지 쏟아진 수많은 충격적인 기사 중에서도 잊혀지지가 않았다.

대통령의 혼밥은 화장실에 자주 가지 않기 위해 국물이 없는 돼지불백을 선호하는 택시기사나, 돈도 시간도 부족해 ‘컵밥’이나 편의점 도시락으로 한 끼를 때우는 취업준비생들의 혼밥과는 차원이 다르다. 대통령이 밥 먹자고 부르면 그야말로 ‘열 일 제쳐 두고’ 달려올 사람도 많을 텐데 업무 시간에 혼자 밥을 먹는다니? 의아할 수밖에 없다. “대통령은 깨어 있으면 집무 중이시고 주무시면 퇴근한 것”이라는 김기춘 실장의 표현대로라면 대통령의 식사 시간이야말로 엄연한 업무 시간 아닌가? 대통령이 “평소 혼자 TV를 보며 식사하는 시간을 가장 좋아했다”는데, 국민 대신 TV와 함께 업무를 본 셈이다. 이쯤 되면 청와대 관저 TV 시청 내역에 대해 정보공개 청구라도 해야 하는 것 아닌가 싶을 정도다. 특별한 일이 없는 한 늘 관저(집)에서 혼자 식사를 했다고 하니, 그동안 집에서 혼자 TV 보면서 밥 먹는 자유로운 직장 생활을 해온 셈이다. 평범한 직장인이었어도 진작에 직장 생활이 끝났을 일인데, 일국의 대통령이라면 말할 것도 없지 않은가.

게다가 먹을 것을 나눠먹는 것은 그 자체만으로도 훌륭한 위로다. 레이먼드 카버의 소설 <별것 아닌 것 같지만, 도움이 되는> 속 풍경은 비극적이지만 따뜻하다. 아들을 사고로 잃고 슬퍼하는 부부를 만난 빵집 주인은 “뭘 좀 드시고 기운을 차리는 게 좋겠소. 이럴 때 뭘 좀 먹는 일이 별것 아닌 것 같지만, 도움이 될 거요”라며 갓 구워낸 롤빵을 건네고, 부부는 시나몬 롤빵을 나눠먹으며 아침이 될 때까지 이야기를 나눈다. 즉석에서 해결책을 제시해 타인의 슬픔을 위로한 빵집 주인과 달리, 대통령은 세월호 사고 당일에도 평소처럼 혼자 관저에서 점심과 저녁을 먹었다고 한다. 대통령이라면 응당 국민과 아픔을 함께 나눠야 할 의무가 있는데도 지금껏 자식을 잃고 상처받은 국민들을 불러 따뜻한 밥 한 끼 나눈 적 없다. 대통령의 의지만 있었다면 얼마든지 가능했을 일이고 어려운 일도 아니다. 매주 일요일 회의를 하러 들어왔다는, ‘경계의 담장을 낮췄던’ 최순실과도 밥은 같이 안 먹은 분에게는 너무 어려운 일이었을까?

직무정지된 이후에도 평소와 크게 다를 것 없는 고독하고 익숙한 일상을 보내고 있다는 ‘신분만 대통령’인 분께, 지금이라도 함께 먹는 밥을 권하고 싶다. 혼밥을 좋아하는 대통령을 뽑은 국민은 이미 그 대가를 톡톡히 치렀다. 대통령은 맡은 책임을 지는 자로서 외로워야지, 식탁에서조차 외로운 사람이어서는 곤란하다.

정지은 | 문화평론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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촛불 민심과 국민 여론은 거듭 대통령의 하야다. 하지만 대통령은 꿈적도 하지 않는다. 헌법을 무기로 대통령이 국민을 이기겠다고 작정했다는 뜻이다. 선을 넘은 것이다.

이로써 마지막 가능성으로 남았던 대통령의 정치는 완료됐으며 명예혁명과 망명을 운운했던 일각의 로망은 소멸했다. 남은 것은 국회의 정치와 시민의 정치다. 국회의 정치는 이제 외길로 보인다. 탄핵을 가결하고 헌법재판소로 가는 길, 대통령의 헌법과 국회의 헌법이 맞붙는 막다른 길이다. 반면 시민의 정치는 이 길과 함께 또 다른 길로 나가기 시작했다. 그것은 ‘모든 권력은 국민으로부터 나온다’는 헌법 제1조의 사문화된 원칙을 되살려 엘리트 독과점 정치의 대의 민주제를 넘어서겠다는 국민혁명의 길이다.

날마다 특종과 속보와 가십성 뉴스가 홍수를 이루지만 국민은 허우적거리며 떠내려가지 않는다. 대통령의 하야를 마땅하게 여기는 민심은 하야한들 지난한 탄핵으로 간들 그다음이 마땅치 못한 이 난국을 냉정하고 차분하게 직시하고 있다. 국민은 마음속에서 대통령을 지웠기 때문이다. 진상 규명과 처벌은 응당한 일이기 때문이다.

문제는 누가 무엇을 위해 새로운 민주공화국을 만들 것인가이다. 초겨울의 주말문화이자 저녁문화가 된 광장 행렬이 100만 촛불을 켜면 때맞춰 청와대 실내등이 꺼지고 경복궁과 북악산이 깜깜해지는 광경은 우연이 아니다. 낮과 밤, 평일과 주말을 교차하는 이 빛과 어둠의 대비는 국민 저마다의 간절한 ‘보디 퍼포먼스’가 어우러진 거대한 ‘미디어 아트’다.

이 ‘국민예술’이 열망하는 국회의 정치는 ‘경제부흥, 국민행복, 문화융성, 평화통일’의 4대 국정과제를 사사로운 먹잇감으로 갈취한 ‘비선 실세’의 공범들과 이들을 공권력으로 뒷바라지한 국가 시스템의 적폐를 대청소하라는 것이다. 이를 위해 국민 대표성이 현저히 떨어진 국회를 정당득표 연동 비례대표제를 통해 일신하라는 것이다.

여기까지가 탄핵 정국을 경과하는 동안 국회의 정치가 보여줘야 할 기본이다. 이것을 실천하지 않고 대통령 선거로 가서 차기정부가 하겠노라 공약한들 할 수 있는 것이 그리 많지 않다는 사실을 민심은 안다. 51%로 당선된 대통령을 95%가 마음에서 버리게 된 국민의 자괴감은 더 이상 무력감이나 패배감이 아니라 새 판 짜기를 시작해야겠다는 집단지성의 장기전으로 가고 있다.

이 점에서 민심의 향배를 요약하면 이렇지 않을까 한다. 못 볼 것의 끝을 끝내 보았다, 돌이킬 수 없고 돌아갈 수 없는 데까지 왔다, 그리고 이 몹쓸 사태를 단숨에 정리할 방법을 그 누구도 갖고 있지 않다. 따라서 국회는 죄인의 심정으로 탄핵의 외길에서 입법, 행정, 사법, 헌법재판, 선거관리에 이르는 헌법기관 전체의 정상화를 위한 대장정에 그 어떤 지름길도 샛길도 없음을 직시하고 국가 대개조의 가시밭길을 정직하게 걸어가라고 말이다. 이렇게 국민과 소통하며 탄핵 정국이 일단락되어야 대통령 선거가 의미를 갖는다.

시민의 정치는 국회의 정치를 견인하되 따로 가야 할 길이 있다. 그것은 100만 촛불이 부른 그 노래의 후렴구 그대로다. “후회 없이 꿈을 꾸겠다 말해요”이고 “새로운 꿈을 꾸겠다 말해요”이다. 이 꿈을 계속 꾸고 싶어서 소설가 부희령은 “오래오래 광장을 지킬 수 있으면 되는 거”라 믿지만 그러기 위해선 “촛불이 꺼지면 언제든지 옆 사람에게 붙여달라고 부탁할” 수 있는 공간이 있어야 한다. 강풍이 불고 한파가 와도 모일 수 있는 공간을 국민과 함께 만들 공적 주체는 누구일까. 이 난국에도 국민의 일상과 안전을 책임지는 최후의 헌법기관, 바로 전국 17개 광역 지방정부와 의회이며 228개 기초 지방정부와 의회다.

세월호와 메르스 사태를 겪으며 국민은 경험했다. 중앙권력의 갑질 횡포에 위축된 지방정부와 지방의회지만 주민자치를 위해 깨알같이 많은 일을 해 왔으며 특히 위기 때 국민이 믿고 의지할 언덕이 되었던 공공이 누구였는지 말이다. 그 지방정부와 의회가 전국 각지에 한겨울의 촛불 민심을 환대하는 공간을 마련한다면, 시민의 정치는 겨울밤 내내 새로운 민주공화국의 천일야화를 이어갈 것이다. 이 천일야화를 통해 헌법을 공부하고 민주주의 교과서를 집필하며 나와 당신, 그리고 우리의 아이들이 살아갈 행복한 나라를 후회 없이 꿈꿀 수 있어야 한다. 대중문화 평론가 황진미의 통찰대로 “허깨비가 사라진 이후의 세계를 적극적으로 꿈꾸는 것”이야말로 시민의 정치가 갖는 힘이자 국민혁명을 만들어가는 길이다.

새로운 민주공화국이라면 국회의 정치와 시민의 정치를 연결하는 플랫폼은 대통령이나 중앙정부가 아니라 충분한 권력을 가진 지방자치의 각양각색 정치여야 할 것이다.

내년이면 6월 국민항쟁 30년이다. 그 사이에 국민은 박근혜 대통령까지 여섯 명의 대통령을 뽑았다. 국민이 원하는 바는 일곱번째 대통령을 뽑기 전에 헌법 제1조의 원칙이 살아 숨 쉬는 민주공화국을 맘껏 꿈꾸는 일이다.

김종휘 성북문화재단 대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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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통령이 물러나면 헌정(憲政)이 중단되는가? 대통령 스스로의 결단에 따라 물러나는 소위 하야든, 탄핵을 받아 물러나든, 두 경우 모두 헌정중단은 아니다. 헌정은 쿠데타 등에 의해 헌법과 법의 적용이 멈출 때 중단된다. 대통령이 물러나더라도 국가작용이 헌법과 법에 따라 행해진다면 헌정이 중단되는 것은 아니다.

원래 헌정이란 입헌정치, 즉 헌법에 의거한 정치다. 따라서 근대 헌법의 핵심인 국민주권주의, 법치주의, 기본권 보장, 그리고 권력분립의 원리가 지켜지는지가 헌정 계속의 판단기준이 된다. 오늘의 대한민국은 대통령이, 국민의 뜻이 아닌 최순실의 뜻에 따라, 법과 절차를 어기고, 국민의 기본권을 침해하는 정치를 함으로써 헌정이 파괴되었다. 지금까지 대통령 본인이 담화를 통해 인정한 것이나 여러 언론보도, 사건 관계자들의 말을 종합해보면, 대통령은 스스로 입헌정치를 중단시켰다. 따라서 정치적인 고려를 일절 배제하고 법적인 관점에서만 본다면 오히려 대통령이 물러나야 비로소 헌정질서가 회복된다고 할 수 있다.

대통령은 공적 직함이 전혀 없는 최씨에게 남북관계 등 국가기밀이 들어 있는 기록물이나 연설문을 직간접으로 유출하고, 최씨나 그 일당에게 장차관 등 공무원 인사권을 위임하거나 또는 무단행사를 방치했다. 최씨의 딸인 정유라가 출전한 2013년 상주경마대회와 관련하여 승마협회를 감사한 문화체육관광부 공무원의 보고가 맘에 들지 않는다는 이유로 이들을 좌천시켰다가 끝내 해임시켰다. 스스로 법치주의를 훼손한 것이다.

대통령은 또한 국민의 기본권을 침해했다. 대통령은 무엇보다 ‘모든 인간은 법 앞에 평등하다’는 헌법 선언을 어기고 최씨와 그 일당에게만 각종 특혜를 부여했다. 대통령은 최씨의 딸인 정유라가 이화여대에 부정입학하는 과정에서 불법을 행하거나 최씨의 불법을 방조함으로써 모든 국민이 능력에 따라 균등하게 교육을 받을 권리를 침해하고 이화여대의 자율권을 침해했다. 대통령은 인간은 누구나 자신이 옳고 그르다고 생각하는 대로 생각하고 이를 행동하는 자유를 가짐에도 재벌회장들의 손목을 비틀어 미르와 K스포츠 재단에 돈을 내도록 강요함으로써 재벌회장들이 양심에 따라 행동을 스스로 결정할 권리, 즉 일반적 행동 자유권과 양심의 자유를 침해했다.

대통령은 또한 권력분립의 원칙을 훼손시켰다. 주권자인 국민으로부터 위임받은 대통령의 권력을 일개 사인인 최씨에게 양도하고, 친박이라고 하는 측근 여당 의원들을 통해 의회에 영향을 미치는 방법으로 의회를 장악하거나 의회의 정상적 작동을 마비시켰다. 그리고 감사원이나 검찰 등 사정기관을 측근 인사로 채우는 등의 방법으로 감사기관이나 사정기관의 감시와 견제 기능을 제거했다.

오늘의 국기문란 사태는 대통령 권력을 제대로 견제하고 감시하지 못했기 때문이다. 미국 의회와 달리 우리 국회는 여당이 사실상 대통령에 종속되어 있다. 검찰은 대통령에게는 종속된 것에 비해 의회로부터는 거의 견제 받지 않고 있다. 결국 대통령이 검찰을 장악할 경우 대통령 권력을 견제할 방법이 없다. 입헌 정치의 핵심요소인 권력분립의 원칙이 참담히 무너져버린 것이다.

전대미문의 국기문란 사건을 대하며 국민은 참담하다. 국가는 국민의 기본권보장을 위해 존재한다고 할 때, 대통령이 국민의 기본권을 침해하고 국민을 불행하게 한 이번 사태의 재발을 막기 위해서는, 우리는 소위 제왕적 대통령제라 불리는 현행 대통령제를 폐지하거나 아니면 그 권력을 효율적으로 견제하는 방법을 하루속히 찾아야 할 것이다.

강신업| 변호사·대한변호사협회 공보이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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현대 한국은 온 세계의 모순을 걸머진 화약고가 되어 있다. 우리는 식민지 경험에 이어 분단구조 아래에서 독재정권을 겪으면서 빛나는 민주화와 눈부신 경제성장을 이룩하였다. 그런데 보수반동 정권이 연달아 들어서서 모든 걸 뒤엎어 놓았다.

박근혜 정권이 들어선 뒤 갈등과 분열의 양상이 온 사회에 걸쳐 짙게 깔렸다. 무엇보다 인사정책을 보면, 고위 공직자를 불법으로 부동산 투기를 일삼고 요리조리 병역을 기피하고 출세를 위해 수단 방법을 가리지 않는 인물로 채웠다. 게다가 무슨 은혜를 갚는다고 해 자신의 선거캠프에 있던 사람이나 곁에서 아첨하는 인사를 골라 요직에 앉혔다. 이는 바로 족벌주의나 환관정치로 추악한 권력의 남용이었다.

‘비선 실세’ 최순실씨가 31일 오후 서울 서초동 서울중앙지검에 출석하면서 울먹이고 있다. 이석우 기자

다음. 재벌에게 법인세 인하 등 온갖 특혜를 주고 노동자의 권익을 짓밟았으며 민주인사를 종북좌파로 몰아붙여 숨을 죽이게 만들었다. 남북대화는 파탄을 가져왔으며 사드 배치 문제로 인접국과 마찰을 빚고 있다. 일본과는 위안부 문제를 두고 단돈 10억엔을 받고 마무리 짓는 해괴한 일도 벌였다. 세월호 사건의 진상규명을 막고 고사하게 만들었고 시민단체의 활동을 무력화시키고 있다.

게다가 마침내 ‘박근혜 게이트’(최순실 게이트는 틀린 말)가 곪아서 터졌다. 양식이라고는 한 푼 없는 무식하고 사이비종교를 받드는 최순실이라는 간악한 여인이 대통령을 등에 업고 막후에서 국정을 농단하다 못해 기업인에게 강요해 비리재단을 만들고는 사유화하는 사태까지 벌어졌다. 19세기 끝 무렵, 고종과 민비는 진령군이라는 무당에게 빠져 국고를 탕진하였고 진령군은 그 위세를 업고 온갖 이권을 차지하고 재물을 갈취한 게 100여년 전에 일이다. 추악한 권력이 현대 민주정치 제도 아래에서 재현되었다.

하나 더 있다. 역사 교과서를 국정으로 지정하고 건국절을 새로 지정하려 하고 있다. 세계 민주국가에서는 교과서를 검인정이나 자유 채택제로 선택해 역사의 다양성과 창의성을 가르치고 있다. 국정교과서를 채택하는 국가는 현재 김일성 교조를 강요하는 북한과 종교교육에 충실한 이슬람권 국가뿐이다. 또 정부수립일을 건국절로 지정하는 건 한국 근현대사를 왜곡하고 헌법정신을 유린하는 작업이다. 왜 이러는가? 이승만 때문인가, 박정희 때문인가?

지난 29일 서울 광화문 일대와 전국 여러 곳에서 수많은 시민들이 일어나 박근혜와 최순실을 규탄하고 ‘박근혜 하야와 탄핵’을 외쳤다. 이 기세대로라면 동학농민혁명과 3·1운동, 4·19혁명, 6월항쟁이 다시 일어날 분위기이다. 오늘날 그런 사태가 일어나야 모순의 사회를 바로잡고 국가 기강을 세우며 역사의 정의를 실현하는 길이 될 것이다. 이승만은 하야하고 박정희는 살해당하고 전두환은 감옥에 가지 않았는가?

지금 여당에서는 비리에 연루된 청와대 비서진을 개편하고 대통령의 중립을 보장한 거국내각을 구성하는 게 그 해결 방법이라고 여기는 모양이다. 어림없는 해결책이다. 현행 헌법은 대통령중심제이므로 그 권한을 어떤 편법으로 어떻게 분산하든 박근혜 주도로 이루어질 것이다. 이런 미봉책을 국민 정서는 용납하지 않을 것이며, 양식 있는 인사는 그런 자리에 들어가려고 하지 않는다. 그래 봐야 그 나물에 그 밥이 되고 말 것이다. 너무나 썩어 문드러져서 어지간한 집도로는 치유가 불가능하다. 이를 푸는 방법은 두 가지밖에 없다고 판단한다.

첫째, 박근혜 대통령은 유신독재의 향수를 잊고 일대 결심을 굳혀 이 사회의 비리와 갈등을 풀어가는 것이다. 편중 인사를 전면 철폐하고 양식과 청렴, 전문성과 능력을 헤아려 공직자를 임명하고 환관과 같은 간상모리배를 제거하는 기풍을 만든다. 재벌의 특혜를 막고 비정규직 노동자와 저소득자의 권익을 보장하며 남북의 대화 물꼬를 트고 반민주적 국정 교과서를 철폐한다. 그러고 나서 참된 민주가치가 무엇인지, 소득 불균형을 어떻게 바로잡을지 처절한 성찰을 해야 한다. 이를 해내지 못한다면 마지막으로 사퇴하는 방법밖에 없다.

대통령은 우리 헌법이 명시한 최고 통치자다. 통치자는 용기와 결단력과 판단력이 있어야 리더십을 발휘할 수 있다. 자질이 모자라면 물러나는 것이 국가를 위해 현명한 선택이다. 하야를 선택하라. 일시의 혼란은 긴 역사에 비추어 보면 짧은 시간에 지나지 않는다. 터지는 둑을 미봉으로 막으려 하다가 정작 둑이 터지고 나면 모든 게 쓸려간다. 그때는 개인도 나라도 그르친다. 박근혜 대통령의 준엄한 자기 성찰과 결단이 요구된다.

루이 16세는 거대한 프랑스 혁명의 노도(怒濤) 앞에서 머뭇거리다가 단두대에 올라갔다. 이게 역사의 교훈이요, 심판이다.

이이화 | 역사학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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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osted by KHross

지난주 박근혜 대통령의 국무회의 발언은 많은 논쟁과 생각할 거리를 남겨주었고 여전히 그 여파가 진행 중이다. 이미 많은 논평들이 쏟아져 나오기는 했지만, 가장 놀랍게 느낀 것은 박 대통령의 짙은 정치혐오였다. 대통령이 정치인이기를 멈춘 것이다.

대통령은 과연 정치인인가? 매우 단순해 보이는 질문이지만 그 대답이 간단치는 않다. 여기서 정치인이란 말을 편의상 ‘정파적(partisan)’이란 말로 대체한다면 실마리가 보일 것도 같다. 대통령은 “국가의 원수이며 외국에 대해 국가를 대표하는” 기관이기 때문이고, 국민 모두의 지지로 당선되지는 않았어도 국민 모두를 대의하는 기관이기 때문이다. ‘부분(part)’을 일컫는 말에 뿌리를 둔 정당, 혹은 정파적이란 말은 애초에 대통령과는 어울리지 않는 말일지도 모른다. 그런 의미에서 여야 정치인들을 하나로 묶어 공격한 대통령은 매우 탈정파적이었고 도덕적 우월성에 대한 확신을 지니고 있었다는 점에서 매우 초월적이었다.

‘국부(國父)’ 혹은 ‘박사’라는 명칭이 더 편했던 이승만 전 대통령의 경우가 어쩌면 이러한 초월적 대통령의 이상형일 것이다. 자신을 추종했던 정당, 정치인들을 끊임없이 부정, 멸시, 말살하고 독촉국민회, 한민당, 자유당 등으로 끊임없이 여당을 갈아치우면서도, 정치를 초월한 국민의 아버지이자 시대의 현인으로 추앙받고 싶어했다. 권력을 향한 끊임없는 투쟁을 전제로 한 정치는, 대통령이라는 권력의 정상에 다다른 이에게는 너절하고 비천한 일로 보였을 것이다.

 



더 극단적으로 정치와 정당을 초월했던 이들은 이후 권위주의 정권의 대통령들이다. 이들은 정치인들을 정화(淨化)하고 정당을 소각한 무균진공의 공간에 준국가기관인 공화당과 민정당을 ‘설치’했는데, 아마 무질서한 투쟁과 지저분한 갈등이 없는 ‘아름다운 정치’를 꿈꿨을지도 모른다. 이승만 전 대통령이 정치란 개념을 거부했다면 이들은 정치 공간 자체를 멸균했다는 차이는 있지만, 정치를 초월한 대통령이라는 의미에서는 매우 흡사하다.

민주화와 민주주의의 성숙 과정이라는 것, 그리고 근대적 정치라는 것은 이러한 ‘초월자적 대통령’의 신화를 극복하는 과정에 다름 아니다. 노태우 전 대통령이 스스로를 ‘보통사람’이라 칭했던 것이 과연 우연이었을까? 영수회담(領袖會談)이란 말이 본격적으로 쓰이기 시작한 것은 야당을 국정 파트너로 인정하면서부터였고, 당정(黨政)협의란 말이 당정청(黨政靑)협의라는 말로 바뀐 것은 국회와 대통령의 직접적인 소통창구로서 여당의 역할이 강조되는 장면이었다. 민주주의 한국의 대통령은 심판이 아니라 선수이며, 정파를 초월한 지도자가 아니라 선거에서 이긴 정파의 지도자이다.

초월자적 대통령은 그 이름만큼이나 매력적이며 정치혐오증의 이면이기도 하다. 사익의 지배를 받는 무능하고 비효율적인 ‘정치’보다 관료제로 무장한 대통령의 ‘행정’은 몇 배나 더 효율적으로 문제를 해결할 수 있기 때문이다. 그런 의미에서 대통령의 정치혐오증을 우리 사회도 공유하고 있다. 그러나 정치가 지저분하고 비효율적이라고 해서 없애거나 축소할 수 있는 것이 아니라 아침에 밥알을 씹고 저녁에 화장실을 가는 것과도 같은 과정이라는 점을 상기해야 할 것이다. 사회 갈등을 찾아내고 그것을 짚어내거나 터트리는 일이 어떻게 아름다울 수 있겠는가. 정치가 근본적으로 문제를 해결하기 위해서가 아니라 문제를 제기하기 위해서 존재한다면, 정치가 문제 해결에 서투르고 비효율적인 것은 당연한 일이다. 박 대통령의 지난 선거와 당선 과정을 상기해보면, 그것이 이러한 사회 갈등의 줄기를 짚는 ‘정치’의 과정이었고, 여전히 그 작업을 멈추면 안된다는 의미에서, 대통령은 계속 정치인이어야 한다.

이상의 논의를 책임정당제라는 한 단어로 요약할 수 있다. 박 대통령이 새누리당 공천을 받아 당선된 것은 변하지 않을 사실이며, 여전히 새누리당의 핵심 지도자라는 사실도 변하지 않는다. 대통령이 진정한 미래의 비전을 정책으로 구성하고 실현하는 것은 혼자서는 불가능하고 자신의 정당에서 리더십을 발휘함으로써, 그리고 그 정당을 통해 이어진 사람들을 설득하고 이들과 협력하는 과정에서만 가능할 것이다. 이처럼 후보자가 정당과 같이 비전을 만들고, 이를 정책적 공약으로 구체화하며, 선거에서 평가받는 과정, 이것을 당선 후 구현하고 재평가받는 과정을 책임정당제라고 부른다. 한국 정치의 비극이라는 것은 대통령이 정당을 통해 당선된 후, 자기 정당을 ‘초월’하고, 이후에는 다시 그 정당에 의해 부정되는 과정을 반복해 왔다는 사실이며, 이것이 쉽사리 가까운 시일에 바뀔 것 같지는 않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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