흔히 선거를 민주주의의 꽃이라고 한다. 선거는 시민들이 자유롭게 다양한 견해를 제시하며 토론하는 마당이기 때문일 것이다. 그러나 이번 대통령 선거 과정은 그렇게 되지 못할 것 같다. 표현의 자유를 옥죄는 심각한 독소 조항이 있는 선거법을 방치한 결과다. 앞으로 촛불집회나 친박단체의 집회에서 대통령 탄핵에 대한 찬반입장을 밝히는 등 정치 현안에 대한 통상적인 발언은 괜찮지만 입후보 예정자를 지지·반대하는 발언은 할 수 없다. 예를 들면 ‘탄핵 환영(규탄)’이나 ‘사드 배치 반대(찬성)’라는 구호는 허용되는데, ‘정권을 교체하자’거나 ‘사드 배치 반대하는 ○○당을 선거에서 심판하자’를 외치면 불법이다. 지금까지 광장에서 맘껏 의사 표현을 하던 것은 이제 범죄행위가 되는 황당한 상황이 벌어진 것이다.

중앙선거관리위원회는 이런 제한이 비현실적인 것은 알지만 그동안 이 조항으로 처벌받은 판례들이 있기 때문에 법 규정대로 적용하지 않을 수 없다고 한다. 악명 높은 선거법 90조(시설물 등의 금지)와 93조(인쇄물 등의 금지)도 그대로 있다. 무심코 차량에 붙이고 다니던 ‘정권교체’나 ‘○○당 아웃’ 등의 스티커도 불법 부착물이 된다. 후보자 초청 대담 내용을 게재한 인쇄물을 배부하는 것도 법 위반이다. 모든 시민을 잠재적 범죄자로 모는 선거법이라도 해도 과언이 아니다.

이런 모순을 그대로 두고 선거를 치르는 것은 온당치 않다. 돈은 막고 입은 풀라는 선거법 제정의 취지와 어긋난다. 유권자의 표현의 자유를 최대한 보장하는 일이 시급하다. 이미 선관위도 대안을 제시한 바 있다. 선관위는 지난해 이런 맹점을 시정하기 위해 법 90조와 93조를 폐지하자는 개정을 정치권에 요구한 바 있다. 말과 전화를 통한 선거운동을 선거운동기간(대선의 경우 22일)에만 가능하도록 한 제한도 없애자고 제안했다. 그러나 여야는 받아들이지 않았다. 이는 시민들로부터 시시비비를 듣고 싶지 않다는 뜻이다. 시민들의 관심과 평가가 불편하다는 의사 표현이기도 하다. 선거 과열 방지를 통제의 명분으로 내세우지만, 시민들의 견해를 제한하겠다는 발상 자체가 비민주적이다.

선거에서 가장 필요한 것은 시민들의 자유로운 의견 표출이다. 선거는 시민의 의사를 결집하는 과정이고 선거 결과 역시 다양한 견해가 모여 형성되는 것이다. 그런데도 자유로운 의사 표현을 막고 선거를 치르겠다면 선거의 정당성도 그만큼 훼손된다는 사실을 각오해야 할 것이다. 표현의 자유를 절실히 필요로 할 때 오히려 억제하는 선거법은 당장 뜯어고쳐야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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황교안 대통령 권한대행이 대통령 선거 출마 여부를 놓고 고민하고 있다. 어제까지 3일 동안 공식일정을 잡지 않은 채 보고만 받으며 권한대행으로 계속 남을지 아니면 출마할지를 놓고 숙고하고 있다고 한다. 이번주 중으로 임시 국무회의를 열어 대선일을 공고해야 하는 상황인 만큼 그에 맞춰 자신의 출마 여부도 조속히 결정해야 한다.

황 권한대행이 출마할지 여부는 그의 자유다. 그는 이미 각종 여론조사에서 구여권 인사로는 1위를 달리는 유력 후보다. 자유한국당은 홍준표 경남지사와 황 권한대행이 대선 경선에서 경쟁하면 흥행을 할 수 있다는 생각으로 그의 출마에 공을 들이고 있다. 심지어 황 권한대행을 염두에 두고 대선 예비경선을 하지 않아도 된다는 규정까지 제정, 당내 분란이 조성되고 있다. 이런 위상에도 불구하고 황 권한대행이 이번 대선에 출마하는 데는 문제가 있다.

우선 황 권한대행은 박근혜 전 대통령 실정에 너무나 큰 책임이 있다. 박 전 대통령을 탄핵에 이르게 한 온갖 비리가 황 권한대행이 총리로 또는 법무장관에 있을 때 저질러졌다. 박 전 대통령의 비리를 몰랐다는 것만으로는 덮을 수 없는 책임이다. 법무장관 시절에는 세월호 수사를 방해했다는 의혹도 받고 있다. 박 전 대통령과 함께 시대착오적인 정책에 책임을 져야 할 인물이 바로 황 권한대행 자신이다.

황교안 대통령 권한대행 국무총리가 10일 오전 세종로 정부 서울청사로 출근하고 있다. 청와대사진기자단

황 권한대행이 대행의 역할을 충실히 해냈다면 달리 생각해볼 여지도 있겠다. 그러나 국가를 위해 공평무사하게 국정을 관리했다는 본인 평가와 달리 시민들은 그가 박근혜 정권의 실패를 연장했다고 보고 있다. 국정교과서와 고고도미사일방어체계(사드) 배치 등 논란이 많은 정책을 강행, 국론을 분열시켰다. 국회에 출석하지 않으려는 권위주의적인 모습도 보였다. 막판에는 박 전 대통령·최순실 국정농단의 진상을 밝혀야 한다는 여론을 거슬러 특검 연장을 거부했다. 황 권한대행이 무엇을 했다고 시민의 선택을 받겠다고 나선다는 것인지 묻지 않을 수 없다.

게다가 그에게는 탄핵 정국에서 내각을 안정적으로 관리하는 중차대한 임무가 맡겨졌다. 박 전 대통령이 헌법 위반으로 대행체제라는 부담을 시민들에게 안겨준 것도 모자라, 황 권한대행이 대행의 대행체제라는 위태로운 상황을 조성하겠다는 발상은 이해하기 어렵다. 자신에게 맡겨진 책임을 내팽개치고 대통령 선거에 뛰어들겠다는 그 생각만으로도 그는 이미 대선에 나설 자격이 없다. 운동경기 심판이 선수로 뛸 생각을 하고 있다면 그 자체로 반칙이다.

행여 시간을 끌다가 보궐선거 시 공직자 사퇴시한(투표일 30일 전)에 맞춰 갑자기 후보로 나서는 일은 꿈도 꾸지 말기 바란다. 아니, 황 권한대행이 출마 여부를 놓고 고민하는 모습을 보는 것 자체가 시민을 슬프게 한다. 파면된 대통령을 배출한 정권의 총리라면 내각 관리라도 잘해냄으로써 잘못을 조금이라도 덜겠다는 생각을 해야 한다. 그래도 시원찮을 마당에 대선 출마라니. 그런 몰염치를 보고 싶지 않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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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야 유력 정치인들이 속속 대선 출마를 선언하고 있다. 앞선 주자는 대세론을 주장하고, 후발 주자들은 ‘제3지대’ 연합이니 야권 공동경선 등을 제안하고 있다. 남경필 경기지사와 안희정 충남지사 등 젊은 후보들은 세대교체와 정책 중심의 경쟁을 외치지만 정국을 주도하지는 못하고 있다. 심상정 정의당 대표의 ‘슈퍼우먼방지법’ 공약과 유승민 바른정당 의원의 ‘육아휴직 3년 보장법’, 이재명 성남시장의 기본소득 정책 등도 이목은 끌었지만 의제로 떠오르진 못했다. 오히려 유력한 대선주자들일수록 특정 지역에 한정된 약속들만 내놓고 있다. 현안에 대한 해법이나 국가 미래를 좌우할 정책 제안보다는 유리한 경쟁 구도 만들기에 집중하는 상황이다.

안희정 충남지사가 22일 서울 혜화동의 한 소극장에서 대선 출마를 선언한 뒤 참석한 지지자들에게 감사 인사를 하고 있다. 정지윤 기자

대선은 정당과 후보들이 시민들의 요구를 반영하고 사회문제에 대한 해법을 공약으로 제시해 대결하는 과정이다. 이런 점에서 이번 대선 공약의 기조는 당면한 안보·경제 위기를 극복하면서 재벌과 검찰, 언론 개혁 등 과제를 어떻게 실천할 것인가가 되어야 할 것이다. 급선무로 떠오른 저출산 문제와 교육 정상화, 일자리 창출, 복지 강화 등에 대한 종합적인 해법도 필요하다. 아무리 준비를 잘해도 해법을 찾기 쉽지 않은 난제들이다. 게다가 이번 대선은 대통령의 탄핵이라는 돌발 상황에서 치러진다. 촛불민심으로 표출된 시민들의 요구도 대통령이나 집권 정당을 바꾸자는 수준을 넘어섰다. 박근혜 정권의 실정과 국가와 시장의 실패를 넘어설 대안을 구현해 달라고 요구하고 있다. 단순한 정권 교체가 아니라 ‘좋은 정권 교체’를 위한 집권 프로그램을 제시해야 하는 이중의 과제가 후보들에게 주어진 것이다.

그러나 촉박한 대선 일정으로 정책 검증이 쉽지 않은 상황이다. 심지어 특정 후보가 정책 토론을 회피할 것이라는 말까지 나온다. 이대로라면 유권자들은 후보들의 정책이 뭔지 제대로 평가하지도 못한 채 기표소에 들어가는 일이 생길 수 있다. 당선된 대통령은 인수위원회에서 정책을 조율할 틈도 없이 곧바로 집무를 시작해야 한다.

공약과 도덕성, 자질을 검증하지 못하면 또다시 실패한 정권이 탄생할 수밖에 없다. 졸속으로 만들어 낸 공약으로 선거를 치른다면 그 길을 피하기 어렵다. 공약 없이 이미지로 선택받겠다는 것처럼 위험하고 무책임한 일은 없다. 후보들 간 활발한 정책 경쟁을 기대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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온 국민이 특검 수사에 몰입하고 있던 지난 며칠 사이, 두 개의 섬뜩한 국제뉴스가 있었다. 하나는 트럼프 시대의 개막이다. ‘미국 우선!’의 막무가내식 밀어붙이기를 어떻게 감당할 것인가. 다른 하나는 중국의 일대일로가 그 첫 번째 결실을 보았다는 기사이다. 중국 저장성 이우시에서 출발한 화물열차가 17일간 1만2500㎞를 달려 영국 런던에 도착한 것이다. 중국, 카자흐스탄, 러시아, 벨라루스, 폴란드, 독일, 벨기에, 프랑스를 거쳐 마침내 영국에 도착했다. 트럼프 시대에 예상되는 변화는 언론을 통해 비교적 많이 소개되었으니 여기서는 일대일로의 의미를 생각해보자.

육로와 해로 두 개의 길을 통해 중국과 유라시아, 중동, 아프리카, 유럽을 거쳐 스칸디나비아까지 연결하는 이 거대한 프로젝트는 중화인민공화국 수립 이래 최대의 국가사업일 뿐 아니라 2차대전 이후 유럽의 부흥을 가져온 마셜 플랜의 12배 규모이다. 완성되고 나면 전 세계 인구의 65%, 그리고 전 세계 국내총생산(GDP)의 3분의 1을 설명하게 될 것이다. 아직도 많은 불확실성이 남아있지만, 옹호론자들은 물론이고 회의론자들조차도 최소한 이 사업에서 구경꾼으로 남아서는 안된다는 것이 일치된 의견이다. 중국에서 출발한 기차가 런던에 도착했다는 것은 일대일로의 첫 길을 열었다는 중요한 의미를 가진다. 트럼프의 미국이 미국 우선의 고립주의 길을 가는 동안 중국은 유럽으로 뻗어나갈 더 많은 기회를 얻게 될 것이다.

초유의 거대 프로젝트는 엄청난 자본을 필요로 한다. 인프라 투자에 필요한 돈은 주로 아시아인프라투자은행(AIIB)에서 나온다. AIIB는 일대일로의 돈줄이자 동시에 금융에서 미국 주도의 국제통화기금(IMF)에 맞서는 중국의 전진기지이기도 하다. 미국과 일본을 제외한 57개 주요국이 참여했고, 한국은 미국의 만류에도 불구하고 AIIB에 참여하면서 5번째로 많은 분담금을 냈다. 미국으로서는 단단히 서운할 일이었는데, 그 와중에 전승절 행사까지 참석하면서 화를 돋웠다. 그 후 한·일 간 각종 외교분쟁에서 미국이 일본 편을 드는 느낌을 주었던 것은 우연의 일치가 아니었을 것이다. 하지만 대규모 분담금의 대가로 받은 부총재직은 4개월 만에 날아가고 그 자리는 국장급으로 강등되었다. 그뿐인가. 사드 배치를 둘러싸고 갑작스러운 방향선회로 이번에는 중국의 각종 보복조치에 시달리고 있다. 돈은 돈대로 내고 양쪽에서 뺨을 맞고 있는 격이다.

돈도 냈고 뺨도 맞았으니 얻는 것이 있어야 할 것이다. 가장 중요한 것은 이 거대한 물류·문화·정치의 망을 통해 한창 산업화가 진행 중인 고성장 경제에 동승해야 한다는 점이다. 일자리 부족, 양극화, 성장동력 상실, 저출산 등 우리가 겪는 문제들은 모두 탈산업화와 밀접하게 관련되어 있다. 제조업이 줄어들면 가족을 부양할 수 있는 양질의 일자리가 줄어들고 이것이 앞서 나열한 모든 문제들을 일으킨다. 경제성장, 계층이동의 사다리, 낙수효과 같은 기회의 문들은 탈산업화하는 국가가 아니라 산업화하는 국가들에 있다. 중앙아시아, 인도, 중동, 아프리카, 동유럽 등 일대일로를 따라 펼쳐지는 기회에 우리도 동승해야 한다. 일대일로의 대부분 경제활동은 소위 ‘경제회랑’을 통해 일어날 것으로 전망된다. 6개의 경제회랑이 있는데 한국이 포함되어야 할 동아시아 경제회랑은 존재하지 않는다. 북한에 가로막혀 있기 때문이다. 박근혜 정부의 유라시아 이니셔티브는 일대일로와 매우 비슷한 구상에서 출발했다. 돈도 냈고, 뺨도 맞았고, 구상도 같다면 이제야말로 실익을 챙겨야 할 때이다. 하지만 박근혜 정부가 한 일은 느닷없는 개성공단 폐쇄로 실익을 챙길 기회를 스스로 막아버린 자해적 정책이었다. 주요 대선주자들이 개성공단 부활을 주장하고 있지만, 그동안 강화된 대북 제재로 인해 이제 와서 되살린다는 것도 쉽지 않은 일이 되었다.

나는 다가오는 대선에서 후보들의 공약은 두 개의 큰 틀 안에서 평가되어야 한다고 믿는다. 하나는 코앞에 닥친 인구절벽·소비절벽 앞에서 적어도 20년을 내다본 정책의 장기효과이고, 다른 하나는 과거와는 달라진 미국과 중국의 양대 헤게모니 격돌 속에서 우리가 어떻게 성장과 한반도 평화를 얻어낼 것인가라는 글로벌 전략이다. 주요 주자들이 내놓고 있는 공약들에서 이런 큰 틀의 사고는 보이지 않는다. 심지어 유엔의 수장을 지낸 후보조차도 아직까지 이런 사고를 선보인 적이 없다. 그들의 준비 부족일 수도 있을 것이고, 아직까지 한국에서 선거에 이기는 데 글로벌 전략 같은 건 별로 중요하지 않기 때문일 수도 있을 것이다. 정권교체든, 정치교체든, 시대교체든 좋다. 그러나 그 새롭게 만들어진 세상에서는 우리를 둘러싼 글로벌 환경에서 우리 스스로가 주요 변수가 될 수 있어야 하지 않겠는가.

장덕진 | 서울대 교수·사회학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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선거는 민주주의의 꽃이라고 한다. 시민이 자신의 의사를 대표할 인물을 뽑는 선거는 주권자의 권리 행사라는 민주주의의 핵심을 보여주기 때문이다.

그러나 한국에서 이런 표현은 색이 바랬다. 정치를 향한 냉소는 커가고, 그에 반비례해 시민의 선거 참여도는 떨어지고 있다. 유권자들은 “찍어 봐야 바뀌는 것은 없다”며 한탄하기에 이르렀다. 그 끝판에서 박근혜·최순실 게이트가 터졌고, 그예 촛불혁명의 불이 붙었다. 이렇게 시민과 괴리된 정치가 가능한 것은 시민의 의사를 제대로 반영하지 못하는 선거제도 때문이다.

현 선거제도에서 가장 먼저 손봐야 할 문제는 ‘표의 비례성’을 바로잡는 것이다. 각 정당 득표율은 실제 의석수와 비례하지 않는다. 유권자의 선택과 다른 결과가 나오니, 결과적으로 시민은 선거에서 소외된다. 지역구에서 1표라도 더 얻은 최다 득표자가 당선되는 승자독식 구조 때문이다.

20대 총선에서 대구 지역구 전체 투표수 108만여표 중 새누리당은 47.9%인 52만여표를 얻었지만 12석 중 8석을 차지해 66.7%를 대표하는 셈이 됐다. 더불어민주당은 18.8%인 20만여표를 얻었지만 1석만 따내 8.3%에 불과했다. 광주 전체 71만여표 가운데 국민의당은 55.8%인 39만여표를 받고 8개 지역구 100%를 가져갔다.

비례대표는 그나마 낫다. 새누리당은 정당 득표에서 33.5%를 얻고 의석 47석 가운데 17석을 획득해 36.1%를 대표했다. 민주당과 국민의당은 각각 25.5%와 26.7%를 얻고도 27.7%인 13석씩 가져갔다. 정의당은 7.2% 득표에 8.5%인 4석을 얻었다.

(출처: 경향신문DB)

해결책으로 1개 지역구에 2명 이상을 뽑는 중·대선거구제 도입이 거론되지만, 토호만 발호하고 2개의 특정 지역 기반 정당이 해당 지역을 나눠먹을 우려도 여전하다. 전국을 6개 권역으로 나누고 권역 내에서 득표율을 기준으로 비례의석을 배분하는 권역별 비례대표제는 절차가 복잡하고, 거물들의 선거 안전판 역할로 작용할 수 있다.

현재로서 가장 현실적인 방안은 전국 명부 연동형 비례대표 확대다. 지역구는 현재 253석을 그대로 두되, 47석인 비례대표 정수를 120석 이상으로 늘리면 된다. 한국 국회의원 1인당 인구수는 16만7000명으로, 너무 많다. 평균 9만9000명인 경제협력개발기구(OECD) 34개국 가운데 4번째로 많다. 중앙선거관리위원회는 지역구와 비례대표 정수를 2 대 1로 할 것을 권고한 바 있고, 한국국제정치학회는 국가 규모가 비슷한 OECD 국가와 비교했을 때 한국 의원 정수로 370명 안팎이 바람직하다고 밝혔다.

비례대표 정수가 늘면 그나마 표의 비례성이 제고된다. 세가 약한 지역에서 고군분투하는 후보를 비례대표로 배려할 수 있다. 녹색당, 해적당, 청년당, 복지당 등 이념과 정책이 분명한 정당들도 의원을 배출해 국회에서 민의를 전달할 수 있다. 유권자들에게는 더욱 다양한 선택의 기회가 주어진다.

의원 정수 확대의 가장 큰 걸림돌은 시민들 사이에 만연한 정치 혐오와 국회 불신이다. 그러나 국회 문이 좁을수록 정치 엘리트와 자산가, 지역의 세도가 등 기득권층에 유리하다. 시민들이 보고 싶어하는 참신한 인물, 전문가, 지역 봉사자들은 들어가기 어려워진다. 과도한 국회의원 특권을 폐지하고, 공천이 대권·당권을 쥔 계파의 전리품이 되지 않도록 투명성과 민주성을 보장하는 내부 절차를 만들면서 비례대표를 늘려야 한다.

선거운동 제한은 대폭 풀어야 한다. 선거가 시민의 축제라지만, 단속과 처벌의 장으로 전락해 있다. 투표 당일을 제외하고 호별 방문, 명함 배부, 전화·메시지 발송, 신문·방송 광고, 플래카드 게시 등을 전면 허용해야 한다. 선거 직전 여론조사 공표 및 언론사의 후보 비교·서열화 금지도 유권자의 알 권리를 막는 것이므로 해제해야 한다.

특히 선거운동 기간이라는 이유로 촛불집회에서 표출된 것과 같은 다양한 표현을 옥죄어서는 안된다. 금품 제공, 후보 매수, 허위사실 유포 등 부정행위가 아니라면 후보나 정당의 지지와 반대 등 자유로운 의견 표명을 보장해야 한다. 표현의 자유를 더욱 보장해야 할 선거 때 거꾸로 더 억압한다면 결코 선거를 민주주의의 꽃이라고 할 수 없다.

선거권 연령도 현행 만 19세에서 18세로 낮추는 게 온당하다. 190개국 가운데 147개국은 선거연령이 18세 이하이고, OECD 회원국 중 18세를 초과하는 나라는 한국밖에 없다. 교육 수준의 향상, 소셜미디어 등 다양한 매체를 통한 정보 교류로 고등학교 3학년생의 정치적 판단력은 부족함이 없다. 맑은 눈과 귀를 가진 그들이 탁한 기성세대보다 후보자 감별을 잘할 것이다. 고령화되는 한국 사회에서 젊은 세대의 정치적 의견이 미래 정책 결정에 더 반영되도록 할 필요가 있다.

대통령 선거에서는 결선투표제를 도입해야 한다. 그간 이념과 지향이 다른데도 사표를 우려하며 자기가 원하는 후보 대신 다른 후보를 찍는 왜곡을 더 이상 방치해서는 안된다. 결선투표제는 인위적 후보 단일화의 폐해도 막을 수 있다. 무엇보다 투표자 과반 지지를 얻음으로써 당선자의 대표성이 강화된다.

촛불에 힘입어 선거제를 혁파할 천금 같은 기회가 찾아왔다. 정치권이 그 뜻을 받들지 못하면 시민들이 직접 압박하고 요구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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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역은 64개의 괘로 길흉을 따진다. 64괘 중에서 가장 좋은 괘가 겸(謙)이다. 겸손할 겸은 말씀 언(言)과 아우를 겸(兼)이 합쳐진 자다. 말할 때 상대를 배려해서 하면 자연 겸손해진다는 뜻이다. 상대의 말을 경청하는 것도 마찬가지다.

새해는 겸과는 거리가 먼 해가 될지 모르겠다. 대통령 선거철만 되면 많은 사람들이 이성을 잃는다. 자기가 지지하는 후보는 항상 옳고 똑똑하고 구국의 영웅이다. 들보 같은 흠결도 ‘세상에 안 그런 놈 어디 있느냐’고 하고, 티끌만 한 장점은 “세상에 이런 사람 또 있느냐”고 한다. 무조건적이다.

정책은 관심의 대상이 아니다. 세금은, 보육은, 가계 빚은, 실업문제는 어찌 풀지 궁금하지도 않다. 그건 난 모르겠고, 뽑아 주면 어련히 알아서 잘하겠지 식이다. 새누리당 충청권 의원들은 반기문에 대해 “공산당만 아니라면 따라갈 것”이라고 했다. 자기 집 가사 도우미를 구한대도 “공산당만 아니면…”이라고 하진 않을 것이다. 그런 식으로 눈 감고 귀 막고 뽑았던 대통령이 박근혜고 이명박이다. 이명박은 4대강에 20조원이 넘는 돈을 퍼부었다. 5000만 국민 1인당 40만원씩 걷어 강물에 뿌린 꼴이다. 지난 연말 모임에서 만난 서울대 교수는 “그 돈을 벤처 불쏘시개로 지원해줬으면 10%, 5%만 성공했어도 지금 활활 불타고 있을 것”이라고 했다.

박근혜는 긴 말 할 것 없다. 시민들은 박근혜에 대해 믿어 왔던 것들이 조작된 신화이며 허상이었음을 4년 뒤에 깨달았다. 그나마 늦게라도 밝혀진 게 다행이다. 정유라의 강아지가 나라를 구했다. 촛불시위에 나온 노인들이 아이들에게 과자를 건네주며 “우리가 잘못해서 너희가 고생이다”고 했다고 한다. 과자로 끝낼 일이 아니다.

리더십의 요소는 통찰력이다. 미래를 내다보는 눈이다. 나라의 장래가 여기에 달려 있다. 상황은 바람과 같아 눈에 보이지 않는다. 지도자는 남보다 먼저 봐야 한다.

16세기 일본의 작은 섬에 포르투갈인이 표류했다. 이들이 긴 총으로 멀리 떨어진 과녁을 맞히는 걸 보고 깜짝 놀랐다. 일본은 총 만드는 기술을 전수받기 위해 그들의 말을 배웠다. 17세기 조선의 제주도에 네덜란드인 서른여섯명이 표류해왔다. 하멜 일행이다. 이들 중에도 총포 기술자가 있었다. 조선은 이들에게 노역을 시켰다. 생김새가 특이하다고 춤과 노래를 가르쳐 남자 기생으로 부리기도 했다. 일본의 오다 노부나가는 조총으로 전국시대를 통일했고, 조선은 굴욕적인 역사를 맞았다.

바깥세상은 눈이 핑핑 돌아가게 변하고 있다. 변화의 주기는 갈수록 짧아지고 있다. 지금 1년은 미래 10년, 100년을 좌우한다. 4대강이나 창조경제 따위가 새 시대로 나아가는 시대정신일 수는 없었다. 본인이 모르면 사람이라도 잘 써야 한다. 경전에는 ‘천하가 다 옳다고 해야 그 사람을 한 번 찾아가서 보고 쓰라’고 했다. 박근혜는 천하가 다 안된다는 사람을 보지도 않고 썼다. 이명박은 5년 내내 땅을 팠고 박근혜는 주사를 맞았다.

역사는 계절이 바뀌는 것처럼 저절로 바뀌지 않는다. 겨울이 가고 봄이 오듯 불의가 가고 정의가 오지 않는다. 역사는 그냥 발전한 적이 없다. 기득권 수구세력이 변화를 바라지 않기 때문이다. 역사의 진보는 이름 없는 수많은 개인들이 힘을 모을 때만 가능했다. 4·19혁명이 그랬고 6·10항쟁이 그랬다. 그렇게 죽어라 애써도 역사는 직선이 아닌, 나선형으로 발전한다고 이탈리아 역사학자 비코는 말했다.

대한민국은 지난 세월을 허송했다. 박근혜, 이명박은 하늘에서 뚝 떨어진 게 아니라 시민들의 손으로 뽑았다. 그사이 금쪽같은 시간이, 기회가, 에너지가 강물처럼 흘러갔다. 같은 강물에 두 번 발을 담글 수 없다. 흐르는 강물은 기다려주지 않는다.

2000년 전 폼페이 사람들은 베수비오 화산을 끼고 살면서도 희희낙락하다 하루아침에 4m 두께의 화산재에 파묻혔다. 이들은 마지막 순간까지 무슨 일이 닥쳤는지 잘 모르는 모습 그대로 발견됐다. 기존의 특권세력들이 이들과 똑같다. 기득권 세력들은 다른 세상을 사는 듯 살아왔다. 촛불은 박근혜의 무능뿐 아니라 재벌, 검찰, 정치, 언론 등에서 그동안 자행돼온 불의와 시민의 분노가 만난 곳에서 등장했다. 시민들은 진작부터 알고 있었다. 몰랐던 게 아니고 마그마처럼 부글부글 끓고 있었을 뿐이다.

새해는 불평등, 불공정, 불의의 구체제에서 빠져나와야 한다. 특권과 반칙, 불법과 협잡이 판치는 세상을 끝내야 한다. 촛불은 화산 폭발의 전조(前兆)다. 민심이란 화산에 연기가 피어오르기 시작했다. 화산은 아직 폭발하지 않았다.

박래용 논설위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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