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데이트 폭력'에 해당되는 글 2건

  1. 2015.06.28 ‘7층’에 선 여성들
  2. 2015.06.23 데이트 폭력

얼마 전 ‘데이트 폭력’이 사회관계망서비스(SNS)를 통해 고발되었다. SNS상에서 폭로와 사과가 연이어 오고 가며 여기저기 기사화도 되었다. ‘데이트 폭력’이란 ‘연인 사이에 가해진 폭력’을 의미하는데, 가정폭력과 마찬가지로 은폐되고 드러나지 않는다. 이번에 SNS에 폭행을 당했다는 사실을 공개한 여성도 수년이 지나 어렵게 용기를 낸 것이다. 그런데 수년이 지난 지금에야 이 문제를 공개하느냐는 문제제기도 있다(금태섭 변호사가 슬로우뉴스에 기고한 ‘데이트 폭력 피해자에 대한 훈계, 그 무지에 대하여’라는 글 참조). 이 정도까지는 아니어도 데이트 폭력에 분노하는 많은 이들이 ‘왜 맞으면서까지 상대방을 만날까’라는 의문을 버리지 못한다.

데이트 폭력이 어떻게 한 여성을 파괴하고 그의 주체적 결정을 가로막는가를 잘 설명해주는 만화가 있다. 스웨덴 여성 만화가 오사 게렌발의 <7층>(우리나비)이다. 표지를 보자. 맨 위에 분노한 남자 주인공 닐의 얼굴이 있고, 그 밑으로 점점 작아지는 여자 주인공 오사의 얼굴이 있다. 폭력이 상대방을 어떻게 무기력하게 만드는가에 대한 상징적 표지다.

오사 게렌발의 <7층> (출처 : 경향DB)


항상 검은 옷을 입고 아이라인을 진하게 그리는 오사는 새로운 예술학교에 다니게 된다. 이곳은 예전에 다니던 학교와 딴판으로 모든 게 쿨했다. 오사는 이 학교가 퍽 마음에 들었다.

어느 날 파티에서 꿈만 같은 일이 벌어진다. 학교 최고 인기남 닐이 오사에게 다가왔다. 교수부터 학생들, 그리고 아주머니들까지 모두에게 인기 최고인 닐은 오사에게 “넌 내가 지금껏 알았던 사람 중에 가장 아름답고 멋진 여자야. 겉모습만큼 마음도 분명 예쁘겠지. 밝고 명랑한 데다 똑똑하기까지 하고. 정말 사랑해”라고 고백한다. 오사는 행복했다.

‘달콤하고 행복한 꿈’은 곧 ‘악몽’으로 변한다. 닐은 오사의 작은 행동을 꼬투리 잡아 화를 내고 윽박지른다. 오사는 닐이 왜 화를 내는지 잘 이해할 수 없지만 닐에게 사과한다. 사과하는 오사에게 닐은 뭘 잘못했느냐고 윽박지른다. 닐은 점점 자기 마음대로 행동하고, 오사는 모든 걸 닐에게 맞춘다. 귀고리를 빼고, 머리를 염색하지 않게 되었으며, 화장을 그만두고, 즐겨 입던 검은색 옷을 버렸다. 오사는 오사다운 개성이 점점 사라지고, 닐이 제시한 틀에 맞춰진 오사가 되었다. 다른 사람들은 둘을 완벽한 커플로 봤다. 언어폭력으로 오사를 틀 안에 가두던 닐은 서서히 신체적 폭력도 가하기 시작했다. 때리고 목을 졸랐다. 심지어 자동차로 데려가 운전을 시킨 뒤 괴롭혔다.

아무도 모르게. 오사는 닐과 함께 사는 7층에서 늘 뛰어내려버릴까 하고 생각한다. 닐의 폭력은 갈수록 과격해진다. 어느 날, 닐은 함께 차를 타고 가다 오사의 손을 물어버린다. 살점이 뜯긴 손을 본 오사는 차를 타고 아빠에게 돌아가 상처를 보여준다. 그 뒤 주변 사람들과 제도의 도움을 통해 병원에 가서 진단서를 발급받고, 닐을 고소한다.

“난 그야말로 난파선과도 같았다. 내 자존심은 산산이 부서졌다. 나의 정체성은 사라지고, 내가 어떤 사람이었는지조차 모르겠다. 어디서부터 다시 시작해야 할지 모르겠다.”

오사는 닐이 망가뜨린 CD를 다시 사고, 머리를 검은색으로 염색하며, 검정 옷을 사고, 화장을 시작했다. 이렇게 노력해도 한 번 망가진 자존감은 쉽게 회복되지 못했다. 직업도 갖고, 친구들과 만나도 “거대한 짐덩이”가 오사를 따라다녔고, “온갖 잡다한 것들이 다시금” 오사를 파괴했다. 폭력은 마치 개미지옥과도 같다. 한 번 빠지면 몸과 마음이 모두 파괴되면서 계속 함정 속으로 빨려들어간다. 스스로 빠져나오는 건 쉬운 일이 아니다. 오사도 혼자 고립되었다고 생각하고, 7층에서 뛰어내릴 생각을 하기도 했다.

많은 여성들이 7층에 서 있다. 가부장적 편견이 유독 강한 우리나라는 특히 7층에 서 있는 여성들이 많다. 7층에 서 있는 그들에게 다가가 손을 내미는 건 우리의 몫이다.


박인하 | 청강문화산업대 교수·만화평론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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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osted by KHross

이것이 만약 ‘폭력’에 대한 글이었다면 나는 차마 이 글을 쓸 수 없었을 것이다. 그런 글을 쓰기에 나는 떳떳한 인간이 못 되기 때문이다. 그러나 원고 청탁을 받아들인 것은 이것이 ‘데이트 폭력’에 대한 글이어서였다. ‘데이트 폭력’이라는 단어를 듣는 순간 A군이 술김에 찢어 놓았던 왼쪽 귀를 꿰매던 응급실의 불빛과 의료용 바늘의 감촉이, B군이 발로 차서 금이 갔던 왼쪽 갈비뼈가, C군이 이단 옆차기를 해서 부러졌던 오른쪽 갈빗대가 얼얼해져 왔다. 벌써 몇 년 전인데도. 내가 마지막으로 사랑했던 남자는 나를 때리지는 않았다. 단 한 대도 때리지는 않았지만 야 이 XX야 차라리 때려라, 하고 악을 쓰고 싶은 사람이었다. 화가 나면 욕설을 참지 못하는 성정이었고, 태어나서 듣지도 보지도 못한 욕을 그에게서 다 들었다. 욕설도 데이트 폭력에 포함될까.

그 처참한 말들을 들으며 내 영혼이 입었던 내상을 생각하면 그 역시 데이트 폭력의 범주에 넣을 수밖에 없을 것 같다. 내가 그의 심기를 거스르는 말을 했을 때, 그는 즉각 신고 있던 신발을 벗어 “이런 XX가…” 하는 욕설과 함께 내 얼굴을 향해 휘둘렀다. 차라리 그대로 갈기기라도 했으면 좋았을 텐데, 참 신통한 재주로 그는 신발짝이 내 뺨에 닿기 0.1초 전에 손을 멈췄다. 그리고 나를 향해 씨익 웃어 보이며 말했다. “야, 나 너 안 때렸다? 분명히 안 때렸어? 너 어디 가서 내가 때렸다고 하면 거짓말 되는 거 알지?”

차라리 때리지. 한 번 더 내가 그의 심기를 거슬렀을 때, 그는 자신의 기분이 풀릴 때까지 무릎을 꿇고 앉아 있으라고 했다. 물론 나는 그 자리를 뛰쳐나갈지 말지 수십 번 고민했다. 그리고 결국 나는 그의 원룸 귀퉁이에 무릎을 꿇고 앉았다. 세 시간쯤 지났을까, 다소 기분이 풀린 그는 부드러운 목소리로 나에게 속삭였다. “그러니까 나 속상하게 하지 마, 알았지?”

마그리트, 연인, 1928년 (출처 : 경향DB)


남자 보는 눈이 그렇게 없느냐, 어지간히 못났다, 하고 나에게 혀를 끌끌 차실 분들이 있겠지만 그는 회사에서는 상사들에게 신임받는 인사고과 1위의 성실한 직원이었고 동료들과의 관계도 원만한, 지극히 정상적인 인물이었다. 내가 당당하고 씩씩하게 살아왔을 거라고 생각하셨던 독자들은 이쯤에서 꽤나 실망하셨을 것이다. 그럼에도 이 자랑스럽지도 않은 구차한 이야기들을 털어놓는 것은 나처럼 그나마 페미니즘 물 좀 먹었다는 여자, 혼자 똑똑한 척은 다 하는 여자, 불의를 보았을 때 별로 참지 않고 어디 가서 성격 좋다는 이야기 들어본 적 없는 나 같은 여자까지 폭력을 휘두르는 연인을 사랑한다는 착각에 빠져 데이트 폭력을 한계까지 견뎠을 정도라면, 여자다움의 미덕을 주입받고 자란 선량한 보통의 한국 여성들은 이런 경우를 당했을 경우 도대체 어떻게 살고 있을지 상상만 해도 끔찍해서이고, 그들이 결코 혼자가 아니며 바보 같아서 당하는 일도 아니고 이 한심스러운 나를 보고 조금이라도 용기를 내기를 바라기 때문이다. 용기를 내어 거기에서 나와야 한다.

나를 때린 남자들은 하나같이 이렇게 말했다. “나 절대 여자 때리는 남자 아니야. 이번이 처음이야.” 내가 자기를 그렇게 만들었다는 거였다. 이런 점에서 성폭력과 데이트 폭력의 희생자들은 닮았다. 내가 좀 더 몸가짐을 조심했더라면, 내가 성질을 건드리지 않았더라면…. 그러면서 점점 자책하게 되고, 마침내 고립된다. 그리고 폭력적인 연인들은 대부분 폭풍의 시간이 지나가면 그것을 보상하기 위해 배나 달콤해진다. 다음부터는 절대 그러지 않겠다는 약속에 알고도 속으면서 혹시나, 혹시나 하는 희망을 버리지 못하는 것이다. 혹시 그 남자의 이제 변할 거라는 약속을, 너만 사랑한다는 말을, 나는 너 아니면 안 된다는 말을 아직도 믿고 있는 당신이라면 최대한 빨리, 지금 즉시 그를 떠나라. 그는 결코 당신을 사랑하지 않는다. 당신의 육체와 영혼에 그가 산산조각낼 수 있는 부분이 아직 남아 있는 것뿐이다. 더 부서지기 전에 일어나라, 당신. 우리를 구할 수 있는 것은 결국 우리뿐이다.


김현진 | 에세이스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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