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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 2015.06.01 숲의 자연주의자 되기

숲 근처에 가면 얼마간은 자연주의자가 된다. 풀과 꽃, 나무와 숲 그리고 벌레와 새들이 사는 자연을 좋아하지 않을 사람은 없다. 아닌가. 생각보다 많은 사람들이 숲을 두려워한다. 벌레 한 마리에 기겁하는 사람은 숲 근처에 가기를 꺼릴지도 모르겠다. 편견 몇 가지를 내려놓을 수 있다면 가끔은 자연주의자가 되는 것도 나쁘지 않다. 가끔 자연주의자라고? 자연을 문명의 건너편에 있는 무엇으로 생각하는 사람들이 어쩌다 자연주의자가 될 수 있을지 몰라도 오롯이 자연과 더불어 지내기는 힘들다. 자연주의자란 문명 이후에 일부 인간들에게 나타나는 행동양식일 따름이다.

자연은 한 번도 나를 위해 존재한 적이 없다. 꽃만 해도 그렇다. 꽃을 좋아하지 않는 사람은 없지만 정작 꽃은 사람에게 잘 보일 이유가 없다, 벌레라면 모를까. 말하자면 자연은 언제나 그들만의 리그를 벌이고 있을 뿐, 인간들은 자연 앞에서 언제나 국외자들이다. 그럼에도 자연의 존재들 사이에서 벌어지는 일들을 훔쳐보는 것만으로 자연주의자가 된다. 숲에 가까이 있다 보면 자연이 주는 너무 많은 호사에 오히려 미안할 지경이다. 그동안 사람들이 자연에 해온 짓을 생각해보면 더 그렇다.

숲에 딱따구리 부부가 산다. 늘 같이 붙어 다닌다. 날개 아랫부분이 검은색과 흰색의 알락무늬를 이루고 배 아래쪽이 붉은색인 걸 보면 오색딱따구리일 것이다. 가끔 건넛산에 머물기도 하지만 대개는 이곳 북쪽 사면에서 아침을 해결한다. 이들은 식량 창고 두 채를 임대해 놓았다. 두 그루의 죽은 소나무다. 아침이면 딱따구리 부부가 번갈아 구멍을 뚫으며 내는 드라마틱하고 공학적인 소리가 들린다.

딱따구리는 몸 자체가 고속회전 장치가 달린 해머 드릴이다. 머리뼈와 연결된 부리는 부러질 염려가 없어 쓸 때마다 갈아 끼우는 나의 스테인리스 드릴 날보다 몇 배는 유용하다. 물론 훌륭한 연장을 지니고 있는 목수가 해머 드릴만 다루지는 않는다.

또르르르 하는 기계음과 달리 나무를 쳐내듯 톡, 토독 하는 소리를 내기도 한다. 자귀질 소리다. 주로 나무껍질을 벗길 때 머리의 방향을 틀어 여기저기를 번갈아 쪼아대며 나무껍질을 아래로 떨어뜨린다. 어쩜, 내가 하는 동작과 똑같아! 딱따구리가 아침 식사를 위해 다시 숲을 찾았다. 소나무 꼭대기에 자리를 잡은 녀석이 뽁뽁 하는 소리를 내며 즐겁게 테이블보를 펼쳐 놓는다.

몰래 나무 밑으로 가 한 아름이 넘는 소나무를 끌어안았을 때, 녀석이 드디어 포크를 들어 접시를 공략하기 시작한다. 순간 탁자가 흔들리며 해머 드릴 소리가 숲으로 퍼지기 시작한다. 소리는 손바닥으로 전해지고 나무의 진동이 가슴으로 파고든다. 새가 내는 소리라는 생각이 들지 않을 정도의 큰 소리가 나는데 구멍을 뚫으며 나는 소리는 나무 기둥을 타고 밑으로 퍼지며 울린다. 나무에 귀를 대고 들어보면 소리는 마치 나무 속에서 나는 것 같다. 다른 쪽 귀는 숲에 퍼지는 소리를 들으니 말 그대로 서라운드 입체 음향이다. 감동적이다. 그 소리 하나로 나는 자연주의자가 된다.

까막딱따구리 어미가 둥지 안을 살피고 있다. (출처 : 경향DB)


며칠 뒤 새벽. 집이 울리는 요란한 소리에 놀라 잠에서 깼다. 예의 그 해머 드릴 소리였다. 순간 일요일 아침 아파트의 어느 집 벽에 액자라도 걸기 위해 뚫는 드릴 소리 때문에 아침잠을 설쳤던 때의 푸념이 저절로 나왔지만 곧바로 그게 우리 집에서 내는 소리라는 걸 깨달았다. 딱따구리가 지붕 어딘가를 쪼아대고 있는 게 틀림없었다. 아스팔트 싱글로 된 지붕 속에 벌레가 살 리도 없고 여간해선 뚫어지지도 않을 테지만 도대체 왜 지붕을 쪼아대는지 알 수가 없었다.

그 뒤로도 몇 번인가 지붕을 두드리는 소리가 나 밖으로 나가보면 녀석은 감쪽같이 사라지고 난 뒤였다. 흔적을 발견한 것은 다시 며칠 뒤, 딱따구리는 지붕 처마 밑에 덧대놓은 삼나무를 뜯어대고 있었다. 오일스텐이 발라져 있던 삼나무 판재는 여기저기 뜯겨 허연 속살을 드러내고 있었다. 그대로 두었다간 딱따구리 때문에 처마를 보수해야 할 날이 앞당겨질 판이었다. 딱따구리를 어떻게 쫓아낼 수 있을까 고민하기 시작했는데 자연주의자가 되기는 영 글러 먹었다.


김진송 | 목수·문화평론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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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osted by KHross