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무라카미 하루키'에 해당되는 글 2건

  1. 2017.09.26 김명수 대법원장, 31년 재판 실력 보여줄 때다
  2. 2016.08.17 폭염에 하루키를 읽다

사람이 말로는 못할 것이 없다. “우리 국문과 교수들이 소설을 안 써서 그렇지, 쓰면 연수씨보다 훨씬 잘 쓸 수 있다는 것을 알아야 해요.” 소설가 김연수에게 어느 국문학과 교수가 했다는 말이다. 인터뷰집에서 김연수는 써야만 쓰는 것이라고 했다. “가장 중요하고 결정적인 것은 간절함인데, 그 간절함(은) 반복적인 행동으로 나오는 일이겠죠.” 그리고 “재능은 큰 도움이 안되는 것 같아요. 우리가 서른 살까지 산다면 결정적이겠지만, 대부분은 오래 살기 때문에 시간이 지날수록 무의미해지죠”라고 했다.

상상력조차도 꾸준함에서 나온다고 소설가 무라카미 하루키는 말했다. 1982년 이후 하루도 거르지 않고 달리고 있는 그이다. “그저 묵묵히 시간을 들여 뛰어간다. 장편소설을 쓰는 것도 마찬가지다. 계속 이어가는 것 리듬을 끊지 않는 것. 이것이 장기적인 작업에서는 중요하다.” 무라카미는 에세이를 쓰는 이유도 비슷하게 설명한다. “나는 글자로 써보지 않으면 어떤 사물에 대해 제대로 생각하기 어려운 사람이다.” 누구라도 반복하지 않으면 프로가 되지 못한다.

김명수 대법원장 후보자가 22일 오전 서울 서초동 사무실로 출근하고 있다. 김 후보자 임명동의안은 21일 문재인 대통령이 지명한지 31일만에 국회를 통과했다. 연합뉴스

김명수 대법원장은 후보자로 발표되고 기자들에게 말했다. “저는 31년5개월 동안 법정에서 당사자들과 호흡하며 재판만 해온 사람입니다. 그 사람이 어떤 수준인지, 어떤 모습인지 이번에 보여드릴 것으로 기대합니다.” 두 가지 속내를 전달하고 싶었을 테다. 법원행정처 경험이 없다는 비판에 대한 답변, 평생을 재판만 해온 95% 판사들에 대한 응원이다. 이 말에는 사실 이유가 있다. 재판을 잘하려면 재판을 오래 해야 한다는 당연한 명제가 법원에서는 부정되어 왔기 때문이다.

김명수 후보자가 발표되자 행정처에서 일한 전·현직 판사들은 노골적이고 조직적으로 반발했다. 기자를 만나서도 스스럼없이 후보자의 경력을 깔보았고, 사고를 치고 법복을 벗은 처지에 사법부의 미래를 개탄했다. “(청와대가) 사법부를 행정조직으로 바라보는 것이다. 1948년 정부 수립 이래 가장 혁명적인 조치.” “도대체 법원이 어떻게 되려고 이러나.” 행정처 출신들은 스스로도 이렇게 본다. “우리 행정처 판사들이 재판을 안 해서 그렇지, 하면 당신들보다 훨씬 잘할 수 있다는 것을 알아야 한다.”

행정처 출신 판사 가운데 재판을 잘하는 사람들이 있다. 가령 강일원 헌법재판관의 재판은 폭포가 떨어지듯 정확하고 신속하다. 박근혜 대통령 탄핵심판이 무난하게 끝난 것도 그의 공이다. 또 다른 행정처 출신인 특허법원 김환수 수석부장판사 재판은 사람의 마음부터 어루만진다. 영어로 심리를 주재하는 실력파이지만 당사자의 긴 얘기를 마음으로 듣는 겸손한 판사다. 무람하지만 내 주례 선생인 김앤장 변호사도 행정처 출신의 그런 판사였다.

하지만 몇몇 좋은 결과가 있다고 해서, 일반적인 현상을 부정하지는 못한다. 재판을 오래 하지 않았어도 깔끔하게 하는 사람이 있지만 어디까지나 예외다. 오히려 이 판사들이 재판에만 집중했다면 더 좋은 재판을 했을 테다. 사법시험에 붙은 판사들의 능력은 비슷하다. 그렇다면 재판을 오래 한 사람이 잘하는 것은 당연한 이치다. 그런데도 사법관료들은 “하급심을 아무리 오래 해도 대법원 재판은 다르다. 미국에서도 곧바로 대법원장이 되지만 종신제라 다르다”며 버틴다. 

일본을 대표하는 화가 가쓰시카 호쿠사이가 걸작 <후가쿠 36경(富嶽三十六景)>을 내놓은 게 일흔이 넘어서다. 여든아홉에 임종을 앞두고 그는 “하늘이 내게 수명을 다섯 해 더 준다면, 진정한 화공이 될 수 있을 텐데”라고 했다. 유럽까지 뒤흔든 천하의 호쿠사이도 이렇다. 물감이 아닌 사람을 상대하는 재판은 죽을 때까지 해도 제대로 하기가 어렵다. 25일 업무를 시작한 김명수 대법원장에게 주권자인 국민이 여섯 해를 주었다. 이 시간 동안 약속을 지켜야 한다.

31년 동안 재판만 한 사람의 실력을 보여줄 때다.

<사회부 | 이범준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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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osted by KHross

뭘 생각하기도 못하게 만드는, 지독한 더위다. 하루키 책을 읽는다는 것은 이 폭력적인 더위에 일종의 피서이다. 왜냐하면 많이 알려져 있듯 그의 소설은 지극히 ‘쿨’하기 때문이다. 선풍기 앞에 누워 몇 권의 하루키 소설을 훑어보면서 나는 그 쿨함의 정체성에 대해 생각해보았다. 가령 이런 것이 아닐까.

첫째 하루키 소설의 주인공들은 잘 ‘묻지도 따지지’도 않는다. 4년간의 결혼 생활 끝에 이혼에 이른 남자는 파국의 원인을 따지지 않고 혹은 바람난 아내에게도 ‘그녀의 일’이라고 덮어버린다. 또는 고등학교 시절 단짝 친구들로부터 갑작스러운 절교를 당했는데도 그 이유를 캐묻지 않고 16년이 지난 뒤에야 진실을 찾아나선다. 합리와 논리, 진실이 아닌 비합리와 모순투성이의 세계를 수용하는 것이 몸을 차게 하는 데 도움이 된다. 그러기 위해서는 <상실의 시대>의 와타나베의 다음과 같은 말이 도움이 될 것이다. “내가 해야 할 일은 하나밖에 없었다. 모든 사물을 심각하게 생각하지 말 것. 모든 사물과 나 자신 사이에 적당한 거리를 둘 것.”

일본 소설가 무라카미 하루키. 민음사 제공

또 하루키 인물의 욕망은 끈적거리지 않는다. 가령 <4월 어느 햇빛 좋은 날에 100퍼센트의 여자를 만나는 것에 대하여>라는 소설이 100%의 여자를 만나는 방법에 대해 알려줄 거라고 생각하면 오산이다. 이 소설은 4월 어느 햇빛 좋은 날에 우연히 100%의 여자를 알아보고 잠시 행복해하다가 보내는 일이 전부이다. 어떤 뜨거운 열정도 스토킹도 없다. 하루키의 인물에게 욕망의 대상은 풍경으로 머물기 쉽다. 와타나베의 금언이 여전히 효력을 발휘하는 국면이다. 그래서 하루키의 남자들은 대체로 젠틀하고 우아하다. 욕망에 집착하지 않기 때문에 그들의 사랑은 쉽사리 증오나 혐오, 그리고 폭력으로 발전하지 않는다. 그것은 여자뿐 아니라 돈, 명예 같은 것에도 해당된다.

둘째, 그렇기 때문에 고립과 단절을 추구하고 ‘개인’이 되는 것의 필연적 운명과 장점에 대해 설파한다. 그들은 대개 홀로 책과 음악을 탐닉하고, 타인과의 교류를 싫어하며 온전히 ‘자신’이 되고자 한다. 무리가 아닌 개인이 되었을 때, 인간은 순해지기도 하는 것이다.

셋째, 그의 소설에 의하면 세상은 ‘사막’ 같은 곳이다. <상실의 시대>를 비롯한 연애소설에서 하루키의 남자들은 대개 실연과 이별, 죽음을 겪고 허무와 상실감을 겪는다. 그 상처를 견디는 방법은 “어떤 진보도 또 어떤 변화도 결국은 붕괴하는 과정에 불과”하다는 진리를 깨닫고 ‘신이 나서 무(無)를 향해 가려는 인간들’을 가련하게 여기는 것이 쿨함을 유지하는 데 필수적이다.

넷째, 그 연장선상에서 현실이 아닌 다른 세계의 존재를 믿는 것이다. 가령 또 다른 달을 품고 있는 세계라든가 세계의 끝에서 만나는 무의식의 세계, 고양이와 얘기를 나누는 환상의 세계 같은 것 말이다. 그러나 하루키의 소설을 판타지 문학이라고 생각하면 오산이다. 판타지 소설은 본능적 욕망을 실현하고 해소하는 대중장르적 특성을 지니고 있으나 하루키의 비현실은 초월적 현실 같은 곳이고, 오히려 현실적 욕망과 법칙이 승리하지 않는다는 점에서 ‘저 세상’과 유사한 곳이다.

다섯째, 초월적 세계를 품고 있는 하루키의 소설에는 대체로 일체의 집착과 마음을 놓아버린 금욕적 인물들이 자주 등장한다. <얼음 사나이>의 주인공 얼음사나이는 그 극단의 메타포라 할 수 있는데, ‘빙산같이 고독한’ 이 남자는 모든 과거를 얼음 속에 동결시켜 봉인한 채 단지 응시할 뿐 풀어헤치지 않으며 부단히 현재를 과거화시키는 인물이다. 그 동결 속에 마음과 온기는 물론, 일체의 비극적 역사도 망각된다.

여섯째, 하루키 소설은 읽고 나면 줄거리가 잘 기억나지 않는다. ‘이쪽 세계와 저쪽 세계’를 오가는 어떤 희미한 기미들과 여러 개의 플롯들이 얽혀 있기 때문에 ‘읽으면서 잊어버리는’ 해체적 독법에 적합하다. 또한 강렬한 주제의식이나 박진감 넘치는 드라마가 없기 때문에 읽기에 덜 피로하고 의미규명에 대한 강박을 가지지 않아도 좋다.

마지막으로, 하루키의 소설을 읽다보면 뉴스에 나오는 세상사가 구질구질하고 한심해 보인다. 정치꾼들에 대한 환멸은 더 깊어지고 토론과 정쟁도 쓸데없는 일처럼 생각된다. 국가와 민족 운운하는 것에도 냉소적이 되며, 심지어 사드(THAAD)니 올림픽 메달 획득이니 하는 난리에도 심드렁해진다. 그러니 폭염에 하루키를 읽는 것만 한 피서는 없다. 이렇게 정리해보니 하루키 소설이 왠지 현대판 종교서 같다는 느낌이 든다. 음, 그런데 지금 하루키 문학을 비판하는 거냐고? 글쎄, 그것도 가을이 되면 생각해보는 것이 좋을 것 같다.

정은경 | 문화평론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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