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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 2016.08.17 폭염에 하루키를 읽다

뭘 생각하기도 못하게 만드는, 지독한 더위다. 하루키 책을 읽는다는 것은 이 폭력적인 더위에 일종의 피서이다. 왜냐하면 많이 알려져 있듯 그의 소설은 지극히 ‘쿨’하기 때문이다. 선풍기 앞에 누워 몇 권의 하루키 소설을 훑어보면서 나는 그 쿨함의 정체성에 대해 생각해보았다. 가령 이런 것이 아닐까.

첫째 하루키 소설의 주인공들은 잘 ‘묻지도 따지지’도 않는다. 4년간의 결혼 생활 끝에 이혼에 이른 남자는 파국의 원인을 따지지 않고 혹은 바람난 아내에게도 ‘그녀의 일’이라고 덮어버린다. 또는 고등학교 시절 단짝 친구들로부터 갑작스러운 절교를 당했는데도 그 이유를 캐묻지 않고 16년이 지난 뒤에야 진실을 찾아나선다. 합리와 논리, 진실이 아닌 비합리와 모순투성이의 세계를 수용하는 것이 몸을 차게 하는 데 도움이 된다. 그러기 위해서는 <상실의 시대>의 와타나베의 다음과 같은 말이 도움이 될 것이다. “내가 해야 할 일은 하나밖에 없었다. 모든 사물을 심각하게 생각하지 말 것. 모든 사물과 나 자신 사이에 적당한 거리를 둘 것.”

일본 소설가 무라카미 하루키. 민음사 제공

또 하루키 인물의 욕망은 끈적거리지 않는다. 가령 <4월 어느 햇빛 좋은 날에 100퍼센트의 여자를 만나는 것에 대하여>라는 소설이 100%의 여자를 만나는 방법에 대해 알려줄 거라고 생각하면 오산이다. 이 소설은 4월 어느 햇빛 좋은 날에 우연히 100%의 여자를 알아보고 잠시 행복해하다가 보내는 일이 전부이다. 어떤 뜨거운 열정도 스토킹도 없다. 하루키의 인물에게 욕망의 대상은 풍경으로 머물기 쉽다. 와타나베의 금언이 여전히 효력을 발휘하는 국면이다. 그래서 하루키의 남자들은 대체로 젠틀하고 우아하다. 욕망에 집착하지 않기 때문에 그들의 사랑은 쉽사리 증오나 혐오, 그리고 폭력으로 발전하지 않는다. 그것은 여자뿐 아니라 돈, 명예 같은 것에도 해당된다.

둘째, 그렇기 때문에 고립과 단절을 추구하고 ‘개인’이 되는 것의 필연적 운명과 장점에 대해 설파한다. 그들은 대개 홀로 책과 음악을 탐닉하고, 타인과의 교류를 싫어하며 온전히 ‘자신’이 되고자 한다. 무리가 아닌 개인이 되었을 때, 인간은 순해지기도 하는 것이다.

셋째, 그의 소설에 의하면 세상은 ‘사막’ 같은 곳이다. <상실의 시대>를 비롯한 연애소설에서 하루키의 남자들은 대개 실연과 이별, 죽음을 겪고 허무와 상실감을 겪는다. 그 상처를 견디는 방법은 “어떤 진보도 또 어떤 변화도 결국은 붕괴하는 과정에 불과”하다는 진리를 깨닫고 ‘신이 나서 무(無)를 향해 가려는 인간들’을 가련하게 여기는 것이 쿨함을 유지하는 데 필수적이다.

넷째, 그 연장선상에서 현실이 아닌 다른 세계의 존재를 믿는 것이다. 가령 또 다른 달을 품고 있는 세계라든가 세계의 끝에서 만나는 무의식의 세계, 고양이와 얘기를 나누는 환상의 세계 같은 것 말이다. 그러나 하루키의 소설을 판타지 문학이라고 생각하면 오산이다. 판타지 소설은 본능적 욕망을 실현하고 해소하는 대중장르적 특성을 지니고 있으나 하루키의 비현실은 초월적 현실 같은 곳이고, 오히려 현실적 욕망과 법칙이 승리하지 않는다는 점에서 ‘저 세상’과 유사한 곳이다.

다섯째, 초월적 세계를 품고 있는 하루키의 소설에는 대체로 일체의 집착과 마음을 놓아버린 금욕적 인물들이 자주 등장한다. <얼음 사나이>의 주인공 얼음사나이는 그 극단의 메타포라 할 수 있는데, ‘빙산같이 고독한’ 이 남자는 모든 과거를 얼음 속에 동결시켜 봉인한 채 단지 응시할 뿐 풀어헤치지 않으며 부단히 현재를 과거화시키는 인물이다. 그 동결 속에 마음과 온기는 물론, 일체의 비극적 역사도 망각된다.

여섯째, 하루키 소설은 읽고 나면 줄거리가 잘 기억나지 않는다. ‘이쪽 세계와 저쪽 세계’를 오가는 어떤 희미한 기미들과 여러 개의 플롯들이 얽혀 있기 때문에 ‘읽으면서 잊어버리는’ 해체적 독법에 적합하다. 또한 강렬한 주제의식이나 박진감 넘치는 드라마가 없기 때문에 읽기에 덜 피로하고 의미규명에 대한 강박을 가지지 않아도 좋다.

마지막으로, 하루키의 소설을 읽다보면 뉴스에 나오는 세상사가 구질구질하고 한심해 보인다. 정치꾼들에 대한 환멸은 더 깊어지고 토론과 정쟁도 쓸데없는 일처럼 생각된다. 국가와 민족 운운하는 것에도 냉소적이 되며, 심지어 사드(THAAD)니 올림픽 메달 획득이니 하는 난리에도 심드렁해진다. 그러니 폭염에 하루키를 읽는 것만 한 피서는 없다. 이렇게 정리해보니 하루키 소설이 왠지 현대판 종교서 같다는 느낌이 든다. 음, 그런데 지금 하루키 문학을 비판하는 거냐고? 글쎄, 그것도 가을이 되면 생각해보는 것이 좋을 것 같다.

정은경 | 문화평론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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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osted by KHross