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단'에 해당되는 글 3건

  1. 2018.02.20 ‘미투’ 운동에 대하여
  2. 2018.02.14 [정동칼럼]한국 현대문학사와 문단
  3. 2018.02.08 [여적]문단과 괴물

나는 ‘미투(me too)’ 운동이 현상적으로는 구체적인 ‘실명 주체(개인)’를 호명해 비판하더라도, 누군가 개인을 징치(懲治)하기 위한 운동이라고 생각하지 않는다. 만약 그런 지향만 있다고 오해한다면, 교통신호를 무시했거나 불법 유턴하다가 재수 없게 걸린 사람의 변명거리로 전락할 위험이 있기 때문이다.

그와 반대로 ‘미투’ 운동에 대한 불편함을 이야기하며, 남성 또는 문단 전체가 그런 것이 아니란 식의 호도와 볼멘소리에도 반대한다. 이는 우리 사회의 성차별을 비롯한 구조적 모순과 일상의 민주주의가 체현되지 못하고 과거에 머무는 현실을 개인의 실수나 잘못으로 치부하는 오류를 범하기 때문이다.

연극연출가 이윤택씨가 19일 오전 서울 종로구 30스튜디오에서 열린 기자회견에서 상습 성폭력 의혹을 일부 시인하고 공개 사과한 뒤 자리를 떠나고 있다. 이상훈 선임기자

일부 예술가와 비평가들은 예술의 초월성에 주목한 나머지 예술이 역사와 지역의 맥락과 무관한 초월적이고 추상적인 가치인 것처럼 주장한다. 그러나 문학을 비롯해 모든 예술은 역사라는 시간성과 지역이라는 공간성 또는 장소성 등에 의해 상호침투적인 영향을 주고받는다. 따라서 이번 서지현 검사, 최영미 시인을 비롯한 수많은 여성을 통해 재점화된 ‘미투’ 운동(1년여 전부터 해시태그 운동이 있었다고 하지만, 우리 사회에 경고등이 점멸하기 시작한 것은 이미 오래전의 일이었다)의 당사자들은 물론 가해자로 지목된 이들 역시 별개의 세계 속에 외따로이 존재하는 돌출된 인물이나 사건이 아니라 우리 사회의 이면에 숨겨진 참모습을 드러낸 사건의 전위이자 전형이다.

다시 말해 이 사건은 ‘문단’이라는 특정한 세계의 구성원에게만 해당하는 그들만의 문제가 아니라 ‘한국’이라는 우리가 속한 시간과 공간, 세계의 문제이다. 다만 ‘문단, 예술계, 언론계, 의학계, 법조계, 교수사회’ 등등 우리가 전문성을 지닌 영역, 독특한 문화를 지닌 세계(世界)로 상정하는 공간에 몸담은 이들은 때로 우리 사회 전체, 외부세계의 변화와 다른 시간대를 살아간다. 우리가 하나의 ‘계(界)’라고 부르는 독특한 영역을 구축한 이들은 ‘그들만의 리그’에서 높은 담을 쌓고 변화를 거부하는 양상을 보이기도 한다.

물론 예술가란 이 사회가 만들어낸 견고한 ‘사회적 언어와 매너’로 상징되는 지배질서에 저항하는 자들이어야 한다. 그러나 그 저항의 대상이 약자라면 그는 지배질서의 일부분이며, 지배질서를 강화하는 존재일 뿐이다. 우리가 자칫 착각하기 쉬운 것은 ‘미투’ 운동과 페미니즘이 지목하는 대상이 특정한 개인이자 사건인 동시에 특정한 것이 아니듯, ‘미투’ 운동의 고발자 역시 겉으로 드러나는 모습과 달리 그 자체가 개인이기만 한 것은 결코 아니다. 가해자에게 존중받을 업적과 가치가 있을 수 있듯, 고발자 역시 개인적 약점이나 결점을 가진다. 그러나 비판에 대한 반론이나 옹호를 위해 이것을 들추어 가며 가해자를 옹호하는 행위는 우리 사회의 모든 고발, 비판의 가능성을 전면적으로 무화(無化)하는 매우 위험한 일이다.

지금 ‘미투’ 운동을 통해 페미니즘과 젠더 감수성이 불러일으키는 불편함은 21세기가 된 지금까지도 ‘문학이란 이렇다, 이래야 한다. 예술가는 이렇다, 이래야 한다’는 과거의 낭만적 예술관, 전근대적 가치관만으로도 편하게 살 수 있었던 사람들에게 울리는 하나의 경종이다. 물론 루쉰의 비유대로 오늘 우리가 깨어난다 한들 강고한 기득권과 권력을 쥔 이들의 체제는 깨부술 수 없는 ‘무쇠로 된 방’일지 모르지만, 그대로 잠든 채 머문다면 ‘확실한 죽음’ 이외의 것은 남지 않을 것이다.

1987년 민주화가 있었지만, 그로부터 30년이 흐른 2017년 우리는 다시 촛불을 들었다. 페미니즘과 젠더감수성에 대한 요구와 목소리가 여성을 중심으로 퍼져 나오는 것은 당연한 일이지만, 이에 호응하는 남성의 목소리도 점차 커진다. 그 까닭은 이것이 단지 여성이라는 이유만으로 차별당하고, 성희롱과 성폭력의 대상이 되는 여성만의 문제가 아니라 더불어 살아가야 하는 세상에서 가장 약한 자, 소수자의 권리가 보장될 때, 그 사회의 나머지 사람들의 권리도 함께 보장받을 수 있다는 깨달음 때문이다.

<전성원 | 황해문화 편집장>

Related Posts Plugin for WordPress, 

Blogger...
Posted by KHross

# 문단_내_성폭력 1차 파동이 일던 2016년 가을, 한 여성 평론가에게 물었다. “요즘 문단 분위기 어떻습니까?” 매우 신중한 성격인 그녀는 약 5초간 침묵하다가 “문단이란 걸 아예 없애버려야 한다고 생각합니다”라고 답했다. 그녀의 입에서 그런 단호한 말이 나오는 걸 들은 건 처음이었다. 어린 고교생 작가 지망생까지 성폭력의 희생자였음이 드러난 때였다.

대구경북여성단체연합 등 시민단체 회원들이 지난 1일 대구지방검찰청 앞에서 검찰 내 성폭력 사건의 진상규명을 촉구하고 있다. 연합뉴스

문단이란 도대체 무엇인가? 그것은 없앨 수도 있고 없앨 수 없는 것이기도 하다. 제도로서의 문단은 등단과 문학상, 문예지와 문학가 단체 등을 아우른 체계를 뜻하고, 비물질적인 측면에서 문단이란 문인들의 네트워크, 또 비평적·예술적 규범과 권위로 이뤄진 무정형의 공동체 같은 것을 뜻한다. 한국에서는 대표적인 문예지를 운영하는 출판사와 그 주변의 작가·비평가가 문단의 중심에 서 왔다. 그리고 이 땅 문단에서는 근대문학의 이념과 제도가 발생하던 20세기 초부터 술자리가 중요했다. 이는 한국 사회 어디에나 있는 그 술자리의 문학판 버전이기도 하다. 거기서 친분과 인맥이 생겨나며, 청탁과 거래가 오가기도 한다. 언젠가부터 큰 출판사들은 의식적으로 많은 돈을 쓰며 지식인·문인들에게 공짜 술을 샀다. 고담준론이나 지적·예술적 교류가 오간 것도 사실이니, 좋게 보면 술자리는 문학계의 자율성과 연동되어 있었다. 그러나 바로 이런 자리들에서 권력의 네트워크와 권위를 악용한 성폭력도 자행돼온 것이다. 성폭력범은 소수라 해도 이런 문화 자체가 한국 현대문학사에서 이어져왔다는 것은 객관적 사실이다.

2015~2016년의 표절·성폭력 스캔들을 겪고 문단의 제도와 네트워크는 부분 개혁되었지만, 권위와 존경은 근저에서 깨져나가고 있어 안타깝다. 필자가 다니는 대학 문학 동아리의 한 남학생은 모 원로 소설가를 일컬어 ‘고마운 개새○’라 했다. 노회한 상습범이 젊은 영혼에게 충격적 깨달음을 준 것이다. 그는 남성인 자기에게 모호하던 많은 문제가 사태로 인해 분명해지고, ‘여성의 처지’에 대해 깊이 생각해보게 됐다고 했다.

저렇게 심각했던 1차 파동 때에 문단의 호스트이자 ‘권력’이었던 ‘어른’들은 마치 아무 일 없는 양 하거나 침묵했다. 그리고 며칠 전 어느 ‘원로’는 다시, ‘작품과 작가는 분리해서 생각해야 된다’거나 ‘예술가들의 업적은 존중하되 그 약점이나 실수는 보호’(!)해야 한다고 했다. ‘원로’나 일부 비평가들은 이런 사태로 인해 자신들이 쌓아온 ‘공적’이 무너질 것이라는 불안에 사로잡힌 모양이다. 그러나 무엇보다 우선, 많은 피해자들과 젊은 문학인과 독자들에게 미안한 마음을 갖고, 가해자 또는 방조자됨을 진정으로 반성하고 사과해야 한다. 그래야만 그 ‘예술적’ ‘공적’의 일부라도 한국문학 교실에서 가르칠 수 있다.

사실 이미 한국문학사는 ‘불구하고’(일본어투라지만 문맥상 양해를)가 되었다. 표절에도 불구하고 작품성이 훌륭하다, 일본을 위한 전쟁에 죽으라 선동했음에도 소설은 좋다, 이승만·박정희가 한 모든 일과 전두환을 찬양하는 시를 썼음에도 불구하고 모국어의 마술사다, 상습 성추행범이었음에도 뛰어난 예술가며 민족 시인이다. 이런 한국 현대문학사란 도대체 무엇일까? ‘문학이라는 질병’(‘도쿄제국대학 문학부 엘리트들의 체제 순응과 남성 동맹’이라는 부제가 붙은 다카다 리에코의 책 제목에서 빌림)은 또 얼마나 독한 것인가?

이번에 상습범으로 지목된 시인은 1970년대에 이문구·백낙청 등과 함께 야만적 유신독재뿐 아니라, 어용화된 서정주·조연현 등의 문인협회와 싸워 한국문학의 기풍과 정신성을 바꿨었다. 그 싸움과 정신의 중요 구성부분을 ‘민족문학’이라 경칭해왔다. 민족문학은 식민 지배와 내전, 분단을 겪은 가련한 한반도 종족과 민중의 문화 이념이자 운동이었다. 그런데 민족문학은 민주화의 부분 성공과 문단 헤게모니의 교체 이후에 주류·정통의 자리에 놓였다. 바로 거기서 많은 모순과 불행이 배태됐다고 생각한다. 그가 계속 가장 유력한 노벨상 후보로 거명되었던 것은 민족문학의 한 상징이었기 때문이다. 최영미 시인이 경험한 폭력은 1990년대 민족문학의 제도적 구현체와 직간접 관계가 있다. 폭로 이후 SNS에서 2차 가해성 글을 쓴 또 다른 시인도 민족문학작가회의의 활동가였다 한다. 이념과 운동으로서의 민족문학은 21세기에 들며 자연사하다시피 했는데, 이렇게 또 스스로 면류관을 벗고 역사의 뒤안길로 스러진다.

그럼에도 이 지구에는 한국어로 생각하고 노래하고 이야기를 짓는 사람들이 여전히 몇 천만명이니, ‘민족의’ 문학이나 한국어 문학은 또 이어질 것이다. 새로운 공동성과 규범이 절실하다. ‘문학이라는 질병’을 넘는 문학인의 네트워크나 문화가 곧 도래할 것이다. 여성들과 젊은 세대가 할 것이다.

<천정환 | 성균관대 교수·국문학>

Related Posts Plugin for WordPress, 

Blogger...
Posted by KHross

소설가 김명순(1896~1951)은 1917년 단편 ‘의심의 소녀’를 발표하며 등단한 한국 최초의 여성 작가다. 1920년대 문예지 ‘창조’의 동인으로 활동했던 김명순은 문학적 재능이 탁월했던 작가로 평가받았다. 하지만 김동인·전영택·김기진 등 당대의 유명 남성 작가들에 의해 ‘퇴폐 여성’으로 낙인찍히며 문단에서 사장됐다. 김명순은 소설 &lt;탄실이와 주영이&gt;를 통해 일본 유학 시절 성폭행을 당한 사실을 폭로했다. 그러자 김기진은 김명순에게 “성격이 이상하고 행실이 방탕하기 때문”이라며 인격살해를 가했고, 전영택은 “탕녀”라는 극언을 퍼부었다. 당시 김명순에게 남성 작가들은 ‘문단 내 괴물’과도 같은 존재였다.

여성혐오와 성차별은 한국 문단의 뿌리깊은 병폐다. 여성 작가에 대한 성폭력도 어제오늘의 일이 아니다. 2016년 10월 해시태그 운동 ‘#문단_내_성폭력’은 문화예술계를 뒤흔들어 놓았다. 당시 문단 내 성폭력 피해자들이 모인 트위터 계정 ‘고발자5’의 폭로는 충격적이었다. ‘고발자5’는 고교 문예창작 실기교사였던 배용제 시인에게 성폭행을 당했다고 폭로했다. 제자에게 몹쓸 짓을 저지른 배 시인은 “네가 문학에서 벽을 마주하는 이유는 틀을 깨지 못해서 그렇다. 탈선을 해야 한다”고 했다. ‘고발자5’의 폭로가 있은 뒤 ‘#문단_내_성폭력’ 해시태그 운동은 온라인에서 오프라인으로 번지며 성폭력이 만연한 한국 문단의 추악한 실태를 고발했다.

최영미 시인이 ‘황해문화’ 2017년 겨울호에 발표한 시 ‘괴물’이 소셜미디어(SNS)를 통해 확산되면서 ‘문단 내 성폭력’ 고발운동이 재연될 조짐을 보이고 있다. 최 시인은 시 ‘괴물’에서 원로시인의 성추행을 폭로한 데 이어 6일 JTBC에 출연해 “(시에 언급된) 그는 상습범이다. 너무나 많은 성추행과 성희롱을 목격했고, 피해자가 셀 수도 없이 많다”고 밝혔다. 시 ‘괴물’에서 ‘En’으로 표기된 이름과 노벨문학상을 뜻하는 ‘노털상’으로 인해 가해자로 지목된 원로시인은 “잘못된 행동이라 생각하고 뉘우친다”고 했다. 한국 문단에는 아직도 성폭력을 일삼는 ‘괴물’들이 적지 않다. 최 시인이 시에서 언급한 대로 문학이란 이름을 더럽히는 ‘괴물을 잡아야’ 할 때다.

<박구재 논설위원>

Related Posts Plugin for WordPress, 

Blogger...
Posted by KHross