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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 2017.09.26 [조호연 칼럼]문 대통령의 전쟁과 평화

문재인 대통령은 연설을 잘한다. 취임사나 5·18 기념식 연설은 감명 깊었다. 적절한 언어 구사, 논리와 감성이 잘 버무려진 글에 진정성이 깃든 태도와 목소리가 강한 울림을 주었다. 문 대통령의 유엔 순방에서 가장 눈에 띈 것도 총회 기조연설이었다. 사실 도널드 트럼프 미국 대통령이 ‘북한 완전 파괴’를 거론했기 때문에 문 대통령이 연설에 어떤 메시지를 담을까 궁금했다. 염려하는 분위기도 있었다. 그런데 뚜껑을 열어보니, 준수했다.

문 대통령은 연설에서 균형 잡힌 언어로 다자주의와 평화를 말했다. 은연중이지만 연설문 곳곳에 미국의 군사행동에 반대한다는 메시지가 담겨 있었다. 감정적으로 미국 우선주의와 전쟁과 압박을 강조한 트럼프와는 확연히 달랐다. 트럼프를 자극하지 않는 방식을 구사한 것도 인상적이었다. 유엔이 표방하는 평화를 강조하면서 북핵의 평화적 해결을 호소한 대목이 특히 절묘했다. 트럼프가 좋아하는 로널드 레이건의 평화론을 동원한 것도 세심한 안배였다.

문재인 대통령이 21일(현지시간) 오전 미국 뉴욕 유엔본부에서 열린 제72차 유엔총회에서 기조연설을 하고 있다. 맨 앞줄의 북한 외교관들(왼쪽)이 문 대통령의 연설을 지켜보고 있다. 유엔본부 _ 연합뉴스

보수 야당들은 한·미 공조에 도움이 안되는 연설이라고 비판했지만 공연한 매타작일 뿐이다. 지금은 언제 한반도 전쟁이 벌어진다고 해도 이상하지 않을 만큼 정세가 험악하다. 이번 한·미 정상회담은 이명박·박근혜 대통령처럼 미국이 하자는 대로 복창하기만 하면 문제없던 시절의 정상회담과는 근본부터 다르다. 한국 대통령이 미국 대통령 앞에서 다른 목소리를 내는 것 자체가 큰 용기를 필요로 하는 일이다. 하물며 지금 미국의 대통령은, 북한 완전 파괴를 입에 올리는 ‘미스터 불확실성’ 도널드 트럼프 아닌가.

여기까지 문 대통령의 유엔 데뷔는 성공적이었다. 그런데 한·미 정상회담에서 문제가 발생했다. “트럼프 대통령께서 대단히 강력한 연설을 해줬는데, 저는 그런 강력함이 북한을 반드시 변화시킬 것으로 확신한다”는 모두발언이 문제였다. 문 대통령이 전쟁은 안된다고 연설한 직후 열린 정상회담에서 트럼프의 ‘북한 완전 파괴’ 연설을 높이 평가한 것이다. 트럼프는 이에 만족해하며 친근감을 표시해 회담 내내 화기애애했다고 한다. 정상외교에서 의례적인 덕담은 관행이지만 문 대통령의 발언은 덕담 수준을 넘어선 것이다. 트럼프의 연설 메시지는 문재인 정부의 대북정책 정체성을 부정하는 것이다. 정부의 대북정책은 양보나 협상의 대상이 돼서는 안된다. 외교적 립서비스 대상으로는 더더구나 적절치 않다. 

이를 모를 리 없는 문 대통령이 이를 비판하기는커녕 칭찬한 것은 이해가 안된다. 국가 수반으로서의 자존심을 훼손하지 않으면서 트럼프를 자극하지도 않는 발언은 얼마든지 가능하다. 그러지 않고 트럼프의 연설을 평가한 데서는 이명박·박근혜의 그림자가 어른거린다. 문 대통령의 단순 실수라거나 의도를 오해한 것이라고 할지 모르겠다. 그렇지 않다. 전조가 있기 때문이다.

트럼프 연설 직후 청와대는 “국제사회와 유엔이 당면한 평화와 안전 유지와 관련한 주요 문제에 대해 확고하고 구체적인 입장을 표명한 것”이란 논평을 냈다. 논평이라면 평가가 있어야 할 텐데 이 문장 어디서도 찾을 수 없다. 미국을 의식한 나머지 평가를 피했다고 보는 게 맞을 것이다. 이에 ‘6·15 공동선언실천 남측위원회’는 “주권과 평화를 지켜야 할 정부가 미국에 굴종하는 굴욕적이고 한심한 태도의 극치”라고 강력 비난했다. 이를 계기로 대미 굴욕외교 논란이 벌어지기도 했다. 한 언론인의 “평화를 위해서라면 미국이 기라면 기고 짖으라면 짖어야 한다”는 페이스북 글에 트럼프 연설 논평이 마중물 역할을 했다. 6·15남측위의 청와대 비판 수위는 지나쳐 보이지만 비판 자체는 일리가 있다.  

북·미 간 대치가 심화되면서 어느 순간부터 문재인 정부의 외교안보는 길을 잃었다. 한반도 평화를 위한 큰 그림을 제시하고 돌발 상황이 발생하더라도 그 틀 속에서 일관성을 잃지 않고 전략적 대응을 하는 대신 즉흥적 대응만 하고 있다. 한·미동맹에만 의존하는 자세도 지나치다. 전쟁을 막기 위해서는 무엇이든 할 수 있다는 자세부터 문제다. 전 세계로부터 혹평을 받은 트럼프 연설에 대한 높은 평가도 이런 기조 속에서 나온 것이다. 하지만 위기 대응을 핑계로 남북관계 원칙을 훼손한다면 추후 기회가 온다 해도 운신의 폭이 좁아질 수밖에 없다. 핵잠수함 등 첨단무기 도입과 ‘세컨더리 보이콧’ 등 적어도 한반도 평화나 대북기조에서는 불가역적 조치를 최대한 자제할 필요가 있다. 

문재인 정부는 지금 ‘전쟁’을 치르고 있다. 전쟁 방지와 한반도 평화가 목표일 것이다. 그런데 겉으로 드러난 행적만 보면 무조건적인 미국 추종밖에 없다. 정부에 묻는다. 어느 쪽이 진짜 얼굴인가.

<조호연 논설위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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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osted by KHross