드라마 <미스터 션샤인>의 남자 주인공은 구한말 노비로 태어나 미국에서 성장한다. 그가 가장 많이 받았던 질문은 “어디서 왔느냐?(Where are you from?)”였다. 이방인인 그는 이 질문이 고통스럽다. 이런 종류의 질문은 ‘모르는 것을 묻는다’는 평범한 의미가 아니다. “여기는 내 땅인데, 너는 어디서 왔니”라는 뜻이다. 익숙한 논리다. 어린 시절 어깨동무를 하고 편을 갈라 주고받던 “우리 집에 왜 왔니~ 왜 왔니~”, 이 노래가 시작이었을까.

공부는 질문하는 방식을 배우는 것이다. 혹은 공부하다가 이해가 안되는 부분을 선생님에게 물어 도움을 요청하는 노동이다. 이 외의 모든 질문은 권력 행위다. 타인에 대한 물음은 호기심에서부터 신문(訊問), 힐난, 비난까지 다양하다. 묻는 자의 정체나 위치는 드러나지 않는다. 그렇기 때문에 말 한마디로도 묻는 자의 교양, 인격, 무지, 태도를 알 수 있다. “어쩌다 동성애자가 되었나요?” “자네는 어느 대학을 나왔나?” “왜 아직도 취직을 못했나?” “여자가 왜 이런 일을?” 이런 질문은 질문이 아니라 인권 침해다.

일러스트_김상민 기자

인간은 완전하지 않다. 우리는 수시로 이런 질문에 노출되기도 하고, 자신도 모르게 저지르기도 한다. 나는 어디에, 상대는 어디에 ‘서’ 있는지, 내가 하는 질문의 의미는 무엇인지…. 이것이 평생의 화두여야 한다.

당연시되고 고착된 질문은 폭력이다. 가장 괴로운 질문은 답이 정해져 있는 질문일 것이다. 고문이 대표적이다. 내가 생각하는 가장 일상적이면서도 폭력적인 질문은, 가해자(피의자)에게 할 질문을 피해자에게 하는 경우다. 성폭력 범죄가 그것이다. 조사를 가장한 피해자 비난, 여론 재판…. 유아 성폭력이거나 가해자가 여러 명인 사건을 제외하곤(?) 피해자가 질문에 시달린다. 피해자는 목숨을 건 저항 여부나 거절이 얼마나 단호하고 절절했는지, 특히 자신이 얼마나 피해자다웠는지 최대한 증명해야 한다.

1991년부터 성폭력특별법이 제정, 개정되는 과정에 참여해온 나는 전 충남도지사 사건을 통해 법정에서는 변화가 ‘없다’는 사실을 깨달았다. 27년이다. 게다가 올해 봄, 들불과도 같았던 미투 운동에도 불구하고 여전히 피해자의 동의와 저항에 관한 질문은 집요하다.

이제는 동의, 저항 여부 자체가 쟁점이 되어서는 안된다는 생각이 든다. 가해자에게 질문하자. 절도나 사기사건, 즉 다른 형사사건의 피해자에게 성폭력 피해자만큼 질문하는가? 아니, 사건 발생을 증명하라고 요구하는가? 일단, 법정은 가해 용의자에게 질문하는 공간이다. 그러나 우리 사회는 성폭력 피해자에게 궁금한 것이 너무 많고, 뭐든지 질문해도 된다는 권리의식을 가지고 있는 듯하다.

내가 아는 가정폭력 피해자는 40년 동안 남편의 폭력에 시달리다 환갑에 이르러 이혼 소송 중이다. 처음에는 데이트 폭력으로 시작됐다. 주변에서는 모두 결혼하면 나아진다, 아들이 있으면 그만둘 것이다, 아이가 대학에 가면… 아이가 결혼하고 손자를 보면… 결국 그녀는 스무 살에 만난 한 남성에게 평생을 구타당했다.

문제는 “고쳐진다”는 통념을 수용한 피해 여성이 남편의 폭력을 해결하기 위해 결혼을 서두르는 등 상황을 ‘주도’했다는 것이다. 그러나 법정에서는 통념과 반대 상황이 벌어졌다. 왜 때린 사람과 결혼했느냐, 왜 경찰에 신고를 안 했느냐, 얼마든지 탈출할 수 있었는데 왜 이제야 이혼하려고 하느냐, 혹시 다른 이유(돈, 남자…)가 생긴 것은 아니냐는 질문을 받았다.

피해 여성이 폭력적인 상황을 벗어나지 못하는 ‘이유’는 당사자마다 다르고, 제3자는 상상할 수 없을 정도로 다양하다. 그리고 무엇보다 피해자는 이 질문에 대답할 의무가 없다. 다른 방식의 접근이 필요하다. 사회운동은 생각의 틀을 바꾸는 것이다. 성별 권력관계는 더욱 그렇다. 가해자에게 질문하는 반성폭력 운동을 제안한다.

우리는 가해자에게 물어야 한다. 왜 여성을 때렸습니까? 아내를 ‘교육시킨다’면서, 교육만 시키지 왜 죽였습니까? 안 때린다고 공증까지 했으면서 왜 또 때렸습니까? 술을 마셔서 때린 게 아니라 때리기 위해 술을 마신 거 아닌가요? 술을 마시고도 아내를 때리지 않는 남성이 훨씬 많습니다!

왜 비서에게 개인적인 심부름을 시키고 돈을 지불하지 않았습니까? 왜 안마를 요구했습니까? 왜 수시로 초과노동을 시켰습니까? 왜 해외 업무에 동반했습니까? 왜 평소엔 여성인권 운운했으면서, 이중적 태도를 보였습니까? 왜 자신의 성폭력 재판에 부인이 나왔죠? 본인이 생각하는 성폭력과 성관계, 사랑의 관계는 무엇입니까? 피해자와 사귀지도 않았으면서 왜 불륜이라고 거짓말했습니까?

권력관계에서 발생한 폭력과 관련한 질문 내용은 그 자체로 가해자의 시각에서 구성한 것이다. 위력의 행사가 자연스럽다고 믿는 사회에서는 가해자의 행동이 궁금하지 않다. 대신 피해자의 대응이 의문시될 뿐이다. 피해와 피해 이후의 심문. 약자는 어떻게 살아야 하는가. 법의 존재 이유를 다시 묻는다.

<정희진 | 여성학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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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 차에는 각시만 태운다.” ‘미투’ 운동이 전 사회적으로 확산되는 와중에 홍준표 자유한국당 대표는 이렇게 고백했다. 지난 대선에서 ‘돼지발정제’로 곤욕을 치른 그로서는 불똥이 튀지 않도록 사전 방어막을 칠 필요가 있다고 생각한 모양이다. 정몽구 현대차그룹 회장이 부인과 사별한 후 가사도우미를 남성으로 교체한 것과 비슷한 심리라고 하겠다. 성폭력 가능성을 아예 차단하기 위해 여성과의 접촉을 최소화하는 ‘펜스 룰’이 사회현상으로 번질 태세다.

회식이나 출장에서 여성들을 배제하고, 여직원을 대면하지 않고 사내 메신저로 업무지시를 하는 경우도 늘고 있다고 한다. 하지만 이는 자기들만 피해 보지 않으면 그만이라는 일부 남성의 이기심의 발로일 뿐이다. 이렇게 하면 성폭력 피해는 줄어들지 모르지만 여성들이 또 다른 피해를 입는 것을 막을 수 없게 된다. 공식·비공식 교류와 접촉에서 배제되고 소외된 여성들은 제대로 사회경력을 쌓을 수 없기 때문이다. 펜스 룰은 여성을 유교의 덫에 가둔 조선시대로 돌아가 남성 위주 사회를 더욱 공고히 하자는 얘기나 다름없다. 본디 성폭력은 여성을 성적 대상으로 간주하고, 물리력과 권력으로 여성의 성을 소유할 수 있다는 남성 위주 성문화의 소산이다. 성폭력을 없애기 위해 성차별을 강화한다면 이는 빈대 잡기 위해 초가삼간 태우는 격이다.

애초 펜스 룰이란 말은 여성을 사회적 관계에서 배제한다는 뜻이 아니었다. “아내가 아닌 여성과 단둘이 저녁을 먹지 않는다”는 마이크 펜스 미국 부통령의 인터뷰 발언에서 나왔지만, 이는 언행을 신중히 하겠다는 의도였다. 같은 인터뷰에서 “남성과의 술자리에서도 몸가짐을 조심하겠다”고 한 것만 봐도 그것을 알 수 있다. 펜스 룰의 원전으로 알려진 ‘빌리 그레이엄 룰’도 그레이엄 목사가 물적, 성적 유혹에 빠지지 않기 위한 자기수양적 규칙이었다. 그랬던 것이 태평양을 넘어오면서 엉뚱한 의미로 변질된 것이다.

미투 운동은 만연한 성폭력을 퇴치하고 강고한 성차별 문화를 허물기 위한 혁명으로 가고 있다. 성평등 사회, 정의로운 사회로 나아가려면 오염된 언어도 바꾸는 게 맞다. ‘펜스 룰’ 대신 ‘서지현 룰’로 쓰면 어떨까.

<조호연 논설위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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진즉에 바꿨어야 했던 악폐가 악폐로조차 인식되지 않는 사회에 대해 여성들이 #MeToo를 통해 ‘변해야 한다’고 외치고 있다. 개인의 피해를 말하는 방식이지만 여성들은 ‘몇몇 괴물이 아닌 구조를 바꾸겠다’고 나섰다.

지난 2월22일(현지시간), UN 여성차별철폐협약(CEDAW) 제8차 한국정부보고서 심의가 있었다. 정현백 여성가족부 장관을 단장으로 한 8개 부처(여성가족부, 법무부, 고용노동부, 교육부, 외교부, 보건복지부, 인사혁신처, 경찰청) 대표단이 참여했다. 나는 한국정부 심의 대응을 위해 꾸려진 NGO 참가단 일원으로 현장에 있었다. 

4일 서울 광화문광장에서 열린 ‘3·8 세계여성의날 기념 제34회 한국여성대회’에 참석한 시민들이 성폭력을 고발하는 ‘미투 운동’을 지지하고 성평등 실현을 촉구하는 집회와 행진을 하고 있다. 정지윤 기자

여러 언론에 보도된 것처럼 많은 CEDAW 위원들이 한국의 여성인권 상황을 우려하며 한국정부의 해결 의지에 대해 질타했다. 현장에서 느낀 CEDAW 위원들의 분노 포인트는 한국정부의 태도였다. 8개 부처 대표단이라지만 여성가족부를 제외한 부처는 대체로 사무관급으로 구성되었다. 책임 있는 답변을 할 수 없었던 이들은 준비한 답변을 앵무새처럼 읽기만 했다. 

한국의 강간 기준이 국제사회 기준인 ‘동의 부족’보다 엄격한 항거 불가능할 정도의 폭행과 협박을 요구하기 때문에 피해자들이 적절한 법의 보호를 받지 못하는 현실을 개선해야 한다는 요구에 법무부 하급 사무관이 무슨 답을 할 수 있는가? 피해자를 침묵하게 하는 무고나 명예훼손 등 2차 피해를 막기 위해 한국정부가 무엇을 하겠다는 답을 이들이 감히 할 수 있는가? 나는 한국정부의 이런 모습이 근본적인 구조를 바꾸자는 여성들의 외침에 대한 응답의 현실이라고 느껴져 실망스러웠다.

#MeToo는 제대로 된 처벌구조가 없고 성차별이 만연한 한국사회가 만든 현상이다. 여성들이 피해를 말했을 때 분명한 처벌이 약속된 사회라면, 여성이 동등한 사회구성원으로서, 동료로서 존중받는 사회라면 #MeToo가 생겼을 리 없다. 법을 다루는 검사가 범죄인지 몰라서 공개된 장소에서 성추행을 했겠는가? 지켜본 검사들도 범죄인지 몰라서 현행범을 그대로 방치했겠는가? ‘몰라서’ 문제가 아니라 할 수 없게 하는 구조와 권력이 문제라는 여성들의 외침에 정부는 당장의 불 끄기에 여념이 없고 보수야당은 #MeToo를 불쏘시개 삼아 정치적으로 이용하려 하고 있다. 음모론자들과 선정적 보도를 통해 #MeToo를 상품화하는 일부 언론들은 #MeToo의 의미를 왜곡·훼손하고 오히려 문제를 악화시킨다.

원천적으로 문제를 최소화할 수 있는 형법개정 권한을 가진 법무부나 국회가 역할을 하지 않는 상황에서, 고용노동부가 손 놓고 있는 상황에서 여가부의 피해자보호 대책은 사후약방문일 수밖에 없다. ‘괴물’이나 하급 직원, 여가부 등 작은 권력에 책임을 떠넘기거나 변죽만 울리는 방식으로는 구조를 바꿀 수 없다.

이제 청와대가 책임 있게 나서야 한다. 성차별적인 고용, 노동, 교육, 문화 등 모든 영역에 대한 총체적인 접근 없이 구조를 바꾸는 일은 불가능하다. 악폐인 성차별적 구조를 바꾸겠다는 분명한 의지로 모든 부처의 역량을 총망라하는 추진체계를 짜야 한다. 근본적인 해결을 위해서는 이미 알고 있고 약속한 대통령 직속 성평등위원회를 마련하고 인적·물적 자원의 충분한 배치와 명확한 책임과 권한의 분배 등을 통해 확실하게 집행할 수 있는 조건을 만들어야 한다.

<김민문정 | 한국여성민우회 대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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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끝없는 미투 폭로… 문화행사 차질로 시민도 피해자.” 뉴스를 보려고 TV채널을 돌렸다가 화면에 찍힌 자막에 깜짝 놀라고 말았다. 앵커의 말이 이어졌다. “전국 각 분야에서 미투 폭로가 그칠 줄 모르고 이어지고 있습니다. 유명 문화예술인들의 성추문 폭로로 문화예술 행사도 차질을 빚으면서 성폭력 피해 당사자뿐만 아니라 시민들도 피해를 보고 있다는 지적입니다.”

똥인지 된장인지 못 가린다는 탄식이 절로 입에서 새어나왔다. 이제는 고통을 말할 자유도 없구나. 저 앵커와 기자는 도대체 무슨 생각을 하는 것일까? 성폭력 피해가 피해 당사자뿐 아니라 시민에게까지 미친다는 것을 강조하려는 말일까? 아무리 새겨들어도 미투 폭로가 가해자 아닌 애먼 시민에게 손해를 입힌다는 뜻으로밖에 들리지 않았다.

SBS '김어준의 블랙하우스'의 출연진 언론인 김어준이 노트북 화면을 보고 있다.

너무나 익숙한 논리. 하지만 너무나 얄팍한 사고방식. 자연스럽게 지난주 소셜미디어 공간을 달궜던 김어준씨의 발언이 떠올랐다. “공작의 사고방식으로 보면 미투 운동이 정치적 공작에 이용될 가능성이 예상된다”는 말은, 그가 해명한 대로 미투 운동이 훼손될까 염려한 발언이었다 해도 절대 해서는 안 되는 말이었다. 발언의 논리는 이러했다. 미투 운동이 우리 편을 겨냥하는 데 이용됨으로써 의도하지 않은 결과를 낳을 수 있다, 심지어 우리 편을 음해하려는 가짜 폭로도 예상된다, 이 모든 원망이 미투 운동에 돌아갈 수 있으니 운동 자체를 위해서라도 신중해야 한다, 다 미투를 위한 말이다….

조직을 위하여, 너 자신을 위하여, 애먼 사람에게 돌아갈 피해를 생각하여…. 이 논리들은 ‘당신 자신이 다시 피해를 입을까 염려되어’라는 배려의 얼굴로 다가온다. 바로 그런 걱정 때문에 성폭력 피해자 대다수가 모진 고통의 기억을 발설하지 못하고 혼자 견뎌내고 있다는 것을 무시한다. 무지하다고 할까. 그럼에도 이런 몰이해를 드러내는 것은 당사자가 아니기 때문이다.

공동체의 이익이 개인에 우선한다는 사고는 19세기로 거슬러 올라간다. 공리주의라는 사고방식이다. 사회가 ‘최대 다수의 최대 행복’을 위하는 방향으로 움직여야 한다는 이 명제는 언뜻 보면 공동체를 위한 자명한 논리처럼 여겨진다. 사회를 하나의 단위로 보고 구성원이 누리는 행복의 총량을 그 사회의 윤리적 지표로 삼을 수 있다는 생각이다. 그러나 행복과 고통이라는 주관적 경험을 동일한 양적 기준으로 계산하기는 어려운 법. 이런 함정 때문에 존 롤스는 ‘차등의 원칙’이라는 해법을 제시했다. 구성원의 행복이 아닌 고통을 기준으로 하여, 사회는 고통받는 이에 대한 보상을 우선함으로써 전체의 행복을 늘릴 수 있다는 것이다. 이런 원칙은 ‘침해의 최소화 원칙’으로 구체화되어 현행법에도 일부 채택되고 있다. 공공 목적을 위한 사유재산 침해를 보상하거나 일조권을 보장하는 것이 그런 것들이다.

그러나 나는 이런 합리적인 해법들조차도 어쩐지 불편하다. 행복은 나눌 수 있지만 고통은 나눌 수가 없고, 당사자의 고통은 어떤 방식으로도 보상할 수 없다는 생각 때문이다. 당사자가 아닌 우리는 기껏해야 위로할 수 있을 뿐이다. 철학에서는 ‘너의 고통을 느낀다’는 말을 성립 불가능한 진술로 본다. 고통의 유일무이한 특징 때문이다. 바늘로 찔린 사람의 고통은 그의 찌푸린 표정으로 짐작할 뿐 내가 느끼는 고통은 아닌 것이다. 행복해하는 사람으로 말미암아 덩달아 내가 즐거운 행복감에 휩싸이는 것과는 달리 말이다. 그래서 실존주의 철학자들은 이 유일무이한 고통의 경험이야말로 실존의 증거이고 다른 무엇으로도 환원할 수 없는 사실이라 보았다.

미투 폭로의 당사자들이 겪는 고통을 나는 알 수가 없다. 내가 느꼈던 다른 고통에 비추어 짐작하거나 공감할 수는 있지만, 당사자가 느꼈을 유일무이한 고통을 느낄 수는 없기 때문이다. 집단의 행복으로 개인의 고통을 보상할 수는 없다. 집단의 행복이 개인의 고통을 참아야 하는 이유가 될 수도 없다. 그러므로 또 다른 개인인 내가 할 수 있는 일은 다만 위로하고 응원하는 것뿐이다.

미투 운동에 따라붙는 이런저런 입방아에는 묘한 공통점이 있다. 첫째는 전지자 시점이다. 마치 다 알고 있다는 듯이 피해자들을 하나의 사건 내지 사물로 대상화하고 평가한다. 피해자의 말투, 인상, 과거 행적까지 동원하여 허구의 그림을 완성한다. 이 관점은 둘째, 음모론적 시각으로 이어진다. 피해자의 의도와 목적과 앞으로의 가능성까지 따져서 존재하지 않는 사실을 사실처럼 확정한다. 가능성으로 따진다면야 우리는 모두 죽을 가능성의 존재다. 그러기 전에 당장의 현실에 대해 한번이라도 함께 눈물을 흘리는 편이 낫지 않은가.

<안희곤 | 사월의책 대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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