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미투(#MeToo) 운동'에 해당되는 글 1건

  1. 2018.03.02 그들의 꿈을 짓밟지 마세요

“다른 예술 분야의 유명인들이 국악을 활용해 많은 작품을 만드는 것을 돕고 싶다”던 한 유명 드러머는 자신의 연주에 참여할 예정이었던 한 젊은 여성 국악인을 불러놓고 음탕하게 협업할 요량으로 옷을 벗으라고, 가슴을 보여달라고 한다. 연기를 가르쳐주겠다던 한 유명 배우는 한 여성 연기 지망생을 모텔로 데리고 가 어느 저질 드라마의 대사처럼 “더운데 씻자”고 한다. 한국문학의 우수성을 세계에 보여주겠다던 한 노 시인은 술집 의자에 누워 바지를 벗고 자신의 아랫도리를 주무르며 옆에 있는 어린 여성 문인들에게 “니들이 여기 좀 만져줘”라고 한다. 학점을 주겠다며, 유명하게 만들어주겠다며, 진정한 연기가 무엇인지를 보여주겠다며, 음흉한 미끼를 던지는 상층부 남성 문화예술계 권력자들은 국악을, 연극을, 시를 그렇게 자신의 욕정을 채우는 데 사용했다. 그 선생을 존경해서 그 학교 그 과에 입학했다고 고백한 어느 여학생에게 돌아온 것은 차마 말할 수조차 없었던 치떨리는 선생의 희롱과 음욕이었다.

한국여성민우회 주최로 23일 서울 신촌 유플렉스 앞 광장에서 열린 ‘달라진 우리는 당신의 세계를 부술 것이다 - 강간문화의 시대는 끝났다’ 공개 발언대회에 참석한 여성들이 성폭력에 반대하는 손팻말을 들고 있다. 김영민 기자 viola@kyunghyang.com

그것도 한때의 낭만이라고, 창작을 위한 상스러움이라고 말하던 시대는 끝났다. 가해자 행동이 ‘낭만이자 자유’라고 말하던 시간은 더 이상 존재하지 않는다. 그들은 대가를 치러야 하고, 처벌을 받아야 하고, 예술계에서 떠나야 한다. 그리고 그 폭력의 자리에 있었던 너와 나, 상습적인 성희롱을, 분위기 살리는 음담패설로 관대하게 웃어넘기려 했던 우리들, 그 민망한 상황을 차라리 회피하고 싶어 했던 동료들, 그 아픈 기억의 고백을 손쉽게 위로하려 했던 누군가들. 우리 모두 이 사태의 우울함과 엄중함에서 자유롭지 못하다. 우리 모두 상상의 가해자는 아니었을까? 우리 모두 뼈저리게 통감해야 한다. 피해자는 우리의 동료이고, 동지이며, 미래의 벗이기 때문이다.

젠더폭력은 계급폭력보다 더 오랜 역사를 가지고 있다. 그것은 다른 어떤 폭력보다도 근원적이고 원초적이다. 그래서 그것은 정치적 당파의 유불리를 가늠하는 방어적 센서가 아니다. 김어준의 ‘웃긴 변명’대로 작금의 ‘미투(#MeToo) 운동’이 설령 보수진영의 공작으로 이용된다한들, 그 운동이 공작일 수는 없다. 문제는 그 어떤 것으로 환원될 수 없는 ‘미투 운동’ 그 자체이다. 김어준의 발언이야말로 젠더폭력을 정치적 이해관계로 환원하려는 정치적 음모이며, 그가 그동안 세상을 공치사하며, 살아온 정치적 음모론의 졸렬한 연장이자, 성폭력 피해자의 자기 고백에 대한 마초들의 인습적인 아전인수에 불과하다. 그 정도는 나도 안다. 그것은 예언이 아니라 망언이다. 이 와중에 보수진영의 공작을 운운하는, 그런 나라 걱정을 하는 진보라면 차라리 분쇄되는 게 낫다. 정치적 진보로 젠더폭력의 현실을 정당화할 수 없다. 오히려 그 정당화의 역사가 상층부 진보적 남성 문화예술 권력의 민낯을 은폐했던 것은 아니었을까?

지난 수요일 한국예술종합학교의 2018학년도 입학식이 있었다. <숲속으로>라는 유명한 뮤지컬 영화의 동명 제목으로 시작된 한국예술종합학교 새내기들의 힘찬 출발의 예식은 동명 뮤지컬의 주제곡을 개사해서 연기과 학생들이 멋지게 부르는 것으로 마무리되었다. 예술의 숲속으로 들어가는 새내기들, 그들에게 예술의 숲은 무엇일까? 그 숲속에서 어떤 일들이 벌어질까? 예술의 원대한 꿈을 품고 시작하는 그들에게 숲은 포근하고, 아늑하며, 상쾌한 산소를 뿜어내는 어머니의 품 같은 곳이어야 할 텐데. 그런데 그 숲이 예술 새내기들에게 공포의 밀실이자, 어둠의 속이 된다면, 숲은 그들을 집어삼키는 포식자의 소굴이다. 예술의 숲속으로 이제 막 들어가는 그들에게, 이미 그 숲속에서 들어갔다 길을 잃고 발버둥치는 그들에게 숲이 진정 그들의 안식처가 되려면 숲은 생태적 윤리의 미학을 위해 스스로 이렇게 명령해야 한다. “그들의 꿈을 더 이상 짓밟지 마세요.”

<이동연 한국예술종합학교 교수>

'일반 칼럼 > 세상읽기' 카테고리의 다른 글

독(獨) 깨는 개헌  (0) 2018.03.08
‘검찰 기소독점’이 개헌의제로 손꼽힌 이유  (0) 2018.03.06
그들의 꿈을 짓밟지 마세요  (0) 2018.03.02
동맹의 변주  (0) 2018.02.27
다시 조직사회와 개인  (0) 2018.02.23
‘미투’ 운동에 대하여  (0) 2018.02.20
Related Posts Plugin for WordPress, 

Blogger...
Posted by KHross