선거민주주의란 것이 민의를 표현하기 전에 먼저 대리인을 자처하는 자들의 수준을 끝없이 확인해야 한다는 것은 고역이다. 더구나 과연 이것이 민주적인가? 민의와 상관없이 그 민의를 대표할 대리인들이 선정되는 것이. 무엇이 저들을 대선후보라고 정했는가? 여론조사? 지지율? 과연 그것이 민의를 얼마나 반영할까? 한국의 정치인 지지율 조사가 얼마나 그릇되고 조작되고 바람몰이용인지는 이미 지난 18대 대선에서 충분히 폭로된 바 있다.

결국 대의민주주의로 불리기도 하는 자유민주주의는 선출된 자들(the elected) 가운데 고르기 게임이다. 즉 ‘자격 갖춘 자들’(the elite) 중에서 고르는 정치게임. 1987년 헌법으로 재개된 대통령 직선제도 마찬가지다. 내 주권은 선거일과 선거일을 앞둔 얼마 동안만 작동한다. 그리고 그 이전에 나는 내가 원하는 후보감이 없는 것도 참아내야 하고, 내가 주인이라는 사실도 잊어야 한다. 지금도 이른바 주권자들은, 어느새 촛불 든 자발적이고 다양하며 역동적인 시민들에서 촛불 든 방청객이 되고 있다. 주말마다 촛불 들고 광화문 콘서트에 모이는 관중들. 일부에서 제도권과 촛불권력, 혹은 의회권력과 시민권력의 관계를 두고 ‘이중권력’으로 개념화하려는 시도가 있었다 하지만 이는 국회와 사법권력, 그리고 촛불권력이 제로섬 게임이 아니라 시너지효과를 내야 한다는 규범적인 언명에 불과하다. 왜 규범적이냐면? 현실의 정치사를 보면, 제도정치와 사회운동정치, 아니면 의회권력과 ‘민중권력’, 지금은 또 이름을 바꿔 의회권력과 ‘시민권력’이라는 양대 정치가 긍정적이고 생산적인 관계를 맺거나, 양자가 유지 존속하면서 상호 성장한 경우는 거의 찾기 어렵다. 양자는 대립 혹은 경쟁적인 동원의 관계다. 이것은 사회운동론이 주로 규명해온 수수께끼이기도 하다.

1일 서울 광화문에서 열린 ‘박근혜 정권 퇴진 비상국민행동’ 주최 박근혜 대통령 탄핵 촉구 집회 참가자가 노란 리본이 깃봉에 달린 태극기를 들고 있다. 이준헌 기자

그리고 이 점이 더 중요한데, 그렇게 되는 이유가 바로 양자 동원체제의 효과나 작동기제 탓이 아니라 그들이 터를 두고 있는 민주주의의 성격 탓이라는 점이다. 자유민주주의는 직접민주주의를 거세하면서 의회민주주의라는, 한때는 반민주적 장치로 불렸던 정당정치에 기초한 대의제를 유일한 민주주의로 만들어낸 정치체제다. 그렇게 자유주의를 민주주의가 안았기 때문에 자본주의는 민주주의를 받아들였다. 그러므로 지금 의회민주주의의 신봉자들이 광장권력과 제도정치의 시너지와 이중권력 상태를 유지하자고 주장하는 것은, 그것 자체가 불가능한 테제이며, 혹은 광장권력을 통해 의회권력을 장악하거나 의회권력으로 진출하려는 욕망의 정치적 표현일 뿐이다. 그래야 대중은 스스로 주권자라고 생각하고 열심히 스스로를 정치적 주체로 동원한다. 하지만 딱 거기까지. 동원은 선거로 이어주는 동력이고, 선거는 대중의 주권을 제도적 대리자들의 대의정치로 전화시키고, 대중은 다시 장외로 퇴출되거나 아니면 제도화된다. 벌써부터 정권교체 이후 ‘대중’의 동원이 불러올 혼란과 환멸을 걱정하는 목소리들이 터져 나온다.

그렇다면 촛불 이후에 올 것들은 무엇일까? 여러 얘기가 가능하겠지만 미국의 오큐파이운동에 대한 지젝의 인용으로 마무리하련다. “여러분 자신을 사랑하는 길로 빠지지 마십시오. 우리는 지금 유쾌한 순간을 맞고 있지만, 축제를 여는 데는 그렇게 돈이 들지 않는다는 사실을 명심하세요. 중요한 건 축제가 열린 그 다음날입니다. 우리가 저마다 평범한 일상으로 돌아갔을 때 무언가 변화돼 있을까요?”

지금 특검의 마지막 브리핑에 귀를 쫑긋하고, 다음주 헌법재판소의 탄핵인용 여부로 세상을 행과 불행으로 나누고자 한다면 당신은 많이 불행하고 자괴감에 빠질 것이다. 환멸과 희망은 한 끗 차이다. 어느 쪽으로 풀썩 넘어지는가, 아니 풀썩 넘어지지 않고 그 자리에서 떠나지 않고 버틸 것인가? 촛불이 촛농으로 흘러내려 지저분한 얼룩이 되지 않으려면 촛불은 버텨야 한다. 투표함이 아니라 이 광장에서. 그리고 나아가야 한다. 99%가 사는 길은 법관의 판결이 아니라, 민주주의를 둘러싼 투쟁이다.

권영숙 | 노동사회학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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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국민들이 선거 날만 주인이 되고 투표가 끝나면 다시 노예로 돌아가는 제도.” 사회계약론으로 유명한 18세기 철학자 장 자크 루소는 현대정치, 현대 민주주의를 대표하는 대의 민주주의를 이렇게 비판한 바 있다. 최근 온 나라를 뜨겁게 달구고 있는 ‘박근혜·최순실 게이트’와 촛불을 바라보면서, 정치학자로서 가장 자주 떠오르는 것은 이 비판이다.

그렇다. 2012년 12월19일 우리는 주권자로서 한 표를 던졌다. 그러나 그 이후 지난 4년 가까운 기간 동안, 다른 후보를 찍은 사람은 말할 것도 없고 박근혜를 찍은 사람들까지, 박근혜의, 아니 최순실의 ‘노예’에 불과했음이 만천하에 드러나고 있다. 국회는 어떠한가? 보수야당들조차도 분노의 촛불이 광화문에 넘쳐나기 전까지는 기껏해야 ‘질서 있는 퇴진’ ‘명예로운 퇴진’을 주장하며 몸조심하기에 바빴다. 박근혜의 지지율이 4%로 떨어지고 국민의 80%가 탄핵을 지지하고 있음에도 불구하고 새누리당 친박계는 아직도 탄핵에 반대하고 있다. 이정현·김진태 의원을 뽑은 순천과 춘천 시민들이 박근혜의 사수대 역할이나 하라고 이들을 국회에 보낸 것인가? 비박계 역시 오락가락하다가 지난 주말 촛불에 놀라 뒤늦게 탄핵 합류를 선언했지만, 언제 다시 마음이 변할지 모른다. 한국 대의 민주주의는 중병에 걸려있다. 만일 탄핵안이 국회에서 부결된다면 사망선고를 받는 것에 다름 아니다.

‘박근혜 정권 퇴진 비상국민행동’이 5일 서울 여의도 국회의사당 앞에서 개최한 촛불문화제에서 많은 시민들이 촛불을 들고 박근혜 대통령 탄핵 구호를 외치고 있다. 이준헌 기자

인구가 증가하고 사회가 복잡해지면서 우리는 대의 민주주의를 어쩔 수 없는 ‘현대정치의 유일한 대안’으로 간주해 왔다. 그러다가 최근 들어 문학의 ‘재현(representation)’ 논쟁이 불붙고 인터넷의 발달 등으로 직접 민주주의의 가능성이 커지면서 대의 민주주의에 대한 비판적 재평가가 간헐적으로 진행됐다. 재현이란 어떤 사물을 다시 형상화하는 것인데 재현이 대상을 그대로 표현할 수 없듯이, ‘대의’ 역시 불가피하게 민의의 왜곡을 가져올 수밖에 없다는 비판이 제기됐다. 박근혜·최순실 게이트는 이 같은 부분적 재평가를 넘어서 대의 민주주의를 근본적으로 다시 생각하게 만들었다.

물론 이번 촛불항쟁의 밑바닥에는 단순한 권력남용을 넘어 헬조선, 흙수저, 신분세습제에 대한 분노가 자리 잡고 있다. 그러나 논의를 정치 문제로 국한시킨다 하더라도, 우리의 문제는 단순히 박근혜를 몰아낸다고, 문제의 근원으로 지목되고 있는 ‘87년 헌정체제’(제왕적 대통령제)를 타파한다고 해결되지 않는다. 설사 내각제로 정부 형태를 바꾼다고 하더라도 탄핵 과정이 잘 보여주듯이 ‘국민을 대표하지 않는 대통령의 독재’를 ‘국민을 대표하지 않는 국회의 독재’로 바꾸어놓을 따름이다. 다시 말해 이번 문제의 핵심에는 루소가 고발한 대의 민주주의의 근본적인 문제점이 자리 잡고 있다.

촛불을, 광장을 주목해야 하는 진정한 이유는 바로 여기에 있다. 단순히 박근혜를 몰아낼, 아니 이미 몰아낸 힘이 거기서 나왔기 때문만이 아니다. 대의 민주주의를 넘어서는 새로운 계기와 가능성을 촛불과 광장이 제공하고 있기 때문이다. 박근혜 이후에 우리가 만들어야 하는 ‘새로운 공화국’의 단초들을 그 속에서 발견할 수 있다. 광장은 전국 1500개 시민사회단체가 밑으로부터 퇴진운동조직을 만들면서 시작된 것이다. 그러나 광장을 메우고 있는 것은 일반시민이다. 구체적으로 1500개 조직의 조직화된 참여자는 20만명 수준이며, 90%는 일반시민이다. 직접민주주의가 폭발한 것이다. ‘운동 내에서의 직접민주주의적 계기’들도 주목해야 한다. 주요 단체의 대표들이 단상에 포진하고 의례적으로 발언을 과점하는 ‘운동 내의 대의제’가 약화되고 참가자들이 자유롭게 발언권을 갖는 직접민주주의가 강화되고 있다. 일부 운동권의 돌출적 행동에 대해서도 대중들이 비판하고 규율하고 있다. 탄핵 결과와 상관없이 이제 민선공직자 소환제 강화 등 대의제 민주주의를 근본적으로 수술하고 직접민주주의적 기제들을 극대화해야 한다. 대의 민주주의는 죽었는가?

손호철 | 서강대 교수·정치학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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민주주의는 피를 먹고 자란다고 믿었다. 김주열의 피로, 경무대 앞에서 쓰러진 학생들의 피로 4·19혁명이 이뤄졌다. 박종철, 이한열, 그리고 자신의 몸을 불사른 많은 열사들의 피는 1987년 6월항쟁으로 이어졌다. 그렇게 자유를 위해 비상해 본 사람이면 안다. 자유에는, 민주주의에는 피의 냄새가 섞여 있다는 걸.

어느새 아득한 시절이 돼 버린 전두환·노태우 군사정권 시절. 학교엔, 거리엔 화염병과 최루탄, 쇠파이프와 곤봉이 난무했다. 그걸 당연시했다. 이렇게 온 목숨을 걸고 싸우지 않고는 독재정권을 무너뜨릴 수 없다고 믿었다.

요즘은 민주주의가 촛불을 먹고 자란다. 100만명, 200만명이 촛불을 들고 권력자를 쫓아내려는 집회와 행진을 이어가지만 경찰과의 충돌은 없다. 전두환·노태우 정권 시절엔 지금 박근혜 대통령을 향하는 촛불 시민들의 구호보다 훨씬 더 자극적이고 무서운 비난과 분노가 권력자를 향해 외쳐졌다. 그러나 그들 모두 어쨌거나 임기는 마쳤다. 이번에는 정치적 꼼수가 훤히 보이긴 하지만 박 대통령이 스스로 물러나겠다는 말은 꺼내놓은 상태다. 화염병보다 촛불의 폭발력이 더 강하다.

6차 촛불집회가 열리는 3일 오후 서울 여의도 새누리당사 앞에서 '박근혜정권 퇴진 비상국민행동'이 주최한 새누리당 해체 요구 집회에서 시민들이 '4월 퇴진, 6월 조기대선'을 당론으로 채택, 탄핵 추진에 제동을 건 새누리당의 대형 깃발을 찢고 있다. 연합뉴스

그래서 현 상황을 명예혁명이라 부르는 이들도 많다. 명예혁명은 1688년 영국에서 무력충돌 없이 왕을 몰아낸 혁명을 말한다. 이 혁명은 국왕의 전횡에 맞서 의회가 자신들의 권리를 지키기 위해 일으킨 반란이다. 입법권, 조세제정권 등 당시 의회가 쟁취한 권리와 자유가 일반 민중들의 삶에 긍정적 영향을 주고 영국 민주주의 발전의 토대가 되긴 했다. 하지만 혁명의 과실을 가장 많이 차지한 것은 의회의 주인인 귀족과 부자들이다.

무엇보다 명예혁명이라는 말은 혁명의 대상을 주인공으로 하는 명칭이다. 당시 영국 왕 제임스 2세는 새로 들어설 왕의 묵인 아래 가족들과 함께 프랑스로 도피할 수 있었다. 모름지기 혁명이라면 왕을 단두대나 교수대로 보내는 거지만 왕은 스스로 물러났고, 혁명세력도 쫓겨난 왕에게 살길을 열어줬다는 의미에서 명예혁명이라 불린다.

그러나 지금 거리의 촛불은 박 대통령에게 명예로운 퇴진을 열어주고 싶은 마음이 없다. 그래서 지금 상황을 명예혁명이라 부르고 싶지 않다. 혁명의 대상이 아니라 혁명의 주체가 주인공이 되는 이번 혁명의 이름은 촛불혁명이다.

느닷없이 들이닥친 것처럼 보이기도 한다. 불과 두 달여 전만 해도 현재 펼쳐지는 상황을 예상한 이들은 거의 없었다. 과연 바람은 딴 데서 오고 구원은 예기치 않은 순간에 오듯 촛불혁명은 우리 앞에 툭 떨어진 것일까. 아니다. 촛불혁명은 세월호에 갇힌 아이들 수백명의 피, 메르스로 고통 속에 숨진 시민 수십명의 피, 경찰 물대포에 쓰러진 백남기 농민의 피를 먹고 자랐다. 시민들은 세월호와 메르스 사태를 보며 ‘이게 나라냐’고 절망했고, 남북관계를 일촉즉발의 위기로만 치닫게 하는 개성공단 폐쇄와 사드 배치에 절망했고, 아버지를 미화하겠다는 ‘박근혜 국정교과서’에 절망했다. 쌓여만 가는 절망들이 결국 촛불혁명으로 폭발했다.

피와 절망으로 점철된 이 땅에서 우리는 그저 운이 좋아서 살아남았을 뿐이다. 강해서 살아남은 것이 아니다. 우리는 그때 세월호에 타고 있지 않아서, 그때 메르스 감염자와 접촉하지 않아서 지금 살아 있다.

수많은 이들의 고통으로 차려진 밥상에 정치인들은 숟가락을 들고 쇄도하고 있다. 대선을 어느 시점에 치러야 유리한지 주판알을 굴리고, 누구 뒤에 줄을 서고 누구와 합종연횡해야 살아남을지 탐색하는 이들의 복마전이 펼쳐지고 있다. 본디 자기가 차린 밥상도 아닌데 독차지하겠다고 싸우고 있다. 밥상을 엎을 기세다.

거리를 가득 메운 시민들은 새 대통령을 뽑겠다고 나온 것이 아니다. 그들이 분노하는 것도 단지 박 대통령 개인에 대한 절망 때문만은 아니다. 근저에는 특권과 반칙의 늪에 빠져 있는 우리 사회에 대한 깊은 실망이 깔려 있다. 최순실 게이트의 어처구니없는 일련의 사건들은 더욱 심각해지는 부의 양극화, 전혀 변하지 않는 권력과 재벌의 유착, 그리고 시류에 표변하는 하이에나 같은 언론과 검찰 등 우리 사회의 고질병이 상징적으로 표출된 것이다. 그래서 촛불을 든 시민들은 다음 대통령이 아니라 이런 잘못된 사회를 바로잡아달라고 요구한다.

밥상이나 엎지 마라. 그게 살아남은 자의 의무이고 최소한의 염치다. 지난 주말 거리를 비춘 232만개의 촛불은 부끄러움을 모르는 이들에게 주는 경고이기도 하다. 누가 대통령이 되든 우리 사회가 바뀌지 않는다면 또 다른 촛불혁명이 기다리고 있을 뿐이다.

김준기 사회부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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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난 주말 촛불집회는 대한민국 시위의 새 역사를 썼다. 전국을 밝힌 190만 촛불은 사상 최대 규모요, 촛불의 절정이었다. 춥고 눈·비가 내린 궂은 날씨에도 훼손된 민주주의를 시민 손으로 직접 되살리려는 촛불은 횃불로, 들불로 번져 활활 타올랐다. 시민들은 활력이 넘쳤고 외침은 엄중했다.

시민들은 박근혜 대통령에게 직접 체포영장을 발부했다. 청와대를 동·남·서쪽으로 에워싼 인간띠 잇기는 청와대를 포위하며 행진을 벌였다. 6살 아들과 함께 나온 젊은 엄마는 “이미 민심이 대통령을 이겼다”고 했다. 시민들은 아무도 보지 않는 골목길에서도 버려진 손팻말 등 쓰레기를 주웠다. 광화문광장을 일순간 암흑으로 바꾼 ‘1분 소등 행사’에서 시민들은 “어둠은 빛을 이길 수 없다”고 외치며 다시 불을 붙였다. 감동과 전율이 몸에서 몸으로 전해졌다. 남녀, 세대, 지역, 이념을 떠나 모든 시민이 하나가 된 자리였고, 대화합 축제의 장이었다.

주말인 26일 오후 8시 제5차 촛불집회가 열린 서울 광화문 일대에서 150만개의 촛불이 1분간 꺼졌다. 칠흑 같은 어둠 속에 “박근혜는 퇴진하라”는 함성이 이어졌다. 촛불은 광화문에서 남대문까지, 옆으로는 종로·청계천로·새문안길, 율곡로까지 메우며 밝고 힘있게 다시 켜졌다. “어둠은 빛을 이길 수 없다.” “침묵은 진실을 덮을 수 없다.” 시민들은 너나없이 목청껏 울분을 토해내며 청와대를 향한 행진을 시작했다. 전국 60여개 도시에서도 눈비가 오락가락하는 가운데 ‘박근혜 대통령 즉각 퇴진’을 요구하는 40만개의 촛불이 함께 타올랐다. 사진공동취재단

광장에 나오지 못한 수많은 시민들도 마음은 함께했을 것이다. 시민들은 비폭력·평화 시위를 유지했으며 경찰은 평화시위 보장 약속을 지켰다. 외신들도 “사상 최대 피플 파워” “거대한 콘서트”라며 놀라움을 표시했다. 대통령은 국격을 추락시켰지만 시민들은 성숙한 시민의식으로 전 세계에 대한민국 민주주의의 품격을 보여줬다.

청와대는 주말 집회 이후 “국민의 뜻을 다시 한 번 무겁게 받아들인다. 국민의 소리를 잘 듣고 겸허한 자세로 어떻게 해야 할지 고민할 것”이라고 했다. 하나마나한 반응만 5주째 앵무새처럼 되풀이하고 있는 것이다. 말로는 시민의 뜻을 준엄하게 받아들인다고 하지만 속 시원한 해법을 내놓기는커녕 오히려 시민들의 화만 돋우고 있다.

박 대통령은 지난 4일 2차 대국민담화 이후 3주일 넘게 침묵을 지키고 있다. 박 대통령은 수석비서관회의(10월20일), 국무회의(10월11일)를 마지막으로 주재한 이후 공식 회의석상에서 모습을 감췄다. 법무부 장관·청와대 민정수석이 낸 사표조차 1주일이 다 되도록 처리를 못하고 있다. 참모가 던진 사표조차 이러지도 저러지도 못하는 게 대통령의 현재 모습이다. 국정 역사교과서를 둘러싼 교육부의 반기(反旗) 조짐에도 가타부타 언급이 없다. 어쩌면 지금까지 모든 국정 현안을 판단하고 결정해줬던 비선 측근들이 한순간에 사라졌기 때문인지도 모른다.

이제 검찰이 데드라인으로 제시한 대면조사가 하루 앞으로 다가왔다. 이번 주엔 국회 국정조사가 본격 개시되고, 야당이 추천한 특검도 임명해야 한다. 대통령으로선 운명의 한 주가 시작된 셈이다. 더는 입을 닫고 넘어가기 어렵게 됐다. 아무런 해법도 내놓지 못하고 시간만 보내는 박 대통령에 대한 시민의 분노는 점점 더 커지고 있다.

혹시 역풍을 기다려 국면전환을 하겠다는 속셈이라면 가당치도 않고 이뤄질 수도 없다는 점을 알아야 한다. 무엇이 수많은 시민들로 하여금 한 달 동안 촛불을 들고 광장으로 나서게 했는지를 헤아려야 한다. 200만 촛불의 명령은 탄핵 전에 퇴진하라는 것이다. 시민들은 대통령 스스로 결단해주길 바라는 것뿐이다. 강제로 끌려 내려오기 전에 스스로 사퇴 일정을 제시하고 물러나는 게 본인을 위해서나 나라를 위해서나 바른길이다. 청와대는 시민들에게 포위됐고, 섬처럼 고립됐다. 들끓는 민심은 이제 폭발단계에 이르렀다. 더 얼마나 많은 촛불이 필요한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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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늘 시위가 만들어내는 감동적인 장면들의 한 주인공은 10대들이다. 그들은 이번 시위에서 최초이자 거의 유일하게 ‘혁명’이라는 단어를 사용했다. 급진적인 성인들도 꺼렸을 단어를 그들은 거리낌없이 내걸었고, 이 싸움이 박근혜 퇴진을 넘어 사회를 근본적으로 바꾸는 일임을 환기했다. 아무래도 우리는 감동할 것 하나를 빠트린 듯하다. 우리는 그들에게 그런 걸 거의 가르치지 않았다. 우리가 가르친 건 이 고약한 자본 체제에서 나만 살아남는 법이었고, 그들의 미래를 위한 최선이라 믿었다. 그런데 혁명이라니, 세상에. 나는 잠시 어쭙잖은 감회에 젖는다.

15년 전 어느 날, 불현듯 나는 한국의 아이들이 전에 없던 특별한 상황에 처해 있음을 발견했다. 동네에서 뛰어놀던 아이들이 일제히 사라졌다는 것과 함께 늘 이어오던 중요한 가르침이 일제히 중단되었다는 사실이었다. ‘공부 열심히 해야 한다. 하지만 공부만 잘한다고 훌륭한 사람 되는 건 아니다.’ ‘돈 많이 벌면 좋지. 하지만 사람이 돈만 알면 죄 받는 법이란다.’ 상하좌우를 막론하고 제정신을 가진 어른이라면 으레 아이에게 거듭하던 가르침이었다. 한국 교육이 아이가 ‘어떤 사람이 되는가’가 아니라 ‘얼마짜리가 되는가’에 관한 일이 되면서 가르침은 사라졌다. 어른의 한 사람으로서 죄책감을 물리치기 어려웠고, 어린이 책 출판과는 전혀 무관하던 나는 ‘고래가그랬어’를 만들게 되었다.

일러스트_ 김상민 기자

2014년 ‘고그’(아이들은 ‘고래가그랬어’를 이렇게 부른다)의 지면 개편은 전에 없이 심각했다. 고그는 ‘어린이 교양지’라는 타이틀을 달고 있음에도 아이들에게 직접 강의하는 방식의 콘텐츠는 지양해왔다. 학과 공부에 짓눌린 아이들에게 또 하나의 공부거리를 만들어줄 게 아니라, 함께 놀며 느끼는 동무가 되어야 한다는 원칙이었다. 세월호 참사는 이 원칙을 재고하게 했다. 동료들과 나는 ‘그들은 왜 가만있었을까’라는 질문에서 벗어날 수 없었다. 그즈음 방한한 놀이터 연구가 귄터 벨치히는 우리에게 ‘독일 학생들이라면 절대 가만있지 않았을 것이고, 대부분 생존했을 것’이라고 말했다. 교육의 실종이 아이들의 목숨마저 위협하는 긴급한 현실에서 고그의 원칙은 지나치게 낭만적이었다. 아이들에게 조기 교육을 해야 할 건 영어도 수학도 아닌 민주주의였다. 사회, 경제, 역사, 과학, 생태 등 전문가들의 흔쾌한 참여로 ‘아삭아삭 민주주의 학교’라는 이름의 지면 강의 섹션이 생겨났다.

옛 혁명가들이 파업을 ‘노동자의 정치학교’라 일컬었듯, 시위는 ‘시민의 민주주의 학교’라 할 수 있다. 우리는 이 순간 전국 도처의 공간에서 각양각색의 시민들이 만들어내는 자치적 민주주의 학교를 목격한다. 이번 시위는 고질적인 진영 논리를 넘어서 합리적 성향의 보수 시민들까지 참여하는 새로운 모습을 보이고 있다. 오늘 시민들의 일반적 의식 수준과는 워낙 동떨어진 1970년대의 망령이 부활한 사건이다 보니 생긴 역설적 현상이다. 덕분에 시위는 왕의 목을 잘라본 경험이 없고, 스스로 공화정을 만들지 못한 탓에 살아남아 내내 민주주의를 위협하는 전근대적 병증들을 치유하는 학교 노릇을 하게 되었다.

이 시위가 갖는 또 하나 각별한 의미는 ‘아이들이 보고 있다’는 사실이다. 아이들은 태어나 거의 처음으로 무기력한 각자도생의 태도를 벗어난 어른들을, 나와 내 새끼를 넘어 ‘사회’에 대해 열띤 토론을 벌이며 함께 싸우는 어른들을 보고 있다. 시민의 민주주의 학교는 자연스럽게 아이들의 민주주의 학교가 되고 있다. 이 귀한 사실 앞에서 우리는 좀 더 긴장하고 좀 더 성찰할 수밖에 없다. 무엇보다 우리는 교육에 대한 전향적 태도 변화를, 교육을 아이가 ‘얼마짜리가 되는가’에 관한 일에서 ‘어떤 사람이 되는가’에 관한 일로 바로잡는 일을 피할 수 없다.

또한 우리는 이 시위에서 갖는 자부와 희열만큼이나, 이 시위가 배제한 시위와 배제된 사람들을 되새기지 않을 수 없다. 비정규직 문제를 비롯한 주요한 노동 의제를 가진 시위에 우리는 얼마나 연대하고 참여했던가. 우리는 단지 불행한 처지에 있는 사람들을 동정하지 않은 게 아니라, 대다수 아이들의 미래를 결정하는 싸움을 외면해왔다. 우리는 시위의 방식을 누구나 자유롭게 선택할 수 있는 게 아니라는 사실을 외면했다. 가장 간절하게 평화 시위를 원하는 사람들은 까마득한 고공이나 길바닥에서 몇달 몇년을 먹고 자며 싸워야만 하는 사람들과, ‘폭력적’이라 손가락질받으면서도 공권력과 격렬히 충돌해야만 하는 사람들이라는 사실을 외면해왔다. 10대들은 이미 ‘비폭력 프레임을 넘어서야 한다’고 말하고 있다.

시위는 시민의 민주주의 학교이자 아이들의 민주주의 학교가 되었다. 그러나 민주주의 학교는 시위의 시간을 넘어 지속되어야 한다. 민주주의 학교는 상당 기간 사회와 사회 성원의 가장 중요한 일이자 사명이어야 한다. 민주주의 학교는 아이들이 스스로 생각하고 행동하는, 나아가 그들이 원하는 세상을 함께 만들어가는 힘과 지혜를 기르도록 도와야 한다. 민주주의 학교는 가급적 평화로워야 한다. 그러나 평화의 진열이 민주주의 학교의 목적은 아니다. 민주주의 학교의 목적은 사회를 근본적으로 바꾸는 일, 혁명이어야 한다.

김규항 | ‘고래가 그랬어’ 발행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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며칠 전 지인이 갑자기 물었다. 최순실·박근혜 게이트 때문에 각 당의 유력 대선후보들이 내년 대선에 어떤 공약을 새로 내놓을 것 같은가라는 질문이었다. 사실 이에 대한 답변은 별로 어렵지 않았다. 지금까지 비슷한 사건들이 벌어졌을 때 정치인들이 내놓은 대안들이 크게 다르지 않았기 때문이다.

아마도 내년이 되면 청와대 제2부속실 폐지나 청와대 이전, 대통령의 사적관계에 대한 철저한 정리 등이 정당과 정치인들의 새로운 약속으로 제시될 가능성이 높다. 그러나 사건이 발생할 때마다 무엇을 없애거나 더 도덕적이겠다는 선언을 한다고 문제의 본질이 해결되는 것은 아니다. 박 대통령은 세월호 사고 이후 해경을 해체하겠다고 말했다. 그러나 해경은 실제로는 해체되지 않았고 오히려 관료조직은 더 커졌으며 한편에서는 최근 중국 어선들의 불법조업에 대응하는 과정에서 해경의 역할과 중요성에 대한 고민도 필요해졌다. 따라서 최순실·박근혜 게이트 이후 정치개혁의 대안은 청와대 부속실을 폐지하는 수준이 아니라 시민들에게 위임받은 권력이 시민들의 의지와 별도로 작동되지 않도록 하는 것이어야 한다.

검찰 수사와 언론 보도를 보면 이번 게이트는 연설문을 손보거나 사적이익을 추구한 것에 그치지 않았다. 대기업들에서 자금을 모금했고 이를 대가로 기업들의 민원을 매우 꼼꼼하게 들어줬다. 그것은 각종 노동기본권에 대한 후퇴이고 재벌들의 경영권 승계에 대한 정부 차원의 보호였다. 국가 차원의 전략육성산업이라며 문화산업을 치켜세우고 그것을 통해 사적이익을 꾀했다. 그 과정에서 세금으로 만들어진 예산이 어떻게 편성되고 집행되는지에 대해서 관료제도는 오직 비선 실세들의 눈치만 보고 있었다. 이를 감사해야 할 감사원도 국정원도 제대로 작동하기는커녕 공모했다는 의심마저 받고 있다. 이것은 단순히 대통령과 지인들의 비리를 넘어 민주주의 시스템의 철저한 파괴라 불러야 하는 수준이다. 따라서 더 근본적인 대안이 필요하다. 그것은 시민들의 직접통치라는 민주주의의 기본원리를 다시 세우는 것이 되어야 할 것이다.

대한민국에서 시민들에 의해 선출되고 위임받는 권력은 대통령과 국회다. 대통령과 청와대 권력이 시민들의 통제를 벗어나 민주주의 그 자체를 위협하고 있다는 것이 증명된 상황에서 대안은 또 하나의 위임받는 권력, 즉 입법부가 되어야 한다. 이를 위해 국회의 권한과 역할에 대한 새로운 해석과 적극적인 개혁이 필요하다. 예산은 이제 대통령과 청와대 주변의 선호에 의해 마음대로 결정되고 집행되는 것이어서는 안된다.

이를 위해 예산법률주의의 도입과 현재 행정부가 독점하고 있는 예산편성 권한의 입법부로의 이전을 고민해야 한다. 이번 사태에서 제대로 작동하지 않았던 감사원 역시 더 이상 청와대 권력이 관료들을 통제하는 전가의 보도여서는 안된다. 오히려 입법부의 통제하에 실질적으로 행정부 관료제를 견제하고 감사할 수 있는 역할로 개혁되어야 한다. 감사원을 대통령 소속이 아닌 국회 산하로 옮겨 입법부와 행정부의 비대칭적인 권력관계를 바꾸어야 할 것이다.

사건이 발생하자 ‘특검’ 이야기가 바로 나오는 것도 문제다. 특검을 하자는 것은 결국 검찰을 믿지 못하겠다는 이야기다. 그러나 검찰은 권력형 비리만 수사하는 곳이 아니다. 시민들의 각종 생활과 안전에 관계된 수많은 범죄수사 등에서 검찰의 일상적 역할은 더 크다. 그러나 우리 사회가 검찰을 이렇게까지 믿지 못한다면 시민들의 일상적 안전과 삶은 어떻게 되는 것인가. 이를 위해 시민들의 신뢰를 받는 검찰이 되어야 한다. 검찰은 청와대 권력으로부터 독립해 시민들의 통제를 받는 조직으로 바뀌어야 한다. 이를 위해 검사장 직선제 등의 제도 도입을 검토해 볼 필요가 있다.

무엇보다도 국회의 국정조사, 청문회 등의 권한을 재검토하고 더 강화해야 한다. 시민들의 대표로 구성된 입법부의 국정조사, 청문회는 특정 범죄사실을 수사하는 검찰의 역할과 그 본질이 다르다. 이번 사건에서 드러났듯이 범죄만이 문제는 아니다. 비록 합법적으로 진행되었다고 하나 실제로는 시민들의 민의와 어긋난 수많은 정책집행들이 오히려 더 큰 문제다. 입법부의 각종 조사와 감사는 검찰의 수사보다 더 폭넓게 시민들의 삶에 미친 영향을 다룰 수 있어야 한다. 이에 대해서 입법부가 더 강도 높게 조사하고 기존 정책들을 재검토해 올바른 방향으로 이끌어 가야 할 것이다. 박 대통령이 물러나도 시민들은 대한민국 민주주의하에서 살아가야 한다. 광장에 나온 촛불은 지금 대통령 개인의 자격을 묻는 것을 넘어 대한민국의 민주주의 그 자체에 질문을 던지고 있다.

조성주 정치발전소 기획위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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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osted by KHross

교육담당 기자를 하면서 교사들에게 자주 들었던 말 중 하나가 우리 교육의 분위기가 확 바뀐 게 국제통화기금(IMF) 구제금융 외환위기 사태를 겪으면서라는 것이었다. 초등, 미취학 아동까지 사교육이 급증하며 놀이터에 아이들이 안 보이기 시작한 것도, 선망의 직장을 향한 무한경쟁 속에서 아이들이 부쩍 독해지고 폭력적이 되어간 것도, 교사들 간의 연대가 무너진 바탕에도 외환위기의 그림자가 드리워져 있었다고 했다.

가르치진 않았지만 아이들은 본능적으로 배웠다. 부모가 직장에서 잘리고, 삼촌의 사업이 망하고, 어른들의 이혼이 늘어나는 것을 보면서, ‘내 삶은 내가 지켜야 한다’는 것을. 친구를 밟고 올라서 1등을 하고 각종 자격증으로 무장해야 정년까지 살아남을 수 있고, 빈곤의 나락으로 떨어지지 않는다는 것을. 공무원, 선생님이 유난히 인기직종이 된 것도 그 무렵이다. 최근 유행어가 된 ‘각자도생’의 씨앗이 싹튼 것도 알고 보면 외환위기 사태의 긴 터널을 지나면서다.

2016년 11월. 대한민국이 목도하고 있는 ‘박근혜·최순실 게이트’라는 절망적인 현장은 아이들의 삶을 외환위기 못지않게 뒤흔들 가능성이 크다. 세월호 참사를 겪은 이 세대는 또 한번 격랑을 맞고 있다.

서울 광화문 광장에서 부모님을 따라 '박근혜 대통령' 하야 촉구 집회에 나온 아이들이 촛불을 들고 행진하고 있다. 이준헌 기자

지난 주말, 100만 시민이 “박근혜 하야”를 외칠 때 단연 눈에 띄는 모습은 교복을 입은 중·고생들이었다. 공부한다는 핑계로 명절 때도 좀처럼 만나기 힘들었던 아이들이 대학수학능력시험을 닷새 앞둔 이날 거리로 쏟아져 나왔다.

뭐가 그리 절박했을까. 아이들이  가장 많이 외친 말은 ‘민주주의’라는 네 글자였다.

“1919년 3·1운동 대한독립 만세를 외쳤던 이곳에서 오늘은 민주주의 만세를 외치겠습니다.” 오후 3시 서울 종로구 탑골공원 앞에선 사회자의 발언과 함께 전국 청소년 시국대회가 열렸다. “1960년대부터 1987년까지 우리 선배들이 피와 몸을 내던지며 겨우겨우 얻어낸 민주주의입니다. 그런 민주주의를 박근혜 정부는 물거품으로 만들어 버렸습니다”(경기 이천 중3), “끔찍한 악몽을 꾸는 나라를 깨우는 가장 빠른 방법은 남이 아닌 내가 먼저 일어나 나라를 깨우는 겁니다. 대한민국 청소년, 민주주의 파이팅!”(강원 원주 고2), “우리 학생들이 학생들의 힘으로 박근혜 정권을 퇴진시키고 무너져 버린 민주주의와 정의를 바로 세웁시다”(경기 성남 고3). 각지 학생들의 ‘사이다 발언’마다 수천명 학생들의 지지함성과 박수가 쏟아졌다.

중학교 사회교과서 속 민주주의는 ‘주권이 다수 국민에게 있고 국민에 의한 정치가 이루어지며, 정치권력이 국민의 동의와 지지를 기반으로 형성되고 행사되는 정치 형태’라고 설명돼 있다. ‘국민의 동의와 지지를 받지 못하는 정치권력’에 저항하기 위해 아이들이 나선 것이다. 모든 것이 전복되고 허물어진 사회. 아이들이 거리에 나와 자신들이 살고 싶은 미래를 외쳤다.

“저희는 우리나라에 태어나 행복할 권리가 있습니다. 오늘 우리가 싸우는 것은 과거 우리를 위해 싸워주신 조상분들에 대한 대답이고 현재 우리 스스로를 위한 혁명의 발걸음이며 미래 후손들을 위한 선물이 될 것입니다.” “우리는 언제까지 가만히 있어야 합니까. 어른들이 못한다면 우리 학생들이 나서서 심판해야 합니다.”

<학교라는 괴물>의 저자인 권재원 교사는 우리 교육의 이중성을 통렬하게 비판하며 “아이들은 세월호 참사를 어른이 아이들을 죽인 사건으로, 더 나아가 국가가 아이들을 버린 사건으로 받아들인다”고 밝혔다. 권 교사는 “그럼에도 불구하고 ‘어른들을 믿지 말라’고 가르치는 것은 아이들을 절망시키는 행위”라고 지적했다.

그렇다면 신뢰를 잃어버린 어른들이 할 일은 뭔가. 권 교사는 자신이 가르치는 것이 거짓이 되지 않도록 현실을 바로잡는 것까지가 교사의 책무에 추가됐다고 했다.

좀 더 구체적으로 어른들이 해야 할 몇 가지를 더하고 싶다. 한 달 전쯤 ‘비선 실세’ 최순실 딸 정유라의 부정입학과 특혜 의혹을 받고 있던 이화여대에는 ‘부끄러움은 왜 학생의 몫인가’라는 현수막이 걸렸다. 이 현수막처럼, 이번 게이트를 관통하는 핵심은 부끄러움을 모르는 부끄러움이다. 우선 이 땅 대부분의 평범한 어른들은 이런 사회를 만든 것에 대해 한없이 부끄러워하고 미안해하고 있다는 사실을 아이들에게 알려야 한다. 다음으론 IMF 체제 이후 20년을 지배했던 ‘각자도생’을 깨고 세대를 넘은 연대의 두 팔을 벌리는 일이다. 그리하여 이 시대가 민주주의를 향한 역사적인 시민 항쟁의 시기였음을 자랑스럽게 기억할 수 있게 해주는 것이야말로 아이들에게 아픔과 실망을 준 어른들의 최소한의 도리다.

송현숙 정책사회부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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