유럽 집행위원회가 작년 7월, ‘유럽에서 ISD는 죽었다’고 선언했다. 외자기업 국제중재권(ISD)이란 외자기업이 국가를 국제 중재에 직접 회부해서 금전 배상을 요구하는 제도이다. 패소할 경우, 해당 국가의 사법권이 작용하지도 못한 상태에서 국가가 금전 배상책임을 지는 사태가 생긴다. 예를 들면 국제 사모펀드인 엘리엇이 이달 14일, 박근혜 정권 시기의 국민연금이 삼성의 합병을 찬성한 것을 이유로 약 8600억원을 배상하라고 정부를 국제 중재에 회부했다. 이것이 바로 이 제도이다.

역사의 역설일까? 박근혜 전 대통령은 2011년, 한·미 FTA 발효를 촉구하면서 “ISD가 있거나 없거나 문제가 안된다”고 말했다.

그러나 엘리엇은 다름 아닌 박 전 대통령의 행동을 문제 삼아 국제 중재를 걸었다. 그리고 그 유일한 근거가 된 것이 한·미 FTA이다. 이명박 정권 시기 한·미 FTA를 발효하지 않았다면 엘리엇의 국제 중재는 불가능했다. 박 전 대통령에게 지금 엘리엇의 제소를 알았으면 무어라고 말할 것인지 묻고 싶다.

유럽은 왜 외자기업의 국제중재권 폐기를 선언했을까? 결론의 일관성이 부족하기 때문이다. 국제 중재 판정은 종종 모순되어, 사법의 핵심적 요소인 법적 안정성이 결여된다. 이 문제는 외자기업이 판정관 중재인 한 명을 정할 수 있는 특권과 무관하지 않다. 법원 재판에 비유한다면, 원고와 피고가 판사를 고를 수 있다니 얼마나 불안정한가?

더 큰 문제는 국가의 정당한 규제권을 제약할 위험이다. 국제 중재에 회부되는 것이 두려워 공익 규제에 소극적이 된다. 이를 흔히 ‘위축 효과’라고 부른다.

한국에 닥친 최근의 외자기업 국제중재권 사태는 엄중하다. 이미 론스타에 의해 5조원대의 국제 중재에 끌려가 있다. 여기서는 벨기에와 체결한 투자 협정이 근거가 되었다. 앞의 엘리엇과 마찬가지로 사모펀드 메이슨 캐피털도 국민연금이 삼성 합병에 찬성한 것을 문제 삼아 한·미 FTA를 근거로 2000억원의 배상을 요구했다. 이미 지난 6월에는 이란의 다야니 가문이 우리 정부를 상대로 제기한 730억원 규모의 ISD 재판에서 한국 정부의 패소 판정이 나왔다. 심지어 박근혜 정부 시기의 잘못을 바로잡는 정당한 검찰 수사에 대해서 국제 중재를 빌미로 저항한다.

지금의 정세에서 더 늦기 전에 외자기업의 국제중재권을 근본적으로 재검토해야 한다.

첫째, 유럽과 같이 국제중재권을 폐지하는 것이 바람직하다. 유럽은 국제중재권 종식 선언에만 그치지 않고 새로운 패러다임을 채택했다. 작년 9월 발효한 유럽-캐나다 경제무역포괄협정에서 국제 중재 대신 투자법원제(ICS)를 채택했다. 유럽의 새로운 혁신에서는 법관이 외자기업 소송을 심판한다. 외자기업은 더 이상 심판관을 고를 수 없다. 유럽은 이달 서명한 일본과의 경제동반자협정에서도 새로운 대안을 적용하는 협상을 진행 중이다.

유럽과 같이 국제 중재를 비판하고 대안을 찾는 것은 하나의 국제적 흐름이다. 일본, 호주, 베트남 등 11개 태평양 국가들은 환태평양동반자협정(TPP 11)을 출발시키면서 투자 계약, 투자 협정 분야에서 국제 중재 조항을 적용하지 않기로 했다.

외자기업 국제중재권 폐지에 합류하여 이를 주도할 필요가 있다. 한국의 대안 모델이 유럽식 투자법원이 될 것인지, 아니면 원칙적으로 한국의 국가배상법과 행정 소송을 통한 사법 구제를 거치게 할 것인지 진지한 토론이 필요하다. 어느 대안이든 국제중재권을 폐지해야 한다. 

둘째, 이미 제소된 사건들에 대한 철저한 대응이 필요하다. 5조원대 론스타 사건에서는 론스타가 애초 대주주 요건을 갖추지 못했다는 핵심 쟁점에 집중해야 한다.

셋째, 국민에게 투명한 정보를 제공해야 한다. 지난 6월, 한국이 최초로 패소한 사건의 중재 판정문을 공개하는 것이 필요하다. 2012년에 제기된 론스타 사건도 깜깜무소식이다. 투명한 정보를 제공해야 합리적 여론을 만들 수 있다.

<송기호 | 변호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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통일부 정책혁신위원회가 28일 보수정부에서 이뤄진 주요 대북정책의 점검결과를 담은 ‘정책혁신 의견서’를 발표했다. 핵심은 지난해 2월10일 개성공단 전면중단 결정이 박근혜 전 대통령의 일방적인 구두지시에 의해 이뤄졌음을 확인한 점이다. 정부는 당시 개성공단 중단조치가 국가안전보장회의(NSC) 상임위원회에서 결정됐다고 밝혔지만 혁신위 조사결과 이틀 전인 2월8일 개성공단에서 철수하라는 박 전 대통령의 구두지시가 있었던 사실이 확인됐다.

혁신위는 또 당시 개성공단 중단의 근거로 내세운 ‘개성공단 임금의 핵개발 전용’ 문구는 충분한 근거 없이 청와대의 의견으로 삽입됐다고 밝혔다. 당시 참고한 것으로 보이는 정보기관의 문건은 주로 탈북민의 진술 및 정황에 기초한 것이다. 해당 문건에도 ‘직접적인 증거를 확인하지 못했다’는 단서가 붙어 있었다고 한다. 요컨대 신뢰하기 어려운 정보에 의존해 남북관계를 파탄으로 몰고갈 결정을 내린 것이다. 이후 홍영표 당시 통일부 장관이 “개성공단으로 유입된 돈의 70%가 당 서기실에 상납됐다”고 했다가 국회에서 의원들의 추궁을 받자 증거자료를 갖고 이야기한 건 아니라고 번복하기도 했다.

정부는 더구나 국무회의도 열지 않은 채 대통령 자문기구에 불과한 NSC 상임위원회 결정을 기초로 11일 개성공단에서 인력을 철수시키고 단전·단수 조치까지 취했다. 북한의 4차 핵실험과 장거리 로켓 발사 등 안보적 위기상황에 따른 통치행위라고 하더라도 헌법과 법률에 따라 이뤄졌어야 하지만 정부가 법절차를 깡그리 무시한 것이다. ‘정세와 상관없이 공단의 정상운영을 보장한다’는 2013년 남북 간 합의서를 철석같이 믿고 개성공단에 진출한 기업인들은 날벼락 같은 결정에 수천억원대의 손실을 입었다.

보수정부의 대북정책은 ‘통치행위’라는 명목하에 법절차를 무시하고 이뤄지는 경우가 잦았다. 이명박 정부가 2010년 천안함 사태 대응조치로 내놓은 남북 간의 모든 교류를 전면 중단시킨 ‘5·24’조치도 마찬가지였다. 하지만 대통령이라고 해서 법률 위에서 권한을 행사할 수는 없다. 이래서는 대북정책이 집권자의 뜻에 따라 요동칠 수밖에 없고, 정치적 후유증을 키우게 된다. 혁신위가 당부한 대로 이번 점검결과를 ‘남북관계를 당파성에서 벗어나 국민적 합의를 바탕으로 법률에 근거해 추진하는’ 계기로 삼아야 한다. 그래야 대북정책이 국민의 신뢰를 받을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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계속 진행 중인 이명박·박근혜 정권의 블랙리스트 문제는 문화예술의 본질이 무엇인지 깊이 생각하게 해준다. 문화예술은 평화와 민주주의 안에서 제대로 숨 쉬며 산다.

한국문학이 한반도에서 살아온 사람들과 국경 바깥 코리아 민족의 정신과 감성, 그리고 ‘나은 삶’을 위한 투쟁의 문화적 정수였다는 사실을 여전히 믿는다. 물론 이때 문학이란 단지 제도 문단에 한정되지 않는 평범한 사람들의 말·글 활동과, 시·소설에 한정되지 않는 다양한 글쓰기를 포함하는 것이다.

이명박 정부 때 국가정보원이 만든 ‘문화·연예계 블랙리스트’에 올라 출연 프로그램 퇴출 등을 당한 것으로 알려진 방송인 김미화씨가 19일 오전 서초구 서울중앙지검에 출석하면서 기자들의 질문을 듣고 있다. 김영민 기자

그런데 어느 평론가의 말처럼 언젠가부터 한국문학은 스캔들이나 외국 문학상 같은 바깥의 자극이 아니면 긍정적인 화제를 만들 수 없는 무엇인가가 되었다. 특히 근래의 잇단 큰 추문, 즉 신모 작가의 표절 사건과 문학권력 문제, 성폭력과 여성혐오 문제 그리고 또 불거진 서정주의 친일·독재 부역 논란은 제도문학과 한국문학사의 한계와 그늘이 무엇이었는지를 너무 선명하게 보여준다. 그리고 그 처리과정은 한국문학이 대단히 고루하고 조로했거나, 청산되지 못한 부끄러운 과거를 그대로 안은 채 ‘자기들만의 리그’를 묵수하는 답답한 제도처럼 보이게 한다. 그리하여 일련의 사태는 기성 한국문학의 권위와 정당성 자체에도 치명적인 타격을 가하고 있다. 교실에서 기성의 ‘대가’와 ‘정전’으로 이뤄진 한국 현대 문학사를 가르치기가 심히 민망하고 어렵다. 많은 연구자와 독자들의 자긍심과 애정이 식어가고 있다.

물론 사태의 큰 책임은 문단을 담당해왔던 주류들과 나 같은 기성세대 연구자들에게 있다 하지 않을 수 없는데, 사태의 전개 과정에는 어떤 공통점이 있다. 권위와 권력의 편에 선 사람들이 제기된 비판을 ‘흠에도 불구하고 문학적 성과가 크다’는 식의 변설로써 무마하려 든다는 점이다. ‘일부’ 표절에도 불구하고, 친일과 독재 부역에도 불구하고, 여성혐오에도 불구하고….

여기에서 ‘문학적 성취’나 ‘문학성’이란 마치 불변하는 절대가치이자 권위주의의 원천 같다. 식민, 전쟁, 분단의 참화를 겪어온 한반도에서 이는 꽤 유례가 깊은 교의다. 이는 ‘예술의 자율성’ 명제에 대한 매우 순진한 해석과 문학적 자유주의와 문학성의 성립 요건을 당파적이고도 안일하게 사고한 데서 비롯했다. 물론 거기에 냉전과 분단상황이 개재해 있었지만, 안이함은 늘 파시즘이나 가장 반문학적인 정치행위가 틈입할 밭이 되었다.

그래서 서정주의 사례는 중요하다. 그의 오류는 단지 일제와 전두환을 찬양한 몇 편의 시에 있지 않다. 그는 수십년간 문인협회·시인협회 등의 대표적 문인단체에 군림한 권력자로서, 한국문학을 극우·냉전 문화정치의 일부로 만든 장본인의 하나였다. 한국 문단 특유의 ‘시인의 순진성·탈속성’이라는 신화가 윤리적 무책임과 정치적 파시즘, 여성혐오를 옹호하는 데 악용돼온 사실도 재차 상기하고 싶다. 서정주의 어떤 아름다운 시편들은 문학과 정치의 복잡한 모순이나 역설성에 대한 교훈적 사례이지, 비천한 정치행위를 덮고 가릴 알리바이가 될 수 없다.

문단은 종종 문학성을 사적이고 작은 것 또한 형식적인 것으로 정의하고, 아래로부터의 정치적 열정이나 역사에 대한 분노와 정의감에 대비시켰다. 가장 편하고 소시민적인 방법으로 문학과 정치 사이의 다가적 모순을 해소하려 했다. 냉전시대뿐 아니라 1990년대 이후에도 재생산된 정치적인 것·사회적인 것과 문학성의 이항대립적 사고는 민주주의 문화에도 장애가 되었다.

오래 묵은 한국문학의 문제들이 충분히 자기비판 또는 토론되지 못한 상태에서 오늘날 문학사 공부와 교육, 그리고 현장 문단은 큰 난경에 처해 있는 것이다. 협소한 문학주의나 민족주의 외에 문학사를 다시 사유할 인식의 틀이 아직 갖춰지지 않았고, 현실의 문학문화에는 세대 장벽과 젠더 분계가 공고해지는 모습도 나타난다.

새로운 한국문학을 위한 공동의 과제를 생각해본다. 우선 문학사의 재해석·재서술과 문학의 생산·수용구조의 재편성이 동시에 시도되어야겠다. 즉 연구자·교육자·비평가가 새로운 이념과 문학성에 관한 합의를 함께 다시 토론해야겠다. 문학과 정치의 관계를 이항대립적이고 우파적인 것으로부터 구제하는 유연한 원칙과 논리가 필요하다. 한국문학이 탈분단·탈식민 그리고 차별 없는 민주주의의 옹호자여야 한다는 원리는 변함없을 것이다.

또한 달라진 문화환경에 맞는 매체·플랫폼의 개발, 탈제도·탈장르 운동이 확산될 필요도 있는 듯하다. 이때 물론 여성혐오 등 나쁜 행태의 완전한 지양과 함께 독자들의 참여, 세대 간의 소통은 기본 과제가 된다. ‘현장’에서 분투하는 젊은 작가·비평가·교육자들에게 격려와 지지의 마음을 보낸다.

<천정환 | 성균관대 교수·국문학>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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자유한국당 혁신위원회가 13일 박근혜 전 대통령의 자진 탈당을 권유했다. 친박계 핵심인 서청원·최경환 의원에 대해서도 탈당을 권유했다. 류석춘 혁신위원장은 “2016년 4월 총선 공천 실패로부터 2017년 5월 대선 패배에 이르기까지 국정운영 실패에 대한 정치적 책임을 물어야 한다”고 했다. 당연한 조치다. 박 전 대통령은 지난해 최순실 게이트가 터졌을 때나 최소한 올 초 헌법재판소 탄핵 인용 후엔 스스로 당적을 정리했어야 했다. 공적 시스템을 내팽개치고 민간인 최순실에게 놀아난 행위 자체만으로도 사유는 충분하다. 박 전 대통령 주변에서 호가호위했던 친박세력도 마찬가지다.

자유한국당 류석춘 혁신위원장(오른쪽)이 13일 서울 여의도 당사에서 박근혜 전 대통령과 서청원·최경환 의원의 탈당 권유 등을 담은 3차 혁신안을 발표한 뒤 기자들 질문에 답하고 있다. 권호욱 선임기자 biggun@kyunghyang.com

그러나 친박계 의원들은 박 전 대통령의 1심 선고가 나오지 않은 상황에서 공론화도 없이 이뤄진 일방적인 결정이라며 강력 반발했다. 박 전 대통령 측은 탈당 권유에 가타부타 말없이 침묵을 지켰다고 한다. 이들의 반발은 참담하기 그지없다. 보수세력을 궤멸의 위기로 몰아넣은 정치적 책임을 지기는커녕 여전히 촛불민심과 맞서는 꼴이다. 홍준표 대표는 “10월17일 박 전 대통령 1심 판결을 전후해 본격 논의할 계획”이라고 말했다. 혁신위의 권고안에 대한 당내 논의를 10월 중순 이후로 미룬 것이다. 그때 가서 친박계의 저항을 넘어설 수 있을지도 불투명하다. 결국 아무것도 정리되지 않은 상태에서 불쑥 탈당 권유만 발표한 셈이다.

문재인 정부 출범 이후에도 변함없는 한국당의 수구적인 행태가 반드시 소수의 친박세력 때문이라고 보기는 어렵다. 한국당의 체질이 그렇게 굳어진 결과로 봐야 할 것이다. 이런 현실에서 친박계 청산은 보수의 미래를 논할 수 있는 출발선에 서는 것에 불과하다. 홍 대표와 류 위원장이 전에 말한 대로 시체에 칼질하는 게 혁신일 순 없다. 설사 몇 사람 쫓아내는 데 성공한다고 해도 그걸 두고 혁신이니, 보수통합의 명분이 생겼느니 운운할 수는 없는 일이다. 한국갤럽이 최근 발표한 한국당 지지도는 12%로 더불어민주당(50%)의 4분의 1 수준이다. 이는 한국당이 친박세력의 후신이자 ‘도로친박당’이란 비판에서 자유롭지 못하다는 사실을 웅변해준다. 한국당은 낡은 이념과 노선에 대한 처절한 자성과 쇄신을 통해 변화된 모습을 보여줄 때만이 잃어버린 지지와 신뢰 회복도 가능하다. 그러나 한국당은 기사회생의 마지막 기회를 놓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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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재인 대통령이 국회에 계류 중인 방송관계법 개정안의 재검토를 지시하고, 더불어민주당은 수정안 마련에 착수한 것으로 알려졌다. 보수야당은 “문 대통령과 여권이 방송장악이라는  민낯을 드러냈다”며   강력 반발하고 나섰다. 문 대통령은 지난 22일 방송관계법 개정안에 대해 “(이대로 시행되면) 최선은 물론 차선의 사람도 (공영방송) 사장이 안될 수 있다”고 말한 것으로 전해졌다. 자칫 공영방송 사장이 여야의 눈치만 살피는 소신 없는 인사가 선임될 수도 있다는 우려를 나타낸 것이다. 지난해 7월 민주당·국민의당·정의당 의원 162명이 발의한 방송법·방송문화진흥회법 등 4개의 방송관계법 개정안은 공영방송 이사 추천권을 여야 7 대 6의 구성으로 바꾸고, 사장을 뽑을 때 재적이사 3분의 2 이상이 찬성해야 하는 ‘특별 다수제’ 도입을 골자로 하고 있다. 어떤 정권도 공영방송을 장악할 수  없도록 제어장치를 둔 것이다.

청와대는 문 대통령의 발언이 “지시가 아닌 제안”이라고 강조했지만 민주당은 지난 22일 열린 ‘정기국회 대비 연찬회’에서 방송관계법 수정안을 마련하기로 의견을 모았다. 민주당과 언론단체 등에선 국민배심원단을 모집해 공영방송 사장을 임명하는 ‘국민 추천제’를 도입해야 한다는 의견이 나오고 있다. 하지만 현재의 방송관계법 개정안조차 자유한국당의 반발로 국회 통과가 무산된 상황에서 문 대통령의 재검토 발언은 시의적절하지 않다. 숱한 논란 끝에 그나마 차선책으로 마련한 방송관계법 개정안이 아닌 제3의 수정안은 현실을 감안하지 않은 채 이상론에 치우쳐 있다고 비판받을 소지가 크다.

현행 방송관계법은 사실상 대통령과 여당의 뜻대로 공영방송 사장을 선임할 수 있도록 규정돼 있다. 이는 야당에 불리한 것이다. 오히려 개정안이 야당에 유리하다. 그런데도 자유한국당은 개정안의 국회 통과를 저지해왔다. 그렇다고 야당에 불리한 현행 방송관계법을 고수하겠다는 것인지도 불분명하다. 결국 ‘반대를 위한 반대’를 하느라 자가당착에 빠진 상황이라고 볼 수밖에 없다.

이명박·박근혜 정부에서 공영방송을 장악하며 국정을 파탄 낸 보수야당은 지금이라도 공영방송 정상화에 힘을 보태야 한다. 민주당도 수정안 마련보다 방송관계법 개정안의 국회 통과에 주력하는 게 옳다. 그게 과거정부에서 참담하게 무너진 공영방송을 되살릴 수 있는 유일한 길이다. 시간이 많지 않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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법정에 선 박근혜와 봉하로 간 문재인. 같은 날 다른 두 장소에 선 전·현직 대통령의 모습을 보는 순간 온몸에 전율이 돋았다. 박근혜가 탄핵되면서 세월호가 올라왔고, 노무현 전 대통령의 8주기 추도식 날 박근혜의 첫 공판이 열렸다. 사필귀정이다.

연일 고공 행진하는 문재인 대통령의 인기 때문에 U-20 대회의 축구 경기장이 썰렁하다고 한다. 적폐청산과 개혁 드라이브가 “슛! 골인”의 쾌감보다 더 짜릿한 까닭일 게다. 그럼에도 연일 매스컴에는 각계각층이 주문하는 개혁과제가 줄을 잇는다. 그 대열에 빠질 수 없는 주제가 인권정책의 과제다.

다른 건 몰라도 문재인 후보의 인권정책 공약은 별 생각나는 게 없다. 공약집에서 애써 찾아보니 문 대통령의 인권정책 공약은 10여개가 있었다. 눈에 띄는 것은 도·감청 남용을 방지하기 위한 통신비밀보호법 개정과 공무원의 민간인 불법사찰 방지법 제정 정도다.

문재인 대통령이 23일 경남 김해시 진영읍 봉하마을의 대통령 묘역에서 열린 노무현 전 대통령 8주기 추도식에서 인사말을 하고 있다. 청와대 사진기자단

‘이명박근혜’ 정권하에서 인권의 가치는 바닥을 모른 채 추락했다. 그 한가운데 독립성을 상실하고 본분을 망각한 국가인권위원회(이하 인권위)가 있다. 권력에 쓴소리는커녕, 민감한 사항을 외면했고, 반인권적 결정까지 줄을 이었다. 더하여 인권 감수성과 전문성이 높은 일부 직원들이 쫓겨나고 밀려났다. 촛불 탄핵 정국 이후 나아졌다고 하지만 여전히 예민한 사항에 대해서는 미적대거나 시늉만 내고 있다는 비판이 있다.

인권위의 정상화는 문 대통령이 드라이브를 걸어야 할 인권 분야의 첫 번째 과제다. 인권위가 눈치 보지 않고, 오로지 인권의 가치와 원칙에 따라 과감하게 쓴소리를 할 수 있으려면 권력으로부터의 독립성 보장이 필수적이다. 위원장과 인권위원의 임명 과정에서 투명성과 전문성의 확보, 시민사회의 의견 수렴이 보장돼야 한다. 사법부가 3명의 인권위원을 지명하는 것이 타당하고 적절한지도 고려해 볼 점이다. 법조인이 인권위원의 대다수를 차지하는 것도 변화가 필요한 지점이다. 법조인이 많다보니 인권위의 많은 결정이 실정법의 테두리 안에 갇히고, 인간의 존엄성에 대한 상상과 국제 인권법 및 국제관습법을 포괄하지 못하는 결과로 이어지고 있다.

박근혜 전 대통령이 23일 옷깃에 수용번호 ‘503번’을 달고 서울중앙지법 417호 대법정으로 들어서고 있다. 사진공동취재단

인권위의 부침을 바라보면서 얻는 교훈은 ‘인권기본법’ 제정과 같은 안정적인 인권 레짐(regime)을 구축하지 않고서는 인권의 지속적 보장이 어렵다는 점이다. 정권교체 때마다 인권위 흔들기는 반복될 여지가 크다. 자유·평등 같은 인권의 가치는 기득권이나 특권과의 끊임없는 저항과 투쟁을 통해 쟁취하는 것이다. 이 때문에 인권 문제는 정치적 문제일 수밖에 없다.

‘인권기본법’은 인권위뿐 아니라 사회 전체가 인권의제를 상시적으로 논의하고 교육할 수 있도록 각종 제도와 정책을 만들자는 취지를 담고 있다. 즉 국가나 지방자치단체는 물론 사회의 여러 단위들이 인권 증진 계획을 수립하고, 이에 대한 영향평가를 하며, 인권교육의 제도화와 시민사회의 참여 등을 통해 인권보장의 안전하고 촘촘한 그물망을 만들자는 것이다.

이번 대선 국면에서 인권의제 중 가장 핫한 뉴스는 성소수자 인권 문제였다. 인권에 대한 국민적 감수성은 최근 십수년 사이에 비약적으로 높아졌다.

반면 갑질과 같은 불평등과 혐오는 갈수록 만연해있다. 성소수자에 대한 차별금지를 포함한 포괄적 차별금지법의 제정은 더 이상 미룰 수 없는, 또한 미뤄서도 안되는 시대적 과제다. 차별금지법을 제정하지 않겠다는 것은 우리 사회를 평등한 세상으로 만들어 갈 의지가 없다는 말과 같은 얘기다.

마지막으로 언급할 문제는 기본권 강화를 중심으로 한 개헌이다. 문 대통령은 5·18민주화운동 기념식에서 헌법 전문에 5·18정신을 담겠다고 약속했다. 그런데 정치권은 헌법 중에서 통치권 구조의 변화에만 관심이 있는 듯하다. 헌법은 무엇보다도 인권법이다. 통치구조는 국민의 인권을 보장하기 위한 제도적 뒷받침일 뿐이다. 주한 미국대사를 지낸 미국 덴버대학의 크리스토퍼 힐 총장은 “민주주의의 첫 번째 축은 다수결이지만, 두 번째 축인 소수자의 권리를 보호하지 않는다면 공허하거나 불안정해질 것”이라고 했다.

여성·노인·어린이·장애인 같은 사회적 약자와 소수자의 평등 보장과 권리 강화는 시대의 대세이자 민주주의의 안정을 위해서도 필수적이다. 또한 이주노동자, 난민 등과 더불어 살아가야 할 앞으로의 세상에서 일부 기본권의 주체를 국민에서 사람으로 바꾸는 방안도 심도있게 토론되어야 한다. 촛불의 정신은 인권과 민주주의의 실현을 의미한다. 인권변호사 출신 대통령이 ‘민주·인권 강국 대한민국 만들기’에 고성능 엔진을 제대로 가동시키길 바란다.

문경란 | 인권정책연구소 이사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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황교안 대통령 권한대행이 박근혜 정부 초기 청와대 비서관을 지낸 김용수 미래창조과학부 정보통신정책실장을 방송통신위원회 상임위원에 내정한 것으로 알려졌다. 황 권한대행이 지난달 말 임기가 만료된 이기주 방통위 상임위원의 후임을 내정한 것은 정권교체기의 어수선한 틈을 탄 ‘알박기 인사’가 아닐 수 없다. 차기 정부 출범이 한 달여밖에 남지 않은 상황에서 친박 인사로 분류되는 미래부 고위 관료를 임기 3년짜리 방통위 상임위원으로 임명하려는 것은 납득할 수 없는 처사다.

방통위 상임위원은 대통령이 위원장을 포함해 2명을 지명하고, 나머지 3명은 야당(2명)과 여당(1명)이 추천한 인사를 대통령이 임명토록 돼 있다. 김재홍 부위원장(야당 추천)과 이기주 상임위원(대통령 지명)이 지난달 24일 임기를 마치면서 현재 3기 상임위원 5명 중 3명이 남아 있다. 김석진 상임위원(여당 추천)은 임기가 끝났지만 최근 연임이 확정됐다. 최성준 위원장의 임기는 오는 7일, 고삼석 상임위원(야당 추천)은 6월8일까지다.

황교안 대통령 권한대행 국무총리가 4일 정부 서울청사에서 열린 국무회의에서 발언하고 있다. 연합뉴스

방통위는 황 권한대행의 임명권 행사가 행정 공백을 막기 위한 불가피한 조치라고 하지만 설득력이 떨어진다. 3기 방통위는 종합편성채널 재승인 등 의결이 필요한 주요 현안을 이미 처리한 상태다. 당장 상임위원 인선을 하지 않으면 업무에 중대한 차질이 발생한다고 보기 어렵다. 그런데도 황 권한대행이 인사권을 행사하려는 것은 시민에게 탄핵당한 ‘시한부 정부’가 차기 정부에 부담을 주려는 의도로 해석할 수밖에 없다.

황 권한대행이 부적격 인사를 상임위원에 내정했다는 지적도 나온다. 박근혜 정부 출범 때 인수위원이었던 김 실장은 정부조직 개편에 참여하며 방통위 기능을 축소하는 데 앞장섰던 인물이다. 방통위가 독립적인 권한을 행사할 수 없도록 행정위원회로 격하시킨 장본인을 상임위원으로 내정한 것은 앞뒤가 맞지 않는 일이다. 황 권한대행은 방통위 상임위원 인사를 차기 정권으로 넘기는 것이 마땅하다. 탄핵으로 파면된 대통령을 대신하는 권한대행이 주요 기관의 인사권을 행사하는 것은 적절치 않다. 황 권한대행은 자신에게 맡겨진 마지막 소임은 대선일까지 국정을 잘 관리하는 것이지 일방적인 인사권 행사가 아님을 명심해야 한다. 방통위 상임위원 임명 절차를 즉각 중단하기 바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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박근혜 전 대통령이 30일 서울중앙지법 321호 법정에서 법원의 구속 전 피의자심문(영장실질심사)을 받았다. 무소불위의 권력자에서 법의 관용을 호소하는 처지가 된 그를 보면서 시민들은 만감이 교차했을 것이다. 그는 파면된 신분으로 형사처벌을 받는 최초의 대통령이라는 불명예를 역사에 남기게 됐다.

검찰과 법원은 박 전 대통령 신병 처리 과정에서 법이 만인에게 평등하다는 것을 모처럼 보여줬다. 박영수 특별검사팀의 수사를 이어받은 검찰은 그가 국정농단의 ‘몸통’이라고 결론짓고 법과 원칙에 따라 사전구속영장을 청구했다. 법원도 그에게 특별 대우를 하지 않았다. 여느 피의자처럼 공개적으로 서울중앙지법 건물 출입구 보안검색대를 통과하게 했고, 영장 발부 여부를 결정할 때까지 유치장소에서 대기하게 했다. 검찰과 사법부의 이 같은 변화는 민주주의를 향한 시민들의 노력과 염원으로 부패 권력에 대한 탄핵이 이뤄진 덕분이라고 할 수 있다.

30일 오후 서울 서초동 서울중앙지법에서 구속영장 실질심사를 마치고 나온 박근혜 전 대통령이 대기장소인 서울중앙지검으로 가기 위해 검찰 직원의 안내를 받고 있다. 사진공동취재단

헌법과 법률을 위반한 박 전 대통령의 범죄혐의는 일일이 열거하기 힘들 정도다. 주권자가 위임한 신성한 권력을 비선에 넘겨 국정을 농단하고, 태만과 무능으로 위험에 빠진 어린 생명들을 지켜내지 못했다. 대통령 권한을 사익 추구에 이용하고, 국회와 언론의 지적에도 사실을 은폐하는 등 국가 지도자답지 않은 행태를 지속했다. 결국 헌법재판소는 “피청구인(대통령)을 파면함으로써 얻는 헌법이익이 압도적으로 크다”며 재판관 8 대 0 전원일치 의견으로 그를 파면했다. 특검은 ‘박근혜 게이트’를 “국가권력이 사적 이익을 위해 남용된 국정농단과 우리 사회의 고질적 부패고리인 정경유착”이라고 규정했다. 검찰은 “박 전 대통령이 막강한 지위와 권한을 이용해 기업으로부터 금품을 수수케 하거나 기업 경영의 자유를 침해하는 등 권력 남용적 행태를 보였다”고 밝혔다.

그러나 박 전 대통령은 헌재 결정에 승복하기는커녕 자기 보전을 위해 극우 성향의 친박 세력에 의지하는 퇴행적인 모습을 보이고 있다. 법원의 영장실질심사마저도 변명과 부인으로 일관했고, 불리하다 싶으면 기억이 나지 않는다고 했다. 그러면서도 ‘법원의 유죄판결 확정 전까지는 무죄로 추정해야 한다’는 무죄추정의 원칙과 형사소송법상의 불구속 수사 원칙 등을 방패로 내세웠다. 헌법과 법률을 어기고 인권을 파괴한 그가 법의 보호를 요구하고 피의자 인권을 강조하는 역설적인 상황이 벌어진 것이다. 박 전 대통령 처벌은 무너진 정의를 바로 세우는 작업이다. 여야의 대선주자 등 위정자들은 그를 반면교사로 삼아야 한다. 미증유의 이번 사태가 한국의 민주주의를 한 단계 끌어올리는 계기가 되기를 기대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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비리와 헌법 위반으로 파면당한 박근혜 전 대통령이 어제 검찰청 포토라인에서 한 말은 “국민 여러분께 송구스럽게 생각합니다. 성실하게 조사에 임하겠습니다”라는 29자가 전부였다. 일반 범법자들이 검찰에 책잡히지 않기 위해 하는 의례적인 상투어 그대로였다. 전직 대통령으로서 최소한의 품격과 책임에 맞지 않는 영혼 없는 발언이었다. 그는 지난 10일 헌법재판소 탄핵 결정 반대 시위를 벌이다 숨진 박사모 회원과 유족들에게도 지금껏 위로의 말 한마디 없다. 전날 오후 그는 손범규 변호사를 통해 “검찰 출두에 즈음하여 입장을 밝힐 것이고, 준비한 메시지가 있다”고 했지만 이 역시 결국 거짓말이었던 셈이다. 이런 사람이 지난 4년간 대한민국의 대통령이었다는 사실에 새삼 놀라게 된다.

법 앞에 불려나온 4번째 전직 대통령 박근혜 전 대통령이 21일 오전 서울중앙지검에 도착해 잠시 뒤를 돌아보고 있다. 박 전 대통령은 기자들의 질문에 간단히 답하고 검찰청 안으로 걸어 들어갔다. 박 전 대통령은 지난 10일 헌법재판소의 파면 선고와 함께 불소추특권을 상실했다. 박민규 선임기자

성실하게 검찰 조사에 임하겠다는 말과는 달리 그는 모든 혐의를 완강히 부인하고, 책임을 최순실씨와 안종범 전 청와대 정책조정수석 등에게 떠넘겼다. 검찰이 안 전 수석의 수첩 같은 범죄 증거를 들이댔지만 그는 지시한 적이 없고 전혀 모르는 일이라고 잡아뗐다. 미르·K스포츠 재단 설립은 선의를 가지고 법 규정 테두리 안에서 한 일이며 재단 설립 비용은 재벌이 자발적으로 낸 것이라는 기존 주장을 되풀이했다. 현대자동차에 최씨 지인회사의 물건을 납품하게 한 것은 중소기업을 돕기 위한 차원이라고 억지를 썼다. 삼성으로부터 뇌물을 한 푼도 받지 않았으며 모든 것은 최씨에게 속아서 벌어진 일이라고 강변했다. 불리하면 아예 입을 닫았다. 그러나 손바닥으로 하늘을 가릴 수는 없다. 그의 범죄 증거는 차고 넘친다. 청와대가 범죄 모의의 온상이고 박 전 대통령이 국정농단의 몸통이라는 사실은 박영수특검팀과 검찰 수사로 이미 확인됐고, 최씨를 비롯해 이미 수많은 공범들이 구속 기소돼 재판을 받고 있다.

이제 검찰과 법원이 법과 원칙대로 박 전 대통령을 처리하는 일만 남았다. 사과도 하지 않고 반성할 줄도 모르는 그에게 관용이란 있을 수 없다. 파면당한 그에게 전직 대통령 예우를 해주는 것도 온당치 않다. 그런 의미에서 그가 동의하지 않았다는 이유로 검찰이 그의 조사과정을 녹화하지 않는 것은 문제다. 검찰은 필요하면 그와 최씨, 그와 안 전 수석에 대한 대질신문도 해야 한다. 구속영장 청구도 적극 검토해야 한다. 중형이 예상되고 도주나 증거인멸의 우려가 있으면 검찰은 그동안 구속수사를 원칙으로 해왔다. 검찰은 한 점 의혹 없이 박근혜 게이트의 진실을 밝혀 법과 정의에 성역이 없다는 것을 보여줘야 한다. 그것이 갈기갈기 찢긴 국론을 통합하고 혼란에 빠진 나라를 바로 세우는 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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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0년대 초 대학입시에 논술이 화두였다. 논술은 객관식인 대학수학능력시험의 한계를 극복하고 수험생의 사고력과 논리력을 측정할 수 있는 좋은 방법이지만 일선 교육 현장에 접목이 쉽지 않았다. 당시 서울대 입학관리본부장으로 논술 출제와 채점을 맡았던 김영정 교수(철학과·2009년 작고)가 두 개의 논술 전범(典範)을 제시했다. 하나는 대통령 취임사, 다른 하나는 헌법재판소 판결문이었다. 취임사는 필자(대통령)가 우리 사회의 문제점이나 당면 과제로 의제를 설정한 뒤 그것에 대한 해결책을 제시하는 형식의 글이다. 독자(시민)의 생각이나 행동을 변화시키기 위해 논리적이면서도 감성적인 전략을 사용한다. 헌재 판결문은 찬반·시비 논란이 있는 사안에 자신의 의견이나 주장을 피력하는 형식이다. 제3자를 자기편으로 끌어들이고 반대 측의 승복을 받아내려면 증거가 객관적이면서도 논리와 구성이 치밀해야 한다.

지난 10일 오전 헌법재판소에서 이정미 재판관이 낭독한 ‘2016헌나1 대통령 박근혜 탄핵사건에 대한 선고 요지’를 보면서 헌재 판결문이 왜 논술의 전범인지 새삼스럽게 깨달았다. 논리 전개가 물 흐르듯 자연스럽고 표현이 적확해 경탄이 절로 나왔다. 글은 재판에 임하는 재판관들의 심경을 밝히는 것으로 시작했다. 이어 대통령 측에서 문제로 제기한 국회의 탄핵소추안 가결 절차와 헌재의 8인 재판관 체제 등은 흠결이 없다고 쾌도난마로 처리하고, 대통령 측과 국회의 주장이 첨예하게 갈린 탄핵 사유 13개를 4개 범주로 묶어 하나하나 따졌다. 문화·예술인 블랙리스트나 삼성 뇌물 등은 대통령 탄핵의 유력한 증거가 될 수 있음에도 제외했다. 국회 탄핵안에 포함되지 않은 내용을 넣으면 대통령 측의 반발 등 분란만 일으킬 우려가 있기 때문이다.

이정미 헌법재판소 소장 권한대행이 10일 오전 서울시 종로구 재동 헌법재판소 대심판정에서 열린 박근혜 대통령 탄핵심판을 선고하고 있다. 헌법재판소는 대통령 탄핵을 인용했다. 사진공동취재단

헌재의 문장은 간결하고 문체는 건조했다. A4용지 4장, 7000자 분량의 글에 관형어와 부사어는 거의 보이지 않았다. 덕분에 “피청구인을 파면함으로써 얻는 헌법이익이 압도적으로 크다고 할 것입니다” 같은 주제문에서 ‘압도적으로’라는 수식어가 힘을 발휘할 수 있었다. 독자(청자)에 대한 배려도 돋보였다. ‘지금부터’ ‘먼저’ ‘이제’ 등의 말을 써서 맥락과 내용이 바뀌고 있음을 친절하게 알려주었고, 어려운 한자나 법률용어를 최소화해 법 지식이 없는 일반인도 이해하기 쉽게 했다. 구성이 탄탄해 극적 효과도 뛰어났다. 4번의 ‘그러나’와 3번의 ‘그런데’는 시민들을 일순간에 천당과 지옥으로 내몰며 팽팽한 긴장감을 불어넣었다. 여론 조사 결과 헌재 선고 전 80% 수준이던 대통령 탄핵 찬성 의견이 헌재 선고 뒤 90% 이상으로 늘어난 것을 보면 그만큼 헌재 판결문이 사람들의 마음을 움직였다고 볼 수 있다.

논술의 또 다른 전범인 대통령 취임사(2013년 2월25일)를 찾아서 읽어봤다. “존경하는 국민 여러분! … 국민 개개인의 행복의 크기가 국력의 크기가 되고, 그 국력을 모든 국민이 함께 향유하는 희망의 새 시대를 열겠습니다. … 노후가 불안하지 않고, 아이를 낳고 기르는 것이 진정한 축복이 될 때 국민행복시대는 만들어지는 것입니다. … 국민의 생명과 안전을 지키는 것은 국민 행복의 필수적인 요건입니다. … 깨끗하고 유능한 정부를 반드시 만들어서 국민 여러분의 신뢰를 얻겠습니다. … 저와 정부를 믿고 새로운 미래로 나가는 길에 동참하여 주십시오. 우리 국민 모두가 힘을 합쳐 국민행복, 희망의 새 시대를 만들어 갑시다.”

교과서에 실려도 손색이 없을 정도다. 대통령인 화자의 권위와 공신력을 바탕으로 청자의 이성과 감성을 흔들어 깨웠다. 직유와 은유, 대조와 대비, 점강과 점층 등 중·고교 국어 시간에 배운 각종 수사법이 활용됐다. 문장이 길어도 운율이 있어 읽는 맛이 느껴졌다. “한강의 기적으로 불리는 우리의 역사는 독일의 광산에서, 열사의 중동 사막에서, 밤새 불이 꺼지지 않는 공장과 연구실에서, 그리고 영하 수십 도의 최전방 전선에서 가족과 조국을 위해 헌신하신 위대한 우리 국민이 계셔서 가능했습니다” 등의 표현은 듣는 이의 가슴을 뛰게 하고 눈물샘을 자극했다. 풍부한 예시와 참신한 비유 외에도 ‘경제 민주화’ ‘창조 경제’ ‘문화 융성’ ‘국민 맞춤형 복지’ 같은 창의적 대안이 돋보였다. 그러나 문제는 진실성이다. 세월호 참사에서 드러났듯이 박근혜 정권에서 시민의 생명과 안전은 뒷전이었다. 양극화와 소득 감소로 중장년의 삶은 더 불안해졌고, 다수의 청년에게 결혼과 출산은 사치 혹은 공포가 됐다. 정부는 총체적으로 무능했고, 대통령은 최악의 비리를 저질러 파면당했다. 아무리 문장이 좋아도 내용이 거짓이면 ‘0점’이다. 불행하게도 이를 확인하는 데 4년이 걸렸다.

오창민 논설위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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역대 대통령치고 애견인 아닌 경우가 드물다. 박정희 전 대통령은 백구와 황구, 스피츠, 치와와 등 다양한 품종의 반려견을 키웠다. 당시 ‘큰영애’로 불린 박근혜 전 대통령은 이중 스피츠 ‘방울이’와 진돗개 ‘진도’를 좋아했다. 전두환 전 대통령이 키우던 진돗개 2마리는 재산압류 때 경매에 부쳐져 40만원에 팔렸다. 다행히 개를 산 낙찰자가 되돌려줬다고 한다. 노무현 전 대통령과 반려견 ‘누리’의 사연은 슬프고 애잔하다. 노 전 대통령이 생전 자택을 찾은 방문객들에게 잊지 않고 소개하던 반려견은 노 전 대통령 서거 후 집을 떠나 실종돼 주변을 안타깝게 했다. 주인이 심장마비로 죽은 줄도 모르고 눈이 오나 바람이 부나 10년을 전철 역 앞에서 기다리다 숨을 거둔 개의 이야기를 그린 영화 ‘하찌’를 연상케 한다. 이명박 전 대통령은 함께 선글라스를 끼며 각별한 애정을 쏟은 반려견 ‘청돌이’의 사진을 퇴임 후에도 자주 공개했다.

박근혜 대통령이 청와대 관저에서 키우는 진돗개 '평화', '통일', '금강', '백두', '한라'

대통령들이 반려견을 키우는 이유는 일반 애견가와 다르지 않을 터이다. 반려견과의 교감은 사람에게 심리적인 위안과 정서적 안정감을 준다. 경쟁·비교 사회에 지친 현대인을 보듬는 데 반려견만 한 존재도 없다. 돈과 권력, 사회적 지위, 나이 등의 편견 없이 한결같이 주인을 따르기 때문이다. 나아가 대통령들에게 반려견은 인간적 면모를 홍보하는 정치적 수단이기도 하다.

박근혜 전 대통령 역시 반려견을 정치에 자주 활용했다. 대통령 취임 때 자택 인근 주민에게서 선물받은 진돗개 한 쌍이 새끼 5마리를 낳자 청와대 홈페이지에 사진을 올리고 페이스북을 통해 이름을 공모했다. 새해 업무보고에서 “한 번 물면 놓지 않는 진돗개 정신’을 강조했고 비선 실세 의혹 당시에는 “청와대 실세는 진돗개”라고 말했다.

이랬던 박 대통령이 파면당한 뒤 진돗개들을 청와대에 둔 채 자택으로 돌아가 유기 논란이 일고 있다. 청와대는 “분양할 예정”이라고 말했지만 동물보호단체는 동물보호법 위반으로 고발했다. 자칫 박 전 대통령의 법 위반 항목이 하나 더 늘어 14개가 될지도 모를 일이다. 배신을 싫어한다는 대통령이 배신을 모르는 반려견을 배신하는 그 지독한 모순과 이기심이 무섭다.

조호연 논설위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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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한민국의 대통령은 국민에 의해, 국회를 거쳐, 그리고 지난주 금요일 헌법재판소에 의해 최종적으로 파면당했다. 이것은 언론방송이 묘사하는 것처럼 ‘승복’의 대상도 아니며, 누군가가 희망하는 것처럼 재고(‘재심’)의 여지가 있는 것도 아닌, 다시는 돌이킬 수 없는 최종적이고 단순명료한 현실의 서술일 따름이다. ‘대통령’ 앞에 붙여진 ‘전(前)’이라는 글자는 시간의 비가역성(非可逆性)만큼이나 무겁고 절대적이다.

그것이 굳이 폭죽을 터트릴 만큼 감격스럽거나 자랑스러운 일은 아니라고 생각한다. 똑같은 이유로, 땅을 치며 통곡을 할 필요도, 애꿎은 분노를 표출할 이유도 없다고 생각한다. 왜냐하면 우리가 한 일은 그저 헌법이 미리 규정한 대로 탄핵과 파면의 절차를 밟았을 따름이기 때문이다. 탄핵의 대상이 자연인 박근혜가 아닌 대통령이라는 기관이고, 파면의 결과가 자연인 박근혜를 처벌하는 것이 아니라 대통령직을 비우는 것에 불과했기 때문이다. 적어도 이론적으로는, 누가 대통령이었다 하더라도 같은 상황에서는 동일한 방식으로 같은 결과가 나왔을 것이다.

헌법재판소가 10일 박근혜 대통령의 파면을 결정하자 주요 외신들도 한국 역사상 최초의 현직대통령 파면 소식을 긴급 타전했다. 왼쪽 위부터 시계방향으로 영국 BBC 방송, 미국 CNN 방송, 영국 일간 가디언, 미국 일간 월스트리트저널(WSJ) 홈페이지 화면. 헌법재판소가 10일 박근혜 대통령의 파면을 결정하자 주요 외신들도 한국 역사상 최초의 현직대통령 파면 소식을 긴급 타전했다. 왼쪽 위부터 시계방향으로 영국 BBC 방송, 미국 CNN 방송, 영국 일간 가디언, 미국 일간 월스트리트저널(WSJ) 홈페이지 화면.

그러나 문제는 2017년 한국 사회의 현실에서 우리 모두가 동의할 수 있는 선악의 뚜렷한 구분이나 하나의 정답이 존재하지 않는다는 점이며, 때로는 ‘팩트(fact)’라는 말이 ‘의견’이나 ‘관점’을 의미하는 것처럼 들리게 되었다는 사실이다. 90%가 탄핵과 파면을 지지한다고 하지만, 절대로 동의하지 않는 10%가 있으며, 양자는 평행 우주의 대척점에 기거하는지도 모른다. 박 전 대통령에 대한 구체적이고 개별적인 평가는, 매우 극단적으로 넓은 스펙트럼에 걸쳐 있다고 점잖게 요약하자.

이제 질문은 다음과 같다. 모든 것이 상대적이고 부분적 진실이라면, 얼마나 심각한 문제와 명백한 증거들이 민의에 의해 선출된 권력인 대통령권의 신속하고 비가역적인 파면을 정당화할 수 있을 것인가. 이 질문은 헌법재판관들을 아주 많이, 오래 괴롭혔을 것이다. 물론 이 질문에 대한 가장 쉬운 해답은 또 다른 민의, 즉 입법부의 수적 우위와 정치적 판단에 따르는 미국 모델이겠지만, 우리 헌법은 그 부담을 오롯이 헌재의 규범적 판단에 남겨놓은 셈이고 그 답안은 지난 금요일 공개되었다.

헌재가 내놓은 답안만이 유일한 정답일 수는 없다. 예컨대 나는 여전히 세월호 7시간과 관련된 대통령의 생명권 보호 의무 위반이 파면사유로 인정되었어야 한다고 생각하는 반면, 나의 어느 친구는 어떤 탄핵 사안도 대통령 궐위를 가져올 정도로 심각하지 않다고 생각한다. 헌재의 통합진보당 해산 결정을 내가 동의할 수 없었던 것처럼 그 친구는 간통죄 처벌 위헌 결정을 납득할 수 없었다.

어쩌면 모든 정치공동체의 공적 결정이 이런 과정일지 모른다. 의견은 갈리고 ‘팩트’는 흐리며, 갈등은 항존하는 곳에서, 승리자가 있으면 패배자의 눈물이 반드시 있기 마련일 것이다. 그러나 적어도 나와 그 친구가 오늘의 불만을 뒤로하고 내일의 토론을 이어갈 수 있는 이유는 정치공동체가 도달한 결론을 존중하고 서로의 의견을 존중하기 때문이며 언젠가 생각이 일치하는 장면도 있을 것이라는 기대 때문이다. 나는 이것이 민주주의의 최소 요건이라 생각한다.

정치인 박근혜에게 결정적으로 결여됐던 것은 이러한 다원주의적 가치들의 공존을 이해하지도, 이해하려고 노력하지도 않았다는 점이다. 문제들을 푸는 정답이 하나가 아닐 수 있고, 나의 답보다 더 나은 답이 얼마든지 있을 수 있으며 그것을 찾아 나가는 토론과 설득이 중요하다는 사실을 받아들이지 않았다. 교과서 국정화를, 사드 배치를, 개성공단 폐쇄를 전격적으로 결정하고는, 다른 목소리와 다른 해답들의 가능성을 들으려 하지 않았다.

정치인 박근혜는 스스로가 항상 올바른 편이라고 생각했으며, 그러한 유일 가치와 위배되는 모든 사람과 세력들을 적으로 간주하였다. 어제의 적이 얼마든지 내일의 동지가 될 수도 있으며, 작은 것을 양보하면 큰 것이 돌아온다는 사실도 믿지 않았다. 다른 가치와 신념들을 배척하였고, 야당을, 여당의 대부분을, 의회를, 그리고 국민의 대부분을, 이제는 검찰과 헌재를 끊임없이 배제하고 적으로 간주하였다. 한 정당 분파의 지도자로서는 일관된 신념을 지닌 것처럼 보였겠지만, 한 국가를 이끌어가는 대통령으로서는 심각한 결격사유였다. 이상은 사인(私人) 박근혜의 사익추구와는 아무 관계가 없다.

한국 정치의 근본적 비극은 이러한 1970년대의 정치적 DNA가 아직까지도 전승되면서 지지자들과 반대자들을 끊임없이 감염시키고 있다는 점이다.

정답이 두 개 이상이라는 것을 당신은 인정할 수 있는가. 그것을 인정하지 못하면 그 누구든 민주공화국에 설 자리는 없다.

박원호 | 서울대 교수·정치학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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박근혜 전 대통령의 호위무사를 자처하고 나선 친박계 인사들의 행태가 점입가경이다. 자유한국당 소속 서청원·최경환(총괄), 윤상현·조원진·이우현(정무), 김진태(법률), 민경욱(언론), 박대출(수행) 의원 등 8명은 박 전 대통령을 보좌하기 위한 역할 분담까지 마쳤다. 친박계 의원들은 비선 실세 최순실씨 일당의 국정농단으로 나라가 밑동부터 썩어가고 있는 동안 대통령을 앞세워 호가호위하며 온갖 권세를 누려왔던 세력이다. 국정의 주축이었던 이들만 정신차렸더라도 작금의 국정 붕괴는 오지 않았을 것이다. 그런데도 뼈저린 반성과 참회는커녕 법치를 부정하며 대결과 갈등을 키우는 데 앞장서고 있다. 참으로 어처구니없다. 이들 중 김진태 의원은 “대통령을 끝까지 지키겠다”며 14일 대선 출마까지 선언했다. 아예 대놓고 헌법과 민주주의, 시민을 조롱한 격이다.

자유한국당 김진태 의원이 13일 오전 국회 정론관에서 기자회견을 열고 헌재의 주장과 달리 당시 새누리당 조원진 의원이 2016년 12월9일 18차 본회의에 발언신청서를 제출했다고 주장하고 있다. 연합뉴스

이들은 과거 당 안팎의 숱한 친박계 청산 요구 속에서도 박 전 대통령과 골수 지지층을 등에 업고 ‘좀비’처럼 살아남은 바 있다. 이번에도 박 전 대통령을 여왕처럼 받들고 빌붙는 것은 그의 한 줌 영향력에 기대 끝까지 정치생명을 연장해보겠다는 의도가 뻔하다. 나라가 어찌 되든 나부터 살고 보겠다는 심사다. 이런 작태를 수수방관하고 있는 자유한국당 지도부도 한심하긴 마찬가지다. 그러니 ‘쇄신쇼’나 벌이고 있다는 얘기를 듣는 것이다.

세금으로 녹을 받는 의원이 섬겨야 하는 대상은 시민이지 파면당한 대통령이 아니다. 헌법기관인 국회의원이 헌법이 파면한 중대 범죄 피의자의 하수인을 자처하는 것이야말로 국기문란이다. 삼성동 보좌팀을 구성한 의원 8명은 모두 지역구 출신이다. 여론조사 결과 시민 86%는 헌재 결정이 옳다고 했고, 92%는 그 결정에 승복해야 한다고 했다. 그렇다면 이들은 지역 주민들의 의사를 제대로 대표하고 있는 것인가. 아니면 제 마음대로 행동하는 것인가. 이제는 그 지역 주민들이 따져 물어야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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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3월 13일 지면기사 내용입니다-

박근혜 전 대통령이 파면 이후 56시간 동안 청와대 관저에 머물 때 대통령기록물이 손상되거나 무단 반출됐을 우려가 제기되고 있다. 대통령기록물법은 대통령직인수위원회, 대통령 본인과 보좌·자문기관이 보유한 기록물 및 물품을 ‘대통령기록물’로 규정해 관리토록 하고 있다. 국무회의와 대통령 주재 수석비서관회의, 대통령 연설문 등이 대상이다. 각계 인사들과의 면담 기록은 물론 청와대 방문일지와 경호 내용, 박 전 대통령 수첩, 청와대 직원들 메모, 인사 기록도 해당된다. 기록물 이관에 필요한 조치는 대통령 임기 종료 6개월 전부터 강구해야 한다.

황교안 대통령 권한대행이 10일 오후 정부서울청사에서 헌법재판소의 박근혜 대통령 파면 선고에 대한 대국민담화를 발표하고 있다. 서성일 기자

그러나 헌정사상 처음 대통령 탄핵 사태로 인해 이관 절차가 제대로 진행되기 어렵게 되면서 기록물 훼손 가능성이 제기되고 있다. 안종범 전 청와대 경제수석과 작고한 김영한 민정수석이 작성한 업무수첩이 수사·재판에서 증거 혹은 참고자료로 사용되는 상황이어서 더욱 그렇다. 재벌회장과의 면담 기록, 박 전 대통령과 최순실씨 사이의 연락 내역, 세월호 참사 당시 박 전 대통령과 관련자들 언행이나 청와대 의무실 진료 기록물이 제대로 보존돼 있을지도 걱정된다. 고고도미사일방어체계(사드) 한반도 배치, 일본군 위안부 협상 시 소녀상 철거 등 일본 정부와의 논의, 청와대와 국가정보원의 보수단체 지원 등의 기록물이 훼손됐을 가능성이 높다.

대통령기록물을 무단으로 파기하거나 국외 반출하면 10년 이하 징역 또는 3000만원 이하 벌금, 은닉·유출·손상·멸실하면 7년 이하 징역 또는 2000만원 이하 벌금에 처하도록 돼 있다. 청와대는 대통령 파면 선고 일시를 기점으로 기록물에서 손을 떼고 보호 조치를 해야 한다. 황교안 대통령 권한대행도 즉각 국가기록관리위원회에 기록물 보존을 지시하고, 검찰은 하루라도 빨리 청와대를 압수수색해 자료를 확보해야 한다. 국회도 민간 전문가들과 함께 보호 조치를 강구할 필요가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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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는 지금 엄중한 역사적 기로에 섰다. 정도냐 사도냐, 진보냐 퇴보냐의 갈림길이다. 해방 후 오늘의 상황보다 더 절박했던 시절 김구 선생은 말했다. “현실적이냐 비현실적이냐가 문제가 아니라 그것이 정도(正道)냐 사도(邪道)냐가 생명이라는 것을 명심해야 한다.”

원칙 없는 정치, 일하지 않은 부, 양심 없는 쾌락, 격을 잃은 지식, 도의 없는 상거래, 인간성 잃은 과학, 희생 없는 신앙(마하트마 간디 ‘7가지 대죄목’)이 오늘의 한국사회를 총체적인 위기로 몰아넣었다. 그 중심에 박근혜 대통령과 그의 하수인들이 자리한다.

공자가 노나라 재상일 때 ‘용서할 수 없는 5악의 인물’이라 하여 한 사람을 처형한 적이 있다. 인의와 덕치를 주장해온 그로서는 예외적인 일이었다. ‘5악 인물’은 첫째, 만사에 빈틈이 없고 시치미를 딱 떼고 음흉하게 나쁜 짓만 저지른다. 둘째, 하는 일이 조금도 공정하지 않으면서 겉으로는 공정한 체 강직한 체한다. 셋째, 거짓말투성이면서 구변이 좋아 그럴싸하게 사탕발림을 한다. 넷째, 성품은 흉악한데 기억력이 좋고 박학다식하다. 다섯째, 독직과 부정을 일삼으면서 한편으로는 일부 사람들에게 은혜를 베풀어 너그럽고 청렴한 체한다. 그동안 이런 인물들이 권력의 핵심이 되었다.

헌법재판소의 박근혜 대통령 탄핵심판 선고일을 하루 앞둔 9일 밤 청와대 건물들이 불이 꺼진 채 어둠 속에 싸여 있다. 서성일 기자

이명박근혜 9년 동안 나라가 온통 거덜났다. 그럼에도 책임감은커녕 부끄러운 줄 모르고 정상배와 법꾸라지, 선동가들을 내세워 국민을 기만하고 시대를 역류시키려 한다. 공공연하게 내란을 선동하고 테러를 공언한다. 국회 해산과 계엄령 선포를 요구한다. 야당이나 재야에서 이랬다면 검찰이 침묵했을까.

“정의 없는 권력은 강도집단”(플라톤)이란 말이 실감나는 계절이다. 민족의 자주독립을 선언한 3월1일 성조기를 들고 광화문을 누비는 집단, 박근혜를 가리켜 헌정사상 가장 청렴한 대통령이라는 법비(法匪)와 풍각쟁이들과 동시대를 산다는 게 부끄럽다.

타락하고 부패한 권력자 하수인들이 아무리 혹세무민해도 절대다수의 국민은 역사의 정도를 걷는다. 정부의 갖은 수단에도 국정교과서를 완벽하게 거부하는 국민이다. 혹한에도 촛불집회에 참여한 시민과 동원된 사람들의 시대정신은 다르다. 깨어있는 시민이 존재하기에 역사는 전진한다.

격동기에 역사의 물꼬를 돌리는 위치에 있는 인물들의 책무는 막중하다. 이 길이냐 저 길이냐, 선택의 기로에서 고민은 배가 된다. 을사늑약 당시 조정대신들의 고민은 컸을 것이다.

역사의 길을 택한 민영환은 영원히 살고 현실의 길을 취한 5적은 매국적으로 죽었다. 동학의 정도를 택한 손병희는 역사인물이 되고 사도를 취한 이용구는 타매의 대상이다. 정도를 걷는 신채호는 민족사관의 대명사가 되고 사도를 택한 최남선은 훼절의 오욕이 따른다. 청렴 강직했던 김홍섭은 ‘사도법관’이 되고 조봉암에게 사형을 선고한 김갑수 등은 ‘사법살인’의 오명을 벗지 못한다.

인간의 수명은 짧고 역사는 길다. 짧은 생애를 권부를 좇다가 역사에 오명을 남긴 인물이 적지 않다. 역사를 우습게 아는 지도층 인사들이 너무 많다. 동양에서 역사는 그물에 비유돼 왔다. 하늘의 그물 즉 천망이라는 뜻이다. 노자는 “천망이 비록 촘촘하지는 못하나 결코 놓치지는 않는다”고 하고, 미국의 역사학자 찰스 비어드는 “신의 물레방아는 천천히 돈다. 그러나 그 물레방아는 짙게 갈아나간다”고 말한다. 현실에 집착하여 역사를 외면하면 언젠가 그물코에 걸린다는 뜻이다.

박근혜 대통령에 대한 헌재의 탄핵심판 날이다. 여덟 분의 결정을 국민과 역사가 지켜보고 있다. 이 시점에 백범의 ‘정도냐 사도냐’가 떠오르는 것은 왜일까.

김삼웅 전 독립기념관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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박근혜·최순실 게이트가 터지면서 많은 사람들이 검찰을 비판하고, 검찰개혁을 말한다. 하지만 어떤 수사든 유무죄는 법원에서 가려진다. 법원의 최종적인 승인 없이 검찰만의 전횡은 불가능하다. 그렇기 때문에 검찰권력은 반드시 법원권력과 함께 논의되어야 한다. 법원권력의 한가운데에는 대법원이 있다. 과거와 달리 지금의 대법원은 정권의 외압을 받지 않는다. 지금의 대법원은 권력에 자발적으로 복종하고 있다. 특히 박근혜 정권 들어서 대법원이 보여준 권력지향성은 차마 눈 뜨고 볼 수 없는 수준이었다.

2015년 1월 박상옥 한국형사정책연구원장이 대법관에 임명제청된 것부터 이상했다. 박 원장은 박종철 고문치사 은폐 사건의 담당검사 출신이다. 아무리 검찰 출신이 대법관에 임명될 차례라고는 하지만, 박종철 고문치사 은폐 사건에 연루된 사람을, 다른 자리도 아닌 대법관에 임명한다는 것은 이해할 수 없는 일이었다. 당연히 변호사단체와 시민단체의 거센 반발이 이어졌다. 당시에는 양승태 대법원장의 무리수를 이해할 수 없었다. 그러나 비선 실세의 국정농단이 폭로되면서 그 단서의 일부가 밝혀진다. 박영수 특검이 김영한 전 청와대 민정수석의 수첩을 확보했는데, 그 수첩에 박 원장 관련 내용이 메모돼 있었던 것이다. 양 대법원장이 청와대의 뜻에 따라 박 원장의 대법관 임명을 강행한 것이 아니냐는 추측이 가능한 대목이다.

전국공무원노동조합 법원본부 조합원들이 8일 서울 서초구 대법원 앞에서 기자회견을 열어 “인사권을 무기로 일선 법관들의 개혁 목소리에 재갈을 물리려는 양승태 대법원장은 즉각 퇴진하라”고 요구했다. 김영민 기자

그뿐 아니다. 2015년 3월 대법원은 박정희 정권 시절 발령된 긴급조치 9호는 대통령의 통치행위이기 때문에 국가배상책임의 대상이 될 수 없다는 판결을 내렸다. 긴급조치 9호는 2013년에 이미 헌법재판소가 위헌결정을 내렸다. 그런데도 대법원은 통치행위라는 이유로 국가배상책임을 부정한 것이다. 워낙 정치적인 판결이다 보니 대법원 판결인데도 이에 대해 반발하는 하급심 판결이 잇따르고 있다.

2015년 5월에는 국정원이 경력법관 임용자들에 대해 사상검증식 신원조사를 했다는 논란이 일었다. 사법의 독립을 침해하는 중대한 사태였는데도 법원행정처장이 고작 “부적절하거나 오해를 불러일으킬 수 있는 사례를 일부 확인할 수 있었다”는 반응을 법원 내부통신망에 밝혔을 뿐이다.

원세훈 전 국정원장 사건도 빼놓을 수 없다. 원 전 국정원장은 지난 대선 때 댓글공작을 통해 선거에 개입했다는 이유로 고등법원에서 유죄를 선고받았다. 여기서 주목해야 할 부분은 원 전 국정원장 사건이 2013년 1월에 제기된 대통령 선거 무효소송과 밀접하게 관련이 있다는 점이다. 그동안 대법원 판례에 따르면 제3자가 선거과정상 위법행위를 저질러 선거인들이 자유로운 판단에 의하여 투표할 수 없게 된 경우 그 선거는 무효가 된다. 따라서 원 전 국정원장에 대해 공직선거법 위반이 유죄로 인정될 경우 지난 대선은 무효가 될 가능성이 높아진다. 감히 대통령 선거를 무효로 판결하는 것은 차마 감당하기 어려웠던 것일까? 2015년 7월 대법원은 공직선거법에 대해 유죄를 선고한 고등법원 판결을 파기하였다. 단 한명의 반대의견도 없었다. 원 전 국정원장의 변호인은 대법관을 거쳐 이명박 정권에서 총리까지 지낸 김황식 변호사였다.지난해 말 국정원이 대법원장을 사찰했다는 의혹이 제기됐다. 유신독재의 망령이 대법원장까지 쫓아다녔다는 것은 매우 충격적이다.

대법원도 ‘중대한 반헌법적 사태’라고 논평했다. 이번에는 법원 내부통신망이 아니라 공식발표였다. 그러나 유신독재의 망령은 청와대 혼자서 불러들인 것이 아니다. 대법원은 망령의 굿판에서 향불을 피워 올렸던 것이 바로 대법원 자신이었음을 분명히 깨달아야 한다. 며칠 전 대법원이 사법독립을 주제로 한 일선 판사들의 학술행사를 축소시키려 한 것 아니냐는 의혹이 제기되었다. 대법원은 부인하고 있지만 대법원이 이 행사를 적극 장려하지 않은 것만은 분명한 것 같다. 이쯤 되면 과연 대법원에 사법의 독립을 지킬 의지가 있는지 의심하지 않을 수 없다. 경제협력개발기구(OECD)가 발표한 ‘한눈에 보는 정부 2015’ 보고서에 따르면 우리나라 사법 신뢰도는 OECD 평균 54%에 훨씬 못 미치는 27%였다. 42개 국가 중 39위다. 권력 앞에 비굴했던 대한민국 대법원의 초라한 성적표다.

나승철 변호사·전 서울지방변호사회 회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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헌법재판소가 어제 박근혜 대통령 탄핵심판에 대한 선고를 10일 오전 11시에 한다고 예고했다. 지난해 12월9일 국회의 탄핵 가결 후 석달 만에 심리 절차를 마치고 최종 결정을 내리는 것이다. 반년 넘게 끌어온 혼란이 헌재의 역사적 결정으로 조속히 수습되기를 기대한다.

박 대통령 탄핵소추의 인용은 상식이다. 박 대통령은 숱한 꼼수로 헌재 심리와 특검 수사를 방해했지만, 그런 심리와 수사에서조차 박 대통령이 국정농단의 몸통임이 확인됐다. 탄핵해야 한다는 여론도 꾸준히 70%를 넘는다. 민주주의 토대 위에 서 있는 헌재가 민의에 부합하는 결론을 내는 것은 당연하다. 민의와 상식에 반하는 결론은 또 다른 혼란을 불러올 것이다. 탄핵 인용 시 헌재 결정에 승복하겠다는 여론이 65%인 데 비해 기각하면 승복하겠다는 응답자는 35%라는 여론조사도 있다.

8일 오후 서울 종로구 헌법재판소 앞 게시판에 박근혜 대통령 탄핵심판 선고일이 안내되고 있다. 탄핵심판 선고는 10일 오전 11시에 진행되며 방송 생중계도 허용된다. 박민규 선임기자

문제는 헌재 결정 이후다. 사회 구성원 전체가 헌재 결정에 승복하면서 중첩한 국가적 난제를 신속하게 풀어갈 것이라고 확신할 수 없는 상황이다. 특히 박 대통령과 그의 법률대리인, 지지자들은 궤변으로 시민들을 선동하며 헌재 결정에 불복할 것임을 시사했다. 헌재 결정이 임박한 지금까지도 터무니없는 탄핵 각하를 주장하고 있다. 자유한국당도 말로는 헌재 결정에 승복한다고 하면서 계속 토를 달고 있다. 지금 북한 핵·미사일 위협과 사드 배치에 따른 중국의 압박, 일본과의 갈등 등 외교안보가 전대미문의 위기에 봉착해있다. 여기에 조기 대선이 겹치면 내부 갈등이 증폭될 우려가 있다. 이런 상황에서 헌재 결정 불복은 국가적 재앙이 될 수밖에 없다.

우선 박 대통령 측은 헌재 결정에 승복함으로써 혼란을 야기한 데 대해 책임지는 자세를 보여야 한다. 여야 정치권도 질서 있는 수습책을 제시해 신속하게 국정을 회복할 수 있도록 해야 한다. 박 대통령의 국정농단이 드러나고 탄핵심판이 진행되는 동안 정치권은 내내 촛불시민의 뒤만 따라다녔다. 심지어는 촛불시민들이 만들어놓은 개혁 입법의 기회조차 살리지 못했다. 만약 탄핵 이후에도 제 역할을 하지 못하면 정치권 전체가 존재 이유를 상실하게 될 것이다. 시민, 정치인, 지식인 모두 엄중한 상황임을 잊지 말고 책임 있게 행동해야 한다. 그런 자세야말로 민주주의를 성숙하게 하고 사회를 발전시키는 동력이 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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박영수 특검은 어제 90일간의 수사를 마무리하면서 “한정된 수사기간과 주요 수사대상의 비협조 등으로 특검 수사는 절반에 그쳤다”고 자평했다. 청와대 압수수색과 대면조사를 거부한 박근혜 대통령의 성역을 끝내 넘지 못한 데 대한 회한의 표현이다. 이제 공은 다시 검찰로 넘어갔다. 특검이 다 드러내지 못한 국정농단과 정경유착의 나머지 부분을 검찰이 밝혀내야 할 차례다. 관건은 박 대통령에 대한 수사를 마무리하고, 우병우 전 청와대 민정수석 비위의 마지막 연결고리를 찾는 것이다. 최순실씨 일가의 의심스러운 재산 형성, 최씨 딸 정유라씨의 학사 부정 등은 드러난 것보다 밝혀내야 할 부분이 더 많다고 특검도 인정했다. 검찰이 맡은 역할이 특검의 뒤치다꺼리나 하는 정도가 아니라는 말이다.

박영수 특별검사 등 수사팀이 6일 서울 대치동 특검 사무실에서 박근혜 최순실 게이트 90일간의 수사결과를 발표한 뒤 인사하고 있다. 김기남 기자

특검이 수사에서 성과를 낸 것은 정치권력의 눈치를 보지 않고 엄정하게 수사한 덕분이다. 황교안 대통령 권한대행을 포함한 여권은 수사기간 연장을 불허하면서까지 특검 수사를 방해했다. 그런 만큼 이들은 또다시 검찰을 조직적으로 압박할 가능성이 있다. 검찰은 조직의 명운을 걸고 오직 법과 원칙에 따라 수사해야 한다. 이번 검찰의 2차 수사를 지켜보는 시민들은 검찰 내 ‘우병우 사단’이 재가동하지 않을까 걱정하고 있다. 지난해 국정농단 수사 초기 검찰 수뇌부와 우 전 수석이 빈번하게 통화한 사실도 최근 드러난 바 있다. 검찰이 이번 수사에서 우 전 수석과 한통속이 아니라는 것을 증명하지 못하면 시민은 검찰을 버릴 것이다. 검찰이 이번 수사에 특검의 자세로 임해야 하는 이유가 여기에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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박영수 특별검사팀 수사 결과 박근혜 대통령에게 뇌물 등 5개 혐의가 추가됐다. 검찰이 밝힌 기존 8개 혐의를 더하면 총 13개에 이른다. 최순실씨 등 비선 실세에 의한 국정농단, 그에 따른 국민주권주의와 법치주의 훼손 등 박 대통령 탄핵 사유는 이로써 더욱 분명해졌다. 특검 수사의 최대 성과는 박 대통령이 최씨와 공모해 삼성그룹으로부터 433억원의 뇌물을 받은 혐의가 확인됐다는 점이다.

특검은 433억원의 성격과 관련해 박 대통령이 공권력과 국가 기구를 동원해 삼성물산과 제일모직의 원활한 합병 등 이재용 삼성전자 부회장의 경영권 승계를 도운 대가라고 못 박았다. 헌법재판관 출신으로 박 대통령 대리인단의 핵심인 이동흡 변호사는 “삼성 관련 소추 사유가 뇌물수수에 해당한다고 입증되지 않는 이상 파면 사유가 되기는 어렵다”고 주장한 바 있다. 그런데 법원은 뇌물 공여자인 이 부회장의 구속영장을 발부했다. 박 대통령 등이 시킨 대로 한 문형표 전 보건복지부 장관은 삼성물산과 제일모직 합병에 국민연금을 동원한 혐의로 구속돼 재판을 받고 있다. 뇌물죄는 뇌물을 준 사람보다 받은 사람의 죄를 훨씬 무겁게 묻는다. 박 대통령은 삼성 뇌물만으로 탄핵감이라 할 수 있다.

박영수 특별검사가 6일 오후 서울 강남구 대치동 특검 사무실에서 열린 박근혜 최순실 게이트 ‘수사 결과 대국민 보고’에서 소회를 밝히고 있다. 김기남 기자

박 대통령이 최씨에게 연설문이나 인사 자료를 유출해 국정 개입을 허용했다는 것은 주지의 사실이지만 특검 수사로 더 많은 범죄 사실이 확인됐다. 최씨의 마수는 문화체육관광부 외에 외교부까지 뻗쳤다. 최씨는 미얀마 공적개발원조사업의 이권을 챙기기 위해 내정된 인사까지 밀어내고 유재경 주미얀마 대사와 김인식 한국국제협력단 이사장을 앉혔다. 청와대 의료시스템이 붕괴 상태였던 것도 드러났다. 박 대통령은 최씨 소개로 불법 의료업자들로부터 시술을 받고 공식 자문의가 아닌 김영재씨로부터 ‘비선 진료’를 받았다. 일급 기밀인 대통령의 혈액 등 건강 관련 정보가 새나가고 있었지만 어느 누구도 문제의식이 없었다. 박 대통령은 문화예술계 블랙리스트에도 관여하고, 최씨 민원을 받아 KEB하나은행의 인사에 부당하게 개입한 혐의도 확인됐다. 청와대 지시로 전국경제인연합회가 극우 단체에 지원해 ‘관제 데모’를 유도한 사실도 추가로 드러났다. 박 대통령은 주권자로부터 위임받은 권한을 이렇게 남용했다.

여권의 대선주자로 거론되는 황교안 대통령 권한대행의 민낯도 드러났다. 황 대행은 청와대 압수수색 등이 이뤄지도록 특검팀을 지원해도 모자랄 판에 오히려 거꾸로 나왔다. 특검의 수사기간을 연장할 수 없다면 하루라도 빨리 이를 공표해야 했다. 그래야 특검이 남은 시간을 효율적으로 사용할 수 있기 때문이다. 하지만 황 대행은 알량한 법 지식을 이용해 결정을 미루면서 국회와 특검을 능멸했다.

박 대통령과 청와대, 황 대행의 조직적인 방해에도 특검이 성과를 낼 수 있었던 것은 민주주의를 위해 주말마다 광장에서 촛불을 든 시민들 덕분이다. 한국 사회의 고질인 정경유착을 뿌리뽑지 않고서는 정의를 바로 세울 수 없다는 특검 수사팀의 의지도 작용했다. 청와대는 “특검의 수사 결과는 헌법재판소의 탄핵심판 심리의 증거로 인정될 수 없다”고 말했지만 이는 헌재가 판단할 일이다. 한겨레와 조선일보의 어제 여론조사 보도를 보면 ‘박근혜 대통령을 탄핵해야 한다’는 의견이 각각 75.7%와 73.3%다. 탄핵심판 선고가 일주일 안으로 다가왔다. 헌재는 법과 원칙에 따라 박 대통령 탄핵 여부를 결정해주기 바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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간통죄는 뿌리가 깊다. 고조선의 팔조법금에도 명시돼 있다. 조선시대에는 간통을 저지른 자는 장형(杖刑) 80대, 유부녀는 90대를 쳤다. 그런 간통죄가 1990년 헌법재판소 테이블에 처음 올랐다. 6 대 3 합헌. 시기상조라는 취지였다. 그리고 2015년 2 대 7 위헌. 성적 자기결정권 침해라는 이유였다. 고조선부터 2100년간 건재했던 간통죄는 헌재 심판 5차례 만에 사라졌다.      

법은 진리가 아니다. 절대 불변도 아니다. 진리는 달라지지 않는다. 태양을 중심으로 지구가 돈다는 지동설은 진리다. 법은 세월에 따라, 사회 변화에 따라 개정되고 폐지되고 새로 만들어진다. 헌재는 법의 흥망성쇠를 다루는 곳이다. 1988년 창립 이래 29년간 헌법적 가치를 판가름하며 역사적 결정을 내렸다. 호주제, 동성동본 금혼, 혼인빙자 간음죄, 제대군인 가산점, 영화 사전검열제를 없앴다. 헌법이 우리 사회의 근본 규범이라면 헌재는 그 근본을 지키는 기둥이다. 그래서 헌재는 매년 국가기관 중 신뢰도 평가 1위를 차지해오고 있다. 헌법재판소를 운영하고 있는 세계 70여개 국가 중 가장 성공한 모델이다. 지금 헌재는 헌정 사상 최초로 대통령 탄핵을 눈앞에 두고 있다. 전직 헌재 재판관에게 물어봤다.

[김용민의 그림마당]2017년 3월7일 (출처: 경향신문DB)

- 재판관들의 심적 부담이 대단하겠다.

“신경 안 쓰인다면 거짓말일 것이다. 재판관들은 자부심과 사명감, 용기를 갖고 있다. 역사에 부끄럽지 않은 결정을 내릴 것이다.”

- 탄핵 평의와 평결은 어떻게 진행되나.

“먼저 법률 위배가 있는지를 따진다. 위법이 있다면 그것이 탄핵당할 만큼 잘못한 것인가 판단한다. 마지막으로 앞으로 이 나라가 어디로 갈 것인가 고민한다.”

- 앞으로 나아갈 길을 고민한다는 뜻은.

“헌재는 여론조사기관이 아니다. 오늘만 판단하는 게 아니라 내일 어떻게 될 것인가까지 폭넓게 본다는 뜻이다.”

- 개인의 정치성향이나 지명자가 누구였느냐에 따라 영향을 미치나.

“법관은 법과 양심에 따라 판단한다. 양심엔 개인의 소신도 담겨 있다. 여당이나 야당이 추천했다고 해서 달라지는 게 아니고, 애초에 그런 성향의 인물을 추천하는 것이다.”

- 평결은 어떻게 나올 것 같나.

“그런 질문이라면 전화 끊겠다.”

박근혜와 가까이 있던 사람들의 공통점이 있다. 지금은 박근혜와 멀어졌다는 점이다. 당 대표나 후보 시절 비서실장을 지낸 대부분이 등을 돌렸다. 박근혜를 알면 알수록 그렇게 된다고 그를 가까이에서 지켜본 대변인 출신 전여옥은 말했다. 멍청한 사람의 최고의 도피처는 침묵이다. 박근혜의 침묵은 가장 효율적인 자기 방어 수단이었다. 어쩌다 한마디 할 때는 사람들을 놀라게 했다. 서민 주거 대책을 논의하는 자리에선 “그런데 근저당권이 뭔가요”, 복지 대책 회의에선 “왜 복지 재원을 세금을 거둬서 하나요. 국가 재정으로 해결해야죠”라고 했다. 세금이 국가 재정이다. 박근혜 후보 시절 경제 과외교사였던 김종인은 “(박 후보는) 뭘 알고서 말하는 것 같지 않다. 아무리 설명해도 이해하는 것 같지 않다”고 했다. 저녁 여섯시면 정치인 박근혜가 어디서 무엇을 하는지 아는 사람은 없었다. 완벽한 미지의 세계에 있었다고 의원들은 말했다.

“당 대표 시절 어느 비행기를 타든 박 대표의 좌석은 정해져 있었다. 비행기 맨 왼쪽 앞좌석 창가였다. 그런데 언제나 그 옆자리를 비워놨다. 옆에 누가 앉는 것을 싫어해서라고 했다.”(전여옥 <오만과 무능>)

박근혜 정치의 키워드는 시혜(施惠)였다. 그는 스스로를 공주나 여왕으로 생각하고 행동했다. 그는 자신의 정치행위를 백성들에게 베푸는 것이라고 생각했다. 지지자는 그를 불쌍하다고 대통령으로 뽑아줬다. 불쌍한 건 국민이었다. 박근혜는 무능하고 오만했다. 그에게 청와대는 ‘나의 집’이었고, 대한민국은 ‘나의 나라’였다. 박근혜의 공적으로 남을 단 하나는 그와 함께 ‘박정희 패러다임’도 종언을 고했다는 것이다. 시대착오적인 극우 이념으로 똘똘 뭉친 김기춘류(類), 권력의 뒤에서 단물만 빨아먹은 최태민류의 부패세력은 이참에 함께 쓸려 나갈 것이다. 국정농단을 가능케 했던 50년 기득권 체제에 금이 쩍 가고 와르르 무너질 것이다. 

사람들이 내게 묻는다. 탄핵 심판 결과가 어찌 나올 것 같냐고. 헌재 재판관들은 시대를 항해하는 항법사다. 8 대 0, 만장일치로 혼란에 종지부를 찍으리라 믿는다. 저항하는 수구세력의 입을 막고, 모욕당한 태극기를 되찾고, 무너진 정의를 세우리라 믿는다. 그래서 우리 사회는 탄핵 전과 후가 달라질 것이라고 믿는다. 이제 며칠 안 남았다. 굿바이 박근혜.

박래용 논설위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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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osted by KHross