박근혜 정부 청와대가 지난해 4·13 총선에서 보수단체를 동원하려 한 사실이 드러났다. 청와대는 이런 정황이 담긴 옛 정무수석실 문건을 발견해 검찰에 넘겼다고 밝혔다. 경향신문이 취재한 바로는 문건 작성 시점이 지난해 1월이고, ‘총선을 앞둔 상황에서 보수단체들이 힘을 모아 정부 지원 세력 역할을 충실히 하도록 독려하라’는 내용이 담겼다. 자유총연맹, 바르게살기운동협의회 등 보수단체 이름이 문건에 구체적으로 명시됐다. 박근혜 정권이 보수단체를 이용해 여론몰이에 나선 정황은 익히 알려진 사실이지만 국민의 대표를 뽑는 국회의원 선거까지 공작을 꾸몄다고 생각하니 모골이 송연해진다. 만약 박근혜 정권이 탄핵되지 않고 오는 12월 대통령 선거가 치러졌다면 같은 일이 반복됐을 것이다.

청와대는 옛 정책조정수석 산하 기획비서관실 캐비닛에서 보수논객 육성 활성화, 보수단체 재정확충 지원 대책 등의 내용이 담긴 ‘국정환경진단 및 운영기조’(2015년 4~6월) 문건도 발견했다고 밝혔다. 구체적으로 2015년 7월에 작성된 비서실장 주재 수석비서관회의 결과 문건에는 신생 청년 보수단체들에 기금 지원을 적극 검토하라는 내용이 들어 있다.

이미 박영수 특별검사팀의 국정농단 수사 과정에서도 이를 뒷받침하는 증거가 나왔다. 특검은 전직 청와대 직원으로부터 2013년 말에서 2014년 초 당시 김기춘 대통령비서실장이 보수단체에 자금 지원을 지시했다는 진술을 확보했다. 김 실장 지시에 따라 정무수석실이 전국경제인연합회에 자금을 요청하면, 전경련은 재벌들로부터 돈을 걷어 극우·보수단체에 차명으로 보냈다는 것이다. 박근혜 정부 동안 삼성·현대차·LG·SK 등 4대 재벌이 보수단체에 지원했다고 특검이 파악한 금액만 70억원에 이른다는 언론 보도도 있다.

선거 공작과 여론 조작은 민주주의의 근간을 위협하는 일이다. 박근혜 정부 청와대는 정권 유지와 재창출을 위해 민의를 왜곡하고 특정 이념 확산에 골몰했다. 청와대가 기획하면 재벌은 돈을 대고 보수단체는 회원들을 동원하는 구조였다. 세월호 유족을 조롱하는 보수단체의 집회나 역사교과서 국정화에 찬성하는 ‘관제 데모’, 재벌개혁 반대 집회 등이 이런 과정을 거쳐 열렸을 가능성이 높다. 검찰은 엄정한 수사로 진상을 밝히고 관련자를 엄벌해야 한다. 정권이 교체됐다고 흐지부지 넘어갈 일이 아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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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년 12월23일자 경향신문 ‘시대의 창’ 지면을 통해 나는 ‘19대 대선이 18대 대선과 다른 이유’라는 칼럼을 게재한 바 있다. 핵심은 촛불정국을 겪으면서 각 정당 지지층이 모두 대거 이탈해 부동층이 전체 유권자의 절반을 넘게 되었으며, 이번 대선은 누가 그들을 설득하느냐에 달려 있다는 것이었다. 지난 대선과는 달리 진영대결이 아니라 국민통합이 화두라는 주장도 덧붙였다. 오늘은 조금 다른 맥락에서 그 이야기를 이어가보려 한다.

흔히 ‘이명박근혜’라고들 말하지만, 박근혜 정부 4년은 이명박 정부 5년과는 확연한 차이가 있었다. 주변의 지식인과 정책전문가들은 너나 할 것 없이 심각한 종말론적 위기감을 토로했다. 정권의 단물을 나눠 먹고 있는 극히 일부를 제외하면 이념도 세대도 상관없는 위기감이었다. 이명박 정부 때는 그렇지 않았다. 진보와 젊은 세대가 동의하든 안 하든 보수와 기성세대는 나름의 자기 주장을 가지고 있었다.

박근혜 정부 들어서는 이념이나 세대 따위가 문제가 아니라 이대로 가면 정말로 몇 년 안에 나라가 망한다는 위기감이 널리 공유되었다. 이제는 정말로 대결적인 정치가 아니라 합의적인 정치가 필요하고, 5년마다 뒤집히는 정책이 아니라 장기적이고 일관된 정책이 필요하다는 깨달음이었다. 그것도 지금 당장 하지 않으면 두 번 다시 기회가 없다는 절박한 깨달음이었다. 학계와 시민사회에서도 차기 대선에서 이 깨달음을 현실로 만들기 위한 여러 조직과 실험이 진행되기 시작했다. 진보단체와 합리적 보수단체들이 함께 활동하려는 움직임도 감지되었다. 아직까지 대중적 공감이란 과제가 남아있었지만, 적어도 지식인·전문가 사회 내부에서만이라도 보기 드문 합의가 만들어지고 있었다. ‘시대정신’이라 불러도 손색이 없을 것이었다. 이런 상황에서 박근혜·최순실 게이트가 터졌고, 모든 것은 탄핵과 조기대선 국면으로 빨려들어갔다.

더불어민주당 문재인 대선후보(왼쪽에서 세번째)가 지난 8일 오후 서울 마포구 한 호프집에서 안희정 충남지사(오른쪽), 이재명 성남시장(왼쪽에서 두번째), 최성 고양시장(왼쪽) 등 경선 경쟁자들과 건배를 하고 있다. 연합뉴스

민주당의 경선 라인업은 꽤 괜찮은 그림이었다. 노무현의 친구 문재인이 지지율 1위로 우뚝 나서고, 합의의 정치를 앞세워 중도보수까지 확장성을 보여준 안희정이 2위, 문재인의 왼쪽에서 강력한 개혁 드라이브를 걸어준 이재명이 3위를 차지하기도 했으니 말이다. 문재인의 ‘정권교체, 적폐청산’ 프레임은 앞서 말한 ‘시대정신’에 비추어보면 아쉬움이 많았지만 경선국면이었으므로 이해할 수도 있었다. 경선 경쟁력과 본선 경쟁력이 늘 거꾸로 가는 민주당의 딜레마가 있고, 안희정이라는 위협적인 경쟁자가 존재하는 상황이었으므로. 그러나 경선이 끝나고 본선이 시작된 지금도 그 프레임이 변함없이 유지되는 것은 곤란하다. 선거공학적으로 불리할 뿐 아니라 시대적 과제를 해결하는 데에도 결코 도움이 되지 않는다.

박근혜 탄핵과 구속에 대한 변함없이 높은 찬성률이 보여주듯이, 상당수의 보수층 유권자들은 지난 대선에서 자신들이 잘못된 선택을 했음을 이미 인정했다. 동시에 그들은 박근혜 같은 후보가 아닌, ‘괜찮은 보수’ 후보를 찾기 위해 필사적으로 노력해왔다. 그런 사람이 있다면 그 사람에게, 정 없다면 문재인에게 표를 주거나 기권할 수밖에 없다는 생각이었다. 그런 탐색이 반기문에서 황교안과 안희정을 거쳐 안철수에게까지 이어졌다.

안희정의 경선탈락 이후 안철수 지지율이 계속 오르더니 지난 주말 사이 다자구도에서도 안철수가 1위를 차지하는 여론조사 결과가 처음으로 발표되었다. ‘적폐세력의 지지를 받는 후보’라는 프레임은 별 효과가 없을 것이다. 적폐 정치인은 버젓이 남아있으나, 적폐 유권자는 없기 때문이다. 문재인 지지층의 높은 충성도가 반드시 플러스 요인인지도 다시 생각해야 한다. 지난 대선에서도 그랬듯이 이번 대선에서도 그들의 높은 충성도는 역으로 확장성을 방해하는 요소를 동시에 가진 양날의 칼이기 때문이다.

노무현 전 대통령은 최고 권력을 쥐고도 소수파일 수밖에 없는 이 나라의 정치구조 속에서 홀로 고군분투하다가 비극을 맞이했다. 안전장치도 제대로 갖춰지지 않은 개도국 대학의 실험실에서 홀로 밤을 새우며 실험에 몰두하다 폭발사고를 당한 과학자처럼 가슴 아픈 일이었다. 그 모습을 가장 가까이서 지켜본 문재인이 철저한 개혁을 다짐하고 또 다짐했으리라는 것은 충분히 이해할 수 있다. 그러나 그때의 교훈을 살리기 위해서라도 개혁과 통합, 개혁과 미래설계를 분리해야 한다. 개혁은, 설사 저강도라 하더라도, 법과 시스템에 따라 예측 가능한 방식으로, 그러나 한 치의 흔들림도 없이, 5년 내내 지속되어야 한다. 저강도의 일관된 개혁이 고강도의 일회성 개혁과 그에 따르는 역풍에 비해 훨씬 효과적이다. 후보는 ‘청산’을 말할 것이 아니라 ‘통합’과 ‘미래’를 말해야 한다. 19대 대선의 화두는 진영 대결이 아니라 국민통합이다. 상대 진영은 이미 파산했고, 안철수 지지자는 청산 대상이 아니다. 19대 대선은 18대 대선과 다르다.

장덕진 | 서울대 교수·사회학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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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이 국제사회의 동네북이고, 한국외교가 사면초가 상태라는 말은 더 이상 언론의 과장이 아니라 정확한 현실 저격이다. 박근혜 정부는 출범 이래 늘 내치에는 문제가 있어도 외교만은 잘한다는 식으로 평가되어왔던 것과 비교하면 격세지감이다. 물론 그런 평가는 순방외교의 겉치레에 의한 가짜 이미지였다. 보수정부 9년 동안 철저한 외교무능으로 국제사회에서 한국의 외교 입지는 계속 좁아졌다. 부시 행정부의 애완견이라고 불릴 정도로 절대 친미를 고집하고, 중국 및 러시아와의 관계가 악화되고, 일본과는 단절했으며, 진보정부 10년간의 남북관계 성과를 폐기함으로써 동북아에서 주도권은커녕 소외돼 버렸다.

이명박 정부의 친미대북강경책에 대한 비판과 함께 변화를 약속하며 집권했던 박근혜 정부는 시간이 갈수록 복잡한 동북아 국제정치를 일차방정식의 단순 진영외교로 회귀시켰다. 여전히 대북 제재 일변도와 북한붕괴론에 집착하며, 친미 편승의 외눈박이 외교를 고수했다. 무엇보다 안보위협을 과장하면서 국내권력을 강화하는 소위 ‘갈라치기’로 국민과 국익을 위한 위민외교(爲民外交)를 외면하고 국민을 이용하는 용민외교(用民外交)로 일관했다. 특히 불확실성, 불안정성, 복잡성이 특징인 대외환경에서 다양한 외교카드를 개발·활용해야 함에도, 오히려 전작권 환수 연기, 개성공단 폐지, 사드 배치, 중국 전승절 참석, 한·일 위안부 문제 합의, 대미 무기 구입 등의 카드도 모조리 반대급부도 없이 소진해 버렸다. 게다가 관료와 전문가들까지 주변화시키고 오직 대통령의 심기, 또는 심지어 국정농단자의 심기에 의존한 결과는 우리가 목도하듯이 심대하다.

미국을 방문한 김관진 청와대 국가안보실장이 1월 9일(현지시간) 도널드 트럼프 미국 차기 정부의 마이클 플린 국가안보보좌관 내정자와 만나 악수를 하고 있다. 주미대사관

국정공백에 이르자 그간 외교 실패의 결과들이 한꺼번에 쏟아져 나왔다. 중국 정부의 사드 배치 관련 제재는 전방위로 확대되고 있으며, 일본은 소녀상과 관련해 적반하장의 한국 때리기를 멈추지 않는다. 북한은 한국을  안중에도 두지 않고 미국만을 상대로 대륙간탄도미사일(ICBM) 위협과 대화 요구의 줄타기 행보다. 그리고 트럼프 신행정부는 선거 기간부터 동맹과 무역에서의 불공정성을 빌미로 우리를 압박하고 있다. 트럼프의 대중 압박기조와 중국의 물러서지 않는 강한 대응으로 한국의 선택지는 시간이 갈수록 점점 줄어든다. 남북관계가 제로상태가 됨으로써 북한 핵 문제가 미·중의 대결구조를 부추기고, 이는 우리의 입지를 막다른 골목으로 몰고 있다. 윤병세 장관이 미·중 양측으로부터의 러브콜이라던 평가는 그때도 틀렸고, 지금은 더 틀렸다.

세상 모든 일이 그렇듯이 결격자가 쓸데없이 과욕을 부릴 때가 가장 문제인데, 현재의 권한대행 정부가 바로 그런 경우다. 지난 연말에 방위사업청장이 미국으로 가서 방위분담금 인상을 언급하고, 한·일 군사정보보호협정의 국무회의 졸속 통과도 모자라서, 올해 벽두에는 김관진 안보실장이 방미해 미국의 압박이나 요구도 없는 상황에서 스스로 사드 조기배치론을 성급하게 던졌다. 역시 그 나물에 그 밥이라지만 박근혜 정부의 외교무능을 반복하고 있는 것이다.

분명히 해야 할 것이 있다. 그것은 탄핵정국과 촛불정국으로 인한 외교공백이 문제의 본질이 아니라, 이전의 외교실패가 초래한 위기상황이라는 점이다. 이런 인식이 중요한 이유는 황교안 권한대행이 외교공백을 최소화한다는 이유로 섣부른 외교에 나섬으로써 또 다른 위기를 자초할 수 있기 때문이다. 한국외교의 어려움은 대외환경의 악조건에서도 기인하지만, 그보다 국민의 지지를 받지 못한 결과다. 외교의 힘은 협상의 기술보다 국익을 중심에 둔 합리적인 정책결정과 그 정책을 뒷받침하는 국민의 힘으로부터 생기는데 박근혜 정부의 외교안보팀은 여기서 완전히 실패했다. 이렇게 볼 때 황교안 권한대행 정부는 국민의 지지를 받는 외교가 원천적으로 불가능한 정부라는 점에서 오버하지 말고, 그 자리에서 멈춰야 한다는 결론이 나온다. 모든 외교역량을 상황관리에만 집중하고, 이후 새로운 외교의 시도는 물론이고, 기존 외교사안의 진행도 차기 정부로 이양해야 한다. 혹시라도 반드시 진행해야 할 시급한 외교사안일 경우에는 국회와 협의해야 마땅하다. 촛불민심을 망각하고 다시 외교를 이용해 국정농단 세력의 부활을 꿈꾼다면 그것은 결코 용납될 수 없다.

한국이 현재 처한 외교공백이 위기상황임을 부정하는 것은 아니다. 그러나 이제는 치밀한 차선으로 가야 한다. 다른 국가들의 외교카드가 나오는 것을 지켜보고 한국의 입장은 가능한 한 뒤로 미뤄야 한다. 주변국의 요구와 압박이 있을 경우에는 한국의 현 상황을 역으로 정당화 수단으로 역이용하면 된다. 제발 부탁한다! 황 대행 정부 가만히 있어라! 다음 정부의 입지를 좁히는 행보를 멈추라. 카드를 숨기고 분석하고 준비하라. 행동하지 마라.

김준형 한동대 교수·국제정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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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근 많은 국민이 검찰의 ‘박근혜·최순실 게이트’ 수사를 숨죽여 바라보고 있다. 오늘은 또 어떤 혐의가 나오고 어떤 비리가 더해질 것인지 검찰의 수사 하나하나에 촉각을 세우고 있다. 지금까지 검찰이 밝혀낸 것만 해도 박근혜 대통령과 최순실 일당의 범죄 혐의는 상상을 초월한다.

하지만 검찰 수사와 별개로 우리는 최근 드러나고 있는 사건들의 보다 근본적인 문제를 생각해야 한다. 무엇 때문에 이러한 국정농단과 엄청난 비리가 일어났는지 근본 원인을 짚어봐야 하는 것이다.

민정수석은 청와대에서 민정, 공직기강, 법무, 민원을 담당하는 직책이다. 민정수석은 국가 인사에 관여하고 감시하며 사정기관들의 정보를 취합하기도 한다. 현재 확인된 여러 비리들은 민정수석이 제대로 된 역할을 했었다면 일어날 수 없었던 일들이지만 실상은 민정수석이 오히려 이런 일들에 공공연하게 앞장선 것으로 드러나고 있다.

24일 오전 김수남 검찰총장이 대검찰청 청사로 출근하고 있다. 서성일 기자

검사 출신인 우병우 전 민정수석에 앞서 박근혜 정부에는 곽상도·홍경식·김영한 3명의 민정수석이 있었는데 모두 검사 출신이었다. 사의를 표명하긴 했지만 우 전 수석의 후임으로 임명된 최재경 민정수석 역시 검사 출신이다. 이 밖에도 정홍원 전 국무총리, 황교안 국무총리, 김기춘 전 비서실장, 안대희 총리 후보, 그리고 최근 박근혜 대통령의 변호를 맡은 유영하 변호사까지 모두 검사 출신이다.

이 정도 되면 대한민국은 사실상 검찰공화국이나 마찬가지라고 할 수 있다. 그런데 검사 출신들이 가장 막강한 실권을 행사하고 있던 박근혜 정부에서 벌어진 엄청난 비리는 우리에게 많은 것을 시사한다.

실질적인 견제기관 하나 없는, 세계에서 가장 막강한 권한을 가진 한국의 검찰조직이 변하지 않는다면 앞으로 이런 일들이 다시 벌어지지 않으리라 결코 보장할 수 없는 것이다. 고 노무현 전 대통령은 자서전에서 임기 중 가장 후회되는 일로 검찰을 개혁하지 못한 것이라고 밝힌 바 있다.

‘박근혜·최순실 게이트’ 수사와 함께 근본적으로 한국의 검찰이 바뀌어야 한다. 수십년간 외쳐온 말뿐인 그들만의 개혁이 아니라 진정으로 검찰이 바뀌어야만 한국 사회는 근본적으로 달라질 수 있을 것이다.

이동규 | 충남 아산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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박근혜 정부의 미스터리가 꼬리에 꼬리를 물고 있다. 의미가 통하지 않는 발언들도 그렇지만, 앞뒤 맥락이 맞지 않는 수많은 정책들이 과연 누구에 의해 어떤 이유에서 나온 것인지, 심각한 물음표가 국민들의 머릿속을 가득 채우고 있다. 일본군 ‘위안부’ 문제 합의는 그 대표 사례 중 하나다.

첫째, 취임 초 일본군 위안부 문제 해결을 유달리 강조한 이유는 무엇일까? 취임 직후부터 한·일 과거청산에 관해 강한 발언들을 쏟아낸 박 대통령은, 2013년 10월29일에는 “문제가 하나도 해결 안된 상태에서, 일본이 거기에 대해 하나도 변경할 생각이 없는 상황에서 그 정상회담은 안 하느니만 못하다”면서 일본군 위안부 문제의 해결을 정상회담 개최와 연계시켰다. 여성 대통령으로서 특별한 문제의식을 가졌기 때문일까? 설사 그렇더라도 경제와 문화 등 다양한 문제들이 얽혀있는 한·일관계를 하나의 문제가 해결되지 않으면 올스톱시키겠다고 나선 것은 분명 ‘비정상 외교’다.

김복동 할머니(가운데) 등 일본군 위안부 피해자들이 3일 서울 광화문광장에서 열린 ‘박근혜·최순실 게이트에 대한 일본군 위안부 관련 단체 시국선언’에서 박근혜 대통령의 하야를 요구하고 있다. 정지윤 기자

둘째, 그럼에도 지난해 12월 ‘최악의 합의’를 덜컥 해버린 이유는 무엇일까? 일본 정부가 내놓은 것은 한국인 피해자들에 의해 이미 거부된 1995년 국민기금 수준에도 못 미치는데, 최종적·불가역적 해결과 국제사회에서의 비난·비판 자제, 심지어 평화비(평화의 소녀상)에 대한 일본 정부의 우려가 해결되도록 노력하겠다는 약속까지 해주었다. 취임 후 2년8개월 이상 정상회담을 거부하는 초강수를 둔 끝에 이런 허망한 합의를 해버린 것이다. 합의 이후 일본은 10억엔을 내놓는 것으로 한국에 대한 과거청산이라는 짐을 벗어던졌다. 아베 총리는 합의를 ‘외교 치적’으로 내세워 중의원 선거에서 압승하고 자민당 총재 3기 연임을 얻어내 최장수 총리와 ‘평화헌법’ 폐기라는 ‘숙원사업’ 해결을 향해 나아가고 있다. 반대로 한국은 새로운 갈등을 떠안았다. 박 대통령은 피해자와 시민들이 1990년대 초부터 4반세기 이상 지난한 노력 끝에 어렵게 얻어낸 일본의 법적 책임이라는 성과를 한순간에 무너뜨리고, 합의의 폐기를 주장하는 그들에게 맞서며 전에 없던 갈등을 만들어내고 있다. 누가 봐도 ‘외교 참사’다.

셋째, 다시 그럼에도 그 잘못된 합의에 과도하게 매달리는 이유는 무엇일까? 합의가 잘못된 것이라는 사실은 이미 명명백백하게 확인되었다. 그런데도 박근혜 정부는 ‘이행 강행’에 목을 매고 있다. 정부기관도 아니고, 민간단체도 아닌 정체불명의 ‘화해치유재단’ 설립을 강행했다. 일본 정부가 ‘절대로 배상금이 아니고 치유금이다’라고 거듭 못 박는데도 10억엔을 서둘러 받았다. ‘성노예’라는 극한적인 아픔을 겪은 피해자들을 찬성파와 반대파로 나누는 짓까지 서슴지 않았다. 심지어 초등학교 교과서에서 일본군 위안부와 성노예라는 단어를 삭제하고 관련 사진도 지웠다. 여성가족부가 추진하던 백서 사업과 유네스코 세계기록유산 등재 사업을 중단시키고, 이미 편성되어 있던 예산조차 집행하지 않았다. 미국 캘리포니아주 정부에 대해 역사교과서 교사용 지도서에 합의가 게시된 일본 외무성 홈페이지 주소를 실어달라고 부탁했다고도 한다. 합의에 포함돼 있지도 않은 이 참담한 일들을, 가해국 정부가 그렇게 하더라도 비난받아 마땅할 터인데, 피해국 정부가 나서서 하고 있으니 참으로 ‘괴기스러운 집요함’이 아닐 수 없다.

박근혜 정부의 대표적인 외교 실책인 일본군 위안부 문제 합의는 마땅히 폐기해야 하고, ‘화해치유재단’은 즉각 해산해야 한다. 국회가 국정조사를 실시해 그 잘못된 합의가 나오게 된 이유, 합의의 범위를 넘어서까지 박근혜 정부가 일본군 위안부 역사 지우기에 매달리는 이유를 명확하게 밝히고, 그에 따른 책임을 철저하게 물어야 한다. 이 전대미문의 혼란 속에서 ‘박 대통령은 외치만 맡는 수습책’이 고개를 내밀고 있다. 하지만 일본군 위안부 문제 합의 하나만 보더라도 외치도 맡아서는 안되는 이유는 이미 넘치고 넘친다.

김창록 경북대 법학전문대학원 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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국가가 권력을 행사하는 것을 합법적으로 인정하는 것은, 국가의 행위가 시민의 자유와 권리를 보장해주는 것을 전제로 한다. 중·고등학교 사회 시간에 배웠던 사회계약설의 개념이다. 사회계약설은 계몽사상의 핵심 논리로 근대 민주주의 사회를 형성하는 기반이 됐다. 구태여 사회계약설을 언급하지 않더라도 사람들은 적어도 국가가 국민을 보호해줄 것이라고 믿어왔다. 그러나 우리는 역사에서 그런 믿음을 저버리는 국가의 행위가 있었음을 잘 알고 있다. 국가가 국민을 보호하기는커녕, ‘국가’의 이름을 내세운 정치권력이 국민의 자유와 권리를 탄압하는 일도 적지 않았다. 나치 독일이나 군국주의 일본이 그러했으며, 3대 세습체제인 북한도 국민의 인권을 탄압하는 행위로 국제사회의 비판을 받고 있다. 1970년대 유신체제하에서 우리도 그런 경험을 했다. 그런데 민주화가 이루어졌다고 생각하던 한국사회에서, 우리는 또다시 국가가 국민을 보호해줄 것이라는 기대감을 잃게 된다.

9월 29일 서울 종로구 세종문화회관 앞에서 열린 ‘백남기 농민 사망 국가폭력 규탄 시국선언’에서 백씨의 둘째딸 민주화씨가 발언하고 있다. 서성일 기자

세월호 사건에서, 백남기씨 사망에서 우리는 이런 현실을 본다. 많은 시민이 TV 화면으로 지켜보는 앞에서 300명이 넘는 사람들이 세월호 배 안에 갇혀서 목숨을 잃었다. 사고신고 접수 후부터 배가 완전히 침몰할 때까지 2시간 이상의 시간이 있었으며 침몰 후에도 당일에는 상당수 생존자가 배 안에 갇혀있을 가능성이 있었는데도, 국가는 거의 손을 쓰지 못했다. 경찰의 물대포에 맞아 쓰러진 백남기씨는 의식을 찾지 못한 채 317일 동안 병원에서 투병하다가 끝내 목숨을 잃었다. 상당수 시민들에게 공권력은 자신을 보호해줄 것이라는 기대감보다는 두려움으로 다가온다. 미르·K스포츠재단에 대한 ‘유언비어’를 퍼뜨리면 의법 조치도 할 수 있다는 위협이 그러하다. 국회 대정부 질문 답변에서 황교안 총리는 “의혹은 누구나 얘기할 수 있으나 의혹제기에 대한 책임은 져야 한다”고 했다.

이제 국민은 정부와 관련된 문제라면 이해가 가지 않거나 의심할 만한 일이 생겨도 함부로 이야기해서는 안된다. 이 사실을 다른 사람에게 이야기하고 싶으면 스스로 입증해야 한다. 그러지 않으면 국가에 의해 법적 조치를 당할 수도 있다. 정부 정책과 의견을 달리하면 피해를 입을 수 있다는 생각에 두려워해야 하는 것이다. 마치 1970년대 포장마차에서 막걸리를 마시면서 정부를 비판하다가 공안당국에 끌려갔다는 사건을 연상시킨다.

사실 사회계약설과는 달리 현대 사회에서 국가가 반드시 시민의 자유와 권리를 보장해줄 것이라고 기대하는 사람은 별로 없다. 국가가 잘못된 정책을 시행하거나 행위를 하지 말아야 하지만, 어쩌다 그런 잘못을 했다고 해서 국가를 없애야 한다는 주장도 나오지 않는다. 그런 의미에서 민주주의의 기본 사상으로 일컬어지는 사회계약설은 현실에는 적용되지 않는 그저 ‘이론’에 지나지 않을지도 모른다.

문제는 국가를 운영하는 정부가 그런 잘못을 되풀이한다는 점이다. 잘못을 되풀이하지 않으려면 원인이 무엇인지 제대로 밝혀야 한다. 그렇지만 세월호 침몰의 원인이 무엇인지, 왜 시간적 여유가 있었는데도 승객을 구조하지 못했는지는 아직도 명확하지 않다. 사건의 책임 소재도 불투명하다. 그저 승객을 내버려둔 채 탈출한 선원들과 선박회사, 현장 구조를 효과적으로 하지 못한 해경의 책임만 물었을 뿐이다. 백남기씨가 시위 도중 물대포를 맞고 쓰러져 병원에 갔다는 사실을 많은 사람이 목격했으며 영상으로도 남아 있다. 병원의 진료기록에서도 ‘외상성 뇌출혈’을 선행 사인으로 기록하고 있다고 한다.

그렇다면 이런 일을 되풀이하지 않기 위한 원인 규명은 사건을 불러일으킨 시위 진압 방식이 어디서 비롯됐는지를 밝히는 것이다. 그런데도 경찰은 이 문제에는 신경을 쓰지 않은 채 고인의 부검에만 집착하고 있다. 이와 같은 시위진압 방식을 개선하기 위한 방안은 논의도 되지 않았다. 그러면서 세월호나 백남기씨 사망 사건의 진상규명을 요구하는 유가족과 시민들을 국가는 다시 ‘공권력’이라는 이름으로 억누르는 악순환만 되풀이하고 있다.

이런 현실에서 국가는 우리에게 두려운 존재로 다가온다. ‘국가’의 이름을 내건 정부는 자신과 이념이나 노선을 같이 하는 사람들은 보호하지만 생각을 달리하는 사람들은 적대시한다. 국민들에게 국가에 보호를 요구할 수 있는 ‘시민’이 아니라 국가의 눈치를 보는 ‘신민’이 되기를 요구한다. 정부가 그토록 내세우는 자유민주주의를 이룬 근간인 시민적 권리는 그저 교과서 안에 나오는 책상 지식으로 전락한다. 국가가 우리를 보호해줄 것이라는 기대감도 함께 사라진다.

김한종 | 한국교원대 역사교육과 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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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osted by KHross