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작은 지난 대통령 선거 이틀 뒤였다. 2012년 12월21일 한진중공업 노조원 최강서가 자살했다. 이어 현대중공업 사내하청 해고자 이운남, 한국외대 노조위원장 이호일, 기아자동차 사내하청 해고자 윤주형, 현대차 비정규 노동자 박정식의 죽음이 이어졌다. 왜 노동자들은 대선 직후 자살했을까? 노동자들 죽음의 행렬을 초래할 만큼 선거가 중요했나?

하지만 다음 선거를, 5년 뒤를 기약할 수 있는 사람들은 죽지 않았다. 지금 당장 조금의 미약한 훈풍이라도, 그 어떤 여지라도 기대했던 노동자들은 속절없이 무너져 내렸다. 정작 그 선거로부터 건질 것이 가장 적었던 노동자들이 죽음을 선택했다는 사실은 선거의 아이러니가 아닐 수 없다. 선거 국면에서 정리해고 철폐와 비정규직 폐지를 외치며 실낱같은 희망을 걸었던 노동자들의 기대는 속절없이 무너졌고 여전히 배제된 자들인 노동자들에 대한 제도정치권의 외면은 결국 노동자들을 절망으로 몰아넣어 죽음이라는 극단적인 선택을 하게 만들었다.

박근혜 대통령에 대한 탄핵소추안이 국회에서 가결된 지난 9일, 나는 어쩔 도리 없이 최강서를 생각했다. 그의 유서를 생각했다. “나는 회사를 증오한다. 자본, 아니 가진 자들의 횡포에 졌다. 어떻게 해야 할지 모르겠다. 심장이 터지는 것 같다. … 박근혜가 대통령 되고 5년을 또 … 못하겠다.” 그렇다면 지금은 어떨까? 촛불들의 이른바 ‘시민혁명’은 과연 노동과 만날 수 있을까? 박근혜씨가 대통령이 됐을 때 조그만 기대조차 무너져 목숨을 버려야 했던 사람들을 기억해줄까? 가장 먼저 박근혜 퇴진을 외치고, 그 체제의 귀퉁이에서 가장 먼저 절망했던 사람들 말이다.

단지 죽은 자들만이 아니다. 실제로도 그러했다. 시민들이 다음 선거를 기다리고 있을 동안에도 이 사회의 거리거리에는 노동자들, 특히 비정규 노동자들이 있었다. 그들은 박 정권하에서 가장 먼저 탄압당했고, 가장 먼저 떨쳐 일어났다. 이천 하이디스 노동자들은 정리해고되어 거리로 나섰고, 구미 아사히글라스 비정규 노동자들은 노조를 만든 지 한 달 만에 쫓겨나 거리로 나섰다. 그리고 지난해 10월 비슷한 처지의 11개 군소 사업장 노동자들이 모여 ‘노조파괴, 민생학살, 박 정권 퇴진을 위한 노동자 공동투쟁’을 만들었고, 박근혜 퇴진을 가장 먼저 외쳤다.

아마 박근혜 탄핵이 최종 결정되면 정치적 민주주의로 족한 사람들은 거리를 떠날 수 있을 것이다. 촛불을 놓을 수 있을 것이다. 하지만 여전히 이 땅 거리에 남아 있어야 하는 사람들은 여기 있을 것이다. 한국의 협소한 정치적 민주주의가 담아내지 못하는 노동, 민중생존권, 반제국주의의 문제들을 두고 싸워야 하는 이들은 그다음 닥쳐올 질서잡기의 역풍을 고스란히 맞아야 할지도 모른다.

과연 촛불은 최강서를 기억해줄까? 촛불 안에 있는 다양한 차이들, 특히 여성, 청소년, 장애인, 노인 등 사회적 소수자들도 포용할 수 있을까? 촛불엔 아직 박근혜를 향한 분노 말고는 공통분모가 없다. 시민혁명이라는 거대 담론 뒤안에는 목소리조차 내지 못하는, 그 목소리조차 평등하지 않은 사람들의 긴 그림자가 있다. 이른바 시민혁명의 주체는 여전히 비어 있다. 그리고 시민혁명의 주체는 대문자 ‘시민’이 아니라 이제 다양한 사회적 주체로 대체되어야 한다. 그렇게 시민이 다양화하고 분기해서 자신들의 사회적 이해를 드러내고 그것의 연합 속에서 조직되어 ‘사회정치적 동맹’을 만들어 나갈 때, 이 사회는 단지 권력의 우두머리 하나를 교체하는 것 이상의 것들, 사회를 재편하고 헌법을 다시 쓰는, 말 그대로 새로운 민주주의 혁명을 경험할 수 있을 것이다.

누구는 대통령 탄핵을 두고 “로도스가 저기다, 뛰어내려라”라고 했지만, 내가 보기에 ‘우리’가 가야 할 로도스는 아직 시계 제로다. 그 섬은 아직 보이지 않는다는 말이다.

권영숙 | 노동사회학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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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 달을 훌쩍 넘어 계속되는 촛불집회에서 관심을 모으는 것 중 하나는 청소년의 참여가 크게 늘어나고 있다는 사실이다. 이들은 교복을 입고 집회에 참여하여 당당하게 자기 주장을 펼친다. 이런 모습을 보고 사람들은 ‘미안하다’고 되풀이하거나, ‘기특하다’거나 ‘어른들보다 오히려 낫다’고 격려한다. 그런데 촛불집회에 참여하는 청소년들 중에는 이런 이야기가 별로 기분 좋지 않다는 반응을 보이는 경우도 있다. 왜 그런 것일까?

말한 사람이 의도하지는 않았을지라도 청소년들에게는 이런 말들에 ‘너희는 아직 어리다’라는 의미가 깔려 있는 것으로 비쳤을 것이다. 실제로 우리 사회는 청소년이 미성숙한 존재라고 강조해 왔다. 그래서 어른의 ‘지도’를 받아서 생각하고 행동해야 하는 것이 청소년이라고 여겨왔다. 촛불집회 참여 학생들이 말하는 것처럼 청소년은 3·1운동, 6·10만세운동, 광주학생운동, 4·19혁명 등 한국 근현대사의 주요 사건들을 확산시키는 기폭제 역할을 했다. 학교 역사교육은 이 사건들을 비중 있게 다루면서, 이에 참여한 청소년을 불의에 항거한 깨어있는 존재로 자랑스럽게 그린다.

그런데 언제부터인지 청소년은 ‘미성숙한 존재’라고 인식되었다. 대학에 들어가기 전까지는 정치에 관심을 가져서는 안되며, 사회문제에 자기 의견을 내서는 안되는 존재로 여겼다. 학생들은 학교가 정해주는 교칙에 따르고, 대학 진학을 위해 밤늦게까지 야간자율학습에 열중하는 ‘모범생’이 되도록 요구받았다. 학교의 ‘정치’ 과목은 민주주의의 원리를 가르치고 참여 민주주의의 필요성을 강조하지만, 정작 민주사회를 만드는 데 청소년이 나서는 것은 ‘정치적’이라는 구실로 금기시했다. ‘청소년은 자기 삶의 주인이다. 청소년은 인격체로 존중받을 권리와 시민으로서 미래를 열어갈 권리를 지닌다. 청소년은 스스로 생각하고 선택하며 활동하는 삶의 주체로서 자율과 참여의 기회를 누린다’는 청소년헌장의 내용은 문서 속에만 존재했다.

청소년단체인 ‘중고생연대’ 소속 회원 등 10대 청소년들이 지난 19일 오후 3시 서울 종로구 보신각 앞에서 ‘박근혜 대통령 하야 촉구 집회’를 열고 있다. 정지윤 기자

학교와 사회의 이런 태도는 많은 청소년으로 하여금 그들이 ‘사회적 존재’라는 것을 의식하지 못하게 만들었다. 1980년 5·18민주화운동에 고등학생들이 참여했지만 계속 이어지지 못했고, 1987년 6월 민주항쟁에서도 청소년은 잊혀진 존재가 되었다. 2000년대 들어서야 비로소 청소년들은 사회문제에 목소리를 내기 시작했다. 2002년 미군 장갑차에 두 여중생이 깔려죽은 사건에 촛불을 들었고, 2008년 ‘광우병 파동’ 당시 촛불집회의 기폭제가 되기도 했다. 그런데도 성인들은 이들을 어리다는 이유를 들어 시민사회와 격리시키려고 했다.

청소년은 학생이기 이전에 한 사람의 시민이다. 어른의 지도를 받아야 하는 미성숙한 존재가 아니라 자기 생각을 가지고 행동을 하는 사회 구성원이다. 더 배우고 공부해야 한다는 것이 사회문제에 참여할 자격이 없는 존재라는 의미는 아니다. 시민으로서 사회문제에 관심을 가지고 자신의 의견을 내는 것은 당연한 권리이다. 그러기에 오히려 청소년이 사회적 관심을 가지고, 사회적 의사결정에 능동적으로 참여할 수 있는 경험을 제공하는 교육이 이뤄져야 한다.

‘청소년은 사회의 미래’라는 말은 단지 그들이 연령이 높아져 앞으로 어른이 된다는 의미만은 아니다. 민주주의 훈련을 받은 청소년이 앞으로 합리적이고 비판적 사고를 바탕으로 사회를 이끌어 가리라는 기대감으로 이해되어야 한다. 그러한 민주시민 교육을 받은 청소년들이 성장했을 때 한국사회의 진정한 민주주의는 이룩될 수 있을 것이다. 어쩌면 오늘날 한국사회가 지금과 같은 문제에 부딪힌 원인 가운데 하나는 청소년 시기부터 사회참여를 위한 민주주의 훈련을 제대로 받지 못했기 때문일지 모른다.

촛불집회에 청소년의 참여가 늘자 새누리당의 일부 국회의원이나 보수우익 인사, 언론 등에서 여느 때와 마찬가지로 ‘불순분자’의 개입이나 전교조 관련 단체의 동원을 들먹인다. 오로지 종북이나 좌편향, 전교조 탓으로만 돌리면 문제를 해결할 수 있다는 식의 사고방식은 이제 너무도 식상하다. 더 큰 문제는 청소년을 스스로 생각하고 행동하는 시민으로 인정하지 않으려는 태도이다. 촛불집회에 참가한 청소년은 박근혜 대통령 퇴진 요구를 넘어서서 19세 이상에게만 선거권을 주는 어른들, 그리고 불평등한 사회구조를 바꾸려고는 하지 않고 무한경쟁에서 이겨야만 살아남는다고 가르치는 사회에 분노를 표한다. 자신을 억압하는 사회와 주변 사람들에게 항의한다. 우리는 함께 살아가는 존재이며, 사람답게 살 수 있는 세상을 함께 만들자고 요구한다. 이념과 좌편향 타령에만 매달리는 일부 어른들에 비하면, 훨씬 더 성숙한 사고이다.

김한종 | 한국교원대 역사교육과 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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냉소적으로 정의한다면, 정치란 사적 이익을 공적 이익으로 포장 또는 승화하는 일이다. 박근혜 대통령은 역으로 공적 이익을 사적 이익으로 만들었다. 적과 동지를 가르는 이분법의 정치에만 몰두했던 박근혜 대통령은 최소한의 포장마저 걷어냈다. 공인 박 대통령이 추구했던 사적 이익이 날것으로 드러났다. 그럼에도 3차 대국민담화에서 박 대통령은 “이번 일”이란 애매한 말로 ‘박근혜·최순실 게이트’를 얼버무렸다. “단 한순간도 저의 사익을 추구하지 않았고 작은 사심도 품지 않고 살아왔”다고 말하는 대통령이, 왜 자신의 “진퇴 문제를 국회의 결정에 맡기겠”다고 하는지 담화문에서는 그 이유를 알기 어렵다. 대통령직의 최대한 연장 또는 구속을 면하는 안전한 퇴진을 위해, 즉 무엇보다도 자신의 사적 이익을 위해 시간 벌기를 하겠다는 말로 읽힌다. 다시금 사적 이익에 골몰하는 공인 박 대통령이 아닌 사인 박근혜를 보게 된다.

지금 여기서 진행되는 국가권력의 사유화에 저항하는 시민혁명의 와중에 정치에 대한 냉소적 정의를 부르게 된다. 광장에 모인 자유로운 개인들의 연합이 정치권력을 장악하지 ‘않으려는’ 또는 ‘못하는’ 우리 시대 혁명의 한 특징 때문이다.

일단, ‘않으려는’에 주목한다. 100만명 이상이 참여하는 비폭력 평화시위는 인류역사에서 상상하기 힘든 사건이다. 대통령의 퇴진을 요구하는 정치적 시위가 곧 축제가 되는 전변이 계속되고 있다.

박근혜 대통령 퇴진촉구 '6차 촛불집회'가 열린 3일 횃불과 촛불을 든 시민들이 서울 광화문 광장과 시청광장 일대를 출발해 청와대로 향하고 있다. 정지윤기자

2008년의 촛불집회처럼 전위와 대중, 지식인과 민중, 활동가와 시민의 이분법도 없다. 주최 측이 있다면, 광장의 정치를 준비하는 일꾼들이지 그들이 자유로운 개인들의 대표는 아니다. 그들을 대표라고 생각하는 사람들은 대표가 있어야 광장이 탄생할 수 있다고 생각하는, 광장에 참여하지 못하거나 또는 광장에서 사적 이익의 실현을 고민하는 낡은 보수·진보세력뿐이다. 자유로운 개인들의 네트워크인 ‘반(反)국가적 국가’ ‘시민국가’ 만들기라는 미답의 길을 우리는 걷고 있다.

그러나 ‘못하는’의 한계가 암초처럼 우리의 항해를 방해하고 있다. 시민혁명이 외치는 공인 박 대통령의 퇴진은, 대통령이 스스로 사의를 표명하는 사적 결정이 아니라 제도적 절차를 거쳐야 하고, 따라서 제도정치를 통과해야 한다. 사인 박근혜는 3차 대국민담화에서 볼 수 있듯이 그 지점을 예리하게 인지하고 있다. 선출된 권력인 대통령의 직무를 중단케 하는 결정은 선출된 대표기관인 의회의 탄핵이어야 한다. 명예로운 퇴진은 정치적 수사일 뿐이다. 여야 담합을 통해 대통령의 퇴진을 결정하는 것은 탈법적인 정치적 행위다. 탄핵이 의제로 강제되자 다양한 정치세력들은 사적 이익을 고려하며 정치적 계산기를 두드리고 있다. 시민혁명이 새 헌정을 창출하려 하지 않고 그 능력도 없다고 생각하는 순간 이 계산기만이 작동한다.

박 대통령의 퇴진을 상수로 해서 자신들의 정치권력 장악이란 사적 이익에 유리한 정치일정을 공학적으로 고민하고 있다. 우리는 이 공학의 난무를 목도한다. 각당 내 다기한 세력들의 셈법이 매일매일 언론을 장식하고 있다. 물론 나는 이 욕망 자체를 부정하지는 않으려 한다. 그러나 어떤 세력이 자신들의 사적 이익을 공적 이익으로 잘 포장하고 있는지를 묻지 않을 수 없다. 시민혁명의 명령을 의회가 거부할 경우, 시민혁명은 의회를 탄핵하는 강을 건널 것임을 그들은 알아야 한다. 박 대통령이 직무정지 상태임에도 불구하고, 한·일 군사협력과 같은 사익 추구적 정책을 결정하는, 광장의 시민과 완벽하게 유리되어 작동하는 또 하나의 ‘비선국가’의 작동을 막기 위해서도 대통령 탄핵은 필수적이다.

지금 여기서 시민혁명의 최소 공통분모는 박 대통령의 퇴진이다. 우리는 시민혁명을 관전하며 지배연합의 재편성을 통해 시민혁명의 성과를 약탈하려는 세력에 맞설 수 있어야 한다. 반국가적 국가, 시민국가를 지향하는 광장의 자유로운 개인들이 대통령 퇴진 이후를 위한 반걸음, 아니 100분의 1 정도의 앞선 발자국을 남기지 않는다면, 모든 혁명의 다음이 그렇듯 반동을 맞이하게 된다.

박 대통령의 탄핵을 요구하는 ‘박근핵닷컴’만큼 탄핵 이후를 생각하는 ‘박근혜이후닷컴’을 준비할 수는 없을까. 형식주의적이어도 좋다. 이른바 지도를 자임하는 낡은 세력들이 위에서 아래로 부과하는 방식이 아니라 자유로운 개인들의 연합이 지향하는 바를, 시민혁명의 정수를, 시민혁명의 최소 공통분모를 간결한 몇 가지 원칙으로 만들 수 있는 방법은 없을까 생각해 본다.

구갑우 | 북한대학원대학교 교수·정치학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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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구·경북에 살고 있는 민주세력은 박정희 신화와 싸우고 있다. 우리의 상대는 박근혜나 새누리당이 아니라 박정희다. 박정희를 가리키는 ‘반신반인’이라는 말에 모두 놀랐겠지만 이곳에서는 이 말이 오히려 겸양이다. 이곳에서 그는 온전한 ‘신’이다. 샤먼이다. 박정희 초상 앞에 촛불을 켜놓고 기복하는 모습을 이 지역에서는 어렵지 않게 볼 수 있다. 박정희 신화를 재생산하는 일은 쉬지 않고 진행됐다. 박정희 동상을 크게 세우고, 그의 최대 치적이라고 하는 새마을 담론을 동원하면서 박정희 신화를 끊임없이 불러내고 있다.

신화의 세계에서 박정희와 싸우는 일은 참 어렵다. 신화는 맹목적 믿음이기 때문이다. 그것은 이데올로기보다도 강력하다. 이데올로기는 어떤 가치와 그것을 설명하는 논리이지만 신화는 조건 없이 따르는 것이다. 그래서 신화는 무섭다. 박정희 신화는 비판하면 할수록 더 단단해진다. 신화의 세계에서 박정희는 어떤 대화와 토론도 허락하지 않는다.

28일 서울 세종로 정부청사 앞에서 전교조와 한국사 교과서 국정화 저지네트워크 회원들이 오늘 교육부에서 발표한 한국사 교과서에 대한 입장을 발표하고 있다. 이준헌 기자 ifwedont@

이곳에서 민주화운동을 하는 사람들은 박정희 신화와 어떻게 싸울 것인가 고민이 이만저만 아니다. 경기 군포 지역구를 버리고 고향을 찾아온 김부겸은 박정희 신화와 싸우기 위해 고육지계를 썼다. 그는 대구에 ‘박정희 컨벤션센터’를 만들겠다는 공약을 걸었다. 그리고 그것과 광주의 김대중 컨벤션센터의 교류를 제안했다. 의표를 찌르는 제안이었다. 민주진영에서는 그것을 두고 논란이 많았다. 민주당 후보의 공약에 박정희 컨벤션센터가 무슨 말인가라는 것이었다. 그런데 김부겸의 의도는 박정희를 신화의 영역으로부터 역사의 영역으로 끌어내리자는 것이었다. 김부겸은 박정희를 역사의 세계로 호명한 후, 그를 신으로 여기는 사람들에게 말을 걸어보자는 생각이었다. 그리하여 차근차근 그의 행적을 역사적으로 따져보자는 계획이었다. 김부겸이 오해와 논란을 감수하면서 내건 그 ‘아슬아슬한 공약’은 이유가 있었고 타당한 것이었다. 그것은 대구·경북에서 신화가 된 박정희와 싸우는 방편이었다. 신화를 상대하는 것은 정말 어려운 일이었다.

그런데 이제 김부겸은 박정희를 신으로 섬기는 사람들에게 말을 걸기 위해 그런 부담스러운 공약을 하지 않아도 될 것 같다. 박근혜 스스로가 박정희 신화를 깨고 있기 때문이다. 내가 보기에 박근혜는 박정희 신화로부터 걸어 나온 ‘신의 딸’이다. 그는 자신의 능력과 판단이 아니라 아버지의 신탁(神託)으로 대통령이 된 사람이다. 그의 언어는 아버지의 그것이고, 그의 국가관도 아버지가 끌고 가던 유신체제의 그것이다. 박근혜는 아버지의 시대에 성장이 멈추어버린 신의 딸이다. 그는 사람을 잘 믿지 못하여 좋은 사람을 곁에 두지 않았고, 국가와 개인을 구분하지 못할 정도의 시대착오적 국가관을 가지고 있었으며, 나랏돈을 빼돌려 최순실에게 주어도 아무런 죄책감이 없었고, 자신을 비판한 사람들에게 냉혹한 보복을 하였다. 박근혜를 지배한 것은 박정희의 신탁이었다. 그가 재벌들을 불러놓고 거래를 하는 모습도 마찬가지였다. 그는 아버지가 하던 방식대로 권력을 휘두르다 파국을 맞이했다.

이제 시민혁명의 횃불이 켜지고 박근혜의 추한 모습이 드러나자 박정희 신전의 어둠도 걷히고 있다. 요즈음 박근혜의 거취에 대해 여러 가지 대안들이 제시되고 있는 모양인데, 중요한 것은 박근혜의 퇴진 과정에서 박정희 신화의 본질을 보여주고 그것을 역사적으로 청산하는 일이다. 박정희가 저렇듯 신화가 되어 그의 유령이 우리 곁을 배회하고 있는 것은 그가 비극적으로 세상을 떠나면서 역사적 청산의 기회를 거치지 않았기 때문이다. 박근혜의 잘잘못을 조목조목 짚어서 정리하고 평가하고 징벌하는 작업을 하면서 그것이 박정희의 신탁에 기인한다는 것을 보여주어야 한다. 어떤 정치인은 박근혜의 퇴진을 두고 명예를 지키도록 하겠다고 했다. 걱정스러운 발언이다. 이 사태를 정치적 타협으로 적당히 마무리하겠다는 정치적 수사가 아닐까라는 염려 때문이다. 박근혜가 자진 사퇴를 한다고 해도 적당히 얼버무려서는 안된다. 그렇게 되면 박정희 신화는 다시 부활할지 모른다.

검찰과 특검수사, 국정조사, 탄핵 등의 과정에서 우리가 해야 할 최소한의 목표는 박정희 신전의 어둠을 걷고 박정희의 신탁이 어떻게 박근혜를 통해 육화되고 박정희의 유령이 우리들 곁을 어떻게 배회하게 되었는지를 밝히는 일이다. 그 다음에야 비로소 우리는 새로운 질서의 건설에 대해 말할 수 있을 것이다.

김태일 | 영남대 정치외교학과 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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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울 광화문 일대, 본래 맘 편하게 걷는 곳이 아니다. 머물러 있기에 적합한 곳도 아니다. 곳곳에서 전경과 마주칠 수 있기에 이어폰을 끼고 음악을 들으며 빨리 지나가고 싶은 거리이다. 청와대와 가까운 효자로, 그리고 자하문로를 걸어본 사람은 누구나 그 기분을 안다.

2016년 11월26일 다섯 번째 주말 촛불집회가 열린 그날에 모인 군중은 청와대와 가장 가까운 곳까지 행진했고 그들의 요구를 대통령에게 통보했다. “박근혜는 즉각 퇴진/하야하라”고. 그날 군중의 한 명이 되어 세종대로를, 사직로를 그리고 종로를 오후 3시부터 그다음 날 새벽 1시까지 걸었다. 원하는 것을 얻을 때까지 아침이슬을 맞겠다는 즐거운 결기로 무장한 이 거대한 인간의 집합체를 관찰했고 그들이 외치는 구호를 채집했다.

도시의 차량을 통제한다고 도심의 거리가 광장이 되지 않는다. 광장은 도시공학의 산물이 아니다. 물리적인 공간에 생명체인 인간이 모일 때 광장은 만들어진다. 동원된 군중은 광장을 완성하지 못한다. 동원된 군중에게선 광장을 구성하는 결정적인 요인인 자발적 의지를 찾아볼 수 없기 때문이다.

26일 박근혜 대통령과 최순실 일당의 국정농단에 분노한 시민들이 서울 도심인 광화문과 세종로 일대에서 촛불집회를 열고 있다. 이석우 기자

우리는 교과서에서 배웠다. 모든 인간은 천부인권과 자연권을 갖고 있는 존재로 태어났음을. 서울의 150만명, 전국적으로 190만명의 사람들은 교과서에 단지 글로 존재하던 천부인권을, 그리고 국가는 자연권을 지닌 개인들이 맺은 계약의 산물임을 부인할 수 없는 사실로 만들어냈다. 자신이 자연권을 지닌 사회계약적 주체임을 자각한 개인들이 모였다. 그래서 평상시 통치의 영역이자 국가의 의지가 재현되는 곳에 다름 아니었던 광화문 일대가 시민들의 광장으로 돌변하는 사태가 기적처럼 일어났다. 그 기적의 다른 이름이 촛불집회이다.

모이는 사람들의 숫자가 늘어날수록 헌법 제1조 제2항 “대한민국의 모든 주권은 국민에게 있고, 모든 권력은 국민으로부터 나온다”는 텍스트는 물리적 힘으로 변화했다. 그들이 행진할수록 결집된 의지는 자연권에 의거한 주권자의 엄중한 명령으로 바뀌었다.

자유발언이 펼쳐지는 광장에서 고등학생, 주부, 회사원, 농민, 목사, 외국인, 대학생이 마이크를 잡고 현재의 부당함에 대해 발언할수록 그들은 국민으로 동원된 착한 주체에서 자신의 권리와 의무의 대칭성을 정확하게 파악한 사회계약적 주체로 거듭났다.

촛불집회에 참여한 연인원, 그리고 물리적으로 그곳에 있지 못했어도 가능한 모든 방법으로 그 광장에 접속한 사람의 규모는 ‘국민’에서 벗어나 ‘시민’의 역능(力能)과 비례한다.

조직에 속한 사람이든 그 어떤 조직에도 소속되지 않은 사람이든 이곳에선 ‘시민’이라는 주체로 합일된다. 깃발을 따라 행진하든 혼자서 행진하든 차이가 없다. 여기서는 혼자서(solitary)와 연대(solidarity)의 경계가 모호해진다. ‘국민’이라는 오래된 강제와 사유습관에서 벗어나는 한, 트위터와 페이스북과 인스타그램에서 이미 수없이 손가락으로 연습했던 ‘좋아요’와 ‘공유하기’와 ‘댓글달기’는 시민의 구호와 몸짓으로 거리에서 재현된다.

‘국민’으로 소환된 사람은 의무를 우선시한다. ‘국민’은 자신의 미래를 국가가 제시해주길 기다린다. 그리고 국가가 제시한 미래를 실현 가능성을 따지지 않은 채 믿어버린다. 국가에 의한 배신에 배신이 더해져도 미래를 국가에 기대는 관습을 ‘국민’으로 소환된 사람은 버리지 못한다. 사회계약적 주체로 거듭난 사람은 ‘국민’이 알지 못하던 시민의 ‘권리’를 너무 잘 알고 있다. 권리를 지닌 시민의 눈으로 지금 현재의 박근혜호 대한민국을 목격한 시민들은 “이게 나라냐”가 쓰인 손팻말을 들었다.

사회계약적 주체는 ‘광장’에서 각자의 미래를 상상하고 타인들과 교류한다. 여기에 모인 사람들은 새로운 시대를 원한다. 모든 ‘국민’이 ‘시민’으로 변화하지 않는 한, 압축성장 신화에 사로잡힌 앙시앵 레짐의 모든 관습에서 유래한 관행과 제도들이 대체되지 않는 한, 박근혜가 더 이상 대통령이 아니어도 과거는 무한 반복된다. 박근혜라는 이름은 이곳에선 한 개인의 이름이 아니라 ‘한강의 기적’이라는 이름으로 신화화되었던 한국 현대사의 앙시앵 레짐, 즉 구체제를 지칭하는 기호이다. “박근혜를 즉각 구속하라”는 외침은 구체제에 대한 긴급 정지명령에 다름 아니다.

박근혜는 박정희에 뿌리를 내리고 있는 구체제가 지연된 현재이다. 박근혜 퇴진은 단순히 정권의 교체를 의미하지 않는다. 사람들은 유예된 과거가 아니라 미래를 원한다. 미래는 현재가 작동 중지될 때야 비로소 다가온다. 그래서 사람들은 이런 구호와 함께 통치의 거리 광화문 일대를 걷는다. “정치검찰을 청산하라. 검찰을 개혁하라”, 그리고 “재벌들도 공범이다, 정경유착 재벌기업 처벌하라”고. 사회계약적 주체는 현재에 대한 작동 중지 명령을 시민의 의무로 파악한다. 국가에 광장에서 수집된 우리 모두의 공통의 미래를 요구하는 것이 시민의 권리라 이해한다. ‘국민’이었을 때 아무것도 아니었던 우리는 광장에서 이제 모든 것이 된다. 미래는 대통령이 아니라 시민들의 손에 달려 있다.

현재를 유지하려는 사람은 초조하기에 얼굴을 찌푸리지만, 미래를 상상하는 사람에게서 분노와 좌절은 찾기 힘들다. 여기엔 잉여의 무기력도 헬조선의 아나키스트적 분노도 없다. 여전히 진지하지만 영리한 군중들은 욕설의 카타르시스가 아닌 미래를 꿈꾸는 생성의 기쁨을 믿는다. 촛불집회는 이렇게 반복을 통해 진화했고 성장했다. 생성의 기쁨을 알아버린 사람은 폭력에 의존할 필요를 느끼지 못한다. 폭력은 현재를 지키려는 자의 비통한 마지막 몸부림이 되어 버렸다.

사람들은 명령하는 국가와 통치하는 국가를 넘어서 광장을 담는 국가를 기다리고 있다.

이제 대한민국이라는 나라에서 광장을 담지 못하는 그 어떤 정치, 그리고 그 정치가 제도화된 국가는 존재 정당성을 확보하지 못한다. 2016년 11월26일 그날 “우리가 주권자다”, “우리의 명령이다”, “세상을 바꾸자”라는 외침은 그래서 유난히 크게 들렸다.

노명우 | 사회학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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군중은 동일한 물리적 공간에 모인 다수의 사람들을 의미한다. 사회학자들은 군중의 유형을 다양하게 구분한다. 쇼윈도 앞에 모여든 ‘우연적 군중’과 스포츠 경기관람을 위해 모인 ‘관습적 군중’으로 나누거나, 강렬한 일체감으로 군무에 빠져드는 ‘춤추는 군중’으로 구분하기도 한다. 군중행동 가운데 언제나 주목되는 것은 집단저항이나 시위에 참여하는 ‘능동적 군중’이다. 능동적 시위군중은 자칫 충동적으로 변해 파괴적이고 폭력적인 행동을 수반하는 경우가 많다. 실제로 서구의 대규모 시위는 약탈과 방화가 없는 경우가 드물다. 시위군중의 폭력성은 자극에 대한 순간적 반응의 효과이기 쉽다. 생각할 틈도 없이 나타나는 ‘순환적 반응’인 셈이다. 반면에 사람들의 일상적 상호작용은 순환적이 아니라 상대의 말과 몸짓을 알아듣고 이해한 후에 반응하는 ‘해석적 과정’이다.

지난 주말 광화문에 모인 100만명이 넘는 군중시위에는 폭력도 없고 순환반응도 없었다. 빼어난 시민의식이라고 했다. 21세기에 ‘무당국가’로 낙인 찍혀 해외에서 추락한 국격을 그나마 100만 촛불시민의 수준 높은 시위문화가 살렸다고도 했다. 그 날 구름처럼 모인 100만의 시위군중은 놀라우리만치 이성적이었다. 100만이 넘는 사람들이 ‘점령’했던 거리에 쓰레기 한 점 남지 않았다는 사실을 어떻게 설명해야 하는가? 무서운 시민들이었다. 그들이 거리로 나와 외친 것은 광폭한 불만이 아니라 아주 냉철하고 차가운 분노였다. 그들은 충동적 군중이 아니라 서로의 표정을 읽고 연사의 발언에 귀 기울이며 끊임없이 현실을 판단하는 ‘해석적 군중’이었다.

수학능력시험을 마친 고등학교 3학년 학생들이 17일 서울 종로구 보신각 앞에서 대통령 퇴진 촛불문화제를 진행하고 있다. 김창길 기자 cut@kyunghyang.com

이 무서운 100만 군중의 차가운 분노는 모든 정세를 한순간도 놓치지 않는 듯하다. 박근혜 대통령의 오만과 시간 끌기, 변호사의 입을 통해 확인된 어떻게든 임기를 채우고자 하는 몸부림과 뻔뻔함, 그 모든 것을 냉철하게 포착했을 것이다. 또한 정치적 이익에 따라 분열하는 정치인의 타산적 행동 또한 분명히 가릴 것이다. 특히 대안이 되어야 할 야권에 대해 시민들은 ‘박근혜 퇴진’이라는 오직 하나의 대오를 만들기를 염원하고 있다. 야권 내의 서로에 대한 비방은 시민들에게는 이기적일뿐더러 때 이른 선거공학으로 비칠 뿐이다. ‘부패’로 망하는 박근혜 정권의 목전에서 ‘분열’로 망하는 모습을 보이는 것이나 다름없다. 그래서는 안된다. 박근혜 퇴진의 절체절명한 국면에서 비난은 오로지 이 대오를 이탈하는 경우로만 한정되어야 한다.

이제 저 무서운 100만의 해석적 군중 앞에서, 나아가 그들이 내리는 ‘명령’ 앞에서 야 3당은 하나의 대오로 결집해야 한다. 마침 그 조건도 만들어졌다. 국민의당과 정의당이 이미 ‘질서 있는 퇴진’을 일관되게 주장했고, 제1야당 더불어민주당도 대통령 퇴진을 당론으로 정했다. 대권주자들도 대통령 퇴진 대오에 모두 동참했다. 안철수 국민의당 전 대표와 박원순 서울시장 등이 광장의 100만 시민과 함께 퇴진운동에 벌써 뛰어들었고, 더불어민주당 문재인 전 대표도 마침내 국민과 함께 전국적인 퇴진운동에 나설 것을 선언했다.

이제 야 3당은 가슴 뚫린 시민들을 위무해야 한다. 촌철의 상황도 놓치지 않고 차가운 분노로 대응하는 위대한 시민을 이제는 야 3당이 앞서서 끌어줘야 한다. 야 3당이 당리당략을 넘어 박근혜 퇴진운동을 거국적으로 주도했으면 한다. 이번 주말 또 한 번의 100만 군중 앞에서 그 출발을 알렸으면 한다.

나는 이번 주말 다시 모이게 될 광화문의 100만 촛불 군중 앞에서 야 3당이 ‘박근혜 퇴진 2000만 서명운동’을 천명할 것을 제안한다. 이미 안철수 전 대표는 서명운동을 전개하고 있다. 이 운동을 야 3당이 공조해서 2000만 서명이라는 분명한 목표를 제시하고, 올 연말을 기한으로 적극 추진했으면 한다. 나아가 야 3당은 조기 대선을 포함한 정권이양 일정을 합의해 국민들에게 분명하게 밝히고 이를 통해 박 대통령의 퇴진을 압박했으면 좋겠다.

1986년 2월 당시 신민당과 민추협은 ‘1000만 개헌서명운동’을 시도했다. 전두환 정권의 혹독한 탄압과 감시 속에서 연행과 투옥이 일상화된 가운데 서명운동이 진행되었다. 그 험한 시절 1000만 서명운동을 추진한 민주화의 역사를 되새긴다면 우리 시대에 어디로든 흐르는 스마트폰과 SNS를 통해 2000만 서명은 빠르고도 효과적으로 실현될 수 있다. 야 3당 대표와 대권주자들이 손을 맞잡고 전국을 순회하며 서명운동본부를 발족시킨다면 여기에서 대한민국의 새로운 미래가 트일 수 있지 않겠는가?

100만 군중을 2000만의 시민행동으로 잇고, 마침내 박근혜의 ‘사설국가’를 정상적 민주공화국으로 되살리는 역사의 과업을 이제 야 3당이 기꺼이 떠안아야 한다.

조대엽 고려대 교수·사회학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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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6년 11월12일은 시민혁명의 날이었다. 서울 도심을 밝힌 100만 평화 촛불은 박근혜 대통령을 향해 퇴진이 시민의 명령임을 분명히 보여줬다. “이게 나라냐”는 분노를 넘어 “이게 민심이다”라는 사실을 확인시켜준 것이다. 박 대통령 퇴진을 요구하는 3차 주말 촛불집회는 규모로도, 내용으로도 역사에 남을 성숙한 시민의식을 보여줬다.

가족이나 연인, 중고생 등 참가자 범위가 넓어졌고 시위는 축제를 방불케 했다. 박 대통령의 출신 고교인 성심여고 학생들은 무대에 올라 “선배님 같은 후배가 되지 않겠다”고 했다. 시민들은 나뒹구는 쓰레기를 줍고 길바닥에 떨어진 촛농까지도 휴대전화 손전등을 비추며 긁어냈다.

2016 민중총궐기 대규모 3차 촛불집회가 열린 12일 오후 서울 광화문광장에서 시청 앞 광장을 가득 메운 시민들이 박근혜 대통령 퇴진을 촉구하며 촛불을 밝히고 있다. 정지윤기자

서울뿐 아니라 전국 곳곳에서, 재외 교포들도 같은 시간 같은 목소리로 외쳤다. 많은 참가자들이 “집회에 처음 나왔다”고 했다. 국가의 기본을 무너뜨린 데 대해 남녀, 세대, 지역, 이념을 떠나 모든 시민이 분노했다. 박 대통령이 진정한 국민대통합을 이뤄냈다는 조롱은 웃을 수만은 없는 역설이다. 법원은 청와대 지근거리인 율곡로까지의 행진을 처음 허용하며 집회권을 보장했고, 경찰도 시민들과의 충돌을 피하며 안전관리에 힘썼다. 한국사회의 성숙함을 보여주는 장면이 아닐 수 없다.

하지만 박 대통령은 100만 촛불에 담긴 분노를 보고도 여전히 미몽 상태에 빠져 있다. 청와대 정연국 대변인은 어제 “대통령께서는 국민 여러분의 목소리를 무거운 마음으로 들었으며 현 상황의 엄중함을 깊이 인식하고 있다”고 말했다. 그러면서 “박 대통령은 대통령으로서 책임을 다하고 국정을 정상화하기 위해 고심하고 있다”고 했다. 박 대통령이 지금 대통령으로서 무슨 역할을 더 할 것이며, 고심을 하고 말고 할 게 무엇이 있는가. 대통령은 시민들의 저항 수위에 따라 한발 한발 뒤로 물러서며 찔끔 사과와 꼼수 수습책을 내놓았지만 민심은 더욱 차갑게 돌아섰다는 걸 시민의 촛불로 입증했다.

100만 촛불에서 확인된 민심은 분명하고 단호하다. 단 하루, 한 시간도 박 대통령의 시민으로 살고 싶지 않다는 것이다. 나라를 이 모양 이 꼴로 만든 박 대통령은 당연히 물러나야 하며 그 길만이 사태 해결의 출발점이란 것이다. 1년3개월 남은 임기 동안 박 대통령에게 국정을 맡길 수 없는 것은 물론 2선에 머문다는 것 자체도 나라의 혼란을 더욱 부채질하는 요인이 될 수밖에 없다. 대통령이 무엇을 한들 믿지 못하고, 그가 무슨 말을 해도 그 문장은 누가 써주었는지 의심하는 게 시민 정서다.

국정 정상화 운운하는 대목에선 실소를 금할 수 없다. 지난 4년간 시민들이 맡긴 권력을 개인에게 넘겨 연설문 작성부터 외교안보에 이르기까지 꼭두각시 역할을 해왔다는 사실이 밝혀지고 있다. 이미 국정은 비정상이었고 대통령은 없었는데 도대체 무엇을 정상화시키겠다는 것인지 되묻지 않을 수 없다.

집권당이라는 새누리당도 신뢰를 잃은 지 오래다. 말로만 촛불 민심을 준엄하고 무겁게 받아들이겠다면서 자리 보전에만 급급하니 불에 기름을 끼얹는 것과 다를 바 없다. 여당뿐 아니라 청와대, 정부, 검찰 내 최순실 부역자들은 스스로 물러나야 한다.

박 대통령의 퇴진은 혼란이 아니라 대한민국의 새로운 시작이다. 헌법과 국가, 정의와 역사, 미래를 바로 세우는 첫걸음이다. 촛불 민심은 대통령 퇴진을 넘어 우리 사회 새로운 질서, 새로운 공동체를 만들자는 열망을 담고 있다. 촛불은 대통령 퇴진 요구로 시작했지만 촛불의 종착지는 새로운 체제, 새로운 나라, 새로운 시대로 향할 것이다.

4·19혁명부터 6월항쟁까지 위기에 처한 민주주의를 되살려온 주인공들은 항상 시민이었다. 시민들이 있었기에 헌정을 유린한 어떤 독재 치하에서도 이 나라를 지탱해올 수 있었다. 시민들은 또다시 민주공화국을 복원시키고 헌법 제1조에 따라 국민이 주인인 시민권력 시대를 열 것이다.

이제 박 대통령은 나라를 ‘비선 놀이터’로 만들고 국정을 망가뜨린 벌을 스스로 청해야 한다. 그에게 주어진 시간도 얼마 남지 않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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