명색이 기자라면서 대책 없이 혼동해 사용하는 단어가 꽤 많다. 최근에도 뒤늦게 의미의 차이를 깨친 단어들이 있다. ‘불사르다’와 ‘불태우다’이다. 열정을 불사르고, 이 한 몸 불태워 어쩌고저쩌고하는 식의 표현들을 뒤죽박죽 사용했으나 사실은 잘못된 것이었다.

국어사전을 찾아보면 불사르다에는 두 가지 뜻이 있다. ‘불에 태워 없앤다’와 ‘무언가를 남김없이 없애 버린다.’ 전자는 서류 더미나 책을 불사르다, 후자는 번뇌나 잡념을 불사른다는 것이 적절한 예문이다. 불태우다 역시 두 가지 의미를 갖고 있다. 무언가 불이 붙어 타게 하거나, 비유적으로 어떤 감정이 끓어 오르게 한다는 것이다. 열정을 불태우고 의지를 불태운다는 표현이 맞다. <더 건방진 우리말 달인>이라는 책을 보니 불사르면 없어지는 것, 불태우면 더 커지는 것이라고 명쾌하게 설명돼 있다.

지난해 말 “한 몸 불사르겠다”는 반기문 전 유엔사무총장의 대권도전 포부가 태평양 건너에서 전해졌다. 별 인상을 남기지 못했던 진부하고 케케묵은 수사에 내가 집착하게 된 것은 그가 귀국 일성으로 이 말을 다시 했기 때문이다. 도대체 무엇을 불사른다는 것일까.

16일 반기문 전UN사무총장이 부산 남구 대연동 UN기념공원을 둘러보고 있다. 김창길 기자

그의 귀국 직전 서울 광화문 앞에서 정원 스님이 소신공양했다. 소신공양은 ‘자기 몸을 불살라 부처님 앞에 바친다’는 뜻으로, 세상을 살리기 위해 자신을 공양물로 바친다는 극한의 수행법이다. 이 의미를 찾아보면서 나는 그제야 앞서 설명한 ‘불사르다’와 ‘불태우다’의 차이점을 알게 됐다.

티베트의 여러 스님들, 가깝게는 7년 전 문수 스님이 자유와 정의를 부르짖으며 자신의 몸을 불살랐다. 실재하는 몸을 불사르는 이 극한의 행위를 선택하는 것은 세상에 자신의 이야기를 전할 다른 방법이 없기 때문일 것이다. 전태일 열사가 그랬던 것처럼 철저하게 소외된 약자들의 처절한 자기 표현법이다. 몸을 불사른다는 것은 실재의 몸을 태우는 것이 아닌, 자신이 죽어 없어질 만큼 헌신하겠다는 다짐의 표현이기도 하다.

아마도 반 전 총장은 그런 의도였겠지만 이런 표현이 어울리는 자리는 이름 없이 희생하는 비천한 곳, 혹은 암흑을 떨치기 위해 몸소 헤쳐가야 할 가시밭길 같은 곳이다. 서로 하겠다고 기를 쓰는 대통령 자리는 아닌 것 같다. ‘불사르다’는 단어를 참칭하려는 의도는 아니었을 거라고, 아마도 열정을 불태워서 국가를 위해 봉사하겠다는 정도의 의미였을 거라고, 생각한다.

어떤 감정이 끓어오르게 한다는 동사 ‘불태우다’와 주로 조응하는 명사는 두 가지 부류가 있다. 먼저 열정이나 투혼, 의욕과 같은 단어다. 귀감이 되거나 다른 사람들에게 감동과 도전을 줄 때 사용된다. 또 다른 부류에는 욕정, 야망, 노욕 따위가 포함된다. 이런 단어로 묘사될 경우 남들에겐 분노와 짜증을 돋우고 본인은 망신살 뻗치는 결과를 맞닥뜨릴 확률이 높다.

비행기에서 내리자마자 곧바로 민생 행보에 나선 반 전 총장의 모습에서 투혼과 열정을 불태우려는 그의 의지가 조금은 보였다. 어이없는 실수도 있었지만 시차적응 과정이려니 했다. 하지만 안타깝게도 실체는 금방 드러났다. “정 다른 일이 없으면 자원봉사라도 하라”, “젊어 고생은 사서도 한다”, “나는 6·25 전쟁 때 땅바닥에서 공부했다” 따위를 자랑스럽게 늘어놓는 그의 언사는 형언할 수 없이 불쾌했다. “나이 들면 양기가 입으로 올라온다”며 성희롱을 합리화하거나 “우리 때는 말이야…” 하고 시절 지난 노래에 박자맞추기를 강요하는 ‘꼰대’의 모습이 겹쳐 보일 만큼.

열정과 투혼을 불태우고 싶은 청춘은 지금도 차고 넘친다. 문제는 거친 비바람 탓에 불꽃도 제대로 피우지 못한다는 것이다. 지구를 100바퀴나 돌며 쌓은 소중한 경험과 자산까지 왜 불태우려 하나. 우리 청춘들에게 진정 필요한 것은 바람막이다.

문화부 | 박경은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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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자와 정치인은 가까이하기도 멀리하기도 어려운 관계다. 뉴스를 원하는 기자와 시민의 주목을 원하는 정치인은 서로 떼려야 뗄 수 없다. 하지만 뉴스를 원하는 기자와 유리한 뉴스만 원하는 정치인의 이해관계가 일치할 수는 ㅂ없다. 그런데 이런 직업적 속성을 오해하는 정치인과 기자가 없지 않다. 반기문 전 유엔사무총장이 그제 기자들을 가리켜 “나쁜 놈들”이라고 말했다. “위안부 문제는 이제 내가 답변을 안 하겠다”고도 했다. 기자들이 한·일 위안부 합의에 대한 입장을 반복 질문하자 거칠게 불쾌감을 피력한 것이다. 이것이 과연 대선주자의 입에서 나온 말이 맞는지 귀를 의심케 한다.

시민들은 위안부 합의에 대한 그의 입장에 의구심을 갖고 있다. “올바른 용단”(합의 직후)→“궁극적 완벽한 합의는 피해 할머니들의 한을 풀어주는 수준이 돼야 한다”(1주일 전 귀국)→“어느 정도 합의의 기틀은 잡힌 것”(18일 발언)으로 말을 계속 바꾸었다. 기자들이 물어보는 것은 당연하고, 반 전 총장은 답할 책무가 있다. 그런 과정은 시민의 궁금증을 해소하는 기회도 된다. 언론의 검증을 이런 식으로 회피하려는 것은 대선주자로서 무책임한 일이다.

귀국 1주일여 동안 그의 대선행보는 연일 논란을 일으키고 있다. 이 중에는 지하철 발권기 2만원 넣기 등 국내 생활 방식에 생소한 데서 비롯된 사소한 실수가 많다. 퇴주잔 논란 등 음해성 사건도 있다. 하지만 현안에 대한 잘못된 인식은 그냥 넘길 일이 아니다. 그제 조선대 강연이 대표적이다. 그는 “젊어 고생은 사서도 한다”며 “저도 좋은 호텔에서 지내다가 화장실이 하나밖에 없는 온돌방에서 잠을 자는 체험을 하고 있다”고 말했다. “할 일 없으면 자원봉사라도 하라”고도 했다. 만성 실업에 시달리는 ‘헬조선’ 청년들에게 할 말이 아니다.

그는 논란에 민감하게 반응하며 일일이 해명했다. 표 끊을 줄도 모르면서 정치적 관심을 얻으려고 퇴근 시간대에 전철을 탄 무리한 ‘서민 코스프레’는 돌아보지 않고, 이를 지적하는 사람들에게 화를 내기도 했다. ‘통합’한다는 지도자상과는 거리가 있다. 한국 물정을 좀 더 익힌 뒤 대선에 나오는 게 좋았을 것이란 지적이 나올 만하다.

조호연 논설위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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반기문 전 유엔 사무총장은 엊그제 기자들과 만나 “홀로 하려니 금전적인 부분부터 빡빡하다. 현재는 당이 없다보니 다 내 사비로 모아놓은 돈을 쓰고 있다. 종국적으로는 어떤 정당이든 함께해야겠다고 생각한다”고 말했다. 이어 “기존 정당과 함께하겠다. 설 연휴 이후 입당의 가닥이 잡힐 것”이라고 했다. 반 전 총장은 지난 12일 입국 때는 “지금 당장은 어떤 정당에 바로 소속한다든지 그런 건 생각 안 하고 있다”고 했다. 불과 1주일도 안돼 정당 입당에 관한 생각이 바뀐 것이다. 조기 대선 국면에서 조직과 자금 지원이 가능하고 검증 등 수많은 난관을 넘기 위해서는 기존 정당에 몸을 담는 게 여러 모로 유리할 것이라고 판단한 것으로 보인다.

아무리 그래도 정당 선택의 이유가 정치 비전과 정책을 함께 실현하기 위해서가 아니라 ‘금전적으로 빡빡해서’라니 듣고도 믿기지 않는다. 추미애 더불어민주당 대표는 18일 “활동비가 필요해 입당한다는 말은 정치 지도자에게서 들어보지 못했다. 정당이 현금인출기도 아니고 우리 정치의 수준을 낮추는 상식 이하의 발언”이라고 힐난했다. 너무도 당연한 지적이다. 정당은 돈과 조직을 대는 도구가 아니다.

[김용민의 그림마당]2017년 1월 19일 (출처: 경향신문DB)

반 전 총장은 귀국 직전 미국에선 “정당이 뭐가 중요하냐”고 했다. 이를 놓고서도 대의민주제의 핵심인 정당에 대한 인식이 부족하다는 비판을 받은 바 있다. 정당은 의회민주주의의 가장 기본적인 구성 요소다. 정당 없이 민주주의는 없다. 민주주의는 여러 정당이 유권자의 뜻을 받들어 책임정치를 경쟁하는 제도다. 반 전 총장은 그간 새누리당 친박(친박근혜)계의 추대론을 즐기다가 탄핵 바람이 불자 이젠 바른정당과 국민의당을 놓고 저울질 중이라고 한다. 뚜렷한 정치적 소신과 철학으로 당을 선택하기보다 백화점에서 물건 고르듯 이해득실을 따지는 태도는 도저히 국가 지도자의 처신이라고 보기 어렵다.

그렇지 않아도 반 전 총장은 귀국 후 계속되는 보여주기식 행보와 술에 술 탄 듯 물에 물 탄 듯 애매모호한 화법으로 정체성이 불분명하다는 지적을 받아왔다. 가는 데마다 구체적 해법은 없이 유엔 사무총장 출신 이력만을 내세워 과연 그가 준비된 대선주자인지 의문을 낳고 있다. ‘정치 낭인’으로 떠돌던 MB(이명박)계 인사들이 다시 제 세상 만난 양 주변에서 활개를 치는 것도 볼썽사납고, 자신과 동생·조카를 둘러싼 비리 의혹도 아직 완전히 해소됐다고 볼 수 없다. 반 전 총장에 대한 지지도가 컨벤션 효과는커녕 귀국 전(20%·한국갤럽)이나 귀국 후(20%·한국리서치)가 별 변동이 없는 것도 이런 점들이 반영됐기 때문일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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진보와 보수 중에 어느 것이 옳은가. 초등학생 수준의 어법으로 말한다. 진보가 필요한 시대에는 진보가 옳고 보수가 필요한 시대에는 보수가 옳다. 국운이 승하는 나라에서는 이런 선순환이 이뤄진다. 그런데 난조에 빠지는 사회가 있다. 진보시대에 보수정권이, 보수시대에 진보정권이 들어서는 경우이다.

1994년 프랑스의 프랑수아 미테랑이 7년 임기의 대통령을 두차례 지내고 퇴임할 무렵이었다. 그는 선거를 통해 집권한 최초의 사회주의자였지만, 국민들은 사회당의 장기집권과 높은 실업률에 염증을 냈다. 이 때문에 대통령 선거를 앞두고 우파정권에 대한 선호가 높았다. 이때 좌파 정치인 자크 들로르가 나타나면서 대선판이 요동치기 시작했다. 미테랑 정권에서 경제·재무·예산부 장관을 거친 들로르는 1985년 ‘유럽의 대통령’으로 불리는 유럽연합 집행위원회 의장에 취임했다. 그는 임기 첫해에 각국의 국경을 폐쇄하는 솅겐조약을 체결해 유럽연합을 실질적인 하나의 영토로 만들었다. 1992년에는 유럽단일화폐 유로화를 탄생시킨 마스트리히트 조약을 체결하는 등 하나의 유럽을 위한 이정표를 세웠다.

반기문 전 유엔 사무총장과 부인 유순택씨가 13일 오전 서울 동작동 국립현충원 현충탑에 참배하기 위해 들어오고 있다. 정지윤 기자

10년의 임기를 마치고 귀국하기 전부터 그의 인기는 상종가를 기록했다. 그런데 놀라운 반전이 일어났다. 대선을 불과 넉 달 앞두고 그는 대통령 선거 불출마 선언을 했다. 들로르는 불출마 이유로 세 가지를 들었다. 프랑스어통역사 최정화씨의 저서에서 인용한다. 첫째, 지금까지 정의로운 사회를 구현하기 위하여 자유와 평등이라는 이념에 봉사해 왔을 뿐, 최고의 지위에 이르기 위해 정치를 한 것은 아니다. 둘째, 프랑스의 체제에 많은 개혁과 쇄신을 가해야 하는데 대선에 승리한다 하더라도 개혁을 실행하기 위해 필요한 의회 내 지지 세력이 없다. 셋째는 개인적인 사항이었다. 1995년이면 일흔 살이 되며 지금까지 50년을 쉬지 않고 일해 왔으므로 여생은 가족과 함께 보내면서 삶의 균형을 이루고 싶다는 것이었다. 사회당 지지자들은 그가 역사적 책임을 외면하고 관념적 위선에 빠진 것이 아닌가 의심했다. 그의 진심은 그게 아니었다. 국민 다수가 오른쪽으로 선회하기를 바라고 있는 시기에 좌파 대통령의 재등장은 나라를 혼선에 빠뜨릴 수 있음을 우려했다.

20여년의 시간차가 있지만 반기문과 들로르는 여러 면에서 비교대상이 된다. 반기문은 세계의 대통령, 들로르는 유럽의 대통령이라는 말을 들었다. 당시 들로르는 70세였고, 반기문은 73세이다. 귀국시점이 대선 시기이며 개인적 인기가 높다는 점도 같다. 다른 점이라면 두 사람의 이념상 위치가 반대쪽이란 사실이다.

들로르가 파리로 돌아왔을 즈음 집권당인 사회당이 총선에서 대패해 좌파 대통령, 우파 총리의 좌우동거 내각이 들어서 있었다. 반기문이 서울로 돌아온 시기의 한국은 어떤가. 총선에서 집권당이 패해 국회는 여소야대이며 촛불정국에서 유권자 지형이 왼쪽으로 이동했다. 진보대통령을 원하는 여론이 높아졌다.

주시해야 할 것은 두 사람의 선택이다. 들로르는 자신의 정체성과 지지자들의 기대를 저버리고 시대의 요구에 따랐다. 반기문은 어떨까. 그는 귀국연설에서 대선출마에 대해 겸허한 마음으로 사심 없는 결정을 하겠다고 말했다. 그가 결정하기 전에 박근혜 정부가 실패한 이유를 생각해 보기를 바란다. 필자가 보기에 국민 다수가 진보정책을 원했던 진보시대에 보수정권이 집권했기 때문이다. 시대와 정권이 엇갈리면 헬조선으로 전락한다. 반기문은 사심 없는 마음으로 들로르의 고뇌를 숙고해 보기 바란다.

김제완 세계로신문 대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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반기문 전 유엔 사무총장이 지난주 귀국한 후 폭넓은 대선 행보를 하고 있다. 귀국 이튿날부터 국립서울현충원 참배와 고향인 충북 음성 꽃동네 방문에 이어 그제는 평택 해군2함대사령부에서 천안함을 견학했다. 어제는 구조조정으로 몸살을 앓고 있는 거제 대우조선해양을 들렀고, 오늘은 노무현 전 대통령 묘소가 있는 봉하마을과 세월호 현장인 팽목항, 광주 5·18묘역을 방문한다. 자신이 제시한 대통합과 정치교체라는 과제 실천에 옹골차게 시동을 걸었다.

그런데 그의 행보가 ‘정치교체’ 슬로건에 부합하는지는 의문이다. 기성 정치인과 다를 바 없는 보여주기식 행보와 실패한 이명박 정권의 인물들을 주변에 포진시킨 것이 대표적이다. 이미 심판받은 정치세력과 함께 정치를 혁신하겠다는 것은 코미디다. 또 반 전 총장은 (박근혜 대통령에 대한) “국민의 실망감을 잘 안다. 기회가 되면 촛불집회에 참석하겠다”고 했다. 그런데 어제 박 대통령과의 통화에서 그는 “잘 대처하시라”고 했다. 촛불시민의 뜻을 일관되게 무시하는, 직무정지된 대통령에게 한 덕담으로 적절치 않다. 보수층을 의식한 구태라고 해도 할 말이 없다.

반기문 전 유엔 사무총장(가운데)이 15일 경기 평택시 해군 2함대를 방문해 천안함 선체를 둘러보며 군 관계자로부터 당시 상황에 대한 설명을 듣고 있다. 연합뉴스

그가 말하는 대통합이 모두에게 듣기 좋은 말만 하는 것이라면 적이 실망스럽다. 시민을 분열시키는 비리와 부정의를 바로잡지 않는 한 대통합은 없다. 그게 빠진 대통합 구호는 이합집산으로 정치적 이득을 취하려는 것으로 볼 수밖에 없다. 무원칙한 세 모으기와 대통합을 구분하지 못할 시민들이 아니다.

정치교체의 내용은 짐작할 수조차 없다. 국내 정치 경험이 없어 해법을 제시하기 어렵다면 그에 상응하는 현실 진단과 해법의 방향 정도는 밝혀야 한다. ‘진보적 보수주의자’라는 모순적인 말로 은근슬쩍 넘길 문제가 아니다. ‘귀족 노동자’를 날 서게 비판했으면 거제 조선소에서 비정규직 문제에 대한 언급도 했어야 시민들이 수긍한다. 반 전 총장의 분명한 노선과 입장을 기대한다. 이것만이 철저한 검증과 공정한 경쟁을 통해 대통령을 뽑으려는 시민들의 요구에 부응하는 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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반기문 전 유엔 사무총장이 지난 10년간 유엔 수장으로서의 활동을 마감하고 어제 귀국했다. 반 전 총장은 귀국 메시지를 통해 “부의 양극화, 이념·지역·세대 간 갈등을 끝내야 한다”며 국민 대통합을 강조했다. 수많은 지지 인파 속에서 “패권과 기득권은 더 이상 안된다”며 국가 발전에 헌신하겠다는 포부와 각오도 밝혔다. 유엔 사무총장으로서 국제무대를 누빈 한국인에게 시민이 주목하는 것은 당연하다.

하지만 반 전 총장이 대통령 선거에 출마하기 위해서는 해결해야 할 문제가 많다. 무엇보다 향후 5개월 안에 대선이 치러질 가능성이 높은 만큼 짧은 기간에 국가 지도자로서의 자질과 역량을 입증해야 한다. 반 전 총장은 외교부 장관과 유엔 사무총장으로 일했지만 국내 정치에는 문외한이다. 지난 10년 동안 국내 현안을 접하지 않아 한국 사회가 안고 있는 복잡한 문제와 그 배경에 대한 이해도 부족할 것이다. 당장 그에게 이에 관한 해법을 기대하기는 어렵다. 이런 반 전 총장을 유력한 대통령 후보로 맞는 한국적 상황은 비정상적이라고 볼 수밖에 없다. 시민들이 투표장에서까지 ‘깜깜이 선거’를 하도록 강요해서는 안된다. 반 전 총장은 한국의 미래 비전과 이를 구현할 대안을 내놓을 수 있는지부터 고민해야 한다.

반기문 전 유엔 사무총장이 12일 인천공항을 통해 입국하며 손을 들어 인사하고 있다. 이준헌 기자

반 전 총장의 인기는 아직 검증을 거치지 않은 막연한 것이다. 반 전 총장은 어제 부의 불평등과 이념·지역·세대 간 갈등을 한국 사회의 당면 문제로 지적했다. 그러면서 “남을 헐뜯고 무슨 수를 써서라도 권력을 쟁취하겠다는 게 권력의지라면 저는 권력의지가 없다”고 비판했다. 정치 신인으로서 기존 정치를 비판할 수 있는 유리한 입장이지만, 기성 정치 비판이 문제를 해결해주는 것은 아니다. 정치는 구성원들간 분출하는 갈등을 조직하고 조정하고 또 해소하기 위해 타협과 설득, 협상을 해야 하는 고난도 작업이다.

특히 현대 민주주의는 정당을 통해 민심을 수렴하고 선거를 매개로 책임지는 과정의 연속이다. 반 전 총장에게 현실 정치, 특히 정당 경험이 없는 것은 예사 문제가 아니다. 더구나 그는 지난달 “국민이 없는 상황에서 정당이 무슨 소용인가. 동교동, 상도동, 비박, 친박이 무슨 소용인가”라며 정당활동에 대한 부정적인 인식을 드러냈다. 그러면서 특정 세력을 제외한 나머지 세력이 뭉치자는 논의의 중심에 반 전 총장이 서 있다. 정당은 경시하면서 정당 간 연대를 통해 당선되겠다는 생각은 이율배반이다.

그의 유엔 사무총장직 수행도 검증 대상이다. 이리저리 눈치만 본 역대 최악의 총장이라는 불명예스러운 평가가 그야말로 터무니없는 험담인지, 남북관계를 개선시켜 줄 것이라는 기대에는 왜 부응하지 못했는지 등을 냉정히 따져야 한다. 게다가 개인 비리 의혹까지 불거져 있다. 박연차 회장으로부터 23만달러를 수수한 의혹은 물론 동생 반기상씨와 조카 반주현씨가 뇌물 공여 혐의로 미국 연방법원에 기소됐다. 반 전 총장은 (박연차씨 의혹에) “왜 내 이름이 등장하는지 도저히 이해할 수 없다”고 부인했다. 유엔 사무총장이 선출직에 진출하지 못하도록 한 유엔총회 결의에 대한 질문에도 “왜 명백한 사안에 대해 문제를 일으키려 하는지 이해할 수 없다. (문제제기가) 정당하지 않다”고 거부감을 표출했다. 이명박·박근혜 두 대통령을 거치며 대통령 후보에 대한 시민들의 검증 욕구는 최고조에 달해 있다. 반 전 총장은 자신에 대해 제기되는 의혹을 정치공세로 치부할 게 아니라 진솔하게 밝혀야 한다.

이번 대선은 박근혜 대통령 탄핵 정국에 경제와 민생, 안보 문제 등이 한꺼번에 겹친 총체적 위기에서 치러진다. 더구나 대통령 선거기간도 짧고 인수위원회 활동도 없다. 그러므로 그 어느 때보다 후보들의 비전과 철학, 정책에 대한 검증을 철저히 하지 않으면 또 실패할 위험성이 높다. 함께할 정당은 물론 함께 집권할 통일된 정치 집단도, 집권 구상도 아직 없는 반 전 총장이 짧은 기간에 대통령 자격을 입증하는 일은 그 자신의 성공 여부를 떠나 국가의 미래가 걸린 사안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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반기문 전 유엔사무총장이 귀국하기 전날인 어제 그의 친동생 기상씨와 조카 주현씨가 미국 연방법원에서 뇌물 공여 혐의로 기소됐다. 반 전 총장의 동생과 조카는 베트남에 있는 경남기업 소유의 초고층빌딩 ‘랜드마크 72’의 매각을 위해 중동 관료들에게 50만달러의 뇌물을 주려고 한 혐의를 받고 있다. 미 사법당국은 이들의 범죄를 매우 무겁게 보고 있다고 한다. 그런데 반 전 총장의 대변인은 이 같은 보도에 대해 “반 전 총장도 보도를 보고 알았다. 전혀 아는 바가 없을 것이고, 굉장히 놀랐을 것”이라고 말했다.

반기문 전 유엔 사무총장의 조카 반주현씨가 지난 10일(현지시간) 뇌물 혐의로 기소된 뉴욕 연방법원에서 심문을 받은 뒤 이동하고 있다. 연합뉴스

반 전 총장의 동생·조카 문제는 이미 알려진 사건으로, 반 전 총장의 연루설이 계속 제기돼왔다. 2013년 자금 압박에 몰린 경남기업이 회사고문인 반기상씨와 미국에서 부동산 회사를 운영하는 그 아들 주현씨에게 랜드마크 72의 매입자 알선을 요청했지만 이들은 카타르 관료의 가짜 대리인에게 속아 돈만 날렸다. 이 과정에서 주현씨가 경남기업에 제시한 카타르 투자청 명의의 인수의향서가 위조된 것으로 밝혀졌다. 매각이 무산되자 경남기업은 이들을 상대로 손해배상 소송을 국내법원에 제기했고, 지난해 10월 6억5000만원을 배상받으라는 판결이 내려졌다. 경남기업의 성완종 전 회장은 바로 반 전 총장 대통령 만들기에 나섰던 인물이다. 2015년 4월 스스로 목숨을 끊으면서 반 전 총장을 후원한 것 때문에 자신이 희생양이 되고 있다고 밝힌 바도 있다. 이런 관계인 만큼 경남기업과 기상씨 간 계약 체결이 반 전 총장과 무관하다는 것은 상식적으로 납득이 가지 않는다. 주현씨가 큰아버지인 반 전 총장과 카타르 국왕 간 면담을 주선할 수 있다고 말하고 다녔다는 증언도 있다. 그런데도 반 전 총장이 이들이 기소되는 것 자체를 몰랐다니 믿기지 않는 것이다.

반 전 총장은 정치 신인이지만 그의 출발이 신선하지는 않다. 비전·정책은 따지지도 않고 충청권이 집권해야 한다는 지역주의는 구태일 뿐이다. 우후죽순처럼 나오는 지지단체들의 모습에서도 신선함을 찾을 수 없다. 반 전 총장은 에둘러 말하는 애매한 화법으로 비판받아왔다. 반 전 총장은 귀국 후 일성으로 박연차씨로부터 23만달러를 받았다는 의혹에 대해 해명할 것이라고 한다. 시민이 납득할 수 있는 해명이 되어야 한다. 동생의 기소를 마치 남의 일로 치부하듯 해명한다면 그에 대한 시민들의 기대도 반감될 수밖에 없다. 반 전 총장의 산뜻한 출발을 기대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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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안녕하세요. 무엇을 도와드릴까요?” 우리 과 주무관이 전화를 받을 때마다 하는 인사말이다. 이 친절한 인사말처럼 무례한 민원 전화도 끝까지 친절하게 응답을 해준다. 그 모습을 보며 오랜 시간 훈련된 공무원의 저력이 느껴져 감탄할 때가 있다. 한편 이 인사말을 들을 때마다 ‘공무원들은 시민들을 동료 시민으로서보다 민원인으로 만날 기회가 더 많겠구나’라는 생각 또한 든다. 이는 그의 직업적 소명을 다하는 데 중요한 자극제가 되기도 할 것이다. 하지만 삶의 대부분의 시간 동안 시민을 민원인으로 만나야 했던 전문관료가, 어느 한순간 시민들의 열정을 모아 사회 변화를 만들어가야 하는 정치인이 된다고 하면 문제가 달라진다. 그가 직접 시민을 상대할 필요가 적었던 외교 고위 공무원이었다면 문제는 조금 더 깊어진다.

정치인은 자신이 어떤 자질을 갖춰야 주어진 권력을 제대로 다룰 수 있을지, 어떻게 해야 책임성을 잘 감당할 수 있을지에 대한 질문에 답할 수 있어야 한다. 그 답은 그가 시민들을 어떤 존재로 인식하고 있는지에서 시작한다고 해도 과언이 아닐 것이다. 시민들을 역사의 수레바퀴를 함께 움직이는 동료로 인식하는지, 이러저러한 필요를 들고 와 요구하는 민원인으로 보는지, 아니면 자신의 정치적 목적을 달성하기 위한 수단으로 보는지, 이 사이에는 큰 차이가 있다. 그렇기에 자기 내면에서 일어나는 여러 가지 감정들과 싸워, 시민을 민원인이나 자신의 개인적 성취를 위한 도구가 아닌 동료로서 바라보는 태도를 놓치지 않는 사람을 우리는 좋은 정치인이라 부른다.

반기문 전 유엔 사무총장 (출처: AFP연합뉴스)

‘시민을 어떤 존재로 바라보는가.’ 우리는 그가 어떤 정치인인지를 가장 잘 설명해줄 이 질문에 대한 답을, 그가 남긴 말과 글을 통해 분석하게 된다. 말과 글로 시민들의 열정을 불러일으키고 주요한 성취를 하는 정치의 속성 때문에도 그렇다. 2017년 대선을 맞아 차기 대선주자들이 하나둘 경기장에 들어서고 있다. 그런데 한 가지 난해한 일이 발생했다. 유력 대선주자로 거론되는 반기문 전 유엔 사무총장과 관련해서다. 그가 시민들을 어떻게 바라보는지 알 방법이 없는 것이다.

물론 외교부 장관 등 전문관료로서 그가 남긴 말과 기록들은 있다. 하지만 장관이라는 자리는 그를 임명한 대통령과 그 정부의 정책 비전을 수행하는 자리이지 그 개인의 정치적 비전을 수행하는 자리가 아니다. 엄밀히 말해 외교부 장관 시절 그의 말은, 노무현 전 대통령과 참여정부의 말이지 그의 말이 아니다. 그가 정치인 출신이 아닌 관료 출신의 장관이기에 더욱 그러하다. 자기 수장의 정치적 비전을 최대한 잘 수행함으로써 자신의 목표를 성취해가는 관료의 속성상, 자신만의 고유한 정치 언어를 갖지 못한 것은 유능한 전문관료가 되는 데 큰 장점이었을 것이다. 하지만 자기 책임하에 주도적으로 정치적 결정을 내린 말이 없다는 것은, 그래서 그 안에 담겨진 그의 시민관, 정치관을 엿볼 수 있는 기록이 없다는 것은, 정치인으로서는 큰 결격 사유이다.

어느 감독도 기록 자체가 없는 선수는 경기에 세우지 않는다. 정치인으로서의 철학을 담은 말과 글이 없는 이를 잘 달릴 수 있을 것 같으니 선택하라고 하는 사람들에 대해서 우리는 어떻게 이야기해야 할까. 우리 사회는 ‘산업화를 이룬 박정희 딸이니까 잘하겠지’라는 허상에 기대어, 우리 삶의 기반이 되는 주요한 일들을 결정할 지도자로 뽑았다. 그리고 혹독한 대가를 지금 치르고 있다. ‘유엔 사무총장을 했으니 잘하겠지’라는 기대감에 기대어, 반 전 총장을 그가 평생 다루어보지 않은 ‘정치’라는 경기장에 세워 달리게 하는 것, 우리 모두를 위해 좋은 일일까. 누가 그리 성급한 것일까. 선수인가, 감독인가, 구단주인가.

반 전 총장의 사실상의 대선 출마는 어떤 이에게는 무척 반가운 소식일지 모른다. 그러나 오랜 행정 경험과 국제무대에서의 경험을 두루 가진 행정 관료인 그가 더 잘할 수 있는 영역에서 활용되지 못하고, 자신들의 정치적 리더를 만들어내는 데 실패한 그룹들의 무능력함을 가리는 도구로 소비되는 것 같아 씁쓸하다. 지금 우리가 풀어가야 할 문제들이 녹록지 않은 것들이기에 더욱 심란하다.

김경미 전 정치발전소 기획실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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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역은 64개의 괘로 길흉을 따진다. 64괘 중에서 가장 좋은 괘가 겸(謙)이다. 겸손할 겸은 말씀 언(言)과 아우를 겸(兼)이 합쳐진 자다. 말할 때 상대를 배려해서 하면 자연 겸손해진다는 뜻이다. 상대의 말을 경청하는 것도 마찬가지다.

새해는 겸과는 거리가 먼 해가 될지 모르겠다. 대통령 선거철만 되면 많은 사람들이 이성을 잃는다. 자기가 지지하는 후보는 항상 옳고 똑똑하고 구국의 영웅이다. 들보 같은 흠결도 ‘세상에 안 그런 놈 어디 있느냐’고 하고, 티끌만 한 장점은 “세상에 이런 사람 또 있느냐”고 한다. 무조건적이다.

정책은 관심의 대상이 아니다. 세금은, 보육은, 가계 빚은, 실업문제는 어찌 풀지 궁금하지도 않다. 그건 난 모르겠고, 뽑아 주면 어련히 알아서 잘하겠지 식이다. 새누리당 충청권 의원들은 반기문에 대해 “공산당만 아니라면 따라갈 것”이라고 했다. 자기 집 가사 도우미를 구한대도 “공산당만 아니면…”이라고 하진 않을 것이다. 그런 식으로 눈 감고 귀 막고 뽑았던 대통령이 박근혜고 이명박이다. 이명박은 4대강에 20조원이 넘는 돈을 퍼부었다. 5000만 국민 1인당 40만원씩 걷어 강물에 뿌린 꼴이다. 지난 연말 모임에서 만난 서울대 교수는 “그 돈을 벤처 불쏘시개로 지원해줬으면 10%, 5%만 성공했어도 지금 활활 불타고 있을 것”이라고 했다.

박근혜는 긴 말 할 것 없다. 시민들은 박근혜에 대해 믿어 왔던 것들이 조작된 신화이며 허상이었음을 4년 뒤에 깨달았다. 그나마 늦게라도 밝혀진 게 다행이다. 정유라의 강아지가 나라를 구했다. 촛불시위에 나온 노인들이 아이들에게 과자를 건네주며 “우리가 잘못해서 너희가 고생이다”고 했다고 한다. 과자로 끝낼 일이 아니다.

리더십의 요소는 통찰력이다. 미래를 내다보는 눈이다. 나라의 장래가 여기에 달려 있다. 상황은 바람과 같아 눈에 보이지 않는다. 지도자는 남보다 먼저 봐야 한다.

16세기 일본의 작은 섬에 포르투갈인이 표류했다. 이들이 긴 총으로 멀리 떨어진 과녁을 맞히는 걸 보고 깜짝 놀랐다. 일본은 총 만드는 기술을 전수받기 위해 그들의 말을 배웠다. 17세기 조선의 제주도에 네덜란드인 서른여섯명이 표류해왔다. 하멜 일행이다. 이들 중에도 총포 기술자가 있었다. 조선은 이들에게 노역을 시켰다. 생김새가 특이하다고 춤과 노래를 가르쳐 남자 기생으로 부리기도 했다. 일본의 오다 노부나가는 조총으로 전국시대를 통일했고, 조선은 굴욕적인 역사를 맞았다.

바깥세상은 눈이 핑핑 돌아가게 변하고 있다. 변화의 주기는 갈수록 짧아지고 있다. 지금 1년은 미래 10년, 100년을 좌우한다. 4대강이나 창조경제 따위가 새 시대로 나아가는 시대정신일 수는 없었다. 본인이 모르면 사람이라도 잘 써야 한다. 경전에는 ‘천하가 다 옳다고 해야 그 사람을 한 번 찾아가서 보고 쓰라’고 했다. 박근혜는 천하가 다 안된다는 사람을 보지도 않고 썼다. 이명박은 5년 내내 땅을 팠고 박근혜는 주사를 맞았다.

역사는 계절이 바뀌는 것처럼 저절로 바뀌지 않는다. 겨울이 가고 봄이 오듯 불의가 가고 정의가 오지 않는다. 역사는 그냥 발전한 적이 없다. 기득권 수구세력이 변화를 바라지 않기 때문이다. 역사의 진보는 이름 없는 수많은 개인들이 힘을 모을 때만 가능했다. 4·19혁명이 그랬고 6·10항쟁이 그랬다. 그렇게 죽어라 애써도 역사는 직선이 아닌, 나선형으로 발전한다고 이탈리아 역사학자 비코는 말했다.

대한민국은 지난 세월을 허송했다. 박근혜, 이명박은 하늘에서 뚝 떨어진 게 아니라 시민들의 손으로 뽑았다. 그사이 금쪽같은 시간이, 기회가, 에너지가 강물처럼 흘러갔다. 같은 강물에 두 번 발을 담글 수 없다. 흐르는 강물은 기다려주지 않는다.

2000년 전 폼페이 사람들은 베수비오 화산을 끼고 살면서도 희희낙락하다 하루아침에 4m 두께의 화산재에 파묻혔다. 이들은 마지막 순간까지 무슨 일이 닥쳤는지 잘 모르는 모습 그대로 발견됐다. 기존의 특권세력들이 이들과 똑같다. 기득권 세력들은 다른 세상을 사는 듯 살아왔다. 촛불은 박근혜의 무능뿐 아니라 재벌, 검찰, 정치, 언론 등에서 그동안 자행돼온 불의와 시민의 분노가 만난 곳에서 등장했다. 시민들은 진작부터 알고 있었다. 몰랐던 게 아니고 마그마처럼 부글부글 끓고 있었을 뿐이다.

새해는 불평등, 불공정, 불의의 구체제에서 빠져나와야 한다. 특권과 반칙, 불법과 협잡이 판치는 세상을 끝내야 한다. 촛불은 화산 폭발의 전조(前兆)다. 민심이란 화산에 연기가 피어오르기 시작했다. 화산은 아직 폭발하지 않았다.

박래용 논설위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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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당 충청권 의원들이 퇴임을 앞둔 반기문 유엔 사무총장을 찾아가 면담했다. 유력한 대권주자와 국회의원들이 견해를 나누고 미래를 도모하는 것이야 무방한 일이다. 한데 의원들이 지역주의에 기대서 ‘묻지마 지지’를 선언하는 행태는 실망을 넘어 섬뜩하다. 비전과 지향보다는 이해 득실만 따져 지역주의를 부채질해온 정치세력 때문에 한국이 입은 상처가 어느 정도였는지는 더 말할 필요도 없을 것이다.

새누리당 소속 충북 의원들이 지난 22일 미국 뉴욕에서 “반 총장이 정하시는 길로, 공산당(입당)만 아니라면 따라갈 것”이라고 하자 반 총장은 “고맙다”는 뜻을 밝혔다고 한다. 의원들은 “보수와 중도를 함께 아울러서 가야 한다”고 말했고, 반 총장은 “전적으로 공감한다”고 답했다. 의원들 발언 취지는 퇴행적이고 조악하다. 반공(反共)을 제1 가치로 내세우기만 하면 지역주의를 조장해도 정당화된다는 것인가. 진보적 시민을 배제하고 나머지만 아우르면 대권을 잡을 수 있다는 속셈도 무섭다.

반기문 유엔 사무총장. AFP연합뉴스

이들이 충북 음성 출신 반 총장에게 구애하면서 내세우는 게 ‘충청권 대망론’이다. 그간 반 총장을 노골적으로 지지해온 정우택 새누리당 원내대표는 충북, 정진석 전 원내대표는 충남이 지역구다. 이들은 반 총장을 앞세우면 새누리당 기반인 영남과 충청 유권자에다 ‘기존 정치권 혐오’ 시민을 묶을 수 있다는 그림을 그려왔다. “우리가 남이가(이냐)” 식 지역주의를 부채질하겠다는 의도에 다름 아니다. 시민의 바람을 좇는 게 아니라 이익에 맞는 주자를 내세운 뒤 지역을 볼모로 유권자를 줄 세우겠다는 것이다.

반 총장도 실망스럽기는 마찬가지다. 유엔에서 각국의 이해를 조정하고 국제 규범을 추구해왔다는 이가 기껏 지역주의에 기대고 있음을 드러낸 것이기 때문이다. 이는 “한국인들이 새로운 형태의 포용적 리더십을 찾고 있다”는 그 자신의 말과도 배치된다. 그렇지 않아도 반 총장이 박연차 전 태광실업 회장으로부터 거액의 달러를 받았다는 의혹이 구체적으로 나오고 있던 차다. 반 총장은 대리인들을 시켜 부인했으나, 경향신문에 따르면 박 전 회장과 잘 아는 법조계 인사는 거듭 금품수수 사실이 맞다고 확인했다.

반 총장이 새로운 리더십을 구축하려면, 자신을 둘러싼 의혹을 규명하기 위해 검찰 수사를 자청해야 한다. 또 내세울 거라곤 지역주의밖에 없는 ‘정치 좀비’보다는 적폐를 해소하고 나아갈 길을 제시하는 이들과 만나 비전과 정책을 궁구하는 데 힘을 쓰는 게 맞다. 안 그러면 일반 시민은 물론 충청 지역민으로부터도 “개갈도 안 난다(‘변변치 못하다’는 충청 방언)”는 지청구를 듣게 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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반기문 유엔 사무총장이 박연차 전 태광실업 회장으로부터 거액을 받았다는 의혹이 잇따르고 있다. 노무현 정부 시절 실세 정치인들에게 금품을 제공했다가 사법처리된 ‘박연차 게이트’의 장본인인 박 전 회장이 유엔 사무총장 취임 전후에 반 총장에게 달러화를 제공했다는 것이다.

그제 나온 보도에 따르면 반 총장은 박 전 회장으로부터 2005년, 2007년 두 차례에 걸쳐 총 23만달러를 받았다. 박 전 회장 지인은 “2005년 5월3일 방한 중이던 베트남 응우옌 지 니엔 외교장관 일행 환영 만찬이 열리기 한 시간 전쯤 박 전 회장이 한남동 외교부 장관 공관에 도착해 반 (당시 외교)장관 사무실에서 20만달러가 담긴 쇼핑백을 전달했다”고 주장했다. 박 전 회장은 주한 베트남 명예총영사 자격으로 만찬에 참석했다. 또 박 전 회장 지인은 “2007년 초 박 전 회장 자신이 잘 아는 뉴욕 한 식당 사장에게 전화를 걸어 반 총장이 식사하러 오면 3만달러를 주라고 했고, 전달된 것으로 안다”고 말했다고 한다.

반기문 유엔 사무총장이 지난 5월29일 경기도 고양시 킨텍스에서 열린 ‘2016 국제로타리 세계대회’ 개막식에서 기조연설을 하고 있다. 이석우기자 foto0307@kyunghyang.com

어제는 박연차 게이트 수사 관련자들이 박 전 회장 비서 이모씨 다이어리에 반기문이라는 이름이 두 차례 등장하고, 옆에 돈 액수가 적혀 있었다고 말했다는 보도도 이어졌다. 돈을 합하면 모두 5만달러 정도였다고 한다. 이 다이어리는 2008년 7월 국세청 세무조사 당시 확보돼 검찰에 넘겨졌다.

반 총장 측근 인사는 “반 총장은 당시 만찬 중 박 전 회장과 따로 만난 사실이 없다”면서 “반 총장은 그날 전까지 박 전 회장과 일면식도 없었으며 이후에도 박 전 회장을 만난 적이 없다”고 밝혔다. 이 인사는 “악의적인 보도가 나오는 것에 대해 깊은 유감”이라면서 정치적 배경을 경계했다.

하지만 이런 의혹 제기를 ‘악의적 보도’로만 치부할 게 아니다. 현재 유력한 차기 대권주자인 반 총장을 검증하는 것은 오히려 필요한 일이다. 앞으로도 등장할 이런 검증 관문을 기꺼이 통과해야 후보 자격이 주어질 것이다. 뇌물죄 공소시효 10년 규정을 내밀며 지금은 죄가 안된다는 식으로 얼버무릴 일도 아니다. 반 총장은 의혹이 사실이 아니라면 익명의 측근에게 맡길 게 아니라 직접 해명하고, 나아가 검찰에 관련 사실을 밝혀 달라고 요구하는 것이 마땅하다. 그렇지 않아도 한국은 지금 제대로 검증되지 않은 후보가 대통령이 된 뒤 온갖 비리로 국정이 마비되는 상황을 목도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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난데없이 반기문 유엔 사무총장 신드롬을 만들었던 여야의 영입전쟁. 결국 반 총장의 해명으로 일단락됐지만, 반기문 러브콜은 정치권에서 계속될 것이다. 그것은 두 가지 이유에서인데 첫째는 박근혜 대통령 때문이고, 둘째는 한국 정당의 후진성 때문이다.

반 총장이 대선후보 1위를 기록하는 이유는 박 대통령 덕분이다. 반 총장의 리더십은 외교가에서 따뜻한 카리스마로 알려져 있다. 반 총장은 외교부에서 일했을 때 부드럽고 인간적인 면모로 후배들을 이끌면서 그의 리더십을 형성했던 것으로 알려져 있다. 박 대통령 레이더에 한번 쏘이면 확실하게 찍히는 정치풍토와는 완연히 다른 모습이다. 최근 김무성 대표가 개헌 이야기를 잘못 꺼냈다가 그것을 만회하기 위해 고생이 많은 것과는 대비된다. 반 총장은 중도적 성향의 인물로 알려져 있다. 타협과 협상을 중요시한다. 그것은 그의 오랜 외교생활 덕택이기도 하다. 그러나 박 대통령은 자신의 정치적 장애라고 생각하면 가차 없다. 공무원연금 개혁은 연말까지 완성해야 하고, 세월호 유가족들 요구 역시 아니면 아닌 것이다. 야당도 지난해 천막당사 농성을 하든 말든 아랑곳하지 않았다. 갈등과 대립을 조정하는 조용한 리더십은 거의 보이지 않았다. 결국 힘센 사람이 이기는 리더십이 박근혜 정권에서 높이 보였다. 그래서 국민들은 아직 잘 모르지만, 검증되지도 않았지만, 뭔가 중립적 입장에서 대화와 협력으로 정치를 이끌 것 같은 반 총장을 선호하는 것이다.

반기문 유엔 사무총장 (출처 : 경향DB)


또 다른 이유는 대선 승리를 위해 모든 것을 거는 정치인들 덕분이다. 한국 정당의 가장 큰 특징은 대통령 권력을 좇아서 혹은 유력 대선후보를 따라 정당이 이합집산됐다는 점이다. 이승만 대통령이 1951년 자유당을 만들 때, 자신의 장기집권을 위해서 말 잘 듣는 사람들로 자유당을 구성했다. 그리고 1952년 헌법을 뜯어고치고 2대 대통령에 취임한다. 자유당 사람들의 목적은 오직 이승만 대통령 구하기였다. 대한민국의 정당은 주인이 바뀔 때마다 창당과 분당, 그리고 당명을 수시로 바꾼 역사를 갖고 있다. 박정희 때의 공화당, 전두환 시절의 민정당, 그리고 3당 합당으로 창당된 민자당, 1995년 김영삼(YS) 정권 시절의 신한국당, 1997년 대선을 한 달 앞두고 만들어진 이회창의 한나라당, 박근혜의 새누리당. 야당도 마찬가지다. 1987년 대선을 앞두고 만들어진 김대중(DJ)의 평민당과 YS를 대권후보로 옹립했던 통일민주당, 또 김종필(JP)의 신민주공화당, 정주영의 국민당, 정몽준의 국민통합21, 노무현의 열린우리당, 이 모든 정당이 한 사람을 대통령으로 만들기 위해, 또 대통령 권력을 공고히 하기 위해 만든 정당이었다고 해도 틀리지 않는다. 그러니, 본래적 의미의 정당 역할은 기대하기 힘들었다. 정당정치 혜택을 받지 못하고 있는 우리 국민에게는 비운이다.

하지만 더 큰 문제는 이러한 한국 정당의 문제점을 잘 알고 있고, 개선해야 된다고, 정치개혁을 외치는 사람들이 기회만 있으면 대선 줄서기용 정당을 만들려고 한다는 것이다. 이번 반기문 추파 사건도 대권 줄대기의 오래된 관행 중 하나다. 새정치민주연합의 전당대회가 내년 2월이라고 한다. 역시 논란의 중심은 문재인 의원의 대선 출마 여부이다. 대권주자 문재인 때문에 당권·대권 분리라는, 대표·최고위원 분리선거 논쟁이 격하다. 한국 정치 현실에서 제대로 된 새 정치는 제대로 된 정당 기반을 다지는 일에서부터 출발해야 하지만, 유력 대권주자 만들기가 더 급하다. 처음부터 확실하게 그 정당을 바꿔야 한다. 정당의 기반도 새롭게 짜고, 지향점 역시 물적 토대 위에서 다시 만들어져야 한다. 그리고 선거에서 해당 정당이 국민에게 심판받고 평가받아야 한다. 그러나 아마도 현재의 국회의원들은 이 작업을 하기가 난망할 것이다. 유력 대선주자 한 명 모시고 선거를 치러도 그 정치적 생명이 보존되기 때문이다. 바뀌지 못하는 한국 정당, 그래서 새로운 정치, 새로운 정당에 대한 갈증이 더욱 심하다.


유용화 | 시사평론가·동국대 대외교류硏 책임연구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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