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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 2018.01.09 [기고]조기 영어교육의 ‘허상’을 깨자

몇 년 전에 서울지역 유치원에서 진행되는 방과후 영어 프로그램을 살펴볼 기회가 있었다. 정규 유치원 프로그램을 마친 아이들이 오후에 사교육업체에서 제공하는 영어교육을 받고 있었다. 강사는 전문적인 훈련 없이 업체에서 간단한 교육을 받고 파견된 사람이었다. 아이 10여명이 TV에서 나오는 노래를 따라 부르거나 강사의 지시에 집단적으로 영어를 따라 했다. 그건 말을 하는 것이 아니었다. 집단으로 영어 떼창을 하는 듯했고, 마치 앵무새가 인간의 말을 흉내 내는 것 같았다. 아이들이 노래를 부를 때 과연 노랫말의 뜻이나 알고 있는지 궁금했다. 그 시간에 아이들이 우리말로 뭔가를 했다면 어땠을까. 이 또래의 아이들은 자신의 모국어로 다양한 생각을 표현할 수 있고, 주변 사람들과 풍부한 대화가 가능한 나이다. 누가 하는 말을 일방적으로 따라 하거나 앵무새처럼 반복할 나이는 아니다. 언어 발달이 폭발적으로 일어나는 시기여서 혼자 내버려 둬도 우리말이 쏟아져 나오는 시기다.

이 시기에 부모나 또래와의 소통은 아이들의 어휘 발달이나 언어 능력 향상에 중요한 영향을 미친다. 어떤 어휘를 사용해서 얼마나 질적으로 풍부한 소통의 기회를 갖느냐 하는 것이 초등학교 생활에 큰 영향을 미친다는 연구도 있다. 그런 점을 고려하면, 그저 시키는 대로 따라 하거나 매우 제한적인 표현만을 활용해서 반복적으로 이루어지는 영어교육은 어떤 면에서 시간 낭비다.

최근 교육부의 유치원 방과후 영어교육 금지는 이런 상황에서 제대로 된 밑그림을 그리겠다는 의도에서 나온 정책이지만, 아쉬운 점은 있다. 한마디로 영·유아를 둔 학부모들이 갖고 있는 자녀의 영어에 대한 생각은 기대와 불안감으로 응축된다. 어차피 영어는 학교나 사회에 나가서 중요한 능력의 하나인데, 이왕이면 잘할 수 있도록 키워주고 싶은 것이 많은 학부모들의 욕심이며 기대다. 더구나 영어를 조기에 배우면 좋다는 믿음으로 똘똘 뭉쳐 있는 현실에서, 다른 아이들이 수십만원에서 수백만원 하는 소위 ‘전일제 영어학원’을 다니는데, 자신의 아이를 보면 왠지 불안하다. 초등학교 3학년부터 학교에서 영어를 가르친다고 하는데, 그렇게 믿고 따라가도 되는지, 그런 불안과 궁금증이 해소되지 않기 때문에 자꾸 주변을 살피고, 남들이 하는 것의 최소한이라도 따라가려고 한다. 이런 학부모들의 불안이나 기대 또는 경쟁의식을 제대로 해소해주지 못하면, 정부의 유아 관련 영어교육 정책은 착근하기 어려울 것이다.

차제에 유아기 영어교육과 관련하여 몇 가지를 체계적으로 추진할 필요가 있다. 첫째, 유치원 단계부터 초등학교 2학년까지 영어교육에 대한 입장을 분명히 할 필요가 있다. 현재 초등학교 3학년부터 영어교육을 실시하고 있다. 이는 유치원 단계의 누리과정이나 초등학교 1~2학년에서 진행되는 영어교육과 일관성이 없으며, 어떤 식으로든 조정이 필요하다. 더불어, 유치원 시기의 아이들 학부모들이 갖는 영어교육에 대한 기대나 요구 또는 불안을 적극적으로 해소할 수 있는 방안도 필요하다. 정부는 조기 영어교육의 효과나 부작용 또는 그 양면성에 대한 보다 과학적인 자료를 제공할 필요가 있다. 그와 함께 전국에 난립해 있는 전일제 어린이 영어학원을 어떻게 할 것인지 분명한 대안이 필요해 보인다. 마지막으로, 국민들의 기대나 불안을 해소할 수 있는 종합적인 영어교육 정책이 필요하다. 초등학교 3학년에서 실시되는 영어교육이 고등학교 3학년까지 이어지면서, 어떤 방식으로 어떤 능력을 길러줄 것인지 명확한 지표를 제시해야 한다. 그런 지표를 제대로 따라간 학생들은 사교육을 받지 않아도 더 이상 학교나 사회에서 손해를 보거나 차별을 받거나 불이익을 받지 않는다는 확신을 줘야 한다. 그럴 때 학부모들은 정부나 학교를 믿고 따를 수 있으며, 조기 영어교육의 허상에서 벗어날 수 있다.

<이병민 | 서울대 교수·영어교육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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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osted by KHross