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법부는 국민들의 신뢰를 먹고 산다. 선출되지 않은 권력인 사법부가 존립할 수 있는 근거는 오직 공정한 재판을 통해 쌓아올린 국민들의 신뢰뿐이다. 진정한 사법부의 권위도 높은 법대 위의 판사석에서 만들어지는 것이 아니라, 공정한 재판들이 켜켜이 쌓여 형성된 국민들의 신뢰 속에서 세워진다. 국민들이 억울한 일을 당했을 때, 마지막으로 기대는 언덕이 사법부다. 그런 사법부에서 일어난 이번 사법농단 사태이기에 국민들이 느끼는 충격과 배신감이 그만큼 더 큰 것이다.

15일 양승태 전 대법원장 재임 시절 사법행정권 남용 의혹에 대한 검찰 수사에 협조하겠다는 대국민담화를 발표한 김명수 대법원장이 서울 서초동 대법원을 나서며 기자들의 질문에 답하고 있다. 이준헌 기자

지난 5월25일에 사법행정권 남용 의혹 관련 특별조사단의 3차 조사결과가 발표됐다. 법관 사찰의 정황들이 지난 2차 조사결과 발표 때보다 더 구체적으로 확인되었고 법원행정처가 상고법원 설치를 위해 판결들을 청와대와의 거래 수단으로 삼았다는 의혹을 살 수 있는 여러 정황들도 추가로 더 많이 나왔다. 특별조사단의 조사로 지금까지 밝혀진 사법농단이 크게 ‘법관 사찰’과 ‘재판거래 의혹’ 두 가지라면, ‘법관 사찰’에 대해서는 이미 어느 정도 증거 확보가 된 셈이다. 문화예술계 블랙리스트 사건에서 조윤선 전 문화체육관광부 장관에 대한 법원의 판결을 보면, 문건 정리와 작성을 시킨 것 자체가 형법상의 직권남용죄에 해당한다고 법원이 이미 판시했기 때문이다. 문건에 언급된 판사들에게 어떤 인사상 불이익을 줬는지는 직권남용죄의 성립과 관련이 없는 사항이다.

지금 논란이 되고 있는 것은 ‘재판거래 의혹’이다. 이 ‘재판거래 의혹’ 부분 때문에 김명수 대법원장이 지난 금요일인 6월15일까지 법원의 입장 표명을 미루고 3주간이나 경청과 장고의 시간을 가졌던 것이다. 3차 조사결과 발표 다음 날 김 대법원장은 검찰 고발이나 수사 의뢰까지 고려대상으로 삼겠다고 공언한 후 법원 내·외부의 의견 수렴에 들어갔고, 그 결과 고발이나 ‘수사 의뢰’에서 후퇴한 ‘수사 협조’의 입장을 최종적으로 정한 것으로 보인다. 주목할 점은 의견수렴 과정에서 이 사태를 바라보는 법원 내부의 입장이 검찰 고발 여부를 놓고 노·소장 판사들 사이에서 분명하게 갈렸다는 점이다. 김 대법원장도 담화문에서 “미처 해명하지 못한 의혹들에 대한 외부기관의 수사를 요청하는 견해”가 있는가 하면, “사법부에 대한 무분별한 수사로 사법부의 독립과 신뢰가 또다시 침해되는 부작용이 발생하지 않을까 우려하는 시각”도 있었다고 고백하고 있다.

이 사태를 법관들만의 문제로 보고 법원 자체적으로 해결 가능하다고 판단하는 일부 고위법관들의 인식은 이번 사태로 충격과 실망을 느끼는 다수 국민들의 인식과 크게 동떨어져 있는 듯하다. 이미 재판거래에 관한 ‘의혹’만으로도 국민들의 사법부 신뢰는 상당 부분 무너졌다. 또다시 더 무너질 신뢰가 별로 남지 않았다고 느끼는 국민들이 적지 않음을 고려해야 한다. 국민의 입장에서 생각해야 한다. 대법원장의 담화문 발표 직후에 같은 날 있었던 대법관들의 입장 발표 또한 국민들의 상황 인식과 간극이 크다. “재판거래 의혹에 대하여는 대법관들은 이것이 근거 없는 것임을 분명히 밝힌다”고 했다. 물론 대법원 재판을 믿어 달라는 말이겠지만, 이런 말로 재판에 대한 신뢰가 다시 생겨나는 것은 아니다. 국민들의 놀란 가슴을 달랠 수 있는 설득력 있는 설명이 빠져 있기 때문이다.

이제 공은 검찰로 넘어갔다. 이미 여러 시민사회단체들에 의한 고발이 열 건이 넘는다. 재판거래가 있었는지 없었는지는 어차피 수사가 진행되면 드러날 것들이다. 검찰은 성역 없는 철저한 수사를 통해 증거들을 확보해야 한다. 수사에서 일체의 정치적 고려를 배제해야 한다. 검찰은 국민의 혈세로 사들인 최첨단의 디지털 포렌식 장비와 인력을 가지고 있다. 특별조사단이 조사한 410개의 파일들뿐만 아니라, 이번 일이 터지자 양승태 전 대법원장의 법원행정처에 의해 긴급 삭제된 2만4500개의 파일들도 모두 복구해 이번 사태의 진상을 낱낱이 밝혀야 한다. 봐주기 수사가 조금이라도 있으면 법원이 아니라 검찰이 또 다른 위기를 맞을지도 모른다.

최근의 여론조사에 의하면 사법부를 불신한다는 국민 여론이 64%이다. 성역 없는 철저한 수사와 기소, 그 후 이어지는 법원의 공정한 재판만이 이번 사법농단 사태로 허물어진 사법부에 대한 신뢰를 회복할 수 있는 유일한 길임을 명심해야 한다. 둘 중 어느 한 가지라도 제대로 이행되지 않으면 국민들의 사법 불신은 회복 불가능한 상황으로까지 갈지 모른다. 사법부의 존립 근거가 완전히 붕괴되는 상황 말이다. 이 일은 단기간에 끝날 일이 아니다. 서두르지 말고 한발 한발 나아가자. 다시 말하지만 시작은 열지 못한 나머지 파일들을 복구하고 열어서 진상을 규명하는 일이다. 지금은 진상규명에 화력을 집중할 때다.

<임지봉 | 서강대 법학전문대학원 교수·헌법학>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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청와대가 양승태 대법원장 등 법관들을 광범위하게 사찰한 정황이 담긴 문건이 공개됐다. 사실이라면 매우 심각한 사안이다. 삼권분립과 사법부 독립을 명시한 헌법을 정면 부정하는, 헌법 질서 문란행위이기 때문이다. 이것만으로도 박근혜 대통령은 탄핵감이다. 2014년 11월 세계일보의 ‘정윤회 문건’ 보도 당시 이 신문사 사장을 지낸 조한규씨는 어제 열린 국회 ‘최순실 국정농단 사건’ 국정조사특위 4차 청문회에 증인으로 나와 “양승태 대법원장의 일상을 사찰한 내용”이라며 문건을 특위에 제출했다.


2014년 1월6일 작성된 것으로 보이는 이 문건은 ‘대외비’라고 표시가 돼 있다. 문건에는 ‘대법원, 대법원장의 일과 중 등산사실 외부 유출에 곤혹’이라는 제목으로 양 대법원장의 동향과, ‘법조계, 춘천지법원장의 대법관 진출 과잉 의욕 비난 여론’이라는 제목으로 최성준 당시 춘천지법원장(현 방송통신위원장)에 대한 부정적 평판 등이 적혀 있다. 조씨는 “김기춘 당시 비서실장의 지시를 받아 민정비서관실에서 작성했지만 (별도로) 수집한 문건일 수도 있다”고 말했다. 이 문건은 ‘정윤회 비선농단 의혹’을 취재하던 세계일보 기자가 2014년 당시 확보한 것이다. 조씨는 이 문건이 보도되지 않은 이유에 관해 “정윤회 문건 보도로 청와대의 고소가 들어왔고, 기자들이 30시간 이상 검찰 조사를 받는 바람에 후속 보도를 못했다”고 설명했다.


국회 청문회 도중 불거진 대법원장에 대한 사찰 의혹이 알려진 15일 양승태 대법원장이 서울 서초동 대법원에서 퇴근하며 기자의 질문을 받자 손사래를 치고 있다. 정지윤 기자



김영한 전 민정수석의 비망록에 적힌 청와대의 사법부 통제 발상을 고려하면 문건은 신빙성이 높아 보인다. 김 전 수석 비망록엔 2014년 9월6일 김기춘 전 비서실장이 ‘법원 지나치게 강대·공룡화 견제수단 생길 때마다 길을 들이도록’이라고 지시했다는 내용이 적혀 있다. ‘2014년 6월24일경부터 9월7일 임기만료인 양창수 대법관의 후임으로 호남 출신을 배제하고, 검찰 몫 획득을 위해 양승태 대법원장 등과 교류하라’는 내용의 메모도 있다. 선박사고를 낸 선장의 구속영장을 기각하면서 세월호 사건의 정부 책임을 언급한 판사를 인사 조치해야 한다는 내용도 있다.


법관 사찰은 개인의 약점을 잡아 정당한 사법권 행사를 방해하려는 불순한 의도에 뿌리를 두고 있다. 문건이 도·감청이나 불법 미행을 통해 작성됐을 가능성도 배제할 수 없다. 박 대통령의 청와대는 지난 4년간 챙겨야 할 국정은 최순실씨 등 비선에 내주고, 해서는 안되는 일만 골라서 했다고 비난받아도 할 말이 없게 됐다. 대법원은 청와대에 해명을 촉구했지만 지금의 청와대와 박 대통령은 그럴 자격도 능력도 안된다. 결국 청와대의 법관 사찰 의혹도 박영수 특검의 수사를 통해 진상이 밝혀져야 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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