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30년대 국가재정 파산 위기, 2040년대 잠재성장률 1%대 진입, 2050년대 인구경쟁력 세계 최하위, 2060년대 잠재성장률 0%대 진입…. 국내 연구기관들이 전망하는 한국의 미래다. 마치 국가부도를 향해 달려가는 모양새다. 이런 암울한 미래의 뿌리는 저출산과 고령화, 그리고 양극화이다. 사회의 구조와 체질을 근본적으로 바꾸는 국가적인 구조조정이 필요하다는 공감대가 형성된 지도 오래다. 복지국가를 만드는 것도 구조조정의 한 줄기다.

이런 위기의식의 발로인 듯, 2012년 대통령 선거에서 여야 후보 모두 복지국가를 약속했다. 국가부도를 피할 희망이 보였다. 그러나 얼마 지나지 않아, 희망은 실망으로 바뀌었다. 심지어 보수 집권세력은 지금의 복지를 과잉 복지로 진단하고, 복지를 구조조정해야 한다고 주장한다. 이들에게 더 이상의 기대를 접는 편이 좋을 듯하다. 그렇다면 진보 야권세력은 희망의 대안으로 인정받고 있는가? 안타깝게도 그렇지 못하다. 그 이유는 여러 가지가 있지만, 과거의 낡은 관성에서 벗어나지 못한 탓이 크다. 변화와 혁신은 진보의 핵심 가치지만, 진보의 복지는 여기서 비켜나 있었다.

2012년 대통령 선거 당시 문재인 후보는 북유럽 복지국가 대사들과의 대담에 참석해 복지국가와 경제성장의 선순환 구조. 일자리와 복지의 양립 등에 대해 자문했다. (출처 : 경향DB)


복지 영역에서 우선적으로 극복해야 할 진보의 낡은 관성은 무상복지 담론이다. 잘 알려진 것처럼 무상복지의 원조는 진보정당이다. 그리고 2012년 민주통합당이 3무1반 정책을 채택하면서, 범야권의 복지 비전을 담는 그릇이 되었다. 2000년대 초반, 진보정당이 제시한 무상복지 정책의 파장은 컸다. 지금과는 다른 세상이 가능하다는 영감을 불러일으켰다. 그리고 무상급식과 무상보육은 복지를 국민의 보편적 권리로 인식하는 전기를 마련해주었다. 그러나 이제는 더 이상 무상복지가 진보의 복지 비전을 담는 그릇이 아니다.

국가가 국민의 삶을 보호하는 수단은 다양하다. 서비스 이용 시점에서 비용 부담을 최소화하는 것은 중요하지만, 수단의 전부는 아니다. 보육에서 이미 입증된 것처럼 보육비용을 줄여주는 것만으로는 안심하고 아이를 키울 수 없다. 의료도 마찬가지다. 국민의 병원비 걱정은 여전하지만, 이에 못지않게 높은 질의 의료, 안전한 의료, 친절한 설명, 진료과정에서의 인간적 존엄성, 환자의 자기결정권, 지역 접근성에 대한 요구도 크다. 무상의료라는 그릇으로는 이런 국민의 요구를 담을 수 없다.

무상복지는 복지에 소극적인 보수 집권세력의 좋은 먹잇감이다. 반복지 정서를 확산시키고, 복지를 정쟁의 대상으로 전락시키는 소재로 활용하고 있다. 게다가 국민의 다수는 무상복지를 공짜 복지, 퍼주기 복지, 획일적인 균등 복지로 이해하고 있다. 보수의 악의적인 왜곡 탓이다. 그러나 원인이 무엇이든 국민의 다수가 그렇게 이해하고 있다는 사실이 중요하다. 우리가 말한 무상복지는 그런 것이 아니라거나, 무상복지를 복지 비전으로 명시적으로 밝힌 적이 없다고 항변해도 소용없다. 이 역시 국민은 그렇게 생각하고 있기 때문이다.

스웨덴은 대표적인 복지국가이다. 그리고 사민당이 복지국가를 만드는 데 중추적 역할을 했다는 것도 주지의 사실이다. 1950년대 중반 이후, 사민당은 매우 중요한 이념적 전환을 단행했다. 우파 정당의 슬로건으로 어울릴 법한 ‘자유선택 사회’를 자신의 복지국가 이념으로 확립한 것이다. 이전까지 사민당의 복지정책은 수직적 재분배와 양적 평등에 초점을 맞춘 것이었다. 그러나 복지 확대로 국민의 삶이 향상되고, 화이트칼라층이 부상하면서, 과거의 균등주의 정책으로는 국민의 지지를 얻기 어렵게 되었다. 용어만 놓고 보면, ‘자유선택 사회’는 우편향으로 해석될 수 있다. 그러나 ‘자유선택 사회’에서 말하는 복지국가의 역할이란 국민 개개인이 자신의 삶의 가능성과 기회를 자유롭게 선택할 수 있는 조건을 갖추어 주는 것이다. 개인적으로 이만큼 복지국가의 궁극적 비전을 잘 묘사한 표현도 없다고 생각한다. 이런 이념적 혁신과 균등주의 정책에서의 탈피를 통해 사민당은 블루칼라층에 더해 화이트칼라층의 지지까지 얻어내며, 더 높은 차원의 복지국가를 만들어낼 수 있었다.

사람도 몸이 커지거나 계절이 바뀌면 옷을 갈아입는 것처럼 진보의 복지 담론도 시대의 요구에 따라 변화하고 혁신되어야 한다. 더 나은 세상을 향한 열정과 희망만 남겨놓고, 이제는 무상복지에 작별을 고할 때이다.

굿바이! 무상복지.


이진석 | 서울의대 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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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근 정부·여당을 선두로 보수적 자유주의 세력이 복지국가 건설이라는 시대적 대세에 제동을 걸고 나섰다. 정부재정의 부족을 이유로 무상급식과 무상보육이라는 보편적 복지를 선별적 복지로 전환하자는 게 드러난 쟁점인데, 이는 장차 보육, 교육, 의료, 요양, 직업훈련, 평생교육 등 보편적 복지의 실질적 확충과 경제민주화의 실현을 포함한 역동적 복지국가로의 패러다임 전환을 허용하지 않고, 시장만능주의가 지배하는 기존의 경제사회 질서를 그대로 유지하겠다는 의지의 표현이다. 이런 흐름은 국민의 기대와 시대정신에 반하는 역주행이다.

2010년 6월 지방선거 때부터 시대정신으로 등장하기 시작한 보편적 복지와 복지국가에 대한 국민의 기대와 열망은 그해 10월 민주당 전당대회에서 보편적 복지가 당헌에 명시되는 것으로 이어졌다. 그리고 당시 박근혜 의원이 국회 공청회를 통해 “생애주기별 맞춤형 복지”를 주창함으로써 여야 간에 복지 경쟁이 벌어지기도 했다. 2011년에는 보편적 급식을 거부하던 오세훈 서울시장이 낙마하고, 박원순 후보가 당선됨으로써 보편적 복지와 복지국가는 우리시대의 큰 흐름으로 자리를 잡았다. 급기야 2012년 총선과 대선에서는 여야 정당 모두 복지국가를 공약했다. 이는 우리 국민이 더 나은 삶을 원했기 때문이다.

우리 국민은 행복하지 않다. 자살률은 인구 10만명당 30명으로 OECD 평균의 3배다. 합계출산율은 1.19명으로 꼴찌다. 강력 범죄율도 급격히 늘었다. 이는 1997년 외환위기 이후 일어난 나쁜 변화들이다. 우리의 삶이 이렇게 불안하고 불행해진 것은 경제와 노동시장의 양극화 때문이다. 선별적 복지 중심의 부실한 복지체제가 사회안전망 역할을 해내지 못한 것도 한몫했다. 불평등이 문제다. 상대 빈곤율은 15%로 유럽 복지국가의 2배나 되고, 노인의 상대 빈곤율은 49%로 OECD 평균 13%를 압도한다. 우리나라는 소득상위 10%가 전체 소득의 45%를 점유해서 미국의 48%에 이어 2위다.

행복하지 않은 것은 1인당 국민소득 2만7000달러의 복지후진국이기 때문이다. ‘GDP 대비 사회복지지출’ 비중은 9%로 OECD 평균 21%나 선진복지국가의 30%에 비하면 형편없다. 더 큰 문제는 복지후진국은 일정 단계 이후론 경제성장이 어렵다는 사실이다. 그래서 지금 우리나라는 저성장의 덫에서 허우적대고 있다. 최경환 경제부총리가 저금리의 통화정책과 확장 기조의 재정정책으로 대응하고 있지만 실패했던 일본의 전철을 밟을 것으로 전망된다. 양극화 경제와 선별적 복지의 구조적 한계로 인해 우리나라는 경제와 복지가 통합된 역동적 발전이 가로막히고 있다.

서적 <복지국가를 만든 사람들> (출처 : 경향DB)


이런 이유로 시장만능주의 양극화 체제에서 보편주의 역동적 복지국가로의 패러다임 전환이 요구되었고, 2012년 총선과 대선에서 여야 선거공약의 전면에 등장했던 것이다. 그런데 박근혜 정부는 처음부터 복지국가 공약을 폐기했고 시장만능주의를 강화했다. 게다가 최근 정부·여당을 필두로 보수적 자유주의 세력은 정부재정의 부족을 이유로 이명박 정부 말기에 정치사회적 합의로 시작되었던 보편적 급식과 보육마저 선별적 방식으로 전환하자며 복지국가의 길을 공격하고 나섰다. 우리나라는 일반정부 지출규모가 GDP의 31%로 OECD 평균인 42%에 크게 못 미친다. 그러므로 복지 축소가 아니라 누진적 증세가 정답이다.

그러나 정부·여당은 ‘증세 없는 복지’ 주장만 반복하며 “한국형 복지국가” 공약을 파기했고, 급기야 재정 부족을 이유로 2010년 이래 시대정신으로 자리 잡은 복지국가를 거부하고 나섰다. 이렇게 된 데는 무기력하고 무능한 제1야당의 책임도 크다. 결국 “깨어 있는 시민”이 나서야 한다. 시장만능주의가 초래한 양극화와 민생불안을 넘어 역동적 복지국가의 새 시대를 여는 것은 ‘복지국가의 기치’를 중심으로 우리 국민의 기대와 열망을 얼마나 잘 결집하는가에 달려 있다. 복지국가가 우리의 희망이다.


이상이 | 복지국가소사이어티 공동 대표·제주대 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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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생애주기별 맞춤복지’, 참 잘 지은 이름이다. 복지국가 가치인 ‘요람에서 무덤까지’를 적절히 담았다. 보편복지에 비판적인 후보가 내건 구호라 의구심은 들었으나 ‘보편적’이든 ‘한국형’이든 복지국가로 간다면 마다할 이유가 없지 않은가. 그런데 집권 2년째, 결과가 참담하다.

아이가 태어나면 보육복지가 필요하다. 박근혜 후보 공약 제목이 “0~5세 보육 및 유아교육 국가완전책임제 실현”이다. 누리과정 지원비용을 증액하고 관련 예산을 안정적으로 확보하겠다고 공약집에 명시했다. 내년부터 교육청이 누리과정 예산 전체를 편성하도록 제도가 개편된다. 그렇다면 늘어난 사업만큼 중앙정부가 교육청에 예산을 증액 지원해야 하건만 이를 방기한다. 이 때문에 교육청이 누리과정 예산을 편성할 수 없다는 걸 뻔히 알면서도 강요한다. 사실상 중앙정부의 누리과정 공약 파기다.

초등학생에게 온종일 돌봄학교를 약속했다. 올해 1, 2학년, 내년 3, 4학년, 내후년 5, 6학년까지 시행하겠다는 공약이다. 내년에 이 사업을 위해 4510억원이 필요하건만, 예산안에 배정된 돈은 0원이다. 급식으로 가보자. 현재 초·중·고생 약 70%가 무상급식을 받고 있다. 청와대 말대로 무상급식은 대선공약도, 중앙정부 사업도 아니다. 중앙정부의 예산 지원 한 푼 없이 지자체와 교육청이 합심해 주민이 동의하고 예산이 허락하는 선에서 진행돼 왔다. 지방자치의 모델 사업으로 꼽을 만하다. 지역 자체 사업으로 존중하면 될 일을 공연히 개입해 망치려 한다.

고교 무상교육을 내걸었다. OECD 국가들이 오래전부터 고교 무상교육을 실시한다면서 올해부터 시작해 임기 말년인 2017년에 완성하겠다고 약속했다. 이 역시 예산은 0원이다. 한편 이미 이명박 정부에서 단계적으로 시작된 대학생 반값 등록금은 박근혜 정부가 임기 2년차인 올해 마무리한다고 했으나 내년으로 연기되었다.

노동자를 위한 복지공약은 사회보험료 지원이다. 박근혜 후보는 저임금 노동자에게 고용보험과 국민연금 보험료 전액을 지원하겠다고 공약집에 적었다. 기존에 최대 절반만 지원하던 것을 국가가 모두 책임지겠다는 내용이다. 이는 아예 인수위원회에서 브레이크가 걸려 기존과 비슷하게 절반만 지원하는 것으로 백지화되었다.

은퇴하면 노인복지가 요청된다. ‘모든 어르신에게 기초연금 20만원’이라는 현수막이 거리 곳곳에 나부꼈다. 얼마 전 통과한 기초연금법에 의하면 70% 노인에게만 지급되고, 국민연금과 연동해 삭감하는 조항이 추가되었으며, 향후 연금액이 소득 대신 물가와 연동하도록 바뀌어 시간이 흐를수록 기존 기초노령연금에 비해 인상률이 하향한다. 당장은 20만원 인상 시기를 앞당겼지만 8년 후인 2022년부터는 기초연금액이 기존 기초노령연금 설계도보다 줄어들 예정이다.

기초노령연금 제도 개선으로 수급비용 줄어든 어르신들이 피켓을 들고 시위를 하고 있다. (출처 : 경향DB)


전체 연령대 복지도 처지는 비슷하다. 의료 공약에선 2016년까지 “4대 중증질환 진료비 전액 국가 부담”을 완성하겠다고 호언했으나, 인수위원회가 3대 비급여는 약속하지 않았다고 발뺌했고 거친 항의를 받고서야 부분적 개선 조치를 취하고 있다. 가난한 사람을 위한 복지인 기초생활보장제도도 약속과 다르게 간다. 부양의무제를 완화하고 비현실적인 재산의 소득환산제를 개선해 사각지대를 해소하겠다고 큰소리쳤건만 국회에 제출된 정부여당안은 부양의무제로 인해 탈락한 117만명 중 12만명을 구제할 뿐이고, 재산의 소득환산액 조항은 아예 다루지 않는다. 대통령은 송파 세 모녀를 위한 법이라 강조하지만 정부여당안대로 통과돼도 세 모녀는 수급 자격을 얻지 못한다. 주거빈곤층을 위한 복지는 철도부지 상부에 인공대지를 조성해 짓는 ‘행복주택 프로젝트’이다. 임기 내 총 20만가구 건설을 목표로 내걸었으나 사업속도가 지지부진해 벌써부터 달성 여부에 우려가 생기고 있다.

세상에 이런 대통령이 또 있을까? 공약마다 재정방안을 꼼꼼히 따져 실현 가능한 것만 약속했다며 ‘생애주기별 맞춤공약’이라 자부했는데 그 멋진 이름의 실체가 ‘생애주기별 공약 파기’라니. 대통령을 직접 손으로 뽑은들 무슨 소용인가?


오건호 | 내가만드는복지국가 공동운영위원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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생로병사(生老病死)! 불교에서 인생은 이 네 글자로 간단히 요약된다. 그렇다. 모든 인간은 태어나고, 늙고, 병들고, 그리고 마침내 이 세상을 떠난다. 물론 우리의 삶이 이 네 가지에만 국한된 것은 아니다. 만일 그렇다면 우리의 삶은 너무나 불행하고 궁핍한 것일 수 있다. 사실 우리 삶이 살아낼 만한 가치가 있는 이유는 생로병사 사이에 벌어지는 다채로운 일 때문이다. 우리는 사랑도 하고, 여행도 떠나며, 맛있는 음식도 먹고, 음악도 듣고, 스포츠도 즐기고, 직장에서 일을 하고, 책도 본다. 그럼에도 불교에서는 왜 생로병사로 삶을 요약한 것일까. 그것은 생로병사가 우리 삶의 행복을 위태롭게 만드는 하나의 한계와 같은 것이기 때문이다.


생로병사는 인간이라면 누구나 피할 수 없는 근본적인 한계와 같은 것이다. 그래서 생로병사에 맞닿아 있는 순간, 우리에게 삶 자체를 향유한다는 것은 하나의 사치일 수밖에 없을 것이다. 한 가지 흥미로운 사실은 누구나 겪는 생로병사의 경험이 최근에는 동일한 장소에서 이루어지고 있다는 점이다. 바로 병원이다. 그렇다. 우리는 병원에서 태어나고, 늙거나 병들면 병원을 찾는다. 그리고 마침내 병원에서 우리는 기구한 운명을 마무리한다. 한쪽에서는 새로운 생명체가 태어났다고 환호하고, 다른쪽에서는 수술실 앞에서 가족들이 전전긍긍하고 있다. 그리고 또 다른쪽에서는 고인의 영정을 모시고 유족들이 깊은 슬픔에 빠져 있다. 이곳이 바로 병원이다.


생로병사의 경험을 통해 우리는 자신이 무엇보다도 먼저 개구리나 벚꽃 아니면 병아리와 마찬가지로 육체를 가진 생명체라는 사실을 뼈저리게 경험하게 된다. 이런 한계에 직면할 때, 그러니까 태어나거나 늙거나 병들거나 아니면 죽을 때, 우리는 다른 사람의 도움 없이 혼자만의 힘으로 한계와 맞서야만 한다. 그 누구도 근본적으로는 우리의 생로병사와 함께할 수 없기 때문이다. 


그렇지만 사랑하는 사람들이 있다면, 우리의 고독한 싸움은 덜 외로울 수도 있다. 병원은 생로병사가 펼쳐지는 거대한 극장인 셈이고, 그곳의 의료진들은 우리의 생로병사를 지키는 동반자였던 셈이다. 고마운 일이다. 생로병사의 고통에 직면하여 두렵고 외롭기만 할 때, 우리는 병원에서 그나마 작은 평화와 안정을 찾게 되니 말이다.


생명체라면 누구나 겪게 될 고통과 불안도 병원 의료진이 떠안는다는 것은 여간 고마운 일이 아니다. 그러니 환자가족에게는 친구보다 더 위로가 되는 곳, 가장 약해질 때 우리에게 힘을 주는 곳, 그래서 가장 인간적이고 따뜻한 곳일 수밖에 없는 곳, 그곳이 병원이어야만 한다. 그렇지만 불행히도 지금 어느 누구도 병원을 그런 소망스러운 곳으로 생각하지 않고 있다. 


누구나 알고 있지 않은가, 생로병사의 고통에 동반자를 찾기 위해서 우리는 엄청난 돈을 가지고 있어야 한다는 사실을. 더 친절하고 더 편안한 동반자를 찾으려면, 우리는 그에 상당한 돈을 의료비로 지불할 준비가 되어 있어야 한다. 그렇다. 자본은 이익이 남는 곳이라면 동물적인 감각으로 찾아내는 법이다. 병원에서도 자본은 돈 냄새를 맡은 것이다.


배가 너무나 고파 굶어죽을 지경에 이른 사람에게 사과 하나는 천금의 가치가 있다. 당연히 생로병사에 고통받고 불안한 사람에게 천금인들 무엇이 아깝겠는가. 그래서일까. 지금 자본은 우리의 생로병사에서 이윤을 얻으려고 한다. 제약회사, 병원 경영자 등 의료자본가들이 인간을 위해서가 아니라 돈을 위해서 바쁘게 움직이고 있는 것이다. 제약회사의 해묵은 리베이트 관행, 의료진에게 직간접적으로 강제되는 과잉진료 관행이 생긴 것도 다 이유가 있었던 셈이다. 물론 그 피해는 모두 생로병사에 신음하는 우리 이웃들이 고스란히 떠안게 될 것이다.



일러스트 _ 김상민 기자

▲ “병원은 생로병사가 펼쳐지는 극장…

의료진은 고마운 동반자이지만 의료자본가는 돈만 좇아서 움직여

‘공공의료기관 폐업’ 맞서 싸워야”


다행히도 경제적 여유가 있는 사람에게 새로운 의약품, 새로운 진단 기술, 그리고 새로운 수술 장비 등이 여간 바람직하지 않을 것이다. 그러니 그들은 거대한 부가가치를 위해 움직이는 의료자본을 반기지 않을 리 없다. 그 정도쯤 구매할 자본은 충분히 있으니까 말이다. 그러나 과연 이런 사람들이 우리 사회에 몇 %나 될까. 대다수의 우리 이웃들에게 그런 고가의 의료서비스는 말 그대로 언감생심의 일일 뿐이다. 물론 의료자본가들은 자신들이 더 큰 이윤을 창출하기 위해 새로운 의료 생산물들을 만든다는 것을 인정한다. 그렇지만 새로운 의료 서비스는 언젠가 일부 부유층을 넘어서 가난한 대부분의 사람들에게도 그 혜택이 돌아갈 것이라고 역설한다. 이른바 ‘트리클다운(trickle-down)’ 효과가 발생한다는 것이다.


사회 부유층이 더 부유해지면, 더 많은 일자리가 창출되어 그 부가 가난한 사람들에게도 혜택으로 주어진다는 것, 바로 이것이 트리클다운 효과다. 그렇지만 과연 그럴까. 이해를 돕기 위해 바우만(Zygmunt Bauman)의 이야기를 들어보자. “하지만 그와 같은 ‘트리클다운’ 효과는 설령 그것이 과거 어느 곳에서는 실제로 이루어졌다고 하더라도 최근에는 그 어디에서도 찾아볼 수 없다. 엘리트 집단이 더 부유해지는 것과 공동체 전체의 삶이 더 안전하고 건강해지는 것 사이의 연관관계는 상상력의 산물일 뿐이다. 따라서 우리의 판단력을 흐리는 이런 정치적 선전을 묵과해서는 안된다.” 최근에 번역된 그의 새로운 책 <고독을 잃어버린 시간> 중 ‘건강 불평등(health and inequality)’에 등장하는 구절이다.


‘트리클다운’ 효과를 신뢰하면서 이루어지는 것이 바로 의료민영화다. 그러니까 이윤이란 자본주의 논리를 의료 영역에도 관철시키자는 것이다. 그를 통해 새로운 의료산업이 발전한다면, 그 결과 새로운 고용 창출과 질 좋은 의료 서비스 제공 등 장기적으로 모든 사람들에게 충분히 혜택이 돌아갈 수 있다는 것이다. 여기서도 다시 정치가들의 정치적 레토릭이 전가의 보도처럼 빛을 발하고 있다. 마치 의료민영화는 사람들이 의료에 참여하는 따뜻한 정책인 것처럼 포장되어 있지만, 사실 의료자본화에 지나지 않기 때문이다. 아이러니한 것은 참여정부를 표방했던 노무현 정부 시절, 그러니까 2003년부터 의료민영화가 본격 논의되었다는 점이다. 보수도 아니고 진보를 자처했던 당시 정부가 트리클다운 효과를 맹신하고 있었다는 것이 안타깝기만 하다.


지금 진주에서는 매우 중요한 사건이 벌어지고 있다. 진주의료원 폐업 사태다. 이번 사태는 의료민영화라는 보수적 정책을 그 문맥에 놓고 보아야 그 본질이 드러나는 법이다. 디테일에 속아서 구조적 본질을 놓쳐서는 안될 일이다. 당신은 자본의 가치가 아니라 공동체적 삶의 가치를 우선시하는가. 그렇다면 당신은 공공의료기관을 폐업하려는 시도 자체에 맞서 싸워야만 한다. 돈이 없다고 병원에 가지 못하는 환자와 가난한 환자를 거부하도록 강요받는 의료진을 위해서라도 말이다. 병원은 인간이면 누구나 겪을 수밖에 없는 생로병사의 고통이 펼쳐지는 곳이고, 그만큼 가장 많은 사랑과 관심이 필요한 곳이다. 이곳을 무시하고 어떻게 복지를 논할 수 있다는 말인가. 인간이 아니라 자본의 편을 들고서도 어떻게 우리 사회가 복지라는 공동체적 이념을 지향한다고 말할 수 있다는 말인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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