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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 2016.12.14 [정동칼럼]복지국가와 재벌체제

촛불을 계기로 헌법을 다시 볼 기회가 생겼다. 부끄러운 이야기지만 이전에는 헌법 문구들을 당위적으로 대했다. 이번엔 사뭇 달랐다. 조항을 읽을 때마다 촛불을 켜는 정성이 생각나고 광화문 거리를 걸었던 해방감이 밀려왔다. 촛불파도가 넘실거리듯, 단어들이 살아 움직이는 듯했다. 몇 번의 촛불 참여가 이러한데 처음 민주공화국을 외치며 쓰러져간 사람들은 어땠을까? 복지국가도 새삼스럽게 다가왔다. 국민은 행복추구권과 인간다운 생활권을 지니고 국가는 이를 보장해야 한다는 조항들, 헌법의 명령이 바로 복지국가였다.

며칠 전 빨라진 대선에 관해 토론하다 지인이 물었다. 복지시민단체는 무엇을 내세울 거냐고. 복지 쪽에선 어떤 요구가 있을지 궁금하고 획기적인 게 나올까 하는 의문이 담긴 질문으로 들렸다. 한두 해 전부턴 강연에서 만나는 사람들도 “복지국가가 시들해진 것 아닌가요?”라고 묻는다. 이때마다 대답들은 있다. 우선 복지재정이 부족하다. 박근혜 정부 들어 복지 공약이 축소되었고 누리과정예산 공방처럼 복지 확충보다는 복지 유지를 둘러싼 힘겨루기만 되풀이돼 왔다. 이러니 시민들이 복지국가를 향한 상상을 키우기보단 당장 ‘돈이 없는데 어떻게 복지를 늘릴 수 있을까’라는 의문을 가지게 된다. 복지세력도 미약하다. 복지는 정치 영역에서 결정되기에 정당이 중요하건만 복지국가를 주창하면서도 ‘세금폭탄론’을 서슴없이 꺼내는 게 우리나라 정당이다. 서구에선 노동조합도 복지국가를 만드는 핵심 부대였다는데 우리나라 노동조합이 여기에 얼마나 힘을 쏟는지를 따지면 긍정적 평가를 내리기 어렵다 등등.

헌법 문구에서 복지국가를 생각하다 문득 질문이 나에게로 향했다. 혹시 나도 기성체제이지 않았을까? 하루하루 ‘헬조선’에서 살아야 하는 사람들의 절박함과 제대로 호흡하고 있었을까? 재정이 없다고? 이미 시민들은 공적보험에 내는 보험료보다 더 많은 돈을 민간보험에 내고 있다. 빈약한 공적보험 탓에 어쩔 수 없이 민간보험에 가입하고 또 이 보험료 때문에 힘겹다고 토로한다. 그렇다면 민간보험료를 공적보험으로 돌리면 되는 일 아닌가? 월평균 1만원 정도 더 내서 민간보험 대신 ‘국민건강보험 하나로’로 병원비를 해결하자는 제안이 몇 년째 잠만 자고 있다. 민간보험료에 힘겨운 사람이 이리 많은데도 왜 이 운동을 힘있게 벌이지 않느냐며 헌법이 질타한다.

복지서비스 질은 어떤가? 아이의 보편 권리로 보육복지가 자리 잡은 건 큰 성과이다. 하지만 비용의 대부분을 공공재정으로 충당할 뿐 ‘믿음직한 안심 보육’이라 말하긴 어렵다. 장기요양 복지도 본인부담금은 줄었지만 지금과 같은 서비스에선 당사자 노인이나 자식들 모두 마음이 불편하다. 의료는 어떤가? 아프니 병원에 가지만 수익을 위해 과잉진료받은 건 아닌지 의구심을 지니며 병원을 나선다. 주거도 걱정 중 걱정이다. 공공임대주택에 들어갔으면 좋으련만 그림의 떡이고 전·월세 비용에 허리가 휜다.

이렇게 아우성이 높은데도 복지국가 이야기가 시들해졌다면 복지시민운동도 책임에서 자유롭지 못하다. 무엇보다 양적 확대 논리에 얽매여 있었다. 다음에 또 무슨 복지를 추가할까 궁리하다 아동수당, 청년배당을 내놓는 방식이다. 사실 복지국가가 갖추어야 할 항목들은 이미 우리나라에 거의 도입돼 있다. 그런데도 시민들이 복지국가로 가는 길을 확신하지 못한다면 우리의 복지구조 자체를 문제시해야 한다. 이는 국가재정이 투입되지만 사적 체제에 의존하기에 가계 지출이 여전하고 복지 질도 높지 못한 원인을 찾는 진단이다.

더 담대하게 복지국가를 말하자. 보육, 요양, 의료, 주거 복지는 공공인프라를 기반으로 해야 질 좋은 복지를 체험하고 가계 부담도 더 덜 수 있다. 지금까지 급식, 보육, 기초연금 등 양적 전면화를 추구하는 ‘선별복지에서 보편복지로’가 핵심 담론이었다면 이제는 복지구조를 혁신하는 ‘사적복지에서 공적복지로’로 가자. 이번엔 상대가 더욱 막강하다. 맞서야 할 주요 세력이 민간보험사, 종합병원, 건설사 등 재벌기업들이다. 결국 헌법에 명시된 민주공화국의 두 기둥, 경제민주화와 복지국가는 모두 재벌체제와 정면 대응해야 하는 일이다.

모두가 촛불은 단지 대통령을 바꾸자는 데 그치지 않는다고 말한다. ‘함께 사는 대한민국’, 민주공화국을 꿈꾼다. 우리 스스로를 일깨우고 손잡게 한, 비로소 헌법의 맥박을 뛰게 만든 촛불을 믿고 복지국가 길을 개척해 가자. 대통령을 끌어내릴 수 있다는 자신감, 우리가 주권자라는 자부심, 새로운 대한민국을 향한 열망이 우리에게 있지 않은가?

오건호 | 내가 만드는 복지국가 공동운영위원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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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osted by KHross