폭염의 여름, 피서를 한다고 바다로 산으로 다녔지만 오가는 길에 이 여름이 얼마나 지독한지 절감했을 뿐 전혀 더위를 피하지 못했다. 돌이켜보니 정작 잠깐 더위를 잊었던 때는 드라마 <비밀의 숲>을 몰아보았던 지난 며칠이 유일했던 듯하다.

출처: tvN

 

내가 이 드라마에 열광했던 것은 이런 이유에서이다. 첫째, 리얼리티이다. <비밀의 숲>은 부정부패로 넘쳐나는 우리의 현실을 배경으로 하고 있으나, 그렇다고 손쉽게 ‘영웅’을 내세워 정의를 바로잡는, 사이다 같은 판타지를 제공하지 않는다. 불의와 정의가 뒤섞여있고, 범죄자와 의인이 하나이고 살인자가 피해자의 모습을 하고 있는 이 드라마에서 서사는 뫼비우스 띠와 같은 기이한 곡면을 따라 롤러코스터를 탄다.

줄거리는 정계, 재계, 검경 가릴 것 없이 뇌물을 주고 로비했던 사업가가 살해되고 우여곡절 끝에 이 사건을 둘러싼 거대한 범죄의 고리를 파헤친다는 것이다. <비밀의 숲>의 성공은 진부할 수도 있는 이 모티브에 있는 것이 아니라 무엇보다 캐릭터 창조에 있다.

우선 주인공인 황시목 검사. 그는 어릴 적 뇌수술로 감정을 상실하고 오직 이성과 법에 충실한 알파고 같은 인간이다. 법리만을 탑재한 황시목 검사는 타인과의 소통에 서툴고 변변한 친구 하나 없는 외톨이다. 공조수사나 사람을 믿지 않고 오직 사실과 증거만을 중심으로 움직이는 황시목 검사는 역설적으로 무감동, 무감정과 관계단절로 인해 인맥과 욕망으로 얽히고설킨 비밀의 숲의 무성한 가지들을 냉철하게 헤쳐나간다.

그리고 살인사건을 둘러싼 ‘비밀의 숲’에는 욕망과 비리로 얽힌 다양한 인물들이 포진해있다. 복수에 눈이 먼 영 검사, 탐욕과 권력에 눈이 먼 재벌 회장, 성접대와 뇌물수수로 오염된 경찰서장과 스폰서 검사, 업계의 비리로 어린 자식을 잃은 수사과장, 그리고 가족에 발목 잡히고 정의감에 눈이 먼 과대망상의 검사장. 이들 인물은 선과 악, 불의와 정의, 가해자와 피해자로 명확히 구분되지 않거니와 고정된 자리에 머무르지도 않는다. 이들 인물은 사건 발생과 동시에 황시목과 더불어 혹은 더 신속하게 자신의 캐릭터를 전개시킨다.

가령 열등감을 지닌 서동재 검사는 권력과 뇌물로 얼룩진 기회주의자로 등장하지만 이중스파이 역할로 사건 해결에 도움을 주기도 하고, 자신의 비리 사실을 감추기 위해 증거물을 은폐하기도 하지만 결정적으로 타인을 해치지는 못하는 아슬아슬한 인물로 등장한다. 범죄의 ‘빅피처’를 연출한 이창준 검사장은 정의감에 가득 찬 인물이지만, 한편 재벌회장인 장인과 아내로 인해 부정부패의 수호자가 된 아수라 백작 같은 인물이다. 즉 <비밀의 숲> 인물들은 모두 한마디로 ‘살아있네’라는 탄성을 자아나게 한다.

<비밀의 숲>이 끝까지 흥미진진할 수 있는 것은 각각의 인물이 모두 범인일 수 있다는 사실이다. 그들이 범인일 수 있는 이유는 각각 어떤 욕망과 감정의 지점에서 ‘맹목적’이기 때문이다. 애국이든 사리사욕이든 사람들은 어떤 지점에서 눈이 멀거나 눈을 감는다. 작가는 이 맹목의 숲에 인공지능 같은 황시목 검사를 가만히 풀어놓는다. 그는 ‘욕망이나 감정’이 제거되었기 때문에 이 맹목의 숲에서 유일하게 ‘눈을 부릅뜨고’ 진실을 보고, 진실을 말한다.

셋째, <비밀의 숲>은 영웅과 독재를 경계한다. 매스컴에서 흘러나오는 숱한 부정부패와 문제들을 접하면서 나는 때론 그런 상상을 하곤 한다. ‘내가 통치자라면 저걸 단칼에 싹!’이라는. 가령 사교육을 없애거나 토지 사유를 금지시키는. 그런 상상 끝에 어떤 독재자나 파시스트가 딸려오는 것을 보고 흠칫할 때가 있다. <비밀의 숲>은 이런 환상을 허용하지 않는다. 가령 이창준 검사는 범죄자이기도 하지만, 한편 권력자들의 비리증거를 확보해서 황시목 검사에게 넘겨주고 자결한 의인이자 내부고발자이기도 하다. 그러나 황시목 검사는 그를 ‘괴물’이라 칭한다. 대를 위해 소를 희생할 수 있고, 큰 목숨과 작은 목숨이 따로 있다고 믿으며 타인을 단죄한 파시스트.

사실 황시목 검사라는 캐릭터야말로 지독한 판타지일 수 있다. 감정이 없는, 타인과 무관한 인간이란 있을 수 없기 때문이다. 그러나 역설적으로 이 판타지야말로 우리 현실의 무의식적 소망을 그대로 보여주는 것이 아닌가. 국정농단뿐 아니라 세월호 등의 거대한 사건에서 우리는 부정으로 촘촘히 연결된 그물망을 본다. 그리고 그 숱한 매듭에는 저와 같은 각각의 맹목이 들어차 있다. 받고 주었다는 이유로, 식구라는 이유로 누구 하나 이 사슬에서 발을 빼어 진실을 외치지 못한다. 이 시대 ‘사람에게 충성하지 않는다’와 같은 알파고 검사가 절실한 이유이다.

<정은경 | 문화평론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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며칠 전 어느 단체의 송년 모임에서 간단한 강의를 했다. 나는 ‘올해 지구촌 뉴스’를 전하면서 “박근혜, 트럼프보다 더한 인물이 다음 우리의 대통령이 될 수도 있다”고 말했다. 청중석에서 비명 소리가 나왔다. 박근혜·최순실도 충분히 끔찍한데, 더 나쁜 사람이 나올 수도 있다고 하니 놀란 모양이다.

‘박·최’에 대한 국민의 분노가 국정파탄, 부정부패 때문만은 아닐 것이다. 그들은 구토를 부르는 인간의 모습이 어떠한가를 보여주었다. 나는 개인적으로 분노보다는 인간의 사회성에 대한 한계와 절망을 느꼈다. 독점한다는 의미의 ‘농단(壟斷)’은 적절한 표현이 아니다. 최순실씨 일가가 박태환 선수 협박부터 무기 구입까지 손을 뻗지 않은 곳이 없으나, 그들이 집어 삼킨 것은 좁은 의미의 국가권력(청와대)이 아니라 사회 전체다. 그들은 ‘우리’에게 깊은 자상을 남겼다. 정권이 교체될지 확실치 않지만, 이번 사태가 새누리당 해체나 정권교체 차원에 머물러서는 안되는 이유다.

인간관계, 사회성, 민주주의를 해결해주는 과학기술은 왜 등장하지 않은 것일까. 기왕 인공지능이 필요하다면 바둑이나 소설 쓰기 실험 대신 인간의 가장 어려운 문제인 도덕성을 조절해주었으면 좋겠다는 공상을 해본다. 삶의 꼭대기에 부와 성공, 물질적 욕망이 등극한 지 오래다. 하지만 실제로 사람들이 절실하게 필요로 하는 자원은 감정의 연대다. 덜 외로운 상태. 스트레스 덜 받는 일상. 자기가 속한 곳에서 인정받는 것. 나의 경우 미세먼지 없는 세상이다. 한국인들이 인간관계의 고통과 불쾌한 기분을 해소하기 위해 쓰는 비용은 만만치 않다. 세계 최고의 1인당 주류 소비량, 국민총생산 대비 최대 규모의 성산업, 쇼핑 중독.

<빵과 장미>라는 영화가 있지만, 둘은 다르지 않다. ‘빵’도 ‘장미(인간으로서 존엄)’의 힘이다. 의식주는 유대와 배려 속에서 생산된다. 정의가 힐링이다. 바람직한 사회제도 역시 선의의 인간이 운용할 때만 인프라로서 힘을 가질 수 있다. 박·최 게이트는 어쩌면 대한민국에서는 이 모든 것이 영원히 불가능할지도 모른다는 두려운 증명 같았다.

나는 휴대전화를 사용하지 않기 때문에 e메일을 많이 받는다. 이런 사연이 적지 않다. “저의 이번 생은 망했다는 생각을 자주 하는데, 요즘은 특히, 마음 둘 곳이 없는 중에, 하소연합니다. 별반 내용도, 목적도 없는 메모가 되고 말았지만… 죄송합니다.”

광장은 불신의 시대에 유일하게 마음을 주고, 나누고, 두고 올 수 있는 안전한 곳이 되었다. 광장에 모인 200만이 넘는 사람들의 동기와 생각이 같을 리 없다. 광장의 축제는 일상의 프로작(우울증 치료제)이기도 하다. 어쩌면 촛불은 밤의 시위가 아니라 낮의 우울을 밝히는 데 더 긴요한지도 모른다. 이런 촛불이 “바람 앞에 쉽게 꺼진다”고?

마음 둘 곳. 마음을 두는 곳은 어디인가. 나는 한때 이데올로기에 마음을 두었고, 한때는 사람에게 마음을 두었지만 지금은 없다. 나의 거처는 나 자신이어야 하는데, 그렇지 않으니 나 역시 있을 곳이 없다. 옆을 기웃거리게 된다. 외로움과 혼자임은 무관하다. 문제는 자기 충족적인 건강한 외로움이 아니라 불안하고 고립된 느낌이다. 외로운 사람이 취약해질 수밖에 없는 이유는 외로워서가 아니다. 외로움 자체는 죄가 없다. 사회가 따뜻하다면, 외로움은 절실한 연대의 근거가 된다. 그런데 경험하다시피 현실은 외로운 사람을 이용한다.

살 만한 현실이 중력처럼 나를 붙잡아주면 좋으련만 세상이 썩었으니 그 끈도 위태롭다. 예전에는 종교에 몸을 맡기는 이들이 많았지만 지금은 기복은커녕 위안도 되지 못하나 보다. “종교가 없다”는 한국인이 56%가 넘는다. 마음 둘 곳을 찾아 헤매다가 방황을 멈춘 이들의 결심, 대한민국의 자살과 우울은 상상 이상이다.

마음 둘 곳이 없는 상황은 몸(존재)을 둘 곳도 없다는 뜻이다. 우리말의 “몸 둘 바(所)를 모르겠습니다”는 겸양, 민망, 사과 등의 의미다. 내 몸이 차지하고 있는 작은 관짝만 한 공간조차 아깝고 부당하다는 자학의 뜻이다. 그런데 비유적으로 “죄송하다”는 의미 말고, 글자 그대로 실제 몸을 둘 곳이 없는 상태. 이것은 외로움을 넘어 존재의 위기다. 나는 어디에 있어야 적합한 사람일까. 타인과 세상에 민폐가 되지 않을까. 진로를 정하지 못한 이들의 스트레스가 이것이다. 자기 몸 둘 곳이 없는 사람에게 사회는 “눈으로 레이저를 쏘며”(‘눈총’에 대한 어느 청소년의 표현인데 실감 났다) 한심하게 여긴다.

나를 포함, 마음 둘 곳도 몸 둘 바도 없는 이들은 어떻게 살아야 할까. 많은 젊은이들이 자신이 잉여 신세임을, 그렇게 될 가능성이 높음을 알고 있다. 자기계발도, 힐링도 속임수라는 것을 안다. 거기에 투자할 돈도 없다. 다른 쪽 사람들, 고령화사회에서 나이 들어가는 이들의 심정은 또 다른 서러움이다. 세상이 계속 “당신의 존재 자체가 사회문제”라고 하면? 고령화 대책은 좋은데, 그럴 때마다 ‘실제’ 고령인 사람의 심정은 어떻겠는가. 나는 ‘그들’과 동일시된다.

나의 송년 결론. 한 사람에게라도 의미 있는 사람이면 되지 않을까. 쓸모가 ‘생산과 건설’로 지구를 망치는 일이라면, 쓸모의 의미를 재규정하면 되지 않을까. 내 마음 둘 곳을 찾지 말고, 쉽지 않겠지만 남들이 마음을 둘 수 있는 사람이 되어보자. 이렇게라도 생각을 묶어두어야 새해를 감당할 수 있을 것 같다.

정희진 | 여성학 강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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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국민담화를 통해 ‘부정부패와의 전쟁’을 선포한 박근혜 정부의 사정 드라이브가 본격화하고 있다. 이완구 총리의 담화 발표 직후, 검찰은 비자금 조성 의혹을 받는 포스코건설에 대한 압수수색을 실시하고 수사에 들어갔다. 그간 해외자원개발 사건에 미온적이던 검찰은 이를 특수부에 재배당해 본격 수사에 착수한다고 밝혔다. 돌연한 ‘부패와의 전쟁’ 담화를 둘러싼 일부 정치적 논란이 일고 있지만, 정부는 거듭 결기를 세우고 있다. 이완구 총리는 3·15의거 기념식에서 “민주주의의 뿌리부터 병들게 하는 부정부패 근절”을 위해 “정부의 모든 권한과 수단을 총동원할 것”이라고 불퇴전의 입장을 재확인했다. 사실 요란스러운 담화 발표가 아니더라도, ‘반부패’는 사회의 상시규범이고 간단없이 실천해가야 할 과제이다. 특히 최근 방위사업 비리 실상이나 세월호 참사에서 드러난 부패의 사슬을 보면, 한국 사회에서 부정부패 척결의 중요성은 아무리 강조해도 지나치지 않다. 최근 ‘김영란법’의 제정에서 목도하듯 투명사회로 가야 한다는 국민적 열망은 여느 때보다 크다.

이 총리는 담화에서 척결해야 할 부정부패의 사례로 방위사업 비리, 해외자원개발 관련 배임과 부실 투자, 대기업 비자금 조성·횡령, 공적 문서 유출 등 4개 영역을 지목했다. 앞으로 검찰과 경찰의 수사가 여기에 집중될 것임을 예고한 셈이다. 안보의 근간을 흔들고 군을 내부에서부터 허물어뜨린 방위사업 비리, 천문학적 액수의 배임과 부실 투자로 천문학적 세금을 낭비한 자원개발 관련 비리는 반드시 청산하고 가야 할 ‘거악’이다. 부패의 사슬을 끊기 위해선 만연되어 있는 대기업들의 비자금 실체도 규명해야 하고, 권력형 공직비리도 뿌리 뽑아야 한다.

이완구 국무총리가 12일 오후 서울 세종로 정부서울청사에서 부정부패 척결과 관련해 대국민담화를 발표하고 있다. _ 연합뉴스


명심할 점은 부패 척결이 효과를 거두려면 그 칼날이 성역을 두어서는 안되고, 불순한 정치적 목적에 의해 변질되지 말아야 한다는 것이다. 과거 정권에서도 숱하게 부패 척결 운동이 펼쳐졌으나 실효성 없이 끝난 경우가 태반이었다. 정략적 접근으로 시작된 사정이 ‘표적’ 논란을 일으키고, 이를 이용한 기득권의 저항에 무너졌기 때문이다. 이번 ‘부패와의 전쟁’도 지지율 회복이나 레임덕 위기를 돌파하기 위한 이벤트성 캠페인으로 의심받게 되면 명분도 동력도 훼손되고, 국민적 신뢰를 받기 힘들다. 친이명박 세력은 벌써 ‘전 정권 때리기’를 들먹이며 방어에 나서고 있다. 검찰의 부패 수사가 조기에 이러한 논란과 저항을 불식시키지 못하면, 정상적으로 나아갈 수 없다. 진정 “어떤 대가를 치르더라도 부정부패를 발본색원하겠다”(이완구)는 결기라면, 무엇보다 사정의 칼날이 사심 없이 똑바로 집행되어야 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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