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명박 정부가 자행한 공작정치의 증거가 무더기로 쏟아져 나왔다. 그 규모와 내용이 상상을 초월한다. 국가정보원과 경찰을 동원해 야당 소속 지방자치단체장들을 사찰하고, 공영방송을 장악하기 위해 임직원들의 동태를 감시했다. 총선에 불법 개입하고, 문화계 블랙리스트 보고를 받은 정황도 드러났다. 그런데도 이명박 전 대통령은 사과 한마디 없이 “안보가 엄중하고 민생이 어려운 시기에 국익을 해치는 일”이라고 적반하장으로 나왔다. 문재인 정부의 전임 정권 적폐청산 작업은 “퇴행적 시도”라고 규정하고, “성공하지 못할 것”이라고 했다. 이 전 대통령의 뻔뻔함에 소름이 돋는다.

[장도리]2017년 9월 29일 (출처:경향신문DB)

더불어민주당 적폐청산위원회가 공개한 문건 중 국정원 작품으로 보이는 ‘야권 지자체장의 국정운영 저해 실태 및 고려사항’ 보고서를 보면 8개 광역 시·도지사와 23개 구청장 등의 신상과 동향이 자세히 적혀 있다. 예컨대 안희정 충남지사에 관해서는 “정부의 대북정책 비판 활동을 주도하고, 가로림만 조력발전소 건설사업 반대해 찬반주민의 갈등 격화를 초래했다”고 적혀 있다. 문건은 기획재정부와 감사원 등을 통해 불이익을 줘서 안 지사 같은 지자체장을 제압해야 한다고 조언하고 있다. 2011년 9월27일에 작성된 ‘KBS 관련 검토사항’ 보고서에는 김인규 당시 KBS 사장 등의 교체를 검토하되, 최시중 방송통신위원장에게 시켜야 한다고 했다. 하나하나가 형사처벌감이다. 

2012년 4월에 치러진 총선에서 ‘친이명박 체제’를 꾸리기 위해 관권이 동원된 정황도 있다. 2011년 12월 공직기강비서관실이 작성한 ‘대통령실 전출자 총선출마 준비 관련 동향’ 문서를 보면 “대통령실 전출자 11명이 내년 총선 출마 준비 중이다. 이들에 대한 동향파악 및 지역 민원과 애로사항을 취합·청취할 대통령실 내 지원창구를 설치해 총선 전까지 한시 운영할 필요가 있다”고 적혀 있다. ‘대통령실 전출자’ 중 한 명이 당시 정무수석인 정진석 자유한국당 의원이다. 최근 정 의원이 ‘댓글정치의 원조는 노무현 정부’라며 이명박 정부 방어에 적극 나서는 이유를 이제 알 것 같다.

국정원과 사이버사 댓글작업 등으로 이명박 정부가 대선에 불법 개입한 혐의에 관해서는 검찰 수사가 진행 중이다. 비위 의혹이 추가로 제기되고 범죄 증거가 나온 이상 검찰 수사 확대는 필수적이다. 검찰은 좌고우면할 것 없다. 민주주의와 헌법을 우롱한 이명박 정부 공작정치의 진상을 규명하고 엄벌해야 한다. 이 전 대통령도 국민에게 죄상을 고백하고 용서를 구해야 한다. 그것이 국익을 위한 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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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명박 정부 시절 여론조작을 위해 민간인을 동원해 댓글부대를 운영한 민병주 전 국가정보원 심리전단장이 19일 새벽 구속됐다. 원세훈 원장 시절인 2010~2012년 외곽팀을 운영하면서 불법 선거운동과 정치관여 활동을 하도록 하고 수십억원의 활동비를 지급한 혐의다. 그는 2013년 박근혜 정부 검찰 수사에서 구속을 면했지만 4년 만의 재수사에선 벗어나지 못했다. 이명박 정권 때 광범위하게 진행된 추악한 여론 공작 실태는 도대체 그 끝이 어디인지 알 수가 없다. 이번엔 2012년 총선·대선을 앞두고 김관진 당시 국방부 장관이 국군 사이버사령부의 댓글작업을 직접 지시하고 보고받았다는 증거가 담긴 군 내부 문건이 새롭게 공개됐다. 국방부 2급 비밀문서인 ‘2012 사이버 심리전 작전 지침’이란 문건에는 ‘총선·대선 개입’이라는 활동 목표가 분명히 적시돼 있다. 국정원 외에 국방부 장관까지 군 댓글공작을 진두지휘한 것이다.

박원순 서울시장이 19일 오전 서울시청 브리핑룸에서 가진 민주당 적폐청산TF(태스크포스) 회의 관련 기자간담회에서 이명박 전 대통령을 고소·고발한 취지를 밝히고 있다. 연합뉴스

이런 수준일 줄은 몰랐다. 블랙리스트에 포함돼 알몸 합성사진에 얼굴이 오른 배우 김여진씨는 “그 추함의 끝이 어딘지 똑바로 눈뜨고 보고 있기가 힘들다”고 했다. 시민들의 생각도 그와 똑같다. 국정원 심리전단은 합성 사진 제작·유포 계획을 상부에 보고하면서 ‘특수공작’이란 표현까지 썼다. 좌파 낙인을 찍은 문화예술인을 지원대상에서 배제하는 방식의 박근혜 정부 블랙리스트와는 전혀 다른 악질적 행태이다. 시민 세금으로 민주주의의 기초를 파괴하고 시민의 기본권을 난도질했으니, 국가기관의 탈을 쓴 범죄집단이었다고 해도 할 말이 없을 것이다.   

그런데도 이명박 전 대통령 측은 “무슨 법적 권능과 근거로 국정원 기밀사항을 뒤지느냐. 제대로 하려면 국정원이 도청했던 이전 정권 때 일도 공개해야 한다”며 반발했다고 한다. 적반하장도 유분수다. 지금까지 드러난 사실로만 봐도 청와대와 국정원의 일사불란한 움직임은 대통령의 지시가 없었다면 실현 불가능하다는 것을 알 수 있다. 국정원의 문화예술인 퇴출공작은 ‘VIP(대통령) 일일보고’ 형태로 청와대에 보고된 사실도 드러났다. MB의 수족인 원세훈 전 원장은 이런 혐의로 이미 징역 4년을 선고받고 법정구속됐다. 도대체 뭐가 더 나와야 순순히 범죄를 인정할 것인가. 재임 중 입만 열면 ‘국격’ 타령이더니 정작 자신이 나라를 망신시킨 대표로 역사에 기록될 수 있다는 것을 모르는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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계속 진행 중인 이명박·박근혜 정권의 블랙리스트 문제는 문화예술의 본질이 무엇인지 깊이 생각하게 해준다. 문화예술은 평화와 민주주의 안에서 제대로 숨 쉬며 산다.

한국문학이 한반도에서 살아온 사람들과 국경 바깥 코리아 민족의 정신과 감성, 그리고 ‘나은 삶’을 위한 투쟁의 문화적 정수였다는 사실을 여전히 믿는다. 물론 이때 문학이란 단지 제도 문단에 한정되지 않는 평범한 사람들의 말·글 활동과, 시·소설에 한정되지 않는 다양한 글쓰기를 포함하는 것이다.

이명박 정부 때 국가정보원이 만든 ‘문화·연예계 블랙리스트’에 올라 출연 프로그램 퇴출 등을 당한 것으로 알려진 방송인 김미화씨가 19일 오전 서초구 서울중앙지검에 출석하면서 기자들의 질문을 듣고 있다. 김영민 기자

그런데 어느 평론가의 말처럼 언젠가부터 한국문학은 스캔들이나 외국 문학상 같은 바깥의 자극이 아니면 긍정적인 화제를 만들 수 없는 무엇인가가 되었다. 특히 근래의 잇단 큰 추문, 즉 신모 작가의 표절 사건과 문학권력 문제, 성폭력과 여성혐오 문제 그리고 또 불거진 서정주의 친일·독재 부역 논란은 제도문학과 한국문학사의 한계와 그늘이 무엇이었는지를 너무 선명하게 보여준다. 그리고 그 처리과정은 한국문학이 대단히 고루하고 조로했거나, 청산되지 못한 부끄러운 과거를 그대로 안은 채 ‘자기들만의 리그’를 묵수하는 답답한 제도처럼 보이게 한다. 그리하여 일련의 사태는 기성 한국문학의 권위와 정당성 자체에도 치명적인 타격을 가하고 있다. 교실에서 기성의 ‘대가’와 ‘정전’으로 이뤄진 한국 현대 문학사를 가르치기가 심히 민망하고 어렵다. 많은 연구자와 독자들의 자긍심과 애정이 식어가고 있다.

물론 사태의 큰 책임은 문단을 담당해왔던 주류들과 나 같은 기성세대 연구자들에게 있다 하지 않을 수 없는데, 사태의 전개 과정에는 어떤 공통점이 있다. 권위와 권력의 편에 선 사람들이 제기된 비판을 ‘흠에도 불구하고 문학적 성과가 크다’는 식의 변설로써 무마하려 든다는 점이다. ‘일부’ 표절에도 불구하고, 친일과 독재 부역에도 불구하고, 여성혐오에도 불구하고….

여기에서 ‘문학적 성취’나 ‘문학성’이란 마치 불변하는 절대가치이자 권위주의의 원천 같다. 식민, 전쟁, 분단의 참화를 겪어온 한반도에서 이는 꽤 유례가 깊은 교의다. 이는 ‘예술의 자율성’ 명제에 대한 매우 순진한 해석과 문학적 자유주의와 문학성의 성립 요건을 당파적이고도 안일하게 사고한 데서 비롯했다. 물론 거기에 냉전과 분단상황이 개재해 있었지만, 안이함은 늘 파시즘이나 가장 반문학적인 정치행위가 틈입할 밭이 되었다.

그래서 서정주의 사례는 중요하다. 그의 오류는 단지 일제와 전두환을 찬양한 몇 편의 시에 있지 않다. 그는 수십년간 문인협회·시인협회 등의 대표적 문인단체에 군림한 권력자로서, 한국문학을 극우·냉전 문화정치의 일부로 만든 장본인의 하나였다. 한국 문단 특유의 ‘시인의 순진성·탈속성’이라는 신화가 윤리적 무책임과 정치적 파시즘, 여성혐오를 옹호하는 데 악용돼온 사실도 재차 상기하고 싶다. 서정주의 어떤 아름다운 시편들은 문학과 정치의 복잡한 모순이나 역설성에 대한 교훈적 사례이지, 비천한 정치행위를 덮고 가릴 알리바이가 될 수 없다.

문단은 종종 문학성을 사적이고 작은 것 또한 형식적인 것으로 정의하고, 아래로부터의 정치적 열정이나 역사에 대한 분노와 정의감에 대비시켰다. 가장 편하고 소시민적인 방법으로 문학과 정치 사이의 다가적 모순을 해소하려 했다. 냉전시대뿐 아니라 1990년대 이후에도 재생산된 정치적인 것·사회적인 것과 문학성의 이항대립적 사고는 민주주의 문화에도 장애가 되었다.

오래 묵은 한국문학의 문제들이 충분히 자기비판 또는 토론되지 못한 상태에서 오늘날 문학사 공부와 교육, 그리고 현장 문단은 큰 난경에 처해 있는 것이다. 협소한 문학주의나 민족주의 외에 문학사를 다시 사유할 인식의 틀이 아직 갖춰지지 않았고, 현실의 문학문화에는 세대 장벽과 젠더 분계가 공고해지는 모습도 나타난다.

새로운 한국문학을 위한 공동의 과제를 생각해본다. 우선 문학사의 재해석·재서술과 문학의 생산·수용구조의 재편성이 동시에 시도되어야겠다. 즉 연구자·교육자·비평가가 새로운 이념과 문학성에 관한 합의를 함께 다시 토론해야겠다. 문학과 정치의 관계를 이항대립적이고 우파적인 것으로부터 구제하는 유연한 원칙과 논리가 필요하다. 한국문학이 탈분단·탈식민 그리고 차별 없는 민주주의의 옹호자여야 한다는 원리는 변함없을 것이다.

또한 달라진 문화환경에 맞는 매체·플랫폼의 개발, 탈제도·탈장르 운동이 확산될 필요도 있는 듯하다. 이때 물론 여성혐오 등 나쁜 행태의 완전한 지양과 함께 독자들의 참여, 세대 간의 소통은 기본 과제가 된다. ‘현장’에서 분투하는 젊은 작가·비평가·교육자들에게 격려와 지지의 마음을 보낸다.

<천정환 | 성균관대 교수·국문학>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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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와 그다지 면식이 없는데도, 부고기사에 가슴이 멍해올 때가 있다. 지난 18일. 김지석 부산국제영화제 부집행위원장 겸 수석프로그래머의 부고를 접했을 때가 딱 그랬다.

1995년 부산 YWCA 대학부에서 진행한 ‘여성영화 읽기’에 한 대학교수가 초빙됐다. 강연을 마치며 그가 말했다.

“곧 부산에서 국제영화제가 열릴 텐데, 여기 있는 학생들이 좀 도와줄 수 있겠죠?”

“그런 거는 서울에서나 하는 거 아닌가요?”

학생들이 미심쩍어하자 그가 정색했다. “아니 반드시 할 겁니다. 여기 있는 학생들은 약속만 분명히 해주세요. 도와주겠다고.” 그가 김지석 부위원장이었다. 당시 부산예술대 교수였다.

칸 해변의 영화진흥위원회 부스에 마련된 고 김지석 부산국제영화제 부집행위원장 추모 공간.

6개월쯤 지난 어느날, 학내에 공고가 붙었다. ‘부산국제영화제 자원봉사자 모집.’ 그와의 약속이 떠올라 무작정 지원했다. 부산 남포동에 있는 극장 몇 군데를 빌려 시작한 제1회 영화제는 참 열악했다. 어떤 영화는 번역이 채 안돼 자막 없이 상영됐다. 예고된 상영시간을 맞추지 못하는가 하면 이유 없이 상영이 중단됐다. 자원봉사자들은 영화제 진행보다 관객들에게 양해를 구하는 데 더 많은 시간을 썼다. 감독과의 대화에 통역자가 없자 보다 못한 관객이 통역에 나서기도 했다. 경험도 없었고 돈도 없었다. 부산국제영화제는 맨손으로 일군 축제였다.

그런 부산국제영화제가 지난해 쑥대밭이 됐다. 세월호 참사 당시 구조작업의 문제점을 다룬 다큐멘터리 영화 <다이빙벨>을 상영했다는 이유 때문이었다. 부산국제영화제는 이명박 정부 당시 ‘좌파영화제’로 낙인이 찍혔다. 미국산 쇠고기 수입반대시위 때 시민들과 함께 촛불을 든 죄였다. 박근혜 정부에서는 ‘종북영화제’로 격상됐다. 블랙리스트에도 이름을 올렸다. 친박시장이 이끌던 부산시는 영화제 예산을 대폭 삭감했다. 기업들은 눈치를 보며 지원을 주저했다. 때마침 밀어닥친 태풍이 해운대 백사장에 설치했던 야외무대를 날리면서 지난해 영화제는 최악이었다. 끝이 아니었다. 김 부위원장과 함께 영화제의 산파 역할을 했던 이용관 전 집행위원장은 횡령, 배임혐의로 검찰에 기소됐다. 특검은 부산국제영화제 탄압의 뒷배경에 김기춘 전 청와대 비서실장이 있었다고 밝혔다.

문재인 정부는 출범 이후 많은 것을 되돌려놓고 있다. 그간 농락당한 부산국제영화제도 새 정부가 시급히 명예회복시켜야 할 대상이다. 단순한 축제의 복원이 아니다. 문재인 정부의 최대 국정과제인 ‘일자리 창출’의 답이 그곳에 있기 때문이다. 부산국제영화제는 양질의 청년일자리를 낳은 거위로서의 역할을 톡톡히 해왔다. 영화제의 성공은 한국영화산업에 대한 관심을 불러일으켰고, 그 결과 아시안필름마켓을 통해 수많은 영화와 시나리오가 팔려나갔다. 이는 한류붐의 원천이 됐다.

영화는 콘텐츠산업의 꽃이다. 한 편의 영화를 상영하기 위해서는 시나리오, 제작, 배급에 수많은 인력이 투입된다. 지난해 국가재정운용계획의 문화체육관광 분야 자료를 보면 콘텐츠산업의 고용유발계수는 10억원당 12.4명으로 전기전자(5.1명)나 자동차산업(5.7명)을 앞선다. 콘텐츠산업 종사자의 32%는 29세 이하 청년들이었다. 새 정부가 찾는 청년일자리의 보고가 여기 있다는 얘기다.

가을 바람이 불 때 문재인 대통령은 부산을 찾아 문화예술 분야에 붙여진 블랙리스트를 시원하게 떼주기를 바란다. 그 자리에서 ‘지원은 하되 간섭은 하지 않는다’는 부산국제영화제의 대원칙에 대못을 박아주기를 더불어 기대한다. 부산국제영화제는 영화의 바다면서 일자리의 바다다. 영화제를 통해 다양한 국내외 영화가 발전하고, 사상과 생각의 자유가 보장되며, 우리 청년들의 일자리가 늘어나는 것, 어쩌면 김지석 부위원장이 꿈꿨던 세계일 수도 있다. 고인의 명복을 빈다.

경제부 박병률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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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법원이 ‘판사 블랙리스트’를 만들어 인사자료 등으로 활용했다는 의혹이 제기됐다. 사실이라면 박근혜 게이트에 버금가는 국기문란 행위라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경향신문 보도를 보면 판사들의 진술은 매우 구체적이다. 법원행정처 기획조정실 김모 전 심의관 컴퓨터에 대법원 정책에 비판적인 판사들의 동향을 정리한 일종의 사찰 파일이 있었다고 한다. 이 사찰 파일에 관해 임종헌 전 법원행정처 차장은 ‘대법원 결정에 의한 것’이라는 취지로 말했다고 한다. 법원행정처의 부당한 지시를 거부해 발령 2시간 만에 행정처에서 인사조치당한 ㄱ판사는 이 파일 관리 업무도 맡으라고 지시받은 것으로 알려졌다.

판사 블랙리스트는 과거에도 설이 무성했다. 게시판 글이나 판결 등을 분석해 법관 인사나 연수자 선발 때 활용한다는 것이다. 판사들의 학술모임인 국제인권법연구회 설문조사에서 법관의 88.2%가 대법원장 등의 뜻에 반하는 의사표시를 했을 때 보직 등에서 불이익이 우려된다고 한 것도 이와 무관하지 않다.

[김용민의 그림마당]2017년 4월 7일 (출처: 경향신문DB)

헌법 제103조는 ‘법관은 헌법과 법률에 의하여 그 양심에 따라 독립하여 심판한다’고 명시하고 있다. 판사 블랙리스트는 법관의 인권을 침해하고 재판의 독립성을 거스르는 반민주적·반헌법적 행위다. 국민이 공정한 재판을 받을 권리도 침해한다. 대법원이 판사 블랙리스트를 작성해 운용한 것이 확인되면 양승태 대법원장이 이끄는 사법부는 탄핵이 불가피하다. 양 대법원장 등 법원 수뇌부는 직권남용 등의 혐의로 수사를 받아야 한다. 존재 여부를 떠나서 판사 블랙리스트가 거론된 것 자체가 사법부엔 치욕이다. 그러나 대법원의 사법개혁 방해 의혹을 조사 중인 진상조사위원회(위원장 이인복 전 대법관)는 블랙리스트 관련 진술을 판사들로부터 확보하고도 쉬쉬하면서 의혹 규명에 소극적인 태도를 보이고 있다.

진상조사위원회는 블랙리스트 파일이 있었다는 컴퓨터를 당장 확보해 디지털 포렌식 등으로 복원하고 정밀 조사를 실시해야 한다. 의혹의 중심에 있는 양 대법원장도 직접 조사해야 한다. 대법원이 법원행정처를 통해 벌인 판사 통제 작업의 실체가 이번 기회에 낱낱이 드러나야 한다. 그렇지 않으면 국회나 검찰의 손을 빌릴 수밖에 없다. 최선은 지금이라도 양 대법원장이 진실을 밝히고 사죄하는 것이다. 양 대법원장과 사법부가 호미로 막을 일을 가래로도 막지 못하는 우를 범하지 않기 바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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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랑하는 이가 어느 순간 떠나고 나면 남는 것은 ‘진실’에 대한 기억뿐이다. 건너가지도 못한 진실, 건너갔으나 닿자마자 변형된 진실, 나에게 비로소 도달했으나 알 수 없었던 그의 진실. 상호모순되는 진실들이 어느 순간 뒤죽박죽 엉키면서 안개가 어리기 시작한다. 우리의 진실이 어느 시공간에서 부유하고 있는지 어디선가 공허한 바람 소리도 난다. 그때의 진실을 이제 와 감정으로 만져본 것뿐이데 어느새 해지고 있다. 진실은 본래 그토록 연약한 것일까.

박사 과정 초기 시절 꽤나 여러번 지도교수들과 사회과학에서의 ‘사실’과 ‘의견’에 대해 논쟁을 했다. 어느 날 나는 두 분의 지도교수들에게 한국과 일본의 비정규직 확대에 신자유주의가 얼마나 영향을 미쳤는지 연구해보겠다고 장황하게 설명하고 있었다. 그런데 한분이 나에게 “너 과학자가 되고 싶은 것이 맞니?”하고 물었다. 다른 한분은 키득 웃으시며 “우리는 왜 자꾸 네가 정치가 같을까?”라고 했다. 그 당시에는 무척 당혹스러웠지만 그 에피소드는 연구할 때마다 나를 긴장하게 한다. 증거가 되는 자료, 사실 등을 찾아내어 들여다보고 만지작거리다 보면 진실이 해지고 있는 것은 아닌지. 햇빛이 프리즘을 통과하면서 보여주는 예쁜 무지갯빛처럼, 나는 진실이 비추고 있는 여러 색깔 중 마음에 드는 색만 골라 해석하고 있는 것은 아닌지 고민을 거듭할 수밖에 없다.

세월호 참사 당시 생존했던 단원고 학생들이 7일 세월호 참사 1000일 추모 11차 촛불집회에서 무대에 올라 발언하자 희생된 학생들의 부모들이 다가가 안아주고 있다. 강윤중 기자

연구자가 진실을 분석하고자 할 때는 사실에 기반을 둔 구체적인 것이어야 한다. 특히, 사회과학에서는 개별적 삶에 대한 구체성이 결여되면 어떤 정책이나 이론도 허무한 맹목이 되어버리기 때문이다. 반면, 정치가의 말에는 늘 추상성이 있다. 추상화된 언어는 사실 권력자들만 구사할 수 있다. 권력자의 힘이 강할수록 구체성과 사실은 감추고 뻔뻔하게 사실을 추상화시킬 수 있기 때문이다. 그 추상성의 정도가 곧 권력의 정도이다.

옥스퍼드 영어사전은 2016년을 ‘탈진실(post-truth)’이라는 단어로 정의했다. 이 단어는 ‘객관적 사실보다 감정과 개인적 신념이 사람들의 의견에 더 큰 영향을 미치는 상황’을 뜻한다. 개인들이 과학적 증거들보다 감정에 쉽게 설득당할 수 있게 되면 진실에 대한 판단은 이성보다는 감정에 따르게 된다. 진실은 온데간데없거나 ‘저마다의 진실’들이 너무 많아져, 감정의 설득력이 더 커지는 것이다.

탈진실은 공적 정보 및 자료에 대한 사람들의 불신과 냉소가 팽배해질 때 발생할 수 있다. 그리고 소셜미디어나 온라인상의 상호작용을 통해 빠르게 확산될 수 있다. 댓글과 ‘좋아요’ 횟수를 통해 확인되지 않은 감정 묻은 정보들이 진실의 위상을 가지게 된 것이 흔한 일이 되어버렸다. 게다가 지식은 점점 세분화되어 파편화된 진실의 조각들은 각 개인들을 설득하기가 너무 가벼워졌다. 작은 진실의 조각들은 범람하고 있는데 우리는 점점 더 진실을 갈구하게 됐다.

이러한 탈진실의 시대에 위험한 것은 권력가의 현혹이다. 이 때문에 탈진실의 시대에 권력자의 말은 위험하고 동시에 무거운 책임이 따른다. 사실보다 감정이 개인들의 의견에 영향을 미치는 탈진실 시대에 최고 권력자가 ‘북한이 언제 쳐들어올지 모른다’라고 추상적인 말 한마디를 한다면, 그 효과를 그가 모를 리가 없거니와 몰라서도 안된다.

물론 민주주의 사회에서 저마다의 진실이 공존하는 것 자체가 문제는 아니다. 다만, 저마다의 진실들이 경합하는 경우 각 개인들이 이성에 따라 판단할 수 있도록 열린 토론과 원활한 정보검증이 이루어질 수 있어야 한다. 표현과 언론의 자유가 보장되어 매체들, 시민단체, 학자 그리고 시민들은 지속적으로 진실에 대해 자유롭게 의견을 말하고 토론할 수 있어야 한다. 또 지속적으로 정보공개를 요청하고 사실을 검증해볼 수 있어야 한다.

우리는 아직도 세월호 참사의 원인에 대해 잘 모른다. 세월호 참사를 다룬 문인과 예술인들조차 블랙리스트에 올랐다니 제대로 된 진실 경합은 언제 시작될 수 있을지 답답하다. 이미 닳고 있는 진실이 만질 수도 없는 안개 속으로 영영 사라질까 두렵다.

이승윤 이화여대 교수 사회복지학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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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난주 서울 광화문광장 블랙텐트에서는 두 개의 의미있는 공연이 있었다. 하나는 이윤택 연출의 연희단 거리패의 <씻금> 공연이고, 다른 하나는 정월 대보름맞이 <얼쑤, 탄핵하세!> 국악공연이다. ‘씻금’은 진도 씻김굿을 바탕으로 만든 창작극으로 진도 앞바다에 몸을 던진 망자들의 혼을 달래주는 이야기를 담고 있다. 구천을 떠돌던 망자들이 각자의 원혼을 씻고 영원한 안식처로 떠나려 할 즈음, 저 멀리서 울부짖는 아이들의 통곡을 바라보며 안타까워하는 장면은 세월호 어린 희생자들을 위한 애도의 시간이기에 충분하다. 공연을 마치고 이승과 저승을 이어주는 하얀 천을 들고 배우와 관객들은 광화문광장으로 나아가 세월호 희생자들의 영정이 있는 곳으로 향하여 넋을 달랬다. 당초 원작에는 포함되지 않았던 세월호 희생자를 위한 씻김의 예식은 광화문광장 블랙텐트였기에 더 깊은 공감을 주지 않았을까 싶다.

지난주 토요일 퇴진행동 본부의 본 집회를 마치고, 저녁 8시부터 블랙텐트에서 있었던 <얼쑤, 탄핵하세!> 국악공연 역시 감동의 무대였다. 특히 공연의 맨 마지막 순서로 나온 ‘앙상블 시나위’의 격정적인 연주는 관객들에게 새로운 차원의 국악공연을 선사했다. 알다시피 앙상블 시나위는 2015년 11월에 국립국악원 풍류사랑방에서 예정된 <소월산천> 공연을 한 문화 관료의 어처구니없는 검열로 인해 하지 못했다. 표면적으로는 <소월산천> 공연에서 연극적인 요소가 극장 특성상 맞지 않아 삭제를 요청한 것이었지만, 실제로는 <소월산천> 공연을 함께 만들었던 박근형 연출가가 박정희 대통령을 비판적으로 풍자한 <개구리>라는 작품을 만들었기 때문이다. 앙상블 시나위는 블랙텐트에서 평소처럼 격정적으로 연주했고, 말미에는 이 팀의 검열에 분노하여 1인 시위를 벌인 안무가 정영두와 함께 즉흥 퍼포먼스를 선보였다.

1월 10일 광화문광장에 문을 연 ‘광장극장 블랙텐트’의 이해성 극장장(극단 고래 대표)은 “정치권력에 빼앗긴 극장의 공공성을 광장에서 다시 일으켜 세우겠다”고 말했다. 권호욱 기자

이 모든 공연의 감동은 모순적이게도 블랙리스트 덕분이다. 광화문 캠핑촌에 블랙텐트라는 극장이 들어서고 나서 무대에 오를 수 없었던 공연들이 무대에 올려졌고, 모든 공연은 매진 행진을 이어가고 있다. 검열 사태를 직접적으로 다룬 작품, 세월호 유가족들이 직접 만든 연극, 그리고 우리 시대 재난의 아픔으로 각인시켜준 마임공연과 영화상영, 시낭송, 국악공연까지 블랙텐트는 검열로 빼앗긴 극장을 대신해서 예술인들의 정겨운 유배지이자 창작의 수용소가 되었다. 비록 시설은 열악하지만, 열정은 충만하다. 발은 시리지만, 마음은 따뜻하다. 그럴듯한 대접은 못 받지만, 검열은 없다. 오직 예술가로서 자기 주권과 관객의 감동적인 환호만 있을 뿐이다.

박근혜 탄핵을 향한 촛불의 리듬은 추운 겨울의 한가운데를 뚫고 봄을 맞이하려 한다. 2월에는 탄핵되길 희망했지만, 국면상 3월 초를 기다려야 한다. 아니 그 이상을 견뎌야 할지도 모른다. 블랙텐트는 그날까지 광장에서 수많은 예술인과 관객들을 만날 것이다. 빼앗긴 극장에도 봄은 오는가? 아마도 올 것이다. 최소한 물리적으로 계절의 순환 원리에 따라 따스한 봄은 올 것이다. 그리고 새로운 세상을 의미하는 ‘은유의 봄’도 올 것이다. 사악한 통치자는 탄핵당할 것이고, 감옥에 갈 것이며 블랙리스트의 실체를 위한 진상규명의 목소리는 더욱 거세야 한다. 

그런데 블랙텐트에는 정말 봄이 올 것인가? 역설적이게도 탄핵이 인용되면 블랙텐트는 아마도 사라질 것이다. 광화문 캠핑촌의 텐트와 각종 작품들과 시설도 서서히 정리될 것이다. 만일 기각되면 블랙텐트는 저항의 시간을 연장하며 존속될 것이다. 블랙텐트에 봄이 오려면 블랙텐트는 소멸되어야 한다. 빼앗긴 극장에 봄이 오면 우리는 다시 블랙텐트를 정리하고 본래의 극장으로 돌아가야 한다. 그러나 그것이 가장 최선의 길일까? 아니다. 빼앗긴 극장에도, 그래서 애써 만든 블랙텐트에도 진정 봄이 오려면, 광화문광장에 블랙텐트가 영구적으로 존치되었으면 한다. 블랙리스트의 참혹한 시간을 기억할 수 있도록, 우리가 우리의 노래를 들을 수 있도록, 우리가 우리의 연기를 할 수 있도록 광화문 블랙텐트는 탄핵 이후에도 그곳에 있어야 하지 않을까.

이동연 한국예술종합학교 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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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학자적 양심을 걸고 이번 경제성 분석 결과를 확신합니다.” 이명박 정부 시절인 2009년 경인운하 사업에 대해 비용 대비 편익(B/C) 분석이 기준점인 1을 넘는다고 설명하던 한 국책기관의 연구원이 이렇게 말했다. 기존의 같은 분석에서 1을 밑돌던 사업이 단번에 경제성 있는 사업으로 둔갑했다는 기자들의 질문 공세 끝에 나온 답이었다. 한반도대운하를 공약으로 내건 MB 정부 출범에 토건관료들은 경인운하를 다시 들고 나왔고, 사업타당성을 높이기 위해 국책연구기관들을 압박했다. 이전에도 정부는 B/C 결과가 1에 못미치자, 평가항목을 수정해 재분석을 요구했고, 그래도 경제성이 없다는 결과가 나오자 용역비 지급을 미루기까지 했다. ‘학자적 양심’과 불도저 같은 정부의 밀어붙이기에 2조원 넘는 예산이 투입됐다. 그 결과는 4대강 사업의 ‘녹조라떼’만큼이나 허탈한 상황이다.

정부가 전문가에게 의견을 묻는 이유는 객관적 입장에서 문제를 진단하고 대안을 제시할 수 있다는 신뢰 때문이다. 일반 시민의 의사 결정에도 전문가의 의견은 필수적이다. 고도로 전문화된 사회에서는 더욱 그렇다. 경제적 측면에서 시민들은 전문가의 의견을 들음으로써 정보취득 비용을 줄일 수 있다. 앤서니 다운스는 <경제이론으로 본 민주주의>에서 “합리적 시민들은 전문가의 의견에 필적한 만한 의견을 스스로 생산할 때 드는 비용보다 훨씬 낮은 가격으로 전문가의 일반적 의견을 구매한다”고 분석했다.

그러나 극단으로 치닫는 사회적 갈등 속에서 전문가 의견마저 그 격차가 커지고 있다. 해리 트루먼 대통령은 한편으론(on the one hand) 어떻고, 다른 한편으론(on the other hand) 어떻다라는 백악관 안팎의 경제학자들에게 “외팔이(one-handed) 경제학자를 한번 만나봤으면 좋겠다”고 비꼬기도 했다지만 지금 우리 상황은 반대다. 너무나 완고해서 논리를 통한 설득보다는 상대방 의견을 ‘순진한 생각’, ‘얼치기 수준’으로 무시하기 일쑤다.

더 씁쓸한 것은 전문가로서 쌓은 명성과 지식으로 사리사욕을 채우는 데 쓰고 있다는 점이다. ‘박근혜·최순실 게이트’에 등장하는 주요 인사들이 그렇다. 안종범 전 청와대 정책조정수석은 미국 위스콘신대에서 경제학 박사를 취득하고 성균관대 교수를 지내다 2005년부터 박근혜의 경제 가정교사 역할을 했다. “해외출장을 가도 대통령 전용기만 타고 다녀서 면세점 갈 시간이 없다”며 명품가방을 요구했다는 소식에 쓴웃음을 숨길 수가 없었다. 미르재단과 보수단체에 필요한 돈을 수금하는 데 앞장섰던 이승철 전경련 부회장 역시 완고한 시장우선주의자였다. 미국 오하이오주립대에서 경제학 박사 학위를 취득한 뒤 전경련 연구기관인 한국경제연구원에서 사회생활을 시작한 학자 출신이다. 대통령 앞에서도 주눅들지 않고 자신의 철학을 얘기하던 달변가이기도 했지만 지금 보면 누구보다 반(反)시장적이었고, 권력을 좇는 ‘예스맨’에 불과했다.

문화계 블랙리스트 작성 의혹의 중심에 있는 김종덕 전 문화체육관광부 장관, 김상률 전 청와대 교육문화수석, 김종 전 문체부 차관 역시 교수 출신이다. ‘어공’(어쩌다 공무원)이 된 이들은 ‘영혼 없는 공무원들’과 함께 헌법을 유린했다. 정유라 부정 입학과 학사 특혜 혐의 등으로 남궁곤·류철균 등 이화여대 교수들도 구속됐다.

시민이 전문가의 의견에 의지하다가는 주주와 전문경영인의 관계처럼 ‘대리인의 문제’를 일으키지 않을까 걱정될 정도다.

고 신영복 선생은 지식인에 대해 “지남철의 여윈 바늘 끝처럼 불안하게 전율하고 있어야 하는 존재”라며 떨림이 없이 어느 한쪽에 고정되면 나침반이 아니라고 했다. ‘조기 대선’ 분위기에 전문가들이 캠프에 몰려들고 있다. 그들에게 필요한 것은 콘크리트처럼 굳어진 신념과 그 신념을 펼치기 위한 자리 구하기가 아니라 사회를 위해 고민하는 ‘지식인으로서의 떨림’이어야 할 것이다.

산업부 | 박재현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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국정농단 사태는 박근혜 대통령 개인뿐 아니라 박근혜 체제의 문제이기도 하다. 대통령을 꼭짓점에 두고 수백만 공직자가 연계된 위계적 피라미드 형태의 이 체제는 놀랍게도 아직 가동 중이다. 청와대가 법원의 영장을 받은 특검의 압수수색을 거부한 것이 이를 증명한다. 특검을 거부한 청와대가 택배차량 출입을 버젓이 허용하고, 수석 및 장관들과 독대하지 않는 대통령이 말 중개상을 단독 접견한 것은 이 체제가 연출한 부조리극의 실체다. 이들이 시민들의 분노에도 아랑곳하지 않고 청와대를 낙동강 전선 삼아 농성하고 있는 것도 이 체제를 믿기 때문일 것이다.

이 점에서 미국의 고위공직자들이 도널드 트럼프 대통령의 야만적인 반이민 행정명령을 막은 것은 신선해 보인다. 샐리 예이츠 법무장관 대행은 행정명령 변호 거부로, 시애틀 연방법원 제임스 로바트 판사는 행정명령 효력 중단 선고로 미국 공직사회의 건강성을 입증했다. 예이츠 장관 대행은 “대통령이 위법적인 일을 지시하면 ‘노’(NO)라고 말하겠다”던 청문회 때 약속을 지켰다.

임기 초반 대통령의 서슬 퍼런 권력에 맞서 단호하게 노라고 외치는 미국의 공직자들은 한국에 곤혹스러운 질문을 던진다. 정권에 충성하지 않고 사회 정의를 실천하는 공직자들이 있느냐고 묻는다면 자신 있게 대답할 수 있을까. 최순실 사태는 한국의 공직자들이 노라고 외치지 못한 결과물이기도 하다.

유진룡 전 문화체육관광부 장관이 25일 오전 서울 종로구 헌법재판소에서 열린 박근혜 대통령 탄핵심판 9차 변론에 증인으로 참석하기에 앞서 기자들과 질의응답을 하고 있다. 연합뉴스

예외도 있었다. 유진룡 전 문화체육관광부 장관은 박 대통령의 낙하산 인사 지시를 거부했다가 퇴출됐고, 노태강·진재수 전 문체부 국·과장은 최씨 딸에게 불리한 감사보고서를 작성했다는 이유로 좌천당했다. 최씨가 150억원의 예산을 전횡하려던 사업 추진을 몸을 던져 막은 정준희 문체부 서기관도 희망의 빛을 던진다. 문체부 공무원들은 블랙리스트 증거자료를 없애라는 장관의 지시를 이행하지 않고 특검에 제출했다. 한국 공무원들도 영혼이 있다는 것을 이들은 직을 걸고 증명했다. 하지만 이들의 용기에도 불구하고 블랙리스트는 도중에 무산되지 않고 실행됐다. 공직자 개인 차원의 문제 제기는 찻잔 속 태풍으로 끝나기 십상이다. 제도화되지 않은 저항이 제왕적 대통령제 아래에서 효율성을 갖추지 못한 것이다. 국정 전반에 걸친 농단이 가능했던 이유다.

어느 조직에서건 노라고 말하는 것은 불편한 일이다. 익숙한 것으로부터 떨어져 나가는 데 따른 당사자의 불안감을 떨쳐낸다 해도 안정을 추구하는 다른 구성원들과의 다툼을 피할 수 없다. 애초 누군가가 자신의 질서를 상대방에 관철시키려고 하는 일 자체가 쉬운 일이 아니다. 더구나 지금 관가에는 권력에 줄을 대 출세를 꾀하는 영혼없는 공무원들로 넘쳐난다. 권력자 주변을 맴돌며 권력 남용 도구 역할에만 골몰하는 그들로 인해 양심과 사명감으로 일하는 공무원들은 우대받지 못하고 조직에서 밀려나고 있다. “시키는 대로 하라. 아니면 문체부를 떠나라”고 윽박지른 김종 전 문체부 차관이 대표적이다.

이런 상황에서 공무원들이 논리나 이성을 관장하는 ‘인간의 뇌’ 대신 생존 및 본능과 관련된 ‘파충류의 뇌’를 활용한다고 무작정 비난할 수는 없다. 공무원들에게 소신과 정의를 지키라고 요구하려면 먼저 할 일이 있다. 헌법 제7조는 ‘공무원은 국민 전체에 대한 봉사자이며, 국민에 대하여 책임을 진다’고 규정하고 있지만 이 정도로는 안된다.

‘이유 있는 항명’의 조직 문화는 제도에서 나온다. 미국 공직자들의 용기 있는 행동은 인사권 남용이나 부당한 행사로부터 공무원을 보호하기 위한 장치가 마련돼 있기 때문이다. 연방인사처 산하 ‘실적제도보호위원회’나 ‘특별검찰관’이 그것이다. 한국에도 법적으로는 부당하거나 위법한 지시를 이행하지 않았다고 징계하거나 해임할 경우 공직자가 소청심사위원회 등을 통해 문제를 제기할 수 있는 길은 열려 있다. 하지만 대부분 심증만 있지 직접적인 증거가 없기 때문에 구제받는 경우가 드물다. 상급자의 부당한 지시를 거부할 수 있는 ‘문화기본법’ 제정 움직임이 있지만 이는 문체부 공무원만 대상으로 한다. 전체 공무원으로 대상을 확대하고 행정부 및 정치권이 실효적 운영을 담보해야 기대와 현실의 조화가 가능해진다.

공직사회에 대한 사회적 감시와 견제도 필요하다. 무관심이야말로 국정농단을 용인하고 재생산한다는 것을 이번 사태가 똑똑히 보여줬다. 문제 제기를 격려하고 보호하는 문화 정착을 위한 노력도 빠져서는 안된다. 사회 스스로 정의를 추구하지 않으면서 공무원들의 맹성만 촉구할 수는 없다. “사람들이 듣기 싫어하는 것을 말하는 것이야말로 가장 중요한 (시민의) 책임”이라는 조지 오웰의 경구가 더욱 와닿는다.

조호연 논설위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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박근혜 정권이 벌인 ‘관제 데모’ 실상이 드러났다. 청와대가 기획하면 재벌을 대변하는 전국경제인연합회(전경련)가 자금을 대고, 극우단체가 움직이는 구조다. 세월호 유족을 조롱하는 집회와 역사교과서 국정화 찬성 집회 등이 이런 식으로 열렸을 가능성이 높다. 이 같은 공작을 주도한 인물은 다름 아닌 김기춘 전 대통령비서실장과 조윤선 전 문화체육관광부 장관이다.

경향신문 보도를 보면 박영수 특별검사팀은 전직 청와대 직원으로부터 김 전 실장이 2013년 말에서 2014년 초 극우단체에 자금 지원을 지시했다는 진술을 확보했다. 김 전 실장의 지시에 따라 정무수석실은 전경련에 자금 지원을 요청했고, 전경련은 극우단체에 차명으로 돈을 보냈다. 진보 성향의 문화예술계 인사를 탄압하기 위해 한편으로는 ‘블랙리스트’를 만들고, 다른 한편으로는 극우단체를 키운 것이다. 특검은 김 전 실장 등이 2014년 6월 극우단체를 동원해 세월호 유가족을 비난하는 집회를 열게 한 구체적인 정황도 포착했다. 단식 농성 중인 유가족들 앞에서 ‘폭식 투쟁’을 벌인 극우단체의 패륜에 시민들이 충격을 받고 의아해했는데 이제야 의문이 풀린 것이다. 정권의 꼭두각시 노릇을 한 극우단체 대표들은 최근 박근혜 대통령 탄핵 반대 집회에도 적극 참가한 것으로 알려졌다.

문화예술계 '블랙리스트' 작성과 관리에 관여한 혐의를 받고 있는 김기춘 전 청와대 비서실장과 조윤선 문화체육관광부이 15시간이 넘는 고강도 특검 조사를 받았다. 김기춘 전 실장(왼쪽)이 15시간이 넘는 조사를 받은 뒤 18일 새벽 서울 강남구 특검 사무실을 나선 뒤 차량에 탑승해 있다. 조윤선 장관도 21시간 가까이 조사를 받은 뒤 이날 오전 6시께 특검 사무실을 나선 뒤 차량에 탑승해 있다. 연합뉴스

국내 최대 보수단체인 한국자유총연맹이 청와대 지시로 역사교과서 국정화 찬성 집회를 벌인 정황도 있다. 뉴시스에 따르면 자유총연맹의 관제 데모를 지시한 사람은 허현준 국민소통비서관실 행정관이다. 허 행정관은 2015년 하반기 자유총연맹 고위 관계자에게 ‘세월호 진상조사 반대 집회’와 ‘국정교과서 찬성 집회’를 열어달라고 연락했다고 한다. 허 행정관은 전경련을 통해 극우단체 어버이연합 차명계좌에 수억원의 자금을 지원하고, 참가자 1인당 2만원씩 줘 관제 데모를 열게 한 배후자로도 지목받고 있다.

권력과 돈으로 민의를 왜곡하고 여론을 조작한 관제 데모는 민주주의를 위협하는 심각한 사안이다. 그것도 김 전 실장 등과 청와대가 조종했다니 어이가 없다. 그런데도 김수남 총장 체제의 검찰은 손을 놓고 있다. 서울중앙지검은 전경련이 어버이연합에 돈을 대고 청와대가 시위를 사주했다는 의혹을 지난해 4월부터 수사하고 있지만 지금껏 감감무소식이다. 추선희 어버이연합 사무총장의 동생이 김 총장 부속실에 근무하기 때문이라는 설도 있다. 관제 데모 의혹 역시 특검이 풀 수밖에 없다. 청와대와 전경련, 극우단체 간 유착 관계를 밝히고, 검찰의 직무유기 행위도 파헤쳐 엄하게 처벌해야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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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람이 죽어서 가는 곳이 명부(冥府)다. 저승이란 곳이다. 저승엔 죽은 자의 죄를 심판하는 열 명의 왕이 있다고 한다. 염라대왕은 그중 다섯 번째에 앉아 있다. 염라대왕 앞에는 아홉 면의 업경(業鏡)이 있다. 하나하나의 거울에 한평생 지었던 죄업이 차례로 떠오른다. 거짓말을 해도 소용없다. 일종의 CCTV다. 꼼짝 마라다.

이승엔 그런 거울이 없다. 그러니 마음 놓고 ‘모른다’고 발뺌할 수 있다. 김기춘은 1975년 중앙정보부 대공수사국장 시절 유학생 간첩단 사건을 총지휘했다. 당시 한국에 있던 재일동포 유학생이 대략 200~300명이었다는데 이 중 10%가량이 간첩으로 몰렸다. 혹독한 구타와 고문으로 조작된 사건 피해자들은 재심에서 무죄가 확정됐다. 김기춘은 그때 일이 “기억나지 않는다”고 했다. 김기춘에겐 기억도 나지 않는 하찮은 사건으로 학생들은 사형 선고를 받고 십수년을 감옥에서 지냈다. 반성도 사죄도 없었다. 단죄도 없었다.

김기춘이 마침내 구속됐다. 생애 첫 수감이다. 김기춘은 정부 비판적인 인사들에 대한 지원을 다 끊으라고 지시했다. 이를 위해 1만명에 달하는 블랙리스트를 만들었다. 그는 40년 전에 “공산주의자들은 무좀과 비슷하다. 약을 바르면 잠시 들어갔다가 약을 바르지 않으면 또 재발한다”고 했다. 1975년 우리나라 1인당 국민소득은 602달러였다. 지금은 3만달러를 눈앞에 두고 있다. 그때에 비하면 소득뿐 아니라 삶의 질과 다양성, 지적 수준, 정보는 50배, 100배 이상 높아졌다. 김기춘의 시계는 40년 전에 멈춰 서 있다. ‘무좀 리스트’를 만들었던 그 사고 그 수준으로 지금 또 블랙리스트를 만들었을 것이다. 해마다 노벨상 후보에 오르는 고은 시인, 맨부커상을 수상한 소설가 한강, 영화배우 송강호·김혜수·하지원, 영화감독 박찬욱 등이 들어 있다. 김기춘에겐 모두 무좀 같은 존재들이다.

‘문화예술계 블랙리스트’ 작성·실행에 관여한 혐의로 지난 21일 새벽 구속된 김기춘 전 대통령비서실장(왼쪽 사진)과 조윤선 전 문화체육관광부 장관이 22일 박영수 특별검사팀의 조사를 받기 위해 서울 대치동 특검 사무실에 들어서고 있다. 강윤중 기자 yaja@kyunghyang.com·연합뉴스

1940년대 할리우드 최고의 작가인 돌턴 트럼보는 미국에서 무좀 취급을 받았다. 당시 미국은 좌파 성향의 극작가·감독·배우의 활동을 막기 위해 ‘할리우드 블랙리스트’를 만들었다. 매카시즘 광풍 이후엔 그 숫자가 더욱 불어나 많은 영화인들이 공산주의자 혹은 동조자로 몰렸다. 미 의회 청문회의 추궁에 트럼보는 “네, 아니요로만 대답하는 사람은 바보 아니면 노예밖에 없다”고 했다. 그는 일자리를 잃었다. 생계를 위해 트럼보는 11개의 가명으로 작품을 썼다. 가명으로 쓴 ‘로마의 휴일’(1953), ‘브레이브 원’(1956)은 아카데미 각본상을 받았다. 그는 수상식에도 나타날 수 없었다. 트럼보는 훗날 ‘악마의 시절’이라고 그때를 회고했다.

김기춘은 21세기 대한민국에 악마의 시대를 재현했다. 2014년 6월14일 김영한 민정수석 부임 첫날 김기춘 비서실장의 지시는 ‘김대중·노무현 정부 인사들이 공직·민간·언론을 불문하고 독버섯처럼 자랐다’ ‘정권에 대한 도전은 두려움을 갖도록 사정활동을 강화하라’고 했다. ‘과거를 보면 미래를 알 수 있으니 위태로운 자, 인간 쓰레기를 솎아내는 일을 점진적으로 추진토록 하라’고도 했다. 김기춘은 네, 아니요로만 대답하기를 강요했다. 아니요라고 하는 사람은 무좀으로, 독버섯으로, 인간 쓰레기로 취급하라고 그는 명령했다.

대한민국 어두운 역사, 부끄러운 과거마다 김기춘 이름 석자가 빠지지 않았다. 부산 초원복집 지역감정 발언은 도청 사건으로 뒤집었다. 김기설 분신은 강기훈 유서대필사건으로 돌려놓았다. 세월호 참사는 유병언 잡기와 유족들에 대한 공격으로, 정윤회 문건은 지라시 유출로, 이석수 특별감찰관은 국기문란으로 몰아 상황을 반전시켰다. 최순실 국정농단은 태블릿 PC 출처 시비로 또다시 국면을 바꾸려 했다. 위기 때마다 본질을 덮고 “불이야” “강도야”라고 외친 사람을 잡아 가뒀다. 그는 법비(法匪), 법을 악용한 도적이라고 한홍구 성공회대 교수는 말했다.

법비는 48년간 이 나라를 활개치고 군림했다. 그건 누군가의 용인과 지원이 있었기에 가능했다. 보수언론은 그에게 ‘미스터 법질서’란 애칭을 붙여줬다. 거제 주민들은 3선 국회의원을 만들어줬다. 박근혜는 그를 대통령비서실장으로 불러들였다. 부끄럽다. 이 나라는 친일도, 유신 잔재도, 군사독재도 제대로 청산해본 적이 없다. 대청소를 할라치면 미래로 가야지 과거를 들쑤셔서 어쩌자는 거냐고 덤벼든다. 그 결과가 김기춘이란 괴물을 만들었다. 온 나라에 제2의 김기춘이 즐비하다. 정의도 아니다. 하늘이 무섭지 않으냐는 말은 저승의 법정 몫이다. 그때까지 기다릴 수 없다. 이승의 법정에서도 정의는 행해져야 한다. 역사의 법정에서도 정의가 이긴다는 것을 보여줘야 한다.

박래용 논설위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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박근혜 대통령이 헌법재판소의 탄핵 결정을 늦추기 위해 갖은 꼼수를 부리고 있다. 박 대통령 측은 어제 헌재에서 열린 탄핵심판 8차 변론에서 김기춘 전 대통령비서실장과 우병우 전 청와대 민정수석 등 무려 39명의 증인을 추가로 신청했다. 검찰과 특검의 조사 결과를 인정할 수 없으므로 관련자들을 직접 불러 얘기를 들어보자는 것이다. 증인 1명 심문에 적어도 1시간이 걸리는 것을 감안하면 재판이 2주 이상 늘어질 수 있다. 그런데 김 전 실장이나 우 전 수석은 이미 국회 청문회에 출석해 모든 사안에 ‘모른다’고 답한 인물들이다. 헌재 출석 요구를 받은 청와대 ‘문고리 3인방’도 모두 불응했다. 나라가 결딴나든 말든 조금이라도 더 대통령 자리에 앉아 반전의 기회를 노리겠다는 속셈이다. 대통령으로서의 품위나 주권자에 대한 예의는 눈곱만큼도 없다.

박근혜 대통령이 23일 서울 동작동 국립현충원에 있는 아버지 박정희 전 대통령, 어머니 육영수 여사의 묘소를 찾아 성묘하고 있다. 청와대 제공

박 대통령은 특검 수사도 훼방을 놓고 있다. ‘문화예술계 블랙리스트’ 작성을 박 대통령이 지시했다고 보도한 언론사와 기사에 언급된 ‘익명의 특검 관계자’를 고소했다. 자중해야 할 피의자가 수사 주체를 고소해 처벌하겠다니 어이가 없다. 대면조사나 청와대 압수수색 등 향후 특검 수사를 거부하기 위한 명분을 축적하려는 것 아닌지 의심스럽다. 최순실씨도 막무가내로 나오기는 마찬가지다. 특검의 소환 통보를 6차례나 거부해 수감 중인 최씨의 체포영장을 법원에 청구하는 지경에 이르렀다.

국정 공백이 길어지면서 나라 꼴이 말이 아니다. 물가와 실업률은 천정부지로 치솟고, 가계부채와 나랏빚도 사상 최고치를 경신했다. 탄핵 국면에 대한 피로도도 높아지고 있다. 나라 바깥도 어지럽다. 도널드 트럼프 미국 대통령 취임으로 전 세계가 대격변의 소용돌이에 들어갔다. 한반도를 둘러싼 외교·안보 상황은 그 어느 때보다 위중하다. 헌재가 일단 내달 1일 김 전 실장과 김규현 외교안보수석 등을 심문하기로 결정함에 따라 헌재의 최종 결론은 8명의 재판관이 내리게 됐다. 박한철 헌재 소장은 오는 31일 퇴임한다. 9명의 재판관 중 6명 이상 찬성에서 8명 중 6명 이상 찬성으로 탄핵 조건이 변해 박 대통령은 그만큼 유리해졌다. 박 대통령은 이런 걸 노렸을 것이다. 헌재는 무책임한 박 대통령의 재판 지연 술책에 말려들지 말아야 한다. 아울러 선고 일정 등을 가능한 한 일찍 알려 시민들이 대통령 선거 등 향후 정치 일정 등을 예측할 수 있게 해야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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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화체육관광부 장관 직무대행인 송수근 제1차관과 문체부 간부들이 어제 정부세종청사에서 문화예술계 블랙리스트에 대해 대국민사과를 했다. 김종덕 전 장관과 김종 전 차관에 이어 조윤선 장관까지 줄줄이 구속되자 부처 차원에서 참회하고 자성의 뜻을 밝힌 것이다. 송 차관은 성명에서 “표현의 자유를 지키는 보루가 돼야 할 문체부가 공정성 문제를 야기한 것에 대해 참담하고 부끄럽다”면서 “통절하게 반성하고 있으며 어떤 변명의 여지도 없다”고 말했다. 특별검사가 진실을 밝히는 일에 적극 협조하고 책임도 감내하겠다고 했다.

하지만 문체부의 참회를 보는 시민들의 마음은 착잡하다. 박근혜 대통령은 문체부를 비선 실세 최순실씨를 챙기는 도구로 마음껏 주물렀다. 자질이 없는 사람들을 장차관으로 기용해 사기업도 못할 일을 서슴없이 시켰다. 문체부는 정상적인 국가 조직이 아니었다. 유진룡 전 장관이 두 차례 박 대통령에게 블랙리스트의 부당성을 제기했다고 하지만 공허한 저항에 그쳤다. 오히려 정유라씨의 승마 대표선수 선발이나 1급 공직자 집단 사직 강요 논란이 보도됐을 때 문체부는 의혹을 부인했다. 미르·K스포츠 재단 편법 설립도 문체부 간부와 직원들이 충실히 해냈다. 법령과 절차에 따라야 할 관료조직이 스스로 규범을 어긴 것이다. 강요당했다고 피해자로 자처할 수 없는 비극적 상황이다.

유진룡 전 문화체육관광부 장관이 23일 서울 대치동 박영수 특검 사무실에 참고인 신분으로 출석하며 기자들과 만난 자리에서 박근혜 정부의 ‘문화예술계 블랙리스트’ 작성·집행에 대해 작심한 듯 비판하고 있다. 김영민 기자

유 전 장관은 어제 블랙리스트 작성은 김기춘 전 대통령비서실장이 주도했으며, “헌법 정신을 훼손한 일”이라고 밝혔다. 그러나 박 대통령과 김 전 비서실장은 지금까지 리스트 작성 지시를 부인하고 있다. 박 대통령 측은 “블랙리스트 작성을 지시한 사실이 없다”며 이를 보도한 언론을 제소했다. 김 전 실장은 “(블랙리스트 운영은) 문화부 장관이 할 수 있는 일로, 불법이라고 생각하지 않았다”고 했다. 하명한 사람들은 나몰라라 하는데 문체부는 분명히 지시를 받았다며 사죄하는 희극이 연출되고 있다. 그러면 황교안 권한대행이 나서서 사과하는 게 마땅하다. 그러나 황 대행은 신년기자회견에서 이를 언급하지 않았다. 문체부를 대표해 사죄한 차관은 언제 블랙리스트 사건 피의자가 될지 모르는 처지다. 1만명에 이르는 문화예술인을 블랙리스트에 묶어 탄압한 국제사회의 수치를 수습하는 정부의 자세가 아니다.

이번 사건은 공무원들이 권력자의 불법적 지시에 복종하면 어떤 결과가 나타난다는 것을 극명하게 보여주고 있다. 상부의 지시를 영혼 없이 따르기만 하다 사후에 참회하라고 공직을 맡긴 게 아니다. 공직사회 전체가 단단히 교훈 삼아야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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송수근 문화체육관광부 장관 직무대행(56·제2차관)이 23일 오후 정부세종청사에서 실·국장 이상 간부들 명의로 “(블랙리스트로) 국민들에게 큰 고통과 실망, 좌절을 안겼다”며 사과문을 발표하고 머리를 숙였다. 문체부는 사과문에서 “공공지원에서 배제되는 예술인 명단으로 문화예술 지원의 공정성 문제를 야기한 것에 대해 너무나 참담하고 부끄럽다”고 했다. 또 “특검 수사 결과에 따라 책임을 질 것”이라며 “부당한 개입을 원천적으로 방지하는 재발방지책을 마련하겠다”고 밝혔다. 하지만 문체부의 사과문 발표는 앞뒤가 바뀌었다. 블랙리스트의 작성 과정과 관여자를 밝혔어야 했다. 문체부는 블랙리스트가 언제 어떻게 만들어졌는지, 그 과정에 어떤 방식으로 얼마나 관여했는지, 그래서 소위 ‘부역자’들에게 어떤 조치를 취하겠다는 것인지 아직 아무것도 제대로 밝힌 적이 없다. 이 때문에 문체부의 대대적인 사과는 특검 수사로 인해 실체가 규명될수록 비난 수위가 높아질 것을 우려해 물타기를 한 것 아닌가 의심스럽다.

23일 오후 정부세종청사 문화체육관광부에서 송수근 장관 직무대행(왼쪽) 등 간부들이 ‘문화예술계 블랙리스트’ 사건에 대한 대국민사과문을 발표하기에 앞서 머리 숙여 인사하고 있다. 연합뉴스

사실 진상을 밝혀 사과할 기회는 이전에도 여러 차례 있었다. 블랙리스트 존재가 공론화된 것은 2015년 9월 국정감사 때였다. 9473명의 명단이 들어간 블랙리스트 문건이 공개된 시점은 지난해 10월이다. 문체부는 그동안 “블랙리스트를 모른다”는 조윤선 전 장관(51)의 입만 쳐다보고 있었다. 조 전 장관이 구속된 이후에야 블랙리스트의 존재를 인정하며 사과에 나선 것이다.

조윤선 전 장관

블랙리스트에 관한 한 모르쇠로 일관했던 문체부는 현재 ‘풍비박산’이 났다. 현직 장관이 구속되는 첫 사례를 기록하며 이미 김종덕 전 문체부 장관(60), 김종 전 2차관(56), 정관주 전 1차관(53)까지 구속됐다. 한 부처에서 최고 수장인 전·현직 장차관 4명이 같은 사건으로 구속된 사례는 건국 이후 찾기 힘들다. 게다가 앞으로 구속자 명단에 누가 더 포함될지 모르는 상황이다. 당장 이날 사과문을 발표한 송 직무대행 역시 블랙리스트 관여자로 의심받고 있다. 이 외에 고위직부터 산하기관 실무자에 이르기까지 적극적으로 가담한 관계자가 더 밝혀질 가능성이 농후하다.

문체부의 사과를 놓고 “피해자 코스프레를 그만두라”는 비판이 나오는 것도 이 같은 이유 때문이다. 문화예술인 단체들로 구성된 ‘박근혜퇴진과 시민정부 구성을 위한 예술행동위원회’는 이날 성명을 내고 “공범자로 추정되는 범죄자의 사과를 결코 수용할 수 없다”고 밝혔다. 특히 문체부가 진실 규명이나 관련자 처벌 없이 “졸속 사과를 했다”고 비판했다. 이번 대국민사과는 문체부가 블랙리스트를 바라보는 안일한 시각을 여과 없이 드러낸 꼼수에 가깝다.

문화부 | 김향미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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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기춘 전 대통령비서실장과 조윤선 전 문화체육관광부 장관이 지난 주말 동시에 구속됐다. 국정농단의 공범이면서도 교묘하게 수사망을 피했던 이들은 ‘문화예술계 블랙리스트’로 결국 꼬리가 잡혔다. 서울중앙지법 영장전담판사는 “범죄 사실이 소명되고 증거인멸의 우려가 있다”고 구속 사유를 밝혔다. 두 사람의 구속으로 박근혜 정부가 정부 비판적인 문화예술인들을 ‘좌파’로 낙인 찍어 각종 지원에서 배제해왔다는 사실은 분명해졌다. 문체부가 오늘 대국민사과를 한다고 한다. 늦었지만 당연한 일이다.

[김용민의 그림마당]2017년 1월 23일 (출처: 경향신문DB)

블랙리스트 대상자들은 문화예술 전 분야에 걸쳐 그 숫자가 무려 1만명에 달한다. 노벨상 후보로 추천받은 작가, 최고 권위의 국제 문학상 수상 작가까지 망라돼 있다. 그들이 한 활동이라 해 봐야 세월호 시국선언에 이름을 올리거나 야당 정치인을 지지한 게 전부다. 헌법은 양심, 언론 출판, 학문과 예술의 자유를 보장하고 있다. 창작과 표현의 자유를 억압하고 문화예술인을 통제한다는 것은 민주주의의 핵심 가치인 사상·표현·언론의 자유를 침해한 반헌법적 중대 범죄다. 더구나 이 정부 국정기조로 문화융성을 내세우고 내부에선 자기 입맛에 맞지 않는다고 빨간 딱지를 붙여 탄압했으니 그 이중성이 가증스러울 뿐이다. 두 사람은 구속 직전까지 “블랙리스트를 본 적 없다”며 거짓말을 밥 먹듯이 했다. 관련 자료를 지우거나 컴퓨터를 폐기하는 등 증거를 없애려고도 했다. 조 전 장관은 장관직을 그대로 유지한 채 영장실질심사를 받아 현직 장관 구속 1호라는 불명예 기록까지 안게 됐다. 고위 공직자의 처신이라고 믿기 힘든 파렴치한 피의자들이다.  

이제 블랙리스트 작성의 최종 책임자가 누군지 밝혀야 한다. 그런 광범위한 명단은 한두 부서에서 만들어질 수 있는 사안이 아니다. 국가정보원을 비롯한 권력기관이 총동원되다시피 했다는 정황은 곳곳에서 드러나고 있다. 박근혜 대통령이 정부 비판적인 문화예술인들에 대한 반감을 공공연히 드러낸 것도 수차례다. 속속 드러나는 증거들은 박 대통령이 블랙리스트 작성의 주동자였음을 가리키고 있다. 민주주의 체제를 위협하고 헌법을 유린한 사상통제는 결코 용서받을 수 없는 범죄다. 박 대통령 탄핵 사유 중 가장 심각하고 위중하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특검은 문명국가의 수치인 블랙리스트의 몸통을 반드시 찾아내 그 책임을 철저히 물어야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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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는 시키는 대로 했을 뿐이다.” 한나 아렌트의 <예루살렘의 아이히만>이란 책에는 유대인 학살에 가장 악랄하게 가담한 독일 장교 아돌프 아이히만의 수많은 증언들이 기록되어 있다. 아이히만의 예루살렘 법정 재판을 참관하면서 아렌트가 내린 결론은 ‘악의 평범성’이었다. 유대인을 색출하고, 그들을 열차로 호송하는 일을 맡았던 아이히만의 반인륜적 범죄행위를 심문하고 진술하는 재판과정을 지켜보면서 아렌트는 아이히만의 범죄행위를 ‘악의 평범성’으로 정의했다. 아이히만은 검찰의 살인죄 기소에 대해 다음과 같은 입장을 밝혔다. “유대인을 죽이는 일에 나는 아무런 관계도 없다. 나는 유대인이나 비유대인을 결코 죽인 적이 없다. 이 문제에 대해 말하자면 나는 어떤 인간도 죽인 적이 없다. 나는 유대인이든 비유대인이든 죽이라는 명령을 내린 적이 없다.” 많은 사람들은 아렌트가 언급한 악의 평범성이 아이히만과 같은 추악한 악을 지나치게 인간의 보편적 악으로 설명하려 했다고 비판했지만, 정작 그녀의 생각은 달랐다. 그녀가 말하려는 악의 평범성은 매우 멍청하고 심오한 의미라고는 하나도 없는 자들, 자신의 잘못을 모르거나 인정하려 들지 않는 자들의 보편적 속성이다.

국정조사에 출석하여 증언하는 내내, 특검에 소환되어 조사를 받는 내내 자신은 블랙리스트를 지시한 적이 없다고 부인하는 김기춘에게서 아이히만과 같은 악의 평범성을 느낀다. 블랙리스트 명단은 오스트리아에서의 유대인 추방자 명단과 크게 달라 보이지 않는다. 왜냐하면 유신·공안 동맹체들은 예술이란 영토를 순결하게 만들기 위해 블랙리스트라는 이름으로 1만명에 가까운 예술가들을 추방하려 했기 때문이다. 김기춘은 박근혜와 동맹하여 블랙리스트 명단 작성을 주도했다. 박근혜와 김기춘은 마치 유대인 학살의 총책 하이드리히와 그 하수인 아이히만과 같다. 그들은 유대인 학살을 뜻하는 말로 ‘최종해결책’이란 그들만의 언어규칙을 쓰듯, 김기춘과 유신·공안 동맹체는 예술가들을 추방하기 위해 블랙리스트라는 언어규칙을 사용했다.

박영수 특별검사팀이구속영장을 청구한 김기춘 전 대통령 비서실장이 구속 전 피의자심문(영장실질심사)을 위해 20일 오전 특검 사무실에 출석하고 있다. 김기남 기자 kknphoto@kyunghyang.com

블랙리스트는 문화공안정국의 인장이자, 유신의 징표이다. 박정희가 부일장학회를 강탈해서 만든 것이 5·16 장학회인데 이 장학회의 첫 수혜자가 김기춘 전 비서실장이다. 검사였던 김기춘은 법무부 과장으로 재직하면서 유신헌법의 기초를 만든 10명의 실무진 중 하나였다. 김기춘은 나중에 자신의 부역행위에 대해 “과장이 아니라 평검사로 일하면서 상부에서 시키는 잔심부름 외에 한 것이 없다”고 해명했다. 아이히만이 한 말과 거의 유사하다. 그러나 당시 언론은 “유신체제의 법령 입법과 개정의 공로와 실력이 높이 평가되어 유례없이 발탁”되었다고 적고 있다.

아리엘 도르프만의 희곡 <죽음과 소녀>는 칠레의 독재정권하에서 벌어진 인권유린 진상조사를 배경으로 한다. 이 작품에 등장하는 에스코바르는 진상조사를 총괄하는 인권 변호사이고, 그의 부인 파울리나는 독재정권하에서 끔찍한 성고문을 당했다. 에스코바르는 어느날 타이어가 펑크가 나 어쩔 줄 몰라 하다, 50대의 시골 의사 로베르토의 도움으로 무사히 집에까지 오게 된다. 그런데 파울리나는 남편을 태워준 그 의사 로베르토가 15년 전에 자신을 성고문한 자임을 단번에 알아차린다. 비록 그녀는 안대를 하고 고문을 당해 로베르토를 본 적은 없지만, 그자의 목소리를 정확하게 기억해 냈다. 파울리나는 결국 로베르토를 집에서 체포하고 몸을 결박한 후 그에게 총을 겨누며 이렇게 말한다. “너를 죽이는 거야, 그래서 내가 나의 슈베르트를 들을 수 있도록.”

김기춘은 대한민국의 로베르토이다. 그는 공안검사로서 유신헌법을 만드는 데 기여했고, 수많은 양심수들을 감옥으로 보냈다. 그리고 유신의 딸을 보좌하며 블랙리스트를 만들어 예술가들의 명예를 짓밟고, 예술을 검열했다. 검열당한 예술가들은 마치 <죽음과 소녀>에 나오는 파울리나와 같다. 그녀가 로베르토를 향해 총을 겨누듯이 우리는 유신의 역사적 유산인 블랙리스트를 향해 죽음을 선언해야 한다. 블랙리스트는 유신 회귀의 악귀이자 역설적으로 그 종말의 증거이기 때문이다.

이동연 한국예술종합학교 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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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윤선 문화체육관광부 장관이 청와대 정무수석비서관 재직 시절 극우단체를 동원해 세월호 가족들에 대한 반대집회를 조직한 사실이 드러났다. 박영수 특별검사팀의 이규철 대변인은 어제 이런 내용으로 수사하고 있음을 확인하고 “객관적 물증을 확보하면 추후 발표하겠다”고 말했다. 한겨레 보도에 따르면 조 장관은 2014년 6월 정무수석에 발탁된 뒤 우익단체 대한민국어버이연합을 동원해 세월호 유가족을 비난하는 집회를 열게 했다. 조 장관은 이들 단체가 시위에서 외칠 구호도 챙기고, 정부 비판 세력에 대한 고소·고발까지 간여했다고 한다.

조윤선 문화체육관광부 장관이 20일 오전 서울 강남구 대치동 특별검사 사무실에서 영장심사를 위해 법원으로 향하고 있다. 김기남 기자 kknphoto@kyunghyang.com

이 같은 사실은 청와대 수석비서관으로 함께 근무했던 고 김영한 전 민정수석의 비망록에 의해 어느 정도 추정된 바였다. 비망록에 따르면 김기춘 당시 대통령비서실장의 지시를 받은 누군가가 정부 비판 세력을 겁박하도록 우익단체를 움직였는데, 그 연결고리가 정무수석 조윤선이었음이 이번에 드러난 셈이다. 자식을 처참하게 잃은 세월호 가족의 아픔을 보듬기는커녕 뒤에서 공격하고 여론을 조작하는 게 고위 공직자가 할 일인지 조 장관에게 묻고 싶다. 조 장관은 김 전 실장의 지시를 받아 반정부 블랙리스트 작성에 간여한 일로도 구속영장이 청구돼 있다. 결국 조 장관은 박근혜 대통령, 김 전 실장과 함께 온갖 불법을 저지른 운명공동체였기에 중용된 것이다.

청와대의 사주와 극우단체의 꼭두각시 노릇이 드러난 만큼 자초지종을 밝혀야 한다. 이는 조윤선 개인이 아니라 정권 차원의 문제다. 보수단체 뒤에 청와대가 있다는 의혹은 이명박 정권 때부터 제기됐다. 어버이연합은 지난해 청와대 정무수석실 허모 행정관의 지시와 전국경제인연합회의 자금 지원을 받아 집회를 연 혐의로 수사선상에 오른 바 있다. 서울중앙지검이 흐지부지했지만 이제는 제대로 수사해야 한다. 블랙리스트와 관제데모, 민주주의에 대한 중대한 도전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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엉망으로 망가진 회사를 다니고 있는 친구가 있다. 시간이 지날수록 상황은 더욱 나빠졌고, 회사가 퇴행을 거듭하는 동안 친구의 일상은 확 달라졌다. 그림 그리기, 서예, 요리 등 각종 취미생활을 섭렵하고 있다고 했다. 이렇게라도 다른 짓을 하면서 버티지 않으면 제정신으로 회사를 다니기 힘들다며 웃는데, 그 덤덤함에 마음이 더 아팠다. 열정 넘치던 신입은 사라지고, 못 볼 꼴을 많이 본 자의 씁쓸함이 가득했다. 회사에 조금이라도 비판적인 목소리를 내면 바로 징계다. 저항하는 자는 제거되고, 따르는 자는 이익을 얻으며, 시스템이 그 지시를 충실히 이행할 때 개인이 버티기란 쉽지 않다. 말이 안되는 것을 알면서도 무력함에 순응할 수밖에 없게 만드는 것이야말로 핵심이니까.

‘블랙리스트’도 비슷하다. 다들 심증은 있되 물증이 없었을 뿐 블랙리스트의 존재는 짐작하고 있었다. 아예 명단을 만들어 배제할 사람과 지원할 사람을 지명해 하달하고, 조직적으로 움직였다는 정황이 속속 밝혀지고 있는데도 ‘모르쇠’로 일관하는 사람들은 여전하다.

이혁진의 소설 <누운 배>에 나오는 구절을 떠올린다. “사실은 사실로 판가름나지 않았다. 사실을 판가름하는 것은 힘이었다. 회장은 결정할 수 있는 사람이었다. 틀릴 수 없는 사람이었다. 임원들이 가짜를 말해도 회장이 진짜라면 진짜가 되고 진짜를 말해도 회장이 가짜라면 가짜였다. 세상은 성기고 흐릿한 실체였다. 그것을 움켜쥔 힘만이 억세고 선명했다. 힘은 우스운 것이 아니었다. 아무리 우스운 것도 우습지 않게 만드는 것이 힘이었다.” 소설의 구절을 빌린다면 ‘아무리 우스운 리스트여도 우습지 않게 만드는 것’이야말로 힘이고, 이 정부가 내세우던 ‘문화융성’이었을 것이다. 소설가 한강이 맨부커상을 탔어도 5·18을 다룬 소설을 쓴 이상 리스트에 포함될 사유가 충분해지는 식이다. 그 결과 조악하고 엉성한 수준의 블랙리스트가 만들어졌고, 일단 한 번 만들어지자 리스트가 사실인지 여부는 중요하지 않게 된다. ‘결정할 수 있는’ 윗분의 뜻에 따라, 일은 착착 처리되었다.

문화예술인들이 지난달 29일 서울 종로구 헌법재판소 앞에서 ‘블랙리스트 관련 조윤선 문화체육관광부 장관의 증거인멸 중단 및 사퇴 촉구 기자회견’을 열고 검은 비닐봉지를 머리에 덮어쓴 후 벗어서 하늘로 날리는 퍼포먼스를 벌이고 있다. 정지윤 기자

차은택이 ‘문화계 황태자’로 수천억원의 문화예술 예산을 주무르며 ‘문화융성’의 혜택을 누리는 동안, 블랙리스트에 오른 현장 문화예술인들은 얼마 되지 않는 지원조차 석연치 않은 이유로 받지 못했다. 문화예술지원사업의 대부분이 공적 기금, 그러니까 국고에 의존하고 있는 현실을 감안한다면 외부 지원 자체가 끊겼다는 것과 마찬가지다. 그 예술인들이 바로 오늘(10일), 광장극장 ‘블랙텐트’의 문을 연다. “블랙리스트와 예술검열은 연극인들에게 무대를 빼앗고 관객들에게 공론장으로서 공공극장을 빼앗았지만, 동시대 고통받는 목소리들이 사라진 공공극장을 광장에 다시 세우겠다”는 것이 이 극장의 취지다.

오스카 와일드는 이기심을 “내가 살고 싶은 대로 사는 것이 아니라 남들더러 내가 살고 싶은 대로 살라고 하는 것”이라고 말한 바 있다. 블랙리스트와 반대로 적극 지원하거나 추천하는 이른바 ‘화이트리스트’까지 만들어 화끈하게 지원했다는 이 정권이야말로 이기심의 끝을 보여주고 있는 것은 아닐까. 블랙리스트를 만들 필요도 없이 마음대로 검열하고 탄압할 수 있었던 지난 시절이 그리웠는지도 모르겠다. ‘국가가 예술과 문화에 대해 어떠한 가치 판단도 해서는 안된다’는 명제에서 출발한다는 네덜란드의 문화정책까지는 바라지도 않는다. 문화예술지원의 오랜 명제인 ‘팔길이 원칙’(지원하되 간섭하지 않는다)만 지켜져도 감사하겠다.

앞서 언급한 친구의 직장은 MBC다. 간판뉴스 시청률이 2%대로 추락하는 와중에도 ‘특검 블랙리스트 수사’에 딴지를 걸고 있는 ‘대단한’ 언론사다. “블랙리스트 운영을 언론, 사상, 표현의 자유를 침해하는 중대 범죄로 보고 있다”는 특검의 수사에 희망을 걸다가도, 친구를 생각하면 가슴이 답답해진다. 광화문광장의 블랙텐트가 사라지기 전에 이 친구는 극장을 취재하러 갈 수 있을까? 문화계뿐만 아니라 사회 곳곳에 꼼꼼하게 뿌려져 작동 중인 블랙리스트들을 확인해야 하는 이유다.

정지은 | 문화평론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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박영수 특별검사팀의 ‘박근혜·최순실 게이트’ 수사 과정에서 국가정보원의 비위가 속속 드러나고 있다. 이른바 문화예술인 블랙리스트 작성에 관여한 것은 기본이고, 정권에 비판적이라는 이유로 정부의 문화예술 지원 사업에서 특정 기관을 탈락시킨 정황까지 나왔다. 헌법에 보장된 사상과 표현의 자유를 심각하게 훼손한 것이다. 대선에 불법 개입한 혐의로 당시 원세훈 국정원장이 형사처벌까지 받았지만 국정원은 하나도 달라지지 않았다. 정치적 중립을 지키지 않는 국정원, 시민 아닌 정권에 봉사하는 국정원은 그 자체가 민주주의의 적이다.

언론 보도를 종합하면 국정원이 작성한 것으로 보이는 ‘시·도 문화재단의 좌편향·일탈 행태 시정 필요’ 문건에는 지방자치단체 산하의 문화재단들이 좌편향을 보이고 있으므로 감사 등을 거쳐 보조금을 삭감해야 한다는 내용이 담겼다. 한국작가회의와 한국민족예술인총연합 등 정권에 비판적인 단체를 탈락시키기 위해 최종 심사까지 마친 ‘현장 예술인 교육 지원 사업’을 갑작스럽게 폐지하는 과정에도 국정원이 개입했다는 증언이 나왔다. 사실이라면 국정원이 정보 수집 차원을 넘어 정부 부처의 예산 집행에까지 영향력을 행사했다는 것으로 매우 심각한 일이다.

[김용민의 그림마당]2017년 1월 10일 (출처: 경향신문DB)

‘아르코(한국문화예술위원회) 주목할 만한 작가상’ 선정과 한국출판문화산업진흥원 이사 선임 과정에도 국정원이 개입했다는 폭로가 있다. 문화예술인 이름 뒤에 알파벳 K나 B가 적혀 있는 새로운 블랙리스트도 발견됐다. 지난해 초 작성된 이 블랙리스트에서 K는 국정원, B는 청와대의 지시에 따라 선정된 것으로 추정된다. 앞서 특검은 문화체육관광부 압수수색을 통해 국정원과 문체부 직원들이 “진보성향 문화예술단체에 대한 경제적 지원을 배제해야 한다”는 내용의 e메일을 주고받은 사실을 확인했다.

특검은 국정원의 불법과 일탈이 드러난 이상 좌고우면할 필요없다. 특검법은 게이트 수사 과정에서 인지한 사건을 수사할 수 있다고 명시하고 있다. 특검은 국정원에 대한 압수수색 등 전면 수사에 착수해야 한다. 대통령 탄핵을 계기로 국정원 개혁을 요구하는 목소리가 높다. 국정원은 국가안전보장과 관련되는 정보·보안 및 범죄수사에 관한 사무를 담당하는 국가 최고의 정보기관이다. 막대한 인력과 예산 지원을 받고 있지만 국가안보를 명목으로 모든 것이 베일에 싸여 있다. 정권에 악용될 우려가 있어 무엇보다 중립이 중요하지만 현재로서는 시민들이 감시하고 통제할 방법이 전무하다. 특검 수사가 국정원의 게이트 개입 의혹을 규명하고 관련자와 책임자를 처벌해 국정원 개혁과 인적 청산의 계기가 되기를 기대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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당시 사무관 ㄱ씨의 표정은 어두웠고, 눈빛은 다소 지치고 불안해 보였다. ㄱ씨는 서류가방에서 꺼낸 파일을 매우 조심히 은밀하게 다뤘다. 제대로 펼쳐 보여주지는 않았지만 엑셀 파일을 프린트한 서류에는 문화예술인들의 이름이 빼곡히 적혀 있었다.

ㄱ씨는 급기야 한 카페에서 불만과 고민을 털어놓았다. 선배들도 ‘이런 것’은 처음이어서 당혹스러워하고 있다, 앞으로 지침에 따라 어떻게 문화예술 현장에서 적용할지 걱정된다는 얘기였다. 문화체육관광부 사무관 ㄱ씨는 상급자에게서 건네받은 그 리스트를 산하기관 현장에 가져와 전달하고 적용토록 해야 하는 책임이 있었다. 리스트에 오른 문화예술인들을 각종 지원공모에서 떨어뜨려 배제시키려면 최종 심사 결과를 조작해야 하는 난관이 있었다. 수십명, 수백명도 아닌 수천명의 사람들을 합법적인 과정으로 제외시키기란 사실상 불가능한 일이었을 것이다.

20대의 젊은 사무관 ㄱ씨는 2015년 가을 대학로에서 그렇게 자신의 책무와 무언가 불의하다고 느껴지지만 거역할 수 없는 힘 사이에서 방황하고 있었다. 사무관 ㄱ씨의 사례는 해당 문체부 산하기관에서 근무한 전직 관계자가 경향신문 기자에게 증언한 내용이다. 사무관 ㄱ씨는 현재 세종시 문체부 청사에서 근무하고 있다.

8일 문화계 블랙리스트 작성에 관여한 의혹을 받는 김종덕 전 문화체육관광부 장관(왼쪽 사진)과 김상률 전 청와대 교육문화수석(오른쪽)이 피의자 조사를 받기 위해 박영수 특별검사 사무실에 출석하고 있다. 이석우 기자 foto0307@kyunghyang

거대한 블랙리스트의 실체가 하나둘 진실을 향해 달려가고 있다. ‘박근혜·최순실 국정농단’ 청문회가 TV로 중계될 때마다 거짓말하려는 자들과의 진실공방을 지켜본다. 김기춘 전 대통령비서실장, 조윤선 문체부 장관 등 핵심 관계자들은 여전히 모른다고 주장하지만 이들의 증언이 거짓이라는 정황은 특검에서 속속 밝혀지고 있다. 문체부의 전·현직 장관과 차관, 국·실장들이 줄줄이 참고인이나 피의자 신분으로 소환되고 또는 구속되는 초유의 사태가 벌어지고 있다.

비밀스럽게 다뤄졌다지만 시간이 지날수록 블랙리스트와 관련 있는 사람들의 수도 점점 늘어나고 있다. 핵심 고위직뿐 아니라 몇년차 되지 않은 젊은 사무관까지 ‘거대한 블랙의 소용돌이’에 가담돼 있다. 공무원뿐 아니다. 민간인들도 ‘나와 무관하지 않다’며 입을 열기 시작했다. 심지어는 지역의 작은 교육기관 인문학 강좌 담당자조차 국정교과서에 반대 서명을 한 강사들을 깨알같이 걸러냈다. 정부 예산이 1원이라도 집행되는 곳이면 작품이든, 사람이든, 프로그램이든, 간행물이든 그물망을 벗어나지 못했다.

블랙리스트는 권력과 탐욕에 눈먼 자들의 손에서 시작됐지만 현장에서 ‘피를 묻힌’ 실무자들은 자신의 일상적인 업무공간에서, 평소 알고 지내던 사람들을 대상으로 최소 1~2년간 지속적으로 실행했다. 그들이 스스로의 이성적 판단을 내면 깊은 곳에 밀어넣은 채 비정상적인 업무를 침묵하며 수행한 이유는 무엇일까. 그들이 “국가에 의해 합법화된 범죄의 시대”를 살고 있었기 때문일 것이다.

수많은 ‘부역자’를 양산한 박근혜 정권에서 한나 아렌트의 <예루살렘의 아이히만>이 자연스레 떠오른다. 유대인 학살 핵심 책임자로 재판받은 아이히만을 두고 아렌트가 정의한 ‘악의 평범성’은 이후 수많은 논쟁을 불러일으켰지만, 여하튼 ‘평범성’이란 단어가 취재 현장에서 만난 적지 않은 부역자들의 평범한 모습들과 겹쳐지기 때문이다.

블랙리스트 관계자로 지목되고 있는 문체부 ㄴ씨는 예의 바르고 성실한 인물로 평판이 나 있었다. ㄴ씨는 최근 자리에서 물러나기 전 마지막 공무수행 때도 겸손한 자세로 제 역할을 했다. ㄴ씨는 취업을 위해 여러번 낙방의 고배를 마시기도 했고, 나중에는 죽을힘으로 공부해 고시에 합격한 평범한 사람이었다. 또 다른 관계자 ㄷ씨는 평소 느지막이 시작한 피아노 연주를 자랑하길 좋아했다. ㄷ씨는 평범한 사람들도 열정만 있으면 음악이든 뭐든 새로 시작해 삶의 성취와 즐거움을 이룰 수 있다고 자주 말하곤 했다.

ㄱ씨, ㄴ씨, ㄷ씨 그리고 아직 드러나지 않은 블랙리스트와 관련된 많은 사람들…. 그들은 지금 어떤 생각으로 이 시대를 지나고 있을까. 일상에서 이뤄진 ‘악의 평범성’은 특별하지 않다는 그 특별함 때문에 더 두렵게 느껴진다.

블랙리스트의 어두운 장막이 명명백백히 거둬진다고 해도 우리 사회가 경험한 비이성적인 인식과 행위의 잔해가 어딘가에 살아남아, 비슷한 상황이 반복됐을 때 불현듯 아무렇지도 않게 재현되는 것은 아닐까. 문체부는 블랙리스트와 관련해 ‘대국민사과’를 고민하고 있다고 한다. 사과로 끝날 일이 아니라는 것을 우리는 안다.      

우리 모두를 “범죄의 시대”에 몰아넣은 이들에 대한 확실한 단죄만이 두려움을 몰아낼 것이다.

김희연 문화부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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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osted by KHross