비선 실세 국정농단의 몸통은 결국 박근혜 대통령이었다. 정치적으로, 박근혜 ‘대통령’은 이미 없다. 법적으로만 간신히 대통령직을 유지하고 있는 본인만 이 현실을 거부하고 있다. 대통령이 불법과 비리를 지속적으로 저질러온 정황이 명백히 드러났으니, 그동안 온갖 의혹과 반대에도 대통령이 앞장서 밀어붙였던 정책들은 전면 재검토되어야 한다. 그런데도 문제의 정책들은 이전과 변함없이, 아니 더욱 신속히 진행되는 것 같다.

교육부는 국정 역사교과서를 예정대로 28일에 공개하겠다고 한다. 국정화 추진은 학생과 교사, 대부분의 역사학자를 비롯한 수많은 국민의 분노와 저항을 불러일으켰던 사안이다. 그리고 국정화의 선봉에는 대통령이 있었다.

지난해 12월 일본군 위안부 밀실·굴욕 협상은 외교부 장관이 반대했지만 대통령이 밀어붙인 정황이 드러났다. 대통령의 행태를 보면 충분한 개연성이 있지만, 외교부 당국자는 사실무근이라며 시치미를 뗀다. 여성가족부는 반성과 사과가 먼저라는 비판은 외면하고 피해 할머니들에게 위로금 지급만 서두른다. 환경부는 강원 양양군의 설악산 케이블카 사업 환경영향평가서를 통과시켰다. 국회 환경노동위원회가 국정감사에서 반려하라는 결론을 내린 조작·부실 평가서였다. 국회의원, 양양군, 한국환경정책평가연구원이 공동 현장검증을 실시한 지 이틀 만이었다. 설악산 케이블카는 사업신청서가 제출되기도 전에 대통령이 두 번씩이나 적극 추진을 지시했다.

최재경 청와대 민정수석과 김현웅 법무부 장관의 사의 표명이 알려지고 새누리당 김무성 전 대표가 탄핵 주도를 선언한 23일 서울 광화문 사거리 뒤편으로 청와대 본관 건물이 보이고 있다. 서성일 기자 centing@kyunghyang.com

한·일 군사정보보호협정은 여건 조성이 우선이라는 입장에서 돌변해 국무회의 의결과 대통령 재가, 양국 서명을 순식간에 해치워버렸다. 지난 이명박 정부 때도 밀실협상 논란으로 막판에 무산됐던 사안이다. 대통령이 진두지휘했던 갑작스러운 ‘사드’ 배치 결정은 도저히 납득할 수 없는 일이었고, 그만큼 격렬한 반발과 분노를 샀다. 하지만 국방부는 롯데의 경북 성주골프장과 경기 남양주의 국유지를 맞바꾸면서 사드의 조기 배치에 열을 올리고 있다.

지난 21일 검찰은 민주노총 한상균 위원장의 항소심 결심공판에서 징역 8년을 구형했다. 1심 형량인 징역 5년이 너무 가볍다는 것이다. 작년 민중총궐기의 근원이었던 박근혜 정권 폭정의 실태가 훤히 드러난 지금도 검찰의 현실 인식은 여전하다.

아우슈비츠의 생존자 프리모 레비의 말이 떠오른다. “괴물이 없지는 않다. 그렇지만 (중략) 그보다 더 위험한 것은 평범한 사람들이다. 의문을 품어보지도 않고, 무조건 믿고 행동하는 기계적 인간들 말이다.”(홍세화, <생각의 좌표>) 눈에 띄는 괴물이라면 맞서 싸울 수는 있다. 하지만 괴물을 무조건 추종하는, 눈에 띄지 않는 수많은 ‘기계적 인간들’과 일일이 싸울 수는 없다. 이런 절망적 현실 때문에 지옥에서도 살아남았던 레비가 노년에 자살했는지도 모르겠다.

우리 사회 현실도 썩 달라 보이지 않는다. 괴물을 따르는 평범한 사람들이 땅에서 갑자기 솟아날 리 없다. 이들도 결국 교육의 결과다. 대입과 취업이 지상 목표가 되어버린 교육 현실에서, 아이들은 자기 생각이 아니라 주어진 문제의 ‘정답’을 맞히는 능력을 키우도록 강요된다. 자율적·비판적 사고 능력은 퇴화되고, 지시받은 업무를 충실하고 효율적으로 수행하는 ‘실무형’ 인간이 만들어진다. 자기가 노예이면서도 노예인지 모르는 인간 말이다.

이런 현실을 감안하면, 요즘 광장에서 만나는 우리 아이들의 모습은 참으로 놀랍고, 반갑고, 고맙다. 무엇보다 미안하다. 이제는 정말 학교 교육의 패러다임을 바꿔야 한다. 부패한 권력일수록 학교 교육을 통제해 아이들을 기존의 현실에 순응하는 ‘기계적 인간들’로 키우려 한다. 자유롭고 비판적 사고의 숨통을 옥죄는 학교, 영혼을 없애는 교육에 우리 아이들을 더 이상 맡겨 놓을 수는 없다. 광장에서 아이들이 보여준 놀라운 가능성을 직접 만나고 돌아올 때마다 드는 간절한 바람이다.

조현철 서강대 교수·신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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박근혜 대통령의 지난 3년8개월 재임 동안 비선 세력의 국정농단 사실이 속속 드러나고 있다. 하지만 여전히 장막에 덮인 의혹이 있다. 2014년 4월16일 세월호 참사 때 박 대통령의 7시간 행적이다. 박 대통령은 당일 오전 10시30분 전화로 구조 지시를 했고, 오후 5시15분에야 중앙재난안전대책본부에 모습을 드러냈다. 그사이 박 대통령이 무엇을 했는지를 놓고 굿, 성형수술 등 억측이 제기돼왔다.

4·16세월호참사가족협의회와 4·16연대 회원들이 서울 광화문 광장에서 시국선언을 하고 있다. 이상훈 기자

여당 새누리당은 ‘대통령 사생활 보호’를 주장하며 정보 공개를 막았고, 청와대는 “청와대에서 업무를 봤다”고만 해왔다. 최근 의혹이 다시 불거지자 청와대는 당일 오전 10시36분부터 오후 5시11분까지 “15차례 보고를 받았다”고 밝혔다. 성형수술 의혹에는 담당 의사의 골프장행을 알리바이처럼 대고 있다. 그러면서도 청와대 어디에서 누구와 무엇을 했는지, 대면보고는 왜 안 받았는지, 대책수립 지시는 무슨 연유로 내려가지 않았는지 답하지 않고 있다. 구속된 정호성 전 청와대 부속비서관만 검찰 조사에서 “대통령은 관저에 있었다”고 말했을 뿐이다.

295명이 숨지고 9명이 실종된 세월호 참사는 정부가 무능하다는 사실을 넘어 시민의 생명을 위협할 수도 있는 존재라고 느끼게 한 사건이다. 행정부 수반이자, 시민 안전의 최종 책임자인 대통령이 참사가 난 평일 근무시간대 집무실이 아닌 관저에서 무엇을 했는지 묻는 것은 주권자 시민으로서의 당연한 권리이다. 대통령 또한 자신에게 권력을 위임한 시민이 궁금해하는 사안에 대해 소상하게 답해야 한다. 그건 선택이 아니라 책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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박근혜 대통령과 비선 실세 최순실씨의 국정농단에 분노한 시민 20만명이 지난 주말 촛불을 들고 서울 광화문 거리를 가득 메운 채 박 대통령의 퇴진을 외쳤다. 촛불은 전국은 물론 해외에서까지 타올랐다. 촛불 시민 사이에는 교복 차림의 중·고교 학생들도 있었다. 기회의 균등을 보장하기는커녕 불평등을 조장한 대통령에게 절망한 미래 세대까지 거리로 나선 것이다. 박 대통령을 지지했던 70대 노인들도 길 위에 섰다. 한 노인은 “박 대통령에게 줬던 한 표를 되돌려받으러 왔다”며 배신감을 토로했다. 그야말로 지역과 나이, 이념을 넘어 시민들이 한목소리로 박 대통령에게 물러날 것을 요구하고 있다.

시민들이 박 대통령의 퇴진을 외치는 이유는 하나다. 민주공화국의 복원이다. 민주국가에서 대통령은 국가 시스템의 일부일 뿐, 무한대의 권력을 위임받은 제왕이 아니다. 시민의 생명과 재산을 보호하기 위해 국가권력을 사용하고 관료조직을 이끌 권한을 일시적으로 부여받은 대표 ‘공복’인 것이다. 국민은 대통령이 위임받은 대로 역할을 제대로 수행하는지 감시하고, 그러지 못할 경우 책임을 물을 권한이 있다. 지금 시민들은 박 대통령의 통치행위가 위임받은 범위를 벗어났다고 판단하고 헌법적 권리에 따라 박 대통령에 대해 ‘즉각 퇴진’이라는 이름으로 책임을 묻고 있는 것이다.

박 대통령이 민주국가의 통치자로서 자격을 상실했다는 증거는 다 열거하기 어려울 정도이다. 공적인 참모조직은 한낱 껍데기일 뿐 비선을 중심으로 국가를 운영해온 것 하나만 갖고도 물러나야 한다. 그것도 모자라 시민을 위해 봉사해야 할 관료조직과 노동자의 피땀이 담긴 기업의 이익을 비선조직의 사적인 이득을 챙기는 데 동원했다. 엊그제는 재벌 총수들과 독대하면서 비선이 꾸린 재단에 돈을 내라고 한 데 이어 수백억원의 추가 모금까지 지시한 정황이 폭로되었다. 정경유착이라는 말로도 표현하지 못할 정도의 국기문란 행위다. 그런데 이 모든 불법과 편법을 동원하고도 박 대통령은 경제와 민생을 살리지 못했다. 외교도 미국과 중국 사이를 오락가락하다 신뢰를 잃었다. 북한 핵과 미사일 개발은 막지 못하고 남북관계를 최악으로 몰고 갔다. 민주적 리더십은 고사하고 무능하고 부도덕하기까지 한 박 대통령을 국가의 통치자로 인정하지 못하겠다는 시민의 외침은 너무나 정당하다.

대규모 촛불집회에도 시민들은 경찰과 충돌하지 않는 등 성숙한 시민의식을 보였다. 시민들은 절제된, 그러나 확고한 태도로 박 대통령의 퇴진을 요구했다. 시간을 끈다고 해서 바뀔 민심이 아니라는 의미다. 이 같은 상황은 전적으로 박 대통령 본인이 자초한 것이다. 박 대통령은 야당과 협의해 국정을 이끌어가라는 민의를 무시한 채 연이틀 동안 국무총리와 대통령 비서실장을 기습적으로 지명했다. 그래 놓고 야당과 협력하겠다는 모순된 태도를 보였다. 이러니 박 대통령이 새롭게 내놓은 제의가 신뢰받지 못하는 것은 당연하다. 엊그제 청와대는 내정과 외치를 분리해 박 대통령이 외치만 맡는다고 했지만, 정작 박 대통령은 이를 공개적으로 약속하지 않았다. 박 대통령의 권력 집착은 스스로 물러날 수 없다는 김병준 총리 지명자의 태도에서도 드러난다. 말로는 책임을 통감한다면서 실제로는 시간을 끌어 위기에서 벗어나려는 박 대통령을 평범한 시민들조차 믿지 못하겠다며 저항에 나선 것이 촛불집회다.

박 대통령 통치의 본질이 바뀌지 않는다는 것을 국민은 다 안다. 박 대통령은 지난 4월 총선 때도 여소야대의 민의를 받아들이는 척하다가 언제 그랬느냐는 듯 다시 독주했다. 박 대통령에게 더 이상의 기회는 없다. 지금 멈춰 선 국정을 정상화하는 길은 박 대통령이 하루빨리 물러나는 것뿐이다. 여당 의원도 “제2의 4·19가 오는데 박 대통령과 당 지도부는 심각성을 모르고 있다”고 했다. 95%의 시민들이 신뢰를 접은 박 대통령이 남은 임기 1년4개월을 계속 통치하는 것은 국가적인 비극이다. 박 대통령이 답해야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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박근혜 대통령이 이틀 연속 ‘깜짝 인사’를 단행했다. 그제는 노무현 대통령의 청와대 정책실장이던 김병준 국민대 교수를 국무총리로 지명하더니, 어제는 김대중 대통령 비서실장이던 한광옥 국민대통합위원장을 자신의 비서실장에 앉히겠다고 발표했다. 인사권을 휘둘러 ‘박근혜·최순실 게이트’를 덮고 분노한 민심을 막을 수 있다고 생각하는 듯하다. 이번 인사는 절차와 과정도 문제지만, 예상외 카드로 자신이 처한 위기를 모면해보려는 그 저의가 노골적이다. 박 대통령의 독단과 독선은 이제 섬뜩하기까지 하다.

그제 김병준 교수 지명을 놓고 정치권은 물론 시민사회에서도 분노가 거세졌다. 시민들로부터 퇴진 압박을 받으면서도 여야, 국회와의 협의 절차를 거치지 않은 채 인사권을 휘두르는, 여전한 오기와 독선 때문이다. 야당과 인연을 가진 인물을 내세워 야권 분란은 물론 김 교수가 주장해온 이원집정부제 등 개헌으로 시선 전환을 꾀하려 했음이 명백하다. 그래 놓고 여야에 인선안을 받으라고 요구했으니 대통령 퇴진 목소리는 더 높아질 수밖에 없다.

한광옥 신임 대통령 비서실장(오른쪽에서 두번째)과 허원제 신임 정무수석(오른쪽)이 3일 임명 발표 후 청와대 출입기자들과 인사하기 위해 춘추관을 향해 걸어가고 있다. 청와대사진기자단

그런데도 박 대통령은 아랑곳하지 않고 또 깜짝 인사를 단행했다. 한광옥 국민대통합위원장을 대통령 비서실장으로 임명한 것이다. 청와대 정연국 대변인은 “화해와 포용의 가치를 바탕으로 어려운 시기에 대통령을 국민적 시각에서 보좌하며 안정적으로 국정을 운영하는 데 적임이라고 판단했다”고 말했다. 한데 한 위원장이 국민 대통합을 이뤘다는 이야기는 들어본 바도 없다. 이제 와서 그가 박 대통령과 마주 앉아 시민의 의견을 제대로 전달해줄지도 의문이다.

박 대통령은 이 같은 오불관언 인사로 여야 할 것 없는 비판에 직면했다. 새누리당에서도 “국회와의 협의 없이 총리를 지명하여 갈등이 고조된 그 다음날 비서실 인선을 강행했다. 비서실 인선 시기를 이렇게 잡은 것은 대통령의 일방 독주 선언”(하태경 의원)이라는 비난이 나왔다. 결국 청와대와 새누리당 내 일부 친박계만 환영하는 인사가 돼버렸다.

박 대통령은 ‘통합과 화합’ 명찰을 단 인물을 내세워 현 국면을 바꿀 수 있다고 생각하는 듯하다. 하지만 눈 밝은 시민이 그런 잔수를 못 알아볼 리가 없다.

최근 주말 날씨를 알아보는 시민들이 부쩍 늘었다고 한다. 5일 열리는 ‘모이자! 분노하자! #내려와라 박근혜 2차 범국민행동’ 문화제에 참석하기 위해서란다. 그만큼 시민의 분노가 턱밑까지 찼다는 사실을 박 대통령은 뼈아프게 자성해야 한다. 박근혜·최순실 게이트 ‘방탄용’ 인사권을 거두고, 국정 방향과 자신에 대한 조사 방법을 국회와 논의하는 게 그나마 정도일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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박근혜 정권 비선 실세 최순실씨의 구속영장이 어제 청구됐다. 대통령 최측근인 안종범 전 청와대 정책조정수석은 피의자 신분으로 검찰에 출석했다. 이제 박 대통령의 운명은 이 두 사람의 세 치 혀끝에 달렸다 해도 과언이 아니다. 미르·K스포츠 재단 관계자들은 배후가 청와대라고 검찰에서 밝혔다. 당초 청와대 개입을 부인한 이승철 전국경제인연합회 부회장도 검찰에서 안 전 수석의 지시로 재벌에 기금을 강요했다고 실토했다. 안 전 수석은 검찰 출석에 앞서 ‘미르·K스포츠 재단 설립 등은 대통령 지시를 받고 한 일’이라고 측근에게 전했다는 보도가 나왔다. ‘박근혜·최순실호’에 몸을 실었던 사람들에 의해 사건의 실체가 조금씩 모습을 드러내고 있다.

이번 사건의 본질은 ‘박근혜 게이트’다. 박 대통령은 시민으로부터 위임받은 통치권을 일개 민간인에게 넘겨 국정문란을 초래했다. 그에 따라 발생한 각종 불법과 비리가 박 대통령이 지시한 결과라는 사실도 박 대통령 참모와 재벌 측에 의해 분명히 드러났다. 최순실씨 패거리를 공직자로 등용하고 최씨의 비행을 지적한 공무원들의 목을 친 당사자도 바로 박 대통령이다. 박 대통령이 아니면 박근혜 게이트의 전모를 밝힐 사람이 없다. 그런데도 지금껏 진솔한 사과 한마디 없다.

박 대통령은 알아야 한다. 피해자 행세나 깜짝 개각의 꼼수는 더 이상 통하지 않는다. 스스로 진실을 밝히고 검찰 수사를 자청하는 것 외에는 길이 없다. 그것이 국민에 대한 최소한의 예의이고, 아버지의 명예를 그나마 지키는 방법이기도 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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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류가 신발을 신기 시작한 것은 대략 2만5000년 전으로 추정된다. 신발은 인류가 수천년에 걸쳐 이주하고, 정착하는 과정에서 뜨거운 사막의 모래, 집중호우, 얼음과 눈으로 덮인 고원지대를 견뎌내기 위한 생존도구였다. 또한 신발은 몸을 장식하거나 계급을 나타내는 수단이기도 하다. 조선시대 양반집 여성들은 주로 가죽과 비단으로 만든 당혜와 운혜, 남성들은 관복을 입을 때 목화나 흑피혜를 신었다. 평민은 평상시엔 짚신, 비오는 날엔 나막신, 추운 겨울엔 설피를 신었다.

비선실세 최순실씨가 31일 피의자 신분으로 조사를 받기 위해 서울 서초동 서울중앙지검으로 들어서며 벌이진 취재진과 검찰 직원의 몸싸움에 벗겨진 신발이 놓여 있다. 강윤중 기자

한국 현대사에는 주인을 잃고 남겨진 신발에 얽힌 일화들이 적지 않다. 1979년 가발수출업체 YH무역은 경영난에 빠지자 노동자를 해고한 뒤 폐업공고를 냈다. 그러자 여성노동자 200여명은 그해 8월 9일 신민당사에 들어가 폐업철회를 요구하며 농성을 벌였다. 결국 경찰이 강제진압했고, 그 과정에서 21살 김경숙씨가 사망하고 여성노동자 170여명은 신발도 신지 못한 채 연행됐다. 그들이 끌려간 자리에는 주인을 잃고 남겨진 신발들만 가득했다. YH사건은 유신정권의 몰락을 부른 10·26사태의 도화선이 됐다.

1980년대 전두환 정권 시절 민주화를 요구하는 시위가 잇달았던 대학가에도 남겨진 신발들이 많았다. 경찰이 최루탄을 쏘며 진압에 나서면 학생들은 신발이 벗겨진 줄도 모르고 몸을 피했다. 경찰은 시위가 끝나면 아스팔트 위에 남겨진 신발을 수거해 시위참여 학생을 검거하는 데 활용했다. 지난해에는 1987년 6월 경찰이 쏜 최루탄에 머리를 맞아 숨진 이한열 열사의 ‘타이거 운동화’가 28년 만에 복원됐다. 당시 시위현장에 나뒹굴던 왼짝 운동화는 찾지 못했다. 오른짝 운동화는 이 열사의 누나가 유품으로 보관하고 있다가 원형 그대로 복원됐다.

지난달 31일 국정을 농단한 ‘비선 실세’ 최순실씨가 검찰청사로 들어가면서 벗겨진 구두가 70만원짜리 명품 ‘프라다’로 알려졌다. 누리꾼들은 영화 <악마는 프라다를 입는다>에 빗대 “악마는 프라다를 신는다” “순데렐라는 프라다를 신는다” 등과 같은 비난과 조롱 섞인 글들을 인터넷에 잇달아 올렸다. 주인 잃은 신발이라도 다 같은 게 아니다. 누가, 무엇을 하다 남긴 것인가에 따라 의미가 다르기 때문이다.

박구재 논설위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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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금 대한민국에선 대통령이 범죄의 몸통이고, ‘비선 실세’가 국정을 농단한 사상 초유의 ‘박근혜 게이트’로 국민들의 분노가 들불처럼 번져가고 있습니다. 나라를 쑥대밭으로 만든 최순실이 검찰에 출석하면서 “국민 여러분, 죽을죄를 지었습니다. 용서해주십시오”라고 말하는 뻔뻔함에 오물을 뒤집어쓴 듯한 모멸감을 느꼈다는 시민들이 적지 않습니다. “박근혜는 물러나라, 최순실은 하야하라!”는 시위 구호가 ‘신정통치’의 장막을 걷어내라는 ‘정언명령’처럼 들리는 기막힌 현실을 어떻게 받아들여야 할까요.

그런 ‘최순실의 나라’에서 경찰이 쏜 물대포를 맞고 쓰러진 뒤 317일간 사경을 헤매다 숨을 거둔 백남기 농민은 영정 속에서 편안한 표정을 짓고 있습니다. 두말할 나위 없는 ‘물대포 살인’을 저지른 경찰은 백남기 농민 사망 이후 한 달간 온갖 ‘패륜 행위’를 일삼다 시신 부검영장을 재청구하지 않기로 했더군요. 국가 폭력에 의해 희생된 아버지를 광주 5·18 구묘역에 모실 세 남매의 형언할 수 없는 슬픔을 그 누가 헤아릴 수 있을까요?

지난달 31일 밤 긴급체포된 최순실씨가 이틀째 검찰 조사를 받기 위해 1일 오전 서울중앙지검에 들어서고 있다. 연합뉴스

제 소개가 늦었습니다. 1998년 세상을 뜬 독일의 소설가 잉게 숄입니다. 히틀러의 폭압정치에 맞서 저항운동을 펼쳤던 대학생 단체 ‘백장미’에서 활동하다 게슈타포에 체포돼 1943년 2월 처형된 한스 숄과 조피 숄의 누나이자 언니입니다. 기억을 되살리고, 자료를 모아 두 동생의 짧지만, 강렬했던 삶을 기록한 책이 <백장미(Die Weisse Rose)>입니다. 한국에선 1978년 <아무도 미워하지 않는 자의 죽음>이란 제목을 달고 출간됐지요. 당시 한국 대학가에선 ‘아미죽’이란 줄임말로 불렸고, 금서로 묶이기도 했다지요?

남동생 한스와 여동생 조피가 단두대의 이슬로 사라진 것은 24살과 21살 때였습니다. 의사가 되려 했던 한스는 뮌헨대 의대에 들어갔고, 조피는 뮌헨대 철학과에 진학합니다. 자유를 옭아매는 독재권력의 족쇄가 조여오고, 수많은 지식인들이 집단수용소로 끌려가면서 두 동생은 나치 정권에 대한 저항의식을 지니게 됐고, ‘백장미’를 결성하게 됩니다. 백남기 농민이 1968년 중앙대 행정학과에 입학한 뒤 전국대학생연맹에 가입해 유신 독재정권에 항거한 것과 흡사합니다.

1942년 뮌헨대 교정에 ‘백장미’ 문장이 새겨진 전단이 뿌려집니다. 전단에는 “한 나라의 국민으로서, 무책임하고 어두운 충동에 빠진 통치자에게 아무런 저항도 하지 않고 무기력하게 지배당하는 것보다 굴욕적인 일은 없다”고 쓰여 있었지요. 지난해 11월14일 민중총궐기대회에 참석하기 위해 상경했던 백남기 농민도 같은 심정이었겠지요. 한 나라의 농민으로서 무책임하고, 어두운 충동에 빠진 통치자에게 굴욕당하지 않으려 차벽을 무너뜨리기 위한 밧줄을 잡았을 겁니다.

1943년 2월 뮌헨대 건물 3층에서 ‘백장미’ 전단을 뿌리던 한스와 조피는 잠복해 있던 게슈타포에 체포돼 즉결심판에 회부된 지 나흘 만에 단두대에 오르게 됩니다. 처형되기 전 한스는 감옥 벽에 “모든 폭력에 굴하지 않겠다”고 썼고, 조피는 “자유!”라는 글을 새겨 넣었지요. 한스와 조피의 처형 10주기였던 1953년 2월 테오도어 호이스 독일연방 초대 대통령은 추도사에서 “독일의 비극 속에 뛰어든 그들의 행동은 암흑의 시대를 밝히는 등불이었다”고 했습니다. 하지만 반인륜적 폭거를 자행한 박근혜 정부는 사과는커녕 백남기 농민을 능욕하고, ‘병사(病死)’ ‘안락사’ ‘부작위에 의한 살인’ 등을 거론하며 유족에 대한 최소한의 예의조차 갖추지 않았습니다. 경찰은 당시 상황보고서에 ‘물대포에 의한 부상’ 등으로 적어놓고도 “파기했다”고 거짓말을 하고, 부검영장이 기각되자 ‘빨간 우의’ 타살 의혹까지 포함시켜 부검영장을 재청구했지요. 나치 체제를 견뎌냈던 저도 소름이 돋을 지경입니다.

70여년 전 나치 폭정에 시달렸던 독일 국민들이 그랬듯이 대한민국 국민들은 ‘자격 없는’ 대통령이 국가의 근본을 무너뜨려 패닉 상태에 빠져 있습니다. 수많은 시민들이 “이게 나라인가”라는 장탄식과 함께 ‘하야’ ‘탄핵’을 입에 올리고, 시민사회와 대학에선 시국선언이 줄을 잇고 있습니다. 한스와 조피가 어렸을 때 아버지가 해주셨던 “히틀러는 독일 민족을 파멸로 몰고 갈 거야”라는 말이 “박근혜와 최순실, ‘문고리 3인방’이 대한민국을 파멸로 몰고 가는 것 아닌가”라는 불길한 예감과 겹쳐집니다. 지난 주말 전국 곳곳에서 열린 최순실 국정농단 규탄 집회에 참가한 시민들은 “아바타 정권 퇴진” “박근혜 하야” 등을 외치며 대통령의 결단을 촉구했습니다. 시민들이 대통령의 결단을 요구하는 것은 더 이상 굴욕당하지 않으려는 간절함 때문이 아닐까요? 아무도 미워하지 않았지만 폭력 정권에 희생된 한스와 조피, 백남기 농민이 그토록 바랐던 것처럼….

박구재 기획·문화에디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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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경찰에 방패를 돌려주세요!”

지난 29일 오후 8시40분. 비선 실세 최순실 게이트와 관련해 박근혜 대통령의 하야를 요구하는 시민 2만여명이 모인 서울 종로구 광화문광장 세종대왕 동상 앞. 일부 시민이 대치하고 있던 경찰관의 방패를 빼앗았다. 근처에 있던 20~30대 시민들은 “방패를 돌려줍시다”라고 외치며 방패를 머리 위로 파도타기 하듯 넘기면서 경찰에 돌려줬다.

31일 오전 서울 광화문광장에서 사무금융노조가 연 '박근혜 하야 촉구 시국선언 기자회견'에서 참가자들이 성역 없는 철저한 수사를 촉구하고 있다. 연합뉴스

10분 뒤 “당신들 프락치 아니냐. 평화롭게 해서 청와대 어떻게 가느냐”고 외치며 시민들의 행진을 막아선 의경을 끌어내려는 움직임이 있었다. 이번에도 많은 시민들이 “때리지 맙시다” “폭력으로 충돌 일어나지 않게 서로 어깨동무 합시다”라고 말하며 경찰과 집회 참가자들의 물리적 충돌을 막아냈다.

시민들이 하나둘씩 해산하기 시작한 밤 10시쯤에는 흰색 대형 쓰레기봉투를 들고 다니며 “쓰레기 여기 버려주세요”라고 외치는 시민들도 등장했다. 그 덕택에 수많은 인파가 머물다 간 거리는 깔끔했다.

경찰은 30일 “시민들이 경찰의 안내에 따라주고 이성적으로 협조해준 것에 대해 감사하다”며 “향후에도 성숙한 시민의식으로 준법 집회시위 문화가 정착되길 기대한다”고 밝혔다. 이 같은 경찰의 이례적 발표에 정부가 덧씌운 ‘불법·폭력 시위’ 프레임에 말려들었다는 주장도 있다. 지금껏 시위를 사전봉쇄하는 데 주력하며 헌법이 보장한 권리인 집회와 시위의 자유를 억눌러온 경찰과 보수언론의 악의적인 프레임에 갇혀 시민들의 분노에 찬 목소리가 제대로 전달되지 못한 것 아니냐는 우려다.

이런 지적과는 별개로 현장에서 마주친 시민들은 냉정함을 유지했다. 사회 전체가 분노로 들끓고 있기에 자칫 경찰과 시민들 사이 충돌 가능성도 배제할 수 없는 상황이었다. 시민들은 평화시위의 상징으로 어깨동무를 하고 “박근혜 대통령 하야”를 주장했다. 위법과 탈법을 서슴없이 저질렀던 최순실씨와 청와대를 상대로 시민들은 냉철하고 이성적으로 반응했다. 누가 비정상이고, 누가 정상인가.

김원진| 사회부  onejin@kyunghyang.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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독일에 은거해온 박근혜 정권 비선 실세 최순실씨가 어제 오전 극비리에 귀국했다. 최씨의 측근으로 중국에 머물던 ‘문화계의 황태자’ 차은택씨도 “귀국해서 검찰수사를 받겠다”고 밝혔다. 청와대 권력을 등에 업고 장관 인사와 국가예산, 재벌기업을 주무르며 국정을 농단한 두 사람이 서로 입을 맞춘 듯 조기 귀국으로 선회한 것이다. 특히 두 사람이 돌연 귀국의사를 밝힌 지난 28일 밤 박 대통령은 청와대 수석비서관 전원에 대해 일괄 사표 제출을 지시했다. 검찰은 박 대통령의 지시가 나오자 기다렸다는 듯 바로 다음날 청와대에 압수수색을 벌였다. 누군가에 의해 짜인 각본처럼 국정농단 비리의 두 주범과 청와대, 검찰이 일사불란하게 움직인 것이다.

30일 오전 최순실씨가 인천공항을 통해 극비 입국하는 장면이 한 시민의 휴대폰 카메라에 찍혔다. 연합뉴스

문제는 이런 일사불란함이 ‘성역없는 수사’보다는 ‘파문 축소’에 맞춰진 듯 석연찮은 행보로 나타나고 있다는 점이다. 검찰은 법원에서 영장을 발부받고도 압수수색 방식을 놓고 청와대와 이틀 연속 입씨름만 하며 시간을 허비했다. 그사이 청와대 비선 실세로서 특권을 마음껏 누리던 최씨는 극비리에 입국해 언론에 전혀 노출되지 않은 채 공항을 빠져나갔다. 검찰이 알고도 봐준 것인지, 모르고 있다 놓친 것인지 알 수 없지만 어느 쪽이라도 납득하기 어려운 상황이 아닐 수 없다. 최씨는 입국 직후 변호사를 통해 검찰에 ‘하루 정도 몸을 추스를 수 있는 시간을 달라’고 했고 검찰은 곧바로 ‘오늘은 소환하지 않겠다’고 호응했다. 최씨 측과 검찰 수뇌부가 귀국 전에 사전 교감이 없이는 가능하지 않은 일이다. 최씨의 돌연 귀국과 일련의 움직임이 진상규명을 위한 자발적 행동이라기보다 조직적 은폐를 위해 이번 사태를 지휘하는 사령탑이 있는지 의심케 하는 대목이다.

하루라도 빨리 피의자의 신병을 확보해 ‘말맞추기’나 ‘증거은폐’의 기회를 차단하는 것은 수사의 기본이다. 하지만 그동안 미적거리던 검찰의 수사 태도를 보면 여전히 권력 눈치 보기에서 벗어나지 못하고 있다는 의심을 지우기 어렵다. 최씨는 구체적 증거가 드러난 국가기밀 유출 등 자신을 둘러싼 비리 의혹을 모두 부인했다. 최씨는 여전히 검찰 조사에서도 ‘꼬리 자르기’를 시도할 가능성이 높다. 이미 각본도 짜였을지 모른다. 그동안 검찰은 항상 박 대통령이 제시한 ‘수사 가이드라인’에 맞춰 수사결과를 내놓았다. 박 대통령과 검찰이 이번에 어떤 선택을 할지 두 눈 부릅뜨고 지켜볼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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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니 땐 굴뚝에 연기 날 리 없다. 세간에 회자된 모든 의혹이 속속 근거 있는 사실로 밝혀지고 있다. 권력서열에 관한 얘기, 연설문 수정 의혹, 십상시와 팔선녀 등등. 비서실장만 몰랐던 듯 ‘봉건시대에도 있을 수 없는 얘기’라고 못 박아 부정했지만 며칠이 걸리지 않았다. 명명백백한 증거가 노출되기까지. 역사의 시계가 ‘잃어버린 몇 년’ 정도가 아니라 지금 우리를 봉건시대로 되돌려 놓고 있다. 대통령은 최순실 관련 의혹 제기를 두고 ‘비상시국에 난무하는 비방과 확인되지 않은 폭로성 발언들’로 깎아내리고, 국민과 언론의 근거 있는 의혹 제기를 비방과 유언비어, 괴담으로 매도하고 불법과 무질서로 낙인찍었다.

그러나 여느 피의자처럼 물증을 들이대니 시인하고 말았다. 그러나 그것도 ‘과거 어려움을 겪을 때 도와준 인연’에게 연설과 홍보 정도 의견을 구했다는 선에서, 사과 시점까지 드러난 물증에 맞는 맞춤형 사과였다. 그러나 물증은 거기까지가 아니었다. 최씨의 비선 비서실은 의견을 구하고 옷을 골라주고 연설문을 수정한 정도가 아니라 국정 전반에 걸쳐 손댄 흔적이 드러났다.

JTBC가 최순실씨 컴퓨터에서 입수했다고 24일 공개한 박근혜 대통령의 연설문. 제목 옆에 ‘신문용‘ ‘재수정’ ‘프롬프터’ 등이 쓰여 있어 대통령 발언 이전 받은 초고임을 알 수 있다. JTBC 제공

대통령의 사과로 통치자로서 능력 없음이 드러났다. 보좌진이 정비되지 않은 시기까지 절친의 도움을 받았다는 대통령의 해명은 준비 안 된 대통령임을 실토한 것이나 마찬가지다. 청와대 비서실 시스템조차 갖추지 못하고 비선의 도움으로 출범한 박근혜 정부가 대한민국을 이끌어 왔기에 지금 나라 꼴이 이 모양이었던 것이다.

국민에게 전할 대통령의 말씀이 아무런 공적 직책도 없어 책임도 물을 수 없는, 그저 수십 년 친하게 지내온 사람에 의해서 주물러졌다는 사실에 온 국민은 충격과 분노에 휩싸였다. 우리가 들었던 대통령 연설문이 공적 시스템에 의해서 완성돼 대통령의 입을 통해 국민에게 전달된 것이 아니었다. 국정운영 능력이나 시스템은 구멍가게 수준이었다. 비선 실세의 의견을 듣고 마련한 자료를 수석비서관회의나 국무회의에서 일방적으로 읽어 가면 고개 숙여 받아 적기 바빴던 장면이 국정운영의 모습이었다. 묻지도 따지지도 말고 내 말을 따르라는 봉건영주의 독주는 국민이 부여한 권력을 행사하는 민주공화정의 모습은 아니었다. 퍼스트레이디 시절과 정계입문 과정에서 도움을 받은 친한 몇 사람에 둘러싸여 불통 대통령이 되어갔던 것이다.

언론보도에 따르면 청와대 비서실이 그들의 활동공간인 강남으로 이전한 모양새다. 대통령 보고 자료가 전달돼 국정 전반을 논의하는 비선모임이 열리고 행정관들이 드나들고 상왕 실장인 최씨가 둥지를 튼 곳이 바로 비선 청와대 비서실이었다. 대통령 사과 당시 도열한 비서실장을 포함한 수석비서관들은 이름뿐이었다. 국민이 준 권력을 사유화해 비선에게 국정운영을 맡긴 꼴은 대통령이 즐겨 쓰던 ‘비정상’ 바로 그 자체였다. 이토록 비선 실세가 호가호위하도록 방조한 것은 대통령이다. 국정을 농단하도록 힘을 건네준 이도 대통령이다. 특별감찰관을 해임시킨 이유가 비선 실세의 걸림돌이었기 때문이었던 것이다. 민정수석조차 비선 실세의 손에 의해 추천되고 대통령이 받아들였다고 하니 최씨를 포함한 비선 실세들은 날개를 단 듯 국정을 농단했다. 그러고도 최씨와의 관계조차도 부인하고 최씨와 관련한 의혹 제기를 비방과 폭로성 발언, 괴담 수준으로 치부했다. 그래서 대통령의 언어는 단 한마디도 신뢰를 얻을 수 없고 씨알도 먹히지 않는 상황이 돼버린 것이다.

그야말로 비정상이 난무하는 비상시국이다. 비선 실세를 키워 불법과 무질서가 판칠 수 있도록 부추기고 방조한 장본인이 바로 청와대와 대통령임이 드러났다. 대통령은 경찰의 날 축사에서 ‘불법과 무질서가 용인되면 사회의 발전도, 미래도, 희망도 없다’고 했다. 그 말의 첫 적용대상자가 청와대와 대통령이 될 상황이다. 이 사태를 그대로 덮어두고 책임 있는 자의 사법적 정치적 책임을 묻지 않으면 대한민국의 발전도, 미래도, 희망도 없다.

국가지도자와 정치인은 신뢰를 먹고 산다. 법을 위반하면 법적 책임을 물어 교도소로 보내야 하고, 국민의 믿음을 얻지 못하면 유권자의 심판을 받거나 자리에서 물러나야 한다. 정치적 책임이 바로 그것이다. ‘무늬만 대통령’에 대한 국민의 분노, 불신임은 정점으로 향하고 있다. 국회 청문회를 통하든 특별검사의 수사에 의하든, 비상거국내각을 구성하든 민주주의와 법치국가의 틀 안에서 비정상이 정상화돼야 한다. 먹고 살기 바쁘고 살인적 물대포도 두려운 시민들을 더 이상 아스팔트로, 광장으로 내몰지 않았으면 하는 바람이다.

하태훈 고려대 법학전문대학원 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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비선 실세 최순실씨의 국정농단 실상이 드러나면서 국정이 마비 상태에 이르고 있다. 정부는 어제 황교안 총리 주재로 긴급 국무위원 간담회를 열었지만 아무런 수습책도 내놓지 못했다. 국정의 한 축인 새누리당은 이정현 대표 퇴진론이 분출하는 속에 친박근혜 세력까지 붕괴해 총체적 난국에 빠졌다. 한 여론조사에서는 박근혜 대통령이 어떻게 책임을 져야 하느냐는 물음에 탄핵 또는 하야해야 한다는 응답이 42.3%로 나와 내각·청와대 인적쇄신(21.5%)으로 마무리하자는 의견보다 압도적으로 많았다. 지난 대선 때 박 대통령에게 90% 투표했던 대구·경북지역에서조차 박 대통령이 물러나야 한다는 의견이 우세했다. 경제 위기 극복과 민생, 안보 등 국정 현안이 산적해 있는데 대통령이 자초한 국정문란으로 식물정권이 되어버린 비극적인 상황에 봉착한 것이다.

21세기청소년공동체희망 소속 회원들이 27일 광화문 광장에서 최순실게이트에서 비롯된 국정농단 논란과 관련한 청소년 시국선언 선포 회견을 하고 있다. 김정근기자

청와대는 내주 중 총리와 청와대 일부 보좌진을 교체하는 방안을 거론한다고 한다. 안이하기 그지없는 생각이다. 지금은 박 대통령이 어떤 것을 들고나와도 시민이 용납하기 어렵다. 이미 대학가를 중심으로 박 대통령 퇴진 운동이 시작됐다. 박 대통령은 이번 사태의 해결을 위해 스스로 특검 수사를 자처하는 것이 옳다. 여야가 합의한 특별검사의 수사가 시작되면 어차피 박 대통령은 직무정지 상태에 놓이게 된다. 그렇지만 박 대통령이 하야하거나 박 대통령을 탄핵하는 것도 현실적이지 않다. 시민의 손으로 뽑은 대통령을 자리에서 내려오게 하는 것은 또 다른 혼란을 부를 뿐이다. 더불어민주당과 국민의당 등 야당이 탄핵과 하야 등을 요구하지 않는 것은 이성적인 판단이다. 지금 필요한 것은 신속하고도 질서 있는 국정 수습책이지 선명성 경쟁이 아니다.

가장 현실성 있는 방안은 여야가 다 참여하는 거국적 중립내각을 구성하는 것이다. 여야 합의로 새 총리와 주요 장관을 뽑은 뒤 중립적으로 국정을 운영하고, 내년 대선까지 관리하게 하는 것이다. 새누리당 김무성 전 대표도 어제 “국민의 신뢰를 잃은 국가 리더십으로 현 체제가 유지돼서는 안된다”면서 “국민이 인정할 수 있는 거국 중립내각이 구성돼서 대통령의 남은 임기가 잘 마무리될 수 있도록 해야 한다는 데 동의한다”고 말했다. 여당의 전 대표가 동의했으니 일정한 공감대는 형성된 셈이다. 새누리당도 이 국면을 회피할 생각만 하지 말고 국정 안정화를 위해 중립내각 구성에 나서야 한다.

박 대통령도 중립내각을 수용해야 한다. 새누리당을 탈당하고 남은 임기 1년3개월 동안 최소한의 역할만 하겠다고 공개 선언해야 한다. 그게 박 대통령이 자신의 과오에 대해 최소한이나마 책임지는 일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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