프로야구 KIA 타이거즈의 최형우는 리그최고 타자다. 좌타자 최초로 4연속 시즌 100타점을 돌파했다. 전인미답의 4연속 시즌 3할-30홈런-100타점에도 도전하고 있다. 프로입단 15년차인 그는 정규시즌 MVP를 차지한 적이 없다. 1인자의 자리에 한번도 오르지 못한 것이다. 최형우는 지난달 “영원한 2인자로 남겠다”고 했다. 1인자가 되겠다는 꿈을 접었다는 것이다. “솔직히 욕심이 없었다면 거짓말이다. 영원한 2인자로 좋은 성적을 올리자고 생각하니 오히려 홀가분해졌다.” 그가 편 ‘2인자론’은 새겨들을 만하다.

2인자는 서럽다. 1인자의 그늘에 가려 있기 때문이다. 오스트리아 황제 요제프 2세가 총애한 궁정악장이었던 안토니오 살리에리는 걸출한 음악가였다. 하지만 살리에리는 모차르트의 공연을 보고 난 뒤 절망의 늪에 빠져들었다. 방탕하고 오만한 모차르트에게 ‘천상(天上)의 음악’을 실현할 수 있는 천재성을 부여한 신을 저주하기도 했다. “신은 내게 음악에 대한 열정만 주셨고, 모든 재능은 모차르트의 몫이었다.” 2인자의 설움은 1인자를 향한 적의로 돌변하기도 한다. 살리에리가 모차르트를 파멸시키겠다는 생각을 품게 된 것도 2인자가 겪는 절망감의 표출일 수도 있다.

최지성 전 삼성 미래전략실장이 25일 서울 서초동 서울중앙지법에서 열린 1심 선고공판에 출석하고 있다. 김영민 기자

2인자는 열등감의 포로가 되기도 한다. 30여년간 전두환의 위세에 눌려 지냈던 노태우가 그랬다. 육사 11기 동기였지만 노태우는 전두환의 뒷길만을 좇았다. 전두환에게 인수인계받은 직책만도 육참총장 수석부관, 경호실 작전차장보, 보안사령관, 민정당 총재, 대통령에 이르기까지 5개나 된다. 민주주의를 짓밟고 헌정을 유린한 1979년 12·12 쿠데타, 1980년 5·18 광주학살 때도 전두환이 앞장서고, 노태우가 뒤따랐다. 노태우가 전두환에게 가졌던 우월감이 있긴 하다. 군사쿠데타로 집권해 ‘체육관 선거’로 대통령에 선출된 전두환과 달리 자신은 국민들의 직접투표로 당선됐다는 것이다. 노태우는 언론인터뷰에서 “만약 내가 (전두환의) 2인자로 행동했다면 대통령이 되지 못했을 것”이라고 했다. 하지만 전두환은 지난 4월 펴낸 <전두환 회고록>에서 “간접선거로 대통령이 되려 했던 노태우를 수차례 설득한 끝에 직선제 개헌을 수용하겠다는 답변을 얻어냈다. 그때까지도 노태우는 내 그늘에 가려져 있는 2인자 이미지를 벗지 못했다”고 기술했다.

재벌기업 2인자의 말로는 비참하다. 총수의 방패막이가 돼야 하는 게 재벌기업 2인자의 운명이다. 최지성 전 삼성그룹 미래전략실장이 그랬다. 마케팅 전문가인 그는 삼성전자 대표이사를 거쳐 2012년 미래전략실장이 됐다. 비서실-구조조정본부-전략기획실-미래전략실로 이름이 바뀌어온 삼성그룹 컨트롤타워의 수장이 된 것이다. ‘이재용의 가정교사’로 불렸던 그는 총수 일가에 대한 충성심이 대단했다. 2014년 이건희 회장이 쓰러지자 수시로 병실을 찾았고, 이재용 삼성전자 부회장의 경영권 승계 작업을 주도했다. ‘실세 중의 실세’라는 세간의 평가가 있긴 했지만 실권은 쥐지 못했다. 삼성그룹 창업주 이병철 회장의 ‘복심(腹心)’으로 불렸던 소병해 비서실장이나 이건희 회장의 오른팔 역할을 했던 이학수 구조조정본부장과 달리 ‘관리형 2인자’에 그친 것이다.

‘박근혜·최순실 뇌물공여 혐의’로 기소됐던 최 전 실장은 재판과정에서 ‘1인자 전략’을 썼다. 그는 “이재용 부회장은 그룹의 최종 의사결정권자가 아니다”라고 강변했다. 이 부회장도 “식사를 하든 회의를 하든 제가 한 번도 상석에 앉은 적이 없다”고 했다. 박영선 더불어민주당 의원은 이를 ‘이재용 바보 전략’이라고 분석했다. 이 부회장을 아무것도 모르는 ‘바보’로 만들고, 모든 책임을 최 전 실장에게 떠넘기려 했다는 것이다. 실제로 최 전 실장은 재판과정에서 짜놓은 각본이 있는 것처럼 진술했다. 그룹 후계자 예우 차원에서 필요한 정보를 선별적으로 제공해 이 부회장이 제일모직·삼성물산 합병, 미르재단 출연금, 정유라 승마지원 등에 대해선 전혀 몰랐을 것이라고 강변한 것이다. 그는 “책임을 묻는다면 판단력이 흐려진 제게 물어 달라”고 읍소하기도 했다. 하지만 1심 법원은 이 부회장에게 징역 5년, 최 전 실장에게 징역 4년을 선고했다. ‘최지성 1인자, 이재용 바보 전략’이 통하지 않은 것이다.

1인자만 기억하고 대접하는 세상에서 2인자가 설 땅은 좁다. 2인자가 겪는 비애와 좌절은 1인자가 되겠다는 욕심을 버리지 못했거나 ‘일인지상 만인지하(一人之上 萬人之下)’의 자리에서 내려오는 것에 대한 두려움이 크기 때문일 수 있다. 높은 곳은 좁고 위태롭지만, 낮은 곳은 넓고 평안하다. 이런 이치를 아는 2인자는 많지 않다. 안분지족(安分知足), 세상의 모든 2인자들이 갖춰야 할 덕목이다.

<박구재 논설위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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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러스트_ 김상민 기자

“제1심 판결은 법리판단과 사실인증 그 모두에 대해서 법률가로서 도저히 수긍할 수 없다.” 이재용 삼성전자 부회장이 5년형을 선고받은 뒤 삼성 측 변호인이 한 말이다. 이해할 수 없었다. 판사들도 나름의 법리에 근거해 판결을 내렸을 텐데, 의견 차이가 약간 있는 것도 아니고 도저히 수긍할 수 없다니 그게 말이 되는가. 심지어 ‘유죄판결 모두에 대해 인정 못 하냐’는 질문에 “전부 다 인정 못 한다. 유죄 선고된 부분에 대해서 전부 다 인정할 수 없다”고 덧붙이기까지 했다. 법은 사회의 질서유지를 위해 만들어진 최소한의 규범이다. 당연히 법은 사회구성원의 보편적인 상식에 부합해야 한다. 이 부회장의 5년형에 대해 시민사회는 어떻게 생각하고 있을까? 한 기사에 따르면 시민들 대부분이 구형량에 비해 형량이 너무 적다며 분통을 터뜨렸다. 재판부 결정에 반대하는 여론도 있긴 하지만, 그건 이 부회장의 구속이 경제를 악화시키지 않을까 하는 우려 때문이지, 이 부회장이 무죄라는 얘기는 아니다. 이 판결을 진심으로 슬퍼한 이들이 없는 것은 아니었다. 선고 직후 “대한민국이 무너졌다”며 울부짖은 바로 그분들인데, 사람들은 이들을 ‘박사모’라 부르며 정상적인 사람 취급을 안하고 있다.

사정이 이런데도 삼성 측 변호인들은 유죄임을 인정 못 한다고 하고, 항소심에서는 죄다 무죄가 선고될 것을 확신한다고 말한다. 둘 중 하나다. 변호인들이 죄다 박사모이거나, 아니면 거짓말을 하고 있는 것이다. 난 후자라고 생각한다. 만일 그들이 박사모라면 정상적인 판단력이 없다는 얘기인데, 그런 사람이 사법고시를 합격하고 변호사로 활동하고 있다는 건 말이 안된다. 

여기서 반론이 나올 수 있다. “국회는 힘이 넘치는데 (박근혜 전 대통령은) 여자 하나다. 법관은 약자를 생각하는 게 정도”라며 탄핵법정을 유린했던 김평우 변호사도 있지 않은가. 하지만 김평우는 1945년생, 우리 나이로 73세니 정신이 오락가락한다 해도 이해할 수 있지만, 송우철을 비롯한 삼성 변호인단의 연령은 거기에 훨씬 못 미친다. 그래서 난 삼성 측 변호인들이 이재용의 유죄사실을 알고 있으면서도 모르는 척하는 것이라 확신한다. 유죄를 인정할 수 없다는 그의 발언은 그러니까 국민들이 아닌, 자신의 주군인 이 부회장을 향해서 한 말이었다. “최선을 다했지만 부족했습니다. 2심에서는 꼭 집행유예로 빼내 드리겠습니다!”

잠시 변호인의 존재의미에 대해 생각해 보자. 서울에 사는 딸을 만나러 저 멀리 산골짜기에서 달려온 할머니가 있다고 가정하자. 그런데 그 할머니가 하필 최순실과 비슷하게 생겨 경찰서에 끌려갔다. 경찰은 험악한 표정을 지으며 할머니에게 훔쳐간 말을 내놓으라고 추궁한다. 경찰과 마주 앉은 게 난생처음인 할머니로선 당황한 나머지 말을 잘 못 했고, 결국 저지르지도 않은 범행을 인정해 버린다. 이런 비극이 발생하지 않게 해주는 이가 바로 변호인이다. 변호인은 할머니로 하여금 경찰의 부당한 협박에 시달리지 않게 해주며, 불리한 진술을 못하게 막아준다. 덕분에 할머니는 원래 목적인, 서울 사는 딸을 만나러 갈 수 있게 된다. 이런 게 변호인이 만들어진 취지, 그런데 지금 변호인들이 과연 이런 역할을 충실히 하고 있을까? 이재용 부회장은 거대 그룹인 삼성에서 가장 높은 사람이다. 검사라 해도 그에게 함부로 대하지 못하며, 법정에서 그의 말을 무시할 수 있는 이는 아무도 없으니, 변호인이 없다 해도 그가 불리한 판결을 받을 것 같지는 않다. 물론 법률 지식이 없으니 그 부분에 대해 조언해줄 변호인이 필요하겠지만, 지금 그의 곁에 있는 변호인들은 그 역할을 훨씬 넘어선다. 이렇게 답변하면 유죄가 나오니까 기억이 안 난다고 말해라, 이 대목은 묵비권을 행사하라, 이런 식의 코치를 해주면서 삼성 측 변호인들이 노리는 것은 바로 이 부회장의 무죄방면이리라. 하지만 그들이 공부한 법 정신은 유죄가 확실한 의뢰인을 자백하게 함으로써 적정량의 형을 받게 하는 것이어야지, 범죄를 저지른 게 명백한 이를 사회로 내보내는 일은 아닐 것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고액의 수임료에 법 정신을 내팽개치는 변호사들이 이 땅에는 너무도 많다.

1000만명이 본 영화 <변호인>에서 돈 잘 버는 변호사로 이름을 날리던 송우석(송강호 분)은 단골 국밥집 아들 진우가 시국사건에 휘말려 재판을 앞두고 있다는 소식을 듣는다. 구치소에 있는 그를 면회하는 것만 도와주려 했던 송우석은 눈앞에 펼쳐진 진우의 처참한 모습에 격분해 모두가 마다했던 그의 변호인이 된다. 재판정에서 송우석은 정권의 편에 서서 진우를 빨갱이로 모는 차동영(곽도원 분)에게 다음과 같이 말한다. “니는 애국자가 아니고 죄 없고 선량한 국가를 병들게 하는 버러지고 군사정권의 하수인일 뿐이야. 진실을 얘기해라. 그게 진짜 애국이야.” 

여기서 ‘군사정권’을 ‘삼성공화국’으로 바꾸면 현 상황에 딱 들어맞을 것 같은데, 이 부회장의 판결을 본 송우석이 다음과 같이 외치는 소리가 들리는 듯하다.

“이러면 안 되는 거잖아요. 그 정도 뇌물이면 최소 10년은 받아야지.”

<서민 | 단국대 의대 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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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화예술계 블랙리스트 1심에서 조윤선 전 문체부 장관이 블랙리스트 무죄, 위증 유죄라며 석방되었다. 박근혜·최순실 국정농단 사태에서 삼성의 뇌물 공여 혐의가 드러나면서 삼성전자 부회장 이재용에 대한 특검의 구속 수사와 재판이 진행되고 있지만, 변호인단은 경영권 승계자인 이재용만 모르게 이건희 회장과 삼성 미래전략실 차원에서 경영 승계가 이루어졌다고 주장한다. 붕어빵에 붕어가 없듯 블랙리스트 재판에 조윤선이 없고, 삼성의 경영권 승계 과정에 이재용이 없다. 각본 없는 드라마가 아니라 주인공 없는 법정이 이들의 목표로 보인다.

중세에서 근대에 이르는 서유럽 역사를 살펴보면 합스부르크와 부르봉 가문 등 몇몇 주요 가문이 여러 국가를 분봉하여 통치했다. 당시 사람들은 왕족과 귀족은 평민과 달리 ‘푸른 피(Blue Blood)’를 지녔다고 생각했다. 세습에 의한 ‘혈연 엘리트(Blood Elite)’의 통치는 근대 시민혁명 이전까지 당연한 일이었고, 수천년간 의심받지 않았다. 특별한 피를 이어받아야만 국가를 통치할 수 있는 권리(주권)가 있다는 왕권신수설을 넘어, 평범한 시민이 공화국의 주인이 되기까지 인류는 오랜 세월에 걸쳐 투쟁했다.

이재용 삼성전자 부회장(왼쪽 사진)과 박영수 특별검사가 7일 서울 서초구 서울중앙지방법원에서 열린 결심공판에 출석하기 위해 법정으로 향하고 있다. 김기남기자 kknphoto@kyunghyang.com·연합뉴스

우리 역시 1987년 민주화와 노동자 대투쟁으로부터 2017 촛불혁명에 이르는 힘든 과정을 통해 비로소 민주공화국 시민의 정체성과 자의식을 획득할 수 있었다.

지난 30년 동안 대한민국의 민주주의는 권력에 대한 비판과 성찰을 통해 오늘에 이르고 있지만, 그 과정에서 제대로 된 비판이나 성찰 없이 꾸준하게 최고의 권력을 누려온 것이 바로 기업 권력이다. 아니, 온갖 비판에도 불구하고 도리어 국가권력과 언론권력을 길들이며 불가침의 성역이 되었다.

국가권력과 부당하게 야합하여 결과적으로 외환위기를 자초했지만, 이 시기를 전후하여 비판지성의 생산지가 되어야 할 서울의 일류대학들은 앞다퉈 재벌 기업 총수들을 불러들여 명예박사 학위를 수여했고, 기업 총수들은 보답으로 자신의 이름이나 기업명을 딴 신축 건물을 지어주었다. 기업권력을 비판하고 감시해야 할 언론 역시 재벌이 쥐여주는 광고의 단물에 취해 감시를 소홀히 하고 기업의 나팔수가 되었다.

특히 삼성은 ‘삼성이 하면 뭔가 다르다’는 대중의 인식과 자본에 길들여진 언론의 비호 속에서 그들이 국가 경제에 기여하는 정도에 비해 과도한 지위를 누려왔다. “삼성이 국가 성장을 견인할 뿐만 아니라 국가경영을 주도한다”는 삼성이데올로기는 민주화 이후 신자유주의적 세계화가 초래한 국가적 위기상황 속에서 하나의 신앙이 되었다. 우리는 이 시점에서 삼성을 비롯한 재벌기업들이 경영권을 대물림하면서 국가공동체의 가치 실현을 위한 어떤 책임 있는 태도를 지녀왔는지 묻지 않을 수 없다.

세계 자본주의 체제의 위기가 불러온 삶의 위기 속에서 대중은 살아남기 위해 안간힘을 써야 했다. 삶의 척박함, 생존의 어려움은 대중의 분노를 자아냈지만, 이 분노는 연대를 통한 극복이 아닌 자기계발과 계층상승을 통한 각자도생으로 향했다. 기업지배사회가 된 대한민국은 이후 어떤 윤리적 규범이나 규칙에 구애받지 않고 오직 ‘부’의 욕망을 추구하는 자들의 세계가 되었다. CEO의 영웅화가 초래한 참혹한 실상은 ‘갑질공화국’으로 나타났다. 2007년부터 2017년까지 10년 동안 언론에 등장한 기업 CEO들의 대표적인 갑질만 언급해도 지면을 다 채울 지경이다.

어느덧 3세, 4세에 이르게 된 경영권 승계자들은 자신의 뛰어난 능력으로 지금의 지위를 누리게 된 것일까? 과연 기업은 대한민국의 권력 구조, 경제시스템, 서민과 중소기업의 희생을 강요하는 정책과 무관하게 오로지 그들의 노력과 혁신으로 성공한 것일까? 신자유주의 이후 우리는 “국가와 국민을 위한 기업이 아니라 기업을 위한 국가”에서 살아가는 기업국가의 국민이 되었다. 그렇기 때문에 기업 민주화 없는 국가의 민주화는 불가능하며, 주권을 능가하는 경영권에 대한 노동자의 참여와 시민의 감독이 필요하다.

전성원 | 황해문화 편집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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청와대 민정비서관실 캐비닛에서 뒤늦게 발견된 삼성 경영권 승계 관련 보고서가 우병우 전 청와대 민정수석의 지시로 작성됐다는 현직 검사의 증언이 나왔다. 이른바 ‘캐비닛 문건’을 모른다는 우병우 전 수석의 발언과 배치된다. 25일 열린 이재용 삼성전자 부회장 재판에 증인으로 나온 이영상 검사(대검 범죄정보1담당관)는 민정비서관실 선임행정관으로 근무하던 2014년 7~9월 당시 민정비서관인 우 전 수석의 지시로 삼성 관련 문건, 메모, 보고서 등을 작성했다고 증언했다. 이 검사는 “민정비서관이 최종적으로 기조를 결정하고 보고서를 승인한 것이 맞냐”는 특검의 질문에 “그렇다. 제가 임의로 혼자서 작성한 것은 없다”고 답했다. 공판에서는 이 검사가 보고서 작성과정에서 남긴 메모도 공개됐다. 삼성 경영권 승계 국면 → 기회로 활용. ‘삼성의 당면과제는 이재용 체제 안착. 윈윈 추구할 수밖에 없음’ 등의 내용이 적혀 있다.

청와대에서 발견된 박근혜 정부의 '삼성 경영권 승계' 관련 보고서를 작성하라고 지시한 의혹을 받는 우병우 전 민정수석이 24일 서초구 서울중앙지법에서 열린 자신의 속행 공판에 참석하고 있다. 연합뉴스

우 전 수석의 음험한 손길이 민정 업무와 거리가 먼 이재용 부회장의 경영권 승계 문제에까지 뻗쳤다니 놀랍다. 작성 시점과 내용으로 추정컨대 민정비서관실의 삼성 보고서는 박근혜 전 대통령에게 보고돼 국정농단 세력이 범죄를 모의하는 데 활용됐을 수 있다. 정권과 삼성이 뇌물을 주고받으며 윈윈하자는 게 ‘박근혜·최순실 게이트’의 기본 구조다. 그런데도 우 전 수석은 보고서 내용은커녕 존재조차 모른다고 잡아뗐으니 그 뻔뻔함에 기가 찬다. 우 전 수석은 지난 17일 서울중앙지법 청사에서 열린 자신의 재판에 출석하다 ‘캐비닛 문건의 존재를 아는가’라는 취재진의 질문에 “언론 보도를 봤지만, 무슨 상황인지 무슨 내용인지 알 수가 없다”고 답했다. ‘법 미꾸라지’인 우 전 수석이 후배 검사의 법정 증언까지 나온 상황에서 어떤 해괴한 논리와 변명을 들이댈지 궁금하다.

삼성의 경영권 승계에는 국정원도 동원됐다. 장충기 전 삼성그룹 미래전략실 사장은 당시 이헌수 국정원 기획조정실장으로부터 삼성물산의 대주주이면서 삼성물산과 제일모직의 합병에 반대하는 미국 헤지펀드 엘리엇에 관한 정보를 수시로 건네받았다. 국정원 기획조정실장은 예산과 인사, 기획 등을 담당하는 핵심 보직이다. 특검에 따르면 이 실장은 “엘리엇 매니지먼트는 … 한국 관련 (상황을) 관리하고, 내부 상황을 철저히 통제하고 있다. 다른 친구를 통해 더 알아보겠다. 추가 내용은 다음에”라는 내용의 문자도 장 전 사장에게 전송했다. 삼성의 경영권 승계를 위해 국정원이 흥신소 역할을 자처한 것이다. 과거사 청산 작업을 벌이고 있는 국정원은 국정농단 부역자들의 비리도 철저히 밝혀 엄벌해야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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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재인 정부 출범이 최순실씨 딸 정유라씨의 ‘철없는 행동’에서 비롯됐다고 하면 지나친 비약일까. 최씨가 삼성의 뇌물을 받은 것은 당시 스무 살도 안된 정씨의 갑작스러운 임신·출산과 관련이 있다. 어린 딸의 장래가 걱정된 최씨는 사람들 눈을 피해 딸을 독일로 보내기로 마음먹었다. 승마 강국 독일은 승마 선수인 정씨가 그렇잖아도 전지훈련을 가고 싶었던 곳이다. 비선 실세의 존재를 일찍부터 간파한 삼성이 정씨를 위해 그랑프리대회 우승마와 생활비 등을 댔다. 최씨가 재벌·대기업의 팔을 비틀어 K스포츠재단을 설립한 것도 2020년 도쿄 올림픽에서 딸이 금메달을 따는 데 도움이 되게 하겠다는 계산이 작용했다. 결국 정씨 임신이 ‘독일 승마 유학 → 삼성 뇌물 수수와 K스포츠재단 설립 → 언론 추적 보도와 검찰·특검 수사 → 대통령 탄핵 및 구속 → 조기 대선과 문재인 정부 출범’이라는 나비효과를 불러온 셈이다.

최순실씨 딸 정유라씨가 31일 오후 인천공항에 도착한 뒤 공항 게이트에 들어서고 있다. 국정농단 사태가 불거진 지난해 9월28일 독일에서 덴마크로 건너가 도피생활을 시작한 지 245일 만에 강제 송환된 정씨는 삼성의 승마 지원 특혜, 이화여대 입학 비리, 재산 해외 은닉 등의 혐의를 받고 있다. 이준헌 기자

이화여대 역사상 최초로 직선 총장이 등장한 것도 정씨가 원인을 제공했다. 이대는 2014년 수시모집 체육특기자 전형에 갑자기 승마를 추가했고 배후에 최씨 모녀가 있다는 소문이 돌았다. 그리고 입시비리와 미래라이프 대학과 관련해 이대생들의 시위가 이어졌다. 특검과 검찰 수사 결과 이대는 정씨를 뽑기 위해 최경희 당시 총장 주도로 입시 요강을 바꾸고 교수들에게 ‘금메달을 딴 학생을 뽑으라’는 지시까지 내린 것으로 드러났다.

정씨가 31일 강제 압송됐다. 지난해 가을 언론의 추적이 시작되자 독일에서 행방을 감춘 지 8개월, 불법 체류 혐의로 덴마크 당국에 구금된 지 5개월 만이다. 정씨는 ‘박근혜·최순실 게이트’의 수혜자이자 이대 입학·학사비리의 당사자다. 그런데도 정씨는 “엄마와 박 전 대통령의 관계는 모른다. 저는 억울하다”고 말했다. 죄를 짓고도 당당한 모습이 그 어머니에 그 딸임을 유감없이 보여줬다. 정씨는 이대 부정 입학과 관련해서도 “학교를 한 번도 안 갔다. 전공이 뭔지도 모른다”고 어처구니없는 말을 했다. 그러나 부정 입학 의혹이 제기되던 2015년 정씨가 또래들을 조롱하며 페이스북에 올린 “돈도 실력이야. 니네 부모를 원망해”라는 글은 지금 이 순간에도 SNS에 떠돌고 있다.

오창민 논설위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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박영수 특별검사팀 수사 결과 박근혜 대통령에게 뇌물 등 5개 혐의가 추가됐다. 검찰이 밝힌 기존 8개 혐의를 더하면 총 13개에 이른다. 최순실씨 등 비선 실세에 의한 국정농단, 그에 따른 국민주권주의와 법치주의 훼손 등 박 대통령 탄핵 사유는 이로써 더욱 분명해졌다. 특검 수사의 최대 성과는 박 대통령이 최씨와 공모해 삼성그룹으로부터 433억원의 뇌물을 받은 혐의가 확인됐다는 점이다.

특검은 433억원의 성격과 관련해 박 대통령이 공권력과 국가 기구를 동원해 삼성물산과 제일모직의 원활한 합병 등 이재용 삼성전자 부회장의 경영권 승계를 도운 대가라고 못 박았다. 헌법재판관 출신으로 박 대통령 대리인단의 핵심인 이동흡 변호사는 “삼성 관련 소추 사유가 뇌물수수에 해당한다고 입증되지 않는 이상 파면 사유가 되기는 어렵다”고 주장한 바 있다. 그런데 법원은 뇌물 공여자인 이 부회장의 구속영장을 발부했다. 박 대통령 등이 시킨 대로 한 문형표 전 보건복지부 장관은 삼성물산과 제일모직 합병에 국민연금을 동원한 혐의로 구속돼 재판을 받고 있다. 뇌물죄는 뇌물을 준 사람보다 받은 사람의 죄를 훨씬 무겁게 묻는다. 박 대통령은 삼성 뇌물만으로 탄핵감이라 할 수 있다.

박영수 특별검사가 6일 오후 서울 강남구 대치동 특검 사무실에서 열린 박근혜 최순실 게이트 ‘수사 결과 대국민 보고’에서 소회를 밝히고 있다. 김기남 기자

박 대통령이 최씨에게 연설문이나 인사 자료를 유출해 국정 개입을 허용했다는 것은 주지의 사실이지만 특검 수사로 더 많은 범죄 사실이 확인됐다. 최씨의 마수는 문화체육관광부 외에 외교부까지 뻗쳤다. 최씨는 미얀마 공적개발원조사업의 이권을 챙기기 위해 내정된 인사까지 밀어내고 유재경 주미얀마 대사와 김인식 한국국제협력단 이사장을 앉혔다. 청와대 의료시스템이 붕괴 상태였던 것도 드러났다. 박 대통령은 최씨 소개로 불법 의료업자들로부터 시술을 받고 공식 자문의가 아닌 김영재씨로부터 ‘비선 진료’를 받았다. 일급 기밀인 대통령의 혈액 등 건강 관련 정보가 새나가고 있었지만 어느 누구도 문제의식이 없었다. 박 대통령은 문화예술계 블랙리스트에도 관여하고, 최씨 민원을 받아 KEB하나은행의 인사에 부당하게 개입한 혐의도 확인됐다. 청와대 지시로 전국경제인연합회가 극우 단체에 지원해 ‘관제 데모’를 유도한 사실도 추가로 드러났다. 박 대통령은 주권자로부터 위임받은 권한을 이렇게 남용했다.

여권의 대선주자로 거론되는 황교안 대통령 권한대행의 민낯도 드러났다. 황 대행은 청와대 압수수색 등이 이뤄지도록 특검팀을 지원해도 모자랄 판에 오히려 거꾸로 나왔다. 특검의 수사기간을 연장할 수 없다면 하루라도 빨리 이를 공표해야 했다. 그래야 특검이 남은 시간을 효율적으로 사용할 수 있기 때문이다. 하지만 황 대행은 알량한 법 지식을 이용해 결정을 미루면서 국회와 특검을 능멸했다.

박 대통령과 청와대, 황 대행의 조직적인 방해에도 특검이 성과를 낼 수 있었던 것은 민주주의를 위해 주말마다 광장에서 촛불을 든 시민들 덕분이다. 한국 사회의 고질인 정경유착을 뿌리뽑지 않고서는 정의를 바로 세울 수 없다는 특검 수사팀의 의지도 작용했다. 청와대는 “특검의 수사 결과는 헌법재판소의 탄핵심판 심리의 증거로 인정될 수 없다”고 말했지만 이는 헌재가 판단할 일이다. 한겨레와 조선일보의 어제 여론조사 보도를 보면 ‘박근혜 대통령을 탄핵해야 한다’는 의견이 각각 75.7%와 73.3%다. 탄핵심판 선고가 일주일 안으로 다가왔다. 헌재는 법과 원칙에 따라 박 대통령 탄핵 여부를 결정해주기 바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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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나금융이 설립한 하나고의 입시 비리를 고발했다가 해임된 이 학교 전경원 교사에 대해 교육부 교원소청심사위원회가 어제 해임취소 결정을 내렸다. 전 교사는 2015년 8월 서울시의회에 출석해 하나고가 신입생 선발과정에서 남학생을 더 많이 뽑기 위해 지원자들의 성적을 조작했다고 증언했다. 교육청 감사 결과 전 교사의 폭로는 사실로 확인됐지만 학교법인은 전 교사가 학교장 허가 없이 외부 강연을 했다는 등의 이유로 지난해 10월 해임했다. 비리 고발에 보복한 것이다. 학교법인의 처분이 잘못됐다는 소청심사위 결정은 사필귀정이다. 의로운 행동으로 상을 받기는커녕 해직의 고통을 겪은 전 교사는 새 학기부터 교단에 다시 서게 됐다. 선생님을 갑작스럽게 떠나보내며 안타까워했을 학생·학부모들도 소청심사위의 이번 결정이 위안과 희망이 됐을 것이다.

정부 조직이나 학교의 비리, 대기업의 담합, 금융권 화이트칼라들의 범죄 등은 내부자의 도움 없이 밝혀내기가 어렵다. 워낙 은밀하게 이뤄지는 데다 내용 또한 전문적이기 때문이다. 내부 고발의 중요성은 박영수 특별검사팀의 ‘박근혜·최순실 게이트’ 수사에서도 여실히 확인됐다. 노승일 K스포츠재단 부장이나 고영태 전 더블루K 이사의 협조가 없었다면 특검 수사가 지금만큼 성과를 내지 못했을 것이다.

K스포츠재단 노승일 부장이 24일 '비선 실세' 최순실씨 재판에 증인으로 출석하기 위해 서울 서초동 서울지법에 들어서고 있다. 정지윤 기자

그러나 전 교사 사례에서 보듯 내부 고발자는 조직의 보복행위에 무방비로 노출돼 있다. 2012년 학교 비리를 제보한 안종훈 동구마케팅고 교사도 해직 통보를 받았고, 2015년 동국대 사태 당시 총장의 논문 표절 의혹 등을 제기한 한만수 교수도 해직됐다가 천신만고 끝에 복직했다. 삼성은 2007년 차명 비자금 등을 사회에 고발한 김용철 변호사를 배신자로 낙인찍었고, 현대차는 지난해 승객 안전을 위협하는 에어백 센서 결함과 세타2 엔진의 시동 꺼짐 등의 문제를 언론에 제보한 직원을 가차없이 해고했다. 현행 ‘공익신고자 보호법’과 ‘부패방지법’ 등은 보상이 미약한 데다 민간 부문 적용이 제한돼 내부 고발자 보호에 한계가 많다. 내부 고발자 보복이 가능하다는 것은 그만큼 비리와 부패가 많다는 뜻이고, 어떤 사회가 내부 고발자 보호와 보상에 취약하다는 것은 그만큼 정의롭지 못하다는 방증이다. 전 교사처럼 옳은 일을 하고도 피해를 당하는 일이 없도록 ‘내부 고발자 보호법’(가칭)을 만들어 사회 정의를 실현하고 부패와 비리를 척결해야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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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재용 삼성전자 부회장에 대한 구속영장이 발부됐다. 79년 만에 처음으로 삼성그룹의 총수가 구속되었다고, ‘삼성 불구속 신화’가 깨졌다고 거의 모든 언론이 보도하고 있다. 물론 합법적으로 구속된 것은 이번이 처음이다. 하지만 약간 다른 각도에서 역사를 바라보면, 이미 삼성그룹의 회장은 한 차례 권력에 의해 붙잡힌 후 ‘몸값’을 지불하고 풀려난 바 있다. 1961년 5월28일, 일본에서 귀국한 이병철 회장이 박정희 장군을 ‘만났다’는 사건에 대해 이야기해보자.

박정희는 쿠데타에 성공한 후 얼마 지나지 않아 기업인들을 ‘부정축재자’로 지적하고 체포했다. 그런데 그 시점에 이병철은 일본에 있었고 한 박자 늦게 한국으로 돌아왔다. 감옥에 갈 줄 알았던 그는, 삼성그룹 비서실에 몸담았던 손병두 전 전경련 상근부회장의 증언에 따르면, 메트로호텔이라는 곳에서 박정희를 ‘만나게’ 된다. 그리고 우리가 익숙하게 들어온 어떤 ‘신화’가 이어진다. 박정희는 자신이 경제를 잘 모르므로 어떻게 해야 하냐고 이병철에게 물어보았다고 한다. 이병철은 박정희에게 기업인들을 석방해달라고 직언한 후, 일본의 일본경제인연합회(게이단렌)를 모델로 삼아 오늘날 전국경제인연합회가 된 한국경제인연합회를 창설하였으며 국가중심의 경제개발 전략 수립에 일조했다는 것이다.

이재용 삼성전자 부회장이 19일 오전 대치동 특검사무실로 구속된 이후 이틀 연속 소환되고 있다. 박민규 선임기자

적잖은 이들이 박정희 신화, 혹은 한국의 재벌 신화를 윤색하는 과정에서 이 사건을 일종의 평화로운 회의처럼, 혹은 이병철의 ‘돌직구’가 한국 경제 성장의 방향을 제시한 사업 설명회인 양 포장하곤 한다. 하지만 이병철의 입장에서 생각해보자. 계엄 상황이고, 상대는 바로 그 쿠데타의 주인공이다. 형무소가 아니라 호텔에서 만났다 해도 실질적으로 구금 상태와 크게 다를 바 없다. 박정희의 요구를 받아들이거나 박정희가 생각하던 것보다 더 큰 이익을 안겨줄 수 있는 방안을 제시해야만 할 상황이다. 박정희를 오래도록 보좌해온 누군가를 익명으로 인터뷰한 후 다니엘 튜더는 <기적을 이룬 나라 기쁨을 잃은 나라>에서 당시의 상황을 다음과 같이 묘사하고 있다.

“이병철은 모종의 방법으로 귀국하라는 설득을 받았고, 돌아오자마자 서울 모처에 감금됐다. 그러나 재능 있는 사업가이자 설득력 있는 화술의 소유자였던 이병철은 박정희 장군과의 협상 끝에, 그가 지닌 대부분의 재산을 국가에 ‘기부’하고 자신의 영향력을 이용해 다른 기업가들이 박정희가 제시하는 경제개발 전략에 따르도록 설득하겠다는 안을 내놓았다. 이 제안이 받아들여져 이병철은 오늘날까지 존속하며 기업인들의 이익을 대변하는 전국경제인연합회의 초대 회장이 되었다.”(36쪽)

대한민국의 기업과 정부의 관계란 바로 이렇게 형성되었다. 정권을 손에 쥔 자는 기업의 목에 칼자루를 들이댈 힘을 갖는다. 기업은 정치인에게 정치자금을 제공하며, 그 대신 정부의 경제발전계획에 따라 주요 사업에 참여할 권리와 더불어 해당 사업을 시작하는 데 필요한 자금을 시중 금리보다 훨씬 저렴하게 대출받을 수 있다. 물론 그 대출받은 돈 중 일부는 다시 정치인의 뒷주머니로 흘러들어가야 하겠지만 말이다. 이재용 측에서 최순실 딸 정유라의 말 구입 및 승마 비용을 지불해놓고도 그것이 뇌물로 제공된 것이 아니라 협박을 받아 내놓은 것이라고 항변하는 것에는 이러한 역사적 배경이 있다. 그러나 그들은 그렇게 ‘강제로’ 돈을 내놓으면 권력으로부터 더 많은 이권을 얻어낼 수 있다는 기대하에 행동했을 따름이다. 1961년 이병철이 불법적으로 ‘구속’될 때부터 2017년 이재용이 합법적으로 구속될 때까지 이어져온 게임의 법칙을 따른 것이다.

‘삼성 불구속 신화’는 없다. 깨진 것이 아니라 원래 없었다. 다만 재벌과 정권의 결탁이 너무도 일상적이고 자연스러운 것이었기에 그런 신화가 존재하는 것처럼 보였을 뿐이다. 이제는 가짜 신화가 사라진 자리에 공정하고 민주적인 시장경제를 수립할 때다.

노정태 | 자유기고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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박근혜 대통령과 최순실씨 측에 433억원의 뇌물을 준 혐의를 받고 있는 이재용 삼성전자 부회장에 대한 구속영장이 어제 법원에서 기각됐다. 조의연 서울중앙지법 영장전담 부장판사는 “뇌물 범죄의 요건이 되는 대가관계와 부정한 청탁 등에 대한 현재까지의 소명 정도 등에 비춰 볼 때 현 단계에서 구속의 사유와 필요성, 상당성을 인정하기 어렵다”고 기각 사유를 밝혔다. 지금까지의 특검 수사 결과로는 이 부회장에 대한 구속 요건이 충분하지 않다는 취지이다.

사법부 판단은 존중하지만 실망을 금할 수 없다. 인신 구속은 신체의 자유를 억압하는 등 개인에게 큰 피해를 주기 때문에 신중해야 한다. 법원은 수사에 미진한 점이 있고 의심이 들면 마땅히 구속영장을 기각해야 한다. 그러나 이 부회장의 구속영장 기각이 법과 원칙에 따른 것인지 의문이다. 수십명의 전관 변호사를 병풍처럼 세운 재벌 총수가 아닌 일반인이었어도 법원이 이처럼 결정했을까. 2300여개 시민사회단체가 참여하는 ‘박근혜정권 퇴진 비상국민행동’은 “법은 평등하지 않았고 상식은 또 한번 무너졌다”고 비판했다. 야당도 일제히 비판 성명을 냈다. 경제 위기론과 재계 및 보수세력의 압박에 법원이 무릎을 꿇었다는 지적도 있다. 당연한 반응이라고 본다.

지난 18일 서울중앙지법에서 구속영장 실질심사를 받고 서울구치소에서 대기하던 이재용 삼성전자 부회장이 19일 새벽 영장 청구가 기각되자 구치소 밖으로 나오고 있다. 연합뉴스

이 부회장의 핵심 혐의는 박 대통령 등에게 뇌물을 줬다는 것이다. 법원은 이 부회장이 박 대통령과 최씨 측에 건넨 433억원의 대가성이 명확하지 않다고 봤다. 이 부회장이 박 대통령과 최씨의 강요에 의해 어쩔 수 없이 돈을 냈다는 이른바 ‘피해자 논리’를 그대로 받아들였다. 하지만 이 부회장은 당시 경영권 승계가 걸린 삼성물산과 제일모직 합병 건으로 박 대통령과 정부 도움이 절실했다. 실제로 박 대통령의 지시에 따라 부정한 방법으로 국민연금공단의 지원이 이뤄진 정황이 있다. 특검은 이 부회장이 뇌물의 대가로 박 대통령에게 경영권의 안정적 승계라는 ‘부정한 청탁’을 한 것으로 규정했다. 특검은 “문형표 국민연금공단 이사장이 보건복지부 장관이던 2015년 6월 말 안종범 당시 경제수석 등을 통해 ‘삼성물산과 제일모직 간 합병이 성사될 수 있게 잘 챙겨보라’는 박 대통령의 지시를 전달받았다”고 밝혔다. 법원도 이를 인정해 문 이사장의 구속영장을 지난달 발부했다. 그래놓고도 이 부회장의 청탁과 이 부회장이 건넨 돈의 대가성은 인정하지 않았다. 법원 판단대로라면 일련의 사건이 모두 독립적으로 이뤄진 셈이다.

삼성은 미르·K스포츠 재단에 204억원 출연 외에도 최씨 모녀를 직접 지원했다. 재단 출연이야 다른 재벌·대기업도 했다지만 삼성은 승마 유망주 육성 명목으로 2015년 8월 최씨가 세운 독일의 페이퍼컴퍼니 코어스포츠(비덱스포츠의 전신)와 210억원 규모의 컨설팅 계약을 맺고 35억원가량을 송금했다. 많고 많은 사람 중에 최씨를 콕 집어서 지원한 것이다. 누가 봐도 비정상적이다. 법원은 이 과정에서도 부정한 청탁이 없다고 봤다. 이 부회장은 박 대통령에 대한 조사 없이 자신의 영장이 청구됐다는 점도 호소했고 법원은 이를 받아들였다. 그러나 수사 상황에 따라서는 뇌물 수수자보다 뇌물 공여자를 먼저 구속하는 경우도 있다. 특히 이번 사건은 최종 타깃이 박 대통령인 만큼 특검 입장에서는 이 부회장 신병 확보가 절실했다.

법원이 영장을 기각했다고 해서 이 부회장이 무죄라는 의미는 아니다. 특검도 이 부회장에 대한 수사 의지를 밝혔다. 이규철 특검 대변인은 “법원의 구속영장 기각 결정은 매우 유감이나 필요한 조치를 강구해 흔들림 없이 수사를 진행할 예정”이라고 말했다. 당연히 그렇게 해야 한다. 특검은 추가 증거가 확보되는 대로 이 부회장의 구속영장을 재청구해야 한다. SK·롯데·CJ 등 다른 재벌 총수의 뇌물 공여 의혹 수사도 계속돼야 한다. 특검의 분발을 촉구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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안종범 전 청와대 경제수석과 부영그룹 최고위층이 지난 2월 서울 롯데호텔에서 만나 박근혜 대통령의 비선 실세 최순실씨가 장악한 K스포츠재단 문제를 논의하는 회의록이 언론에 공개됐다. 재단 관계자가 “부영에서 체육인재 육성사업 5개 중 1개에 대한 시설 건립과 운영지원을 부탁한다. 70억~80억원 정도”라고 주문하자 이중근 부영 회장은 “최선을 다해 도울 수 있도록 하겠다. 다만 저희가 부당한 세무조사를 받게 됐다. 이 부분을 도와주실 수 있을지 모르겠다”고 대답했다. 권력과 금력의 노골적이고 추악한 유착의 현장을 이토록 생생하게 보여주는 광경이 또 있을까 싶다. 최씨 측의 안하무인식 지원 요청이나 그 대가로 세무조사를 없던 일로 해달라는 이 회장의 발상은 개발독재 시절을 연상케 한다.

'비선 실세' 최순실씨를 둘러싼 각종 의혹을 수사 중인 검찰 특별수사본부에서 조사를 받은 안종범 전 청와대 정책조정수석이 4일 새벽 조사를 마치고 서초구 중앙지검 별관에서 구치소로 향하는 차량에 탑승해 있다. 연합뉴스

최씨가 ‘조건이 있다면 놔두라’고 말해 거래는 없던 일이 됐지만 아직도 이런 시도가 있었다는 사실에 아연실색할 뿐이다. 부영은 사실과 다르다고 말하지만 회의록 작성자가 만남에 동참한 K스포츠재단 관계자임을 감안하면 부영의 해명을 믿기는 어렵다. 당시 부영은 세금탈루 혐의로 국세청 조사를 받고 있던 터였다. 국세청은 올 4월 부영을 검찰에 고발했지만 현재까지 제대로 된 조치는 이뤄지지 않고 있다. 앞서 삼성도 미르와 K스포츠 재단에 낸 출연금 204억원 외에 최씨의 딸 정유라씨의 승마지원을 위해 35억원을 송금한 사실이 확인됐다. 최씨를 지원하지 않았다는 그간의 얘기는 거짓이었다. 

기업들은 피해자라며 입을 다물고 있다. 하지만 정부와 기업 간의 관계에 대가성이 없을 리 없다. 당시 SK, CJ, 롯데의 총수들은 검찰 수사를 받던 상황이었다. 삼성은 이재용 부회장 승계작업을 진행하고 있었다. 총수 신병 문제와 관련되지 않은 재벌들도 정부의 우대를 기대했을 것이다. 기업들은 박근혜 정권에 노동5법, 원샷법, 서비스산업특별법 같은 것을 줄기차게 요구해왔다. 따지고 보면 회삿돈을 기업 최고위층이 자의적으로 판단해 재단에 출연하는 것 자체가 업무상 횡령에 해당할 수 있다.

조만간 정경유착의 실상은 드러날 것이다. 재계가 감추고 부인한다고 은폐될 일이 아니다. 재계는 이제 권력에 의존해 이익을 챙기는 낡은 방식이 지속가능하지 않다는 사실을 알아야 한다. 검은돈을 뿌려 부를 축적하겠다는 발상으로는 글로벌 기업이 될 수도 없다. 이 기회에 검은 거래를 끊기 바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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