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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 2014.09.29 우유부단한 ‘결정장애 세대’

물이 반쯤 담긴 컵을 바라보는 시각은 크게 둘로 나뉩니다. 하나는 물이 아직도 반이나 남아 있다고 보는 낙관주의자들입니다. 6개월 시한부 인생을 선고받아도 남은 인생을 실컷 즐기자며 광란의 파티를 즐길 사람들입니다. 다른 한 부류는 물을 단 한 번만 홀짝여놓고도 컵에 물이 반밖에 남아 있지 않다고 말하는 비관주의자들입니다. 그들에게 인생은 한숨과 고난의 연속입니다.

이들 말고 제3의 시각이 있습니다. 컵에 물이 반이나 남아 있다는 말도 맞고, 반밖에 남아 있지 않다는 말도 옳다고 말하는 그룹입니다. 그들은 개개인의 의견을 그다지 중요하지 않게 여깁니다. 아니, 심지어 문명의 퇴보로 여깁니다. “개개인의 주관적인 의견들 때문에 지금까지 애써 가꾸어온 조화로운 문화와 문명이 무너질 수 있다고, 제3차 세계대전까지 가지는 않겠지만 최소한 인류의 분열을 조장하고 인류 문화를 지금보다 야만적이고 미개한 것으로 되돌려놓을 수 있다고 우려”합니다.

그들은 <결정장애 세대>(올리버 예게스·미래의창)로 불립니다. 이 책의 원제는 ‘메이비 세대(Generation Maybe)’입니다. 메이비 세대는 모든 걸 공개하고 공유하는 최초의 세대입니다. 그들에게 사생활은 없습니다. 온라인 친구들과 삶의 모든 것을 함께합니다. 그들은 좌파도 우파도 아닙니다. ‘빅브러더’가 모든 것을 조종하는 상황이나 ‘보이지 않는 손’(즉 시장)이 지닌 무한한 힘도 믿지 않습니다. 그들 앞에는 너무 많은 선택의 기회가 놓여 있습니다. 울트라모던한 세상, 모든 것이 가능한 세상의 수많은 유혹들이 그들을 향해 손짓합니다. 그들이 원하는 게 무엇이든, 그들이 바라는 게 무엇이든 마우스 클릭 한 번이면 대체로 해결됩니다. 그러나 그들은 결정을 내리지 못합니다. 어딘가에 잘 정착하지도 못하고 한 가지 일에 잘 집중하지도 못합니다.

그들의 삶을 송두리째 뒤바꿔놓은 것은 스마트폰입니다. 스마트폰은 그들의 나침반이자 내비게이션인 동시에 중앙관제탑이자 항해일지입니다. 스마트폰으로 접근하는 소셜미디어는 잠깐 반짝하다가 사라지는 단순한 현상이 아닙니다. 그것은 몸에 좋은 음식, 편안한 집, 안정된 직장, 시원한 쾌변, 감동적 섹스만큼이나 삶의 필수 요소에 속합니다.

그들은 신을 믿지 않으니 종교도 없습니다. 대신 그들의 가슴속에는 신비주의나 축구, 건강, 환경보호, 애플, 소셜미디어 같은 ‘대안 종교’들로 가득 채워져 있습니다. 일요일마다 교회에 가는 대신 토요일마다 축구 경기장을 찾고, 아이패드 신제품이 출시될 때마다 실리콘밸리의 애플 본사 앞에 반원형으로 둘러서서 실시간 중계를 감상하곤 합니다.

‘메이비 세대’는 독일의 1982년생 저널리스트인 올리버 예게스가 독일 일간지 ‘디 벨트’에 기고한 한 편의 칼럼이 열렬한 호응을 받으며 페이스북과 트위터를 타고 삽시간에 유럽 전역으로 퍼져나가는 바람에 세상에 널리 회자되었습니다. 이 세대는 사실 지난날 ‘자기계발’ 이데올로기에 빠져 있던 이전 세대들과 크게 다르지 않습니다.


레나타 살레츨은 <선택이라는 이데올로기>(후마니타스)에서 “한국을 비롯한 선진국의 여성들은 특히 선택의 문제에 포위되어 꼼짝도 못하고 있다”고 말합니다. 그들이 매일 마주하는 풍부한 소비 선택지들 가운데 무엇을 선택할지 몰라서가 아니라 사생활에서도 완벽한 선택을 내려야 한다고 믿고 있기 때문이라는 것이지요. “몸매를 가꾸는 법, 욕망을 억제하는 법, 인생의 행로를 조종하는 법, 특히 죽음을 막는 법”에 관한 자기계발서들의 조언이 넘치는 가운데 사랑, 정서, 몸과 건강, 심지어 자녀마저도 선택의 문제로 제시되다 보니 어떤 선택을 해야 할지 갈피를 잡지 못하게 되었다는 것입니다.

레나타 살레츨은 선진국 소비자들이 선택 앞에서 무력해지는 이유는 선택할 수 있는 물품이 지나치게 많다는 데 있는 게 아니라고 말합니다. 오히려 오늘날 만연한 선택 이데올로기가 점점 소비자들의 불안감과 부족감(부적절하며 남보다 못하다는 느낌)을 증가시키고 있다는 것이 문제라고 말합니다. 일류 대학을 나와 좋은 직장에 탄력 있는 몸, 자기 집, 심지어는 근사한 남편이 있음에도 몹시 불만족스러워하면서 다시 수많은 선택을 해야 하는 것에 불안해하는 것이라는 겁니다. 그래서 런던의 유명 레스토랑이 한 가지 메뉴만 제공하기 시작하자 문전성시를 이루고, 한국의 중국집이 만든 아이디어인 ‘짬짜면’이 인기를 끌기도 합니다.

일본의 ‘동양경제’ 2013년 7월27일자의 특집 ‘U40은 어떤 사춘기를 보내왔는가-주요 디지털 기기·서비스와 U40의 역사’는 휴대전화 세대(20대 후반)와 스마트폰 세대(20대 전반)의 차이를 분석한 바가 있습니다. 무리하기보다 할 수 있는 일만 하려는 경향이 있는 스마트폰 세대는 자신들을 ‘얕잡아 보는 시선’이 아니라 자신과 같은 시선으로 바라봐주는 상사를 원한다고 합니다. 이 세대는 적당히 출세하자거나 적당히 사귀자는 등 ‘적당’이라는 말을 입에 달고 산답니다.

올리버 예게스의 지적대로 ‘메이비 세대’는 일시적인 ‘청년의 위기’가 아니라 ‘평생의 위기’에 빠져 있을 겁니다. 그는 “우리가 지닌 능력보다는 우리가 내리는 결정이 우리의 진정한 모습을 더 많이 보여준다”는 조앤 K 롤링의 <해리포터>에서 호그와트 마법학교의 교장 알버스 덤블도어가 한 말을 인용했습니다. 아마도 이 말에 문제 해결의 해법이 담겨 있지 않을까요?


한기호 | 한국출판마케팅연구소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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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osted by KHross