L 전 장관님, 안녕하십니까. 아마 안녕할 수도, 안녕하지 못할 수도 있겠네요. ‘2010년 안태근 전 검사가 장례식장에서 서지현 검사를 성추행하고, 이를 법무부에서 조직적으로 은폐한 사건’에 대해 검찰 내부에서 조사단이 꾸려져 조사를 벌이고 있으니까요. 조사단은 그 자리에 함께 있던 L 전 장관님도 조사 대상이라고 밝혔습니다. 조사단에 출석하는 일이 번거롭고 성가시게 느껴질 수도 있겠습니다.

하지만 다들 궁금해하고 있습니다. 8년 전 당신을 수행하던 안태근 전 검사가 후배 검사를 성추행하던 그 시간과 장소에서 L 전 장관님은 무엇을 보고 들으셨는지요. “내가 이놈을 수행하는 건지 이놈이 나를 수행하는 건지 모르겠다”고 하신 발언은 무슨 뜻이었는지요. 아마 조사단에서 답변을 하게 될지도 모르겠습니다.

어쩌면 당신은 안녕할 수도 있습니다. 성폭력 사건에서 지금까지 안녕하지 못했던 쪽은 주로 피해자였으며, 안녕했던 쪽은 가해자였으니까요. 하물며 일개 ‘목격자’에 불과한 당신의 안녕 여부에 이 사건은 큰 영향을 미치지 못할 수도 있겠군요.

목격자에 불과한 당신을 수신인으로 하는 이 글이 불쾌할 수도 있겠습니다. 하지만 때로 아무런 일도 안 하는 것이 가장 큰 잘못입니다. 높은 자리에 있는 사람일수록 그렇습니다. 당신은 법무부 장관으로서, 검찰 선배로서 후배 검사가 강제추행을 당하는 현장에 있었습니다. 성추행 사건이 조직적으로 은폐되는 동안 법무부를 총괄하는 장관이었습니다. 하지만 당신은 아무런 일도 하지 않았습니다.

어쩌면 당신은 눈감고 귀 막은 게 아닐지도 모릅니다. 실제로 안 전 검사가 성추행하는 장면이 보이지 않았을지도 모릅니다. 모멸감과 수치심, 혼란과 고통으로 일그러진 서 검사의 모습과 그가 속으로 내지르던 비명이 들리지 않았을지도 모릅니다. 검찰 조직 내의 만연한 성폭력은 어제오늘 일이 아니니까요. 그저 술자리에서 벌어질 수 있는 ‘흔한 풍경’ 중 하나로 특별할 것이 없었을지 모릅니다.

8년 전 그 자리에서 당신이 한마디만 했더라면, 성추행을 제지했다면, 백번 양보해 성추행 사실을 인지하지 못했더라도 그 이후 문제가 됐을 때 가해자를 확실히 문책했더라면 많은 것이 달라졌을 것입니다. 하지만 당신의 침묵은 서 검사에게 성추행으로 인한 고통에 더해 인사 불이익이라는 ‘2차 가해’를 했습니다. 나아가 많은 성폭력 피해자들에게 좌절감을 안겨줬습니다. 법무행정을 담당하는 부처의 수장이 함께한 자리에서 버젓이 성추행이 이뤄졌다는 것은 우리 사회와 법제도가 얼마나 성폭력에 무감각한지를 잘 보여주기 때문이죠. 당신은 어쩌면 성폭력 피해자들의 목소리를 지워오는 데 가장 앞장서 있었던 것일지도 모릅니다.

물론 당신만 잘못한 것은 아닙니다. 당신을 장관으로 임명한 이명박 전 대통령도 여성 비하적 발언으로 구설에 올랐습니다. “마사지걸을 고를 때 얼굴이 덜 예쁜 여자를 골라야 서비스가 좋다”는 이른바 ‘마사지걸 발언’ 등으로 여성단체가 주는 ‘꿰매고 싶은 입’ 상을 두 차례 수상하기도 했습니다. ‘그 대통령에 그 장관’이라는 말이 떠오릅니다. 문화계라고 다를 바가 없습니다. 문학계의 대표 시인, 영화계의 대표 감독이 성추행과 폭력으로 논란의 중심에 섰습니다. 그러니 이 글의 수신인은 당신과 비슷한 얼굴을 가진 수많은 남성, 성폭력을 방조하고 묵인한 사회 구조이기도 합니다.

“한 여자가 자기 삶에 대해서 진실을 말한다면 어떻게 될까? 아마 세상은 터져버릴 것이다.” 미국 시인 뮤리엘 루카이저의 말입니다. 하지만 그동안 파괴되고 무너진 것은 오히려 피해자들의 삶이었습니다. 이번만은 달랐으면 좋겠습니다. ‘진실’을 외쳐온 수많은 여성들의 목소리가 거센 물살이 되어 조금씩 둑을 무너뜨리기를 바랍니다. ‘진실’을 말하기를 멈춘 적 없는 여성들은 계속 외칠 것입니다. 정말 세상이 터져버릴 때까지.

<토요판팀 | 이영경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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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학원 다닐 때 들은 얘기다. 인문대 신임 교수가 술자리에서 성추행하는 장면을 목격한 대학원생들이 그 교수에게 찾아가 다시 이런 일이 발생하면 가만있지 않겠노라 경고했더니 그 다음부터 아예 술자리에 나타나질 않았단다. 그 교수가 누구인지, 그 후로도 문제가 없었는지는 알지 못한다. 그럼에도 30여년 전 흘려들었던 이 얘기가 여전히 기억에 남아 있음은 교수의 잘못된 행동에 즉각 응분의 조치를 취한 학생들의 행동이 인상적이었기 때문이리라.

당시 음대에도 성추행을 일삼는 교수가 있었다. 학생회가 이 문제를 공식 제기했지만 학교는 그를 잠시 해외에 나가있게 하는 걸로 무마했고 얼마 후 그는 다시 복귀했다. 실험실에서 벌어진 교수의 성희롱을 고발한 한 조교의 용기로 대학 내 성희롱 문제가 공론화되기 시작했으나, 그로부터 25년이 지난 지금까지도 대학사회의 권력형 성범죄는 여전하고 피해자 다수의 목소리는 들리지 않는다. 최고 권력기관인 검찰 내 여검사들조차도 성추행 가해자를 폭로하는 것이 어려운 사회에서, 하물며 아무런 힘도 없는 학생들이 교수들의 성희롱과 성추행에 제대로 대처하기란 불가능한 일이다. 수년 전 교수들의 성추행 사건이 사회적 이슈가 되며 파면에 이른 경우도 있었지만, 성희롱을 가볍게 여기는 남성중심 문화, 성추행이 밝혀져도 기껏해야 정직 몇 달에 그치는 교수사회의 온정주의는 달라지지 않았다.

2016년 가을, 문화예술계 성폭력 문제가 대두되며 피해자들이 발언하기 시작했을 때 우리 사회 곳곳에 만연한 성폭력의 심각성이 다시 한번 적나라하게 드러났다. 문단, 미술계, 영화계는 물론이고, 예술학교에도 피해자들의 고발이 쏟아졌다. 하지만 클래식 음악계는 조용했다. 피해자가 없어서가 아니라 내부 고발이 어려운 집단이어서다. 오랜 기간 일대일 레슨으로 형성된 교수와의 수직적 관계는 평생 음악 활동의 기반이고 그 관계를 벗어나 살아남기란 쉽지 않기 때문이다. 수년 전 사회적 공분을 일으킨 제자 성추행 문제로 파면에 이른 음대 교수를 제자들이 옹호하며 피케팅을 하고 거리음악회를 열었던 것은 이런 처지를 단적으로 보여주는 씁쓸한 사례다.

일부 음대 교수들의 행태에 대한 소문은 파다하지만, 영향력이 큰 인물일수록 학생들도 그와 이해관계를 공유하기에 내부 문제는 밖으로 발설되지 않는다. 지난 몇년간 신문 사회면을 장식한 음대 교수들의 폭언, 폭행, 티켓 강매, 성희롱, 성추행 사건들은 안에서 곪고 곪아 터져 나온 것들이었다. 문제가 드러나야 개선도 가능하다는 점에서 이런 논란을 부정적으로만 볼 것도 없다. 뼈아픈 반성을 하고 그것을 수습하는 과정에서 장기적으로는 그 집단이 더 나은 방향으로 나아가는 계기가 될 수도 있으니까. 오히려 문제는 성폭력을 비롯한 온갖 잘못된 관행들을 학생들이 당연시하거나 체념해버리고 가해자의 입장에서 침묵하도록 강요받는 데 있다.

돌이켜보면 나 또한 우리 사회에 만연한 성폭력 문제에 민감하지 못했다. 용기를 낸 피해자들의 목소리 덕에 간과했던 문제를 깨달았고, 여전히 강고한 편견에 맞서 싸우게 될 그들 옆에서 목소리를 더하는 것이 필요함을 알게 되었다. 성폭력은 누구에게나 벌어질 수 있는 일이고, 직접 경험하지 않았다 하여 외면할 수 없는 우리 모두의 문제다. 권력관계에서 약자에 놓인 수많은 이들이 일상적으로 마주하는 현실인 것이다.

지난해 할리우드에서 시작된 ‘미투 운동’은 세계적인 노 지휘자 두 사람의 수십년 전 성범죄 고발로까지 이어졌다. 대개 권력을 쥐고 있는 자들은 자신의 문제가 드러나지 않을 거라 확신한다. 하지만 세월은 가고 세상은 바뀌며 사람들의 가치관도 변화한다. 뒤늦게 잘못을 뉘우친 가해자가 피해자에게 진심으로 사과하며 용서를 구하는 모습을 기대하는 건 너무 낭만적인 생각이다. 성추행과 성폭행 피해자 156명의 증언을 일일이 경청하고 격려하며 가해자에게 175년을 선고한 미국 여성 판사의 얘기가 단지 먼 나라의 일이 아니기를… 앞서 용기를 낸 수많은 여성들의 목소리가 우리를 일깨운다.

<이희경 음악학자·한예종 강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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열다섯 살에 피아노학원 원장 남편에게 성추행을 당했다. 서울 시내 대형교회 성가대 지휘를 맡고 있다는 장로였다. 피아노를 전공하는 두 딸이 있어 집에 몇 대의 피아노를 두고 아이들을 가르치는 가정식 학원이었다. 90이 넘은 노모와 원장이 늘 집에 있었는데, 그날은 남편 말고는 아무도 없었다. 나중에 다시 오겠다고 하자 괜찮다며 피아노가 있는 방으로 나를 데려갔다. 처음에는 아무 일도 없었다. 아무도 없는 집에서 연습하는 게 불편해서 일어나려고 하자 자신이 가르쳐주겠다며 뒤에서 불쑥 껴안고 더듬기 전까지는 그랬다. 엄마는 울면서 돌아온 내게 아빠에게는 절대 말하지 말라고 했다. 더 몹쓸 일 겪지 않고 도망쳐 나와 다행이라고 했지만 그것은 과연 다행이었을까.

나는 내가 성추행을 당했다는 사실을 주위 사람들에게 들킬까봐 두려웠다. 그래서 아무 일도 당한 적 없는 아이처럼 굴었다. 그날 학원에 입고 갔던 점퍼를 몰래 버리고, 그 집에서 끓이던 청국장 냄새를 지나가는 길에서라도 맡으면 구역질을 했지만 그 일에 대해서는 한마디도 꺼내지 않았다. 그가 나에게 무슨 짓을 했는지는 나이를 먹을수록 더 이해가 잘됐다. 그럴수록 나는 내 안에서 점점 나쁜 아이가 되어갔다. 직장에 다니면서 몇 번의 성추행을 더 경험했다. 자신을 아빠처럼 오빠처럼 대하라면서, 아빠이고 오빠라면 근친상간의 범주에 들어갈 짓을 다정과 격려로 포장하는 남자들이 권력을 잡은 나라에서 여자들은 성추행, 성희롱을 일상처럼 경험한다.

그러나 이 고백은 #METOO가 아니다. 나는 #METOO로 인해 이 고백을 시작하지 않았다. 한국성폭력상담소가 실시하는 ‘성폭력 생존자 말하기 대회’는 2003년에 시작되었다. 지난해에는 문단성폭력을 비롯하여 예술계의 권력형 성범죄에 대한 폭로가 SNS를 기반으로 쏟아졌다. 정부기관에서는 실태 조사를 위한 설문지를 작성하기도 하였다. 많은 예술단체들이 자체조사를 약속했고, 교육과 처벌을 다짐했다. 그 일이 불과 얼마 전인데, 마치 처음 있는 일인 것처럼 서지현 검사의 성추행 고백이 대대적으로 보도되던 즈음 나는 스스로 세상을 떠난 한 젊음의 부고를 들었다. 숨겨진 문단성폭력 피해자였다. 미투 운동이 벌어지기 전 SNS를 통해 쏟아졌던 여러 가지 문단성폭력 사례들은 극히 일부만 처벌받고, 대부분은 법적 심리를 다퉈보지도 못했으며, 해석의 여지가 많은 어떤 판례 때문에 ‘꽃뱀’이나 ‘자기망상’으로 도리어 비난받은 증언 피해자들도 있다. 

대부분의 권력형 범죄가 그러하듯 가해자들은 복원되고 피해자들은 다시 숨었다. 그런 상황에서 불거진 미투 운동에 대한 관심을 지켜보는 마음이 나는 매우 불안하다. 이제까지 국내에서 이루어진 많은 성폭력 사례와 고백과 증언에 대한 언급 없이 새로운 바람, 새로운 경향으로만 미투를 읽는 시선이 어쩐지 자신의 과오는 진작 알아서 용서해버린 가해자의 것과 닮았다고 느껴지는 것이다.

지난 연말 아픈 마음으로 힘들게 읽었던 책이 있다. &lt;용서의 나라&gt;(토르디스 엘바, 톰 스트레인저 저/권가비 역/책세상)라는 책이다. ‘성폭력 생존자와 가해자가 함께 써내려간 기적의 대화’라는 부제를 달고 있는 이 책을 두고 용서,라는 표현 때문에 분노하는 이들이 많았다. 나 또한 그런 이유로 선뜻 읽지 못했던 책이기도 하다. 그러나 막상 읽은 이 책은 용서하기에 대한 책이 아니라 용서받기에 대한 책이었다. 가해자가 피해자에게 제대로 용서를 구하는 일이 얼마나 중요한지, 무엇을 어떻게 용서받아야 하는지에 대한 이야기였다. 그리고 그 용서가 피해자를 어떻게 복원시키고, 회복시키는지의 과정을 아프게 지켜보면서, 나는 가해자조차 제대로 지목하지 못한 이 땅의 피해자들을 떠올렸다. 억울과 수모라는 말로 스스로를 복원시킨 이들, 때로는 신의 이름으로 기꺼이 자신을 용서한 이들, 그리하여 다른 가해자를 조사 처벌하겠다고 시치미 떼고 나선 가해자까지 존재하는 이 나라에서 비로소 한번 더 관심 받는 미투는 삭제되지 않고, 왜곡되지 않고, 살아남아 그들의 사과를 받을 수 있을까.

<한지혜 | 소설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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검찰 조직 내 성폭력, 성추행 사건이 한 여검사에 의해 드러났다. 한국 최고의 권력 조직 내, 최상의 전문직이라 여겨지는 검사도 성폭력의 대상이 되어 고통받고 차별받는 현실을 폭로한 이번 사건은, 역사상 가장 오래된 성계급 체계가 있다는 사실을 새삼 환기한 것이다. ‘여성’은 여전히 상수처럼 존재하는 가장 열등한 계급이다.

사회적으로 많이 진출했다 하지만 실제 여성에 대한 인식은 크게 변하지 않았다. 남성의 충실한 내조자 혹은 부속품, 육아와 양육을 전담하는 존재, 남성의 성적 욕구를 만족시켜주는 ‘용기’라는 인식은 그 뿌리가 흔들리지 않은 채 각종 기술의 발전에 힘입어 변주되고 발전해 왔다. 예전의 ‘빨간책’은 디지털화되어 폭력적 이미지들을 쏟아내고 여성은 발가벗겨진 채 알 수 없는 표정으로 남성들의 눈요깃거리가 되고 있다. 기생집은 룸살롱으로, 집창촌은 오피스텔로 온라인·오프라인을 넘나들며 횡행하는 성산업은 여성을 사고, 팔고, 비하하고, 때리고, 강간한다.

한국여성단체연합, 전국성폭력상담소협의회 등 40여개 시민사회단체가 1일 전국 16개 검찰청 앞에서 검찰 내 성차별, 성폭력 의혹 진상규명을 위한 기자회견을 열었다. 서울 서초구 대검찰청 앞에서 진행된 기자회견에서 한 참석자가 발언하고 있다. 창원지방검찰청 통영지청 서지현 검사는 지난 1월 19일 한 방송사에 나와 법무부 간부였던 안태근 전검사에게 성추행을 당했다는 과거의 사실을 인터뷰를 통해 밝혔다. 1일 서울 서초구 대검찰청 앞에서 기자회견을 연 한국여성단체연합·전국성폭력상담소협의회 등 시민사회단체 회원들이 ‘#미투’라고 쓰인 손팻말을 들고 검찰 내 성차별, 성폭력 의혹 진상규명을 촉구하고 있다. 김창길 기자

이 같은 현상이 사라지지 않은 상태에서 공적 영역에 진출한 여성은 두 가지 역할을 여전히 수행해야 하는 압력을 느낀다. 남성과 함께 업무를 수행하는 자리에서도 여성은 어리고 예쁘고 날씬하고 순종적이어야 하며 남성이 요구하는 어떤 것에도 ‘눈 똑바로 뜨고’ 저항해선 안된다. 적당히 똑똑하고 적당히 일 잘하며 안팎으로 두루두루 살피는 돌봄의 태도까지 갖추어야 한다. 결혼을 해도 문제고 안 해도 문제며, 아이를 낳아도 문제고 낳지 않아도 문제가 된다. 시시때때로 이어지는 성차별적 발언과 성적 괴롭힘, 느닷없는 성적 접촉에도 순응해야 하고, 심지어 분위기를 깨지 않기 위해 적당히 웃어줘야 하며 웬만해선 참아야 살아남는다. 성폭력의 피해자가 되어도 꽃뱀으로 낙인찍히지 않기 위해, 2차 피해를 걱정하며, 공론화해도 해결되지 않을 것이라고 짐작하곤, 조직의 안위까지 생각하며 입술을 깨물고 삭여야 한다. 서지현 검사가 용기 내어 말하는 데 8년이나 걸린 이유다. 여성은 사실상 단 한번도 남성과 동일한 잣대로 평가받은 적도, 동등한 시민이자 사회의 일원으로 존중받은 적도 없다.

이제 어떻게 해야 하나. 우선, 성폭력이 성차별적 사회에서 발생하는 구조적 폭력의 문제라는 사실을 인지할 필요가 있다. 가시적인 잘못을 저지른 특정인들의 주관적 악행이 아니라, 겉으로 보기에 정상적이고 객관적인 사회적 과정의 결과물인 구조적 부정의로 접근해야 한다는 의미다. 

성폭력이 구조적 문제인 이유는 차별을 당하는 집단에 대한 특권이나 지배를 유지하려는 욕구, 혹은 약자로 낙인 찍힌 자들을 지속적인 피해자로 삼고자 하는 권력의지가 발현된 결과물이며, 위계화된 성별 질서에서 배태되어 불공정한 결과를 야기하고 성별 권력관계를 재생산하기 때문이다. 특정 집단에 속했다는 이유만으로 일생을 위협 속에서 살아가게 방치하는 것, 이들에 대한 폭력 행위들을 가능하게 하고 용인하는 것, 그래서 약자에 대한 지배와 통제가 정상적인 것이라는 메시지를 전달하는 것, 다시 피해자들을 암흑의 고통 속으로 몰아넣는 것, 결과적으로 이들의 자유와 존엄성을 박탈하는 것, 그 자체가 구조적 부정의가 아니고 무엇인가.

그러므로 이번 사건에 대한 명명백백한 진상규명과 관계자 처벌은 문제해결의 선결과제이자 첫걸음에 불과하다. 국가인권위원회의 직권조사와 법무부 내 성희롱·성범죄 대책위원회 설치는 반가운 일이다. 그러나 검찰조직 내 ‘불미스러운’ 문제로 축소되어선 안된다. 개인의 도덕적 흠결의 문제이거나 특수 조직의 성추문 사건이 아니다. 피해자에 대한 각종 외모품평회를 일삼으며 사생활을 캐고, 적반하장식 책임전가에 정치적 의도를 의심하는 이들이 넘쳐나고 있다. 이들은 역설적으로 가장 오래된 적폐가 우리 사회 전반에 뿌리 깊은 성차별적 구조임을 웅변 중이다.

이제 프레임의 대전환이 필요하다. 성폭력, 가정폭력, 여아학대, 성매매, 음란물, 스토킹, 데이트강간, 디지털성폭력, 인신매매 등은 ‘여성문제’가 아니다. 대부분의 가해자가 남성이고, 남성들의 의식과 무의식이 전면적으로 개조되지 않는 한 지속적으로 발생하는 문제라면, ‘남성문제’ 아닌가. 무지가 면죄부를 주던 시대는 끝났다. 여성에 대한 폭력을 묵인하고 동조하고 정상화하고 비가시화하며 성차별적 구조를 재생산하는 무지는 명백한 범죄행위다. 그러므로 목격자가 되었을 때 침묵하지 않겠다는 ‘미퍼스트’(#MeFirst) 선언만으로는 부족하다. 일생을 통해 누적된 가해자성을 되돌아보고 성찰하고 반성하는 자세가 우선이다.

들불처럼 번지는 각계각층 여성들의 ‘미투(#MeToo)’운동은 이제 남성들의 변화를 절실히 요청하고 있다. 변혁의 갈림길에서 당신은 무엇을 선택할 것인가. 인식의 지체현상을 깰 것인가, 과거에 머물 것인가.

<이나영 | 중앙대 교수·사회학>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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군에 특별 경계령이 내려진 지난 6월 신현돈 1군 사령관은 작전 지역을 벗어나 술을 먹고 만취했다. 그는 군화가 벗겨진 채 수행원에게 업혀 다닐 정도로 인사불성이었다. 그 사건이 알려진 며칠 뒤에는 동부전선 일반전초(GOP) 소속 임 병장이 총기를 난사했다. 그로부터 보름 뒤 한 초등학교에서 육군 소령은 북한 실체를 강의한다며 강제 낙태, 영아 살해, 잔인한 고문이 담긴 동영상을 보여주었다. 피가 뚝뚝 떨어지는 그림을 여과 없이 보여준 이 장면에 놀란 어린 학생들은 비명을 지르고 울었으며 그 때문에 다음 수업을 제대로 하지 못했다고 한다. 이 강연의 제목은 ‘나라사랑 교육’이었다. 다시 보름쯤 지나 상습 폭행과 괴롭힘으로 사망한 윤 일병 사건이 밝혀졌다. 그리고 두 달 보름 뒤에 검찰은 해군구조함인 통영함의 비리 혐의로 방위사업청 사업팀장이었던 전 장교를 구속했다.

그로부터 열흘이 지난 어제는 사단장이 부하 여군을 성추행한 혐의로 긴급 체포됐다. 이 여군은 그 전에도 다른 상사로부터 성추행을 당한 바 있다. 지휘관이라면 이런 부하를 보호해야 할 책임이 있다. 그러나 그는 대신 5차례나 성추행을 했다. 마음의 상처를 입은 여군에게 지휘관으로서 상상할 수 없는 짓을 한 것이다. 한민구 국방장관은 부랴부랴 전군 지휘관 회의를 개최하며 군기를 강조했지만, 나아질 것이라는 기대감이 생기지 않는다. 최근 몇 달 사이 발생한 다양한 사건을 보면 우연의 연속이라고 보기 어려운 반복적인 패턴, 고질적 성격이 드러나기 때문이다.

첫째, 장교들에게 명예심이 없다. 빛나는 계급장에 어울리는 자부심도 책임감을 찾을 수 없다. 대신 그 빈자리를 차지하고 있는 건 적나라한 물욕, 치사한 권력이다. 둘째, 병영의 폭력성이다. 지휘권 우선, 왜곡된 군사 규율을 고집하느라 인권 부재의 폭력적 군사문화를 바꾸지 못하고 있다. 셋째, ‘나라사랑 교육’에서 드러난 바와 같이 유신 권위주의에서 벗어나지 못하고 있다. 아이들에게 가르쳐야 할 것은 혐오와 증오가 아니라 군이 지키려는 가치다. 하지만 그런 게 없으니 엽기적 수준의 교육밖에 할 줄 모르는 것이다.

10일 오전 서울 용산 국방부 청사에서 국회 법재사법위원회 소속 국정감사가 열려 새정치민주연합 서영교 의원이 육군 사단장 성추행 사건에 대해 질의하고 있다. (출처 : 경향DB)


최근 일련의 사건은 군의 예외성을 드러내는 것이 아니라 한국 군대의 특질이자, 군사문화가 낳은 것들이다. 이는 군이 민주화 이후에도 사회로부터 고립된 채 성역으로 대접받은 결과이다. 이런 사건의 연속극을 더 이상 보고 싶지 않다면 이제라도 군에 의한 군 통제가 아닌, 민에 의한 군 통제, 즉 문민통제를 해야 한다. 그게 민주화된 군대의 원칙이다. 군의 민주화, 더 이상 늦출 수 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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