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법부가 정의를 세우지 않고 성폭력에 대한 편견을 세웠다. 8월14일 ‘안희정 전 지사 성폭력 사건’ 1심 선고는 피고인을 심판하지 않고 피해자를 심판한 부정의한 판결이다. 업무상 위력을 작동시키는 불평등한 권력관계를 해석할 의지와 역량이 없음을 이번 판결은 보여준다. 페미니즘 대통령을 선언한 대한민국 정부에서 사법부가 비슷한 범죄를 저지른 수많은 가해자들에게 면죄부를 준 ‘사건’이다.

[김용민의 그림마당]2018년8월16일 (출처:경향신문DB)

재판부는 “정상적 판단력을 갖춘 성인남녀” 간에 성적자기결정권 침해로 보기 어렵다고 판단했다. 성적자기결정권이 모두 국민에게 동일하게 주어지고 행사할 수 있는 권리일까? 노동권, 교육권, 참정권 등 헌법에 명시된 기본권은 모든 국민에게 평등하게 실현되어 왔는가? 피해와 차별을 경험한 사람의 위치에서 권리가 실현되도록 싸워야 하는 현실이다. ‘왜 성적자기결정권을 명확하게 행사하지 않았는가’란 질문은 경사로 없는 투표소를 만들어 놓고 장애인에게 ‘참정권 보장하는데 왜 투표 안 해’라고 질문하는 것과 같다. 피해자는 성폭력이 일어난 다음날에도 피해 사실을 표현하지 못하고 일해야 하는 처지에 있는 여성 노동자였다. 24시간 언제든 대기해야 하는 수행원, ‘맥주, 담배’ 단어만으로 지시가 가능한 권력. 일상적으로 안 전 지사가 수행원들과 맺은 업무관계는 권위적이었다. 공무수행이란 명목으로 수행업무라는 ‘일’은 공사, 시간, 장소 구분 없이 안 전 지사가 원하는 때와 방법으로 요구되었다. 그것이 수행원의 역할이자 역량으로 평가되었을 것이다. 물리적 폭력 없는 위력이 발생할 수밖에 없는 구조다. 고용허가제로 사업주 동의 없이 사업장을 변경할 수 없는 이주여성이 사업주의 성폭력을 신고할 수 있는가? 거주시설 원장이 가해자인 경우 장애여성은 저항하기 쉬울까? 성별 권력은 수많은 불평등과 함께 작동한다.

정상적 판단능력은 개인들이 권리를 보장받기 위해 갖춰야 할 조건이 아니다. 웃으며 거절해도, 고개를 숙이며 작은 목소리로 말해도, 거절할 수 없는 위치에서 보이는 난처함도 그것이 거절의 메시지임을 상대방이 받아들여야 한다. 결정권을 행사해도 인정하지 않는다면 개인의 판단능력은 무용지물이다. 피해자의 판단능력이 아니라 거절을 이해하고 수용하는 능력을 가해자들에게 질문해야 한다. 한편으론 장애인 피해자에게 판단능력 없음이란 기준을 쉽게 적용한다. 피해자다움에 장애를 대입시킴으로써 성적자기결정권의 ‘보호’ 측면만을 강조하는 것은 성적 주체성을 제한하고 차별하는 것으로 이어진다. 결국 한국 사회에서 피해자의 성적자기결정권은 어떤 방식으로든 피해자다움이란 요건을 갖춰야 보호법익이 작동된다. 피해자를 믿지 않고 피해자다움을 믿는다.

이미 기울어진 저울에 서서 시작된 재판. 가해자 편에서 피해자에게 질문하기를 중단해야 부당한 판결을 끝장낼 수 있다. 그러나 수십년이 지나도록 사법부가 성폭력에 대한 감수성이 낮다면 어떻게 해야 할까? 지난 6월 미국 캘리포니아주는 성폭행 가해자인 스타 수영선수에게 솜방망이 처벌을 내린 애런 퍼스키 판사를 주민투표로 해임시켰다. 판사소환제도가 없는 한국에선 어려운 일이지만, 사법권력의 관점과 판단의 변화를 촉구하는 싸움이 적극적으로 필요한 시기다.

무엇보다 다시 태어나겠다는 안 전 지사의 말은 끔찍하다. 처벌과 반성 없이도 다시 태어날 수 있는 권력과 권세를 가진 자들의 공모가 무죄를 만들었다.

<이진희 | 장애여성공감 사무국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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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날은 8월14일, 일본군 ‘위안부’ 기림일이었습니다. 27년 전, 고 김학순 할머니께서 강철보다 단단한 벽을 넘어 너무나도 어렵게 그러나 너무나도 당당하게 수많은 기자들이 모인 곳에서 자신의 경험을 밝힌 날이었습니다. 자연스러운 남성의 성욕이자 여성의 숙명으로 여겨져 피해자가 감추어야 할 정조에 관한 죄일 때, 가문의 수치이자 민족의 수치로 손가락질당할 때, 바로 그 일이 가부장제와 식민주의, 군사주의가 공모한 어마어마한 성폭력 범죄행위임을 낱낱이 전 세계에 알린 그날이었습니다. 가족과 공동체, 국가가 모두 외면하던 시절, 피해자가 생존자로 다시 활동가로 거듭나면서 수많은 다른 피해자들의 손을 잡기 시작한 그날, 전 세계를 돌며 ‘거리에서, 강연장에서, 법정에서’ 피해 사실을 알리고 진실을 규명하고자 했던 그래서 체계적이고 구조적인 성폭력과 강간캠프라는 개념을 통해 세계 인권규약을 다시 쓰기 시작했던 그날, 그 정신을 기려 일본군 ‘위안부’ 피해자 국가기림의 날로 지정된 그날, 대통령이 “우리 자신과 일본을 포함한 전 세계가 전체 여성들의 성폭력과 인권문제에 대해 깊이 반성하고 다시는 되풀이하지 않겠다는 굳은 각성과 교훈으로 삼”자고 강조한 그날, 대한민국은 당사자들로부터 ‘많은 것을 빚졌고 많은 것을 배웠다’고 선언한 그날, 바로 그날이었습니다. 당신들은 아무것도 빚진 것이 없다고, 성폭력과 여성인권에 대해 아무것도 배운 것이 없다고 뻔뻔하게 선언했습니다. 사회적 타살을 감내하며 어렵게 나온 피해자들의 입을 다시 봉하는 판결을 감행했습니다.

문재인 대통령이 14일 충남 천안시 국립망향의동산에서 열린 ‘일본군 위안부 피해자 기림의날’ 첫 정부 기념식을 마친 뒤 피해자인 김경애 할머니에게 인사하자 김 할머니가 문 대통령의 얼굴을 어루만지고 있다. 청와대사진기자단

그날은 코소보, 예멘, 우간다, IS 성폭력 생존자들이 기림일을 맞아 ‘일본군 성노예제 문제해결을 위한 정의기억연대’가 개최한 국제심포지엄에 참가해 각자의 경험을 증언하고 손잡던 날이었습니다. 생존자들이 나서서 조직적 성폭력의 의미를, 현실을, 그 참혹한 결과를 알리고 저항하며 세상을 바꾸자고 결의하던 날이었습니다. “한국의 강인한 (일본군 ‘위안부’) 생존자분들은 저희의 영웅이십니다. 견디기 힘들고, 가슴이 찢어질 듯하고, 끔찍하고, 고문과 같고, 위안이 되기 어려운 아픔과 함께 살아야 하는 절망의 깊이 속에서도 여러분들은 저희에게 영감이 됩니다”라고 말하며 연대를 다지던 그날, 증거를 인멸하고, 피해자들에게 입증을 요구하고 공소시효가 지났다고 발뺌하고 피해자의 행실과 자격을 묻고 진술의 신빙성을 의심하고 심지어 없었던 일, 꾸며낸 일, ‘거짓말쟁이’ ‘더러운 ○○’라며 온갖 욕설과 수치심을 안겨 준 가해자들, 그리고 그 옹호자들과 힘겹게 싸워온 지난 세월을 서로 나누던 그날, 일본군 ‘위안부’ 생존자 김복동 할머니께서 여성들의 ‘광복’과 명예회복의 의미를 다시 확인시키던, 바로 그날이었습니다. 당신들은 피해자를 피의자로 완벽히 둔갑시킨 판결문으로 가해자에게 무죄를 선고했습니다. 위력의 존재와 위력의 행사를 구분하며, 피해자의 행실을 의심하고 증언의 신빙성을 따지는 최악의 2차 가해로 전 세계 용감한 생존자들을 경악하게 했습니다.

그래서 우리는 다시 거리에 나섰습니다. 단순히 안희정씨 사건의 재판관들에게 항의하기 위함이 아닙니다. 당신들의 가해행위, 편파수사, 편파판결, 편파보도를 규탄하려 모였습니다. 불법촬영·유포·소지·방조자들과 웹 하드 업체, 쾌락산업이란 명목으로 일상적으로 여성 몸을 거래하는 자들에 대한 공정한 수사와 처벌, 여자 화장실마다 뚫려 있는 ‘구멍’들의 실체 규명, 포털 사이트 댓글만 봐도 접할 수 있는 여성에 대한 끔찍한 욕설과 비방에 대한 반성과 자제, #미투운동 이후에도 역사의 도도한 흐름을 거스르는 무지하고도 공고한 남성연대체의 해산을 촉구하기 위함입니다. 

당신은 최근 페미니즘이 왜곡되고 과격하게 변형되었다고 말씀하시지요? 페미니스트들은 어떤 누구와 전쟁을 하고 있는 것이 아닙니다. 인간다운 처우를 위해, 동등한 교육을 위해, 참정권을 위해, 보다 나은 노동 조건을 위해, 동등하게 돌볼 권리와 책임을 위해, 질 좋은 공보육 시설을 위해, 재생산의 정의를 위해, 혼자든 누구와 함께하든 당당하게 살 수 있는 권리를 위해, 거리에서 안전할 권리를 위해, 매 맞지 않기 위해, 강간당하지 않기 위해, 그리고 죽지 않기 위해 싸워왔습니다. 특정한 집단이나 사람을 해치거나 죽이기 위해 군사훈련을 한 적도 가스실을 설치하거나 생체 실험을 하거나 집단 강간소를 만든 적도 없습니다. 페미니즘 때문에 누가 일상이 두렵고 목숨의 위협을 느끼고 다치고 강간당하고 죽었습니까. 무엇이 과격하고 위험한지요. 공정한 판단, 공정한 수사, 공정한 판결, 공정한 취재가 어렵다고 한다면 그건 당신의 문제입니다. 광복 73주년, 세계인권선언 70주년, 촛불혁명 2주년 이후에도 여성들에게 해방과 정의는 오지 않았습니다. 여성에게 국가는 없습니다.

<이나영 | 중앙대 교수·사회학>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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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난달 나는 4·3 발발 70주년 관련 행사 때문에 제주에 있었다. 공항에서 생활정보지를 집었는데, 어느 시인이 쓴 ‘거리의 복면가왕’이라는 글이 놀라웠다. 올레꾼의 복면(覆面) 복장을 비판하는 글인데, 마지막 부분이다.

“스페인에서는 마스크를 쓰면 나병 환자 취급을 한다고 들었다. 오스트리아는 공공장소에서 부르카를 비롯하여 얼굴을 가리는 복장을 법으로 금지한다. 아무리 제 잘난 맛에 산다지만 보는 이들이 혐오감을 느낀다면 삼가는 것이 미덕 아닐까.”(‘교차로’ 6월25일자, 5569호).

일단, 위 내용은 사실이 아니다. 유럽에서 한센병 환자를 경원시하는 문화는 구약성서의 영향 때문이고, 복면 금지는 KKK단처럼 약자를 린치하는 집단을 단속하기 위해서였다. 부르카 금지는 보는 사람의 혐오감 때문이 아니라 착용 여부에 대한 여성의 선택권을 박탈하는 게 인권의 보편성에 어긋나기 때문이다.

일러스트_김상민 기자

나도 얼굴을 가린 이들을 보면 답답함을 느끼지만, “복면이 싫다”는 판단 기준이 왜 유럽 사례여야 할까. ‘우리는’ 이슬람을 얼마나 아는가. 한 가지는 분명하다. ‘그들이’ 핍박받는 이들이든 악당이든 한국인은 서구의 시각(인종주의)을 통해 그들을 본다.

예멘은 2015년 시작된 내전으로 인구의 70%인 2000만명이 식량 부족 상태이며 자국을 떠난 이들은 19만명에 이른다. 이들 중 500여명이 제주에 왔다. 이 글에서 난민에 관한 근본적인 논쟁이나 구체적인 대책을 논할 수는 없다. 다만, “노동자에게 조국은 없다”고 외쳤던 이들이 “난민보다 더 어려운 우리 국민이 있다”고 말할 때, 일부 여성이 “예멘 남성으로 인한 한국 여성의 성폭력 공포”를 주장하며 “재사회화” 대책(?)을 제시하는 현실이 당황스럽다. 타인의 정체에 대한 확신에 찬 규정과 머릿속의 ‘처리’ 방식까지 마음껏 발화하는 것. 이것이 혐오다.

“여성에게는 조국이 없다.” 근대 초기에 등장한 대표적인 페미니즘 슬로건이다. ‘여성’과 ‘국가’. 둘 중 하나의 정체성만으로는 여성의 현실을 해석할 수 없다. 여성은 젠더와 민족, 모두로부터 억압받기 때문이다. 정체성을 넘는 횡단의 정치가 필요한 이유다. 일본군 위안부 관련 운동이나 ‘적국’인 팔레스타인 여성과 이스라엘 여성의 평화 연대가 좋은 예이다.

문화인류학자 김현미는 난민 중에서 여성과 어린이만 받고 남성 난민은 재사회화시키자는 주장은 여성 연대와 무관하다고 지적한다. 뿐만 아니라 초국적 남성 지배 문화를 드러내지 못하며, 무엇보다 한국 남성의 문제를 은폐한다는 것이다. 한국은 이미 다인종 국가다. 홍세화는 묻는다. 백인과의 관계는 ‘글로벌 라이프’, 그렇지 않은 경우는 ‘다문화’인가? 

이주민 여성운동가인 정혜실은 “어떻게 페미니즘을 앞세워서 또 다른 소수자인 난민을 억압할 수 있는가. 분노하다 못해 절망하고 있다”고 말했다. 그녀는 페미니즘 일각의 성 소수자 혐오가 난민 혐오로 넘어왔다고 본다.

난민 이슈가 중요한 이유는 수용 여부 자체‘보다’, 한국 사회 내부의 차별과 순혈주의 망상과 연관되어 있기 때문이다. “난민 반대”는 자본주의의 절대 지배 속에서 누가 더 약자이고 더 고통받는가를 경쟁하는 비극의 정치일 뿐이다. 난민과 성폭력을 연결시키는 사고는 무지 혹은 의도된 오식(誤識)이다. 1970년대부터 탈식민주의 페미니스트들은 서구가 비서구 사회의 야만성을 부각하기 위해, 아시아와 아프리카 여성의 ‘열악한’ 인권 이미지를 활용해왔음을 강력하게 비판해왔다. ‘서구 선진국’에도 여성에 대한 폭력은 넘쳐난다. 양상이 다를 뿐이다.

성폭력은 오래된 범죄다. 전 세계적으로 가해자의 70~80%가 아는 사람이며, 그들의 30%가 친·인척(가족)이다. 범죄 장소도 가해자나 피해자의 집이 80%다. 피살자가 여성인 경우, 범인의 60% 이상이 남편이나 파트너다. 즉 여성의 안전을 위협하는 제1의 세력은 (난민이 아니라) 가까운 남성들이다. 물론 모든 남성이 가해자도 아니고 모든 여성이 피해자도 아니다. 문제는 젠더가 다른 사회적 구조와 결합하여 성폭력 공포가 조성되는 방식이다. 권력은 무엇이 가해이고 아닌지를 결정하는 시스템이지, 페니스가 아니다. 흑인, 난민, 노숙인은 쉽게 가해자로 간주된다. 현실은 다르다. 미투 운동에서 보았듯이 예술, 학문, 종교계의 성폭력이 더 교묘하고 만연해 있다. 조직적으로 행해지기 때문이다. 지금 남성 주도의 인터넷 커뮤니티에서는 “한국 여성 보호=난민 반대”와 “난민이 못된 한국 여성을 강간해야=난민 찬성” 입장이 싸우고 있다. 여성학자 권김현영은 왜 ‘난민은 남성’으로, ‘한국인은 여성’으로 대표되는지 질문한다. 한국 남성은 한국인도 아니고 남성도 아닌가? 집단의 성별적(性別的) 재현. 이는 난민을 위협 세력, 침략자로 만드는 전형적인 수법이다. 이런 사고방식에서는 한국 남성이 이주여성에게 자행해 온 폭력은 드러나지 않는다.

난민은 ‘우리’의 거울이다. 수용이나 혐오 등 차이에 대한 태도는 민주주의의 척도이기 때문이다. 자국민 우선? 아니, 누가 자국민인가? 도처의 양극화를 보라. 어느 사회 내부도 균질적이지 않다.

<정희진 | 여성학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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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랫동안 감추어졌던 여성에 대한 폭력의 역사가 진실의 햇빛 아래에 모습을 드러내고 있다. 상처받은 피해자의 목소리가 또 다른 피해자의 목소리와 이어지며 부서지지 않을 것 같던 견고한 장벽을 조금씩 흔들고 있다. 모든 폭력은 가해자와 피해자의 권력 관계에 기인한다고 생각한다. 우리 사회에 오랜 시간 동안 뿌리내렸던 가부장제와 남성 중심적인 권력구조가 가해자에게 압도적인 권력을 주었고, 피해자인 여성에게는 침묵을 강요해왔다. 지금 드러나는 수많은 폭력이 오랫동안 은폐된 가장 큰 이유다.

같은 이유에서 침묵을 강요당하는 피해자가 여기에도 있다. 한국에 머무는 많은 이주여성이다. 얼마 전 한국이주여성인권센터와 공익인권법재단 공감에서 실시한 ‘이주여성 농업노동자의 성폭력 실태조사’에 따르면 응답자 중 12.4%가 성폭력 피해를 경험했다고 답변했다. 농촌 노동의 특수한 문제는 아니다. 식당, 공장에서도 여성 이주노동자에 대한 성희롱, 성폭력은 빈번하다. 혼인이주 여성의 성폭력이 동반된 가정폭력도 심각한 수준이다. 최근에는 외국인 유학생에 대한 성폭력 사건도 자주 발생하고 있다.

4일 서울 광화문광장에서 열린 ‘3·8 세계여성의날 기념 제34회 한국여성대회’에 참석한 시민들이 성폭력을 고발하는 ‘미투 운동’을 지지하고 성평등 실현을 촉구하는 집회와 행진을 하고 있다. 정지윤 기자

특히 이주여성들은 공장, 가정, 학교 등 공간적으로 고립되어 있어 외부기관의 조력을 받기 쉽지 않다. 또한 성폭력 피해에 대처할 정보가 충분하지 않고, 무엇보다 한국어 의사소통 능력이 떨어져 적절한 대응을 하지 못하는 경우가 많다. 성폭력 피해를 입은 이주여성들이 언어의 부담 없이 자국어로 소통하며 자신의 피해 사실을 충분히 설명하고 이에 대해 지원을 받을 수 있는 통합 지원 기관의 설립과 경찰·검찰·법원의 사법적 지원이 체계적으로 마련되어야 할 필요가 있다. 이러한 사후적인 지원도 중요하지만, 그보다 더욱 필요한 것은 처음부터 이주여성 피해자가 발생하지 않도록 하는 제도의 근본적인 개선이다. 우리나라의 출입국 정책에 따르면 이주여성은 너무도 취약한 지위에 놓여 있다. 한국 사람과 결혼한 이주여성은 매번 자신의 체류자격을 연장하려면 한국인 남편이 함께 출입국관리소에 동행해야 한다. 두 사람이 진정한 결혼생활을 계속하고 있는지를 심사하기 위해서라고 하는데, 진정한 혼인 관계를 유지하고 있는지를 정부 기관이 심사한다는 것도 당혹스러운 일이지만 이러한 심사를 처음 혼인신고 이후에도 매년 반복해야 한다. 이주여성이 남편에게 가정폭력을 당해도 “신고하면 출입국관리소에 같이 안 가준다”는 말 한마디에 수년 동안 피해를 참고 지낼 수밖에 없었다.

일터에서의 문제는 더욱 심각하다. 지금의 제도에서는 외국인 노동자의 경우 사장이 외국인 노동자의 체류자격을 사실상 결정할 수 있는 권한이 있다. 외국인 노동자는 사장이 싫어도 사업장을 마음대로 바꿀 수 없다. 예외적인 몇 가지 경우를 제외하고, 사장의 허락 없이 사업장에서 이탈하면 그 순간 ‘불법체류자’가 된다. 사장이 가진 권한은 막강하지만, 책임은 거의 없다. 제대로 된 잠금장치도 없는 낡은 비닐하우스가 이주여성 노동자의 숙소이며, 그마저 사장은 여성 노동자의 숙소를 제멋대로 들락날락한다. 이런 숙소를 제공하고 월급에서 매달 20만~30만원씩 깎는다. 고용노동부 지침에 따른 것이라니 할 말이 없다. 이런 취약한 상황에 놓인 이주여성 노동자들이 사장의 온갖 성폭력에 노출되는 것이다.

한 인간이 존엄한 인간으로 존중받지 못하고, 정부에서 만든 제도가 이주여성을 열악한 사각지대로 밀려날 수밖에 없게 만든다면, 이주여성에 대한 폭력은 갈수록 심각해지고, 지속해서 은폐될 수밖에 없다. 어떠한 법과 제도도 사람을 누구에게 종속된 존재로 만들어서는 안 된다. 뒤늦게나마 그동안 감추어진 여성들에 대한 폭력의 역사를 햇빛 아래로 모습을 드러내게 한 위대하고 용감한 목소리가, 지금 이 순간 우리 사회 가장 취약한 어느 곳에서 눈물 흘리는 피부색 다른 이주여성에게도 울림으로 이어지길 희망한다.

<조영관 | 변호사·이주민센터 친구 사무국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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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문단_내_성폭력 1차 파동이 일던 2016년 가을, 한 여성 평론가에게 물었다. “요즘 문단 분위기 어떻습니까?” 매우 신중한 성격인 그녀는 약 5초간 침묵하다가 “문단이란 걸 아예 없애버려야 한다고 생각합니다”라고 답했다. 그녀의 입에서 그런 단호한 말이 나오는 걸 들은 건 처음이었다. 어린 고교생 작가 지망생까지 성폭력의 희생자였음이 드러난 때였다.

대구경북여성단체연합 등 시민단체 회원들이 지난 1일 대구지방검찰청 앞에서 검찰 내 성폭력 사건의 진상규명을 촉구하고 있다. 연합뉴스

문단이란 도대체 무엇인가? 그것은 없앨 수도 있고 없앨 수 없는 것이기도 하다. 제도로서의 문단은 등단과 문학상, 문예지와 문학가 단체 등을 아우른 체계를 뜻하고, 비물질적인 측면에서 문단이란 문인들의 네트워크, 또 비평적·예술적 규범과 권위로 이뤄진 무정형의 공동체 같은 것을 뜻한다. 한국에서는 대표적인 문예지를 운영하는 출판사와 그 주변의 작가·비평가가 문단의 중심에 서 왔다. 그리고 이 땅 문단에서는 근대문학의 이념과 제도가 발생하던 20세기 초부터 술자리가 중요했다. 이는 한국 사회 어디에나 있는 그 술자리의 문학판 버전이기도 하다. 거기서 친분과 인맥이 생겨나며, 청탁과 거래가 오가기도 한다. 언젠가부터 큰 출판사들은 의식적으로 많은 돈을 쓰며 지식인·문인들에게 공짜 술을 샀다. 고담준론이나 지적·예술적 교류가 오간 것도 사실이니, 좋게 보면 술자리는 문학계의 자율성과 연동되어 있었다. 그러나 바로 이런 자리들에서 권력의 네트워크와 권위를 악용한 성폭력도 자행돼온 것이다. 성폭력범은 소수라 해도 이런 문화 자체가 한국 현대문학사에서 이어져왔다는 것은 객관적 사실이다.

2015~2016년의 표절·성폭력 스캔들을 겪고 문단의 제도와 네트워크는 부분 개혁되었지만, 권위와 존경은 근저에서 깨져나가고 있어 안타깝다. 필자가 다니는 대학 문학 동아리의 한 남학생은 모 원로 소설가를 일컬어 ‘고마운 개새○’라 했다. 노회한 상습범이 젊은 영혼에게 충격적 깨달음을 준 것이다. 그는 남성인 자기에게 모호하던 많은 문제가 사태로 인해 분명해지고, ‘여성의 처지’에 대해 깊이 생각해보게 됐다고 했다.

저렇게 심각했던 1차 파동 때에 문단의 호스트이자 ‘권력’이었던 ‘어른’들은 마치 아무 일 없는 양 하거나 침묵했다. 그리고 며칠 전 어느 ‘원로’는 다시, ‘작품과 작가는 분리해서 생각해야 된다’거나 ‘예술가들의 업적은 존중하되 그 약점이나 실수는 보호’(!)해야 한다고 했다. ‘원로’나 일부 비평가들은 이런 사태로 인해 자신들이 쌓아온 ‘공적’이 무너질 것이라는 불안에 사로잡힌 모양이다. 그러나 무엇보다 우선, 많은 피해자들과 젊은 문학인과 독자들에게 미안한 마음을 갖고, 가해자 또는 방조자됨을 진정으로 반성하고 사과해야 한다. 그래야만 그 ‘예술적’ ‘공적’의 일부라도 한국문학 교실에서 가르칠 수 있다.

사실 이미 한국문학사는 ‘불구하고’(일본어투라지만 문맥상 양해를)가 되었다. 표절에도 불구하고 작품성이 훌륭하다, 일본을 위한 전쟁에 죽으라 선동했음에도 소설은 좋다, 이승만·박정희가 한 모든 일과 전두환을 찬양하는 시를 썼음에도 불구하고 모국어의 마술사다, 상습 성추행범이었음에도 뛰어난 예술가며 민족 시인이다. 이런 한국 현대문학사란 도대체 무엇일까? ‘문학이라는 질병’(‘도쿄제국대학 문학부 엘리트들의 체제 순응과 남성 동맹’이라는 부제가 붙은 다카다 리에코의 책 제목에서 빌림)은 또 얼마나 독한 것인가?

이번에 상습범으로 지목된 시인은 1970년대에 이문구·백낙청 등과 함께 야만적 유신독재뿐 아니라, 어용화된 서정주·조연현 등의 문인협회와 싸워 한국문학의 기풍과 정신성을 바꿨었다. 그 싸움과 정신의 중요 구성부분을 ‘민족문학’이라 경칭해왔다. 민족문학은 식민 지배와 내전, 분단을 겪은 가련한 한반도 종족과 민중의 문화 이념이자 운동이었다. 그런데 민족문학은 민주화의 부분 성공과 문단 헤게모니의 교체 이후에 주류·정통의 자리에 놓였다. 바로 거기서 많은 모순과 불행이 배태됐다고 생각한다. 그가 계속 가장 유력한 노벨상 후보로 거명되었던 것은 민족문학의 한 상징이었기 때문이다. 최영미 시인이 경험한 폭력은 1990년대 민족문학의 제도적 구현체와 직간접 관계가 있다. 폭로 이후 SNS에서 2차 가해성 글을 쓴 또 다른 시인도 민족문학작가회의의 활동가였다 한다. 이념과 운동으로서의 민족문학은 21세기에 들며 자연사하다시피 했는데, 이렇게 또 스스로 면류관을 벗고 역사의 뒤안길로 스러진다.

그럼에도 이 지구에는 한국어로 생각하고 노래하고 이야기를 짓는 사람들이 여전히 몇 천만명이니, ‘민족의’ 문학이나 한국어 문학은 또 이어질 것이다. 새로운 공동성과 규범이 절실하다. ‘문학이라는 질병’을 넘는 문학인의 네트워크나 문화가 곧 도래할 것이다. 여성들과 젊은 세대가 할 것이다.

<천정환 | 성균관대 교수·국문학>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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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폭력 피해자가 폭로 이후 겪는 과정을 보면 한국 사회의 조직 어디에나 적용할 수 있는 범용의 알고리듬이 있는 것 같다. 피해자의 입을 틀어막는 솔루션이 제공되는 알고리듬 말이다.

피해자가 젊은 여성일 경우, 솔루션은 ‘꽃뱀’이다. ‘꽃뱀’이란 솔루션을 써 먹기엔 피해자가 내성적인 사람이라면, 취할 수 있는 솔루션은 ‘조직생활 부적응자’다. 조직생활 부적응자라고 몰아가기엔 피해자가 평소 활달하고 업무성취도도 높았을 경우라고 해도 답이 없는 것은 아니다. ‘딴 야심이 있어서’거나 ‘인사를 뒤집으려고’ 폭로를 한 교활한 모사꾼으로 피해자에 대한 구설을 만들면 된다.

한 시민단체 회원이 1일 대구지방검찰청 앞에서 성폭력 피해 고발 캠페인 ‘미투’를 상징하는 흰 장미를 들고 검찰 내 성폭력 사건 진상규명을 촉구하고 있다. 연합뉴스

결정타는 가해자가 청구하는 민형사상의 명예훼손 소송이다. 한국에서 “나도 당했다(Me too)”라고 성폭력 사실을 알리며 가해자를 지목한다는 것은 곧바로 피해자가 명예훼손에 피소될 가능성을 의미한다. 맞은 사람이 때린 사람을 지목하는 게 죄가 될 수도 있는가? 한국의 성폭력 사건을 둘러싼 법의 풍경은 그렇다. 혼자 벽을 보고 가슴을 쥐어뜯는 것이 아니라 공개적으로 말하면(公然性), 그것이 사실이라 하더라도 명예훼손의 요건이 된다. 적반하장을 감당해야 하는 피해자의 억울함은 하늘에 닿는다. 끊임없이 “말하지 말라”고 피해자의 입을 틀어막는 이 모든 조롱과 음해와 협박을 거치고도 간신히 버텨낸 사람은, 그래서 피해자가 아니라 ‘생존자’로 불린다.

과장해서 지어낸 얘기 같은가? 당신이 15년간 다닌 회사에 두 달간 병가를 냈다고 하자. 병가의 와중에 회사로부터 “당신 책상을 치웠다”는 통보를 받는다면 당신과 동료들은 이 조치의 의미를 무엇이라고 해석하겠는가? 아무리 눈치 없는 신입사원이라도 ‘공간이 부족해서 병가 기간 동안 책상을 치웠나보다’라고 생각하지는 않을 것이다.

이것이 서지현 검사가 안태근 전 법무부 검찰국장의 성추행 사실을 폭로한 뒤에 통영지청에서 벌어진 일이다. 서 검사의 폭로가 공론화된 것이 1월29일. MBC 보도에 따르면 1월22일 작성된 검사 배치표에는 서 검사의 이름이 들어 있었지만 2월5일자로 작성된 배치표에는 이름이 빠져 있었다. 2월5일은 문재인 대통령이 청와대 수석·보좌관 회의에서 “성희롱, 성폭력은 한 개인의 일탈 행위가 아니라 성차별적인 사회구조와 문화 때문에 발생한다는 점에서 위계 문화가 강한 정부와 공공기관부터 먼저 달라지고 모범을 보여야 할 것”이라고 강조했던 날이다.

검찰이 정부 수반의 뜻도 못 알아차리는 어리석은 행보를 한 것일까? 그렇지 않다. 검찰의 서 검사에 대한 조치는 성폭력 피해자에게 재갈을 물려온 알고리듬이 얼마나 끄떡없이 작동할 수 있는지 ‘모범을 보여야 하는 공공기관’에서 제시해준 역설적인 본보기다. 서 검사를 응원하는 꽃바구니가 전국에서 몰려들어도, 통영지청의 설명대로 “통상적인 절차에 따라” 휴직 중인 서 검사의 책상을 치우고 짐을 빼는 일은 가능했다.

이 본보기는, 골치 아픈 사내 성폭력 사건을 다뤄야 하는 조직의 장들에게는 엎어져 있는 피해자의 등을 한 번 더 밟고 지나가면서도 없었던 일처럼 만드는 것이 합법적인 규칙의 이름으로 얼마든지 가능하다는 것을 다시 한번 확인해준 것이며, 말문을 열려던 피해자들에게는 “그래봐야 입 연 사람만 괴롭다”는 위협의 시그널을 준 것이다. 검찰이 꾸린 성추행 진상조사단이 서 검사에 대한 음해성 소문이 끊이지 않자 근원을 찾아 처벌하겠다고 했지만 소문의 근원은 몇 사람의 입에 있는 것이 아니다. ‘그래도 우리 조직은 안 바뀌어’ ‘그래도 나는 안 다쳐’라고 가해자들이 자신할 수 있도록 만드는 이런 피해자 재갈 물리기의 알고리듬이 건재하기 때문이다.

시스템의 설계자들은 코드가 결코 깨지지 않을 것이라고 생각한다. 그러나 코드를 읽을 줄 아는 사람들은 반드시 나타난다. 불의한 코드에 의해 상처 입으며 그 본질을 속속들이 알아낸 생존자들이 이제 곳곳에서 입을 열고 있다. 자신의 온몸을 부딪쳐 부패한 시스템의 질서를 허물고 있다. 이 비열한 알고리듬은 해체될 것이다.

<정은령 | 언론학 박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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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성들이 분노를 넘어 행동하기 시작했다. 성폭력 피해를 더 이상 숨길 수 없다는 피해자들의 용기 있는 결단이다. 피해자들이 불이익을 받는 구조적 문제와 사회적 편견을 없애야 한다고, 온·오프라인에서 ‘역대급’ 광풍이 불고 있다. 8년 만에 용기를 낸 서지현 검사의 발언이 여성들에게 힘을 준 결과이다.

서지현 검사의 성폭력 피해 사실이 세상에 나오는 데 8년이란 긴 시간이 걸린 것처럼 성폭력 피해자들이 피해를 말한다는 것은 쉽지 않다. 그러나 미국발 미투(#Me Too)는 아니었지만 1983년 여성의전화 핫라인 상담전화를 통해 여성들은 납득할 수 없는 피해, 있어서는 안되는 일에 대해 이미 말하기 시작했다. 1991년 한국성폭력상담소가 개소했을 때 성폭력의 피해를 말하는, 계속 울려대던 전화 소리를 필자는 잊을 수 없다. 또 2003년 최초로, 비공개 공식장소에서 피해자들은 자신의 피해를 ‘SPEAK OUT’이라는 형식으로 말하기 시작해 지금까지도 이어지고 있다.

안태근 전 법무부 검찰국장으로부터 성추행 피해를 제기한 서지현 검사가 4일 서울동부지검에서 조사를 받은 후 청사를 나서고 있다. 정지윤 기자

그러나 성폭력 피해 사실을 알린 서지현 검사는 용기 있는 고백 하루 만에 업무능력과 근무태도 등과 관련한 근거 없는 각종 소문이 보도되며 2차 피해를 입었다. 이처럼 대중들은 성폭력 범죄 사건을 접했을 때 ‘왜 이제야 말하는 걸까’ ‘피해자는 어떤 여성일까’ ‘피해자가 왜 더 강력하게 저항하지 않았을까’라며 개인의 잣대로 평가한다. 서지현 검사의 말하기를 최초 보도한 JTBC 방송마저도, 2차 피해의 문제점을 보도하는 그 순간에 서지현 검사의 ‘조용한 스타일’이라든가 ‘과거 업적’이 어떠한지에 대해 묻고 있었다. 동료들이 말하는 서지현 검사, 업적을 통해 말하는 서지현 검사를 통해 서지현 검사의 진술이 진실하다고 말하고 있었다.

그러나 8년 전에 발생했다는 성폭력 피해에 집중해야 한다. 피해자가 말하는 사실이 무엇인지, 왜 그동안 말하기 힘들었는지를 중심으로 사건화되지 않았던 그간의 고통을 들어야 한다. 그리고 사건에서 가장 중요한 ‘팩트’와 그 팩트가 왜 이제 말해지고 있는지 피해자의 목소리에 집중하면서 ‘성폭력 가해 사실’에 대해 들어야 한다.

만약 서지현 검사가 과거 장관상을 받지 않았고 (그 사건으로 너무 힘들어서, 아니면 여러 이유로) 형편없는 업적을 수행했다면 강제추행을 당하지 않았을까? 만약 인간관계가 형편없었다면 강제추행을 당하지 않았을까? 말도 안되는 질문이라 여길 것이다. 그러니 서지현 검사가 훌륭한 업적을 수행했다는 사실에 안심하지도 말고 묻지도 말자. 훌륭한 업적을 수행하지 않아도, 조용한 스타일이 아니어도 성폭력 피해 사실을 말할 수 있게 말이다. 피해자가 어떠한 사람이든 ‘성폭력 피해가 있었다’는 그 사실이 중요하기 때문이다.

그러나 성폭력 문제를 바라보는 사회적 시선은 여전히 피해자, 피해에 대한 불신으로부터 시작한다. 여성의 정조가 더럽혀지고, 순결을 잃은 것으로 조명되어 왔던 오랜 역사에서 여성들은 자신들의 피해를 말할 수 없었다. 피해를 당한 것도 억울하지만 그 피해를 말하는 순간 자신의 피해가 이해되기는커녕 더러운 여성으로 환원되기 때문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힘들게 말하면 혹 남성 가해자나 조직을 망치기 위한 ‘거짓말’이라며 믿고 싶어 하지 않는다.

그래서 이제까지 피해자들은 자신의 잘못이라는 자책으로, 더러운 여성이라는 비난을 무릅쓰고, 피해를 말하는 의도, 목적을 의심받으면서까지 그 피해를 말하기 어려웠던 것이다. 이뿐만 아니라 이러한 사회적 통념이 작동되는 상황에서 법과 제도가 만들어지고, 가해자의 역차별 논리, 무고죄, 명예훼손 등까지 가세해 피해자들은 정말 힘들었다.

서지현 검사의 ‘말하기’의 불씨가 그 의미를 갖도록 우리는 끝까지 함께해야 한다. 전국적으로 확산되어 가는 성폭력 문제 해결을 위해 피해자들의 용기 있는 ‘미투’를 넘어서 전 국민적인 응원과 지지의 ‘위드유(#With You)’, 그리고 ‘나부터 나서서 성폭력을 막자’는 ‘미퍼스트(#Me First)’ 성폭력 방지 운동을 통해 우리는 여성인권을 지켜내야 한다.

<변혜정 | 한국여성인권진흥원 원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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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학원 다닐 때 들은 얘기다. 인문대 신임 교수가 술자리에서 성추행하는 장면을 목격한 대학원생들이 그 교수에게 찾아가 다시 이런 일이 발생하면 가만있지 않겠노라 경고했더니 그 다음부터 아예 술자리에 나타나질 않았단다. 그 교수가 누구인지, 그 후로도 문제가 없었는지는 알지 못한다. 그럼에도 30여년 전 흘려들었던 이 얘기가 여전히 기억에 남아 있음은 교수의 잘못된 행동에 즉각 응분의 조치를 취한 학생들의 행동이 인상적이었기 때문이리라.

당시 음대에도 성추행을 일삼는 교수가 있었다. 학생회가 이 문제를 공식 제기했지만 학교는 그를 잠시 해외에 나가있게 하는 걸로 무마했고 얼마 후 그는 다시 복귀했다. 실험실에서 벌어진 교수의 성희롱을 고발한 한 조교의 용기로 대학 내 성희롱 문제가 공론화되기 시작했으나, 그로부터 25년이 지난 지금까지도 대학사회의 권력형 성범죄는 여전하고 피해자 다수의 목소리는 들리지 않는다. 최고 권력기관인 검찰 내 여검사들조차도 성추행 가해자를 폭로하는 것이 어려운 사회에서, 하물며 아무런 힘도 없는 학생들이 교수들의 성희롱과 성추행에 제대로 대처하기란 불가능한 일이다. 수년 전 교수들의 성추행 사건이 사회적 이슈가 되며 파면에 이른 경우도 있었지만, 성희롱을 가볍게 여기는 남성중심 문화, 성추행이 밝혀져도 기껏해야 정직 몇 달에 그치는 교수사회의 온정주의는 달라지지 않았다.

2016년 가을, 문화예술계 성폭력 문제가 대두되며 피해자들이 발언하기 시작했을 때 우리 사회 곳곳에 만연한 성폭력의 심각성이 다시 한번 적나라하게 드러났다. 문단, 미술계, 영화계는 물론이고, 예술학교에도 피해자들의 고발이 쏟아졌다. 하지만 클래식 음악계는 조용했다. 피해자가 없어서가 아니라 내부 고발이 어려운 집단이어서다. 오랜 기간 일대일 레슨으로 형성된 교수와의 수직적 관계는 평생 음악 활동의 기반이고 그 관계를 벗어나 살아남기란 쉽지 않기 때문이다. 수년 전 사회적 공분을 일으킨 제자 성추행 문제로 파면에 이른 음대 교수를 제자들이 옹호하며 피케팅을 하고 거리음악회를 열었던 것은 이런 처지를 단적으로 보여주는 씁쓸한 사례다.

일부 음대 교수들의 행태에 대한 소문은 파다하지만, 영향력이 큰 인물일수록 학생들도 그와 이해관계를 공유하기에 내부 문제는 밖으로 발설되지 않는다. 지난 몇년간 신문 사회면을 장식한 음대 교수들의 폭언, 폭행, 티켓 강매, 성희롱, 성추행 사건들은 안에서 곪고 곪아 터져 나온 것들이었다. 문제가 드러나야 개선도 가능하다는 점에서 이런 논란을 부정적으로만 볼 것도 없다. 뼈아픈 반성을 하고 그것을 수습하는 과정에서 장기적으로는 그 집단이 더 나은 방향으로 나아가는 계기가 될 수도 있으니까. 오히려 문제는 성폭력을 비롯한 온갖 잘못된 관행들을 학생들이 당연시하거나 체념해버리고 가해자의 입장에서 침묵하도록 강요받는 데 있다.

돌이켜보면 나 또한 우리 사회에 만연한 성폭력 문제에 민감하지 못했다. 용기를 낸 피해자들의 목소리 덕에 간과했던 문제를 깨달았고, 여전히 강고한 편견에 맞서 싸우게 될 그들 옆에서 목소리를 더하는 것이 필요함을 알게 되었다. 성폭력은 누구에게나 벌어질 수 있는 일이고, 직접 경험하지 않았다 하여 외면할 수 없는 우리 모두의 문제다. 권력관계에서 약자에 놓인 수많은 이들이 일상적으로 마주하는 현실인 것이다.

지난해 할리우드에서 시작된 ‘미투 운동’은 세계적인 노 지휘자 두 사람의 수십년 전 성범죄 고발로까지 이어졌다. 대개 권력을 쥐고 있는 자들은 자신의 문제가 드러나지 않을 거라 확신한다. 하지만 세월은 가고 세상은 바뀌며 사람들의 가치관도 변화한다. 뒤늦게 잘못을 뉘우친 가해자가 피해자에게 진심으로 사과하며 용서를 구하는 모습을 기대하는 건 너무 낭만적인 생각이다. 성추행과 성폭행 피해자 156명의 증언을 일일이 경청하고 격려하며 가해자에게 175년을 선고한 미국 여성 판사의 얘기가 단지 먼 나라의 일이 아니기를… 앞서 용기를 낸 수많은 여성들의 목소리가 우리를 일깨운다.

<이희경 음악학자·한예종 강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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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너무 무서워서 장독대 뒤에 숨었어요.”

검찰의 성폭력 사건 보도 이후 내 머릿속을 떠나지 않는 장면이 있다. 10여년 전, 한 단체가 ‘성폭력 생존자 말하기대회’라는 것을 열었다. 20대 후반으로 보이는 한 여성이 무거운 발걸음으로 앞자리에 섰다. 그녀는 초등학생 시절 동네 아저씨로부터 성폭력을 당했다고 했다. 어린 마음에도 뭔가 대단히 안 좋은 일이고 부모에게도 말하면 야단을 맞을 것 같았다. 너무나 무서웠던 그 어린 소녀는 뒷마당의 장독대로 기어들어가 한참 동안 부들부들 떨었다며 울먹였다. 여기저기 훌쩍이는 소리에 그녀는 자신의 말을 들어줘서 고맙고, 함께 울어줘서 곪은 상처가 일부 치유되는 것 같다고 말했다.

검찰의 성폭력 사건을 접하면서 분노가 치밀었지만 다른 한편 착잡했다. 언론이 대대적으로 보도하고 검찰과 법무부가 나서고 대통령까지 강력지시를 내린 것은 이례적인 발빠른 대응이다. 그럼에도 씁쓸했던 것은 그동안 우리 사회가 마치 그런 사실을 몰랐던 것처럼, 없었던 일인 양 새삼 호들갑을 떠는 것 같아서다.

오래전부터 여성들은 온갖 비난과 고통을 감수하면서도 목소리를 내왔다. 최근 미투(#Me Too) 운동처럼 뜨겁게 달아오른 적도 있지만, 장독대 뒤에서 울먹였던 소녀의 목소리처럼 가늘게 떨리는 작은 아우성도 있었다.

이전에 국가인권위에서 근무할 때 다뤘던 성희롱 사건 중 제법 많은 비율의 피해자가 소규모 영세사업장이나 사무실에서 일하는 여직원이었던 것으로 기억한다. 여성은 달랑 한두 명이고 그 외는 모두 남자인 일터에서 그들은 성희롱에 무방비로 노출돼 있었다. 조직화된 대응이나 도움을 받기도 어렵고, 외롭게 목소리를 내도 귀 기울여 주는 이도 별로 없었다. 권리구제의 또 다른 사각지대가 우리 사회 도처에 숨어있는 것이다.

성폭력은 뿌리 깊은 성별권력체계에서 비롯된 성차별이자 권력의 문제다. 그런데 이번 사안을 보면서 성폭력 피해자를 대하는 우리 사회의 태도 또한 차별적이고 또 다른 계층 및 권력체계가 작동하는 것 아닌가 싶어 마음 한편이 편치 않았다.

검찰의 성폭력 폭로 이후 불꽃처럼 번져가는 미투 운동은 피해자들이 강요돼 왔던 침묵을 깨고 생존자로, 주체자로 나섰다는 점에서 운동의 새로운 차원으로 평가할 수 있다. 하지만 염려스러운 점도 없지 않다. 피해자를 비난하는 문화는 여전하고 심지어 꽃뱀으로 몰아가는 작태 또한 드물지 않은 것이 현실이다. 목격자와 주변 사람들이 함께하자는 ‘미퍼스트(# Me First)’ 운동이 제안되고, 2차 피해를 막아야 한다는 지적도 많다. 하지만 언제나 세상의 변화는 느리고, 피해자 개인이 감내해야 할 상처와 고통은 직접적이고 가혹하다.

야만적인 성폭력을 근절시켜야 한다는 요구는 시대의 핵심적인 과제가 되었다. 그 변화의 문을 열기 위해 마련되어야 할 첫 번째 대책은 권리구제 시스템의 정비다. 공공기관이든, 민간기업이든 대부분의 조직은 성폭력 문제가 발생하면 어떻게든 문제를 축소·은폐하려 한다. 이를 위해 피해자를 회유하거나 비방 또는 음해하는 것도 불사한다. 이는 피해자에 대한 2차 피해로 이어지며 문제를 확대재생산한다. 당장 발생한 크고 작은 성폭력 사건에 대응하기 위해서는 외부 전문가를 활용해 조사와 상담, 징계방안을 마련토록 하는 것이 필요하다. 이번 검찰의 성추행 사건에서 보듯 위계적인 조직과 순환보직 같은 인사체계에 얽매인 내부조직원으로서는 제대로 문제를 해결하기란 거의 불가능하기 때문이다.

두 번째로 시급한 과제는 현재 시행되고 있는 성희롱 예방교육의 전면적 개편이다. 지금처럼 30분~1시간 내에 성희롱의 종류 등만 반복해서 알려주는 성희롱 예방교육은 소기의 성과를 거두기엔 미흡하다. 성희롱 예방교육은 성폭력이 가부장제의 낡은 관습이며, 그 뿌리가 성차별과 여성혐오와 연결되어 있음을 우리 사회 구성원 모두가 깨닫고 비판적 시각을 갖추는 데 초점이 맞춰져야 한다. 여성도 남성과 똑같은 존엄한 존재이며 평등한 존재라는 기본적인 인식이 정착되지 못할 때 위계적인 권력 조직은 성폭력을 양산해 낼 수밖에 없다. 성희롱 예방교육은 젠더와 인권교육을 토대로 감수성을 키우고, 일상에서 벌어지는 권력 갑질을 깨닫고 비판하는 교육으로 전환되어야 한다.

하지만 무엇보다 선결되어야 할 것은 이번 사건에 대한 정확하고도 포괄적인 진실 규명이다. 그 결과는 검찰은 물론 이 정부에 대한 신뢰에도 직접적인 영향을 줄 것이다. 정부와 민간 모두가 나서 촘촘하고 치밀한 대책을 내놓아야 할 때다. 8년의 침묵을 강제한 풍토, 장독대 뒤에서 숨죽이며 울먹여야 했던 참담한 상황은 이제 혁파되어야 한다.

<문경란 | 인권정책연구소 이사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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검찰 내 성폭력을 고발한 서지현 검사가 소설처럼 쓴 글을 보면서 가슴에 와 박혔던 구절은 ‘아버지가 나빴다’ ‘어머니가 나빴다’라는 것이었다. 그는 검찰 통신망에 올린 글에서 “모든 게 아빠 때문이었다. 이 땅에서 살아남게 하기 위해서는 여자를 착하고 예쁜 딸로 키워서는 안되는 것이었다. 그 어떠한 불의도 참아내지 말라고, 그 어떠한 부당함에도 입 다물지 말라고, 욕설을 하고 소리를 질러대며 절대로 세상과 타협하지 말고 네 멋대로 살아가라고 가르쳐줬어야 했다. 이 모든 게 엄마 때문이다. 이 땅에서 여자를 살아남게 하기 위해서는 참고 또 참는 모습을 보여주어서는 안되는 것이었다. 그 어떤 불합리도 참아내지 말라고, 여성이라고 무시하거나 업수이 여기는 것은 더더욱 참아내서는 안된다고, 멱살을 휘어잡고 주먹을 휘둘러줘야 한다고 가르쳐줬어야 했다”고 썼다.

그의 글을 읽고 비슷했던 경험을 떠올리면서, 내가 그동안 살면서 가족과 윗 세대와 학교에서 듣고 배운 것들과 못 배운 것들을 되짚는다. 누구든 다 비슷했겠지만 차별은 늘 있었고, 노골적인 무시와 구조적인 억압 사이를 왔다갔다 했다. “여자애가 고기를 잘 먹는다”고 타박하던 외할머니, 초등학교 5학년 성교육 시간에 “여자들은 통닭과 같다. 누가 먹고 싶어 먹었다면 그 사람을 욕할 수는 없다”던 선생님. 최근 ‘황태자’가 풀려난 대기업의 ‘여비서’ 공개채용 시험을 본 기억도 떠올렸다. 토론 면접에서 나름 선방했다며 안심하고 있던 내게 “말은 조리있게 하는데, 어디 회사 오래 다니겠느냐”고 한 사장님. 어쨌든 시험에 붙었고, 3박4일 직원 연수에 참석하라는 연락이 왔다. 연수 프로그램이 ‘녹차 끓여내는 법’이라는 걸 보고 어쩐지 허망해졌다.

결국 그 회사에 가지 않았고 기자가 됐다. 업종이 다르고 회사가 달라도 차별은 늘 있었다. 그럭저럭 대응하며 살아온 것 같다. 하지만 과연 잘 살았을까? 때로는 내가 어쩔 수 없는 마이너리티임을 자각했고, 때로는 감각이 없는 사람처럼 그냥 넘어갔다. “블루스 추자”는 취재원들, ‘이쁜 여자’ 타령하는 남자에게 똑같이 성차별적인 언사를 섞어 능글맞게 대처했던 것은 고육책이었을 뿐이다. 싫어요! 미쳤어요? 왜 성희롱이야! 하면서 맞서지 못한 나같은 이들이 지금까지 계속되는 성적 괴롭힘의 바탕이 됐다는 죄책감이 크다.

서 검사의 글을 보면서 눈물이 났던 것은 성적 괴롭힘들이 줄줄이 적혀 있었기 때문만은 아니다. 그 와중에 아이를 키워야 하고, 무신경한 남편의 대꾸에 혼자 실망하고, 그럼에도 불구하고 일을 부여잡고 있는 자신을 보며 자괴감을 느끼는 그 모든 과정은 여성들에겐 너무나도 보편적인 것이었다. 학교에선 가르쳐주지 않았다. 부모님도 선생님도, 은밀하게 때론 노골적으로 닥쳐오는 공격을 어떻게 맞받아쳐야 하는지 가르쳐주지 않았다.

다양성도, 기후변화도, 인권도, 노동자의 권리도, 모두 제대로 배우지 못했다. 그 시절엔 그런 화두가 없었다는 이유를 붙이자니 좀 우습다. 성차별도, 인권 침해도, 노동자 착취와 탄압도, 환경 파괴도, 모두 그 시절에 더 심했으면 심했지 지금보다 나았을 리 없으니까. 이제라도 사회 전체가 이런 고민에 맞부딪쳤다는 것은 시간이 흐르면서 세상이 좀 나은 방향으로 가고 있다는 뜻일까. 5일자와 6일자 신문에 노동 문제를 가르치지 않는 교육에 대한 기사를 실었다. 여전히 우리가 배우는 것들엔 살면서 꼭 필요한 무언가가 빠져 있다. 평등과 정의가 비어 있다. 내가 어릴 적에 배우지 못했던 것은 옳지 않은 것을 옳지 않다 말하는 용기, 안되는 것은 안된다고 말하는 자신감이었다. 이제라도 서 검사와 용기 있는 이들을 보며 배운다.

초·중·고교 페미니즘 교육을 의무화하자는 청와대 청원에 20만명 넘는 이들이 서명을 했다. 이 소식을 전한 포털 기사에는 이례적으로 여성들이 댓글을 많이 달았다. 온라인 전체가 ‘남초’이다시피 한 상황에서 응원글이 많이 보이니 반갑다. 그런데도 답답한 마음이 든다. 학교야말로 가부장적이고 권위적이며, 대다수 여성들이 성차별과 성희롱을 경험하는 ‘첫번째 사회’가 아니던가. 그러나 배우는 사람뿐 아니라 가르치는 사람도 함께 바뀌고 커 나가는 것이 교육의 본질이다.

좀 더 근본적인 의문도 있다. 학교에서의 제도교육을 통해 개개인과 사회를 얼마나 바꿀 수 있을까. 한참 앞서 나갔다는 유럽이나 미국에서도 저성장과 취업난 속에 인권과 평등과 평화와 환경과 다양성의 가치에 반하는 일들이 고개를 드는 시대다.

그럼에도, 아니 그렇기 때문에, 더더욱 가르치고 배워야 한다. 최소한 몇 명이라도 옳게 말하고 용기있게 행동할 수 있게 되면 세상이 바뀐다. ‘몇 명’의 목소리가 역사를 바꾼 사례는 얼마나 많았던가. 성평등, 다양성을 존중하는 태도, 인간에 대한 예의, 범죄와 폭력에 맞선 저항, 권위주의를 거부하는 열린 자세 모두 배워야 한다. 페미니즘을 학교에서 가르쳐야 한다. 모든 정책에 ‘젠더 평등 의식’이 녹아들게 해야 한다.

<구정은 정책사회부장 ttalgi21@kyunghyang.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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검찰 조직 내 성폭력, 성추행 사건이 한 여검사에 의해 드러났다. 한국 최고의 권력 조직 내, 최상의 전문직이라 여겨지는 검사도 성폭력의 대상이 되어 고통받고 차별받는 현실을 폭로한 이번 사건은, 역사상 가장 오래된 성계급 체계가 있다는 사실을 새삼 환기한 것이다. ‘여성’은 여전히 상수처럼 존재하는 가장 열등한 계급이다.

사회적으로 많이 진출했다 하지만 실제 여성에 대한 인식은 크게 변하지 않았다. 남성의 충실한 내조자 혹은 부속품, 육아와 양육을 전담하는 존재, 남성의 성적 욕구를 만족시켜주는 ‘용기’라는 인식은 그 뿌리가 흔들리지 않은 채 각종 기술의 발전에 힘입어 변주되고 발전해 왔다. 예전의 ‘빨간책’은 디지털화되어 폭력적 이미지들을 쏟아내고 여성은 발가벗겨진 채 알 수 없는 표정으로 남성들의 눈요깃거리가 되고 있다. 기생집은 룸살롱으로, 집창촌은 오피스텔로 온라인·오프라인을 넘나들며 횡행하는 성산업은 여성을 사고, 팔고, 비하하고, 때리고, 강간한다.

한국여성단체연합, 전국성폭력상담소협의회 등 40여개 시민사회단체가 1일 전국 16개 검찰청 앞에서 검찰 내 성차별, 성폭력 의혹 진상규명을 위한 기자회견을 열었다. 서울 서초구 대검찰청 앞에서 진행된 기자회견에서 한 참석자가 발언하고 있다. 창원지방검찰청 통영지청 서지현 검사는 지난 1월 19일 한 방송사에 나와 법무부 간부였던 안태근 전검사에게 성추행을 당했다는 과거의 사실을 인터뷰를 통해 밝혔다. 1일 서울 서초구 대검찰청 앞에서 기자회견을 연 한국여성단체연합·전국성폭력상담소협의회 등 시민사회단체 회원들이 ‘#미투’라고 쓰인 손팻말을 들고 검찰 내 성차별, 성폭력 의혹 진상규명을 촉구하고 있다. 김창길 기자

이 같은 현상이 사라지지 않은 상태에서 공적 영역에 진출한 여성은 두 가지 역할을 여전히 수행해야 하는 압력을 느낀다. 남성과 함께 업무를 수행하는 자리에서도 여성은 어리고 예쁘고 날씬하고 순종적이어야 하며 남성이 요구하는 어떤 것에도 ‘눈 똑바로 뜨고’ 저항해선 안된다. 적당히 똑똑하고 적당히 일 잘하며 안팎으로 두루두루 살피는 돌봄의 태도까지 갖추어야 한다. 결혼을 해도 문제고 안 해도 문제며, 아이를 낳아도 문제고 낳지 않아도 문제가 된다. 시시때때로 이어지는 성차별적 발언과 성적 괴롭힘, 느닷없는 성적 접촉에도 순응해야 하고, 심지어 분위기를 깨지 않기 위해 적당히 웃어줘야 하며 웬만해선 참아야 살아남는다. 성폭력의 피해자가 되어도 꽃뱀으로 낙인찍히지 않기 위해, 2차 피해를 걱정하며, 공론화해도 해결되지 않을 것이라고 짐작하곤, 조직의 안위까지 생각하며 입술을 깨물고 삭여야 한다. 서지현 검사가 용기 내어 말하는 데 8년이나 걸린 이유다. 여성은 사실상 단 한번도 남성과 동일한 잣대로 평가받은 적도, 동등한 시민이자 사회의 일원으로 존중받은 적도 없다.

이제 어떻게 해야 하나. 우선, 성폭력이 성차별적 사회에서 발생하는 구조적 폭력의 문제라는 사실을 인지할 필요가 있다. 가시적인 잘못을 저지른 특정인들의 주관적 악행이 아니라, 겉으로 보기에 정상적이고 객관적인 사회적 과정의 결과물인 구조적 부정의로 접근해야 한다는 의미다. 

성폭력이 구조적 문제인 이유는 차별을 당하는 집단에 대한 특권이나 지배를 유지하려는 욕구, 혹은 약자로 낙인 찍힌 자들을 지속적인 피해자로 삼고자 하는 권력의지가 발현된 결과물이며, 위계화된 성별 질서에서 배태되어 불공정한 결과를 야기하고 성별 권력관계를 재생산하기 때문이다. 특정 집단에 속했다는 이유만으로 일생을 위협 속에서 살아가게 방치하는 것, 이들에 대한 폭력 행위들을 가능하게 하고 용인하는 것, 그래서 약자에 대한 지배와 통제가 정상적인 것이라는 메시지를 전달하는 것, 다시 피해자들을 암흑의 고통 속으로 몰아넣는 것, 결과적으로 이들의 자유와 존엄성을 박탈하는 것, 그 자체가 구조적 부정의가 아니고 무엇인가.

그러므로 이번 사건에 대한 명명백백한 진상규명과 관계자 처벌은 문제해결의 선결과제이자 첫걸음에 불과하다. 국가인권위원회의 직권조사와 법무부 내 성희롱·성범죄 대책위원회 설치는 반가운 일이다. 그러나 검찰조직 내 ‘불미스러운’ 문제로 축소되어선 안된다. 개인의 도덕적 흠결의 문제이거나 특수 조직의 성추문 사건이 아니다. 피해자에 대한 각종 외모품평회를 일삼으며 사생활을 캐고, 적반하장식 책임전가에 정치적 의도를 의심하는 이들이 넘쳐나고 있다. 이들은 역설적으로 가장 오래된 적폐가 우리 사회 전반에 뿌리 깊은 성차별적 구조임을 웅변 중이다.

이제 프레임의 대전환이 필요하다. 성폭력, 가정폭력, 여아학대, 성매매, 음란물, 스토킹, 데이트강간, 디지털성폭력, 인신매매 등은 ‘여성문제’가 아니다. 대부분의 가해자가 남성이고, 남성들의 의식과 무의식이 전면적으로 개조되지 않는 한 지속적으로 발생하는 문제라면, ‘남성문제’ 아닌가. 무지가 면죄부를 주던 시대는 끝났다. 여성에 대한 폭력을 묵인하고 동조하고 정상화하고 비가시화하며 성차별적 구조를 재생산하는 무지는 명백한 범죄행위다. 그러므로 목격자가 되었을 때 침묵하지 않겠다는 ‘미퍼스트’(#MeFirst) 선언만으로는 부족하다. 일생을 통해 누적된 가해자성을 되돌아보고 성찰하고 반성하는 자세가 우선이다.

들불처럼 번지는 각계각층 여성들의 ‘미투(#MeToo)’운동은 이제 남성들의 변화를 절실히 요청하고 있다. 변혁의 갈림길에서 당신은 무엇을 선택할 것인가. 인식의 지체현상을 깰 것인가, 과거에 머물 것인가.

<이나영 | 중앙대 교수·사회학>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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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지현 검사의 용기 있는 폭로가 큰 파장을 불러일으키고 있다. 검찰 고위간부에게 성추행당하고, 8년 동안 고통 속에서 침묵을 강요당했다는 그의 고백은 공동체 구성원 모두를 부끄럽게 한다. 서 검사는 31일 변호인을 통해 입장을 내고 “까마득한 터널 속에 있는 기분이었는데 많은 분들의 공감, 응원 덕분에 이제 여러분과 같은 세상 속에 있다”고 했다. 그러면서 “이 사건의 본질은 제가 어떤 추행을 당했는지에 있지 않다. 무엇이 문제였으며, 어떻게 바꾸어 나갈 것인가에 관심 가져주길 부탁드린다”고 밝혔다. 한국 사회는 서 검사의 호소에 응답해야 한다.

지난 29일 오후 JTBC 뉴스룸에 출연해 자신이 겪은 검찰 내 성추행 피해 사실을 폭로한 서지현 검사. JTBC 화면 캡쳐

무엇이 문제였나. 이른바 ‘가해자들의 연대’에 책임을 묻지 않을 수 없다. 서 검사가 성추행을 당한 장소는 장례식장이었다. 법무부 장관과 다수 검사들이 함께 있었다. 그럼에도 가해자 안태근 전 검사장의 행동을 제지한 사람은 한 명도 없었다. ‘공익의 대표자’라는 검사들이 눈앞에서 범죄가 벌어지는데 방관했다. 이후 성추행 사실이 덮이는 과정에서도 가해자들의 연대가 작동했을 가능성이 짙다. ‘미투(MeToo)’ 운동을 촉발한 할리우드 영화제작자 하비 와인스타인 사건 때도 마찬가지였다. 와인스타인이 영화 캐스팅을 빌미로 자신을 성폭행하려 했다고 폭로한 여배우 레아 세이두는 “가장 역겨운 건 와인스타인이 그러고 다니는 것을 모두 알았지만, 아무도 행동에 나서지 못했다는 것”이라고 비판한 바 있다. 성폭력을 직접 저질러야만 가해자인 것은 아니다. 성폭력을 외면하거나, 방관하거나, 알고도 침묵하거나, 피해자의 침묵을 강요하거나, ‘피해자 책임론’을 들먹이는 이들 모두 가해자다.

도널드 트럼프 미국 대통령이 30일(현지시간) 취임 후 첫 국정연설을 한 하원 의사당에서 민주당 여성 의원들이 성폭력 피해 고발 캠페인 ‘미투’를 지지하는 취지로 검은색 옷을 입고 있다. 워싱턴 _ EPA연합뉴스

어떻게 바꾸어 나갈 것인가. 문유석 서울동부지법 부장판사는 자신의 페이스북에 “미투 운동에 지지를 보내는 것에 그치지 말고, 내 앞에서 이런 일이 벌어졌을 때 방관하지 않고 나부터 먼저 나서서 막겠다는 미퍼스트(MeFirst) 운동이 필요하다”는 글을 올렸다. 성추행이나 성희롱에 대한 항의가 ‘분위기 깨는 일’이라는 유의 인식은 바뀌어야 한다. 문 부장판사의 말대로 “단 한 명이라도 ‘지금 뭐하시는 겁니까!’ 하며 제지한다면” 가해자는 고립되고 범죄행위는 중단된다. 다수가 침묵을 깨 가해자를 제지하고, 목격한 사실을 증언할 때 세상은 달라질 것이다. 피해자들은 공감과 지지 속에 용기를 내 진실을 드러낼 것이다. 모두가 눈 부릅뜨고 ‘고발자’로 나서야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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처음부터 한국 정부가 혼자 감당할 문제가 아니었다. 어쩌면 한국 정부가 해결하겠다고 나설 일이 아니었다. 일본군에 강제로 끌려가 성노예 제도의 희생양이 된 여성은 26개국 출신 40만명 이상이다. 중국인 20만명을 포함해 독일·영국·미국 간호사 등이 포함돼 있다는 것이 최근의 연구 결과다. 따라서 일대일 양자협상을 통해 해결할 수 있는 문제가 아니었다.

그렇다고 할머니들이 우리 문제부터 해결하지 않으면 일본과 국교를 단절하라고 요구한 것도 아니고, 국제사회에서 한·일 간에 합의가 조속히 이뤄져야 한다고 요구한 것도 아니다. 이런 국제적인 인권문제를 졸속 합의로 땡처리한 당사자가 1965년 한일협정을 강행한 박정희 전 대통령의 딸이라는 사실은 역사의 아이러니다.

일본군 위안부 피해자 할머니들이 9일 오후 경기 광주시 나눔의집에서 강경화 외교부 장관이 한·일 위안부 합의 처리 방향을 발표하는 모습을 TV로 시청하고 있다. 연합뉴스

어쩌면 그런 박근혜 전 대통령이어서 별다른 일이 없으리라고 우리는 생각했는지도 모르겠다. 2014년 4월부터 12차례 국장급 회의가 진행되는 동안 한국 시민단체들도 적극적으로 개입할 생각을 못했다. 한·일 양국에 입장차가 있다는 언론 보도만 있었기에 별다른 결과가 나올까 싶었다.

그러면서도 우리는 한국 정부가 적극적으로 임해야 한다고 생각했다. 일본은 전쟁범죄를 다루는 협상테이블에 앉은 적이 없는 만큼 미국의 요구든 뭐든 협상테이블에 나온 것 자체가 드문 일이었다. 하지만 박근혜 정부가 내놓은 결과는 납득하기 어려운 것이었다. 샌프란시스코에 기림비를 세우는 등 이 문제 해결에 진력해온 우리는 실망하고 분노했다.  

그리고 문재인 정부는 출범 7개월 만인 지난 9일 위안부 합의 후속조치를 발표하면서 일본에 재협상을 요구하지 않겠다고 했다. 이에 대해 일부에서는 합의 파기를 선언해야 한다는 목소리가 나온다. 당장 10억엔을 일본에 돌려주고 화해·치유재단도 해산해야 한다는 것이다.

하지만 문재인 정부는 ‘최종적·불가역적 해결’을 선언한 한·일 합의에 사망선고를 했다. 일본 정부와 언론은 한국이 합의를 파기했다며 반발하고 있다. 한국 정부가 “위안부 문제는 세계인권에 관한 것인 만큼 두 나라의 합의로 해결됐다고 볼 수 없으며, 앞으로 국제기준에 맞춰 피해자 중심으로 해결되어야 한다”고 천명했기 때문이다. 또 “일본 정부가 출연한 화해·치유재단 기금 10억엔은 전액 우리 정부 예산으로 충당하고, 기금의 향후 처리 방안에 대해서는 일본 정부와 협의하도록 하겠다”고 밝혔다.

이제 무엇을 할 것인가. 한·일관계 안에 위안부 문제를 가두는 2015년 양국 합의에 대한 한국 정부의 입장이 바뀌었다는 것을 국제무대에서 행동으로 보여줘야 한다. 위안부 기록물을 유네스코 세계기록유산으로 등재하는 사업부터 재개해야 한다. 우리도 캘리포니아 교육부가 채택한 10학년 교과과정 2016년 개정판에 포함된 한·일 합의에 대한 일본 외무성 링크를 없애달라고 다시 요청할 것이다. 한·일 양국 정부가 공동으로 요청해서 포함된 이 링크를 삭제하는 것은 한국 정부가 간단히 풀 수 있는 첫 번째 과제이기도 하다.

위안부 문제는 피해자와 피해 당사국들만의 문제가 아니다. 전시 여성에 대한 성폭력은 세계의 인권문제다. 가장 앞장서서 가장 오랫동안 싸워온 할머니를 모시고 있는 한국 정부가 국제기준에 맞는 해결을 이루도록 능력을 발휘하기를 기대해 본다. 더 늦기 전에.

<김현정 미국 가주한미포럼 사무국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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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난해 방영된 드라마 <마녀의 법정>에서 여주인공 마이듬 검사(정려원 분)는 독특한 캐릭터였다. ‘외로워도 슬퍼도 나는 안 울어’의 캔디도, 착하고 아름다워 남자에게 구원받는 신데렐라도 아니었다. “나는 약자를 위해 싸우지 않는다. 나를 위해 싸운다”며 거침없이 야망을 드러내는 여성이었다. 드라마는 마이듬이 여성·아동 대상 성범죄를 수사하는 과정에서 내면적 성장을 이루는 과정을 섬세하게 그려내 호평받았다.

배우 정려원이 지난달 31일 오후 서울 여의도 KBS신관에서 열린 2017 KBS 연기대상 레드카펫 행사에 참석하고 있다. 연합뉴스

‘2017 KBS 연기대상’에서 최우수상을 받은 배우 정려원씨의 수상소감도 마이듬다웠다. “(성범죄는) 감기처럼 만연하게 퍼져 있지만 가해자들이 드러나지 않습니다. 이 드라마를 통해 성범죄, 성폭력에 대한 법이 강화돼 가해자들이 처벌을 제대로 받고 피해자들이 목소리를 더 높일 수 있는 기회가 됐으면 좋겠습니다.” 다음날엔 “너무 떨어서 하고 싶은 말도 제대로 못했다”며 인스타그램에 수상소감을 다시 올렸다.

한국에서 배우, 특히 여배우가 사회적 이슈와 관련해 발언한다는 것은 위험한 일이다. 엔터테인먼트업계는 ‘소신 발언’을 반기지 않는다. 시상식 때마다 천편일률적인 ‘감사합니다’ 시리즈가 반복되는 것도 그래서일 테다. 이제 그 벽에 금이 가기 시작했으니, 더 많은 여배우들이 속내를 드러내게 될 것이다.

7일(현지시간) 미국 골든글로브 시상식에선 검은색 드레스를 입은 여배우들이 ‘반성폭력’의 목소리를 냈다. 할리우드 거물 제작자 하비 와인스틴이 수십 년간 여배우 등을 성추행한 사실이 폭로된 이후 벌어진 ‘미 투(MeToo) 운동’의 연장선상이었다. 이 캠페인을 주도한 여배우들이 직장 내 성폭력·성차별 문제를 해소하기 위해 ‘타임스 업’이란 단체를 만들었고, 검은 드레스를 입은 것은 타임스 업의 첫 단체행동이었다. 메릴 스트리프는 “사람들은 이제 힘의 불균형을 안다. 그것이 도처에서 (성적) 학대를 초래했다.

이를 바로잡기 원한다”고 말했다. 오프라 윈프리는 공로상 ‘세실 B 드밀’상을 수상하며 “그들(성폭력 가해자들)의 시간은 끝났다. 새로운 시대가 다가오고 있다”고 외쳤다. 윈프리가 옳다. 저스틴 트뤼도 캐나다 총리의 어록을 빌리면 “지금은 2018년이니까”.

<김민아 논설위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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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구업체 한샘의 신입 여사원 성폭행 논란이 일파만파로 번지고 있다. 사건 자체도 충격적이지만 처리 과정에 회사 측의 조직적인 회유와 압력이 있었다는 피해자의 주장이 더해지면서 파장은 갈수록 커지고 있다. 최고경영자가 사과하고 재발방지를 약속했지만 불매운동과 책임자 처벌을 요구하는 인터넷 청원까지 벌어지고 있다. ‘여성친화 경영’을 표방해온 국내 1위 가구업체에서 신입 여사원 성폭행 의혹이 불거졌다니 놀라움과 개탄을 금할 수 없다. 남성중심 기업문화의 추악한 민낯이 고스란히 드러났다는 점에서 대수롭지 않게 넘길 일이 아니다.

한샘의 사내 성폭행 논란은 지난달 29일 신입사원이라고 밝힌 여성이 인터넷에 “회사 직원들에게 잇달아 성폭행과 성추행을 당했다”는 글을 올리면서 비롯됐다. 이 여성은 지난해 12월 신입사원 회식 때 화장실에서 입사동기 남성에게 ‘몰래카메라 피해’를 당했다고 주장했다. 올해 1월에는 신입사원 교육담당자가 성폭행을 했고, 4월에는 인사팀장이 성폭행을 시도했다고 한다. 화장실에서 몰래카메라를 촬영한 남성 직원은 동종 전과로 집행유예 중이어서 구속됐다. 성폭행 가해자로 지목된 교육담당자는 경찰 조사에서 증거 불충분으로 무혐의 처분을 받았다.

한샘의 사례처럼 직장 내에서 우월적 지위를 남용한 ‘갑질 성범죄’는 매년 증가하는 추세다. 경찰청 자료에 따르면 직장 내 갑질 성범죄는 2012년 341건에서 지난해 545건으로 늘었다. 업무상 위력에 의한 간음·추행도 같은 기간 134건에서 251건으로 급증했다. 직장 내 성범죄가 근절되지 않는 것은 기업에 대한 처벌 규정이 없는 탓이 크다. 미국에선 직장 내 성범죄가 발생하면 가해자뿐 아니라 기업에 징벌적 손해배상금을 물린다. 프랑스와 이탈리아에선 기업이 성범죄를 방치하면 형사 처벌을 받는다. 하지만 국내에는 성범죄가 발생한 기업을 처벌하는 규정이 없다. 남녀고용평등법 등에 직장 내 성희롱을 내부 징계나 과태료 처분 대상으로 규정한 게 전부다.

직장 내 성범죄는 예방교육만으로 근절되기 어렵다. 피해자에게 평생 씻을 수 없는 고통을 안기고, 남녀가 일터에서 조화롭게 일할 수 있는 문화를 조성하지 못한 기업에 대해 처벌을 강화하는 방안을 적극 검토할 필요가 있다. 그릇된 남성중심의 기업문화가 온존하는 한 한샘 사태는 어디에서도 발생할 수 있다는 사실을 잊지 말아야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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할리우드 거물 제작자 하비 와인스타인의 성폭력 스캔들로 촉발된 ‘#미투(Me Too)’ 캠페인에 동참한 여성들의 이름을 보며 다시 한번 실감했다. 사회적 지위와 명성이라는 후천적 권력도 ‘여성’으로 태어났다는 선천적 약점을 상쇄해주지 못한다는 사실을. 와인스타인에게 성추행당했을 때 귀네스 팰트로는 이미 세계적으로 이름이 알려진 영화배우였다. 현재 미국 민주당 차기 대선주자 중 하나로 꼽히는 엘리자베스 워런조차 대학교수 시절 동료 교수에게 성폭행을 당할 뻔했다. 심지어 네덜란드의 한 상원의원은 정치를 막 시작했을 무렵 장관(!)에게 성추행당한 적이 있다고 고백했다. 이들마저 이럴진대, 하물며 후천적 권력은커녕 선천적 약점에 후천적 약점까지 덤으로 얹힌 대다수 여성들은 더 말해 무엇할까.

성폭력을 당할 위험이 비무장지대의 지뢰밭만큼이나 도처에 널려 있는 세상이지만, 사실 그렇기 때문에 우리는 살아가면서 성폭력의 피해자가 될 확률 못지않게 성폭력의 목격자가 될 확률이 높다. 성폭력이 제3자의 눈을 피해 은밀하게 이뤄지는 경우가 많다는 점을 감안하더라도 그렇다. 성폭력은 순간의 충동을 참지 못해 어쩌다 저지르는 한 번의 실수가 아니라 내면화된 습성에서 비롯되기 때문이다. 그런 습성은 수위를 조금씩 달리할 뿐, 타인 앞에서도 쉽게 감춰지지 않는다.

와인스타인은 자그마치 30년 동안 성희롱하고, 성추행하고, 성폭행했다. 이 사실이 알려지자 할리우드의 동료배우와 제작자들은 사회관계망서비스(SNS)에 “꿈에도 몰랐다. 알았다면 가만있지 않았을 것”이란 글을 잇달아 올리며 분노를 쏟아냈다. 그런데 그들은 정말 30년 동안 아무것도 몰랐을까. 그리고 ‘알았다면’ 과연 가만있지 않았을까. 와인스타인과 여러 차례 작업했던 각본가 스콧 로젠버그는 자신의 페이스북에 장문의 고백을 남기면서 “충격을 받았다”고 토로하는 할리우드의 위선을 비판했다.

“이건 명확히 하고 가자. 모두가 X나 잘 알고 있었다. 성폭행까지는 몰라도, 그의 게걸스러운 탐욕은 이미 공공연한 비밀이었으니까. 어떻게 그렇게 확신하냐고? 나는 그 자리에 있었으니까. 당신들을 봤으니까. 당신들과 그것(와인스타인의 행동)에 대해 이야기를 나눴으니까. 바로 당신들. 유명 제작자들, 감독들, 에이전트들, 투자자들, 남자 배우들, 여자 배우들, 모델들, 언론인들, 정치인들! 모두가 X나 잘 알고 있었지만, 그저 하비와 좋은 시간을 즐겼지. 하비는 나의 형편없는 각본에도 거액을 투자해줬다. 나는 (하비와 일하면서 생긴) 이득을 취했고, 대신 입을 닫았다. 결국 나도 공범자다. 그래서 다시 한번 진정으로 미안하다.”

사람들은 자신이 성폭력 현장을 목격하게 된다면 당연히 적극적으로 개입해 말릴 것이라고 쉽게 생각하지만, 실제 그런 일이 닥쳤을 때 행동으로 옮기는 사람은 의외로 많지 않다. 조지 B 커닝햄 텍사스 A&M 대학 교수는 2012년 사람들을 두 그룹으로 나눠 실험을 했다. 한 그룹은 성폭력 상황이 담긴 시나리오를 읽기만 하게 했고, 다른 그룹은 성폭력 상황을 실제로 목격하게 했다. 시나리오를 읽은 사람들 상당수는 ‘이런 일이 실제 벌어진다면 직접 개입해 말리겠다’고 답했지만, 그 상황을 목격한 그룹에서 성폭력을 중단시키기 위해 실제 행동을 취한 사람들의 숫자는 훨씬 적었다.

그래서 미국 등 해외의 초·중등학교, 대학교, 사회단체 등에는 잠재적 성폭력 목격자들을 훈련시키기 위한 ‘목격자 개입 프로그램(bystander intervention program)’이란 것도 존재한다. ‘저 정도는 친밀감의 표현으로 볼 수 있지 않을까.’ ‘여자가 반항하지 않는 걸로 봐서 서로 즐기는 것 아닐까.’ 개입을 망설이는 목격자들을 위해 구체적인 개입 기준과 요령을 알려주는 것이다.

예를 들어 몇년 전 오하이오 대학에서는 공공장소에서 여성이 남성에게 성폭행을 당하는데도 목격자들이 아무도 말리지 않아 충격을 안긴 바 있다. 당시 목격자들은 “남녀가 둘 다 술에 취한 듯 보였고, 여성이 반항하지 않아 서로 즐기고 있는 것이라 생각했다”고 답했다. ‘목격자 개입 프로그램’은 “여성이 반항의사를 표하지 않더라도 어떤 이유에서든 명료한 의식이 없는 상태라면 반드시 목격자가 개입해야 한다”고 가르친다. 본인의 신변까지 위협받을 가능성이 큰 경우엔 경찰에 신고를 하고, 그렇지 않으면 자연스럽게 접근해 남성에게 길을 묻는 방식으로 주의를 흐트러뜨린다는 등 구체적인 개입 요령도 훈련시킨다.

물론 목격자가 나섰다가 피해를 볼 수도 있다. 실제 한국에서는 성희롱당한 동료를 위해 증언을 해줬다가 사측으로부터 노골적인 보복징계를 받은 사례들이 적지 않게 존재한다. 그러나 그럴 때는 그 목격자의 불이익을 목격한 사람들이 또다시 나서면 되지 않을까. 침묵의 문화를 바꿀 수 있는 것은 목격자들의 개입뿐이다. 세상을 바꾸는 것은 피해자가 아니라 목격자의 몫이니까.

<정유진 토요판팀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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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난 5월24일, 한 해군 대위의 자살 소식이 전해졌다. 민간인 친구에게 “상관으로부터 성폭력 피해를 입었다”고 말한 사실이 확인됐고, 자살 다음날 바로 상관인 대령은 준강간 혐의로 긴급 체포됐다. 그리고 그 다음날에는 구속영장이 발부됐다. 해군의 대응은 믿기지 않을 정도로 신속하고 거침이 없다. 고인의 안타까운 죽음을 생각하면 해군의 신속한 대응은 지극히 당연한 일이지만 ‘뭔가 미심쩍다’는 의심을 떨치기 어렵다.
 
보도에 따르면 자살한 대위가 발견된 경위는 ‘연락이 끊긴 채 출근을 하지 않아 동료들이 대위의 집을 찾아갔다가’이다. 단순히 연락이 안되고 출근하지 않는다고 ‘동료들’이 집까지 찾아가는 일은 아무래도 상식적이지 않다. 유서도 없었는데 민간인 친구에게 털어놓았다는 얘기만으로 가해자를 특정하고 단 7시간 만에 긴급 체포했다는 것도 이상하다. 또한 대령이 만취상태로 성관계를 한 사실은 인정했다지만 체포 하루 반나절 만에 구속영장이 발부된 것까지. 그야말로 일사천리 속도전적 해결이다.
 
그동안 수많은 군대 내 성폭력 및 자살·사망사건들에서 축소·은폐·조작을 위한 조직적 시도들이 있었던 점을 고려하면 이런 대응들은 이상하고 낯설다. 뭔가 숨겨진 얘기가 훨씬 많을 것 같다는 합리적 의심이 든다. 그래서 지금 이 사건 해결에서 가장 필요한 것은 ‘신속한 결론과 처벌’이 아니라고 느낀다. 대위에게 어떤 일이 있었고 왜 그런 선택을 할 수밖에 없었는지 철저한 조사가 먼저다.
 
2016년 금태섭 의원이 공개한 자료에 따르면 최근 5년간 여군 대상 성폭력 범죄를 저지른 ‘육군’은 총 111명이고 대부분 계급과 서열에 의한 권력형 성폭력이었음에도 실형 선고는 7명(5.9%)에 그쳤다. 2014년 발표된 홍일표 의원의 자료에서도 실형은 5%에 불과했다. ‘강력한 처벌’을 할 것처럼 보이지만 실제로 제대로 처벌받는 사례는 드문 것이다.
 
상명하복의 강력한 권위적, 위계적인 구조, 폐쇄적인 조직문화, 여성군인을 동료가 아닌 ‘여성’으로 여기는 젠더화된 위계질서는 군대 내 성폭력의 원인이자 동시에 군대 내 성폭력을 축소·은폐·조작하는 메커니즘이다. 피우진 보훈처장 내정자의 경험담과 2013년 육군 대위 자살사건 등 수많은 성폭력사건을 통해 우리는 이미 알고 있다.
 
2014년 발표된 ‘군 성폭력 실태조사’에 따르면, 군대 내에서 성적 괴롭힘이 밝혀졌을 때 피해자는 집단 따돌림(35.3%), 가해자나 부대 내 선임 혹은 상관에 의한 보복(각 23.5%), 전출(17.7%) 등의 불이익을 받았고, 불이익을 받지 않은 경우는 단 한 건도 없었다. 피해 시 남성군인은 97.4%가 대응하겠다고 했지만 여군은 단 10.0%만이 대응하겠다고 했다. 이런 현실에서 군대 내 시스템만으로 군대 내 성폭력 문제 해결을 말하는 것은 어불성설이다. 근본적인 문제 해결에 제대로 접근할 수 없고 어떠한 변화도 만들어낼 수 없다.
 
지금 필요한 것은 신속한 결론이 아니라 ‘인권 관점의 충분하고 철저한 조사’다. 그래서 여성단체들은 인권위, 국회, 민간전문가가 참여하는 특별조사를 요구한다. 특별조사에는 종결된 성폭력사건에 대해서도 철저한 검증과 재조사를 포함할 것을 제안한다. 또 다른 ‘ㄱ대위’가 생기지 않도록 환부를 확실히 도려내는 과정이 필요하다. 고인의 희생이 헛되지 않도록. 삼가 고인의 명복을 빕니다.

김민문정 한국여성민우회 대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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모든 것이 그 속으로 휩쓸려 들어간 것만 같다. 모두들 제각기 다른 생각과 입장, 각양각색의 고민들을 머리와 마음속에 가득 안고 있겠지만 한 가지 분명한 것은 있다. 우리 모두를 하나 되게 한 것은 정의로운 사회에 대한 타오르는 열망이라는 점이다.

하지만 정의를 바로 세우기 위한 또 다른 작은 목소리들을 그 거대한 포효 속에서 우리가 잠시 잊어버렸던 것도 사실이다. 기억하고 있는가? 불과 얼마 전까지만 해도 ‘문단 내 성폭력’ ‘미술계 성폭력’ 등 온갖 분야에서의 이른바 ‘성폭력 피해 고발’이 하루가 멀다 하고 터져 나왔다는 것을. 비록 이제는 거의 모든 언론 지면을 송두리째 점령해 버린 그 사건에 묻혀버리긴 했지만 말이다. 심지어 한 언론은 “최순실이 고마운 사람들 #문단_내_성폭력”이라는 카드뉴스를 내기도 했다.

우리 헌법은 비상한 시국에 대한 최후의 보호장치를 잊지 않았다. 1987년 국민들이 피땀으로 성안해 낸 민주헌법은 직무집행에 있어서 헌법이나 법률을 중대하게 위배한 공직자에 대한 탄핵소추 제도를 구비하고 있다. 탄핵 결정으로 민사상·형사상 책임이 면제되지 않음은 물론이다.

성희롱 관련 일러스트_ 김상민 기자

그러나 미시적 일상 속 뿌리 깊은 성희롱·성폭력에 대한 투쟁은 이 거대한 싸움과는 성격을 달리한다. 성희롱 문제만을 두고 생각해 보자. 국가인권위원회는 공공기관의 종사자, 사용자 또는 근로자가 직위를 이용하였거나 업무상으로 행한 성희롱이 아닌 사인 간의 성희롱은 구제 대상으로 삼지도 않거니와, 그나마도 피해 발생 시점으로부터 1년이 경과하였다면 진정을 받아들이지 않는다. 민사 불법행위 손해배상은 재판에 따른 시간과 비용도 문제가 되거니와 원칙적으로 3년의 단기소멸시효 적용을 받으므로 오랜 시간 후에 어렵사리 용기를 낸 피해자에게는 실효적 구제책이 되기 어렵다. 성희롱이든 성폭력범죄든 두 가지 모두, 한 개인의 영혼을 병들게 하고 피폐하게 한다는 점에서 다를 바가 없으나 성희롱 피해자의 경우에는 ‘강간이나 강제추행을 당한 것도 아니잖아’라고 하는, 틀에 박힌 편견에 또 한 번 분루를 삼켜야 하는 때도 많을 것이다.

성희롱·성폭력 문제에 대한 법과 제도, 우리의 사회적 인식에는 여전히 미비한 점이 많다.        

법에 정해진 대로 따르는 길은 차라리 덜 어려울 수 있으나, 나아가야 할 올바른 길을 우리 스스로 찾아내야 하는 싸움은 더 어려울 수밖에 없다. 하지만 우리는 일상 속 폭력에 저항하는 우리의 이 싸움이 정의를 향한 것임을 안다. 법과 제도의 도움을 받기 어려운 상황임에도 용기 있게 진실을 드러내는 피해자들에게 따뜻한 지지를 표명하고 연대의 손길을 내미는 소중한 노력들, 바로 그것이 내일의 대한민국을 보다 건강한 공동체로 만들어 주리라 믿는다. 촛불을 들고 외치자. 우리는 당신들의 아픔을 외면하지 않는다고. 촛불과 함께 도도히 타오르는 우리의 다른 모든 희망과 함께 그들의 목소리도 꼭 기억하자.

박찬성 | 변호사·서울대 인권센터 전문위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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육군본부 감찰실장이 11사단 임모 여단장의 성폭력 사건 조사를 위한 합동조사단 간담회에서 피해 여군 동료들에게 책임을 전가했다는 주장이 제기됐다. 육군본부 원모 감찰실장이 성폭력 사건이 발생한 11사단 소속 여군들에게 “사태가 이렇게 될 때까지 왜 몰랐나”라고 비난했다고 군인권센터가 어제 기자회견을 열어 주장했다. 원 실장은 이 사건 조사를 위한 5부 합동조사단 팀장을 맡고 있다. 그와 동행한 11사단 부사단장도 “똑바로 하라”며 여군들을 죄인처럼 취급했다고 군인권센터는 전했다. 군 간부들의 수준이 정말 이 정도밖에 안되는지 믿기지 않을 정도다.

성폭력 사건 조사 간담회라면 사건 관련 정보 수집과 동료 여군들에게 미친 영향을 파악하는 것이 주요한 목적일 터이다. 가해자의 추가 범행 및 다른 성범죄 발생 여부를 탐문하는 것도 필요한 일이다. 그럼에도 충격을 받았을 게 뻔한 동료 여군들을 위로하지는 못할망정 책임을 전가하다니 입이 다물어지지 않는다. 통상적 의미의 사건 조사가 아니라 남성 위주 성 관념으로 여군들을 겁박하고 피해자에게 2차 피해를 입힌 것이다. 이러니 군이 성범죄 사건과 관련해 자체 정화 능력이 없다는 말이 나온다. 당사자들의 사과와 군 당국의 응당한 조치가 필요하다.

새누리당 송영근 의원의 피해 여하사와 가해자인 임모 여단장에 대한 부적절한 발언이 지난 달 파문을 불러일으켰다. (출처 : 경향DB)


원 실장의 돌출적 언행은 군내 성범죄 사건과, 고위 간부들의 부적절한 발언이 속출하면서 사회적 파장이 계속되는 가운데 나온 것이다. 그렇다면 단순 실언이 아니라 자신의 비뚤어진 성의식을 드러낸 것이라고 볼 수밖에 없다. 나아가 원 실장을 비롯한 문제의 발언 당사자들이 누구보다도 군 내부를 잘 아는 현역 장성인 점을 주목할 필요가 있다. 그간 군내 성폭력 사건의 가해자가 대부분 이들과 같은 고위지휘관이었기 때문이다. 물론 그들 모두를 잠재적 성범죄자로 내모는 것은 잘못된 일이지만 이들이 조성한 군 문화가 군내 성폭력과 성희롱을 조장할 가능성을 열어 놓고 있는 것만은 사실이다.

여군 1만명 시대를 눈앞에 둔 군은 이제 남성의 전유물이 아니다. 군내 성범죄는 군 기강의 문제일 뿐 아니라 국가안보 차원의 중대 현안인 것이다. 그러잖아도 군은 인권의식의 신장과 양성평등이라는 시대 조류에 뒤처져 있다는 지적을 받고 있다. 성범죄 사건이 발생할 때마다 조사반을 가동하지만 지휘관들의 인식 전환 없이는 군내 성범죄의 재발을 막을 수 없다. 병영 문화를 양성 평등이란 시대 조류에 맞춰 재편해야 한다. 그러나 무엇보다 시급한 것은 군 고위간부들의 엇나간 성의식을 바로잡는 일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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TAG 성폭력