처음부터 한국 정부가 혼자 감당할 문제가 아니었다. 어쩌면 한국 정부가 해결하겠다고 나설 일이 아니었다. 일본군에 강제로 끌려가 성노예 제도의 희생양이 된 여성은 26개국 출신 40만명 이상이다. 중국인 20만명을 포함해 독일·영국·미국 간호사 등이 포함돼 있다는 것이 최근의 연구 결과다. 따라서 일대일 양자협상을 통해 해결할 수 있는 문제가 아니었다.

그렇다고 할머니들이 우리 문제부터 해결하지 않으면 일본과 국교를 단절하라고 요구한 것도 아니고, 국제사회에서 한·일 간에 합의가 조속히 이뤄져야 한다고 요구한 것도 아니다. 이런 국제적인 인권문제를 졸속 합의로 땡처리한 당사자가 1965년 한일협정을 강행한 박정희 전 대통령의 딸이라는 사실은 역사의 아이러니다.

일본군 위안부 피해자 할머니들이 9일 오후 경기 광주시 나눔의집에서 강경화 외교부 장관이 한·일 위안부 합의 처리 방향을 발표하는 모습을 TV로 시청하고 있다. 연합뉴스

어쩌면 그런 박근혜 전 대통령이어서 별다른 일이 없으리라고 우리는 생각했는지도 모르겠다. 2014년 4월부터 12차례 국장급 회의가 진행되는 동안 한국 시민단체들도 적극적으로 개입할 생각을 못했다. 한·일 양국에 입장차가 있다는 언론 보도만 있었기에 별다른 결과가 나올까 싶었다.

그러면서도 우리는 한국 정부가 적극적으로 임해야 한다고 생각했다. 일본은 전쟁범죄를 다루는 협상테이블에 앉은 적이 없는 만큼 미국의 요구든 뭐든 협상테이블에 나온 것 자체가 드문 일이었다. 하지만 박근혜 정부가 내놓은 결과는 납득하기 어려운 것이었다. 샌프란시스코에 기림비를 세우는 등 이 문제 해결에 진력해온 우리는 실망하고 분노했다.  

그리고 문재인 정부는 출범 7개월 만인 지난 9일 위안부 합의 후속조치를 발표하면서 일본에 재협상을 요구하지 않겠다고 했다. 이에 대해 일부에서는 합의 파기를 선언해야 한다는 목소리가 나온다. 당장 10억엔을 일본에 돌려주고 화해·치유재단도 해산해야 한다는 것이다.

하지만 문재인 정부는 ‘최종적·불가역적 해결’을 선언한 한·일 합의에 사망선고를 했다. 일본 정부와 언론은 한국이 합의를 파기했다며 반발하고 있다. 한국 정부가 “위안부 문제는 세계인권에 관한 것인 만큼 두 나라의 합의로 해결됐다고 볼 수 없으며, 앞으로 국제기준에 맞춰 피해자 중심으로 해결되어야 한다”고 천명했기 때문이다. 또 “일본 정부가 출연한 화해·치유재단 기금 10억엔은 전액 우리 정부 예산으로 충당하고, 기금의 향후 처리 방안에 대해서는 일본 정부와 협의하도록 하겠다”고 밝혔다.

이제 무엇을 할 것인가. 한·일관계 안에 위안부 문제를 가두는 2015년 양국 합의에 대한 한국 정부의 입장이 바뀌었다는 것을 국제무대에서 행동으로 보여줘야 한다. 위안부 기록물을 유네스코 세계기록유산으로 등재하는 사업부터 재개해야 한다. 우리도 캘리포니아 교육부가 채택한 10학년 교과과정 2016년 개정판에 포함된 한·일 합의에 대한 일본 외무성 링크를 없애달라고 다시 요청할 것이다. 한·일 양국 정부가 공동으로 요청해서 포함된 이 링크를 삭제하는 것은 한국 정부가 간단히 풀 수 있는 첫 번째 과제이기도 하다.

위안부 문제는 피해자와 피해 당사국들만의 문제가 아니다. 전시 여성에 대한 성폭력은 세계의 인권문제다. 가장 앞장서서 가장 오랫동안 싸워온 할머니를 모시고 있는 한국 정부가 국제기준에 맞는 해결을 이루도록 능력을 발휘하기를 기대해 본다. 더 늦기 전에.

<김현정 미국 가주한미포럼 사무국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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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난해 방영된 드라마 <마녀의 법정>에서 여주인공 마이듬 검사(정려원 분)는 독특한 캐릭터였다. ‘외로워도 슬퍼도 나는 안 울어’의 캔디도, 착하고 아름다워 남자에게 구원받는 신데렐라도 아니었다. “나는 약자를 위해 싸우지 않는다. 나를 위해 싸운다”며 거침없이 야망을 드러내는 여성이었다. 드라마는 마이듬이 여성·아동 대상 성범죄를 수사하는 과정에서 내면적 성장을 이루는 과정을 섬세하게 그려내 호평받았다.

배우 정려원이 지난달 31일 오후 서울 여의도 KBS신관에서 열린 2017 KBS 연기대상 레드카펫 행사에 참석하고 있다. 연합뉴스

‘2017 KBS 연기대상’에서 최우수상을 받은 배우 정려원씨의 수상소감도 마이듬다웠다. “(성범죄는) 감기처럼 만연하게 퍼져 있지만 가해자들이 드러나지 않습니다. 이 드라마를 통해 성범죄, 성폭력에 대한 법이 강화돼 가해자들이 처벌을 제대로 받고 피해자들이 목소리를 더 높일 수 있는 기회가 됐으면 좋겠습니다.” 다음날엔 “너무 떨어서 하고 싶은 말도 제대로 못했다”며 인스타그램에 수상소감을 다시 올렸다.

한국에서 배우, 특히 여배우가 사회적 이슈와 관련해 발언한다는 것은 위험한 일이다. 엔터테인먼트업계는 ‘소신 발언’을 반기지 않는다. 시상식 때마다 천편일률적인 ‘감사합니다’ 시리즈가 반복되는 것도 그래서일 테다. 이제 그 벽에 금이 가기 시작했으니, 더 많은 여배우들이 속내를 드러내게 될 것이다.

7일(현지시간) 미국 골든글로브 시상식에선 검은색 드레스를 입은 여배우들이 ‘반성폭력’의 목소리를 냈다. 할리우드 거물 제작자 하비 와인스틴이 수십 년간 여배우 등을 성추행한 사실이 폭로된 이후 벌어진 ‘미 투(MeToo) 운동’의 연장선상이었다. 이 캠페인을 주도한 여배우들이 직장 내 성폭력·성차별 문제를 해소하기 위해 ‘타임스 업’이란 단체를 만들었고, 검은 드레스를 입은 것은 타임스 업의 첫 단체행동이었다. 메릴 스트리프는 “사람들은 이제 힘의 불균형을 안다. 그것이 도처에서 (성적) 학대를 초래했다.

이를 바로잡기 원한다”고 말했다. 오프라 윈프리는 공로상 ‘세실 B 드밀’상을 수상하며 “그들(성폭력 가해자들)의 시간은 끝났다. 새로운 시대가 다가오고 있다”고 외쳤다. 윈프리가 옳다. 저스틴 트뤼도 캐나다 총리의 어록을 빌리면 “지금은 2018년이니까”.

<김민아 논설위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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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구업체 한샘의 신입 여사원 성폭행 논란이 일파만파로 번지고 있다. 사건 자체도 충격적이지만 처리 과정에 회사 측의 조직적인 회유와 압력이 있었다는 피해자의 주장이 더해지면서 파장은 갈수록 커지고 있다. 최고경영자가 사과하고 재발방지를 약속했지만 불매운동과 책임자 처벌을 요구하는 인터넷 청원까지 벌어지고 있다. ‘여성친화 경영’을 표방해온 국내 1위 가구업체에서 신입 여사원 성폭행 의혹이 불거졌다니 놀라움과 개탄을 금할 수 없다. 남성중심 기업문화의 추악한 민낯이 고스란히 드러났다는 점에서 대수롭지 않게 넘길 일이 아니다.

한샘의 사내 성폭행 논란은 지난달 29일 신입사원이라고 밝힌 여성이 인터넷에 “회사 직원들에게 잇달아 성폭행과 성추행을 당했다”는 글을 올리면서 비롯됐다. 이 여성은 지난해 12월 신입사원 회식 때 화장실에서 입사동기 남성에게 ‘몰래카메라 피해’를 당했다고 주장했다. 올해 1월에는 신입사원 교육담당자가 성폭행을 했고, 4월에는 인사팀장이 성폭행을 시도했다고 한다. 화장실에서 몰래카메라를 촬영한 남성 직원은 동종 전과로 집행유예 중이어서 구속됐다. 성폭행 가해자로 지목된 교육담당자는 경찰 조사에서 증거 불충분으로 무혐의 처분을 받았다.

한샘의 사례처럼 직장 내에서 우월적 지위를 남용한 ‘갑질 성범죄’는 매년 증가하는 추세다. 경찰청 자료에 따르면 직장 내 갑질 성범죄는 2012년 341건에서 지난해 545건으로 늘었다. 업무상 위력에 의한 간음·추행도 같은 기간 134건에서 251건으로 급증했다. 직장 내 성범죄가 근절되지 않는 것은 기업에 대한 처벌 규정이 없는 탓이 크다. 미국에선 직장 내 성범죄가 발생하면 가해자뿐 아니라 기업에 징벌적 손해배상금을 물린다. 프랑스와 이탈리아에선 기업이 성범죄를 방치하면 형사 처벌을 받는다. 하지만 국내에는 성범죄가 발생한 기업을 처벌하는 규정이 없다. 남녀고용평등법 등에 직장 내 성희롱을 내부 징계나 과태료 처분 대상으로 규정한 게 전부다.

직장 내 성범죄는 예방교육만으로 근절되기 어렵다. 피해자에게 평생 씻을 수 없는 고통을 안기고, 남녀가 일터에서 조화롭게 일할 수 있는 문화를 조성하지 못한 기업에 대해 처벌을 강화하는 방안을 적극 검토할 필요가 있다. 그릇된 남성중심의 기업문화가 온존하는 한 한샘 사태는 어디에서도 발생할 수 있다는 사실을 잊지 말아야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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할리우드 거물 제작자 하비 와인스타인의 성폭력 스캔들로 촉발된 ‘#미투(Me Too)’ 캠페인에 동참한 여성들의 이름을 보며 다시 한번 실감했다. 사회적 지위와 명성이라는 후천적 권력도 ‘여성’으로 태어났다는 선천적 약점을 상쇄해주지 못한다는 사실을. 와인스타인에게 성추행당했을 때 귀네스 팰트로는 이미 세계적으로 이름이 알려진 영화배우였다. 현재 미국 민주당 차기 대선주자 중 하나로 꼽히는 엘리자베스 워런조차 대학교수 시절 동료 교수에게 성폭행을 당할 뻔했다. 심지어 네덜란드의 한 상원의원은 정치를 막 시작했을 무렵 장관(!)에게 성추행당한 적이 있다고 고백했다. 이들마저 이럴진대, 하물며 후천적 권력은커녕 선천적 약점에 후천적 약점까지 덤으로 얹힌 대다수 여성들은 더 말해 무엇할까.

성폭력을 당할 위험이 비무장지대의 지뢰밭만큼이나 도처에 널려 있는 세상이지만, 사실 그렇기 때문에 우리는 살아가면서 성폭력의 피해자가 될 확률 못지않게 성폭력의 목격자가 될 확률이 높다. 성폭력이 제3자의 눈을 피해 은밀하게 이뤄지는 경우가 많다는 점을 감안하더라도 그렇다. 성폭력은 순간의 충동을 참지 못해 어쩌다 저지르는 한 번의 실수가 아니라 내면화된 습성에서 비롯되기 때문이다. 그런 습성은 수위를 조금씩 달리할 뿐, 타인 앞에서도 쉽게 감춰지지 않는다.

와인스타인은 자그마치 30년 동안 성희롱하고, 성추행하고, 성폭행했다. 이 사실이 알려지자 할리우드의 동료배우와 제작자들은 사회관계망서비스(SNS)에 “꿈에도 몰랐다. 알았다면 가만있지 않았을 것”이란 글을 잇달아 올리며 분노를 쏟아냈다. 그런데 그들은 정말 30년 동안 아무것도 몰랐을까. 그리고 ‘알았다면’ 과연 가만있지 않았을까. 와인스타인과 여러 차례 작업했던 각본가 스콧 로젠버그는 자신의 페이스북에 장문의 고백을 남기면서 “충격을 받았다”고 토로하는 할리우드의 위선을 비판했다.

“이건 명확히 하고 가자. 모두가 X나 잘 알고 있었다. 성폭행까지는 몰라도, 그의 게걸스러운 탐욕은 이미 공공연한 비밀이었으니까. 어떻게 그렇게 확신하냐고? 나는 그 자리에 있었으니까. 당신들을 봤으니까. 당신들과 그것(와인스타인의 행동)에 대해 이야기를 나눴으니까. 바로 당신들. 유명 제작자들, 감독들, 에이전트들, 투자자들, 남자 배우들, 여자 배우들, 모델들, 언론인들, 정치인들! 모두가 X나 잘 알고 있었지만, 그저 하비와 좋은 시간을 즐겼지. 하비는 나의 형편없는 각본에도 거액을 투자해줬다. 나는 (하비와 일하면서 생긴) 이득을 취했고, 대신 입을 닫았다. 결국 나도 공범자다. 그래서 다시 한번 진정으로 미안하다.”

사람들은 자신이 성폭력 현장을 목격하게 된다면 당연히 적극적으로 개입해 말릴 것이라고 쉽게 생각하지만, 실제 그런 일이 닥쳤을 때 행동으로 옮기는 사람은 의외로 많지 않다. 조지 B 커닝햄 텍사스 A&M 대학 교수는 2012년 사람들을 두 그룹으로 나눠 실험을 했다. 한 그룹은 성폭력 상황이 담긴 시나리오를 읽기만 하게 했고, 다른 그룹은 성폭력 상황을 실제로 목격하게 했다. 시나리오를 읽은 사람들 상당수는 ‘이런 일이 실제 벌어진다면 직접 개입해 말리겠다’고 답했지만, 그 상황을 목격한 그룹에서 성폭력을 중단시키기 위해 실제 행동을 취한 사람들의 숫자는 훨씬 적었다.

그래서 미국 등 해외의 초·중등학교, 대학교, 사회단체 등에는 잠재적 성폭력 목격자들을 훈련시키기 위한 ‘목격자 개입 프로그램(bystander intervention program)’이란 것도 존재한다. ‘저 정도는 친밀감의 표현으로 볼 수 있지 않을까.’ ‘여자가 반항하지 않는 걸로 봐서 서로 즐기는 것 아닐까.’ 개입을 망설이는 목격자들을 위해 구체적인 개입 기준과 요령을 알려주는 것이다.

예를 들어 몇년 전 오하이오 대학에서는 공공장소에서 여성이 남성에게 성폭행을 당하는데도 목격자들이 아무도 말리지 않아 충격을 안긴 바 있다. 당시 목격자들은 “남녀가 둘 다 술에 취한 듯 보였고, 여성이 반항하지 않아 서로 즐기고 있는 것이라 생각했다”고 답했다. ‘목격자 개입 프로그램’은 “여성이 반항의사를 표하지 않더라도 어떤 이유에서든 명료한 의식이 없는 상태라면 반드시 목격자가 개입해야 한다”고 가르친다. 본인의 신변까지 위협받을 가능성이 큰 경우엔 경찰에 신고를 하고, 그렇지 않으면 자연스럽게 접근해 남성에게 길을 묻는 방식으로 주의를 흐트러뜨린다는 등 구체적인 개입 요령도 훈련시킨다.

물론 목격자가 나섰다가 피해를 볼 수도 있다. 실제 한국에서는 성희롱당한 동료를 위해 증언을 해줬다가 사측으로부터 노골적인 보복징계를 받은 사례들이 적지 않게 존재한다. 그러나 그럴 때는 그 목격자의 불이익을 목격한 사람들이 또다시 나서면 되지 않을까. 침묵의 문화를 바꿀 수 있는 것은 목격자들의 개입뿐이다. 세상을 바꾸는 것은 피해자가 아니라 목격자의 몫이니까.

<정유진 토요판팀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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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난 5월24일, 한 해군 대위의 자살 소식이 전해졌다. 민간인 친구에게 “상관으로부터 성폭력 피해를 입었다”고 말한 사실이 확인됐고, 자살 다음날 바로 상관인 대령은 준강간 혐의로 긴급 체포됐다. 그리고 그 다음날에는 구속영장이 발부됐다. 해군의 대응은 믿기지 않을 정도로 신속하고 거침이 없다. 고인의 안타까운 죽음을 생각하면 해군의 신속한 대응은 지극히 당연한 일이지만 ‘뭔가 미심쩍다’는 의심을 떨치기 어렵다.
 
보도에 따르면 자살한 대위가 발견된 경위는 ‘연락이 끊긴 채 출근을 하지 않아 동료들이 대위의 집을 찾아갔다가’이다. 단순히 연락이 안되고 출근하지 않는다고 ‘동료들’이 집까지 찾아가는 일은 아무래도 상식적이지 않다. 유서도 없었는데 민간인 친구에게 털어놓았다는 얘기만으로 가해자를 특정하고 단 7시간 만에 긴급 체포했다는 것도 이상하다. 또한 대령이 만취상태로 성관계를 한 사실은 인정했다지만 체포 하루 반나절 만에 구속영장이 발부된 것까지. 그야말로 일사천리 속도전적 해결이다.
 
그동안 수많은 군대 내 성폭력 및 자살·사망사건들에서 축소·은폐·조작을 위한 조직적 시도들이 있었던 점을 고려하면 이런 대응들은 이상하고 낯설다. 뭔가 숨겨진 얘기가 훨씬 많을 것 같다는 합리적 의심이 든다. 그래서 지금 이 사건 해결에서 가장 필요한 것은 ‘신속한 결론과 처벌’이 아니라고 느낀다. 대위에게 어떤 일이 있었고 왜 그런 선택을 할 수밖에 없었는지 철저한 조사가 먼저다.
 
2016년 금태섭 의원이 공개한 자료에 따르면 최근 5년간 여군 대상 성폭력 범죄를 저지른 ‘육군’은 총 111명이고 대부분 계급과 서열에 의한 권력형 성폭력이었음에도 실형 선고는 7명(5.9%)에 그쳤다. 2014년 발표된 홍일표 의원의 자료에서도 실형은 5%에 불과했다. ‘강력한 처벌’을 할 것처럼 보이지만 실제로 제대로 처벌받는 사례는 드문 것이다.
 
상명하복의 강력한 권위적, 위계적인 구조, 폐쇄적인 조직문화, 여성군인을 동료가 아닌 ‘여성’으로 여기는 젠더화된 위계질서는 군대 내 성폭력의 원인이자 동시에 군대 내 성폭력을 축소·은폐·조작하는 메커니즘이다. 피우진 보훈처장 내정자의 경험담과 2013년 육군 대위 자살사건 등 수많은 성폭력사건을 통해 우리는 이미 알고 있다.
 
2014년 발표된 ‘군 성폭력 실태조사’에 따르면, 군대 내에서 성적 괴롭힘이 밝혀졌을 때 피해자는 집단 따돌림(35.3%), 가해자나 부대 내 선임 혹은 상관에 의한 보복(각 23.5%), 전출(17.7%) 등의 불이익을 받았고, 불이익을 받지 않은 경우는 단 한 건도 없었다. 피해 시 남성군인은 97.4%가 대응하겠다고 했지만 여군은 단 10.0%만이 대응하겠다고 했다. 이런 현실에서 군대 내 시스템만으로 군대 내 성폭력 문제 해결을 말하는 것은 어불성설이다. 근본적인 문제 해결에 제대로 접근할 수 없고 어떠한 변화도 만들어낼 수 없다.
 
지금 필요한 것은 신속한 결론이 아니라 ‘인권 관점의 충분하고 철저한 조사’다. 그래서 여성단체들은 인권위, 국회, 민간전문가가 참여하는 특별조사를 요구한다. 특별조사에는 종결된 성폭력사건에 대해서도 철저한 검증과 재조사를 포함할 것을 제안한다. 또 다른 ‘ㄱ대위’가 생기지 않도록 환부를 확실히 도려내는 과정이 필요하다. 고인의 희생이 헛되지 않도록. 삼가 고인의 명복을 빕니다.

김민문정 한국여성민우회 대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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모든 것이 그 속으로 휩쓸려 들어간 것만 같다. 모두들 제각기 다른 생각과 입장, 각양각색의 고민들을 머리와 마음속에 가득 안고 있겠지만 한 가지 분명한 것은 있다. 우리 모두를 하나 되게 한 것은 정의로운 사회에 대한 타오르는 열망이라는 점이다.

하지만 정의를 바로 세우기 위한 또 다른 작은 목소리들을 그 거대한 포효 속에서 우리가 잠시 잊어버렸던 것도 사실이다. 기억하고 있는가? 불과 얼마 전까지만 해도 ‘문단 내 성폭력’ ‘미술계 성폭력’ 등 온갖 분야에서의 이른바 ‘성폭력 피해 고발’이 하루가 멀다 하고 터져 나왔다는 것을. 비록 이제는 거의 모든 언론 지면을 송두리째 점령해 버린 그 사건에 묻혀버리긴 했지만 말이다. 심지어 한 언론은 “최순실이 고마운 사람들 #문단_내_성폭력”이라는 카드뉴스를 내기도 했다.

우리 헌법은 비상한 시국에 대한 최후의 보호장치를 잊지 않았다. 1987년 국민들이 피땀으로 성안해 낸 민주헌법은 직무집행에 있어서 헌법이나 법률을 중대하게 위배한 공직자에 대한 탄핵소추 제도를 구비하고 있다. 탄핵 결정으로 민사상·형사상 책임이 면제되지 않음은 물론이다.

성희롱 관련 일러스트_ 김상민 기자

그러나 미시적 일상 속 뿌리 깊은 성희롱·성폭력에 대한 투쟁은 이 거대한 싸움과는 성격을 달리한다. 성희롱 문제만을 두고 생각해 보자. 국가인권위원회는 공공기관의 종사자, 사용자 또는 근로자가 직위를 이용하였거나 업무상으로 행한 성희롱이 아닌 사인 간의 성희롱은 구제 대상으로 삼지도 않거니와, 그나마도 피해 발생 시점으로부터 1년이 경과하였다면 진정을 받아들이지 않는다. 민사 불법행위 손해배상은 재판에 따른 시간과 비용도 문제가 되거니와 원칙적으로 3년의 단기소멸시효 적용을 받으므로 오랜 시간 후에 어렵사리 용기를 낸 피해자에게는 실효적 구제책이 되기 어렵다. 성희롱이든 성폭력범죄든 두 가지 모두, 한 개인의 영혼을 병들게 하고 피폐하게 한다는 점에서 다를 바가 없으나 성희롱 피해자의 경우에는 ‘강간이나 강제추행을 당한 것도 아니잖아’라고 하는, 틀에 박힌 편견에 또 한 번 분루를 삼켜야 하는 때도 많을 것이다.

성희롱·성폭력 문제에 대한 법과 제도, 우리의 사회적 인식에는 여전히 미비한 점이 많다.        

법에 정해진 대로 따르는 길은 차라리 덜 어려울 수 있으나, 나아가야 할 올바른 길을 우리 스스로 찾아내야 하는 싸움은 더 어려울 수밖에 없다. 하지만 우리는 일상 속 폭력에 저항하는 우리의 이 싸움이 정의를 향한 것임을 안다. 법과 제도의 도움을 받기 어려운 상황임에도 용기 있게 진실을 드러내는 피해자들에게 따뜻한 지지를 표명하고 연대의 손길을 내미는 소중한 노력들, 바로 그것이 내일의 대한민국을 보다 건강한 공동체로 만들어 주리라 믿는다. 촛불을 들고 외치자. 우리는 당신들의 아픔을 외면하지 않는다고. 촛불과 함께 도도히 타오르는 우리의 다른 모든 희망과 함께 그들의 목소리도 꼭 기억하자.

박찬성 | 변호사·서울대 인권센터 전문위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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육군본부 감찰실장이 11사단 임모 여단장의 성폭력 사건 조사를 위한 합동조사단 간담회에서 피해 여군 동료들에게 책임을 전가했다는 주장이 제기됐다. 육군본부 원모 감찰실장이 성폭력 사건이 발생한 11사단 소속 여군들에게 “사태가 이렇게 될 때까지 왜 몰랐나”라고 비난했다고 군인권센터가 어제 기자회견을 열어 주장했다. 원 실장은 이 사건 조사를 위한 5부 합동조사단 팀장을 맡고 있다. 그와 동행한 11사단 부사단장도 “똑바로 하라”며 여군들을 죄인처럼 취급했다고 군인권센터는 전했다. 군 간부들의 수준이 정말 이 정도밖에 안되는지 믿기지 않을 정도다.

성폭력 사건 조사 간담회라면 사건 관련 정보 수집과 동료 여군들에게 미친 영향을 파악하는 것이 주요한 목적일 터이다. 가해자의 추가 범행 및 다른 성범죄 발생 여부를 탐문하는 것도 필요한 일이다. 그럼에도 충격을 받았을 게 뻔한 동료 여군들을 위로하지는 못할망정 책임을 전가하다니 입이 다물어지지 않는다. 통상적 의미의 사건 조사가 아니라 남성 위주 성 관념으로 여군들을 겁박하고 피해자에게 2차 피해를 입힌 것이다. 이러니 군이 성범죄 사건과 관련해 자체 정화 능력이 없다는 말이 나온다. 당사자들의 사과와 군 당국의 응당한 조치가 필요하다.

새누리당 송영근 의원의 피해 여하사와 가해자인 임모 여단장에 대한 부적절한 발언이 지난 달 파문을 불러일으켰다. (출처 : 경향DB)


원 실장의 돌출적 언행은 군내 성범죄 사건과, 고위 간부들의 부적절한 발언이 속출하면서 사회적 파장이 계속되는 가운데 나온 것이다. 그렇다면 단순 실언이 아니라 자신의 비뚤어진 성의식을 드러낸 것이라고 볼 수밖에 없다. 나아가 원 실장을 비롯한 문제의 발언 당사자들이 누구보다도 군 내부를 잘 아는 현역 장성인 점을 주목할 필요가 있다. 그간 군내 성폭력 사건의 가해자가 대부분 이들과 같은 고위지휘관이었기 때문이다. 물론 그들 모두를 잠재적 성범죄자로 내모는 것은 잘못된 일이지만 이들이 조성한 군 문화가 군내 성폭력과 성희롱을 조장할 가능성을 열어 놓고 있는 것만은 사실이다.

여군 1만명 시대를 눈앞에 둔 군은 이제 남성의 전유물이 아니다. 군내 성범죄는 군 기강의 문제일 뿐 아니라 국가안보 차원의 중대 현안인 것이다. 그러잖아도 군은 인권의식의 신장과 양성평등이라는 시대 조류에 뒤처져 있다는 지적을 받고 있다. 성범죄 사건이 발생할 때마다 조사반을 가동하지만 지휘관들의 인식 전환 없이는 군내 성범죄의 재발을 막을 수 없다. 병영 문화를 양성 평등이란 시대 조류에 맞춰 재편해야 한다. 그러나 무엇보다 시급한 것은 군 고위간부들의 엇나간 성의식을 바로잡는 일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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TAG 성폭력