변호사·의료인·언론인·교수·회계사 등 전문직 여성들의 상당수가 직장에서 각종 성희롱과 성폭력에 노출돼 있다는 실태조사 결과가 나왔다. 한국여성변호사회는 5일 전문직 여성 1015명을 대상으로 조사한 결과 이같이 드러났다고 밝혔다. 올해 불붙은  ‘#미투(MeToo·나도 고발한다)’ 운동은 현직 검사인 서지현 검사가 폭로한 상급자의 성추행 사건에서 시작됐다. 여성들의 인권을 유린하는 성폭력이 전문직이자 막강한 권력을 갖고 있는 검사들에게도 남의 일이 아니라는 사실을 보여준 사건이다. 이번 조사결과는 이 같은 잘못된 성문화가 우리 사회의 어느 분야에서도 예외가 아니라는 것을 확인시킨다.

5일 서울 서초구 변호사회관에서 한국여성변호사회 주최로 전문직 여성 직장 내 성폭력 실태조사 심포지엄이 열리고 있다. 김창길 기자

조사결과 응답자의 절반 이상(541명)이 ‘외모, 옷차림, 몸매 등을 성적으로 희롱·비하·평가받는 행위’를 직·간접적으로 당했다고 답했다. 성적인 이야기나 음담패설을 듣거나, 고의로 신체 부위를 건드리거나 몸을 밀착시키는 행위를 당하거나 이성의 옆에 앉기나 러브샷 등을 강요당했다는 응답자도 각각 절반가량 됐다. 대면조사에 응한 전문직 여성들은 직장 상사 등이 회식 중이나 후, 또는 차량을 함께 타고 가면서 강제로 신체접촉을 하거나 모텔 등에 끌고 가기도 했다고 고백했다. 특히 전문직 여성들은 향후 불이익이 클 것이라는 불안감 때문에 성폭력을 당해도 제대로 문제 제기하지 못하는 경우가 많다. 실제 이번 조사에서도 성폭력 피해 이후 문제 제기를 한 328명 중 10%가량인 33명이 ‘업무상 부당 대우를 겪었다’고 답했다. 악의적 소문이나 따돌림에 노출된 사례도 14.6%나 됐다.

조사결과는 우리 사회에서 이른바 ‘엘리트’ 조직이라 불리는 법조계·의료계·언론계·학계 등에도 어김없이 고질화된 남성중심적인 조직 문화가 자리 잡고 있다는 것을 보여준다. 이들 조직에서 근무하는 남성들 대부분이 평균 이상의 교육을 받은 이들이다. 그럼에도 상당수 남성들이 여성 동료를 성적 대상으로 삼는 잘못된 문화에 물들어 있는 것이다. 남성들의 인식 전환이 필요한 것은 물론이고, 성폭력 예방과 가해자에 대한 철저한 처벌을 위한 법적·제도적 뒷받침도 필요하다. 최근 여성의 사회진출이 크게 늘면서 전문직에서도 새로 진입하는 인력 중 여성이 절반을 넘고 있다. 이제는 단지 ‘소수자’인 여성 배려 차원이 아니라 조직의 정상적인 운영을 위해서도 구시대적인 남성중심적 문화는 사라져야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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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난해 초 당시 문재인 대통령 후보가 ‘페미니스트’라고 선언했을 때 나는 희망을 품었다. 대통령 선거 결과를 보며 ‘이제는 여성들의 삶이 바뀌겠구나!’ 희망에 가슴이 벅찼다.

올해는 미투 운동으로 시작했다 해도 과언이 아니다. 희망을 품은 여성들이 그동안 겪었던 차별과 폭력을 증언하며 사회의 변화를 촉구했다. 여성혐오 사회에서 자신의 발화가 어떤 어려움과 파장을 가져올지 알면서도 여성들은 용기를 냈다. 변하지 않으면 한국 사회에 미래는 없으니까.

여성의 삶에도 민주주의가 실현되기를 바라는 여성들의 용기가 밑거름이 되어 변화를 만드는 것처럼 보였다. 정부는 신속하게 성희롱·성폭력 근절을 위한 범정부협의체를 꾸리는 등 범정부 차원의 근본적인 대책을 마련하겠다고 공언했다. 법무부, 문화체육관광부, 교육부, 경찰청 등 문제가 제기된 핵심부처에서도 별도의 대책기구를 만들고 발 빠르게 대책 마련에 나섰다.

26일 여성단체 ‘페미당당’ 등이 서울 종로구 보신각 앞에서 주최한 낙태죄 폐지를 요구하는 집회에 참가한 여성 125명이 경구용 임신중단약인 ‘미프진’을 먹는 퍼포먼스를 하고 있다. 김영민 기자

그런데 문재인 정부 출범 1년3개월, 미투 운동 6개월이 지난 지금, 한국 사회는 무엇이 변했는가? 하나의 사안이 발생할 때는 그저 하나의 현상일 뿐이다. 그러나 유사한 ‘하나’들이 생기고 그 양이 늘어나면 이는 개별 현상을 넘어 ‘기조’이고 ‘방향’이 된다.

미투 운동의 상징이며 한국 사회의 새로운 성폭력 규범 정립의 지렛대가 될 것이라고 믿었던 안희정 전 충남지사 성폭력 사건에 대한 법원의 무죄 판결. 미투 운동의 후속 대책으로 마련된 성희롱·성폭력 예방 및 성평등 추진체계 인력과 예산에 대한 행정안전부와 기획재정부의 제동. 하루에도 수백명의 여성들이 엄청난 금액을 지불하면서도 안전하지 않은 의료 환경에서 심지어 처벌에 대한 두려움까지 떠안고 임신중절을 하는 상황임에도 낙태죄 위헌 여부에 대한 판단을 다른 중요한 사안을 이유로 차기 재판부로 미룬 헌법재판소. 국민의 건강과 보건을 책임지고 특히 임신중절과 관련한 주요법안인 모자보건법의 주무부처임에도 헌법재판소 낙태죄 심리과정에서 ‘의견 없다’며 책임을 방기한 보건복지부. ‘임신중절수술은 비도덕적 진료행위’라고 규정한 복지부의 의료관계 행정처분규칙 날치기 고시. 불법촬영과 촬영물 유포에 대한 경찰의 편파수사와 무수한 법원의 편파판결. 개각 대상에 3명의 여성장관과 미투 운동 핵심부서인 여성가족부를 포함한 청와대….

일련의 사건들은 현재 문재인 정부가 어떤 방향으로 나아가고 있는지 적나라하게 보여준다. 사법과 행정을 퉁칠 수 없음을 안다. 그러나 우리는 완전히 분리할 수 없음도 너무나 잘 안다. 그래서 지금의 현실이 기막히다.

모 방송에 출연한 불법촬영물 삭제업체 대표는 삭제를 의뢰했다가 자살해 연락이 끊기는 사례가 100건 중 3~5건이나 된다고 말했다. 이유조차 모른 채 가족들은 딸, 누나, 엄마의 죽음을 맞이하고 있다. 복지부의 의료관계 행정처분규칙 고시로 의사들은 임신중절수술을 전면 금지하겠다 한다. 얼마나 더 여성들이 벼랑 끝으로 내몰려야 하는가? 

이제라도 문재인 정부는 입에 발린 수사와 이벤트가 아닌 구체적인 인력과 예산정책, 그리고 실질적인 법집행으로 답해야 한다. 올 한 해에만 거리에 나선 수십만명의 여성들. 국가에 대한 복수로 비혼·비출산을 선언하는 20~30대 여성들. 직장 내 성차별과 성폭력에 대항해 노조를 만들고 싸우는 여성들….

문재인 정부는 그들을 똑똑히 봐야 한다. 그들은 분명한 변화가 보일 때까지 결코 물러나거나 주저앉지 않을 것이기 때문이다.

<김민문정 | 한국여성민우회 대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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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랫동안 감추어졌던 여성에 대한 폭력의 역사가 진실의 햇빛 아래에 모습을 드러내고 있다. 상처받은 피해자의 목소리가 또 다른 피해자의 목소리와 이어지며 부서지지 않을 것 같던 견고한 장벽을 조금씩 흔들고 있다. 모든 폭력은 가해자와 피해자의 권력 관계에 기인한다고 생각한다. 우리 사회에 오랜 시간 동안 뿌리내렸던 가부장제와 남성 중심적인 권력구조가 가해자에게 압도적인 권력을 주었고, 피해자인 여성에게는 침묵을 강요해왔다. 지금 드러나는 수많은 폭력이 오랫동안 은폐된 가장 큰 이유다.

같은 이유에서 침묵을 강요당하는 피해자가 여기에도 있다. 한국에 머무는 많은 이주여성이다. 얼마 전 한국이주여성인권센터와 공익인권법재단 공감에서 실시한 ‘이주여성 농업노동자의 성폭력 실태조사’에 따르면 응답자 중 12.4%가 성폭력 피해를 경험했다고 답변했다. 농촌 노동의 특수한 문제는 아니다. 식당, 공장에서도 여성 이주노동자에 대한 성희롱, 성폭력은 빈번하다. 혼인이주 여성의 성폭력이 동반된 가정폭력도 심각한 수준이다. 최근에는 외국인 유학생에 대한 성폭력 사건도 자주 발생하고 있다.

4일 서울 광화문광장에서 열린 ‘3·8 세계여성의날 기념 제34회 한국여성대회’에 참석한 시민들이 성폭력을 고발하는 ‘미투 운동’을 지지하고 성평등 실현을 촉구하는 집회와 행진을 하고 있다. 정지윤 기자

특히 이주여성들은 공장, 가정, 학교 등 공간적으로 고립되어 있어 외부기관의 조력을 받기 쉽지 않다. 또한 성폭력 피해에 대처할 정보가 충분하지 않고, 무엇보다 한국어 의사소통 능력이 떨어져 적절한 대응을 하지 못하는 경우가 많다. 성폭력 피해를 입은 이주여성들이 언어의 부담 없이 자국어로 소통하며 자신의 피해 사실을 충분히 설명하고 이에 대해 지원을 받을 수 있는 통합 지원 기관의 설립과 경찰·검찰·법원의 사법적 지원이 체계적으로 마련되어야 할 필요가 있다. 이러한 사후적인 지원도 중요하지만, 그보다 더욱 필요한 것은 처음부터 이주여성 피해자가 발생하지 않도록 하는 제도의 근본적인 개선이다. 우리나라의 출입국 정책에 따르면 이주여성은 너무도 취약한 지위에 놓여 있다. 한국 사람과 결혼한 이주여성은 매번 자신의 체류자격을 연장하려면 한국인 남편이 함께 출입국관리소에 동행해야 한다. 두 사람이 진정한 결혼생활을 계속하고 있는지를 심사하기 위해서라고 하는데, 진정한 혼인 관계를 유지하고 있는지를 정부 기관이 심사한다는 것도 당혹스러운 일이지만 이러한 심사를 처음 혼인신고 이후에도 매년 반복해야 한다. 이주여성이 남편에게 가정폭력을 당해도 “신고하면 출입국관리소에 같이 안 가준다”는 말 한마디에 수년 동안 피해를 참고 지낼 수밖에 없었다.

일터에서의 문제는 더욱 심각하다. 지금의 제도에서는 외국인 노동자의 경우 사장이 외국인 노동자의 체류자격을 사실상 결정할 수 있는 권한이 있다. 외국인 노동자는 사장이 싫어도 사업장을 마음대로 바꿀 수 없다. 예외적인 몇 가지 경우를 제외하고, 사장의 허락 없이 사업장에서 이탈하면 그 순간 ‘불법체류자’가 된다. 사장이 가진 권한은 막강하지만, 책임은 거의 없다. 제대로 된 잠금장치도 없는 낡은 비닐하우스가 이주여성 노동자의 숙소이며, 그마저 사장은 여성 노동자의 숙소를 제멋대로 들락날락한다. 이런 숙소를 제공하고 월급에서 매달 20만~30만원씩 깎는다. 고용노동부 지침에 따른 것이라니 할 말이 없다. 이런 취약한 상황에 놓인 이주여성 노동자들이 사장의 온갖 성폭력에 노출되는 것이다.

한 인간이 존엄한 인간으로 존중받지 못하고, 정부에서 만든 제도가 이주여성을 열악한 사각지대로 밀려날 수밖에 없게 만든다면, 이주여성에 대한 폭력은 갈수록 심각해지고, 지속해서 은폐될 수밖에 없다. 어떠한 법과 제도도 사람을 누구에게 종속된 존재로 만들어서는 안 된다. 뒤늦게나마 그동안 감추어진 여성들에 대한 폭력의 역사를 햇빛 아래로 모습을 드러내게 한 위대하고 용감한 목소리가, 지금 이 순간 우리 사회 가장 취약한 어느 곳에서 눈물 흘리는 피부색 다른 이주여성에게도 울림으로 이어지길 희망한다.

<조영관 | 변호사·이주민센터 친구 사무국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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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느 대학으로부터 자문 요청을 받았다. 사건이 발생했기에 즉시 위원회를 소집해 성희롱에 해당하는 것으로 판단하고 징계절차에 회부했단다. 그런데 징계절차 중 학내 근거 규정을 다시 살펴보니 이 사안이 과연 성희롱이 맞는지 반론이 제기되었다는 것이다. 변호사 자문을 구했더니 법률상 성희롱에는 해당하지 않는다는 회신이 왔다고 했다.

성희롱으로 보이지만 성희롱이 아닐 수도 있다는 당혹스러운 의견은, 적어도 법리적으로는 터무니없는 소리가 아니라는 데 문제가 있다. 해당 대학의 규정에는 “이 지침에서 사용하는 ‘성희롱’이란 양성평등기본법 제3조 제2호에 따른 성희롱을 말한다”고 되어 있었다. 그런데 양성평등기본법에 따르면 성적 굴욕감이나 혐오감을 느끼게 하는 것만으로는 부족하다. ‘업무, 고용 그 밖의 관계’하에서 ‘국가기관 등의 종사자’가 행한 점, 그리고 ‘지위 이용 또는 업무 관련’이라는 점까지 전부 인정되어야 비로소 이 법에 따른 성희롱이 된다.

학생 사이의 성적 언동이라면 어떤가? 이것이 업무·고용 등의 관계에서 있었던 것인가? 학생이 국가기관이나 공공단체의 ‘종사자’인가? 지위를 이용하거나 업무와 관련된 것으로 볼 수 있을까? 직원이 업무일 아닌 휴일에 사무실이 아닌 곳에서 한 번도 마주친 적 없는 어느 학생에게 같은 대학의 직원임을 밝히지 않고 혐오스러운 성적 언동을 했다고 하자. 이런 경우까지도 지위를 이용하거나 업무 관련성이 있는 것이라 볼 수 있을지는 의문스럽다.

일러스트_ 김상민 기자

이는 굴욕감을 주는 성적 언동이라는 측면에서 분명 성희롱이지만 법률에 따라 적절히 규제되지 못하고 있는 사례들이다. 대학 내 성희롱 가운데 큰 비중을 차지하는 학생 간 성희롱은 놀랍게도 법률상의 정의에 따른 성희롱이 아니다.

대학이 성희롱 예방 규정을 마련할 때, 법에서 정한 내용을 그대로 따르는 것이 가장 안전하리라 생각하는 것도 무리는 아니다. 법에 이렇게 구멍이 숭숭 뚫려 있으리라고 어느 누가 생각하겠는가. 그러다보니 이런 웃지 못할 촌극이 발생한다.

‘업무·고용 등’ ‘지위 이용이나 업무 관련’ 등의 요건은 당연히 성희롱에 해당하는 것으로 보아야 할 성적 언동을 법률상의 성희롱으로 포섭하지 못하게 하는 장애물이다. 서울대의 경우, 대학 내에서 발생 가능한 모든 상황에 대비하기 위해 위와 같은 요건을 모두 배제하고 성적 굴욕감이나 혐오감을 일으키는 일체의 언동을 규제 대상으로 삼고 있다. 이처럼 폭넓게 정의하는 것이 위법한 것도 아니다. 규제되어 마땅한 것을 빠짐없이 규제하고 있는가 하는 점이 핵심이다. 법률 규정을 그대로 따온 성희롱 예방규정을 아직 유지하고 있는 여러 대학들에서는 현실과 필요에 부합하는 방향으로 조속히 관련 규정을 개정하는 것이 바람직할 것이다.

박찬성 | 변호사·서울대 인권센터 전문위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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TAG 성희롱

모든 것이 그 속으로 휩쓸려 들어간 것만 같다. 모두들 제각기 다른 생각과 입장, 각양각색의 고민들을 머리와 마음속에 가득 안고 있겠지만 한 가지 분명한 것은 있다. 우리 모두를 하나 되게 한 것은 정의로운 사회에 대한 타오르는 열망이라는 점이다.

하지만 정의를 바로 세우기 위한 또 다른 작은 목소리들을 그 거대한 포효 속에서 우리가 잠시 잊어버렸던 것도 사실이다. 기억하고 있는가? 불과 얼마 전까지만 해도 ‘문단 내 성폭력’ ‘미술계 성폭력’ 등 온갖 분야에서의 이른바 ‘성폭력 피해 고발’이 하루가 멀다 하고 터져 나왔다는 것을. 비록 이제는 거의 모든 언론 지면을 송두리째 점령해 버린 그 사건에 묻혀버리긴 했지만 말이다. 심지어 한 언론은 “최순실이 고마운 사람들 #문단_내_성폭력”이라는 카드뉴스를 내기도 했다.

우리 헌법은 비상한 시국에 대한 최후의 보호장치를 잊지 않았다. 1987년 국민들이 피땀으로 성안해 낸 민주헌법은 직무집행에 있어서 헌법이나 법률을 중대하게 위배한 공직자에 대한 탄핵소추 제도를 구비하고 있다. 탄핵 결정으로 민사상·형사상 책임이 면제되지 않음은 물론이다.

성희롱 관련 일러스트_ 김상민 기자

그러나 미시적 일상 속 뿌리 깊은 성희롱·성폭력에 대한 투쟁은 이 거대한 싸움과는 성격을 달리한다. 성희롱 문제만을 두고 생각해 보자. 국가인권위원회는 공공기관의 종사자, 사용자 또는 근로자가 직위를 이용하였거나 업무상으로 행한 성희롱이 아닌 사인 간의 성희롱은 구제 대상으로 삼지도 않거니와, 그나마도 피해 발생 시점으로부터 1년이 경과하였다면 진정을 받아들이지 않는다. 민사 불법행위 손해배상은 재판에 따른 시간과 비용도 문제가 되거니와 원칙적으로 3년의 단기소멸시효 적용을 받으므로 오랜 시간 후에 어렵사리 용기를 낸 피해자에게는 실효적 구제책이 되기 어렵다. 성희롱이든 성폭력범죄든 두 가지 모두, 한 개인의 영혼을 병들게 하고 피폐하게 한다는 점에서 다를 바가 없으나 성희롱 피해자의 경우에는 ‘강간이나 강제추행을 당한 것도 아니잖아’라고 하는, 틀에 박힌 편견에 또 한 번 분루를 삼켜야 하는 때도 많을 것이다.

성희롱·성폭력 문제에 대한 법과 제도, 우리의 사회적 인식에는 여전히 미비한 점이 많다.        

법에 정해진 대로 따르는 길은 차라리 덜 어려울 수 있으나, 나아가야 할 올바른 길을 우리 스스로 찾아내야 하는 싸움은 더 어려울 수밖에 없다. 하지만 우리는 일상 속 폭력에 저항하는 우리의 이 싸움이 정의를 향한 것임을 안다. 법과 제도의 도움을 받기 어려운 상황임에도 용기 있게 진실을 드러내는 피해자들에게 따뜻한 지지를 표명하고 연대의 손길을 내미는 소중한 노력들, 바로 그것이 내일의 대한민국을 보다 건강한 공동체로 만들어 주리라 믿는다. 촛불을 들고 외치자. 우리는 당신들의 아픔을 외면하지 않는다고. 촛불과 함께 도도히 타오르는 우리의 다른 모든 희망과 함께 그들의 목소리도 꼭 기억하자.

박찬성 | 변호사·서울대 인권센터 전문위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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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용노동부가 채용정보사이트 ‘워크넷’에 성차별적 면접 요령을 올렸다가 논란이 일자 삭제했다. 지난 14일 오후까지 워크넷에 올라 있던 여성 구직자용 예상질문과 모범답안은 이런 것들이다. “성희롱에 대해 어떻게 생각합니까?” “가벼운 말이라면 신경 쓰지 않겠고, 농담으로 받아칠 여유도 필요하다고 생각합니다.” 직장 내 성차별 해소에 앞장서야 할 주무 부처가 외려 성차별을 조장하는 격이니 개탄스럽다.

워크넷에 실려 있다 삭제된 예상문답은 황당하다. “커피나 복사 같은 잔심부름이 주어진다면?”이란 질문엔 “한 잔의 커피도 정성껏 타겠다. 사무실 청소도 할 수 있다”를 답변으로 제시했다. 결혼·출산에 대해 물으면, 결혼 후 퇴사를 전제로 하는 회사도 있으니 신중하게 답하라고 권했다. 이들이 내놓은 모범답안은 “결혼 계획도, 이성 친구도 없다. 언니들도 일에 매진하다 서른에 결혼했다”는 것이다. 결혼·출산을 이유로 퇴사를 요구하는 일은 불법임에도, 질문에서 이를 당연시하니 기막히다. 성희롱 관련 질문에선 “지나치게 예민한 여성 사원에게 곤란을 당한 회사도 있다. 도량을 넓혀 말하라”고 했다. 정당한 문제 제기를 ‘예민하고 도량이 부족한 여성’의 투정쯤으로 치부한 것이다. 정부 인식이 이 수준이니 전직 국회의장에서 전직 검찰총장, 현역 사단장, 현직 서울대 교수까지 직역을 불문하고 성추행이 만연한 것 아니겠는가.


노동부는 “워크넷이 민간 구직사이트와 연계돼 있어 발생한 문제”라 해명한 모양이다. 이 해명이 정부 잘못을 정당화할 수는 없으나, 시사점을 주는 측면은 있다. 민간 사이트에 상식 밖의 면접 요령이 떠도는 것은 성차별적 채용 관행이 뿌리 깊음을 방증한다. 취업포털 사람인이 지난해 10월 구직자 1142명을 조사한 결과, 여성의 58%가 ‘면접에서 성별을 의식한 질문을 받은 적이 있다’고 답했다. 질문 유형도 애인 유무, 결혼 계획, 야근 가능 여부, 커피 심부름에 대한 생각, 출산 후 퇴사 계획 등을 망라했다고 한다.

노무현 정부 당시인 2007년 노동부는 ‘표준면접 가이드라인’을 개발해 공공부문과 1000명 이상 대기업에 보급한 바 있다. 여성이 불합리한 차별을 받지 않도록 면접위원을 공정하게 구성하고, 성별에 따라 질문을 달리하지 않으며, 결혼·이혼·출산·육아·외모와 관련해선 묻지 않도록 했다. 노동부는 공정한 취업기회 보장을 위해 이 같은 가이드라인이 현장에서 적용될 수 있도록 적극 나서야 한다. 이에 앞서 성차별적 면접 요령이 워크넷에 오른 과정을 명확히 규명해 책임을 물어야 함은 물론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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TAG 성희롱