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리나라는 행정권이 입법, 사법에 비해 월등히 큰 전형적 개발도상국형 현대행정국가이다. 그래서인지 최근 안전행정부 장관은 ‘세월호특별법’과 관련지어 국회선진화법을 비난하면서 “내각제였다면 국회를 해산해야 할 상황”이라며 국회 자진해산을 촉구했다. 이런 발언을 보면 관료제가 국민의 대의기관인 입법부를 얼마나 무시하며 국민을 얕잡아 보는지 알 수 있다.

관료는 원래 정책 결정의 주된 참여자가 아니었으나 행정 활동이 전문화·복잡화하면서 정책 결정 과정에서 중요한 위치를 차지하게 되었다. 이는 사회 발전에 따라 입법활동이 기술적으로 복잡해져 행정수반의 역할이 증대되었고, 법률 규정의 모호성과 비정밀성이 공무원들에게 재량적 결정권을 준 것이라 할 수 있다. 그러나 권한이 너무 비대해진 관료제는 민주주의의 중대한 위협세력이 될 수 있으므로 정책의 민주화를 위해 관료의 결정권은 어떤 방식으로든 통제되어야 한다.

우리나라 대통령은 입법, 사법, 행정을 불문하고 가장 큰 영향력을 행사하고 있다. 제왕적 대통령이라 부를 만큼 정책 결정 과정에 대한 대통령의 지배력은 더욱 커지고 있다. 그런데 현 시점 우리 사회에서 가장 중대한 사회문제이자 정책 형성 과정에 있는 ‘세월호특별법’ 제정에 대해 최고 정책 결정자인 대통령은 이상하게도 대통령이 관여할 일이 아니라며 입법부가 처리하라고 했다. 가장 강력한 정책 결정 권한을 가지고 있는 대통령이 스스로 중대한 그 권한을 포기한다는 것은 명백한 직무유기이다.

민주주의 국가에서 입법부는 헌법상 국가의 최고 정책기관이다. 정책 결정 과정에서 입법부는 정책 의제 형성에 대한 민의 반영, 법률 혹은 예산 형태로 정책을 결정하는 기능, 정책 집행에 대한 통제와 감시, 결산을 통한 정책 평가 기능 등을 수행한다. 그러나 1930년대 이후 행정국가화 현상이 나타나면서부터 이 과정에서 입법부의 기능이 상대적으로 약화되기 시작했다.

사법부는 법률심사권, 법령해석권 등을 통해 정책 결정에 참여할 수 있다. 사법부의 정책 참여는 선진국의 경우 다양하게 이루어지고 있지만, 행정권이 지나치게 큰 개발도상국에서는 사법부가 정책 결정 과정에서 거의 제외되어 있는 실정이다.

대한민국은 현재 지나치게 비대해진 행정수반과 관료제 권한의 확대로 인해 입법부·사법부의 작동이 거의 마비된 상태에 이르렀다.

대통령은 편리할 때만 삼권분립의 원칙을 주장하며 책임회피와 독재에 나서고 있고, 국회는 국민의 입과 발이 되지 못하고 정권 획득에만 관심 있는 듯하고, 사법부는 탄압이 두려워 눈 가리고 아웅 하는 식의 판결만 내리고 있다. 심지어 대통령이 국민을 향해 정보차단 명령을 내리고 사회관계망서비스(SNS) 검열 등 개인정보조차 위협하고 있는 것이 지금 대한민국의 현실이다. 이런 총체적인 무능과 부실, 독재가 세월호와 같은 사고와 사건을 양산하고 있는 것이다.

새정치민주연합 의원들의 세월호특별법 관련 SNS 발언 (출처 : 경향DB)


현재 대한민국은 병들어 있다. 원인 분석과 대처 방안, 치료가 시급한 실정이다. 그런 의미에서 ‘세월호특별법’ 제정은 이 모든 총체적 문제를 해결해 나가는 시작이 될 것이다.

만약 ‘세월호특별법’ 제정이 흐지부지 묻혀버린다면 우리 사회는 정의로운 사회로 가는 중대한 기회를 잃는 것이라 생각한다. 더불어, 가장 강력한 정책 결정 권한은 ‘국민’에게 있다는 것을 대통령과 관료, 입법부, 사법부는 명심해야 할 것이다.


이상미 | 경복대 복지행정과 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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참 야멸차고 무책임한 대통령이다. 세월호 참사 발생 5개월이 된 어제 박근혜 대통령은 국무회의에서 세월호 유족들의 간절한 호소를 전면 거부했다. 진상조사위 수사권·기소권 부여에 대해서는 “대통령으로서 할 수도 없고 결단을 내릴 사안이 아니다”라고 잘랐다. 삼권분립과 사법체계를 이유로 댔으나 독단적 주장일 뿐이다. 특별법이란 말 그대로 특수한 사안을 특별히 취급하려 만드는 법이다. 입법권자인 국회가 법률로 수사권·기소권을 부여할 수 있다. 세월호특별법에 대한 통치 차원의 결단을 호소했더니, 외려 박 대통령은 ‘절대 불가’의 지침을 설정해 국회 협의를 차단한 꼴이다. 더욱이 박 대통령은 여야의 ‘2차 합의안’이 “마지막 결단”이라고 못박았다. 대통령이 가이드라인을 제시했으니, 새누리당의 체질상 꼼짝달싹 못할 게 뻔하다. 제대로 된 세월호특별법 제정을 아예 무산시킬 작정인 것이다.

박 대통령은 유족들의 간절한 면담 요청도 “그동안 진도에서 팽목항에서, 청와대에서 유족들과 만나 그분들의 애로와 어려움에 대해 다양한 얘기를 들었다”면서 사실상 거절했다. 단식과 노숙을 해가며 유족들이 애타게 대통령과의 면담을 바라는 것은 ‘진상규명’의 약속을 확인하고 싶기 때문이다. 초기 현장 방문과 유족 면담으로 “할 일 다했다”고 뻗대는 대통령의 모습을 지켜봐야 하는 건 끔찍한 일이다.

박근혜 대통령이 16일 청와대에서 새누리당 김무성 대표, 이완구 원내대표 등 여당 지도부를 만나 현안에 대한 의견을 밝히고 있다. _ 연합뉴스


세월호 유족들의 호소와 비원을 외면하고 침묵으로 일관해온 박 대통령이 이날 내놓은 발언은 국정 최고책임자의 언사라고는 믿기지 않을 만큼 섬뜩하다. 세월호 유족들에게 야만적 언행을 일삼는 극우의 모습을 떠올리게 할 정도다. 박 대통령은 “세월호특별법도 순수한 유가족들의 마음을 담아야 하고 희생자들의 뜻이 헛되지 않도록 외부 세력이 정치적으로 이용하는 일 없도록 해야 할 것”이라고 말했다. 오로지 왜 생때같은 아들딸이 무참히 수장돼 죽어갈 수밖에 없었는지 진실을 알고 싶다는 유족을 ‘순수’와 ‘불순’으로 나누고, 피해자의 아픔에 공감해 ‘행동’하는 수많은 시민들을 외부세력에 조종당하는 꼭두각시쯤으로 모독했다.

박 대통령은 세월호특별법 논의가 ‘본질’을 벗어나고 있다고 강변했다. 세월호특별법을 제정하자는 취지는 명확하다. 진실을 밝히고, 책임소재를 규명하고, 재발방지책을 마련하자는 것이다. 그 무한책임을 지고 있는 대통령이 ‘외부 세력’ ‘대통령 모독’ 운운하며 유족들의 요구를 불온시하고 진영 논리로 국민을 분열시키며 ‘세월호 탈출’만을 도모하고 있으니 기막힐 노릇이다. 눈물을 흘리며 “진상규명에 유족들의 여한이 없도록 하겠다”고 한 그 약속은 어디에 갔는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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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osted by KHross

“(이 법률이) 특히 죽은 사람의 가족들 입장에서는 적절하게 이름 붙여지는(labelled) 것이 중요하다.” 영국에서 ‘기업살인법’ 논의 과정에서 법 이름이 너무 과격하지 않으냐는 제기에 대해 영국 행정자치부 차관이 일갈한 얘기이다. 그저 ‘사고’가 아니라 ‘범죄’이자 ‘살인’이라고 정확히 이름을 불러야만 대형 사고들을 예방할 수 있다는 거다. 2007년에 이 법이 제정된 후, 거짓말처럼 영국의 산재 사망률이 줄어들고 있다.

이 법이 특별한 의미를 갖는 까닭은, 개인이 아니라 기업에도 형사책임을 지운다는 점 때문이다. 특히 대기업의 경우 이사진만 수십명에 달해 사고가 발생하면 도대체 누구에게 안전 책임을 지울 것인지가 분명치 않아 처벌을 피해가는 일이 많았다. 잘못과 책임은 분명한데, 누구에게도 죄를 물을 수 없는 기막힌 현실을 가만둘 수 없었던 것이다.

물론 기업을 징역 살게 할 수는 없는 노릇이어서 형사처벌이라 해봐야 벌금형이 전부이지만, 벌금 상한선이 없어서 이론적으로는 사고를 낸 기업이 망할 정도의 벌금형도 가능하다. 사람이 아니라 기업에도 ‘살인죄’ 책임을 물을 수 있다는 이 법이 논의되기 시작한 배경은, 놀랍게도 한국의 세월호 참사와 쌍둥이처럼 닮은 사건이었다.

2000년 10월 영국 하트필드 지역에서 4명이 숨지고 70여명이 다친 열차 전복사고가 일어났다. 법원이 선로 균열을 방치한 회사에 대해 무죄 판결을 내리면서 영국에서 ‘기업살인법’ 논의를 촉발시키는 계기가 됐다. (출처 : 경향DB)


1987년, 앞의 문이 열린 채 항해 중이던 영국 여객선이 벨기에 근처에서 침몰해 승객 150명과 선원 38명이 사망하는 사고가 발생했다. 그러나 법원은 기업의 과실치사죄를 인정하지 않았다. 해상에서 발생한 사고라는 이유로 산업안전법도 적용이 안되었다. 영국 사회 전체가 비참한 탄식으로 가득 찼고, 자기반성과 광범한 토론이 시작되어 기업살인법 제정의 촉매제가 된다.

하지만 똑같은 사고에 대한 한국 정치권의 반응은 어떠한가. 여야가 논의 중인 ‘세월호특별법’에 유가족 의견을 반영할 것을 촉구하며 국회에서 농성을 벌여도 꿈쩍하지 않는다. 영국은 법의 이름도 희생자 유족 입장에서 지어져야 한다고 주장하는데, 한국은 법안 내용에 유가족 의견을 반영하는 것조차 가로막힌다.

세월호 참사 앞에서 민심은 둘일 수 없다. “철저한 진상규명과 재발방지.” 그렇다면 진상규명 의지는 ‘세월호특별법’에 담고, 재발방지를 위해 ‘기업살인법’을 제정하는 게 순리이다. 하지만 여야가 제시한 특별법은 의심스러운 진상규명 의지에, 재발방지책은 보이지 않고 오직 보상에 초점을 맞춘다. 유족들은 보상이 아니라 철저한 진상조사를 원하는데 말이다.

7·30 재·보선을 코앞에 두고도 이러니 두 개의 ‘새’당에 기대를 거는 게 애초부터 틀려먹은 건지도 모른다. 그런데 기업살인법과 세월호특별법을 동시에 들고 나온 후보가 한 명 있다. 평택을 보궐선거에 출마한 쌍용차지부 김득중 지부장이다. 무소속으로 출마한 그는 ‘노동자 후보’임을 강조한다. 그러고 보니 세월호 참사에서 끝까지 아이들 곁을 지켰던 것은 안산 단원고 교사 노동자들과 승무직 선원 노동자들이었다. 그 노동자들의 숭고한 희생 위에 버티고 있는 이 나라, 그렇다면 노동자가 직접 정치를 하고 사회를 운영해야 안전해지지 않겠는가.

지난 12일 새벽, 충북 영동의 각계터널에서 보수공사를 하던 코레일 하청업체 소속 2명의 노동자가 화물열차에 치여 죽는 사고가 발생했다. 3년 전 인천공항철도에 5명, 지난 3월 청라역사 신축 공사장에서 또 1명…. 아, 이 나라는 어디까지 망가질 건가.

지난 5년간 25명의 동료와 가족의 억울한 죽음을 추모하는 맏상제이기도 한 김득중 지부장. 그가 외치는 기업살인법과 세월호특별법은 공약이라기보다 시대의 민심이 담겨 있다. 그렇다면 이제 사회 전체가 자기반성과 토론으로 바통을 이어받을 때 아닐까.


오민규 | 비정규직노조연대회 정책위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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