얼마 전에 책 한권을 받았다. 평택 쌍용자동차(쌍차) 공장 굴뚝에서 오늘로 84일째 고공농성 중인 쌍차 해고노동자 이창근의 해고일기다.

책 첫머리엔 85호 크레인에서 309일 동안 고공농성을 벌인 김진숙 지도위원의 추천사가 실려 있었다. 추천사를 읽다가 눈과 마음에 오랫동안 머문 글 내용이 있었다.

“어쩌면 저들이 더 절박할 텐데 그러나 난 그걸 애써 외면했다. 한진에 와야 할 관심이 혹여 쌍차로 가면 어쩌나 조바심이 나기도 했다. 그들보단 우리가 더 절박하다고, 우리를 더 먼저 봐달라고 기도했다. 그러면서 입으로는 쌍차를 봐주세요 했던 가증스러움. 인간은 다급하면 본성이 드러나는 법이란 말, 그래서 찔린다.”

전혀 어울리지 않을 것 같은 가증스러움과 본성이라는 두 단어의 절묘한 조화였다. 그게 어떤 의미를 지니고 있는 것인지 충분히 짐작이 된다. 몇 번이고 되뇐 가증스러움이다. 그 절박함에 내가 살아야겠다는 생각이 도덕적으로 윤리적으로 잘못된 것일까?

따지고 보면 그 절박함 때문에 누군가를 희생시킨 것도 아니고 내가 이렇게 힘드니 도와달라고 아니 내 문제가 더 크니 일단 이것부터 함께해 달라는 것이 정말 가증스러운 것일까? 아니 그게 본성이라면 이해될 수 있는 자연스러움이 아닐까?

연신 가증스러움이라는 단어를 입으로 낯설게 옹알거리며 되새기고 있다 보니 2년 전 대한문에서 쌍차 사태의 조속한 해결과 이 땅의 모든 해고노동자들을 위한 “사람아, 희망이 되어라” 미사를 225일 동안 봉헌하며 들었던 이야기가 불현듯 떠올랐다. 잊을 만하면 이따금씩 그리고 지금도 듣는 질문이 있었다. 왜 이리 노동문제에 집착하냐고 말이다. 다른 여타의 사회 현안도 많은데 너무 쌍차에 집중하는 게 아니냐고 말이다.

집착과 집중이라는 말이 이렇게 서글프게 들린 적도 없다. 말로 표현할 수 없는 고통을 겪고 더 이상 죽을 수만은 없어 세상 한복판에서 살겠다는 외침도 하루가 멀다고 얼마나 무자비하게 공권력의 탄압을 받으며 피폐해진 쌍차 해고노동자들의 삶을 생각하면서 다른 이들의 고통을 헤아리지 못하는 내가 너무나 쌍차 해고노동자들에게만 매달리는 가증스러운 짓을 하고 있는 것은 아닐까? 라는 생각에 심경이 착잡했다.

그리고 한편으로는 내심 서운했다. 쌍차 해고노동자들의 문제가 사회적 의제가 될 만하면 굵직한 정치적 이슈에 떠밀려 그때마다 쌍차 문제는 뒷전으로 밀려나고 말았다. 어떻게든 안간힘을 써가며 그들이 공장으로 돌아갈 수 있었으면 뭐라도 하고 싶은 심정인데 대체 뭐가 잘못된 것일까?

아침 해고자들이 공장 앞에서 기자회견을 하고 있는 모습 (출처 : 경향DB)


나름 항변해 보았다. 사실 내겐 쌍차 해고노동자들의 문제가 너무나 다급했다. 어쩌면 그래서 그 본성이 드러나 다른 문제들을 헤아리지 못하는, 아니 쌍차 문제가 더 절박하니 집중해달라고 부탁하며 기도했던 것이 가증스러움이라면 가증스러움일지도 모르겠다.

가끔 우리가 착각하는 것 중의 하나가 고통의 상대화이다. 자신의 고통은 누구에게나 절대적이다. 고통을 상대화하거나 비교한다면 그건 또 다른 폭력이다.

그렇게 비교되는 고통은 이해와 공감보다는 무시된다. 각자 처해진 상황을 이해하고 받아들인다면 결코 서로 다를 수 없는 우리의 문제이다. 다시 말해 분리될 수 없는 우리의 아픔이다. 그런 아픔을 함께하고자 하는 마음에 집중과 집착이라는 말은 정말 당치 않은 것 같다.

만일 그렇게 바라본다면 나는 오늘도 가증스러움과 다급한 본성이 드러난 쌍차 해고노동자들의 문제에만 집착하고 있는지도 모르겠다. 다른 이들의 고통을 외면하는 매우 이기적인 그런 연대를.

그래도 간절히 부탁하고 싶다. 내가 입버릇처럼 하는 말이 있다. 이름을 불러 그리우면 사랑이고, 그리운 사람 이름을 부르면 사랑고백이라고.

내가 진정으로 사랑하는 김정욱 이창근 이 두 사람이 하늘 벼랑 끝 굴뚝의 삶이 마무리될 수 있도록 새봄이 오는 3월14일 토요일 평택 쌍차 공장 굴뚝 앞에서 고통 앞에 중립 없는 뜨거운 연대를 해달라고.


서영섭 | 천주교정의구현사제단 신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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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난은 부끄러운 게 아니다. 다만 불편할 뿐이다.’ 이 말을 믿었다. 불편만 감수한다면, 돈이 없어도 누구나 자신만의 삶을 꾸려갈 수 있다고 생각했다. 그래서 돈이 그렇게 대단한 것은 아니라고 생각했다. 지금은 다르다. 돈은 세상을 조종하는 힘이 있다고 생각한다. 돈 많은 대기업들의 영향력을 보면서다. 특히 요즘 들어 이런 생각이 많이 든다.

며칠 전 판결이 하나 나왔다. ‘이마트는 대형마트가 아니다’라는 서울고법의 판결이다. 재판부가 이렇게 판단한 이유 중 하나는 이렇다. “시장경영진흥원이나 소상공인진흥원의 조사 결과는 영업 제한에 우호적인 단체가 단기간 조사한 결과인 반면, 연세대 정진욱·최윤정 교수가 집필한 ‘대형 소매점 영업 제한의 경제적 효과 분석’은 광범위한 조사를 거친 객관적, 과학적 연구 결과로 신빙성이 높다”는 것이다. 정진욱·최윤정 교수는 한국체인스토어협회의 의뢰로 연구를 진행했다. 이 협회는 이마트·홈플러스·롯데마트 등 대형마트 운영사들이 회원사로 있는 단체다. 재판부가 처음부터 대형마트 편이었다고 생각하지는 않는다. 하지만 대형마트들이 연구에 훨씬 많은 돈을 쓴 것은 분명하다고 본다. 준정부기관인 시장경영진흥원이나 소상공인진흥원의 예산이 많지는 않을 테니까.

지난달 13일 대법원은 쌍용차의 정리해고가 정당하다는 판결을 내렸다. “구조조정의 근거인 긴박한 경영상 필요성을 인정하기 어렵다”고 한 2심 재판부의 판단은 뒤집혔다. 쌍용차는 이 대법원 판결을 이끌어내기 위해 대법관 출신 2명, 서울고등법원장 출신 등 19명의 변호인단을 선임했다.

지난해 봄 양승태 대법원장이 기자들과 함께 등산을 했다. 그는 기자들에게 “제발, 법원이 보수적이라고 하지 말아달라”고 부탁했다. ‘보수적이라는 평가를 받을 판결이 나오지 않도록 노력하겠다’는 의미로 생각했다. 잘못 생각한 것 같다. ‘보수적인 판결이 나올 수밖에 없으니 이해해달라’는 얘기였던 것 같다.

돈 많은 대기업들은 자신들의 이익을 위해 곳곳에 돈을 쓴다. 얼마 전 정윤회씨 관련 청와대 문건이 대기업의 ‘정보맨’에게 넘어간 사실이 확인됐다. 이들 ‘정보맨’은 공무원들과 만나 필요한 정보를 교환하고 협조를 구하기도 한다고 알려져 있다. 수십명의 ‘정보맨’을 둔 기업도 있다고 한다. 언론사를 갖고 있는 대기업들도 있다. 돈의 힘은 정부 부처에, 학계에, 법원에, 연구소에, 언론사에 알게 모르게 영향력을 미치고 있다. 돈이 없는 사람들은 손님을 빼앗겨도, 일자리를 잃어도 의지할 곳을 찾기 힘들다.

지난 6일 서울 양천구 신정동 성당에서 열린 ‘쌍용차 해고자들의 특별한 은퇴식’에서 김승태씨(왼쪽)와 박일씨가 후배들로부터 받은 꽃다발을 안은 채 웃고 있다. (출처 : 경향DB)


날씨가 춥다. 안데르센의 ‘성냥팔이 소녀’가 떠오른다. 굶주린 성냥팔이 소녀가 추운 거리에서 성냥을 팔지만 아무도 사주지 않는다. 소녀는 꽁꽁 언 손을 녹이기 위해 성냥을 켠다. 소녀는 성냥의 불꽃 속에서 환상을 본다. 난로를, 맛있는 음식을, 크리스마스트리를, 그리고 할머니를. 날이 밝은 뒤 사람들은 미소를 띤 채 죽어 있는 소녀를 본다.

지난 13일 새벽 쌍용차 해고노동자 김정욱과 이창근이 평택공장의 굴뚝에 올랐다. 높이 70m의 굴뚝이다. 이들은 말했다. “우리의 강함을 증명하기 위해 굴뚝에 오르지 않았습니다. 우리가 얼마나 약하고 무서움 또한 많고 여린 인간인지를 알리기 위해 올랐습니다. 도와주십시오.” 이들이 바라는 것은 많지 않다. “사측에 당장 뭘 해달라는 것은 아니다. 단지 얘기 좀 하자는 것이다. 우리가 6년째 내밀고 있는 손을 이젠 잡아줬으면 한다”고 말한다.

18일 평택의 최저기온은 영하 10.3도였다. 밖에 나가본 사람들은 그들의 고통을 이해할 것이다. ‘성냥팔이 소녀’의 결말은 보고 싶지 않다. 땅에 내려와 환하게 웃는 그들을 보고 싶다. 그리고 돈보다 힘이 센 것이 있음을 보고 싶다.


김석 비즈 n 라이프 팀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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참으로 추운 겨울이다. 수은주는 영하 십수도를 오르내리고, 대지는 꽁꽁 얼어붙었으며, 칼날처럼 예리한 삭풍은 행인들의 속살까지 파고들고 있다. 기쁘고 희망찬 소식보다는 갑갑하고 참담한 소식만 잇따르고 있는 작금의 현실은 팍팍한 삶을 살아가는 보통 사람들에게 더한층 추위를 느끼게 한다. 그런데 이 혹한 속에서도 생존의 막다른 벼랑 끝에서 눈물겨운 싸움을 이어나가는 우리의 이웃이 있다. 정리해고 철회 등을 요구하며 공장 굴뚝 등 까마득히 높은 곳에 올라가 고공농성을 벌이고 있는 노동자들이 바로 그들이다.

금속노조 쌍용자동차지부 이창근 정책기획실장과 김정욱 사무국장은 13일 새벽 경기 평택공장 내 70m 높이의 굴뚝 위에 올랐다. 병마와 싸우고 있던 또 한 명의 해고노동자는 이날 세상을 떠났다. 26번째 ‘해고에 의한 사실상의 살인’이었다. 지난달 대법원이 “회사 측의 정리해고는 적법하다”는 판결을 내리자 노동자들이 갈 곳은 지붕조차 없는 폭 1m의 굴뚝 위뿐이었다. 두 사람은 “6년 세월 동안 끊임없이 몸부림쳤지만 이제 더 이상 다른 선택이 없었다”고 절규했다.

희망연대노조 케이블방송비정규직지부 임정균·강성덕씨는 지난달 12일부터 서울 한국프레스센터 옆 대형 전광판에서 해고자 복직을 요구하며 고공농성 중이다. 케이블업체 씨앤엠 하청업체 소속인 이들은 하청업체가 변경되는 과정에서 동료 노조원 107명과 함께 해고통보를 받았다. 또 원사 생산업체 스타케미칼에서 정리해고된 차광호씨는 경북 구미공장 굴뚝에서 16일로 무려 204일째 농성 중이다.

영하 9도 혹한 속…“동료들아, 우리가 보이는가” 금속노조 쌍용차지부 이창근 정책기획실장(왼쪽)과 김정욱 사무국장이 14일 경기 평택시 쌍용차 공장 내 70m 높이의 굴뚝 위에서 동료들에게 손을 흔들고 있다. _ 연합뉴스


혹한에 목숨을 걸고 하늘 높이 올라야 하는 이들 해고 노동자는 한국사회에서 법과 제도의 이름으로 쫓겨난 사람들이다. 사용주는 경영상의 문제 등을 걸핏하면 정리해고를 통해 손쉽게 해결하려 하고, 정부와 법원은 사용주에게 더욱 유리한 정책과 판결을 양산하고 있는 사면초가의 절박한 상황에서 이들이 선택할 수 있는 것이 달리 뭐가 있겠는가. 기업은 정리해고의 사회적 비용이 만만찮은 만큼 이를 최대한 자제해야 한다. 정부는 기업의 배후지원자가 아니라 노사의 중재자라는 본연의 모습으로 되돌아가야 한다. 시민사회도 해고자들이 생업을 되찾을 수 있도록 이들과 적극 연대해야 한다. 배우 김의성씨는 쌍용차 고공농성을 지지하면서 무기한 1인시위에 돌입했다고 한다. 김씨의 용기와 열정이 사회 곳곳에 확산됐으면 좋겠다. 아무쪼록 해고 노동자들이 하루빨리 굴뚝이나 광고탑에서 내려와 가족들의 따뜻한 품에서 언 몸을 녹인 뒤 일터로 되돌아갈 수 있기를 소망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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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울지방변호사 회 인권위 소속 변호사들이 어제 대법원의 쌍용자동차 판결을 비판하는 성명을 냈다. 이들은 “해고 노동자를 벼랑 끝으로 내몬 판결에 유감”이라며 “사회적 약자의 목소리와 존재를 외면한 판결”이라고 밝혔다. 이어 “이번 사건은 극도의 사회적 갈등과 생명의 존엄성이 걸린 사안”이라며 “해고 노동자들이 왜 자살을 선택했는지 한번이라도 고민해 봤는지 묻고 싶다”고 했다. 변호사들은 “대법원은 사회적 갈등을 치유하는 마지막 보루”라며 이번 판결에 아쉬움을 표시했다.

변호사들이 대법원 판결을 노골적으로 비난한 것은 전례 없는 일이다. 서울변회는 2011년 쌍용차 사태에 대한 특별조사를 통해 국가공권력의 인권 침해와 노사합의 불이행을 그 원인으로 꼽은 바 있다. 쌍용차 문제에 관한 한 전문가 집단이다. 하지만 변호사와 법원은 일종의 갑을관계다. 보수 성향의 변호사 단체가 최고법원을 비난하는 것은 상상하기 힘든 일이다. 성명에 동참한 변호사들은 일정 부분 불이익을 감수해야 할지 모른다. 그럼에도 대법원을 비판한 것은 그만큼 사안이 중하다는 방증이다.

오영중 서울지방변호사회 인권위원장(오른쪽)과 김종우 변호사가 17일 서울 서초지법 기자실에서 최근 대법원이 내린 쌍용차 해고자 판결에 대해 유감을 표명하는 기자회견을 하고 있다. (출처 : 경향DB)


쌍용차 판결은 대법원의 현주소를 드러낸 상징적 사건이다. 정치·사회적 파장이 큰 사건은 대법관 13명이 참여하는 전원합의체에서 결론을 내는 게 통례다. 4명으로 구성된 소부(小部) 사건도 재판관 간에 이견이 있으면 전원합의체로 넘어간다. 그러나 쌍용차 사건은 소부에 배당돼 최종 결론이 났다. 재판관 4명 중 누구도 이의가 없었다는 뜻이다. 더구나 주심을 맡은 박보영 대법관이 비(非)서울대·소수자 몫으로 천거된 인물인데도 이런 결과가 나왔다. 이는 대법원의 편향성이 개인적 성향을 넘는 구조적인 문제라는 걸 말해준다.

우리는 양승태 대법원장 취임 후 갈수록 심화되는 보수 성향·획일성에 수차례 우려를 표한 바 있다. 그 밑바닥엔 엘리트 법관 일색의 순혈주의가 자리 잡고 있다. 서울대-50대-남성-법관 출신 아니면 대법관 명함을 내밀기 어려운 게 엄연한 현실이다. 이런 와중에 법 테두리에서 소외된 사회적 약자의 목소리에 귀 기울여달라는 주문은 기대난망이다. 이는 대법원의 존재 이유와 직결된 문제기도 하다. 국회에서는 지금 대법관의 절반을 비(非)법관으로 채우는 법 개정안이 논의되고 있다. 대법원이 먼저 달라지지 않으면 편향성의 대가를 치를 곳은 다른 누구도 아닌 대법원 자신이라는 사실을 알아야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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엄마가 점을 봤다. 연초가 되면 으레 봤었는데 2009년 그 사건이 있고 나선 좀체 보지 않던 점이다. 아들이 구속되면 어찌하느냐며 용하다는 점집을 찾아 묻고 또 물었다. 어느 점집에선 구속되지 않을 테니 걱정 말라고 했고 또 어떤 ‘점바치’는 구속된다고 했다. 결국 아들은 구속됐다. 그 뒤론 발길 끊었던 점집을 이번에 다시 찾았다. 쌍용차 정리해고 사건 대법원 선고를 앞둔 며칠 전 일이다. 결과를 말해주지 않아 몰랐는데 희망이 별로 없었나 보다. 수화기를 타고 넘어 오는 목소리가 마른 나뭇가지처럼 바싹 말라 있었다.

지난 11월13일 쌍용차 해고 노동자들은 정리해고 무효 소송에서 지고 말았다. 대법원은 서울고법이 쌍용차 정리해고 무효를 판결했던 사건을 뒤집어 파기하고 서울고법으로 돌려 보냈다. 6년의 시간동안 쥐고 있던 희망이 물거품처럼 사라지는 데는 20초면 충분했다. 법정 공방이 사실상 일단락되는 순간이었다.

대법원은 6년 전, 2009년 6월8일에 벌어진 쌍용차 정리해고 사건이 긴박한 경영상의 필요성이 있다고 판단했다. 해고회피 노력 또한 충분했다며 파기 환송했다. 회사의 유동성 위기 주장을 받아들였고 유형자산손상차손도 과다계상되었다고 판단한 서울고법의 판결문을 뒤집었다. 3000명에 가까운 대량의 정리해고 규모도 합리적이라고 했다. 대법원은 법률심 즉 법률 적용의 타당성 여부를 다투는 곳이다. 그러나 사실심인 서울고법에서 인정한 사실을 뒤집는 월권을 행사했다.

소위 쌍용차 경영위기는 2008년에 발생한 금융위기와 유럽 환경규제 그리고 경유가격 인상이라는 일시적 원인임에도 구조적 위기라는 회사 측 주장을 그대로 받아 읽었다. 정리해고가 아닌 근로시간 단축을 통한 일자리 나누기로 넘길 수 있는 위기였지만 대법원은 다르게 봤다. 산출 근거도 밝히지 않은 대량의 정리해고 규모도 적절하고 잘한 일이라며 회사 머리를 쓰다듬어준 것이다.

공장으로 돌아가지 못한 쌍용 노동자 (출처 : 경향DB)


이번 대법원 판결로 ‘정리해고’ 사건에서만큼은 자본에는 신세계가 선물로 주어졌고 노동자에겐 무간지옥이 안겨졌다. 이미 곤죽이 돼버린 노동시장을 더 어떻게 유연화할 수 있고 누구를 위한 유연화란 말인가. 정리해고 비정규직으로 대표되는 한국 노동시장의 불안을 어디까지 밀어붙일 텐가. 빈껍데기란 지적에 시달리는 근로기준법이지만 적어도 정리해고 요건은 못 박고 있었다. 이마저도 이번 판결로 마지막 빗장이 풀린 것이다.

쌍용차 재판을 담당한 대법관은 소수자 목소리를 대변하라는 취지로 임명된 분이다. 그 소수가 한 줌밖에 되지 않는 자본의 목소리로 돌아올 줄은 몰랐다. 오늘은 쌍용차 해고자들이 이러한 비참함과 만났지만 내일은 또 다른 선한 이들이 이 비극적인 참담함을 만날 수밖에 없을 것이다. 대법원이 다양성을 포기하고 정치 일색으로 ‘깔맞춤’하는 오늘의 현실이 극복되어야 하는 이유다.

대법원이 쌍용차 해고자들의 고름 같았던 시간의 종결자 구실을 포기하고 완충지대 없는 허허벌판으로 떠밀었다. 겨우 옷가지 하나 나뭇가지에 걸린 채 벼랑 끝에 매달려 살던 이들에게 그 작은 나무조차 뽑아버렸다. 추락은 다시 시작됐고 바닥을 짐작하기 어려운 상황이다.

지친 마음에 포기하고 싶은 오늘이지만, 자판이 흐리게 보이고 엄마를 붙들고 소리 내어 울고 싶은 오늘이지만, 비탄의 시간 속에 무릎 꺾이고 심장이 타들어가 주저앉고 싶은 오늘이지만, 그런 개 같은 날이 오늘이지만, 이대로 이 모진 시간이 사람들 기억에서 삭아 해질 수도 있겠다는 생각에 목구멍이 막히는 오늘이지만, 우리가 돌아가야 하는 자리에 서 있지 못하는 한, 그날이 오늘은 아니다.


이창근 | 쌍용차 해고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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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난 13일 대법원은 2009년 쌍용자동차의 구조조정이 적법하다는 판단을 내놨다. 아스팔트에서, 농성장에서, 법정에서 5년 넘게 싸워온 153명의 쌍용차 해고노동자들은 바람 찬 거리에서 다시 기약없는 싸움을 벌여야 할 처지에 놓였다. 지난 5년간 25명의 쌍용차 노동자와 가족이 세상을 떠났다. 삶의 기반이 통째로 무너져내린 극한의 상황에서도 쌍용차 해고자들이 2000일 넘게 싸울 수 있었던 것은 언제든 승리할 수 있을 것이라는, 나와 가족과 동료의 삶의 존엄을 인정받을 수 있을 것이라는 실낱같은 기대가 있었기 때문이다. 그러나 대법원은 이들의 마음을 밝히던 희망의 불빛을 야멸차게 꺼버렸다. 승리의 전망은 흐릿해졌다. “어떻게 싸워야 할지 모르겠다. 별의별 것과 싸워왔는데 잘 모르겠다, 이제는. 남은 해고자를 어떻게 보듬어야 할지 모르겠고, 어떤 말로 위로해야 할지 모르겠다.” 금속노조 쌍용차지부 정책기획조정실장인 이창근씨가 대법원 선고 직후 한 말은 이들이 느끼는 당혹감과 막막함, 절망의 깊이를 보여준다.

대법원의 판결문에 적힌 언어는 짧고, 단순하고, 건조하다. “정리해고를 단행할 만한 긴박한 경영상의 위기가 있었다” “예상매출 추정이 합리적이고 객관적 가정을 기초로 한 것이라면 그 추정이 다소 보수적으로 이뤄졌다고 해도 합리성을 인정해야 한다” “기업 운영에 필요한 인력 규모가 어느 정도인지, 잉여인력은 몇 명인지 등은 특별한 사정이 없다면 경영자의 판단을 존중해야 한다”고 나열돼 있다. 2심을 뒤엎는 판결이라면 2심과 달리 판단한 구체적 근거를 제시할 법도 한데, 판결문을 눈 씻고 뒤져봐도 없다. 대법원의 권위에 기댄 친기업·반노동 가이드라인, 또는 ‘사법적 판단’보다 ‘정치적 결단’에 가깝다는 인상을 받게 된다.

대법원의 판결이 있던 날은 공교롭게도 전태일 열사 44주기였다. ‘근로기준법 준수하라’ ‘노동3권 보장하라’고 요구하며 열사가 제 몸을 불사른 지 44년이 지났지만 오늘 노동이 처한 상황은 춥고 엄혹하다. 정리해고에 맞서, 비정규직 처지에 절망해 목숨을 버리는 노동자의 행렬이 끊이지 않는다. 평화시장 ‘시다’의 눈물은 의류업계 인턴의 눈물이 돼 오늘도 마를 날이 없다. 파리 같은 목숨에 중노동·저임금이 서러워 노조 좀 만들어보겠다고 나섰다가 재계약을 거부당하거나 회사가 폐업해 일자리를 잃은 노동자가 얼마인가. 한 번 찍히면 업계에 소문이 돌아 영영 발을 붙이지 못하게 될까봐 숨죽이며 일하는 인턴은 또 얼마인가.

13일 대법원이 쌍용자동차 해고노동자에 대한 무효확인소송에 대해 '해고는 유효하다'는 취지로 파기환송 결정을 내렸다. 쌍용차 해고노동자들이 판결 후 대법원 앞에서 눈물을 흘리고 있다. (출처 : 경향DB)


저 참혹한 독재 시절에는 그래도 희망이란 게 있었다. 민주화가 되고 민주노조가 만들어지면 좋은 세상이 올 것이라는 기대가 있었다. 그때 ‘노동’이라는 어휘에는 ‘불온’과 ‘천대’의 어감과 함께 어떤 ‘신성함’이 깃들어 있었다. 그러나 오늘 ‘노동’은 경멸의 언어가 되었다. 신자유주의의 해악 중 하나는 ‘노조’를 악마화했다는 데 있다. 비정규직을 외면했다고 정규직 노조를 욕하면서, 정작 비정규직과의 연대에 헌신적인 노조 간부나 활동가는 ‘외부세력’이라고 비난한다. 이런저런 구실을 둘러댈 뿐 이들이 말하고 싶은 바는 하나다. ‘노조는 싫다’는 것이다. 이들 역시 비정규직이나 저소득층의 고단한 삶을 위무하지만 온정주의의 수인한계는 분명하다. ‘동정과 시혜의 대상’에 머물 때는 너그럽지만 ‘권리의 주체’로 나서는 순간 온갖 공격이 가해진다. 세월호 유가족에게 그랬던 것처럼. 대법원의 판결도 이런 시류를 반영한 것일 터이다.

공동체 구성원 대다수는 노동자이고, 어떤 권리도 그냥 주어지지 않는다. 노동의 상황이 엄혹하다는 건 노조 바깥에 있는 90%의 노동자를 권리의 주체로 묶어세우는 일이 그만큼 중요하고 시급한 사회적 의제가 됐다는 의미다. 절망이 깊을수록 먼 미래를 내다보고 첫걸음을 떼야 한다. 다시 문제는 ‘조직화’다.


정제혁 사회부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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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1월13일 수능의 강추위가 몰아친 초겨울에 대법원에서는 또 다른 매서운 칼바람이 있었다. 쌍용자동차의 정리해고에 대해 2심 판결을 뒤집고 ‘문제가 없다’는 대법원의 판결이 나왔다. 기나긴 세월을 인내하며 복직을 희망하던 노동자들은 눈물이 터졌고 재계는 안도의 한숨을 쉬었다. 과연 문제가 없는 것일까? 기업인은 웃고 노동자는 울어도 되는 세상을 정당화하는 가치는 현 정권의 ‘창조경제’론과 결코 무관하지 않다. 우리 사회가 참으로 건강하고 좋은 사회가 되기 위해서, 창조경제가 결코 창조하지 못하는 것들이 무엇인가를 우리는 성찰해 보고 행동해야 할 때이다.

창조경제는 외형상 세계 자유시장에서 경쟁력을 근거로 고부가가치 산업을 육성하고자 하지만, 신자유주의 세계 체제에서 비교 우위를 선점해야 한다는 강박에서 자유롭지 못하다. 경쟁력이 있어 ‘보이는’ 대기업과 재계 총수들의 특권을 전제로 국내 산업을 육성하려 하기에 우리의 일상과 생활세계마저 대기업 중심으로 예속되어 가고 있다. 중소기업은 대기업의 하청업체로 종속되고 노동자는 시장의 유연화의 원칙 아래 ‘소모품처럼 사용하다 버려져도 문제없다’고 정당화하는 위험천만한 상황에 이르렀다. 요컨대, 신자유주의 체제에서 선택한 창조경제론은 우리 사회를 약육강식과 적자생존의 원칙으로 재구조화해 끊임없는 ‘양극화’의 문제를 확대재생산하고 있다.

창조경제의 이념이 농축되어 있는 ‘기업이 살아야 국민이 산다’는 슬로건은 국가 정체성을 표현한 헌법에 위배되는 정신이다. 대한민국의 헌법은 제1조에서 ‘대한민국의 모든 권력은 국민에게서 나온다’고 명시하고 있다. 그런데, 국민에 앞서 기업을 우선할 수 있는가? 우선 국민이 살도록 하는 기업을 육성해야지, 국민이 고통스러워하고 신음하고 죽도록 방치하며 기업을 키우는 것은 명백히 대한민국의 헌법에 위배되는 정신이다. 이는 국민의 주권을 현실적으로 무시하는 처사가 아닐 수 없다. 소위 ‘잘나가는 기업인’만이 국민의 대표로 인식되고 절대다수의 노동자들은 소모품으로 전락되는 국가사회에서는 미래가 암울해질 수밖에 없다.

창조경제는 이처럼 사람과 공동체의 가치를 파괴할 수 있다. 나는 우리 시대를 함께 살아가는 가톨릭 사제이며 사회학자로서 한국이 세계 1등 국가의 반열에 가까이 오르지 못해도 ‘문제없다’고 믿는다. 자살률 1등만은 면했으면 제발 좋겠다. 집단 정리해고가 25명의 자살로 이어진 쌍용자동차 사태는 우리 사회가 체계적으로 창조해 낸 사회적 배제와 사회적 타살이다. 우리는 ‘사람이 그 무엇보다 가치롭고, 인간이 함께 사니 더욱 좋다’고 말할 수 있는 사회를 최우선으로 선택해야 한다. 그러기 위해서는, 우리 사회에서 구조와 정책으로 소외된 구성원들에게 우선적인 관심과 배려를 기울여야 한다.

13일 대법원이 쌍용자동차 해고노동자에 대한 무효확인소송에 대해 '해고는 유효하다'는 취지로 파기환송 결정을 내렸다. 쌍용차 해고노동자들이 판결 후 대법원 앞에서 눈물을 흘리고 있다. (출처 : 경향DB)


국민 행복의 시대를 선언한 박근혜 정부는 국민대통합의 기치를 세운 바 있으나, 오로지 기업인들을 우대하고 노동자를 천대하는 차별 정책을 일관하고 있다. 창조경제를 강조하는 박근혜 정부에서, 우리는 과거에 ‘잘살아 보세’를 외치며 노동자의 고통과 신음을 억압하기만 했던 유신의 향기가 느껴진다. 박정희 전 대통령은 ‘내 무덤에 침을 뱉어라’고 표현했다고 대통령 후보 시절 박근혜 대통령이 TV에 나와 했던 말이 다시금 아프게 되살아난다. 살아생전에 그런 일들을 만들지 말았으면.

이제 가족의 아픔과 상처의 고리를 끊고, 국민대통합을 이끄는 행복의 시대를 창출하기 위해서는 ‘창조경제’의 궤도가 기업인만이 아니라 국민에게, 즉 절대다수인 서민 노동자들에게 우선적으로 봉사하는 방향으로 전환되어야만 한다. 박근혜 정부는 국민들의 눈물을 닦아주지 못할망정 국민들이 계속해서 눈물 흘리게 만들어선 안된다.


오세일 | 서강대 교수·사회학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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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자님, 진짜 이거는 바꿔야 됩니다. 1심 2심 3심까지 가면 몇 년 걸리잖아요. 사장이야 오래 끌수록 좋겠지만 회사에서 잘린 노동자는 그 시간을 도대체 어떻게 견딥니까. 이것 좀 어떻게 해야 한다니까요 정말.”

지방의 한 노동조합 사람들을 취재하고 기차역으로 향하는 길에 중년의 노동자가 수차례 반복했던 말이다. 해고의 부당함을 확신하고 있는 그에게 세상은 납득되지 않는다. 그의 말대로, 부도덕한 사장의 입장에서 생각해보자. 비용을 줄이고 싶거나 고분고분 따르지 않는 직원들이 있다면, 해고하면 된다. 법은 부당한 해고를 못하도록 하지만 법이 최종적으로 부당성 여부를 판단하기까지는 해고 상태가 유지된다. 부당 해고가 아니라는 최종 판결이 나오면 좋고, 부당하다고 하면 그때 가서 복직시키면 된다. 욕먹는 것만 감수하면 크게 손해날 일이 없다. 물론 소송에는 돈이 들지만 인건비 절감액에 비하면 ‘새발의 피’다. 반면 당장 먹고살 일이 막막한 해고 노동자에게는 소송 비용 대기도 벅차기만 하다. 법은 평등하지만 판결을 받기까지의 부담은 평등하지 않다.

명진 스님은 최근 케이블 설치·수리 노동자들을 만난 자리에서 “회사가 어렵다며 나가라는 것은 굶어 죽으란 소리다. 예전처럼 농사짓는 시대도 아니고, 일이 세분화돼 있어서 더욱 그렇다”고 말했다. 1980년대 구로공단에서 해고된 노동자들은 이른바 ‘블랙리스트’에 올라 재취업이 사실상 봉쇄됐다. 20여년이 흘러 민주화되고 경제가 발전했다지만 2009년 해고된 쌍용자동차 노동자들 역시 마찬가지였다. “평택 바닥에서는 발붙일 곳이 없어서” 일자리를 찾아 타지를 전전하다 쓸쓸한 죽음을 맞기도 했다.

오는 11일이면 그렇게 살아온 세월이 2000일을 맞는다. 눈뜨면 절망인 날들을 2000번이나 견뎌냈다. 쓰러져 있는 이들은 수십억원의 손해배상 판결로 다시 한번 짓이겨졌고 동료와 그 가족들의 잇따른 부음은 가장 힘든 고통이었다. 아예 다 잊고 싶지만 아무리 생각해도 해고는 부당했기 때문에 버티며 싸웠다. 무엇보다 구조조정의 근거가 됐던 회계 자료들이 엉터리였다. 지난 2월 서울고등법원의 ‘해고 무효’ 판결에서 인정한 유형자산손상차손의 과대계상의 핵심이다. 쉽게 말하면, 향후 생산 설비(유형자산)에서 예상되는 매출이 아예 없는 것으로 간주해 대규모 손실이 발생하는 것으로 회계에 반영했던 것이다. 기존 차종을 단종시키고 후속 신차는 개발하지 않는다는 전제다. 이 전제대로라면 회사를 접겠다는 의미여서 앞뒤가 맞지 않다. 회계는 숫자의 정확성이 생명인데 감사조서(감사보고서의 기초 자료)와 감사보고서의 숫자가 일치하지 않았다. 감사조서에는 작성한 회계사의 서명조차 없었다.

쌍용차 정리해고 무효소송 최종 선고(13일)를 앞둔 6일 오후 서울 서초동 대법원 앞에서 쌍용차 해고노동자들이 '무효판결'을 바라는 2천배를 하고 있다. (출처 : 경향DB)


쌍용차 정리해고 2002일째인 오는 13일 대법원의 선고가 내려질 예정이다. 쌍용차 해고 노동자들이 그동안 형극의 시간들을 살아냈던 것은 공장으로 돌아가겠다는 의지와 희망이 있었기 때문이리라. 아니 그 이전에 받아들일 수 없는 부당함에 대한 가슴속 깊은 분노와 저항이 밑바탕이 됐을 것이다.

겨울로 가는 길목이다. 철모르던 어린 시절에는 누군가 좋아하는 계절을 물으면 괜히 겨울이라고 답하곤 했다. 군대에 가서야 뼈저리게 느꼈다. 없는 사람들에게 인정사정 봐주지 않는 겨울 바람은 잔인하다. 그 바람은 몸을 지나 마음까지 얼어붙게 한다. 쌍용차 해고 노동자들에게 올해 겨울은 확실히 다를 것이다.

봄 같은 겨울이 될지, 아니면 더욱 혹독한 겨울이 될지는 11월13일 결정난다. 세월호 이후 한국 사회에서는 상식과 신뢰의 둑이 무너진 듯하다. 영혼을 잠식한다는 불안만 커져간다. 대법원의 쌍용차 정리해고 판결만큼은 상식의 선을 벗어나지 않으리라고 믿는다.


박철응 정책사회부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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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문에서 독거노인이 스스로 목숨을 끊었다는 보도를 봤다. 서울 장안동의 다가구주택이었다. 주검을 수습할 이들에게 남겼을 것으로 추정되는 쪽지엔 “고맙다. 국밥이라도 한 그릇 하라. 개의치 말고”라 써 있었다. 빈곤의 바닥으로 또 하나의 목숨이 푹 꺼졌다. 그런데 ‘스스로 끊었다’는 말이 오랜 시간 머리를 떠나지 않았다. 스스로라니. 모순이지 않은가. 목숨은 스스로 끊는 게 아니다. 극단으로 몰린 이들이 어쩔 수 없이 벼랑으로 떨어지는 과정일 뿐이다. 송파 세 모녀도 집단으로 벼랑으로 몰린 예가 아니던가. ‘스스로’라는 말은 그저 남은 자들의 면피처럼 읽혔다. 이들의 죽음이 주목된 이유는 그들이 남긴 짧은 글이었다. 노인은 ‘고맙다’는 말을 남겼고 송파 세 모녀는 ‘정말 죄송합니다’라고 했다. 가느다란 신음 같은 말이다. 무엇이 고맙고 무엇이 죄송하다는 것인가. 질식해가는 이들은 큰소리조차 낼 수 없다. 기절과 탈진을 반복한 이들이 남기는 마지막 말은 그래서 언제나 낮고 가늘다. 말할 힘까지 소진했기 때문이다.

유서가 없었다. 궁금했고 한편으로 화가 났다. 단서라도 남기지 않았을까 싶어 집안 구석구석을 찾아 헤맸지만 소용없는 일이었다. 유서는 끝내 발견되지 않았다. 억울하다는 말이 담긴 유서를 흔들어대며 회사 멱살이라도 잡고 싶었지만 그런 일도 일어나지 않았다. 6년 동안 침묵의 죽음만 이어졌다. 그 숫자가 25로 바뀌었다. 이들은 왜 조용하게 숨졌을까. 난리라도 한번 치고 죽지 왜 그렇게 하나같이 조용하게 죽어갔을까. 궁금함보다 원망스러움이 컸다. 다투고 싸우는 것도 그들에겐 그저 번잡스러움이었을까. 의문이 완전히 가신 건 아니지만 이해는 조금씩 넓어졌다. 체념과 극단의 좌절이 불러온 죽음은 소리가 없다. 뚝뚝 끊기며 가늘게 이어지던 소리는 죽음 주변에 맴돌았다. 그러나 주파수가 달라 우리가 듣지 못한 것이다.

쌍용자동차 해고노동자들과 가족들이 근로자 지위 확인 가처분소송 판결을 10여일 앞둔 2일 쌍용차 평택공장에서 평택지원까지 3보1배를 하고 있다. (출처 : 경향DB)


2000일. 쌍용차 해고노동자들이 정리해고에 맞서 싸운 시간. 다가오는 11월11일이다. 까마득한 시간이 하얗게 머리 위에 내려앉았다. 정리해고를 막겠다며 겁 없이 경찰 특공대의 진압을 온몸으로 막아섰던 시간들이다. 한여름 공장 옥상에서 최루액을 몽땅 뒤집어쓰고, 사회적으로 빨갱이라 불렸다. 집 밖 나서기가 두려웠고 이어지는 동료의 부음에 오금 저렸다. 쌍용차 해고노동자들이 한국 사회를 향해 던진 질문에 사회는 응답했다. 정리해고 폐해와 비정규직 남용의 문제가 대선 시기 공약으로까지 밀어올라간 것이다. 사회적 논의는 불이 붙었고 뭐라도 될 것 같은 분위기였다. 그러나 또 제자리걸음이었다. 무겁게 밀어올린 돌덩이가 다시 산 아래로 굴러 떨어지는 체념의 반복이었다. 운명으로 받아들이기엔 비탄스럽기만 한 세월이다. 취업의 문은 막혀 있고 해고의 문은 여전히 활짝 열려 있다. 격차는 더욱 벌어졌고 지난 과정의 반면교사들은 등을 돌렸다.

쌍용차 문제는 재난의 문제다. 인간이 만든 해고가 인간 삶을 부수는 인간 재난이 극단의 형태로 드러난 정치적 사건이다. 정치권이 해결의 실마리를 찾아야 하는 이유다. 그러나 해결 의지는 보이지 않고 여전히 낙인찍기 의도와 편가르기 소재로만 삼고 있다. 화재가 나면 119 소방차가 출동하고 사람들은 길을 열어준다. 불 끄는 것이 우선이기 때문이다. 그런데 2000일 동안 수많은 사람들이 길을 열었지만 정작 정치 난전판은 길 한가운데 떡 버티고 서 있었다. 요란하게 울리는 재난 경보음을 정치권만 듣지 않았다. 쌍용차 문제 해결의 가장 큰 책임이 있는 정치권의 이 같은 행태는 중단돼야 한다. 소복하게 쌓여만 가는 인고의 시간 앞에 정치가 답을 찾고 해법 마련에 나서야 한다. 소리 없는 죽음이라지만 귀를 열면 들리는 죽음이며 막을 수 있는 죽음이었다. 사건 이후 요란 떨 게 아니라 그들의 가늘고 작은 신음 소리에 주목해야 재난은 방지할 수 있다. 더는 이대로 살 수 없지 않은가. 2000일이 두렵다.


이창근 | 쌍용차 해고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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청명한 가을날. 하늘은 높고, 바람은 선선했다. 미안하다며 빨리 공장에 돌아와 함께 일하자는 공장 안 동료들의 응원에 힘을 얻어 시작한다. 세 발 내딛고 한 번 절하는 3보1배다. 쌍용차 평택공장 앞에서 평택 법원까지 매일 아침 9시에 출발한다. 몇 걸음 뗐을 뿐인데 벌써 숨이 차고 온몸이 땀으로 젖는다. 뼈마디가 쑤시고 무릎관절까지 아파온다. 감옥 수발은 물론 가족 생계를 책임져온 해고자 아내들이 현수막을 들고 지친 남편들을 이끌며 앞서나간다. 이렇게 한 시간쯤 절하고 걷노라면 자동차 소음도 들리지 않을 정도로 무아지경에 이른다. 근육과 뼈도 감각이 사라진 듯하다.

2009년 쌍용차 정리해고 발생 6년. 세월이 훌쩍 지났다. 오는 11월 11일은 3000명의 노동자가 정리해고, 계약해지, 징계해고, 희망퇴직, 무급휴직이란 이름으로 쫓겨난 지 2000일이 되는 날이다. 작년에 무급휴직자 340여명만 복귀했을 뿐, 해고자는 여전히 거리 위에 있다. 파탄난 가정과 줄 잇는 이혼이 부지기수다. 생때같은 자식들을 뒤로하고, 하루하루 날품팔이 노동시장을 전전하는 동료들. 평택역에 알량하게 써 붙인 ‘쌍용자동차 해고노동자 고용알선’은 먼 나라 얘기일 뿐이다. 정부 정책이라며 ‘해고자 우선 고용’을 하겠다는 말도 현실에서는 거짓말이 되고 있다.

해고당한 노동자에게 생존권 보호장치라고는 찾아볼 수 없는 곳이 대한민국이다. 지난 6년 동안 쌍용차 해고노동자들이 증명하고 있지 않은가. 쌍용차 해고사태는 대량해고가 노사문제에 그치지 않고, 어떻게 사회적 문제로 악순환되는지를 잘 보여준 대표적 사례다. 좁게는 지역 전체의 고용불안을 부추겼다. 일시에 쏟아져나온 쌍용차 해고노동자들은 기존의 노동시장을 위협했다. 대리기사와 일용직 건설시장이 넘쳤고, 망하는 것을 뻔히 알고도 가게를 열었다. 기존의 고용과 일자리를 위협하거나, 자식뻘인 청년들의 일자리까지 빼앗는 천덕꾸러기 신세로 전락한 것이다.

2일 오전 평택 쌍용자동차 노동조합 해고 조합원들이 근로자 지위확인 소송 가처분 신청 결과를 기다리며 쌍용자동차 평택공장에서 법원 평택지원까지 삼보 일배를 하며 가고 있다. (출처 : 경향DB)


지난 2월7일 서울고법에서 쌍용차 정리해고를 ‘부당해고’로 판시했다. 진실을 향한 몸부림과 노동자 자존심을 건 지난한 5년간 투쟁의 결실이었다. 그러나 회사는 아무런 답변 없이 7개월을 버티고 있다. 지난 5월 쌍용차 해고자들은 근로자 지위보전 가처분 소송을 평택 법원에 냈다. 이제 곧 그 재판 결과가 나온다. 손바닥으로 하늘을 가릴 수는 없다. 법원은 부당해고 판결에 따른 해고자 복직 및 후속조치를 회사가 즉시 이행할 수 있도록 강제해야 한다. 그것은 즉각적인 판결임과 동시에 공명정대한 판결이어야 한다. 이 간절한 바람이 매일 3보1배로 법원까지 해고자들과 아내 그리고 노동자, 시민들이 걷고 절하는 이유다.

쌍용차 정리해고는 조작된 회계감사 보고서가 그 밑바탕이었다. 그러나 자본주의 시장질서를 근본적으로 흔들었던 회계법인은 물론 쌍용차와 감독 소홀의 책임이 있는 금감원은 아직까지 어떤 사과도 하지 않고 책임도 지지 않고 있다. 그사이 억울한 노동자들만 죽음으로 내몰리고 있다. 이번 가처분 재판이 상식과 정의를 따를 것으로 믿는다. 그러나 이번 판결 또한 완치가 아닌 상처 치유를 위한 첫출발일 뿐이다. 너무나 억울해 처자식 먹여살리기 위해 “함께 살자” 몸부림친 수백의 노동자가 폭도로 몰려 짧게는 1년, 길게는 3년씩 감옥살이를 해야 했다. 평생 노예처럼 일해도 갚을 수 없는 천문학적 손배, 가압류에 목숨까지 압류 당하고 있는데 승리라는 수사를 어찌 붙일 수 있단 말인가?

우리에게 덧씌워졌던 정리해고는 부당한 천형이었다. 그 운명적 고행의 길을 서로가 부둥켜안고 6년의 시간을 달려왔다. 재판부의 현명한 판결, 진심으로 바란다.


한상균 | 쌍용자동차 해고 노동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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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께서 과부를 보시고 불쌍히 여기사 울지 말라 하시고” 성경 누가복음에 기록된 구절로, 예수가 죽은 아들의 관과 함께 나온 한 과부에게 한 말이다. 예수가 이 죽은 아들을 살려내는 기적을 행한 것으로 성경은 기록하고 있다.

프란치스코 교황은 한국으로 향하는 전세기에서 가자지구 취재 중 숨진 기자를 위해 기도했다. 아르헨티나 부에노스아이레스의 나이트클럽 화재 때는 당시 추기경이었던 교황이 누구보다 먼저 현장을 찾아 직접 구조에 참여하고 희생자 가족들을 위로했다.

교황의 관심은 생명이며 심장이 찢어지는 아픔을 겪는 이들에게 ‘울지 말라’고 하는 것을 사명으로 여긴다. 그래서 세월호의 비극을 뒤로하고 이제는 경제를 살려야 할 때라고 부르짖는 이 어두운 땅에서, 교황의 방한은 더욱 강한 빛으로 다가온다. 차가운 권력과 돈의 힘 앞에 깨지고 부숴지기 일쑤인 이들이 교황을 간절하게 바라보고 있다.

불쌍히 여기는 마음이 고갈됐기 때문일까. “좀 지겨워. 나도 처음엔 많이 슬펐지만 이제 그만 해야지. 솔직히 나라 지키는 군인들도 아니잖아. 말 그대로 사고야, 사고.” 식당 같은 일상의 공간에서 간혹 이처럼 섬뜩한 얘기를 듣게 된다. 세월호 진상규명은 ‘남의 일’이고, 조금이라도 수입이 느는 것은 ‘나의 일’이다. 물론 산 사람은 살아야 하지만, 곡기를 끊고 목숨을 걸 만큼 처절한 ‘남의 일’을 뭉개려 하는 것은 문명에 반하는 야만일 따름이다. 지난 봄, 우리가 흘렸던 눈물이 싸구려가 아니라면 세월호 참사 가족들이 바라는 제대로 된 진상규명에 힘을 보태야 한다.

무엇보다 ‘이제는 경제’라는 논리는 세월호 진상규명을 두려워하는 이들의 속임수로 보인다. 이미 대부분 일상으로 돌아왔고 진상규명을 하면서도 얼마든지 경제가 발전할 수 있다.

그리고 세월호 참사 가족들뿐 아니라 이 땅에는 생사를 넘나드는 고통 속의 노동자들이 있다. 오는 18일 명동성당에서 열리는 교황의 ‘평화와 화해를 위한 미사’에 초청받은 쌍용자동차 해고자들은 “해고는 살인”이라는 단 한마디의 메시지를 간절히 바라고 있다. 25명의 목숨을 앗아간 쌍용차 사태는 ‘노동계의 세월호’로 불리기도 한다. 구할 수 있는 목숨을 거짓말처럼 잃었기 때문이다.

프란치스코 교황이 16일 서울 광화문광장에서 ‘윤지충 바오로와 동료 순교자 123위 시복미사'를 집전하고 있다. 이날 광화문광장에는 신도와 시민들 100만 인파가 운집했다. (출처 : 경향DB)


하지만 교황 방한 이튿날인 15일 아침부터 날아든 소식은 심란했다. 노조 파괴 공작과 대량 해고 횡포에 맞서 39일째 노숙 농성 중인 케이블방송 씨앤앰 노동자들을 경찰이 밀어내려 한다는 것이었다. 노조는 “16일 광화문에서 열리는 시복미사를 이유로 경찰이 새벽부터 농성장 주변을 차벽으로 막고 농성대오를 둘러쌌다”면서 “평화와 자비를 바라는 교황의 역사적인 방한 취지에 반해 박근혜 정부가 반인권적 작태를 보이고 있다”고 토로했다. 씨앤앰 노동자 99명은 외주업체 변경 과정에서 노조 조합원이라는 이유로 해고된 상태다. 앞으로도 더 많은 해고자가 나올 수 있다.

세월호 참사라는 역사적 비극 앞에서도 한국 사회의 민낯은 여전해 보인다. 교황의 메시지가 타인의 아픔을 제 것으로 여기고, ‘돈보다 생명이 우선’임을 깨닫는 계기가 되길 바란다. 가장 이상적이지만 너무 순진한 바람이라는 것도 안다. 보다 현실적인 바람은 교황의 메시지가 낮은 자들을 보호하는 울타리가 돼 주는 것이다.

교황은 15일 대전월드컵경기장에서 열린 성모승천대축일 미사 강론에서 “올바른 정신적 가치와 문화를 짓누르는 물질주의의 유혹에 맞서, 그리고 이기주의와 분열을 일으키는 무한 경쟁의 사조에 맞서 싸우기를 빈다. 새로운 형태의 가난을 만들어내고 노동자들을 소외시키는 비인간적인 경제 모델들을 거부하기를 빈다”고 말했다. 다시 한번, 결단의 시간이다.


박철응 정책사회부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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