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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 2017.08.16 [노명우의 인물조각보]‘아픈 사람’과 돌보는 사람의 서러움

아프면 서럽다고 한다. 병원 신세 지고 난 사람들의 입에서 흔히 나오는 푸념이다. ‘서럽다’는 단어는 신체의 고통만을 표현하지 않는다. ‘서럽다’에는 병을 앓았고 치료받은 경험이 있는 사람들이 인간으로서 겪은 모든 편치않은 체험이 농축되어 있다.

그 서러움을 아서 프랭크가 <아픈 몸을 살다>라는 책에서 털어놓았다.

아서 프랭크는 사회학자다. 그는 병에 걸렸다. 서른아홉에 심장마비를 겪었고 마흔살에는 암환자가 되었다. 암판정을 받고 병원에서 치료를 받기 시작하자, 병원은 그를 ‘환자’라는 호칭으로 부르기 시작했다. 사회학자 아서 프랭크는 ‘환자’라는 호칭으로 환원될 수 없는 병치레의 체험을 <아픈 몸을 살다>에 낱낱이 담았다.

 

이 책을 통해 우리는 암환자이기도 하지만 동시에, 아니 여전히 사람인 한 인격체가 겪는 서러움에 대해 들을 수 있다.

병원에서 ‘아픈 사람’은 그들이 앓고 있는 ‘질환(disease)’으로 환원된다. 예를 들자면 ‘514호 암환자’는 흔히 사용되는 환원호칭이다. 의료진이 질환이 인격을 압도하는 환원호칭을 쓴다고 그들을 비난할 수는 없다. 병원은 인격을 돌보는 시설이 아니라 ‘질환’을 고치는 기관이며, 의료진은 병을 다루는 전문가이기 때문이다. 의료진은 ‘질환’을 관찰하고 감정에 흔들리지 않으면서 치료하도록 훈련받은 전문가이다.

질환이 그 사람의 모든 것을 설명해주지 못한다. 너무나 당연한 말이지만, 질환이 있는 사람은 질환 덩어리가 아니라 질환을 겪는 사람이기 때문이다. ‘아픈 사람’이 된다는 것은 오래된 일상의 습관과 강제적으로 이별해야 함을 뜻한다. 직업활동이 정지되고, 사회관계는 축소된다. 자식에게 밥상을 차려주던 어머니가 ‘아픈 사람’이 되자마자, 자식이 차려주는 밥상을 받는 사람이 된다. 천성이 새침데기인 사람도 ‘아픈 사람’이 되면 가장 은밀한 행위인 배변 역시 누군가의 도움을 받아야 되는 처지가 될 수도 있다. 이런 변화는 ‘아픈 사람’을 당혹스럽게 한다. 의학적으로 판명되는 혹은 측정되는 고통에 못지않게, 아니 그 고통 이상으로 ‘아픈 사람’은 돌연 변화한 일상에 어떻게 적응해야 할지 모른다.

하지만 어느 누구도 그 당혹감을 ‘아픈 사람’에게 묻지 않는다. 질병치료의 전문가는 ‘환자’의 증상에 대해 묻지만 ‘아픈 사람’이 겪는 인격의 당혹스러움을 궁금해하지 않다. 심지어 병문안 온 사람조차 질병에 대해 묻지 ‘아픈 사람’의 편치않음에 대해 묻지 않는다. 편치않은 상황은 환자가 당연히 극복해야 하는, 수긍하고 받아들여야 하는 것으로 취급된다. 그래서 ‘아픈 사람’의 신체고통에 마음의 불편함이 더해진다. ‘아픈 사람’은 ‘환자’라는 별도의 카테고리로 분류되어 인간세계로부터 밀려난 듯한 고독감에 힘들어한다.

치료의 전문가는 환자 앞에서 전지전능하고, 환자복을 입은 사람은 무기력하다. 그 치료의 전문가가 여러 가지 이유로 용납하기 힘든 방법으로 환자를 대해도 치료의 전문가가 주도하는 ‘전방위적 통제기관’인 병원 내에서 환자는 크든 작든 모든 불만을 속으로 삼키는 수밖에 없다. 엄격하게 말하자면 치료의 전문가인 의료진에게 인간으로서의 당혹감을 알아달라고 호소하거나 해결해달라고 요청할 수는 없다.

그래서 더욱 ‘아픈 사람’에겐 계약관계로 고용된 ‘간병인’이 아니라 당혹감 그리고 불편함을 경청해줄 수 있는 사람이 긴요하다.

의료진이 질병 치료를 통해 ‘아픈 사람’을 돕는다면, 돌보는 사람은 ‘아픈 사람’의 절망과 공포와 불평을 원 없이 들어주고 맞장구쳐주는 방식으로 병과 대결한다. 돌보는 사람은 ‘아픈 사람’의 손상된 인격회복을 돕는 조력자이다.

‘아픈 사람’과 그 사람을 돌보는 사람은 질병을 함께 경험한다. ‘아픈 사람’을 돌보는 사람은 수술동의서나 연명치료 포기 각서 등을 쓸 때는 ‘보호자’라는 호칭으로 불리며 반드시 있어야 하는 사람이지만, 정작 서류에 사인이 끝나고 나면 병원에서 쉴 곳도 찾기 힘든 잉여인간이 된다. ‘아픈 사람’의 서러움에 돌보는 사람의 서러움이 더해진다. 자신의 서러움과 그를 돌보는 아내의 서러움을 목격한 아서는 이렇게 말한다. “병원의 공간과 일정은 질환치료를 위해서만 설계되어 있어서 돌보는 사람을 배려하지 않는다. 질병이 삶을 갈가리 찢는 동안 관계들을 지탱하려 노력하는 사람이 바로 이들인데도 그렇다.”

2016년 기준 전국 병원 수는 3215개이고 총병상 수는 57만8252개라고 한다. 병원의 수와 총병상 수는 ‘아픈 사람’과 ‘아픈 사람’을 돌보는 사람의 규모를 짐작할 수 있는 자료이다.

“삼년 간병에 불효”나고, ‘아픈 사람’이 아픈 상태에서 벗어나자 그를 돌본 사람이 다시 병나는 악순환이 반복되고 있지만 건강정책 논쟁에서 ‘아픈 사람’은 그저 치료의 대상인 ‘환자’일 뿐이며, ‘아픈 사람’을 돌보는 사람은 여전히 투명인간에 불과하다. 세상에는 서러운 사람들이 한가득인데도.

<노명우 | 아주대 교수·사회학>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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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osted by KHross