안희정은 비운의 세자다. 2002년 12월21일. 노무현 대통령 당선인은 가족과 함께 제주도로 갔다. 안희정도 불렀다. “국민 앞에 털어야 할 것이 있다면 미리 다 털고 가자.” 안희정은 1994년 노무현을 만난 이후 줄곧 살림을 담당했다. 안희정은 대선자금 수수 총대를 메고 구속됐고, 징역 1년을 선고받았다. 문재인은 “안희정은 정말 가혹하게 당했다. 본인 책임이 아닌 일까지도 안아버렸다. 민정수석으로서 그저 지켜볼 수밖에 없는 내 처지가 원망스러웠다”고 했다(문재인의 <운명>).

함께했던 많은 사람들이 청와대·정부로 입성할 때 안희정은 바깥에 혼자 남았다. 청와대에 들어가면 정원에서 삼겹살 파티 한번 하자던 그의 꿈은 실현되지 못했다. 안희정은 “본진은 앞으로 출발하고 나 혼자, 다리 부상 입은 놈이 혼자 남아 추격꾼들을 맞는 심정이었다”고 그때를 기억했다. 감옥에서 나온 뒤 안희정은 참여정부 내내 아무런 공직을 맡지 않았다.

문재인이 대통령이 된다면 일등공신은 안희정이다. 지난주 한국갤럽 조사결과 문재인·안희정·이재명 등 민주당 세 주자의 지지율 합은 56%로 당 지지율(47%)보다 높다. 세 주자는 지지층을 서로 뺏고 빼앗기기보다 새로운 영토를 개척했다. 안희정은 중도·보수 블루오션에 뛰어들어 이들을 야당으로 끌어왔고 누수를 막았다. 대선 불출마를 선언한 반기문·황교안의 이탈표도 흡수했다. 안희정의 등장으로 민주당 후보들의 지지율 합은 2, 3월 두 달간 최저 46%에서 최고 61%로 안정적 박스권을 형성할 수 있었다. 안희정이 없었다면 민주당 후보들이 지지율 파이를 키우면서 플러스섬 게임을 하기는 어려웠다.

더불어민주당 대선후보인 안희정 충남지사가 21일 오후 서울 마포구 상암MBC에서 진행한 100분 토론 녹화에서 토론을 준비하고 있다. 국회사진기자단

어제 호남은 문재인을 선택했다. 문재인(60.2%)과 안희정(20%)의 표차는 컸다. 호남 경선은 야권 지지 민심의 바로미터다. 호남은 될 사람, 본선 가능성을 본다. 전략적 투표다. 그래서 호남 1위는 민주당 적통 이미지를 갖는다. 남은 충청·영남·수도권도 비슷할 것이다. 역대 야당 경선에서 수도권은 호남 동조투표 양상이 뚜렷했다. 문재인의 대세론은 확인됐다. 이대로라면 문재인이 민주당 대통령 후보가 될 것이다.

관심은 경선 이후다. 세 주자들의 지지율 합이 본선에서도 문재인 지지로 온전히 유지될 수 있을까. 그러기 위해서는 각 후보 지지자들이 적대적 관계가 되지 않아야 한다. 5년 전 대선에서 문재인·안철수 단일화는 시너지 효과를 내지 못했다. 안철수의 앙금을 풀지 못한 때문이다.

안희정은 문재인에게 화가 나 있다. “질리고 정 떨어지게 한다”고 했다. “30년 민주당에 충성한 안희정을 배신자로 만드는 게 동지들의 우정이냐”고도 했다. 앵그리 안희정은 등 돌린 안철수보다 더 무섭다. 호남 경선 직전인 지난 주말 오후 안희정에게 물어봤다.

- 화가 많이 난 것 같은데.

“문재인 캠프는 나의 성향, 가치, 소신을 너무 잘 알고 있는 사람들이다. 그런데 나를 국정농단 세력을 옹호하는 사람으로 만들고 무원칙한 정치인이란 프레임을 씌워 두들겨 팼다. 동지들 간에 너무 심했다. 밑에서 여론을 만들면 문 후보는 추임새를 넣었다. 배신감 때문에 서운하고 화도 났다.”

- 경선 이후에 다시 합칠 수 있나.

“당연하다. 싸우더라도 다음날 다시 만나는 게 친구요 동지다. 각자 이기려고 하는 것인데, 정치에선 그런 걸 마음에 두면 안된다. 다만 현직 도지사라는 게 한계가 있을 것이다. 경선에 실패하면 도지사를 계속해야 한다. 그만두는 걸 도민들이 허락하지 않을 것이다.”

- 경선 최종 결과는 어떻게 전망하나.

“관건은 수도권이다. 여론조사 결과 문재인·안철수 차이는 12% 정도다. 위험하다. 하루에 뒤집어질 수 있다. 안희정·안철수 격차는 21%다. 두 배나 차이 난다. 야당 지지자들은 이제 ‘누구를 내놔도 이긴다’에서 ‘누가 확실하게 이길 것이냐’는 질문 앞에 섰다. 안희정이 정권교체의 확실한 승리의 카드라고 설득할 것이다. 지지자들이 합리적 선택을 한다면 기적이 일어날 것이라고 믿는다.”

- (경선에 지면) 내년 지방선거에서 3선에 도전하는가.

“그건 경선 끝나고 적절한 시점에 제 입장을 밝히려 한다.”

안희정은 38살에 대통령을 만들었고, 53살에 대통령에 도전했다. 첫 도전에서 그는 뚜렷한 족적을 남겼다. 이분법을 넘어 통합과 협치의 리더십도 선보였다. 경선에서 이기면 대권으로의 거보(巨步)를 내딛겠지만, 지더라도 많은 정치적 수익을 챙겼다. 어느 쪽이든 흑자다. 비운도 끝나는 것 같다. 안희정에게 박수를 보낸다.

박래용 논설위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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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통령 선거전이 본격화되면서 후보 간 경쟁이 정책 대결이 아니라 말꼬리 잡기와 흠집 내기로 흐르고 있다. 더불어민주당 문재인 후보의 ‘표창장’ 논란이 대표적이다. 문 후보가 토론회에서 특전사 복무 시절 사진을 보여주며 “전두환 여단장으로부터 표창받기도 했다”고 소개하자 민주당 안팎의 대선후보들이 융단폭격하듯 비판을 쏟아냈다. 비판의 여지가 없지는 않지만 그렇게까지 크게 문제 삼을 일이었는지 의문이 든다. 또 자유한국당은 중앙선거관리위원회가 조사 끝에 별문제가 없다고 발표한 문 후보 아들의 대기업 입사에 대해 연일 의혹을 제기하고 있다.

더불어 민주당 대선후보들의 토론회가 21일 오후 서울 상암동 MBC 스튜디오에서 열렸다. 왼쪽부터 이재명 성남시장, 문재인 전 대표, 안희정 충남지사, 최성 고양시장. 사진공동취재단

이번 대선에서 정책 토론은 어느 때보다 더 중요하다. 경제와 민생, 외교안보, 노동 등 해결이 시급한 현안들이 산적해 있다. 후보 간 치열한 토론을 통해 공약을 검증해야 하는데 시간이 촉박하다. 게다가 선거가 끝나면 당선자와 캠프는 대통령직인수위원회에서 정책을 조율할 틈도 없이 바로 집무를 시작해야 한다. 이런 마당에 선거 과정을 통해 국민적 공감을 얻지 못한 공약을 국정에 그대로 반영한다면 상당한 시행착오가 우려된다. 그런데 후보 간 정책 토론의 빈도는 오히려 다른 때보다 더 적다. 최근 몇 차례 선거에서 복지와 외교안보 정책 등을 놓고 정책선거를 했던 것에 비해서도 후퇴하고 있다. 갑자기 치러지는 대선이라 공약 준비가 부족한 현실을 감안해도 아쉬운 일이다. 후보 약세로 공약조차 제대로 내놓지 못하는 정당과 후보들이 비방전에 더욱 적극적인 점은 유감스럽다. 정책 대결을 선도하지는 못할망정 흠집 내기로 선거판을 흐리는 것은 해서는 안될 일이다.

문 후보를 비판했던 안희정 충남지사가 어제 공세를 멈추며 “경선 캠페인이 네거티브로 흐르지 않도록 품격 있게, 그리고 절제 있게 말하고 상대를 존중하자”고 제안했다. 바람직한 태도이다. 모든 후보와 캠프는 꼬투리 잡기 캠페인을 자제하고 정책과 비전으로 승부해야 한다. 토론을 통해 정책을 검증받지 않은 후보가 집권하면 시민은 또다시 좌절할 수밖에 없다. 언론과 시민들도 정책 대결이 가능하도록 후보들의 공약에 주목해야 한다. 유권자가 조금 더 관심을 기울인다면 후보들 간 정책 대결도 유도할 수 있다. 후보 간 직접 토론뿐 아니라 전문가들 간 토론의 장도 적극적으로 활용할 필요가 있다. 시민들의 힘으로 만들어낸 조기 대선이 정작 시민의 바람과 거꾸로 가는 일이 있어선 안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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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난 칼럼에서 안희정 충남지사와 이재명 성남시장의 ‘2등 경쟁’을 지켜보겠다고 했다. 한 달이 흘렀다. 하지만 지금 시간과 순위를 따지는 게 무의미할 정도다. 2017년 대선 정국이 안희정으로 요동치고 있다.

‘공적 됨됨이.’ 십수년간 지켜본 정치인 안희정에 대한 주관적 평가다. 1990년 3당 합당 후 이념도 정치도 헌 옷처럼 느껴져 여의도(이철 의원 비서관)를 나설 때, 1993년 친구 이광재와 서울 연신내 허름한 술집에서 ‘노무현 대통령 만들기’를 도원결의 할 때, 2002년 노무현 정부 출범 후 홀로 멍에를 짊어졌을 때도 안희정은 조직과 대의명분이 우선이었다. 2007년 대선 패배, 2008년 총선 공천 배제 땐 ‘폐족’이란 말로 친노를 일으켜 세웠다.

스스로의 자리가 보장되지 않는 혁명을 결코 원하지 않았던 게 한국 야당사다. 가진 게 어정쩡해서다. 안락한 2등이 보장되는 소선거구제를 움켜쥐고 있는 것만 봐도 짐작이 간다. 그래서 결정적일 때 늘 보수적이었다. 1987년 분열, 1990년 민자당 합당, 1997년 DJP 연합, 2002년 노무현·정몽준 단일화 등은 선명한 궤적이다. 안희정은 그럴 때마다 “동의할 수 없는 가치와 타협할 수 없고, 더욱이 그 동의할 수 없는 것이 현실 권력으로 존재할 때 난 그 권력을 (중략) 관용, 용서, 이해할 수 없다”(2004년 7월3일 옥중일기)고 다독여 왔다. 이렇게 하지 않고 역사적 소명의식으로 산다는 건 그저 세상의 대기권 밖을 서성이는 일이었을 테니.

안희정 충남지사가 21일 서울 중구 대한상공회의소에서 열린 ‘4차 혁명과 미래인재’ 콘퍼런스에서 축사를 하고 있다. 박민규 기자

안희정은 이처럼 예측 가능했다. 그런데 ‘선한 의지’, 대연정 제안, 사드 배치 신중, 녹색성장과 창조경제 계승…. 파문도 이런 파문이 없다. 파문이 지나간 자리마다 기존 정치가 익숙하게 밟았던 경로 의존성도 흔적조차 없다. 안희정 ‘현상’이라 해도 과하지 않다.

대선이라는 최고 권력 획득전에서 한 후보의 발언을 두고 전략이냐, 소신이냐는 격론이 연일 벌어진다. 즉위를 반대하는 노론을 상대로 ‘아버지의 원한을 갚으려 하지 않겠다’고 한 정조의 시그널도 어른거린다. 안방(야권)에서 쫓겨날 듯한 질타를 받으면서도 지지율은 고공상승 중이다. 순식간에 야권 대 야권의 대결로 대선 구도를 바꿔 버렸다. 여권은 ‘안희정 경계령’을 내렸고, 야권에선 선거철 전가의 보도였던 연대·단일화 논쟁이 사라졌다. 생존조차 불투명했던 진보정당은 회생 기회를 잡았다.

합리적 차별조차 무의미할 정도로 국민정당(캐치올 정당)화된 여야, 길을 잃었지만 안길 곳 없는 보수 등 정치환경이 바뀐 이유도 있다. ‘노무현 적자’라는 배경 또한 안희정에겐 든든한 방어막이다.

그럼에도 아직은 안희정 현상이라고 단언하진 못하겠다. 대선 주자가 개인 선의부터 확신한 것, 구체적으로 치열해야 할 때 담론의 늪을 만든 것, 민심의 언어로 세상을 읽지 않고 있는 것. 대연정만 해도 싸우지 않기 위해 손잡자는 게 아니다. 안정적 국정운영을 위한 쓰임새가 더 크다. 분권형 개헌이 불가피하다. 법과 시스템을 강조하면서도 정작 법과 시스템이 필요한 대목을 그는 지나쳤다.

무엇보다 정치인의 신념은 철학과 계몽으로 얻어지지 않는다. 공동체 이익이 무엇인지 제시하고, 약속하고, 실천하면서 얻게 되는 것이다. 미국 역사상 첫 의료보험제로 평가받는 오바마 케어가 버락 오바마 전 대통령에게 ‘의료복지’라는 신념을 안겨줬듯이.

구시대 마지막 열차와 새시대 첫 열차는 같은 길목에서 만나겠지만 타고 내리는 통로는 분명히 다르다. 반미청년회 수장 ‘안희정’에서 재선 충남지사 ‘안희정’이 되기까지, 마음속 철조망을 걷어내느라 수천 수만번 찔리고 다쳤을 것이다. 현실 정치로 나왔다면, 안희정 현상을 입증하려면 숱한 생채기가 벗겨지고 새살이 돋는 동안 ‘내가 품었던 세상의 욕망’을 성찰만 하지 말고 뚜렷하게 보여달라. 지난 계절을 ‘불만의 겨울’(1970년대 말 영국 노동당 집권 후 대규모 공공노조 파업)로 기억하는 봄을 맞고 싶진 않다.

정치부 구혜영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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안희정 지사의 지지율이 무서운 상승세를 이어가고 있다. 보수 후보들의 지지율이 전혀 오르지 않고 있는 상황에서 보수층 유권자들의 표심은 갈 곳을 잃었다. 본인의 애매한 자세에도 불구하고 황교안 대통령 권한대행의 지지율이 높은 편이지만, 막상 ‘권한대행의 권한대행’을 임명하고 출마할 경우 불어닥칠 후폭풍은 간단치 않을 것이다. 황 대행이 그 후폭풍을 뚫고 당선될 꿈을 꿀 정도로 순진하지는 않다고 본다면, 정치적으로 보이는 그의 행보는 대선보다는 다른 목표를 향하고 있을 가능성이 높다. 안 지사의 최근 지지율 상승은 갈 길 잃은 보수와 문재인 전 대표에게 불안감을 느끼는 중도층의 지지에 힘입은 바가 크다. 1987년 이후 모든 선거에서 야권을 항상 불리한 출발선에 세웠던 기울어진 운동장이 이번에는 실질적으로 사라졌다. 그러나 그것은 유의미한 보수 후보가 없기 때문이지, 보수성향 유권자가 사라진 것은 아니다. ‘안정적 진보’의 이미지를 착실하게 선점한 안 지사는 기울어진 운동장의 혜택을 누리는 최초의 야권 후보가 될 수도 있다.

물론 그렇다 하더라도 그가 민주당 경선의 문턱을 넘을 가능성은 아직까지 매우 작다. 완전국민경선제와 결선투표제라는 변수가 누구에게 유리하게 작용할지는 아직 예측하기 어렵다. 헌법재판소가 탄핵을 인용할 경우 분노한 민심은 어느 정도 풀릴 것이고, 대선 판도는 크게 출렁일 것이다. 그러나 3월13일 전후에 후보를 확정하기로 한 민주당 경선 일정을 감안할 때, 세간의 예측대로 3월 초 탄핵인용이 이루어진다면 안 지사는 달라진 대선 판도의 이득을 챙길 시간적 여유가 부족하다. 그렇다고 문 전 대표와 더불어 친노의 양대 적자인 그가 민주당을 탈당할 가능성도 없다고 봐야 할 것이다. 본선에서의 높은 외연 확장성에도 불구하고, 그가 가진 가능성이란 결국 경선 이전에 지지율이 문 전 대표와 비슷한 수준으로 오르고 그것이 경선 투표자들의 결정을 바꿔놓는 것과 같은 이변 이외에는 없을 것이다.

안희정 충남지사가 12일 광주 서구 쌍촌동 5·18민주화운동 학생기념탑에서 참배 후 전시물을 둘러보고 있다. 연합뉴스

여기까지는 선거공학적인 이야기들이다. 이번에는 우리 민주주의와 정치현실을 직시해보자. 최근 논란이 된 소위 ‘대연정론’ 이야기다. 앞서 소개한 것처럼, 화두를 던진 안 지사의 가능성이 매우 작기 때문에 오히려 편하게 말할 수 있다. 소위 ‘헬조선’을 운위하게 만드는 이 나라의 수많은 문제들 중 거의 대부분은 대결적 정치에서 시작됐고 합의제 민주주의의 성격을 강화함으로써 풀 수 있는 것들이다. 참여정부가 애써 마련했던 여러 개혁 ‘로드맵’들, 그리고 이명박 정부의 녹색성장이 어디로 갔는지 아는 사람은 아무도 없다. 박근혜 정부의 창조경제는 이미 쓰레기통에 처박혔다. 승자독식을 위해 필사적으로 쟁패하는 정치로는 헬조선의 문제를 아무것도 풀 수 없다. 세계적으로 보아도 합의제 민주주의를 가진 나라들이 그렇지 않은 나라들보다 양극화, 실업, 고용률 등 다양한 지표에서 더 나은 성적을 거두고 있다. 당장 개헌은 못하더라도 정치의 합의적 요소를 강화하는 것은 국가를 위기에서 구하기 위해 꼭 필요한 일이다.

현실을 보자. 민주당이 집권한다고 가정할 경우 121석의 여당은 178석을 차지하는 자유한국당, 국민의당, 바른정당, 정의당 그리고 무소속 의원들을 상대해야 한다. 국회선진화법하에서 법안 통과를 하려면 180석이 넘어야 하니 야당으로부터 적어도 59석의 협조가 필요하다. 국민의당이 호락호락 협조할 리도 없지만 그래봤자 38석이다. 이번 대선에서 후보다운 후보도 내지 못하고 몰락한 자유한국당이지만 여전히 의석은 94석인데, 이들은 대선을 통해 심판을 받았다고 주장하며 하나부터 열까지 발목을 잡을 것이다. 과거 열린우리당은 2004년 총선에서 탄핵역풍 덕분에 제1당으로 출발했지만 실질적으로 와해되는 데 1년밖에 걸리지 않았다. 이 상태로 2020년 총선까지 가야 한다. 그 중간에 2018년 지방선거가 있는데, 이때야말로 자유한국당과 바른정당은 사활을 건 총력전을 펼칠 것이고 보수 유권자들도 결집할 것이다. 그러니 설사 정권교체가 된다 한들 합의제 성격을 강화하지 않은 채 출범한 다음 정부가 제대로 성과를 낼 수 있을까? 일본 민주당의 전례를 보면, 진보정권 시즌 2가 실패할 경우 수권능력 제로로 낙인찍혀 두 번 다시 집권이 어렵게 될 수도 있다.

자유한국당도 포함될 수 있는 대연정은 안된다는 주장은 심정적으로는 이해할 수 있다. 하지만 자유한국당을 배제하기 위해 이처럼 중요한 의제를 논의조차 해보지 않는다는 것은 득보다 실이 너무 크다. 교체와 청산도 중요하지만 미래가 더 중요하다. 정권교체를 이루겠다고 말하지만 경천동지할 이변이 없는 한 정권교체가 될 것이다. 그렇다면 유능하고 지속가능한 차기 정부를 만드는 논의를 시작부터 걷어차야 할 아무런 이유가 없다. 선거공학과 별도로, 진지하게 연정을 논의해보자.

장덕진 | 서울대 교수·사회학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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매주 토요일 광화문 촛불집회는 거대한 민주주의 야시장이다. 지난 석 달 동안 야시장 풍경은 분명 달라졌다. 탄핵이라는 절대 목표가 있던 때는 절박하게 뭉쳤다. 지금은 저마다 마음속 광장에서 다양한 담론의 분화가 일어나는 중이다. 마치 묵은 낙엽 위에 또 낙엽이 쌓여 숲은 잊혀져가지만 어느새 수많은 나무가 자라고 있는 것처럼.

광화문 한 사케집은 붐볐다. 우리 일행은 작은 테이블을 앞에 두고 파전과 어묵탕을 주문했다. 750㎖ 사케 반병은 차게, 또 반병은 따뜻하게 데웠다. 어묵탕 국물이 말갛게 끓어오를 때쯤 우린 광장 숲더미에서 골라온 나무를 꺼내보자고 했다.

가장 최근에 대선 출마를 선언한 이재명 성남시장과 안희정 충남지사다. 두 사람은 많이 다르다. 세상을 대하는 방식도 이 시장은 “물이 반밖에 없는데 참아야 하나”라면, 안 지사는 “아직 물이 절반은 있으니 여기서 시작해보자”는 식이다. 이 시장은 사적 고난을 통해, 안 지사는 공적 고난을 통해 성장했다. 촛불정신에서 봐도 이 시장은 촛불의 변혁에, 안 지사는 촛불의 평화에 가깝다.

이재명 성남시장이 23일 경기도 성남시 중원구 오리엔트 시계공장에서 열린 대선 출마선언을 하며 가족들과 함께 지지자들에게 인사를 하고 있다. 정지윤 기자

그런데도 왜 이 두 사람을 같이 거론하게 될까. 누군가 “시대 교체, 50대 기수(연합)론이 강렬해서”라고 했다. 50대는 한국 사회 주축이면서도 부모 부양에 자식 양육, 소득 불안정까지 가장 고단한 삶을 살고 있는 세대다. 세대별 유권자 지형 변화에서도 대선 캐스팅보터가 40대에서 50대로 이동했다는 ‘세대 이동’ 지표가 뚜렷하다. 결국 이들의 대표가 이들의 고통을 해소해야 사회가 발전한다는 논리다. 탄핵심판 이후 심판 프레임보다 미래 프레임이 부상할 것이라는 전망도 시대 교체, 50대 기수론을 받치는 힘이다.

다른 누군가는 “정당 정치 발전”을 이유로 들었다. 쇼핑하듯 정당을 고르는 후보, 때만 되면 텐트 치기 바쁜 후보들 틈에서 이 두 사람은 ‘고향 까치’ 같다고 했다. 그런 느낌이긴 하다. 특히 안 지사는 구태와 동의어였던 ‘직업 정치’를 바꿔 놓았다. 당의 명령에 따라 불출마했고, ‘폐족’을 자처하며 성찰했다. 이 시장은 야권 촛불공동경선을 주장하면서도 민주당 대선 경선 룰에 승복했다. 정당을 당원들의 민주적인 의사 결집체로 받아들였기에 가능한 일이다.

사케 한 병을 더 시켰다. 이야기는 다시 시작됐다. ‘2등 경쟁’이 화두가 됐다. ‘문재인 대세론’을 기정사실화하고 두 사람이 2등 싸움을 한다는 것이다. 아닌 게 아니라 실제 정책만 보면 이 시장은 문재인 전 대표 왼쪽에, 안 지사는 문 전 대표 오른쪽에 있다. 결과적으로 이 시장은 문 전 대표의 진보정체성 강화를, 안 지사는 문 전 대표의 외연 확대를 책임진 셈이다. 촛불 정국 최전선에 섰던 이 시장 덕에 색깔론 타깃이 될 뻔했던 문 전 대표는 1위 자리를 안정적으로 유지했다. 이 시장은 문 전 대표와의 ‘사이다·고구마’ 공방도 확대하지 않았다. 안 지사는 ‘비문 우산론’ ‘개헌’ 등 치열하게 문 전 대표의 아킬레스건을 막았다.

은메달을 따려고 올림픽에 출전하는 선수는 없다. 두 사람도 문 전 대표의 페이스메이커가 아님을 수차례 강조했다. 그러나 곳곳에서 2등 경쟁은 합리적 의심으로 다가온다. 혹시 문재인 이후를 차지하려는, 그래서 지금은 밋밋한 경선의 흥행 코드면 된다는….

그냥 2등 경쟁은 김빠진다. 기왕 할 거면 색깔 분명한 젊은 주자들이 더 치열하게 2등 싸움을 해야 한다. 그래야 정권교체에 가려진 시대교체, 정당정치 발전이라는 ‘이재명·안희정’ 출마 의미가 살수 있다. 레닌은 “혁명은 하층계급이 과거 방식으로 살기를 원치 않는 것만으론 어렵다. 상층계급도 과거 방식으로 통치할 수 없는 상태여야 한다”고 했다. 촛불민심이 밀어올린 ‘아래’의 변화와 대표 주권자 후보들이 만드는 ‘위’의 변화가 만나야 새 시대를 열 수 있다.

마지막 사케 한 병은 다 비우지 못했다. 2등 경쟁이 만드는 변화를 우린 좀 더 지켜보기로 했다.

정치부 구혜영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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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야 유력 정치인들이 속속 대선 출마를 선언하고 있다. 앞선 주자는 대세론을 주장하고, 후발 주자들은 ‘제3지대’ 연합이니 야권 공동경선 등을 제안하고 있다. 남경필 경기지사와 안희정 충남지사 등 젊은 후보들은 세대교체와 정책 중심의 경쟁을 외치지만 정국을 주도하지는 못하고 있다. 심상정 정의당 대표의 ‘슈퍼우먼방지법’ 공약과 유승민 바른정당 의원의 ‘육아휴직 3년 보장법’, 이재명 성남시장의 기본소득 정책 등도 이목은 끌었지만 의제로 떠오르진 못했다. 오히려 유력한 대선주자들일수록 특정 지역에 한정된 약속들만 내놓고 있다. 현안에 대한 해법이나 국가 미래를 좌우할 정책 제안보다는 유리한 경쟁 구도 만들기에 집중하는 상황이다.

안희정 충남지사가 22일 서울 혜화동의 한 소극장에서 대선 출마를 선언한 뒤 참석한 지지자들에게 감사 인사를 하고 있다. 정지윤 기자

대선은 정당과 후보들이 시민들의 요구를 반영하고 사회문제에 대한 해법을 공약으로 제시해 대결하는 과정이다. 이런 점에서 이번 대선 공약의 기조는 당면한 안보·경제 위기를 극복하면서 재벌과 검찰, 언론 개혁 등 과제를 어떻게 실천할 것인가가 되어야 할 것이다. 급선무로 떠오른 저출산 문제와 교육 정상화, 일자리 창출, 복지 강화 등에 대한 종합적인 해법도 필요하다. 아무리 준비를 잘해도 해법을 찾기 쉽지 않은 난제들이다. 게다가 이번 대선은 대통령의 탄핵이라는 돌발 상황에서 치러진다. 촛불민심으로 표출된 시민들의 요구도 대통령이나 집권 정당을 바꾸자는 수준을 넘어섰다. 박근혜 정권의 실정과 국가와 시장의 실패를 넘어설 대안을 구현해 달라고 요구하고 있다. 단순한 정권 교체가 아니라 ‘좋은 정권 교체’를 위한 집권 프로그램을 제시해야 하는 이중의 과제가 후보들에게 주어진 것이다.

그러나 촉박한 대선 일정으로 정책 검증이 쉽지 않은 상황이다. 심지어 특정 후보가 정책 토론을 회피할 것이라는 말까지 나온다. 이대로라면 유권자들은 후보들의 정책이 뭔지 제대로 평가하지도 못한 채 기표소에 들어가는 일이 생길 수 있다. 당선된 대통령은 인수위원회에서 정책을 조율할 틈도 없이 곧바로 집무를 시작해야 한다.

공약과 도덕성, 자질을 검증하지 못하면 또다시 실패한 정권이 탄생할 수밖에 없다. 졸속으로 만들어 낸 공약으로 선거를 치른다면 그 길을 피하기 어렵다. 공약 없이 이미지로 선택받겠다는 것처럼 위험하고 무책임한 일은 없다. 후보들 간 활발한 정책 경쟁을 기대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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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osted by KHross