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너무 오래 지체된 정의는 정의에 대해 거부하는 것과 같다. 지연된 정의는 정의가 부정된 것이다.”(마틴 루서 킹 <버밍햄 감옥에서의 편지>)

‘지연된 정의는 정의가 아니다’라는 법언(法諺)을 꺼내기도 무참하리만큼 참으로 너무 ‘오래’ 걸렸다. 청춘의 나이에 영문도 모른 채 일본으로 끌려가 강제노역에 시달리다 몸과 마음이 병든 채 해방 조국에 귀국한 이래 일흔세 해가 흘렀다. 일본에서의 법정 싸움까지 포함하면 소송 제기 21년, 국내 소송 기간만 따져도 13년이 걸렸다. 일제 강제징용 피해자들에게 해당 일본 기업이 배상해야 한다는 대법원의 최종 판결이 이제야 나왔다.

13년이나 끌어 온 일제 강제징용 피해자들의 손해배상 청구소송 최종 선고가 원고 승소 판결로 내려진 지난달 30일 서울 서초구 대법원 청사에서 강제징용 피해 당사자인 이춘식 할아버지가 입장을 밝히고 있다. 이준헌 기자

늦어도 너무 늦었기에 소송을 낸 강제동원 피해자 4명 중 3명(여운택·신천수·김규수씨)은 ‘제사상 판결문’으로 받아보게 됐다. 이춘식 할아버지(94) 홀로 승소가 확정되는 것을 직접 눈으로 보았다. 할아버지는 강제징용의 아픔을 함께 나누며 오랫동안 힘든 법정 싸움을 벌여온 이들이 모두 세상을 떠난 사실을 이날에야 알았다. “같이 이렇게 살아서 봤더라면 마음이 안 아플 텐데, 나 혼자라서 눈물 나고 슬프다.” 할아버지의 오열이 ‘지연된 정의’의 책임을 아프게 묻고 있다.

사실 몇 해만 앞서 재판이 이뤄졌어도, “한이 됐던 피멍울을 안은 채” 징한 세상을 하직하는 참혹은 막을 수 있었을 터이다. 그 천금 같은 ‘몇 해’를 지연시킨 것이 박근혜 정권의 무도한 국가폭력이다. ‘박근혜 청와대’와 ‘양승태 대법원’이 재판 연기와 법관 해외파견 자리를 맞바꿔 거래 대상으로 삼는 바람에 대법원 판결이 지체되었다는 야만이 드러나고 있다.

대법원이 아무런 행동을 하지 않으면서 무려 5년을 흘려보낸 동안 20여년을 힘들게 싸워온 피해자 할아버지들은 하나둘 세상을 떠났다. 2012년 대법원 판결 당시 강제동원 피해자 신고건수는 15만건에 달했다. 이들 소송 당사자들도 대부분 세상을 떠났고, 신규 소송은 원천적으로 봉쇄당했다. 강제동원 피해자들이 살아 있는 동안에 법적 구제를 받을 수 없다면 정의가 세워진들 무엇하랴. 현재 남아 있는 10여건의 강제징용 재판에도 속도를 내야 한다. 이제 지연된 정의라도 하루속히 세워야 한다. 지금도 아픔을 치유하기에는 너무 늦었다.

<양권모 논설위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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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제강점기 강제징용 피해자들이 일본 기업을 상대로 낸 손해배상 청구소송이 13년8개월 만에 피해자들의 승소로 마무리됐다. 대법원 전원합의체는 30일 이춘식씨 등 4명이 신일철주금(구 일본제철)을 상대로 낸 손배소송 재상고심에서 “신일철주금은 이씨 등에게 각 1억원을 지급하라”고 판결한 원심을 확정했다. 일제강점기 형성된 법률관계 중 대한민국 헌법정신에 부합하지 않는 것은 효력이 없음을 선언한 판결로, 역사적 의미가 크다. 먼 이국땅에서 강제노동에 시달려야 했던 피해자와 후손들의 원통함을 풀 수 있는 길이 열린 것도 다행이다. 그러나 사법농단으로 확정 판결이 5년이나 미뤄진 것은 유감스럽다. ‘지연된 정의는 정의가 아니다’라는 법언(法諺)을 떠올리지 않을 수 없다.

[김용민의 그림마당]2018년 10월 31일 (출처:경향신문DB)

이번 사건의 핵심 쟁점은 두 가지였다. 우선 손해배상을 인정하지 않은 일본 판결의 국내 효력을 인정할 수 있는지 여부다. 전원합의체는 “일본 법원의 판결이 대한민국의 선량한 풍속이나 사회질서에 어긋난다는 원심 판단은 타당하다”고 밝혔다. 일제의 한반도 식민지배가 합법적임을 전제로 내려진 일본 판결은 국내 효력을 인정할 수 없다는 취지다. 2012년 이 사건 첫 상고심을 담당한 대법원 제1부도 “일본 판결은 일제강점기의 강제동원 자체를 불법이라고 보는 우리 헌법의 핵심 가치와 정면충돌한다”며 피해자들의 손을 들어준 바 있다. 또 다른 쟁점은 1965년 체결된 한일청구권협정으로 피해자들의 청구권이 소멸됐다고 볼 수 있는지다. 대법원은 “청구권협정은 일본의 불법적 식민지배에 대한 배상 청구를 위한 협상이 아니라 양국 간 재정적·민사적 채권·채무 관계를 정치적 합의로 해결하기 위한 것이었다”며 피해자들의 개인 청구권을 인정했다.

“마침내 이겼다” 일제 강제징용 피해자들이 신일철주금(구 일본제철)을 상대로 제기한 손해배상 청구 소송이 13년 만에 대법원에서 원고 승소로 최종 확정된 30일 서울 서초구 대법원 청사에서 원고 4명 중 유일하게 생존한 이춘식씨가 소감을 밝히면서 눈물을 흘리고 있다. 왼쪽은 강제징용 피해자인 고 김규수씨의 부인 최정호씨. 이준헌 기자 ifwedont@kyunghyang.com

참으로 안타까운 것은 주권국가로서 지극히 온당한 결론을 내리는 데 너무 오랜 시간이 걸린 점이다. 2012년 대법원이 원고승소 취지로 파기 환송한 뒤 이듬해 서울고법은 “피고는 원고들에게 1억원씩 배상하라”고 판결했다. 그러나 피고 측의 재상고 이후 대법원은 별다른 이유 없이 심리를 미뤘다. 그사이 피해자 4명 중 3명이 세상을 떠났다. 선고공판에 나온 유일한 생존자 이춘식씨(94)는 “혼자라 슬프다”며 오열했다고 한다. 심리 지연 배경은 사법농단 수사를 통해 드러났다. 박근혜 정권과 ‘양승태 대법원’이 재판 연기와 법관 해외파견을 맞바꾼 정황이 확인된 것이다. 뒤늦게 결론이 내려지기는 했으나, 이 사건은 사법 역사에 치욕으로 기록될 것이다. 재판거래 의혹에 연루된 법관들은 수사에 협조함으로써 속죄해야 옳다. 이번 사건과 유사한 강제징용 손배 소송을 심리 중인 법원들은 대법원 판례에 따라 신속하게 재판을 진행하기 바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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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7일 구속된 전 법원행정처 차장 임종헌에 대한 구속영장에는 ‘양승태 대법원’ 당시 법원행정처가 더불어민주당 의원인 유동수의 2심 재판 전략을 짜줬다는 혐의가 적혀 있다. 유동수는 1심에서 당선무효형에 해당되는 벌금 300만원을 선고받았다. 2심에서 벌금 90만원이 나와 의원직을 유지했다. 특허 무효제도를 도입하려던 특허청장을 국정감사장에서 혼내달라는 요청을 유동수가 수행한 대가로 법원행정처가 재판 전략을 써 제공한 것이다.

임종헌은 상고법원 법안을 발의한 자유한국당 의원 홍일표에게도 ‘법률 서비스’를 제공했다. 정치자금법 위반 혐의와 관련해 검찰 수사를 받을 때 임종헌이 법원행정처 양형위원회 판사에게 대응 전략을 짜주라고 지시한 혐의도 영장에 적혔다. 사법농단 사태에서 다시 확인한 건 ‘양승태 대법원’이 전방위로 ‘대형 로펌’ 역할을 수행했다는 점이다.

[김용민의 그림마당]2018년10월30일 (출처:경향신문DB)

임종헌이 2015년 11월 작성한 ‘상고법원의 성공적 입법추진을 위한 BH와의 효과적 협상추진 전략’ 문건엔 스스로 이익집단이 되거나 이익집단 대변자를 자처하는 대법원의 자기 선언이 들어 있다. 임종헌은 청와대의 비협조로 상고법원 도입이 좌절되면 “사법부로서도 더 이상 BH(청와대)와 원만한 유대관계를 유지할 명분과 이유가 없다는 점을 명확히 고지해야 함”이라고 썼다. “법이 언제나 판매 대상이며, 대체로 최고가격을 제시한 입찰자의 편에 선다”(미국 법학자 프레드 로렐)는 진단에 부합한다. 최고가격(상고법원 도입)을 내놓지 않는다면, 편들지 않겠다는 ‘결연한 의지’를 이 문건에서 읽었다.

임종헌은 청와대 비협조를 쓴 대목의 ‘BH 국정운영기조를 고려하지 않는 독립적, 독자적 사법권행사 의지표명’ 제목 앞에 ‘압박카드’라 적고 꺾쇠 부호로 감쌌다. ‘양승태 대법원’에 사법부 독립은 그 어떤 경우에도 지켜야 할 절대 가치가 아니라 집단 이익을 위해서는 취하거나 버릴 수 있는 카드였다.

자본의 이익에 복무하며 ‘사법 상인’으로도 불리는 대형 로펌의 속성을 ‘양승태 대법원’에서도 확인한다. ‘양승태 대법원’ 당시 기획조정심의관이자 현 울산지법 부장판사인 정다주가 임종헌 지시로 작성한 ‘정부운영에 대한 사법부의 협력 사례’엔 KTX 승무원 사건, 콜텍·쌍용차 정리해고 사건, 철도노조 파업 사건에서 사측 편을 든 사례가 ‘노동개혁에 기여할 수 있는 판결’로 올랐다. 항소심을 뒤엎은 대법원 판결로 KTX 승무원 한 명이 스스로 목숨을 끊었다. 2014년 11월 대법원이 “해고는 무효” 판결을 파기하지 않았다면, 쌍용차 노동자와 그 가족의 27·28·29·30번째 죽음은 없었을지 모른다.

바른미래당 의원 채이배가 최근 내놓은 <사법농단 의혹 사건 인명 사전> 발간사 첫머리에 한 말은 “지난 20년간 재벌개혁 운동을 해 오면서 도저히 이해할 수 없었던 부분 중 하나가, 우리 사법부가 유난히 재벌 총수에게 관대하다”이다. 사법부가 노동조합 위원장 관련 재판에서 ‘산업역군’의 대표로 경제발전에 이바지한 점을 고려해 관대하게 선처한 사례를 들은 적이 없다.

사법농단은 조직 이기주의를 넘어 한국 사회의 뿌리 깊은 정경유착과 유전무죄 이데올로기에 맞닿아 있다. 삼성전자 부회장 이재용과 롯데그룹 회장 신동빈이 항소심에서 집행유예로 풀려난 데서 세상을 지배하는 현실의 법칙, 경제·사회적 토대는 쉽게 바뀌지 않는다는 걸 깨닫는다.

로펌은 입법·행정부와 공공기관에서도 찾을 수 있다. 정의당은 삼성전자 기흥공장 이산화탄소 누출사고와 삼성전자서비스 노조 와해 사건, 가습기 살균제 사건을 두고 이재용과 SK 회장 최태원 등 총수를 증인으로 불렀지만 여당과 다른 야당의 합의로 무산됐다. 박근혜 정권 때 재벌 비판에 앞장섰던 여당은 이번 국감에서 재벌 방패막이로 나섰다. 재벌개혁 목소리는 사라지고, 그 빈자리에 ‘일자리 창출’과 ‘경제발전’ 명목의 ‘기업 살리기’가 부활했다.

‘양승태 대법원’을 대형 로펌에 비유했지만, 대형 로펌은 불법·범죄 행위를 변호할 뿐, 스스로 범죄와 불법의 주체로 나서는 건 아니다. 임종헌 구속은 ‘양승태 대법원’의 불법과 범죄를 처벌하는 출발점으로 이어져야 한다. ‘양승태 대법원’ 단죄로 끝날 일은 아니다. ‘관료화’ ‘엘리트주의’ ‘전관예우’ ‘유전무죄’의 사법 불신을 구조적·제도적으로 개혁하는 일이 남아 있다. ‘촛불’ 이후 소수의 사법·행정 관료와 재벌, 기득권 정치세력·언론이 그들의 이익을 위해 다수의 시민·노동자를 지배하는 체제 문제를 청산했는지도 되돌아볼 때다.

29일은 민주공화국을 기치로 박근혜 퇴진에 나선 촛불집회 2주년이 되는 날이다.

<김종목 사회부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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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양승태 대법원’의 사법농단 의혹을 수사 중인 검찰이 임종헌 전 법원행정처(이하 행정처) 차장에게 오는 15일 피의자 신분으로 출석해 조사받으라고 통보했다. 임 전 차장은 양승태 전 대법원장 재임 중 행정처 기획조정실장과 차장을 역임하며 재판거래·법관사찰의 실무 책임자 역할을 한, 사법농단의 핵심 인물이다. 임 전 차장의 검찰 소환은 지지부진하던 사법농단 수사가 정점으로 향하고 있음을 의미한다. 그의 진술 여하에 따라 양 전 대법원장 및 차한성·박병대·고영한 전 행정처장 등 옛 대법원 수뇌부의 소환 시기와 신병처리 방향이 결정될 가능성이 크다.

[김용민의 그림마당]2018년10월12일 (출처: 경향신문DB)

임 전 차장의 혐의는 일일이 나열하기 어려울 정도이다. 대표적인 것이 일제 강제동원 피해자들이 전범기업을 상대로 낸 민사소송과 전교조 법외노조 효력 집행정지를 둘러싼 행정소송에 개입했다는 의혹이다. 2016년 당시 박근혜 대통령이 탄핵 위기에 몰리자 직권남용죄 법리검토를 해준 혐의도 받고 있다. 이밖에도 사법농단 관련 문서들을 작성한 전·현직 법관 대다수가 임 전 차장 지시로 보고서를 썼다는 취지로 진술했다고 한다. 검찰은 압수수색 과정에서 사법농단 의혹 문건 수천건이 담긴 이동식저장장치(USB)를 확보해 수사를 벌여왔다.

검찰이 이미 확보한 진술과 문건 등으로 미뤄볼 때 임 전 차장에 대한 기소는 불가피하다고 본다. 그러나 임 전 차장은 실무 책임자에 불과하다. 주지하다시피 헌정사상 유례없는 사법농단의 ‘몸통’이자 총책임자는 양 전 대법원장이다. 임 전 차장 소환 조사는 양 전 대법원장 조사로 가는 길목일 뿐이다. 검찰은 수사의 고삐를 조여 진상규명과 책임자 처벌을 앞당겨야 한다.

대법원 국정감사에서 ‘방탄판사단’이라는 비판까지 들은 서울중앙지법 영장전담판사들은 양 전 대법원장의 주거지에 대한 압수수색영장을 네 차례나 기각했다. 네 번째 기각 사유는 “주거, 사생활의 비밀 등에 대한 기본권 보장”이었다. 사법농단으로 수많은 사람들이 기본권을 침해당했고 심지어 목숨을 끊은 이까지 있는데, 판사들 눈에는 오로지 전직 대법원장의 기본권만 보이는가. 법원이 양승태로 상징되는 ‘앙시앵 레짐’을 비호할수록 특별재판부 구성이나 사법농단 연루 법관들에 대한 탄핵 요구만 높아질 것이다. 법원이 임 전 차장 선에서 꼬리를 자르는 것으로 사태가 마무리될 거라 여긴다면 오산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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검찰개혁에 이어 법원개혁에 대한 국민 여망이 뜨겁다. 법원이 사법개혁 귀착지라는 점에서 당연한 수순으로 보이지만 사법부 스스로 자초했다는 점에 그 심각성이 있다.

끊임없이 검찰개혁이 논의되고 있는 사이에 양승태 대법원은 상고법원 도입에 총력을 쏟았다. 현직 법관이 입법 로비를 위해 국회에서 살다시피 했다는 말도 들린다. 이것이 사실이라면 일찍이 몽테스키외 이래로 정립된 삼권분립의 근간을 해치는 행위에 가깝다.

법관 사찰, 재판거래 의혹, 법원비리 수사 기밀 유출 및 비자금 조성 사건 등의 실체가 속속 드러나고 있다. 그 모습이 기업의 행태와 흡사하다. 자신을 지켜줄 것이라 믿었던 마지막 보루가 무너지고 있음을 보는 국민들은 참담한 심경에서 헤어나지 못하고 있다.

[김용민의 그림마당]2018년9월4일 (출처:경향신문DB)

법관이 누구던가. 검은 천으로 두 눈을 가린 채 인간의 잘잘못을 가리고자 했던 정의의 여신 디케의 화신에 다름없다. 두 눈으로 정면을 응시하는 대법원 현관의 디케상은 우리가 알고 있는 그런 상이 아니다. 혹 이러한 변형된 상에서 나온 정의 관념이 오늘날 사법부의 암울한 현실을 초래한 건 아닌지 상상이 꼬리를 문다.

민초들은 비록 팍팍한 삶을 살아가지만 그래도 이 사회에 한 가닥 정의가 살아있으리라는 믿음이 있었다. 그런데 최근 드러난 사법농단은 보통사람들이 가진 일말의 기대감마저 무너뜨렸다. 이는 우리 사회의 정신적 안전망의 파괴로 이어진다는 점에서 매우 심각한 문제다. 법정에서 더 이상 보편타당한 재판을 기대하기 어렵다면 사법부(司法府)는 사법부(死法府)에 지나지 않는다.

한편 이를 단순히 사법부만의 문제에 국한된 것이라고 생각하면 오산이다. 이야말로 헌법이 보장한 국민주권주의에 대한 커다란 위협이다. 우리는 대한민국의 주권이 국민에게 있고 모든 권력은 국민으로부터 나온다는 헌법 가치에 확고한 믿음을 가져왔고 또 자랑스러워해 왔다. 그런데 정작 이를 수호해야 할 법원은 모든 권력이 재판으로부터 나온다고 여겼던 것은 아닌지 의구심이 든다.

김명수 대법원이 들어선 지 1년이 되었다. 이번 기회에 사법의 이름으로 자행되는 온갖 불법행위들을 걷어내야 한다. 적폐청산 작업에 대해 내부 저항이 있음도 간간이 흘러나오고 있다. 실로 외부의 적보다 내부의 적이 더 무서운 것임을 안다면 개혁작업이 생각대로 쉽지만은 않을 것이다.

하지만 어떤 이유에서든 자체 개혁이 지지부진하면 결국 국민이 나설 수밖에 없음을 알아야 한다. 따라서 하루빨리 법원을 헌법이 정한 제자리로 갖다놓는 것이 필요하다. 그리하여 국민들의 허탈감을 치유해 주는 동시에 묵묵히 정의를 좇아 일하는 대다수 법관들의 자긍심을 고취시켜 주어야 할 것이다.

올해는 법원 70돌을 맞는 뜻깊은 해다. 그에 걸맞게 사법부 내부의 적폐를 도려내라는 국민들의 목소리도 유례없이 높다. 가뜩이나 보수적이라는 평가를 받는 사법부이기에 그 길이 험난한 것임을 잘 알고 있다. 그렇기에 오히려 김 대법원장 체제에 거는 기대가 크다. 분명한 것은 국민들이 김 대법원장의 사법부를 신뢰하고 있으며 법원 제자리 찾기 시도를 적극 지지하고 있다는 사실이다.

지금 이 순간에도 국민들은 디케를 향해 끊임없이 묻는다. 우리가 경험하고 있는 이게 사법인가를.

<최영승 | 대한법무사협회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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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양승태 대법원’이 상고법원 추진에 필요한 비용을 조달하기 위해 비자금을 조성한 정황이 포착됐다. 검찰은 2015년 대법원이 허위 증빙서류를 꾸며 일선 법원의 예산 수억원을 빼돌린 뒤 유용한 단서를 잡고 수사 중이라고 4일 밝혔다. 당시 법원행정처는 이 돈을 상고법원 추진에 나선 고위 법관들에게 대외활동비·격려금 등의 명목으로 지급했다고 한다. 비자금 조성을 엄단해야 할 대법원이 비자금을 조성했다니 말문이 막힐 따름이다. 법원이 범죄자들을 재판하는 과정에서 범죄의 기술을 익힌 것인가. ‘양승태 사법농단’의 끝은 도대체 어디인가.

[김용민의 그림마당]2018년9월5일 (출처:경향신문DB)

법원의 행태는 건설회사 등의 비자금 조성 양태와 다를 게 없다. 2015년 당시 행정처는 각급 법원 공보관실 운영비를 현금으로 인출한 뒤 비밀리에 인편으로 건네받아 행정처 예산담당관실 금고에 보관했다고 한다. 검찰 관계자는 “법원 재무담당자들이 한 번에 얼마 이상 지출하면 안되기 때문에, 소액으로 나눠 뽑아 대법원에 전달했다”고 말했다. 각급 법원 공보관실 운영비는 2015년 처음으로 책정됐다. 검찰은 행정처가 애초부터 비자금 조성을 목적으로 신규 예산을 편성한 것 아닌지 의심하고 있다.

양승태 사법농단을 둘러싼 의혹은 양파 껍질 까지듯 연일 보태지고 있다. 당초 판사 블랙리스트 의혹에서 출발했다가 재판거래 의혹으로 비화했고, 이제는 국고손실 혐의까지 포착됐다. 과거 공공 부문에서 수많은 횡령 범죄가 있었지만, 법원이 조직적으로 예산을 횡령한 의혹이 불거진 것은 처음이다. 당시 대법원 예산 담당자는 검찰에서 “윗선 지시에 따른 것”이라고 진술했다고 한다. 사안의 엄중함에 비춰볼 때, 그가 언급한 ‘윗선’이 행정처 차장 수준일 리는 만무하다. 당시 행정처장(박병대)과 대법원장(양승태)이 지시했거나 최소한 보고받았을 가능성이 높다고 본다. 양 전 대법원장과 박 전 행정처장은 물론 예산을 지급받은 법관도 모두 불러 사용처를 조사해야 한다. 법원 예산이 법관들의 호주머니를 거쳐 어디로 흘러갔는지 밝혀내야 한다.

사법농단 사태는 ‘선출되지 않은 권력’에 대한 견제가 절실함을 웅변한다. 검찰의 수사와 별개로 법원의 개혁작업도 진행돼야 한다. 현 행정처는 지난 3일 사법농단 재발을 막기 위한 제도개선 작업 경과를 공개했으나, 내부에만 맡겨놓을 일이 아니다. 시민이 참여하는 개혁이 필요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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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는 법원의 예언자였을까. “한 고위 법관은 ‘양 후보자가 조직 장악력이 뛰어나 사법행정을 통해 재판에 영향을 줄 우려도 있다’고 말했다”(한겨레 2011년 8월19일자). ‘양 후보자’는 기사 게재 전날 대법원장으로 지명된 양승태 변호사를 가리킨다. 우려는 적중했다. 이제 양승태라는 이름 뒤에는 사법농단이란 문구가 따라다닌다.

그런데 사법농단이 적확한 표현일까. 군이 적을 향해 겨눠야 할 총부리를 시민에게 돌렸다면? 군사쿠데타라 부른다. 법관이 사실과 증거 대신 권력의 입맛에 따라 재판을 했거나 계획을 세웠다면? 사법쿠데타라 불러야 하지 않을까. 심한 표현이라는 시각이 있겠다. 사람이 죽었다. 양승태 대법원이 1·2심 판결을 깨고 KTX 승무원들의 복직 길을 막아서자 세 살배기 딸을 둔 해고자가 목숨을 끊었다. 양승태 대법원이 2심 판결을 깨고 “쌍용차 정리해고가 정당하다”고 판결한 이후 노동자 5명이 세상을 떴다.

[김용민의 그림마당]2018년7월27일 (출처:경향신문DB)

국군기무사령부의 ‘계엄령 문건’ 진상규명을 위해 군·검 합동수사단이 구성됐다. 시민은 국회 국방위원회를 통해 기무사의 실상을 목격했다. 문재인 대통령도 세 차례나 문건 관련 메시지를 내놓았다. 양승태 사법농단을 두고도 검찰 수사팀이 꾸려지긴 했다. 그뿐이다. 대법관과 법원장들은 태연히 재판거래 의혹을 부인한다. 김명수 대법원장이 수사 협조를 약속했으나, 자료를 내놔야 할 법원행정처는 요지부동이다. 양승태 체제에 순치된 일부 판사들은 사실상 ‘관선변호인’ 노릇을 하고 있다. 국회는 법사위를 열었지만 안철상 행정처장의 “재판거래를 인정할 정황을 발견하지 못했다”는 답변을 듣는 데 그쳤다. 청와대는 언급을 삼간다. 삼권분립이란 헌법정신 때문이다.

법원은 이를 틈타 치외법권지대가 되어가고 있다. 최근 사법농단 수사팀은 17건의 압수수색영장(e메일 보전조치 영장 포함)을 청구했다. 발부된 것은 임종헌 전 행정처 차장에 대한 2건뿐이다. 발부율은 11.76%다. 지난 1~6월 서울중앙지법의 압수수색영장 발부율은 80.85%(법원통계월보)였다.

기각 이유를 살펴보자. 현직 대법관 연루 정황까지 제기된 부산 법조비리 은폐 의혹 사례다. 검찰은 행정처 윤리감사관실·인사심의관실 및 문모 전 판사의 사무실, 현기환 전 정무수석(구속 중)의 구치소 등에 대한 압수수색영장을 청구했다. 법원은 ①윤리감사관실의 경우 “임의제출 가능성”이 있고 ②인사심의관실 자료는 “국가 중대 이익과 관련된 공무상 비밀에 해당할 여지”가 있으며 ③문 전 판사 건은 “별건수사”이고 ④현 전 수석 수감실은 “증거물이 남아 있을 가능성이 없다”며 기각했다. 그러나 ①행정처는 윤리감사관실 자료 제출 계획이 없다고 밝혔으며 ②법관 인사자료를 내준다고 국익이 훼손된다는 건 논리적 근거가 약하다. ③과 ④는 더 군색하다. ③절도범 쫓다가 살인범 목격하면 외면해야 하나. ④원세훈 전 국가정보원장 구치소에 대한 압수수색은 왜 허락했나.

양승태 체제를 옹호하는 일부 법관들은 시민의 합리적 의심을 일축한다. 우리가 위법이 아니라면 아닌 거다, 우리는 사법발전을 위해 노력한 것뿐이다…. 양 전 대법원장이 상고법원(대법원 상고심 사건 중 단순한 사건만 별도로 맡는 법원) 도입에 욕심을 냈다는 사실은 잘 알려져 있다. 하지만 그뿐이 아니었다. 검찰이 확보한 문건들을 보면, 양승태 대법원은 ‘법관의 해외공관 파견’과 ‘고위 법관의 외국 방문 시 의전’ 같은 사안까지 알뜰히 챙긴 것으로 드러나고 있다. 행정처의 재판개입 시도가 상고법원 도입이라는 사법정책적 목표 외에 극소수 엘리트 판사들의 ‘복지 증진’ 차원에서도 이뤄졌을 가능성을 시사한다. 낯부끄러워서라도 법복을 벗어던지는 고위 법관 한 사람쯤 나와야 옳다. 과도한 기대인가.

재판거래 의혹의 피해자인 김승하 철도노조 KTX열차승무지부장은 “수사 대상자들이 법원에 남아 스스로를 변호하는 상황”이라고 비판했다. 김 지부장의 말처럼 피의자 혹은 잠재적 피의자들이 수사를 방해하는 상황을 더 이상은 용납할 수 없다. 영장심사는 물론 기소 후 재판 과정에서도 공정성을 담보할 장치가 절실하다. 더불어민주당 박주민 의원은 사법농단 책임자 처벌과 피해자 구제를 위한 법안 2건을 발의할 예정이다. 전자는 시민사회가 참여하는 추천위원회를 설치해 여기서 추천된 판사들로 ‘특별재판부’를 구성하는 내용을 담고 있다. 후자는 재심사유를 확대해 사법농단 피해자들이 구제받을 길을 넓혀주는 법안이다. 이제 국회가 적극 나서 신속하게 입법해야 한다. 법원은 현대판 ‘소도(蘇塗·삼한시대 죄인이 도피해도 잡지 않았던 신성지역)’가 아니다.

<김민아 논설위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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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한민국 대표 노동변호사’가 대법관이 됐다. 국회는 26일 본회의를 열어 김선수 변호사 등 대법관 후보자 3명에 대한 임명동의안을 통과시켰다. 김 변호사는 다른 두 후보자와 달리 판검사를 거치지 않은 순수 재야 출신이다. 2015년부터 줄곧 대한변호사협회 추천으로 대법관 후보군에 올랐지만 번번이 대법원 문턱에서 좌절하다 이번에 마침내 입성했다. ‘대법관 김선수’의 등장이 대법원에 새로운 바람을 몰고 올 것으로 기대한다.

김선수 대법관 후보자가 23일 국회에서 열린 인사청문회에서 관계자와 이야기하고 있다. 권호욱 기자

대법원의 주류는 고위 엘리트 법관이다. 이들은 대부분 사법연수원 수료 후 곧바로 법관이 되고 기록을 통해 세상을 보아온 사람들이다. 적지 않은 대법원 판결이 기계적 법리 해석에 치우치고, 다원화된 가치와 시각을 반영하는 데 실패해온 까닭이 여기에 있다. 김 변호사는 기존 대법관들과는 사뭇 다른 삶을 살아왔다. 사법시험에 수석합격하고도 판검사를 택하지 않았다. <전태일 평전>을 쓴 고 조영래 변호사의 법률사무소에 합류한 이후 30년간 노동·인권 변호사의 외길을 걸었다. 골프장 보조원(캐디) 노조 설립, 서울대병원 노동자 법정수당, 공무원노조 창립 등 주요 노동사건이 있는 곳에 그가 있었다. 기록이 아닌 현장 경험을 통해 노동자를 이해하고 노동사건을 바라보는 대법관이 탄생하게 된 것이다.

자유한국당은 국회 인사청문 과정에서 김 변호사가 민주사회를위한변호사모임(민변) 회장을 지내고 통합진보당 해산심판 사건을 변론했다는 등의 이유로 반대했다. 김 변호사는 “대법관으로 사는 삶은 민변과의 관계를 단절하는 데서 출발해야만 할 것”이라며 “민변이 국가보안법 폐지를 요구하더라도 대법관은 현행 국가보안법을 전제로 판결할 수밖에 없다”고 했다. 그럼에도 한국당은 끝까지 청문보고서 채택에 동의하지 않고 퇴장했다. ‘다른 생각’을 조금도 허용하지 않겠다는 옹졸함이 딱할 뿐이다.

‘양승태 대법원’의 재판거래·법관사찰 의혹이 불거지며 법원에 대한 주권자의 신뢰가 나락으로 떨어진 상태이다. 분쟁의 최후 종결자여야 할 대법원이 외려 분쟁을 야기하는 어처구니없는 풍경이 벌어지고 있다. ‘대법관 김선수’의 등장이 실추된 사법 신뢰를 회복하는 하나의 전기로 작용하기를 바란다. 향후 이뤄질 대법관·헌법재판관 인선에서도 ‘인적 구성의 다양성 확보’라는 가치가 충실히 구현돼야 함은 물론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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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양승태 대법원’의 재판거래·법관사찰 의혹을 수사 중인 검찰이 양승태 전 대법원장과 박병대 전 법원행정처장(전 대법관)에 대해 출국금지 조치를 취했다. 앞서 임종헌 전 행정처 차장을 출국금지한 검찰은 두 사람이 재임 당시 임 전 차장의 ‘윗선’으로 사법행정권 남용과 관련된 각종 조치를 지시하거나 보고받은 혐의가 있는 것으로 보고 있다. 전직 대법원장·대법관에 대한 출금 조치는 극히 이례적이다. 법원이 두 사람에 대한 압수수색영장을 기각하자, 검찰 자체적으로 강수를 둔 것으로 본다.

대법원은 인권과 정의의 최후 보루이며, 대법원장은 그 수장이자 표상이다. 전직 대법원장이 재임기간 권력을 남용한 혐의로 출금된 것은 사법부의 불행이고 수치다. 물론 모두 본인이 자초한 일이다. 고구마 줄기 캐듯 쏟아지는 의혹들은 사법행정권 남용 행태가 얼마나 광범위했는지 보여준다. 경향신문 보도를 보면, 양 전 대법원장 재임 시절 행정처는 전·현직 판사가 연루된 법조비리 수사상황을 보고받고, 방상훈 조선일보 사장 사돈의 형사재판 상황을 관리했다고 한다. 대법원 재판예규에 어긋나는 행태로 직권남용이나 공무상 비밀누설이 될 소지가 짙다.

양승태 전 대법원장 (출처:경향신문 자료사진)

사법농단의 정황이 연일 보태지는데도 법원이 요지부동인 것은 유감스럽다. 검찰 관계자는 “자료제출 범위와 관련해 법원과의 입장 차가 크다. 저희가 필요하다고 한 것의 아주 일부만 주고 있다”고 말했다. 행정처 내에서도 기획조정실 외에 사법정책실·인사총괄심의관실 등의 하드디스크는 접근조차 못하게 한다는 것이다. 사법정책실은 상고법원 추진 주무부서이며, 인사총괄심의관실은 대법원이 특정 법관들을 사찰한 후 인사상 불이익을 가했다는 의혹과 관련된 부서다. 기조실 자료는 내놓고 다른 부서 자료는 못 내놓겠다는 것은 수사를 거부하겠다는 말이나 마찬가지다.

지난 23일 열린 전국법관대표회의는 사법농단 관련 문건 410건 중 아직 공개되지 않은 228건을 공개해야 한다고 의결했다. 진상규명에 미온적 태도를 보이고 있는 법원행정처에 대한 우회적 반발로 해석된다. 전국법관대표회의는 사법관료화에 대한 반성으로 상설화한 법원 내 공식 기구다. 김명수 대법원장은 사법의 개혁과 독립을 갈망하는 법관들의 기대에 부응해야 한다. 문건 전면 공개와 자료 제출 협조는 그 시작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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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양승태 대법원’의 재판거래·법관사찰 의혹을 수사 중인 검찰이 강제수사에 돌입했다. 서울중앙지검은 지난 21일 임종헌 전 법원행정처 차장의 자택과 사무실을 압수수색해 임 전 차장이 은닉한 자료를 확보했다. 검찰은 그러나 양승태 전 대법원장과 박병대 전 법원행정처장 등에 대한 압수수색에는 실패했다. 법원이 임 전 차장에 대한 압수수색영장만 발부하고 나머지는 모두 기각했기 때문이다. 수사 차질을 우려하지 않을 수 없다.

[김용민의 그림마당]2018년 7월 23일 (출처:경향신문DB)

압수수색은 강제수사의 기초단계이며, 인신 구속을 요하지 않는다. 따라서 혐의 일부라도 소명되면 영장을 발부해온 것이 관행이다. 영장을 기각한 서울중앙지법 영장전담 부장판사는 ‘주거권을 침해할 만큼 혐의가 소명되지 않았다’고 밝혔다. 기각 사유가 사태의 심각성과 동떨어진 데다, 담당 판사의 이력도 석연치 않다. 해당 판사는 영장이 청구됐던 박 전 처장이 서울고법 부장판사를 할 때 배석판사를 지냈다. 서울중앙지법은 “함께 근무한 경력은 형사소송법상 재판 회피 사유가 아니다”라며 문제가 없다는 입장이다. 하지만 언론에서 이미 해당 판사와 박 전 처장의 관계를 들어 공정성 논란 가능성을 보도한 터다. 법원에서 지시하든, 본인이 선택하든 영장심사를 다른 영장전담 판사에게 넘기는 것이 옳았다.

애당초 검찰이 강제수사에 착수한 것도 법원이 자초한 측면이 크다. 김명수 대법원장은 수사에 적극 협조하겠다고 했으나, 이후 대법원의 행태는 약속과 달랐다. 폐기되지 않은 임 전 차장 등의 컴퓨터 하드디스크 제출을 거부하고, 자의적 기준으로 선별한 파일만 검찰에 냈다. 양 전 대법원장의 하드디스크 데이터가 디가우징으로 영구 삭제된 사실도 드러났다. 비판 여론이 높아지자 법원 내에서 자료를 열람한 뒤 복제하는 일은 허용했다. 하지만 검찰은 법원 컴퓨터에서 의심스러운 문서를 발견하고도 여전히 법원의 거부로 반출하지 못하고 있다고 한다.

김 대법원장은 왜 자신의 약속이 지켜지지 않는지, 지금 ‘김명수 코트(court)’에서 무슨 일이 벌어지고 있는지 직시하기 바란다. 사법부의 신뢰 회복은 말이 아닌 행동으로만 가능하다. ‘제 식구 감싸기’로는 시민의 분노만 키울 뿐이다. 법원이 검찰 수사에 계속 협조하지 않는다면, 국회가 나설 수밖에 없다. 특별법 제정을 통해 사법농단 사태 특별재판부를 구성하는 방안을 검토할 필요가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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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양승태 대법원’이 상고법원 도입을 위해 ‘박근혜 청와대’를 상대로 로비한 구체적 정황이 드러나고 있다. 양 전 대법원장 재임 당시 법원행정처는 대법원장과 대통령의 독대 자리를 마련하기 위해 친박근혜계 핵심인사와 접촉하고, 국정 협조를 약속하는 별도 자료까지 건넸다고 한다. 이후 청와대에서 이뤄진 박근혜·양승태 회동은 이 같은 로비의 결과물일 공산이 크다. 양측의 유착 정황은 사법농단의 핵심인 재판거래 의혹이 사실일 가능성을 짙게 한다.

경향신문 취재 결과에 따르면, 2015년 6월 임종헌 전 법원행정처 차장은 서울의 한 식당에서 친박계 핵심인 이정현 의원을 만났다고 한다. 임 전 차장은 이 의원에게 ‘창조경제정책에 협조할 테니 상고법원 설치를 도와달라’는 요청을 했다. 이 의원은 그 자리에서 ‘문고리 3인방’ 일원인 정호성 당시 청와대 부속비서관에게 전화해 양 전 대법원장과 박 전 대통령 간 독대 일정을 잡아달라고 했다. 법원행정처는 며칠 후 기획심의관을 이 의원 사무실에 보내 ‘사법한류를 통해 창조경제정책에 협조하겠다’는 자료까지 전달했다. 그로부터 두 달 후인 8월6일 양 전 대법원장은 청와대에서 박 전 대통령과 오찬 회동을 했다.

지난 5일 서울 종로구 세종문화회관 앞에서 양승태 전 대법원장 재임 시절 이뤄진 ‘사법농단’ 때문에 부당한 판결을 받았다고 주장하는 피해자들이 양 전 대법원장의 가면을 쓰고 책임자 처벌을 요구하는 퍼포먼스를 펼치고 있다. 연합뉴스

우리가 박근혜·양승태 회동에 주목하는 것은 재판거래 의혹과의 연관성 때문이다. 2015년 7월 법원행정처가 작성한 ‘정부 운영에 대한 사법부의 협력 사례’ 문건에는 대법원이 심리 중이던 ‘발레오만도 노동조합 조직형태 변경 사건’이 등장한다. 문건은 이 사건의 결론에 따라 “향후 노동조합 운영방식 전반에 큰 파급력이 예상”된다고 썼다. 이 문건이 만들어진 직후 청와대 회동이 이뤄졌다. 그리고 2016년 2월 대법원 전원합의체는 노조 손을 들어준 원심 판결을 뒤집었다. 사용자에 대한 교섭력을 높이려 만든 ‘산업별 노조’ 소속 지부·지회를 과거의 ‘기업별 노조’로 쉽게 전환하는 길을 열어준 것이다.

양 전 대법원장은 지난달 기자회견에서 “(박 전 대통령과의 회동을 앞두고) 청와대와 (사전에) 교감을 나누지 않았다”고 밝혔다. 그러나 회동 성사를 위한 법원의 집요한 로비 행태에 비춰볼 때 그의 발언을 사실로 믿기는 어렵다. 양 전 대법원장과 임 전 차장 등 관련자들은 이제라도 모든 진실을 털어놓는 게 도리다. 검찰은 재판거래 의혹의 규명을 위해서라도 양승태 대법원과 박근혜 청와대의 커넥션을 낱낱이 파헤쳐야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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근대는 픽션, 즉 만들어진 사회이다. 정치학자 마루야마 마사오는 “비근대적 사회의식은 픽션에서 불안을 느끼지만, 근대정신은 픽션의 가치와 효용을 믿고 재생산한다”고 했다. 이렇게 근대를 구성하는 픽션의 정점에 헌법이 있다. 국가라는 거대한 픽션의 설계도이다. 군사정부의 성실한 마름이던 대법원이 공정하고 독립적인 사법부라는 서구적인 픽션을 갖춘 것은 역설적이게도 1987년이 계기다. 시민혁명의 대상은 세계적으로 역사적으로 정권과 법원이지만 6월항쟁은 법원에 손을 대지 않았고, 법원은 혁명에 무임승차했다. 어설픈 타협은 오랜 시간이 흘러서야 실체를 드러낸다. 전두환 정권 시절 청와대에서 근무한 판사가 이명박 정부 당시 대법관이 되고, 박종철 고문치사 사건에 관여한 검사가 박근혜 정부에서 대법관이 됐다.

[김용민의 그림마당]2018년7월2일 (출처:경향신문DB)

세상의 모든 픽션은 내러티브를 요구한다. 경험하지 않은 시간을 상상하고 공유하게 만들어 픽션을 강화하기 때문이다. 일본헌법이라면 일왕의 존재가, 한국헌법에는 임시정부의 시간이 있다. 독재정권에 협력한 사법부에 공정함이란 픽션을 제공한 내러티브는 우리법연구회라는 존재다. 1988년 취임한 노태우 대통령은 군사독재 시절 인물인 김용철 대법원장을 유임시키려 했다.(1982년 7월 문재인 사법연수생에게 판사임용 불가를 통보한 사람이 김용철 법원행정처장이다.) 6월15일 서울민사지방법원에 ‘새로운 대법원 구성에 즈음한 우리들의 견해’라는 문건이 돌며 서명운동이 시작됐다. 이들은 김용철에 반대했다. 이광범, 유남석, 김종훈, 한기택 등이 주축이었다. 이에 노태우 대통령은 김용철 대신 비슷한 정기승을 대법원장에 부쳐보지만 국회에서 부결된다. 2차 사법파동이고, 이 사건 주역들이 만든 모임이 우리법연구회다.

지난해 시작된 판사 블랙리스트 사건으로 공정한 사법부라는 픽션은 위기에 처했다. 우리가 믿어온 재판의 공정함이 실재가 아니라 믿음이라는 것을 자각하게 만들었다. 이 자리를 파고든 것이 ‘보수적인 양승태 대법원의 악행’ 때문이라는 소문이다. 얼마 전 어느 방송사에서 내게 전화를 걸어와 “ ‘양승태 대법원’과 ‘이용훈 대법원’ 시절 법원행정처 출신 판사들의 고등부장 승진율 자료를 달라”고 했다. 나는 “지난해 기사에서 양쪽 모두 100%라고 밝혔다”고 했지만 상대는 받아들이지 못했다. 그러면서 “그러면 양승태 전 대법원장이 상고법원을 추진한 이유가 퇴임 이후 변호사로서 돈을 벌기 위해서 아니냐”고 물었다. 어디서부터 얘기해야 할지 난감했다. 어느 언론사의 기자는 “상고법원을 추진한 사람은 모두 징계 대상이 아니냐”고도 했다.

양승태도, 상고법원도 악이 아니다. 대법관 12명이 연간 4만여건을 처리하는 상황은 바뀌어야 한다. 이를 위해 ‘이용훈 대법원’이 추진한 고등법원 상고부와 ‘양승태 대법원’이 추진한 상고법원이 다르지 않다. 변호사로 돈을 번 걸로 치면 양 전 대법원장이야말로 깨끗하다. 대법관을 마치고 하루도 변호사로 일하지 않다가 대법원장이 됐다. 그에 비해 이 전 대법원장은 대법관을 마치고 삼성 등의 사건을 맡아 거액을 챙기고 세금도 누락했다. 행정처의 관료화가 본격화한 것도 이용훈 대법원장 시절이다. 그런데도 눈앞의 상황을 보혁구도로 파악하는 것은 진실이 아닌 것은 물론이고, 1987년에 구축된 공정한 사법부라는 부당한 픽션을 재생산하는 것일 뿐이다. 문제는 양승태 개인이 아니라 관료화한 사법부 그 자체다.

재판거래 의혹을 비롯해 이번 사법행정권 남용 문건 작성자 상당수가 우리법연구회 회원이다. 여기에 몇 명 되지도 않는 행정처 심의관 숫자, 그보다 조금 많은 우리법연구회 회원 숫자를 생각하면 사법행정권 남용 사태는 우리법연구회가 주도했다고 말할 수 있다. 지금 검찰 손에 들어간 어마어마한 문건을 발견하고도 형사처벌이 어렵다는 결론을 적어 김명수 대법원장을 궁지로 몰아넣은 특별조사단에도 우리법연구회 회원이 있다. 끝이 아니다. 우리법연구회 초기 멤버들은 불법적인 문건을 작성한 후배 판사들을 만나 수사와 재판에 대비하고 있다. 보혁구도 같은 무책임한 상상으로는 이런 상황이 설명되지도, 부당한 픽션이 붕괴되지도 않는다.

엊그제 발표된 대법관 후보자를 두고 순수 변호사 출신이라서 의미가 있다거나, 우리법연구회 소속에 여성이라서 이번 사태에 도움이 될 것이라는 생각도 낡은 픽션을 바탕으로 한 것이다. 그런 식으로 보자면 오히려 지금까지 판례를 바꾸어온 주인공은 서·오·남(서울대, 50대, 남성)들이 더 많고, 반대로 사형제에 합헌 의견을 내거나 쌍용차 노동자를 일터에서 몰아낸 민변 회장과 여성 변호사 출신도 있다.

사법이라는 제도는 픽션이지만, 재판이라는 작용은 현실이다. 지금 당장은 제대로 된 대법관을 가려내는 것부터 해야 한다. 부당한 현실에 저항해온 자신만의 내러티브를 가진 대법관이 무너진 사법부를 살려낼 것이다.

<이범준 사법전문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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블랙리스트 사건은 이명박·박근혜·김기춘 등이 권력과 국민의 세금으로 전 장르에 걸쳐 문화예술계를 검열하여 인위적으로 판을 바꾸고, 이를 통해 전 국민에 대한 이데올로기 통제를 획책한 반헌법·반민주 국가범죄였다. 이 대규모 국가범죄는 청와대·국가정보원이 문화체육관광부 중·하위직과 산하 공공기관 사람들까지 부리고 동원했기에 가능했다. 김기춘과 전 문체부 장차관들은 처벌받고 있지만, 하위 실행자·부역자들은 대부분 자리를 지키고 있다.

지난주 ‘문화예술계 블랙리스트 진상조사위’는 전·현직 문체부 공무원과 산하기관 직원 130명에 대한 수사 또는 징계를 권고했다. 그러니까 ‘하수인’에 불과할 수 있는 공무원과 산하기관 직원까지 여럿 포함된 것이다. 이러한 단죄는 과도한 것일까?

촛불항쟁 전후에, ‘영혼 없는 공무원’으로 지목됐던 공무원들의 행위를 철학자 아렌트가 유태인 학살을 저지른 나치 하수인들을 통해 개념화한 ‘악의 평범성’으로 비판한 담론이 쏟아졌었다. ‘자기 생각’과 언어에 나태한 범상한 인간들이 최악의 범죄를 저질렀다는 것이다. 그러나 수백만 인간 학살에 연루된 전범들을 한국 공무원들에 비유하는 것에는 크게 공감하지 않는다. 사태의 맥락은 물론 죄의 경중에도 차이가 있기 때문이다.

그러나 ‘조직의 힘없는 을’로서 ‘생계를 잃을까봐 시키는 대로 했다’는 식의 변명도 다 믿지 않는다. ‘조직의 질서’와 ‘생계’는 언제나 누구에게나 좋은 알리바이 같지만, 그것이 우리가 사는 세상뿐 아니라 한국 공무원 사회의 진실 전체도 아닐 거라 생각한다. 연루된 하위직 공무원들이나 산하기관 직원들을 모두 처벌하는 일은 어렵다 해도, 어떤 식으로든 문제를 기록으로 남기고 고위직 연루자에게는 책임을 물어야 한다고 생각한다.

그래서 여기서 새삼 두 가지가 궁금하다. 첫째, 촛불과 정권교체 이후 한국 공무원들의 ‘영혼’은 어떻게 됐을까? 문재인 정부가 촛불정부를 자처한다지만, 공무원들의 보신주의와 복지부동 때문에 개혁이 더디다거나, ‘○○부 마피아’ 때문에 아무 일도 안된다는 말이 나 같은 서생에게도 들려온다. 공무원들은 정말 영혼을 어디 맡기고 다니는 듯 ‘정치’나 윗사람 앞에서 머리를 조아리지만 기실 5년짜리 정권 따위보다는 공무원 자신들의 조직과 신분보장 제도가 세고 질기다는 것을 잘 알고 있다는 것이다. 어느 부처 장관은 정권 출범 1년이 넘은 지금도 ‘공무원들을 움직여 일하게 하는 것이 내 숙제’라고 말하고 다닌다 한다. 이런 ‘숙제’는 어떻게 해야 할까? 문재인 정부는 공무원들을 개혁에 나서게 할 설득력과 단호함을 다 갖고 있는지?

둘째, ‘영혼 없음’이나 ‘영혼 털림’이 비단 공무원들만의 일인가? 과연 ‘불안은 영혼을 잠식’했다. 생존주의(‘먹고사니즘’)가 모든 윤리와 공덕을 압도한 유일한 진리처럼 된 것이 세월호 참사나 이명박·박근혜 시대의 퇴행을 불렀던 것이 아니었던가? 사납고 못된 권력은 순응·보신·침묵을 ‘점잖고 합리적인 것’으로 치장해주었다. 이 땅의 삶은 더욱 사소하고 영악해져서, 정상적인(?) 사람들은 돈이나 권력이 시키는 일이 아니면 나서지 않게 됐다. 자결한 아들의 죽음을 삼성전자서비스에 6억원에 팔고 위증도 했다는 아비의 경우는, 어떤 외력이 ‘영혼 없음’을 만드는지 상징적으로 보여준다.

소시민이야 소시민이라 해도, 구성원 전체가 생존 불안과 상대적 박탈감 외에는 가진 게 없는 사회, 청년다운 청년도, 존경할 만한 어른이나 지식인도 없는 좀팽이 공화국, 즉 ‘주체’가 해체된 나라를 경험했다. 대신 얻은 것(?)도 있다. 너나 할 것 없이 ‘모두 그렇고 그런 인간’이라는 무한 상대주의와, 꼰대나 586세대에 대한 젊은 세대의 깊은 불신이다. ‘계몽충, 오지라퍼, 불편러, 씹선비’ 따위의 신조어들도 생겼는데, 모욕을 담은 이런 단어는 기실 불의에 대한 연루와 공모를 정당화하기 위한 것들이었다.

여기까지 말하니 창자에서부터 ‘너는 얼마나 정의롭냐?’라든가 ‘너나 잘하세요’ 같은 반박이 메아리친다. 옳은 말이다. 그러나 개별자로서의 성찰의 도리와 공동체 정의의 문제를 섞어 문제를 무화하지 않아야 하겠다. ‘윤리’와 ‘생존’이 병존 가능해야 우리 허약한 영혼이 구원받을 가능성이 높아질 터인데, 직업윤리와 사회정의가 그 지렛대겠다. 적폐청산과 영혼의 구제는 다르지 않은 일이다.

그래서 법관들의 영혼을 위해서는 ‘양승태 대법원’을, 고용노동부 사람들의 영혼을 위해서는 ‘이채필 노동부’를 제대로 수사하여 단죄해야 한다. 언론인과 교수의 영혼을 위해서는 언론 개혁과 대학 민주화가 필요하다. 일부 언론과 대학은 적폐의 무책임·무풍 지대로 남아있다.

<천정환 | 성균관대 교수·국문학>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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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명수 대법원장이 김선수 변호사와 이동원 제주지법원장, 노정희 법원도서관장을 대법관 후보로 제청한 것은 대법원 구성 다양화란 시대적 요구에 부응한 것으로 보인다. 세 사람은 역대 대법관 대다수를 차지했던 ‘서·오·남(서울대 출신, 50대, 남성)’의 범주를 모두 벗어났다. 김 변호사는 법원·검찰을 거치지 않은 순수 재야 출신의 노동·인권변호사다. 이 원장은 고려대 출신으로 법원행정처 근무 없이 재판에만 전념해온 정통 법관이다. 노 관장은 젠더 관점을 지닌 이화여대 출신 여성 법관으로 여성의 지위와 권한에 관해 주목할 판결을 여럿 남겼다. 대법원은 “대법관 구성의 다양화를 요구하는 국민 기대를 염두에 두고 사회적 약자와 소수자 보호에 대한 인식 등을 고려해 선별했다”고 밝혔다. 외형상 인적 구성이나 대법관 가치관의 다양성을 종합적으로 반영했다는 점에서 긍정적으로 평가할 만하다.

오는 8월 2일 퇴임하는 고영한, 김창석, 김신 대법관 후임으로 김선수 변호사(왼쪽부터)와 이동원 제주지법원장, 노정희 법원도서관장이 결정됐다. 김명수 대법원장은 2일 김 변호사 등 3명을 신임 대법관으로 임명해달라며 문재인 대통령에게 제청했다고 밝혔다. 연합뉴스

“입법부는 지갑을, 행정부는 칼을 가지고 있다. 사법부는 지갑도 칼도 없다. 사법부는 국민의 신뢰만 가지고 있다.” 10달러 지폐에 초상화가 그려져 있는 미국의 법률가이자 정치인 알렉산더 해밀턴 얘기다. 빈털터리 사법부는 시민의 신뢰를 밑천으로 비로소 권부(權府)가 됐다. 그러나 과거 대법원은 권력에 대한 추종과 사법부 기득권 지키기 행태로 유일한 밑천인 시민의 신뢰를 잃었다. ‘양승태 대법원’은 재판을 정치권력과의 거래 대상으로 삼는 사법농단으로 사법부 신뢰를 바닥까지 떨어뜨렸다. 여론조사에서 시민 10명 중 6명 이상이 사법부 판결을 불신한다고 했다. 신뢰관계가 무너진다면 판결은 정당성을 상실하고 사회는 혼란에 빠지게 된다. 이는 사법부 스스로 자초한 것이다.

김명수 대법원장은 시민 신뢰를 회복하고 사법개혁을 추진해야 할 막중한 책무를 안고 있다. ‘양승태 대법원’ 시절의 보수 일변도 구성을 탈피하는 것도 그중 하나다. 최종심을 담당하는 대법관은 시민의 권리를 구제하는 마지막 심판자다. 특히 사회적 약자에 대한 배려에 관심을 기울여야 한다. 비슷한 경험과 생각을 가진 대법관 일색으로는 다양한 사회적 가치관을 반영하는 데 한계가 있을 수밖에 없다. 실추된 사법부의 신뢰를 회복하기 위해서라도 대법원 구성의 다양화는 앞으로도 계속되어야 할 것이다. 야당도 진보와 보수를 망라해 다양한 가치관을 지닌 인물들이 대법관으로 임명된다면 반대할 이유가 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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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osted by KHross

전국 법원장 35명이 ‘양승태 대법원’의 사법농단 의혹 수사를 사실상 반대한다는 입장을 표명했다. 이들은 지난 7일 간담회를 열어 “사법행정권 남용 관련자들에 대해 형사상 조치를 취하지 않기로 한 특별조사단의 결론을 존중하며, 사법부에서 고발·수사의뢰 등의 조치를 취하는 것은 적절하지 않다”고 밝혔다. 법원장들은 양 전 대법원장 시절의 문제에 공동책임을 져야 할 인사들이다. 자중하고 자숙해도 모자랄 처지에, 형사조치가 부적절하다는 주장을 공공연히 하고 나서다니 기막힐 따름이다. 사법 신뢰가 더 추락하든 말든 자신들을 포함한 고위법관들만 보신(保身)하면 그만이라는 생각인 듯하다. 사태의 심각성을 외면한 안이한 인식, 법 위에 존재하는 듯한 오만한 태도를 비판하지 않을 수 없다.

이찬희 서울지방변호사회 회장이 11일 오전 서울 서초구 서울변회 회관 앞에서 양승태 전 대법원장 당시 ‘사법농단’을 규탄하는 시국선언문을 낭독하고 있다. 박광연 기자

특히 우려스러운 대목은 재판거래 의혹 제기에 대해 ‘합리적 근거가 없다’고 단정 지은 부분이다. 의혹이 제기된 사건 가운데 일부는 문건 작성 시점과 재판 결과 등에 비춰볼 때 의혹이 사실로 드러날 가능성이 짙다. 대표적 사례가 원세훈 전 국가정보원장 사건이다. 2015년 2월 원 전 원장의 선거법 위반을 인정한 항소심 이후 법원행정처는 청와대의 ‘전원합의체 회부’ 의중을 파악하고, 증거능력 인정 여부 등 핵심 쟁점을 정리한 문건을 작성해 대법원 재판연구관에게 전달했다. 사건은 이후 전원합의체에 회부됐으며, 대법관 13명은 전원일치로 일부 증거의 증거능력을 문제 삼아 원심을 파기했다. 문건 내용이 그대로 실현된 것이다. 전교조 법외노조 효력 집행정지 사건, 발레오만도 노조 조직형태 변경 사건도 마찬가지다. ‘재판거래 의혹에 합리적 근거가 없다’는 법원장들의 주장이야말로 합리적이지 않다.

양승태 전 대법원장(가운데)을 비롯한 대법관들이 2015년 7월 대선개입 혐의로 기소된 원세훈 전 국정원장에게 전원합의체 선고를 하기 위해 서울 서초구 대법원 대법정에 들어와 자리에 앉고 있다. 김영민 기자

일선 판사들은 연일 엄정한 수사를 촉구하고, 법원노조 지부장은 무기한 단식농성에 돌입했다. 법학전문대학원생 300여명은 책임자 처벌을 촉구하는 성명을 발표했고, 전국의 변호사들은 오는 11일 시국선언을 할 예정이다. 민주사회를위한변호사모임과 참여연대는 진상규명 조치를 요구하는 진정을 유엔에 제기했다. 사법부의 ‘초엘리트’라는 법원장들만 다른 행성에 살고 있는 것인가.

김명수 대법원장은 8일 사태 수습 방안과 관련해 “원칙적으로 법원 내에서 해결하는 것이 제일 중요한 부분이라고 생각한다”고 말했다. 고심은 이해하나, 사법부에서 자체적으로 해결할 수 있는 단계는 이미 지났다. 김 대법원장은 11일 열리는 전국법관대표회의 의견을 수렴하는 대로 결단을 내려야 한다. 시민의 분노가 임계치를 넘어서고 있다. 시간이 갈수록 사법의 권위는 만신창이가 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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