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얼굴'에 해당되는 글 2건

  1. 2018.02.06 [송민령의 뇌과학이야기]구분의 두 얼굴
  2. 2015.03.13 아주 낯선 낯익은 이야기
우리는 뇌를 사고와 지능과 종종 연관 짓는다. “머리가 나쁘다”는 표현은 지적 능력이 낮다는 의미로 쓰이며, “머리를 쓴다”는 표현은 뭔가를 외우거나, 어려운 것을 이해하려고 애쓸 때 사용한다. 감정이 심장이나 몸의 다른 부위에 있다고 여겨진 적은 있었지만, 이성이 뇌가 아닌 다른 기관에 있다고 믿는 이들이 많았던 적은 없는 듯하다. 그래서인지 ‘뇌는 이성적이고 고차원적인 사고를 하도록 진보해 온 기관’이라고 오해되기도 한다.

■ 신경계가 생겨난 이유

신경계는 움직임을 돕기 위해서 존재한다. 생명체가 살아가려면 나에게 해로운 것(예: 천적)은 피하고, 내 생존에 유익한 것(예: 먹이)은 획득해야 한다. 움직이면 주위 환경이 빠르게 변하기 때문에, 움직이는 생물은 해로운 것이 나타날지, 유익한 것이 나타날지 잘 예측하고, 그에 맞게 피하거나 접근할 수 있어야 한다. 신경계는 나중을 예측하고, 움직임을 만들어내는 역할을 한다.

신경계가 움직임을 돕기 위해 존재한다는 사실을 잘 보여주는 사례가 있다. 멍게류의 일종은 유생 시기에는 돌아다니면서 살기 좋은 장소를 물색하다가, 적당한 장소를 찾은 뒤에는 한 장소에 정착해서 움직이지 않고 살아간다. 이 생물은 돌아다니는 시기에는 신경계를 가지고 있지만, 정착한 뒤에는 신경계를 소화시켜서 없애버린다. 그래서 뇌는 좋아하고 싫어하는 것을 구분하는 데 능하고, 미리부터 예상하는 데 탁월하다. 이런 능력은 살아가는 데 분명 도움이 된다. 뱀 한 마리만 보고도 다른 뱀들도 무서운 줄을 예상하고 조심할 수 있다. 사과 하나만 먹어보고도 다른 사과도 비슷한 맛일 거라고 예상하고, 사과를 살지, 배를 살지 고민할 때 참고할 수 있다.

■ 범주화와 구분

이렇게 경험해보지 못한 일도 예측할 수 있으려면, 서로 다른 개별 사건을 범주화하는 과정이 필요하다. 인공신경망을 사용하는 인공지능(딥 러닝)을 통해서 뇌가 어떻게 개별 사건을 범주화하는지 살펴보자. 인공신경망은 신경세포를 모방한 단위들과, 이 단위들 간의 연결로 구성된다. 같은 입력을 주어도 연결 세기에 따라 인공신경망의 출력이 달라지기 때문에 인공신경망의 학습은 단위들 간의 연결 세기를 조정함으로써 이루어진다.

인공신경망이 개와 고양이를 구분하게 하려면, 먼저 인공신경망에 개와 고양이의 사진을 수만장 입력한다. 인공신경망은 사진이 하나씩 입력될 때마다 입력된 사진이 개 또는 고양이라는 출력을 낸다. 이 출력이 맞는지 틀렸는지 피드백을 주면, 피드백에 따라 인공신경망의 연결 세기들이 조금씩 조절된다. 인공신경망의 출력이 맞을 때는 다음에 동일한 출력을 내기에 더 유리한 방향으로, 틀렸을 때는 틀린 출력을 내기에 불리하고 정답을 내기에는 더 유리한 방향으로 연결 세기들이 조절된다. 이 과정에서 입력된 정보에서 자주 나타나는 조합이 추려진다. 예컨대 개의 사진에는 긴 코와 동그란 눈망울의 조합이, 고양이의 사진에는 짧은 코와 길쭉한 눈동자의 조합이 더 자주 나타날 것이다. 신경망에서 범주는 이처럼 입력된 데이터 속에서 자주 나타나는 조합들로 두루뭉술하게 표현된다.

이렇게 얻어진 범주는 개별 사건을 구분하는 데 사용된다. 어떤 일이 일어나고 있는지 빠르고 정확하게 파악하기에는 외부에서 얻을 수 있는 정보가 부족하고 불명확할 때가 많다. 예컨대 어둠 속에 뭔가 나타났다면, 형체를 파악하기가 어려울 것이다. 이럴 때 뇌 속에 있는 범주가 부족하고 불명확한 정보를 메꿔준다. 흐릿한 형체와 반짝이는 눈만 보고도 보이지 않는 부분들을 예상해서 고양이임을 알아보고 대비할 수 있게 해주는 것이다.

■ 구별과 편견

안타깝게도 부족한 정보를 예상해서 메꾸는 뇌의 작용은 선입견과 편견으로 이어지기도 한다. 이는 신경망의 범주가 경험한 데이터에서 자주 나타나는 조합들로 표현되기 때문이다. 그래서 경험이 제한적이면 범주에 대한 인식도 편향된다. 예컨대 인공신경망을 학습시킬 때 다양한 품종의 고양이 사진과 흰 진돗개 사진을 사용하면, 이 신경망은 나중에 까만 셰퍼드를 접했을 때 고양이로 착각하거나, 개인 줄 모를 확률이 높다. 모든 사람의 경험은 제한적이기 때문에, 누구나 인종, 성별, 직종에 대해 어느 정도 편향된 인식을 갖고 있다고 볼 수 있다. 타인에 대한 선입견이 흔한 것도 이런 이유 때문일지도 모르겠다.

둘째, 입력된 데이터에 담겨있는 암묵적인 차별을 학습한다. 예컨대 흑인과 부정적인 단어의 조합이 백인과 부정적인 단어의 조합보다 더 자주 나타나는 데이터로 인공신경망을 학습시키면, 이 신경망은 흑인에 대한 편견을 학습할 것이다. 사람들이 쓴 글로 학습시킨 인공지능은 실제로 인종과 성별에 대한 암묵적인 편견을 습득한다고 한다. 인공지능 덕분에 사회의 암묵적인 편견이 겉으로 드러난 것이다. 고작해야 문자 데이터만 학습했고, 독해력도 사람보다 부족한 인공지능이 저럴 정도라면, 인종과 성별에 대한 편견이 우리 마음속에 얼마나 깊이 내면화되었을지 짐작할 수 있다.

■ 다채롭고 변화무쌍한 세계

범주는 대상을 빠르게 인식하도록 도와주기는 하지만 다채롭고 풍성하게 살아가기에는 좋지 않다. 세상을 틀에 박힌 시각으로 보고, 틀에 박힌 방식으로 대하게 만들기 때문이다. 겨울이 매년 돌아오지만 해마다 조금씩 다르고, 한 상자 안의 귤들도 조금씩 다른 맛이 난다. 세상에는 똑같은 사람이 없고, 같은 사람도 그때그때 다르다. 심지어는 지루하다는 느낌에도 사람 따라 상황 따라 다채로운 색깔이 있다.

성별, 피부색, 직장, 학벌에 따라 사람을 차별하는 것은 바람직하지도 않지만, 뻔하고, 따분하고, 시시하다. 다채롭고, 변화무쌍한 세상에서 재미있게 살자.

<송민령 | 카이스트 바이오 및 뇌공학과 박사과정>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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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osted by KHross

“스스로 자(自) 자의 기원이 뭔지 아세요?” 영문학자의 입에서 나온 말이었다. 좌중이 일순 조용해졌다. 영문학자는 자기 코를 가리키면서 이렇게 말했다. “코입니다, 바로 이 코.” 믿기지 않았다. 모임의 뒤풀이, 농담이 오가는 자리여서 더 그랬는지 모른다. 나는 한쪽 귀로 흘리고 말았다. 다음 날 한자의 기원과 관련된 책을 뒤적이다가 간밤의 코 이야기가 떠올랐다. 그가 맞았다. 자(自)의 갑골문 자형은 사람의 코를 본뜬 것이었다. 중국인은 자신을 가리킬 때 손으로 자기 코를 가리킨다고 한다.

뒤풀이 자리에서 영문학자는 말했다. “얼굴 중에서 자기 눈으로 볼 수 있는 게 코 하나밖에 없습니다.” 압권은 그 다음이었다. “문제는 자기 코가 잘 안 보인다는 겁니다.” 전날 밤 그랬듯이 내 두 눈은 내 콧잔등을 보고 있었다. 잘 보이지 않았다. 희미하게 콧잔등의 윤곽만 눈에 들어왔다. 낯익은 것이 이렇게 낯설어지다니. 대단한 메타포였다. 보이되, 잘 보이지 않는 코를 자기 자신이라고 여긴 고대 중국인들의 생각이 놀라웠다.

물론 자기 입과 두 귀도 자기 눈에 보이지 않는다. 코가 아예 보이지 않았다면 문제는 달라졌을 것이다. 보일 듯 보이지 않는, 보이면서도 보인다고 말할 수 없는 안타까움이 고대 중국인을 고민에 빠뜨린 것은 아니었을까. 3000년 전 갑골문 시대의 자기 인식이 21세기 디지털 시대의 우리를 뒤흔드는 걸 보면, 우리가 자부하는 진화와 진보는 여전히 도구와 기계 수준에 머물러 있는 것인지도 모른다. 우리가 디지털 기억 장치에 담아놓고 수시로 검색하는 엄청난 양의 지식이 아직 지혜의 경지로 올라서지 못하고 있는 것이다.

눈과 코의 관계는 나와 내 안의 ‘또 다른 나’의 관계와 대응한다. 눈이 코에 초점을 맞출 수 없듯이 나는 내 안의 ‘수많은 나’를 장악하지 못한다. 분명 마음속에 있지만, 마음으로 포획할 수 없는 다른 마음들이 있다. 마음 곳곳에 마음의 오지(奧地)가 있다. 마음이 볼 수 없는 마음들. 코가 곧 자기 자신이라는 농담 같은 이야기가 두 눈을 중심으로 얼굴을 이해해왔던 그간의 고정관념을 무너뜨렸다. 코가 얼굴 한복판에 자리 잡고 있다는 사실도 새삼스러웠다. 눈과 입, 귀도 다르게 보였다. 얼굴이 달리 보이기 시작했다.

코가 화두로 떠오른 데는 또 다른 이유가 있다. 최근 문예지에 발표한 졸시 때문이다. ‘얼굴’이란 제목을 달았는데 이렇게 시작된다. “내 얼굴은 나를 향하지 못한다/ 내 눈은 내 마음을 바라보지 못하고/ 내 손은 내 몸 안으로 들어가지 못한다.” 진즉 코의 갑골문 자형에 대해 알고 있었다면, 영문학자를 좀 더 일찍 만났다면 시가 달라졌을 것이다. 코가 첫 연의 핵심, 얼굴의 중심이었을 것이다. 뒤늦게 얼굴에 관심을 갖게 된 계기는 타인이 다시 보였기 때문이다.

얼굴은 나의 것이지만, 실제로는 거의 전적으로 타인을 위해 존재한다. 얼굴은 ‘남의 것’이다. 우리가 지나치게 타인 지향적이라는 지적이 있다. 외모지상주의, 명품 열풍, 자녀 교육에 대한 과도한 집착 등 우리는 ‘타인의 시선’이라는 감옥 속에서 살아간다. 틀린 말이 아니다. 하지만 시 ‘얼굴’에서 부각시키고 싶었던 타인은 그런 타인이 아니다. 타인의 눈에 위축되는 ‘나’는 주체적 인간이 아니다. 소비자일 따름이다. 이때의 타인 역시 소비자다. 다른 소비자들의 눈치를 보는 소비자.

드라마 '왕의 얼굴'의 한 장면 (출처 : 경향DB)


우리가 생각하지 않는 소비자에서 주체적 삶의 주인이 되기 위해서는 ‘진정한 타인’ 앞에 서야 한다. 나는 타인의 타인이다. 우리는 모두 타인의 타인이다. 소비자의 눈을 벗어버리면 이방인, 낯선 사람, 나그네, 노약자, 이웃사람이 다시 보인다. 그들이 저마다 사람으로 보인다. 졸시 ‘얼굴’은 큰스님과 한 소년의 대화가 모티브였다. 소년이 큰스님께 여쭙는다. “스님께서 가장 존경하는 사람은 누구예요?” 큰스님이 웃으며 답한다. “지금 내 앞에 있는 사람이다.” 언제, 어떤 경우에도 지금 자기 앞에 있는 사람이 가장 존귀하다는 것이다. 지금 이 순간을 살아라, 언제나 깨어있으라는 경전의 번안이었겠지만, 나는 저 짧은 대화에서 타인을 발견하고 존중하는 자세를 보았다. 지금 내 앞에 있는 사람을 소중한 존재, 유일무이한 생명이라고 여길 수 있다면, 타인은 더 이상 타인이 아니다. 지인(知人)이다. 이것이 환대의 제1 원칙일 것이다.

도처에 거울과 유리창이 있고 수시로 ‘셀카’를 찍는 세상이다. 각종 미디어를 통해 수많은 얼굴과 마주하는 시대다. 하지만 얼굴의 진정한 의미에 대해서는 생각하지 않는다. 얼굴은 많아졌지만 타인을 위한 얼굴, 타인을 맞이하는 얼굴은 찾기 힘들다. 우선 두 눈으로 자기 코(自)부터 살펴보자. 그리고 자주 물어보자. 내 얼굴은 누구의 것인가. 나는 지금 내 앞에 있는 사람을 어떻게 대하고 있는가.


이문재 | 시인·경희대 후마니타스칼리지 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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