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앳된 얼굴의 키가 작은 여자 손님이 카스 두 캔과 감자칩 한 봉지를 카운터 위에 올려놓다 말고 고개를 갸우뚱거리며 그녀에게 물었다. 혹시 홍미영 교수님 아니세요? 그녀는 제대로 고개를 들지 못한 채 어수룩하게 대답했다. 아, 아닙니다. 다행히 여자 손님은 더 이상 아무것도 묻지 않고 편의점을 나섰지만, 그날 이후 그녀는 나이가 어려 보이는 손님이 편의점으로 들어설 때마다 반사적으로 긴장하는 몸의 습관을 갖게 되었다.”

조해진의 소설 <산책자의 행복>에는 구조조정 여파로 대학 강사직을 잃고 편의점 야간 아르바이트를 하는 홍미영이 등장한다. 그녀는 실직 이후 함께 사는 아픈 어머니의 병원비와 은행 빚을 감당하지 못해 파산하고 기초생활수급자가 되면서 빈곤층으로 추락한다. 힘들어하던 제자의 손을 잡고 “살아 있는 동안엔 살아 있다는 감각에 집중하면 좋겠다”고 이야기하던 다정한 스승은 사라진 지 오래다. 대학 철학과 강사에서 편의점 알바가 된 주인공이 나오는 소설을 읽을 때만 해도 ‘너무 극단적인 상황 아닌가’ 싶었는데 웬걸, 한국의 현실은 소설보다 더 나쁘다.

얼마 전 인터넷을 달궜던 최영미 시인의 ‘호텔 투숙 편의 요청’이 바로 그렇다. 일전에도 최영미 시인은 “연간소득이 1300만원 미만이고 무주택자이며 재산이 적어 빈곤층에게 주는 근로소득장려금 대상이 되었다”는 고백으로 화제가 된 바 있다. 내게는 편의점에 들르는 제자들이 자신을 알아볼까봐 전전긍긍하는 소설 속 홍미영 교수보다 자신의 궁핍한 경제적 상황을 솔직하게 알리고 농담 반 진담 반의 글을 올렸다가 홍역을 치른 ‘(전) 베스트셀러 시인’ 최영미가 훨씬 소설 속 인물처럼 느껴졌다. 시인의 현실이 소설이면 얼마나 좋겠냐만, 김명인 교수의 지적대로 이번 논란의 본질은 “시인이라는 돈 안되는 타이틀을 가진, 의식주를 걱정하며 살아가는 한 사람의 50대 중반 빈민 독신여성”의 문제다. 논란 이후 최 시인은 집주인의 월세 계약 연장과 함께 한 호텔에서 투숙 제공 의사까지 전달받은 상태다. 훈훈하게 끝났으니 해프닝쯤으로 치부하고 넘어가기에는 최 시인의 상황이 결코 특수하지 않다는 현실이 문제다. 최근 <반지하 앨리스>라는 시집을 내고 사진전을 연 신현림 시인도 하루에 한 시간만 햇빛이 들어오는 반지하에서 10년간 살았다고 하니 비슷한 처지다.

한국 사회가 돈 없는 사람에게 유독 가혹하다는 현실을 차치하고서라도 ‘여성, 비혼, 소속 없음’으로 살다 보면 가난 혹은 빈곤이라는 단어와 필연적으로 만날 수밖에 없다는 현실은 처참하다. 취업 시장에서 ‘남성이 최고의 스펙’이라는 말은 취업 이후에도 크게 달라지지 않는다. 정규직 근로자 중 여성 비율은 38.7%로 남성 62.3%에 한참 못 미치고, 여성 가구주의 절대 빈곤율은 20.1%인 데 비해 남성 가구주의 절대 빈곤율은 5.1%다. 여성 전체 노동자의 약 40%가 ‘일을 해도 가난한’ 근로 빈곤계층이고, 전문직 내 여성 집중 상위 6개 직업의 월평균 임금조차 214만원에 불과하다.

해외에서는 같은 커피를 팔면서 남성 손님에게 돈을 더 받는 카페까지 등장했다. 호주 멜버른의 ‘핸섬 허(Handsome Her)’ 카페는 같은 일을 해도 남성이 여성보다 더 많은 임금을 받는 구조적 격차(Gender Gap)를 가격표에 반영, 남성에게 가격의 18%를 더 내게 한다. 15년 연속 경제협력개발기구(OECD) 회원국 중 1위인 한국의 남녀 간 임금 격차는 36.3%이니, 한국에도 이런 카페가 생긴다면 남성들은 37%쯤 비싼 가격을 지불해야 할지도 모르겠다.

모든 여성의 인생이 동화나 셰익스피어의 희곡처럼 결혼으로 끝나지 않는다. 결혼을 하지 않아도 삶은 계속되는데, 한국은 결혼하지 않은 가난한 여성들이 어떻게 살아야 할지에 대해 아무런 답도 갖고 있지 않다. 30~40세 미혼 여성 인구는 10년 새 2배 넘게 급증한 반면 국가는 결혼하지 않는 여성에는 무관심하고 출산하지 않는 여성을 걱정하느라 바쁘다. 소설 속의 홍미영 교수와 현실의 최영미, 신현림 시인은 ‘열심히 일하지만 가난’하다는 점에서 꼭 닮았고, 그래서 슬프지만 이렇게라도 가시화되었다는 점에서 다행스럽기도 하다. 아직 늦지 않았다. 지금부터라도 혼자라서 더 괜찮지 않은 여성의 가난에 대해 더 많은 관심과 이야기가 필요하다.

<정지은 | 문화평론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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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1791년 프랑스. “여성은 자유롭게, 그리고 권리에서 남성과 평등하게 태어나며 그렇게 존속한다.” 올랭프 드 구즈는 ‘여성과 시민의 권리선언’을 발표한다.

프랑스 대혁명이 내건 자유와 인권은 남성들의 몫이었고, ‘인간은 누구나 평등하게 태어났다’지만 인간은 남성만을 의미했다. 그는 ‘인간과 시민의 권리선언’을 여성의 관점으로 비판하고 보충한다.

“여성이 단두대에 올라갈 권리를 가지고 있다면, 연단에 올라갈 권리도 가져야 한다”는 그 유명한 10항은 시민으로서 여성의 동등한 권리와 참여를 요구한 것이었다. 1793년, 자신의 말이 예언이라도 된 듯, ‘성별에 적합한 덕성을 잃어버린 사람’으로 비난받고 단두대에 오른다.

세계여성의날인 3월 8일 오후 서울 광화문광장에서 여성 노동계가 주최한 조기퇴근 시위 ‘3시 스톱(STOP)’에 참가한 여성 노동자들이 ‘유리천장 아웃(OUT)’이 적힌 우산을 들고 성평등 정책을 촉구하고 있다. 박민규 기자

#2. 1792년 영국. “여성이 처한 비굴한 의존 상태를 위장하기 위해 남성이 선심 쓰듯 내뱉는 귀엽고 여성스러운 어구들과, 여성의 성적 특징으로 간주되어 온 나약하고 부드러운 정신, 예민한 감성, 유순한 행동거지 등을 거부하고, 아름다움보다 덕성이 낫다는 걸 밝히려 한다.”

메리 울스턴크래프트는 ‘여성의 권리 옹호’를 발표한다. 여성은 남성의 소유물에 불과하고 어떠한 경제적, 정치적 권리도 갖지 못하던 당시, 인간은 동등한 이성과 동등한 권리를 가지고 태어났지만 성별에 따른 불평등한 교육과 편견체계 아래서 다르게 형성되어 간다고 지적하고, 인간으로서 여성의 권리를 요구한 그의 주장은 파격적인 것이었다. “여성이 인간 대접받는 사회를 만드는 것”이라던 그의 소원은 다가올 여성들의 오랜 투쟁을 예고했다.

#3. 1898년 조선. “슬프다! 전날을 생각하면 사나이의 위력으로 여편네를 누르고, 구설을 핑계로 여자는 안에 머물면서 밖의 일을 말하지 않고, 오로지 밥하고 옷 짓는 것만 하리오. 어찌하여 신체와 수족과 이목이 남자와 다름없는 사람으로 규방에 갇혀 밥과 술만 지으리오.”

이소사와 김소사는 ‘여권통문’을 발표한다. ‘여성도 남성과 동등한 인간’이라 선언하고 평등한 교육권과 노동권, 경제권을 강조한 우리나라 최초의 여성인권 선언문이었다. 이들은 여권통문 발표 이후 서민층 부녀와 기생들, 지방의 부인들과 함께 최초의 근대적 여성단체인 ‘찬양회’를 조직하고 여성 교육권을 현실에서 구현하고자 노력한다. 고종황제에게 상소문까지 올렸지만 관립여학교는 설치되지 않는다.

#4. 1927년, 일제강점기 조선. “조선에 있어서는 여성의 지위가 한층 저열하다. 미처 청산되지 못한 구시대의 유물이 오히려 유력하게 남아 있는 그 위에 현대적 고통이 겹겹이 가하여졌다… 이와 같은 견지에서 사업을 전개하려 하는 것을 선언하나니 우리의 앞길이 여하히 험악할지라도 우리는 일천만 자매의 힘으로써 우리의 역사적 임무를 수행하려 한다.” 조선여자기독교청년연합회 강당에서 항일여성운동단체 ‘근우회’가 발족한다.

김활란·유각경·정종명·황신덕·주세죽·허정숙·정칠성 등 당대 자각한 여성들이 총망라되었고 회원 150여명, 방청인 1000여명이 참석했다고 한다.

‘여성에 대한 사회적·법률적 차별 철폐, 봉건적 인습과 미신 타파, 조혼폐지와 결혼의 자유, 인신매매 및 공창제 폐지, 농촌 여성의 경제적 이익 옹호, 여성 노동자에 대한 임금 차별 철폐 및 산전·산후 임금 지불, 부인과 소년공의 위험 노동 및 야근 폐지’ 등을 담은 행동강령은 당시로서도 획기적이었지만 아직도 대부분 실현되지 않은 주장들이다.

# 2017년 대한민국. 여성이 성적 대상, 가정부, 장식물, 보조적 존재, 재생산의 도구였던 시대에서 얼마나 더 나아갔을까. 독립이 오고, 전쟁이 사라지고 민주주의가 실현되며, 분배정의가 이루어지면 진정한 여성해방이 올 것인가.

여성들은 여전히 길거리에 앉아 있고 피켓을 들고, 집회를 하고 목이 터져라 성명서를 발표한다. 평등한 법과 제도를 만들기 위해, 법적 이중 잣대를 비판하기 위해, 불평등과 차별 해소를 위해, 재생산의 권리를 위해, 평등한 노동권을 위해, 임금격차 해소를 위해, 성폭력에 반대하기 위해, 성착취적 산업과 성구매를 비판하기 위해, 피해자 여성들을 보호하기 위해, 이름 없이 죽어간 여성들을 추모하기 위해.

“여성은 스스로 해방하는 날 세계가 해방될 것이다. 조선 자매들아 단결하라.” 90여년 전 근우회 창립 선언문은 슬프게도 여전히 유효하다.

<이나영 | 중앙대 교수·사회학>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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매해 7월 첫 일주일은 양성평등주간이다. 양성평등은 태어난 성별과 상관없이 여성과 남성 모두 동등한 기회, 책임, 권한을 가질 수 있어야 함을 의미한다. 하지만 일터와 가정에서 이중노동을 수행하고 있는 워킹맘들에게 양성평등은 여전히 먼 구호일 뿐이다. 여기서 중요한 것은 양성평등 사회가 여성뿐 아니라 남성의 삶과도 밀접한 관련이 있으며 남성의 참여를 전제로 한다는 것이다.

이제까지는 양성평등의 목표가 주로 남성을 기준으로 여성을 비슷한 수준까지 끌어올리는 것이었다면, 앞으로는 여성적 가치와 영역에 남성의 참여가 늘어나도록 해야 한다. 그러한 변화 속에서 사회의 차별적 요소가 빠르게 사라질 수 있기 때문이다. 그동안 주로 사적 영역에 머물러 있었던 여성들이 공적 영역으로 진출하게 되었고, 남성의 영역으로만 여겨져 왔던 군인, 경찰, 의료, 과학 분야를 비롯하여 정치 분야에서도 여성들의 점유율이 증가했다. 여성의 변화만큼 남성도 변화했는지 평가해 볼 때 그 움직임은 매우 더디다.

보육, 돌봄, 간병, 간호 등 타인을 돌보는 일에 종사하는 남성은 여전히 적다. 맞벌이 부부의 하루 평균 가사노동시간의 차이(남편 41분, 아내 193분) 또한 지난 10여년간 거의 변화가 없다. 육아휴직을 하는 남성의 비율은 전체 중 8%에 불과하다. 단지 참여와 시간의 문제일까? 오히려 무급의 가사노동과 돌봄노동에 대한 남성과 사회의 고정관념이 강하게 작동하는 것이 문제다. 아직까지도 인기를 끌고 있는 <슈퍼맨이 돌아왔다> 열풍은 남성 참여에 대한 사회의 변화와 기대를 잘 보여준다. 그런데 지난달 (BBC 인터뷰 방송사고로 세계적으로 유명해진) 부산대학교 로버트 켈리 교수 가족의 특별출연 방송분은 사회적 열망과 현실 사이에 큰 차이가 존재함을 알려준다. 이날 켈리 교수와 부인은 영어로 대화했고 방송은 두 사람의 대화를 반말과 존댓말로 자막처리해 논란이 있었다.

드라마와 예능, 광고 등에서 가사노동과 양육은 여성의 책임이며 남녀 역할에 대한 구분과 위계적, 차별적 시선은 여전하다. 특히 아동을 대상으로 한 프로그램에서도 이런 시선이 재현되고 있다. 아이들의 대통령이라고 불리는 한 애니메이션의 경우, 여성 등장인물은 2명에 불과하고 쇼핑이나 인형놀이, 집에 머무는 등 소극적인 모습으로 그려지기 일쑤다.

가사와 돌봄 노동, 성역할에 대한 남성의 태도가 유연하게 변하지 않는 상황에서 여성의 경제활동은 또 다른 여성들의 일방적인 헌신으로 이루어지고 있는 중이다. 젊은 세대들은 이러한 사회의 모순과 느린 변화에 희망을 걸지 않고 세계 최고의 출산 파업을 하는 것인지 모른다.

지금부터라도 제도화된 교육 안에 남녀 모두에게 억압과 불편함을 주는 ‘젠더박스(gender box)’를 깨는 양성평등 교육을 강하게 장착시킬 필요가 있다. 교육 기회가 증가한 것이 곧 교육 내용의 공정함을 보장하는 것은 아니기 때문이다. 스웨덴 유치원의 경우 남성 교사가 50%에 가깝다. 독일의 경우 2011년부터 ‘소년의날’을 제정하고(‘소녀의날’은 오래전부터 실시) ‘소년의 새로운 진로’ 프로젝트를 통해 남아들이 가지고 있는 지배적 남성성과 성별 전형적인 직업 이미지를 변화시키고자 노력하고 있다. 최저의 출산율을 보이고 있는 한국 사회는 양성평등에 대한 심각한 성찰과 변화가 이루어질 때 지속가능하게 될 것이다.

민무숙 | 한국양성평등교육진흥원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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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닐 미(未), 죽을 사(死). 아직 죽지 않았다는 뜻을 담아 은퇴 후 고령층을 국가에서 ‘미사자(未死者)’라고 지칭하기 시작했다. 대중매체는 ‘미사자 과잉 사회, 잉여 인구 어떻게 처리할 것인가’라는 식의 여론몰이를 일삼고 있다. 그런 분위기를 부추기기라도 하는 듯 행정자치부에서는 ‘대한민국 미사자 지도’를 지자체별로 순위를 붙여서 공개한다. 인터넷에서는 마치 기다렸다는 듯이 ‘늙은이들 잡으러 가자’, ‘우리 도시를 고려장 특화 도시로’ 같은 ‘농담’이 횡행한다.

물론 이 모든 상황은 가정법이다. 하지만 아마도 독자인 당신에게는 강한 불쾌함과 거부감이 느껴졌을 것이다. 당연한 일이다. ‘국가 경제’를 앞세워 멀쩡히 살아 있고 앞으로도 쾌적하고 행복한 삶을 누릴 권리가 있는 고령의 시민들을 ‘아직 안 죽은 짐짝’ 취급하는 내용이 한가득 담겨 있었으니 말이다. 눈치 빠른 독자라면 짐작할 수 있겠지만, 나는 지금 ‘대한민국 출산지도’ 이야기를 하는 중이다.

대한민국의 공론장에서 발언하는 그 누구도 ‘고령화 문제를 극복하기 위해 고려장을 부활시키자’ 따위의 발언을 하지 않는다. 그것은 절대 선택 가능한 대안으로 취급될 수 없고, 그래서도 안된다. 대신 은퇴 연령 조정이라던가, 연금 정책, 그 외 다양한 방법을 동원해 고령층을 보호하고 그들이 주체적으로 활동할 수 있도록 돕는다. 고령층은 ‘인구(人口)’이기에 앞서서 ‘인간(人間)’이다. 인간의 주체성을 박탈하는 사회 정책은 용납될 수 없다. 당연한 일이다.

그런데 이 당연한 상식이 왜 출산율 문제 앞에서는 통용되지 않는 것일까? 대한민국 출산지도가 공개된 후 얼마 되지 않아 한 인터넷 매체에서는 ‘남자들이 국방의 의무를 지듯이 여성들도 출산의 의무를 지고 애를 낳도록 해야 한다’는 칼럼이 버젓이 게재되었다. 인간을 강제로 죽이는 사회 정책이 용납될 수 없듯, 인간을 강제로 낳게 하는 사회 정책 역시 용납될 수 없다. 하지만 한국에서는 여성을 대상으로 한 발언이나 정책에서 인권의 기준치가 확 낮아진다. 나치 독일에서나 시행했었던 ‘의무 출산’ 정책이 아무렇지도 않다는 듯이 거론되는 그런 나라가 되어 있다는 말이다.

2017년 현재까지도 대한민국은 여자를 사람으로 취급하지 않는다. 인간이 아니라 인구로, 인구를 재생산하는 도구로만 바라보고 있다. ‘가임기 여성’들은 단지 자신들의 숫자를 세서 공개했다는 사실 때문에 분노한 게 아니다. 그 숫자, ‘빅데이터’를 취급하는 방식부터가 모욕적이기 때문에 화를 내는 것이다.

여성을 ‘주체’로, ‘주어’로 존중한다면, 대한민국은 여성들이 아이를 낳기 위해 ‘도와주는’ 방향을 모색할 것이다. 가임기 여성들의 숫자를 지자체별로 공개한다면 동시에 육아 시설이 어떻게 분포되어 있는지, 성별 임금 격차가 어떠한지 등을 함께 제시해야 마땅하다. 그래야 가임기 여성들이 어느 곳에서 아이를 낳고 기를지 결정할 때 도움이 될 테니 말이다. 그러나 정부에서 자료를 공개한 방식은 그와 정반대였다. 지자체별로 ‘순위’를 매겼다. 여성을 ‘목적어’로만 취급하는 것이다. 아이를 낳을 수 있도록 여성들을 보조하는 게 아니라, 지자체를 향해 ‘출산율을 높이라’는 지시를 내리고, 그 순위 경쟁을 위해 여자들이 아기를 ‘낳게 만들라’는 압력을 넣고 있다. 단순히 통계를 제시했을 뿐이지만 그 숫자가 제시되는 맥락과 방향 속에 너무도 많은 여성혐오와 멸시가 드러나 있는 것이다.

현재 대한민국에 절실한 것은 ‘출산율 대책’이 아니다. 여성을 온전히 주어의 자리에 놓는, 한낱 목적어의 대상으로 전락시키지 않는 여성 정책이 먼저다. 여자들이 볼 때 이 나라가 아이를 낳아도 되는 나라라면, 아이를 낳을 것이다. 출산율을 높여야 한다는 대의명분을 내걸고 온갖 여성혐오적 발언을 내뱉는 것이 별문제 아니라는 듯 받아들여지고 있는 한, 이 나라는 망하지 않을 도리가 없다. 출산율이 아니라 여성 인권이 문제의 본질이다.

노정태 | 자유기고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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현 대통령을 ‘최초의 여성대통령’으로 일컫는 것 자체에 불편함을 느끼는 여성들이 많다. 여성을 위한 정책을 제안한 적도 없고, 여성으로서의 의식도 존재하지 않는다는 이유에서이다. 그러나 ‘여성’을 단지 생물학적 범주로밖에 이해하지 못하는 사람들이 여전히 적지 않음을 생각하면, 여성이라는 생물학적 범주에 속하는 사람이 대통령이 되었다는 사실을 너무 과소평가할 필요는 없다. 한때는 ‘단지 생물학적으로 여성’이라는 이유만으로 공직에 접근하는 것 자체가 금기시된 시절이 있었기 때문이다. 적어도 ‘여자가 무슨 정치!’라고 공공연히 훈계하는 사람들의 숫자는 줄어들었다.

물론 현 대통령이 선출된 데에 여성이라는 요소는 크게 작용하지 않았다. 오히려 ‘여성이기 때문에’라는 생물학적 금기조차 무색하게 만드는 ‘아버지의 후광’이 가장 중요했다. ‘박’가에게 통치권을 돌려줘야 한다는, 일종의 ‘역성혁명’의 논리였다고까지 말할 수 있을 것이다.

역성혁명이란 새 왕조의 옹립을 의미한다. 국정교과서를 통해 박정희 정권을 영원히 미화하려는 것이나, 국가예산을 들여 광화문에 박정희 동상을 세우겠다거나, 옥천군 예산으로 육영수 숭모제를 지내겠다는 계획은 ‘대통령’에 대한 평가보다는 오히려 ‘나라님 숭배’의 정서에 가깝다. 청와대라는 ‘구중궁궐’에서 자란 ‘비운의 공주’ 이미지가 사실상 많은 지지자들을 사로잡았다. 그러한 전근대적 역성혁명의 결과가 현재의, 아무도 이해할 수 없는 이 전근대적인 국정농단이다.

박근혜 대통령이 '2016년 여성 신년인사회'에서 건배를 하고 있다. 청와대사진기자단

현 대통령이 여성이라는 사실이 그렇게 중요하지 않았던 만큼, ‘대통령이기 이전에 여자로서 보호받아야 한다’거나, ‘여성대통령의 사생활이기 때문에 세월호 7시간에 대해서 묻지 못했다’는 말들은 어처구니가 없다. 걸핏하면 여성혐오 발언과 사건들이 불거지는 대한민국에서, 여성이 그토록 고귀한(?) 존재인지 아무도 상상할 수 없었기 때문이다. ‘생물학적 여성’의 수치심이 국정농단의 범죄보다, 300명 이상의 목숨보다 우선적으로 고려되어야 할 만큼, 대한민국이 그렇게 여성을 맹종하는 사회였던가?

발언자들의 의도와는 반대로, 이러한 발언은 대한민국 여성을 ‘김치녀’로 매도하는 여성혐오의 문법과 다르지 않다. 그것은 현 대통령을 옹호는커녕, 혐오의 대상으로 만들었다. 김치녀로 표현되는 여성혐오의 출발점이 바로 ‘여성이 무슨 벼슬이나 되는 줄 안다’는 남성들의 지레짐작이기 때문이다. 여성이 실제로 처한 상황이나 경험에 대해 알려고 하지 않으면서, ‘단지 생물학적으로 여성이라는 이유만으로 최대의 이익을 거두려 한다’는 ‘상상과 억측’이 여성혐오의 출발점이기 때문이다. 그런데 여성 대통령을 ‘모시는’ 이 ‘신사(?)’들의 발언은 바로 이 상상과 억측에 기초해 있을 뿐만 아니라, 뻔뻔스럽게도 그것이 충성이라고 주장하는 행위이다.

한국 사회에서 여성혐오는 좌우, 학력, 세대, 계층적 차이와 무관하다. 심지어는 현 대통령을 철벽수비하려는 입장과 비판하는 입장마저 가리지 않는다. 여성대통령의 사생활 운운하는 ‘충신’들의 발언이 여성혐오적이라면, 대통령이 생물학적으로 여성임을 강조함으로써 조롱의 수위를 높이는 표현들 역시 여성혐오적이다. 그러나 생물학적 여성은 여성이라는 범주의 한 차원에 불과하고, 여성이라는 범주의 다른 특성들을 일방적으로 결정하지도 않는다. 단지 생물학적으로 여성이기 때문에 과도한 추앙이나 과도한 조롱을 받을 이유가 없다.

여성대통령의 ‘여성성’은 성적 이미지가 아니라, 젠더 불균형의 사회 문제를 해결하려는 자세를 통해서만 강조될 수 있다. 한국 사회에서 여성혐오가 보편적 현상이 되어가고 있다는 사실만이, 그리고 그러한 현상 뒤에 ‘여성들의 이기심’이 아니라 왜곡된 사회구조가 존재한다는 사실만이, 여성정치인의 여성성을 강조할 유일한 이유가 될 수 있을 것이다.

홍찬숙 | 서울대학교 여성연구소 책임연구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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