캐나다 작가 마거릿 애트우드의 <시녀 이야기>(1985)는 유사 이래 여성이 어떤 일을 담당해왔는지를 적나라하게 보여주고 있다. 21세기 후반 환경오염과 전쟁으로 출산율이 급감하자 남성들은 길리어드라는 전제국가를 건립하고 여성들을 잡아다가 네 부류로 나눈다. 아내, 하녀(집안일), 시녀(대리모), 그리고 비여성. 불임의 ‘아내’를 대신해 아이를 갖도록 강제된 ‘시녀’는 고위층 부부에게 자궁을 제공한다. 가사일을 담당하는 하녀들은 ‘아주머니’라 불리며 ‘시녀’를 감시하는 역할을 한다. 그리고 출산과 가사, 권력으로부터 배제된 ‘비여성’들은 콜로니라는 게토에 갇혀 독극물을 처리하는 강제노역에 종사한다. 작년 드라마화되어 인기를 끌었고 또 여기에서 영감을 얻은 미국 여성들이 낙태금지법안에 맞서 붉은 망토를 입고 “마거릿 애트우드를 픽션으로 돌려놓으라(Make Margaret Atwood fiction again)”고 외치며 시위를 벌여 더욱 화제가 되었던 책이기도 하다. ‘자궁의 공공화’를 둘러싼 이 기묘한 이야기가 21세기 현실이 되어버린 것에 대한 경악은 단지 미국 여성만이 아니라 ‘전국가임여성지도’를 지닌 우리의 것이기도 하다.

돌이켜보면 여성의 노동은 저 <시녀 이야기>의 분류에서 크게 벗어나지 못한 듯하다. 19세기 이후 여성은 법적 지위가 향상되는 것에 더불어 공적인 경제활동을 하게 되었으나 임금격차나 유리천장 등에서 보듯 현저한 남녀차별을 겪고 있다. 또한 여전히 ‘섹슈얼리티’를 부수적이며 함축적인 노동수단으로 제공해야 하는 이중노동에서 크게 벗어나지 못하고 있다. 이는 송충이 잡는 일을 하면서 감독에게 몸을 바쳐야 했던 극빈층의 복녀를 그린 김동인의 <감자>에서부터 지주의 성적 유린, 방적공장 감독의 유혹에 시달리는 여성 ‘선비’를 그린 강경애의 <인간문제> 등 문학작품 곳곳에서 확인할 수 있는 부분이다. 최근 미투 운동이 폭로하고 있는 직장 내 성희롱, 성폭력, 위력에 의한 성범죄 등은 이렇듯 ‘(여성)노동’에서 ‘여성의 섹슈얼리티’를 삭제하지 못한 남성지배구조의 장구한 역사에 대한 뚜렷한 증언들이라고 할 수 있다.

그러나 이 ‘자연’에 기초한 성별 분업이 더 이상 유효하지 않다는 것은 남성노동으로 가정된 노동의 변화를 보면 금세 알 수 있다. 즉 산업화와 첨단 기술에 의해 남성 육체노동 대부분이 기계화되고 사무직과 서비스직으로 이동하고 있는 현실을 감안하면, 4차 산업혁명 이후의 ‘노동의 미래’는 기존 성별 분업의 해체를 가져올 것으로 기대된다. 현재의 가사·육아 분담, 그리고 가사노동의 외주화는 임신과 출산의 기술적 진보, 돌봄로봇, 섹스로봇 등의 확산(‘킹키스 돌스’라는 섹스 인형 대여업소는 작년 토론토에 섹스 인형 성매매 업소 1호점을 열었다고 한다) 등으로 이어져 다양한 대체노동을 가져올 것이다.

그러나 과연 신의 영역에 진입한 호모사피엔스는 유발 하라리의 말대로 “나, 너, 남자, 여자, 사랑, 미움이 완전히 무관해지는” 특이점을 지나게 될 것인가. 이 포스트휴먼의 노동의 미래가 왠지 미심쩍은 것은 기술의 진보를 의심해서가 아니다. 그보다 유사 이래 희소성을 둘러싼 정치경제학이 더 강력한 현실을 만들어왔다는 사실 때문이다. 자본주의 시장의 완전정복은 ‘노동 민주화’ 대신 민족, 인종, 성을 둘러싼 다양한 차별적 현실을 만들어내고 있다. 현재 기술·자본력을 갖지 못한 많은 영세업체들(가구공장 등 위험한 산업현장)이 여전히 육체노동을 이주노동자에게 외주화하고 있듯이 기술에 의한 젠더 해체와 노동혁명은 환상에 불과할 수 있다.

실제로 우리는 돌봄과 가사 노동의 다양한 아웃소싱(홍콩에서 가사나 육아 도우미로 일하는 필리핀 등 동남아시아 여성)이나 결혼이주여성의 연쇄사슬(베트남 오지의 총각은 한국으로 시집간 베트남 여성 대신 캄보디아 등으로부터 ‘아내’를 공급받고 있다고 한다), 성매매와 대리모로 생계를 부양하는 하층 여성 등을 흔히 본다.

첨단 기술과 4차 산업혁명에 의한 젠더노동의 대폭발 지점은 지극히 유토피아적이지만, 그것은 어쩌면 일부 특권층에게나 허용된 꿈이거나 ‘노동의 종말’ 같은 디스토피아의 도래일지도 모른다. ‘인간노동’이라는 거대한 물음 앞에 함께 다다른 우리에게 더욱 시급한 것은 여성 노동의 비전보다 여전히 성적 차별과 계급차별이라는 현실에 갇힌 여성의 섹슈얼리티의 구원이다.

<정은경 | 문화평론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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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두려워 마십시오. 저희 의사들이 당신을 돕고 당신의 아이를 지킬 것입니다.”

2009년 12월, 프로라이트 의사회가 출범했다. 불법적이고 비윤리적인 낙태 시술 근절을 목표로 만들어진 이 단체는 이듬해 2월, 불법 낙태 수술을 하는 병원 3곳과 의사 8명을 검찰에 고발한다. 산부인과 의사가 동료의사를 고발하는 일은 매우 이례적이었지만, 그로 인한 파장은 컸다. 그간 암암리에 낙태를 해오던 산부인과들이 시술을 중단한 것이다. 낙태를 하러 온 여성들은 “안 한다”는 말을 듣고 쓸쓸히 발길을 돌려야 했다.

그렇다고 그들이 낙태를 포기할 리는 만무했다. 미혼모가 되는 게 두려워서, 원하지 않는 성관계로 인해 임신이 됐을 때, 한 명을 더 낳아 키우는 게 경제적으로 부담이 되는 기혼자 등등 다들 낙태를 해야 할 절실한 이유가 있었으니 말이다. 그래서 이들은 단속이 상대적으로 덜한 지방병원으로 가기도 했고, 아예 중국으로 원정을 가서 낙태를 하기도 했다. 낙태기피에 따른 비용 상승은 저소득층이나 저연령층 등 사회적 약자에게 더 큰 타격을 줬는데, 이들은 위험을 감수하고 무허가 시설에 몸을 맡겼다가 마취사고나 세균감염 등으로 목숨을 잃어야 했다. 출산한 산모 10만명당 사망하는 여성의 수를 나타내는 모성사망률이 2009년 13.5에서 2010년 15.7, 2011년 17.2로 증가한 것은 이와 무관하지 않다.

일러스트_김상민 기자

이런 현상이 비단 우리나라만의 일은 아니었다. 루마니아는 낙태가 전면 금지됐던 20여년 동안 모성사망률이 21에서 128로 증가했지만, 1989년 낙태금지법이 철폐되자 한 해 만에 이 수치가 절반으로 뚝 떨어졌다. 지금도 낙태가 금지된 나라에서는 여성들이 뜨개바늘이나 막대기 또는 옷걸이로 자가 낙태를 하다가 큰 상처를 입고, 또 목숨을 잃는다. 옷을 거는 도구인 옷걸이가 엉뚱하게도 낙태합법화 운동의 상징적인 도구가 된 것은 이 때문이다.

사정이 이렇다면 우리나라도 이제 낙태금지법에 대해 재고해 볼 필요가 있다. 새로운 생명을 죽이지 않기 위해 만든 이 법이 오히려 산모의 목숨을 앗아간다니, 이거 문제가 있지 않은가? 대부분의 선진국들은 사회경제적 이유로 낙태하는 것을 허용하고, 덕분에 그 나라 여성들은 안전한 곳에서 낙태 수술을 받는 게 가능하다. 뿐만 아니라 먹는 낙태약 ‘미프진’도 의사 처방만 있으면 얼마든지 복용할 수 있다. 임신 초기에 효과가 좋은 미프진은 선진국은 물론 잠비아, 에티오피아, 우간다, 콜롬비아, 심지어 북한 등등 웬만한 나라에선 죄다 허가를 받은 상태지만, 낙태가 허용되지 않는 우리나라에선 원칙적으로 불법이다. 그래서 여성들은 브로커가 추천하는, 성분이 뭔지도 모르는 가짜 약을 비싼 돈을 주고 사먹고 있으니, 낙태금지법이 도대체 누구를 위한 법인지 의문이 든다.

고무적인 점은 남성들이 댓글을 다는 비율이 압도적으로 높은 네이버에서도 낙태합법화에 대한 지지가 더 많다는 사실이다. 낙태에 관한 기사마다 추천수가 가장 많은 베스트댓글은 대개 이런 식이다. “낙태합법화 적극 지지함.” “나도 남자인데 낙태는 여자 인권 문제인 것 같다. 낙태금지는 아직 태어나지 않은 생명보다 지금 있는 산모의 인권을 무시한다.” “싸튀충 (사정하고 도망가는 남성을 지칭함) 처벌법부터 만들던가. 애는 뭐 혼자 만들었냐?” “낙태 반대하는 놈들 실명을 밝혀라. 그놈들에게 강제 입양하면 된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보건복지부는 지난 8월17일 낙태 수술을 한 의사의 자격을 1개월 정지하는 행정규칙을 공포해 논란을 일으켰다. 산부인과 의사들은 더 이상 낙태 수술을 하지 않겠다고 선언했다. 8년 전 그랬던 것처럼 낙태를 하러 간 여성들은 “안 한다”는 말에 쓸쓸히 발길을 돌린다. 그들이 이대로 포기하지 않을 거라는 건 다들 알고 있다. 혹시 낙태금지를 강화하는 게 출산율을 높이려는 계략이라면, 이건 번지수가 틀렸다. 프랑스 등 낙태를 합법화한 나라의 출산율이 우리보다 훨씬 높으니 말이다.

1879년 여섯 번째 아이로 태어난 마거릿 생어는 열한 명의 자녀를 낳고, 그것도 부족해 여러 차례 유산을 거듭하던 어머니가 한창 나이에 죽는 걸 보고 피임에 관해 생각한다. 생어는 “어머니가 될지 아닐지를 여성이 결정할 수 있어야 한다”고 주장하며 1916년 미국 최초로 산아제한 클리닉을 연다. 그를 불편해한 권력자들 때문에 한 달 동안 옥살이를 해야 했지만, 생어는 그래도 포기하지 않고 세상과 싸웠다. 그 결과 지금은 피임을 안 한다고 뭐라고 할지언정, 피임을 부도덕한 일로 보는 사람은 거의 없다.

낙태가 여성의 당연한 권리로 여겨지는 것도 그리 오랜 시간이 걸리지 않을 것 같다. 2018년 5월, 아일랜드에서는 낙태 허용을 위한 헌법 개정을 놓고 국민투표를 실시했는데, 68%가 낙태금지법 폐지에 투표했다. 놀라운 점은 아일랜드가 보수적인 가톨릭이 지배하는 나라라는 사실이다. 갑자기 걱정이 된다. 우리가 1등은 못할지라도 꼴찌는 하지 말아야 할 텐데, 우리 정부는 왜 자꾸 뒤로 가는지.

<서민 | 단국대 의대 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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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난 14일, 일본군 ‘위안부’ 기림일 행사에 참석했다. 천안 국립 망향의동산으로 가는 버스 안에서 “안희정 무죄” 소식을 들었다. 예상하지 못했고 동승한 여성들도 술렁거렸다. 이번 재판은 대단히 중요하다. 유력 인사의 사건이어서가 아니라 권력형 성폭력의 전형이기 때문이다. 미투 운동에 대한 한국 사회의 ‘대답’이기도 하고, 김지은씨가 많은 여성들에게 용기를 주었기 때문에 다른 미투 사건의 피해자들에게도 충격이 아닐 수 없다.

이번 재판의 가장 중요한 쟁점은 위력(威力)에 대한 인식이다. 재판부는 피해 여성이 경험한 위력의 정도가 의사 표현을 불가능하게 할 상황은 아니었다고 판단했다. 여성을 포함해 많은 이들도 “피해자가 성인이고, 가해자 행동에 대해 자기주장을 할 시간이 충분했는데 왜 그런 관계를 ‘유지’했는지” 의문을 갖는다.

일러스트_김상민 기자

이번 사건은 노동시장, 그것도 선거캠프라는 특수한 공간에서 일어난 여성 노동 이슈다. 가해자는 공적 영역의 노동 문제를 사적인 관계로 둔갑시켰다. 수행비서의 노동은 지사의 모든 공적, 사적 일정을 파악하고 매사에 즉각적으로 대응해야 하는 ‘24시간 대기와 노동 상태’였다. 지사 개인의 하루가 곧 비서의 업무시간이었다. 모든 연락 사안에 대한 응대부터 담배, 맥주 심부름은 물론 가장 중요하게는 가해자를 위한 감정노동까지 그녀에게는 업무였다.

다시 말해, 남성이라면 하지 않았을 일을 여성은 해야 했다. 가해자는 부하 직원을 녹초가 되도록 부려 먹으면서, 노동자가 여성이라는 이유로 이를 ‘사랑(불륜)’이라고 주장했다. 피고용인에 대한 폭력을 ‘남녀관계’로 만드는 것은 피해자에게 책임을 전가하는 유용한 방식이다. 아무리 선거캠프라고 하지만 고용계약, 초과 착취, 불법 노동 문제를 왜 ‘연애’ 담론으로 연결시키는지 이해할 수 없다.

재판부는 “법은 만인에게 평등하다”는 정언을 만인에게 적절하게 적용하지 못했다. 위력의 원리와 조건은 천차만별이다. 어떤 사람들이 어떤 영역에서 어떤 상호 작용을 통해 작동하는지 모른다면, 위력의 의미를 파악할 수 없다. 재판부는 위력의 의미를 좁게 해석했다기보다 무지했다. 위력은 발생 상황에 대한 이해 없이는, 인지 불가능한 권력이기 때문이다.

위력에서 자유로운 인간은 없다. 재판부도 가해자도 보통 시민들도, 상황에 따라 위력의 위협에 노출된다. 피해자의 대응은 당사자의 캐릭터, 젠더, 계급, 나이 등에 따라 다르다. 이번 사건에서 위계의 내용은 전적으로 가해자에게 유리했다. 사망에 이르게 할 정도의 상해가 동반되는 성폭력도 있지만, 이번 사건처럼 실제로는 위력이나 가해자가 자신을 ‘고용인’이 아니라 ‘남성’이라고 주장하는 권력형 성폭력은 폭력이 아니라 성(性)이라는 통념에 부합하기 때문이다.

남성과 여성의 권력관계를 뜻하는 젠더는 친밀성부터 폭력, 살인, 착취까지 극단의 양상을 동시에 띤다. 젠더처럼 일상의 정치는 없다. 그래서 젠더에 대한 인식이 낮은 사회는 성폭력을 지지, 방관할 수밖에 없고 특히 피해자의 행동을 이해하기 어렵다. 내가 가정폭력을 연구할 때 가장 많이 받은 질문은 “왜 매 맞는 여성은 탈출하지 못하는가” “왜 때린 남편에게 북엇국을 끓여주는가” “왜 남편을 불쌍히 생각하는가”였다. 나는 “안기부에서 고문당하는 사람은 왜 탈출하지 못하나요, 혹시 폭력을 즐기는 건 아닌가요?”라고 되묻거나 “폭력 피해 여성이 남편에게 ‘잘해’ 주는 이유는 자신의 도덕적 우월성을 증명하고 싶기 때문”이라 말했다.

여성은 자신에게 불리한 남성 중심 사회에서 적응과 저항이라는 이중 행동을 해야만 살아남을 수 있다. 인간은 합리적이고 일관된 존재이며 자유 의지를 가졌다는 근대 형법의 전제는 의심받고 있다. 그런 인간은 존재하지 않기 때문이다. 성폭력뿐 아니라 인간의 어떤 행동도 명확하게 ‘예’ ‘아니요’로 설명할 수 없다.

내가 혹은 다른 여성이 이번 사건의 피해자와 같은 노동 조건에서 일했다면, 어떤 선택을 했을까. 당장 그만두는 여성도 있겠지만, 자신이 피해자라는 사실을 깨닫지 못하고 미투 운동에 참여하지 못한 여성도 있을 수 있다. 재판부는 전자만을 ‘정상’이라고 판단한 것이다. 그러나 남성 중심 사회에서는 후자인 여성이 훨씬 많다. 남성도 마찬가지다. 상사에게 폭력을 당했다고 곧바로 경찰에 신고하는 남성은 흔치 않다.

성적자기결정권은 누구에게나 있다. 문제는 그것을 행사할 수 있는 조건이다. 피해 여성은 처음에는 가해자에게 위력(偉力), 즉 존경심을 품고 있었다. 그래서 계속되는 의문 속에서도 헌신적으로 일했다. 위력(爲力), 온 힘을 다한 것이다. 전혀 다른 의미의 세 가지 ‘위력’이 모두 완벽하게 가해자에게 유리했다. 가해자의 힘, 피해자가 일을 중단하지 못한 이유, 피해자의 근무 태도.

결국 피해 여성의 ‘헌신’은 성폭력으로 돌아왔다. 재판부의 여성 노동에 대한 이해가 획기적으로 개선되기를 기대한다.

<정희진 | 여성학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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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날은 8월14일, 일본군 ‘위안부’ 기림일이었습니다. 27년 전, 고 김학순 할머니께서 강철보다 단단한 벽을 넘어 너무나도 어렵게 그러나 너무나도 당당하게 수많은 기자들이 모인 곳에서 자신의 경험을 밝힌 날이었습니다. 자연스러운 남성의 성욕이자 여성의 숙명으로 여겨져 피해자가 감추어야 할 정조에 관한 죄일 때, 가문의 수치이자 민족의 수치로 손가락질당할 때, 바로 그 일이 가부장제와 식민주의, 군사주의가 공모한 어마어마한 성폭력 범죄행위임을 낱낱이 전 세계에 알린 그날이었습니다. 가족과 공동체, 국가가 모두 외면하던 시절, 피해자가 생존자로 다시 활동가로 거듭나면서 수많은 다른 피해자들의 손을 잡기 시작한 그날, 전 세계를 돌며 ‘거리에서, 강연장에서, 법정에서’ 피해 사실을 알리고 진실을 규명하고자 했던 그래서 체계적이고 구조적인 성폭력과 강간캠프라는 개념을 통해 세계 인권규약을 다시 쓰기 시작했던 그날, 그 정신을 기려 일본군 ‘위안부’ 피해자 국가기림의 날로 지정된 그날, 대통령이 “우리 자신과 일본을 포함한 전 세계가 전체 여성들의 성폭력과 인권문제에 대해 깊이 반성하고 다시는 되풀이하지 않겠다는 굳은 각성과 교훈으로 삼”자고 강조한 그날, 대한민국은 당사자들로부터 ‘많은 것을 빚졌고 많은 것을 배웠다’고 선언한 그날, 바로 그날이었습니다. 당신들은 아무것도 빚진 것이 없다고, 성폭력과 여성인권에 대해 아무것도 배운 것이 없다고 뻔뻔하게 선언했습니다. 사회적 타살을 감내하며 어렵게 나온 피해자들의 입을 다시 봉하는 판결을 감행했습니다.

문재인 대통령이 14일 충남 천안시 국립망향의동산에서 열린 ‘일본군 위안부 피해자 기림의날’ 첫 정부 기념식을 마친 뒤 피해자인 김경애 할머니에게 인사하자 김 할머니가 문 대통령의 얼굴을 어루만지고 있다. 청와대사진기자단

그날은 코소보, 예멘, 우간다, IS 성폭력 생존자들이 기림일을 맞아 ‘일본군 성노예제 문제해결을 위한 정의기억연대’가 개최한 국제심포지엄에 참가해 각자의 경험을 증언하고 손잡던 날이었습니다. 생존자들이 나서서 조직적 성폭력의 의미를, 현실을, 그 참혹한 결과를 알리고 저항하며 세상을 바꾸자고 결의하던 날이었습니다. “한국의 강인한 (일본군 ‘위안부’) 생존자분들은 저희의 영웅이십니다. 견디기 힘들고, 가슴이 찢어질 듯하고, 끔찍하고, 고문과 같고, 위안이 되기 어려운 아픔과 함께 살아야 하는 절망의 깊이 속에서도 여러분들은 저희에게 영감이 됩니다”라고 말하며 연대를 다지던 그날, 증거를 인멸하고, 피해자들에게 입증을 요구하고 공소시효가 지났다고 발뺌하고 피해자의 행실과 자격을 묻고 진술의 신빙성을 의심하고 심지어 없었던 일, 꾸며낸 일, ‘거짓말쟁이’ ‘더러운 ○○’라며 온갖 욕설과 수치심을 안겨 준 가해자들, 그리고 그 옹호자들과 힘겹게 싸워온 지난 세월을 서로 나누던 그날, 일본군 ‘위안부’ 생존자 김복동 할머니께서 여성들의 ‘광복’과 명예회복의 의미를 다시 확인시키던, 바로 그날이었습니다. 당신들은 피해자를 피의자로 완벽히 둔갑시킨 판결문으로 가해자에게 무죄를 선고했습니다. 위력의 존재와 위력의 행사를 구분하며, 피해자의 행실을 의심하고 증언의 신빙성을 따지는 최악의 2차 가해로 전 세계 용감한 생존자들을 경악하게 했습니다.

그래서 우리는 다시 거리에 나섰습니다. 단순히 안희정씨 사건의 재판관들에게 항의하기 위함이 아닙니다. 당신들의 가해행위, 편파수사, 편파판결, 편파보도를 규탄하려 모였습니다. 불법촬영·유포·소지·방조자들과 웹 하드 업체, 쾌락산업이란 명목으로 일상적으로 여성 몸을 거래하는 자들에 대한 공정한 수사와 처벌, 여자 화장실마다 뚫려 있는 ‘구멍’들의 실체 규명, 포털 사이트 댓글만 봐도 접할 수 있는 여성에 대한 끔찍한 욕설과 비방에 대한 반성과 자제, #미투운동 이후에도 역사의 도도한 흐름을 거스르는 무지하고도 공고한 남성연대체의 해산을 촉구하기 위함입니다. 

당신은 최근 페미니즘이 왜곡되고 과격하게 변형되었다고 말씀하시지요? 페미니스트들은 어떤 누구와 전쟁을 하고 있는 것이 아닙니다. 인간다운 처우를 위해, 동등한 교육을 위해, 참정권을 위해, 보다 나은 노동 조건을 위해, 동등하게 돌볼 권리와 책임을 위해, 질 좋은 공보육 시설을 위해, 재생산의 정의를 위해, 혼자든 누구와 함께하든 당당하게 살 수 있는 권리를 위해, 거리에서 안전할 권리를 위해, 매 맞지 않기 위해, 강간당하지 않기 위해, 그리고 죽지 않기 위해 싸워왔습니다. 특정한 집단이나 사람을 해치거나 죽이기 위해 군사훈련을 한 적도 가스실을 설치하거나 생체 실험을 하거나 집단 강간소를 만든 적도 없습니다. 페미니즘 때문에 누가 일상이 두렵고 목숨의 위협을 느끼고 다치고 강간당하고 죽었습니까. 무엇이 과격하고 위험한지요. 공정한 판단, 공정한 수사, 공정한 판결, 공정한 취재가 어렵다고 한다면 그건 당신의 문제입니다. 광복 73주년, 세계인권선언 70주년, 촛불혁명 2주년 이후에도 여성들에게 해방과 정의는 오지 않았습니다. 여성에게 국가는 없습니다.

<이나영 | 중앙대 교수·사회학>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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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난 28일 방영된 SBS <그것이 알고 싶다>(이하 <그알>)는 성범죄동영상 피해자가 스스로 목숨을 끊은 뒤에도 해당 영상이 사라지기는커녕 ‘유작(遺作)’이라는 이름으로 유통되는 충격적인 실태를 고발했다. 피해자는 전문업체에 돈을 주고 삭제를 의뢰했지만 동영상이 사라지지 않자 결국 극단적인 선택을 하고 말았다. 영상은 피해자가 숨진 뒤에도 웹하드 사이트에서 100~150원에 거래돼 왔다고 한다. 경악스러운 일이 아닐 수 없다.

<그알>은 성범죄동영상을 전문적으로 올리는 이른바 헤비업로더와 웹하드사이트 운영업체 간의 범죄적 공생관계를 파헤쳤다. 웹하드 업체들은 높은 수익을 가져다주는 성범죄동영상 업로더들을 경찰의 단속이 미치지 않도록 감싸왔다고 한다. 경찰이 업로더의 신원정보를 요청하면 업체들은 외국인 명의의 가짜정보를 보내 조사를 막는다. <그알> 취재에 응한 헤비업로더는 웹하드 측이 ‘신변보호를 해줄 테니 일을 계속해달라’고 요청할 정도였다고 폭로했다.

웹하드 업체들은 불법영상물을 걸러내는 ‘필터링’ 기술을 보유하고 있지만 매출하락을 우려해 필터링을 하지 않고 있다는 업계 관계자 증언도 나온다. 웹하드 업체들이 성범죄동영상 업로더들과 공범상태에 있거나 한술 더 떠 범죄를 교사하고 있는 형국이다. 현실이 이렇지만 사법당국이 이들에 대해 제대로 된 단속과 처벌을 하고 있는지는 의문이다. <그알>에 등장한 헤비업로더는 경찰에 적발됐지만 벌금 5만원을 받는 데 그쳤다고 증언했다.  

지난 4월 말 문을 연 디지털성범죄 피해자지원센터에는 두 달여 만에 800명 가까운 여성 피해자들이 영상물 삭제를 요청했고, 삭제지원 건수도 3000건을 넘어섰다. 하지만 한번 유포된 불법 동영상이 완전히 삭제되는 일은 드물다. 일본에서 합법적인 성인영화인 것처럼 유통된 뒤 국내에 역수입되고 있다는 증언도 나온다. 성범죄영상물 피해자들이 성폭력 피해자보다도 더 심각한 후유증에 시달리는 것은 이처럼 ‘한번 찍히면’ 근절되기 어려운 현실 때문일 것이다. 

많은 여성들이 디지털성범죄의 피해자가 될지 모른다는 불안감을 떨치지 못하고 있다. 이런 불안감은 수만명의 여성들이 세 차례나 서울 도심에 모여 불법촬영을 규탄하는 대규모 시위로 이어지고 있다. 사법당국은 디지털성범죄의 실상을 분석해 치밀하고 종합적인 근절대책을 마련해야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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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앳된 얼굴의 키가 작은 여자 손님이 카스 두 캔과 감자칩 한 봉지를 카운터 위에 올려놓다 말고 고개를 갸우뚱거리며 그녀에게 물었다. 혹시 홍미영 교수님 아니세요? 그녀는 제대로 고개를 들지 못한 채 어수룩하게 대답했다. 아, 아닙니다. 다행히 여자 손님은 더 이상 아무것도 묻지 않고 편의점을 나섰지만, 그날 이후 그녀는 나이가 어려 보이는 손님이 편의점으로 들어설 때마다 반사적으로 긴장하는 몸의 습관을 갖게 되었다.”

조해진의 소설 <산책자의 행복>에는 구조조정 여파로 대학 강사직을 잃고 편의점 야간 아르바이트를 하는 홍미영이 등장한다. 그녀는 실직 이후 함께 사는 아픈 어머니의 병원비와 은행 빚을 감당하지 못해 파산하고 기초생활수급자가 되면서 빈곤층으로 추락한다. 힘들어하던 제자의 손을 잡고 “살아 있는 동안엔 살아 있다는 감각에 집중하면 좋겠다”고 이야기하던 다정한 스승은 사라진 지 오래다. 대학 철학과 강사에서 편의점 알바가 된 주인공이 나오는 소설을 읽을 때만 해도 ‘너무 극단적인 상황 아닌가’ 싶었는데 웬걸, 한국의 현실은 소설보다 더 나쁘다.

얼마 전 인터넷을 달궜던 최영미 시인의 ‘호텔 투숙 편의 요청’이 바로 그렇다. 일전에도 최영미 시인은 “연간소득이 1300만원 미만이고 무주택자이며 재산이 적어 빈곤층에게 주는 근로소득장려금 대상이 되었다”는 고백으로 화제가 된 바 있다. 내게는 편의점에 들르는 제자들이 자신을 알아볼까봐 전전긍긍하는 소설 속 홍미영 교수보다 자신의 궁핍한 경제적 상황을 솔직하게 알리고 농담 반 진담 반의 글을 올렸다가 홍역을 치른 ‘(전) 베스트셀러 시인’ 최영미가 훨씬 소설 속 인물처럼 느껴졌다. 시인의 현실이 소설이면 얼마나 좋겠냐만, 김명인 교수의 지적대로 이번 논란의 본질은 “시인이라는 돈 안되는 타이틀을 가진, 의식주를 걱정하며 살아가는 한 사람의 50대 중반 빈민 독신여성”의 문제다. 논란 이후 최 시인은 집주인의 월세 계약 연장과 함께 한 호텔에서 투숙 제공 의사까지 전달받은 상태다. 훈훈하게 끝났으니 해프닝쯤으로 치부하고 넘어가기에는 최 시인의 상황이 결코 특수하지 않다는 현실이 문제다. 최근 <반지하 앨리스>라는 시집을 내고 사진전을 연 신현림 시인도 하루에 한 시간만 햇빛이 들어오는 반지하에서 10년간 살았다고 하니 비슷한 처지다.

한국 사회가 돈 없는 사람에게 유독 가혹하다는 현실을 차치하고서라도 ‘여성, 비혼, 소속 없음’으로 살다 보면 가난 혹은 빈곤이라는 단어와 필연적으로 만날 수밖에 없다는 현실은 처참하다. 취업 시장에서 ‘남성이 최고의 스펙’이라는 말은 취업 이후에도 크게 달라지지 않는다. 정규직 근로자 중 여성 비율은 38.7%로 남성 62.3%에 한참 못 미치고, 여성 가구주의 절대 빈곤율은 20.1%인 데 비해 남성 가구주의 절대 빈곤율은 5.1%다. 여성 전체 노동자의 약 40%가 ‘일을 해도 가난한’ 근로 빈곤계층이고, 전문직 내 여성 집중 상위 6개 직업의 월평균 임금조차 214만원에 불과하다.

해외에서는 같은 커피를 팔면서 남성 손님에게 돈을 더 받는 카페까지 등장했다. 호주 멜버른의 ‘핸섬 허(Handsome Her)’ 카페는 같은 일을 해도 남성이 여성보다 더 많은 임금을 받는 구조적 격차(Gender Gap)를 가격표에 반영, 남성에게 가격의 18%를 더 내게 한다. 15년 연속 경제협력개발기구(OECD) 회원국 중 1위인 한국의 남녀 간 임금 격차는 36.3%이니, 한국에도 이런 카페가 생긴다면 남성들은 37%쯤 비싼 가격을 지불해야 할지도 모르겠다.

모든 여성의 인생이 동화나 셰익스피어의 희곡처럼 결혼으로 끝나지 않는다. 결혼을 하지 않아도 삶은 계속되는데, 한국은 결혼하지 않은 가난한 여성들이 어떻게 살아야 할지에 대해 아무런 답도 갖고 있지 않다. 30~40세 미혼 여성 인구는 10년 새 2배 넘게 급증한 반면 국가는 결혼하지 않는 여성에는 무관심하고 출산하지 않는 여성을 걱정하느라 바쁘다. 소설 속의 홍미영 교수와 현실의 최영미, 신현림 시인은 ‘열심히 일하지만 가난’하다는 점에서 꼭 닮았고, 그래서 슬프지만 이렇게라도 가시화되었다는 점에서 다행스럽기도 하다. 아직 늦지 않았다. 지금부터라도 혼자라서 더 괜찮지 않은 여성의 가난에 대해 더 많은 관심과 이야기가 필요하다.

<정지은 | 문화평론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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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1791년 프랑스. “여성은 자유롭게, 그리고 권리에서 남성과 평등하게 태어나며 그렇게 존속한다.” 올랭프 드 구즈는 ‘여성과 시민의 권리선언’을 발표한다.

프랑스 대혁명이 내건 자유와 인권은 남성들의 몫이었고, ‘인간은 누구나 평등하게 태어났다’지만 인간은 남성만을 의미했다. 그는 ‘인간과 시민의 권리선언’을 여성의 관점으로 비판하고 보충한다.

“여성이 단두대에 올라갈 권리를 가지고 있다면, 연단에 올라갈 권리도 가져야 한다”는 그 유명한 10항은 시민으로서 여성의 동등한 권리와 참여를 요구한 것이었다. 1793년, 자신의 말이 예언이라도 된 듯, ‘성별에 적합한 덕성을 잃어버린 사람’으로 비난받고 단두대에 오른다.

세계여성의날인 3월 8일 오후 서울 광화문광장에서 여성 노동계가 주최한 조기퇴근 시위 ‘3시 스톱(STOP)’에 참가한 여성 노동자들이 ‘유리천장 아웃(OUT)’이 적힌 우산을 들고 성평등 정책을 촉구하고 있다. 박민규 기자

#2. 1792년 영국. “여성이 처한 비굴한 의존 상태를 위장하기 위해 남성이 선심 쓰듯 내뱉는 귀엽고 여성스러운 어구들과, 여성의 성적 특징으로 간주되어 온 나약하고 부드러운 정신, 예민한 감성, 유순한 행동거지 등을 거부하고, 아름다움보다 덕성이 낫다는 걸 밝히려 한다.”

메리 울스턴크래프트는 ‘여성의 권리 옹호’를 발표한다. 여성은 남성의 소유물에 불과하고 어떠한 경제적, 정치적 권리도 갖지 못하던 당시, 인간은 동등한 이성과 동등한 권리를 가지고 태어났지만 성별에 따른 불평등한 교육과 편견체계 아래서 다르게 형성되어 간다고 지적하고, 인간으로서 여성의 권리를 요구한 그의 주장은 파격적인 것이었다. “여성이 인간 대접받는 사회를 만드는 것”이라던 그의 소원은 다가올 여성들의 오랜 투쟁을 예고했다.

#3. 1898년 조선. “슬프다! 전날을 생각하면 사나이의 위력으로 여편네를 누르고, 구설을 핑계로 여자는 안에 머물면서 밖의 일을 말하지 않고, 오로지 밥하고 옷 짓는 것만 하리오. 어찌하여 신체와 수족과 이목이 남자와 다름없는 사람으로 규방에 갇혀 밥과 술만 지으리오.”

이소사와 김소사는 ‘여권통문’을 발표한다. ‘여성도 남성과 동등한 인간’이라 선언하고 평등한 교육권과 노동권, 경제권을 강조한 우리나라 최초의 여성인권 선언문이었다. 이들은 여권통문 발표 이후 서민층 부녀와 기생들, 지방의 부인들과 함께 최초의 근대적 여성단체인 ‘찬양회’를 조직하고 여성 교육권을 현실에서 구현하고자 노력한다. 고종황제에게 상소문까지 올렸지만 관립여학교는 설치되지 않는다.

#4. 1927년, 일제강점기 조선. “조선에 있어서는 여성의 지위가 한층 저열하다. 미처 청산되지 못한 구시대의 유물이 오히려 유력하게 남아 있는 그 위에 현대적 고통이 겹겹이 가하여졌다… 이와 같은 견지에서 사업을 전개하려 하는 것을 선언하나니 우리의 앞길이 여하히 험악할지라도 우리는 일천만 자매의 힘으로써 우리의 역사적 임무를 수행하려 한다.” 조선여자기독교청년연합회 강당에서 항일여성운동단체 ‘근우회’가 발족한다.

김활란·유각경·정종명·황신덕·주세죽·허정숙·정칠성 등 당대 자각한 여성들이 총망라되었고 회원 150여명, 방청인 1000여명이 참석했다고 한다.

‘여성에 대한 사회적·법률적 차별 철폐, 봉건적 인습과 미신 타파, 조혼폐지와 결혼의 자유, 인신매매 및 공창제 폐지, 농촌 여성의 경제적 이익 옹호, 여성 노동자에 대한 임금 차별 철폐 및 산전·산후 임금 지불, 부인과 소년공의 위험 노동 및 야근 폐지’ 등을 담은 행동강령은 당시로서도 획기적이었지만 아직도 대부분 실현되지 않은 주장들이다.

# 2017년 대한민국. 여성이 성적 대상, 가정부, 장식물, 보조적 존재, 재생산의 도구였던 시대에서 얼마나 더 나아갔을까. 독립이 오고, 전쟁이 사라지고 민주주의가 실현되며, 분배정의가 이루어지면 진정한 여성해방이 올 것인가.

여성들은 여전히 길거리에 앉아 있고 피켓을 들고, 집회를 하고 목이 터져라 성명서를 발표한다. 평등한 법과 제도를 만들기 위해, 법적 이중 잣대를 비판하기 위해, 불평등과 차별 해소를 위해, 재생산의 권리를 위해, 평등한 노동권을 위해, 임금격차 해소를 위해, 성폭력에 반대하기 위해, 성착취적 산업과 성구매를 비판하기 위해, 피해자 여성들을 보호하기 위해, 이름 없이 죽어간 여성들을 추모하기 위해.

“여성은 스스로 해방하는 날 세계가 해방될 것이다. 조선 자매들아 단결하라.” 90여년 전 근우회 창립 선언문은 슬프게도 여전히 유효하다.

<이나영 | 중앙대 교수·사회학>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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매해 7월 첫 일주일은 양성평등주간이다. 양성평등은 태어난 성별과 상관없이 여성과 남성 모두 동등한 기회, 책임, 권한을 가질 수 있어야 함을 의미한다. 하지만 일터와 가정에서 이중노동을 수행하고 있는 워킹맘들에게 양성평등은 여전히 먼 구호일 뿐이다. 여기서 중요한 것은 양성평등 사회가 여성뿐 아니라 남성의 삶과도 밀접한 관련이 있으며 남성의 참여를 전제로 한다는 것이다.

이제까지는 양성평등의 목표가 주로 남성을 기준으로 여성을 비슷한 수준까지 끌어올리는 것이었다면, 앞으로는 여성적 가치와 영역에 남성의 참여가 늘어나도록 해야 한다. 그러한 변화 속에서 사회의 차별적 요소가 빠르게 사라질 수 있기 때문이다. 그동안 주로 사적 영역에 머물러 있었던 여성들이 공적 영역으로 진출하게 되었고, 남성의 영역으로만 여겨져 왔던 군인, 경찰, 의료, 과학 분야를 비롯하여 정치 분야에서도 여성들의 점유율이 증가했다. 여성의 변화만큼 남성도 변화했는지 평가해 볼 때 그 움직임은 매우 더디다.

보육, 돌봄, 간병, 간호 등 타인을 돌보는 일에 종사하는 남성은 여전히 적다. 맞벌이 부부의 하루 평균 가사노동시간의 차이(남편 41분, 아내 193분) 또한 지난 10여년간 거의 변화가 없다. 육아휴직을 하는 남성의 비율은 전체 중 8%에 불과하다. 단지 참여와 시간의 문제일까? 오히려 무급의 가사노동과 돌봄노동에 대한 남성과 사회의 고정관념이 강하게 작동하는 것이 문제다. 아직까지도 인기를 끌고 있는 <슈퍼맨이 돌아왔다> 열풍은 남성 참여에 대한 사회의 변화와 기대를 잘 보여준다. 그런데 지난달 (BBC 인터뷰 방송사고로 세계적으로 유명해진) 부산대학교 로버트 켈리 교수 가족의 특별출연 방송분은 사회적 열망과 현실 사이에 큰 차이가 존재함을 알려준다. 이날 켈리 교수와 부인은 영어로 대화했고 방송은 두 사람의 대화를 반말과 존댓말로 자막처리해 논란이 있었다.

드라마와 예능, 광고 등에서 가사노동과 양육은 여성의 책임이며 남녀 역할에 대한 구분과 위계적, 차별적 시선은 여전하다. 특히 아동을 대상으로 한 프로그램에서도 이런 시선이 재현되고 있다. 아이들의 대통령이라고 불리는 한 애니메이션의 경우, 여성 등장인물은 2명에 불과하고 쇼핑이나 인형놀이, 집에 머무는 등 소극적인 모습으로 그려지기 일쑤다.

가사와 돌봄 노동, 성역할에 대한 남성의 태도가 유연하게 변하지 않는 상황에서 여성의 경제활동은 또 다른 여성들의 일방적인 헌신으로 이루어지고 있는 중이다. 젊은 세대들은 이러한 사회의 모순과 느린 변화에 희망을 걸지 않고 세계 최고의 출산 파업을 하는 것인지 모른다.

지금부터라도 제도화된 교육 안에 남녀 모두에게 억압과 불편함을 주는 ‘젠더박스(gender box)’를 깨는 양성평등 교육을 강하게 장착시킬 필요가 있다. 교육 기회가 증가한 것이 곧 교육 내용의 공정함을 보장하는 것은 아니기 때문이다. 스웨덴 유치원의 경우 남성 교사가 50%에 가깝다. 독일의 경우 2011년부터 ‘소년의날’을 제정하고(‘소녀의날’은 오래전부터 실시) ‘소년의 새로운 진로’ 프로젝트를 통해 남아들이 가지고 있는 지배적 남성성과 성별 전형적인 직업 이미지를 변화시키고자 노력하고 있다. 최저의 출산율을 보이고 있는 한국 사회는 양성평등에 대한 심각한 성찰과 변화가 이루어질 때 지속가능하게 될 것이다.

민무숙 | 한국양성평등교육진흥원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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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닐 미(未), 죽을 사(死). 아직 죽지 않았다는 뜻을 담아 은퇴 후 고령층을 국가에서 ‘미사자(未死者)’라고 지칭하기 시작했다. 대중매체는 ‘미사자 과잉 사회, 잉여 인구 어떻게 처리할 것인가’라는 식의 여론몰이를 일삼고 있다. 그런 분위기를 부추기기라도 하는 듯 행정자치부에서는 ‘대한민국 미사자 지도’를 지자체별로 순위를 붙여서 공개한다. 인터넷에서는 마치 기다렸다는 듯이 ‘늙은이들 잡으러 가자’, ‘우리 도시를 고려장 특화 도시로’ 같은 ‘농담’이 횡행한다.

물론 이 모든 상황은 가정법이다. 하지만 아마도 독자인 당신에게는 강한 불쾌함과 거부감이 느껴졌을 것이다. 당연한 일이다. ‘국가 경제’를 앞세워 멀쩡히 살아 있고 앞으로도 쾌적하고 행복한 삶을 누릴 권리가 있는 고령의 시민들을 ‘아직 안 죽은 짐짝’ 취급하는 내용이 한가득 담겨 있었으니 말이다. 눈치 빠른 독자라면 짐작할 수 있겠지만, 나는 지금 ‘대한민국 출산지도’ 이야기를 하는 중이다.

대한민국의 공론장에서 발언하는 그 누구도 ‘고령화 문제를 극복하기 위해 고려장을 부활시키자’ 따위의 발언을 하지 않는다. 그것은 절대 선택 가능한 대안으로 취급될 수 없고, 그래서도 안된다. 대신 은퇴 연령 조정이라던가, 연금 정책, 그 외 다양한 방법을 동원해 고령층을 보호하고 그들이 주체적으로 활동할 수 있도록 돕는다. 고령층은 ‘인구(人口)’이기에 앞서서 ‘인간(人間)’이다. 인간의 주체성을 박탈하는 사회 정책은 용납될 수 없다. 당연한 일이다.

그런데 이 당연한 상식이 왜 출산율 문제 앞에서는 통용되지 않는 것일까? 대한민국 출산지도가 공개된 후 얼마 되지 않아 한 인터넷 매체에서는 ‘남자들이 국방의 의무를 지듯이 여성들도 출산의 의무를 지고 애를 낳도록 해야 한다’는 칼럼이 버젓이 게재되었다. 인간을 강제로 죽이는 사회 정책이 용납될 수 없듯, 인간을 강제로 낳게 하는 사회 정책 역시 용납될 수 없다. 하지만 한국에서는 여성을 대상으로 한 발언이나 정책에서 인권의 기준치가 확 낮아진다. 나치 독일에서나 시행했었던 ‘의무 출산’ 정책이 아무렇지도 않다는 듯이 거론되는 그런 나라가 되어 있다는 말이다.

2017년 현재까지도 대한민국은 여자를 사람으로 취급하지 않는다. 인간이 아니라 인구로, 인구를 재생산하는 도구로만 바라보고 있다. ‘가임기 여성’들은 단지 자신들의 숫자를 세서 공개했다는 사실 때문에 분노한 게 아니다. 그 숫자, ‘빅데이터’를 취급하는 방식부터가 모욕적이기 때문에 화를 내는 것이다.

여성을 ‘주체’로, ‘주어’로 존중한다면, 대한민국은 여성들이 아이를 낳기 위해 ‘도와주는’ 방향을 모색할 것이다. 가임기 여성들의 숫자를 지자체별로 공개한다면 동시에 육아 시설이 어떻게 분포되어 있는지, 성별 임금 격차가 어떠한지 등을 함께 제시해야 마땅하다. 그래야 가임기 여성들이 어느 곳에서 아이를 낳고 기를지 결정할 때 도움이 될 테니 말이다. 그러나 정부에서 자료를 공개한 방식은 그와 정반대였다. 지자체별로 ‘순위’를 매겼다. 여성을 ‘목적어’로만 취급하는 것이다. 아이를 낳을 수 있도록 여성들을 보조하는 게 아니라, 지자체를 향해 ‘출산율을 높이라’는 지시를 내리고, 그 순위 경쟁을 위해 여자들이 아기를 ‘낳게 만들라’는 압력을 넣고 있다. 단순히 통계를 제시했을 뿐이지만 그 숫자가 제시되는 맥락과 방향 속에 너무도 많은 여성혐오와 멸시가 드러나 있는 것이다.

현재 대한민국에 절실한 것은 ‘출산율 대책’이 아니다. 여성을 온전히 주어의 자리에 놓는, 한낱 목적어의 대상으로 전락시키지 않는 여성 정책이 먼저다. 여자들이 볼 때 이 나라가 아이를 낳아도 되는 나라라면, 아이를 낳을 것이다. 출산율을 높여야 한다는 대의명분을 내걸고 온갖 여성혐오적 발언을 내뱉는 것이 별문제 아니라는 듯 받아들여지고 있는 한, 이 나라는 망하지 않을 도리가 없다. 출산율이 아니라 여성 인권이 문제의 본질이다.

노정태 | 자유기고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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현 대통령을 ‘최초의 여성대통령’으로 일컫는 것 자체에 불편함을 느끼는 여성들이 많다. 여성을 위한 정책을 제안한 적도 없고, 여성으로서의 의식도 존재하지 않는다는 이유에서이다. 그러나 ‘여성’을 단지 생물학적 범주로밖에 이해하지 못하는 사람들이 여전히 적지 않음을 생각하면, 여성이라는 생물학적 범주에 속하는 사람이 대통령이 되었다는 사실을 너무 과소평가할 필요는 없다. 한때는 ‘단지 생물학적으로 여성’이라는 이유만으로 공직에 접근하는 것 자체가 금기시된 시절이 있었기 때문이다. 적어도 ‘여자가 무슨 정치!’라고 공공연히 훈계하는 사람들의 숫자는 줄어들었다.

물론 현 대통령이 선출된 데에 여성이라는 요소는 크게 작용하지 않았다. 오히려 ‘여성이기 때문에’라는 생물학적 금기조차 무색하게 만드는 ‘아버지의 후광’이 가장 중요했다. ‘박’가에게 통치권을 돌려줘야 한다는, 일종의 ‘역성혁명’의 논리였다고까지 말할 수 있을 것이다.

역성혁명이란 새 왕조의 옹립을 의미한다. 국정교과서를 통해 박정희 정권을 영원히 미화하려는 것이나, 국가예산을 들여 광화문에 박정희 동상을 세우겠다거나, 옥천군 예산으로 육영수 숭모제를 지내겠다는 계획은 ‘대통령’에 대한 평가보다는 오히려 ‘나라님 숭배’의 정서에 가깝다. 청와대라는 ‘구중궁궐’에서 자란 ‘비운의 공주’ 이미지가 사실상 많은 지지자들을 사로잡았다. 그러한 전근대적 역성혁명의 결과가 현재의, 아무도 이해할 수 없는 이 전근대적인 국정농단이다.

박근혜 대통령이 '2016년 여성 신년인사회'에서 건배를 하고 있다. 청와대사진기자단

현 대통령이 여성이라는 사실이 그렇게 중요하지 않았던 만큼, ‘대통령이기 이전에 여자로서 보호받아야 한다’거나, ‘여성대통령의 사생활이기 때문에 세월호 7시간에 대해서 묻지 못했다’는 말들은 어처구니가 없다. 걸핏하면 여성혐오 발언과 사건들이 불거지는 대한민국에서, 여성이 그토록 고귀한(?) 존재인지 아무도 상상할 수 없었기 때문이다. ‘생물학적 여성’의 수치심이 국정농단의 범죄보다, 300명 이상의 목숨보다 우선적으로 고려되어야 할 만큼, 대한민국이 그렇게 여성을 맹종하는 사회였던가?

발언자들의 의도와는 반대로, 이러한 발언은 대한민국 여성을 ‘김치녀’로 매도하는 여성혐오의 문법과 다르지 않다. 그것은 현 대통령을 옹호는커녕, 혐오의 대상으로 만들었다. 김치녀로 표현되는 여성혐오의 출발점이 바로 ‘여성이 무슨 벼슬이나 되는 줄 안다’는 남성들의 지레짐작이기 때문이다. 여성이 실제로 처한 상황이나 경험에 대해 알려고 하지 않으면서, ‘단지 생물학적으로 여성이라는 이유만으로 최대의 이익을 거두려 한다’는 ‘상상과 억측’이 여성혐오의 출발점이기 때문이다. 그런데 여성 대통령을 ‘모시는’ 이 ‘신사(?)’들의 발언은 바로 이 상상과 억측에 기초해 있을 뿐만 아니라, 뻔뻔스럽게도 그것이 충성이라고 주장하는 행위이다.

한국 사회에서 여성혐오는 좌우, 학력, 세대, 계층적 차이와 무관하다. 심지어는 현 대통령을 철벽수비하려는 입장과 비판하는 입장마저 가리지 않는다. 여성대통령의 사생활 운운하는 ‘충신’들의 발언이 여성혐오적이라면, 대통령이 생물학적으로 여성임을 강조함으로써 조롱의 수위를 높이는 표현들 역시 여성혐오적이다. 그러나 생물학적 여성은 여성이라는 범주의 한 차원에 불과하고, 여성이라는 범주의 다른 특성들을 일방적으로 결정하지도 않는다. 단지 생물학적으로 여성이기 때문에 과도한 추앙이나 과도한 조롱을 받을 이유가 없다.

여성대통령의 ‘여성성’은 성적 이미지가 아니라, 젠더 불균형의 사회 문제를 해결하려는 자세를 통해서만 강조될 수 있다. 한국 사회에서 여성혐오가 보편적 현상이 되어가고 있다는 사실만이, 그리고 그러한 현상 뒤에 ‘여성들의 이기심’이 아니라 왜곡된 사회구조가 존재한다는 사실만이, 여성정치인의 여성성을 강조할 유일한 이유가 될 수 있을 것이다.

홍찬숙 | 서울대학교 여성연구소 책임연구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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