애초 역사교과서 국정화는 시작되지 않았어야 한다. 대체 역사를 국정교과서로 가르치는 나라가 얼마나 되나? 국정화를 중도에 그만둘 기회도 여러 번 있었다. 정말 많은 국민이 반대했을 때, 정책을 추진한 세력이 탄핵당했을 때, 교육부 스스로 올바른 교과서란 명칭을 포기할 정도로 편향과 부실이 명명백백하게 드러났을 때가 그랬다. 그런데 이게 뭔가? 교육부와 일부 시·도교육청이 온갖 꼼수를 동원하고 갖은 혜택을 준다는데도 채택하는 학교가 없다. 학교 구성원의 반대를 깔아뭉개고 억지로 밀어붙였던 일부 사립학교에서는 학생들까지 들고일어나서 반대한다. 대자보를 쓰고, 집회를 하고, 필리버스터를 하고….

역사교과서 국정화는 처음부터 역사교육 발전을 위한 정책이 아니었다. 김영한 전 청와대 민정수석 업무일지에서 드러났듯이 정권이 국민 편가르기를 통해 권력 기반을 다지려고 진행한 일이다. 주범이 단죄를 받고 있는 문화계 블랙리스트와 같은 목적으로, 같은 시기에 추진된 일이다.

20일 오전 경북 경산 문명고에서 학생들이 국정교과서 연구학교 지정 철회를 요구하는 집회를 벌이고 있다. 연합뉴스

학교가 학생들에게, 교육부가 국민에게 더 이상 부끄럽지 않으려면, 국정교과서 이야기는 이제 그만하자. 더 이상 통하지 않는 국·검정 혼용이니, 연구학교니, 보조교재로 보급한다는 따위의 이야기는 이제 그만하자. 그리고 교학사 검정 통과부터 3년 반 동안의 일을 교훈 삼아 역사교육을 새롭게 설계하기 위한 토론을 시작하자. 어떤 역사교육은 안 되는지, 어떤 역사교육을 지향할 것인지 지금이라도 대화의 장을 열자. 99.9% 학교가 채택한 교과서가 편향되었고 그 나머지 0.01%가 상식적이고 올바르다는 억지주장일랑 거두고, 헌법정신과 교육기본법에 나타난 민주시민 형성을 위한 역사교육의 방향을 토론해보자.

차제에 교과서 형태를 바꾸는 것도 고려해볼 만하다. 정선된 지식을 체계적으로 나열한 교과서를 바탕으로 한 5지선다형 지식 교육은 이제 끝내자. 토론수업이 가능하도록 풍부한 자료를 싣고, 학생들 스스로 생각하는 힘을 키울 수 있는 다양한 수업이 가능한 완전히 달라진 교과서도 상상해보자.

현재 진행하는 검정 일정은 일단 중지해야 한다. 44억원을 들여 1년 반 동안 만든 책에서 엄청난 오류와 편향이 드러나지 않았는가. 그런데도 대체 왜 편향되었다는 지금 집필기준을 적용하여 다섯 달 만에 검정교과서를 만들라고 강요하는가. 2017년에는 우선 역사교육의 내용이나 교과서의 형태에 대하여 많은 이들의 의견을 듣고, 이를 바탕으로 교육과정과 집필기준을 마련하는 해로 정하자. 검정 방식도 손을 보자. 최소한 지금 교육부가 정해놓은 1년6개월 이상은 보장해야 한다. 교육부가 검정 절차를 진행하더라도, 검정 기관의 내용 개입은 최소화하되, 전문가를 충분히 투입하여 오류가 없는 책을 만들자. 국정교과서 개발에 들인 돈의 10분의 1만 들여도 가능한 일이다.

새 교과서가 개발될 때까지는 지금 교과서를 그대로 쓰면 된다. 어차피 지금 교과서는 이명박 정부가 내용기준을 만들고, 박근혜 정부가 검정했으며, 그러고도 마음에 들지 않은 부분은 강제수정까지 했다. 그 책을 2020년까지 쓰면 위 일정을 확보할 수 있다.

역사를 공부하고 가르치는 일을 하지만, 역사가 요즘처럼 온 국민의 관심사가 되는 상황이 마냥 반갑지는 않다. 권력을 추구하는 이들이 역사교육을 정치적 동원 수단으로 활용하고, 그때마다 국민들이 이리저리 편을 갈라 갈등하는 일이 자주 일어나기 때문이다.

모든 국민은 존엄하다. 우리 헌법 10조의 가치다. 차이를 당연한 것으로 여기고, 다름을 당당하게 주장할 수 있도록 하며, 서로 다른 이들이 소통하면서 협력할 수 있는 방법을 알게 하는 역사교육을 할 수 없을까? 권력이 부당하게 역사를 이용하려 하지 않으면 가능한 일이다. 역사교육은 교사와 역사학자들에게 맡기고, 교육부나 정치권은 다른 일을 더 열심히 해주길 바란다. 학생들은 역사 말고도 여러 교과를 배우며, 교육당국은 교과 공부와 관련된 부분보다 훨씬 더 많은 일을 한다. 교육부 장관이 공대 교수 출신인 걸로 안다. 국정교과서 문제로 씨름하지 말고, 잘하실 수 있는 일로 국가에 헌신하길 바란다.

김육훈 | 역사교육연구소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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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도 이렇게까지 고될 줄은 몰랐을 것이다. 교육부 장관직을 제안받았을 때 교육을 위해 한몸 불사르리라 다짐했을 수도 있고, 가문의 영광이니 해보자고 자리욕심을 냈을 수도 있다. 부동산 투기·차녀 국적 포기 의혹이 제기됐지만 청문회를 무사히 통과했을 때 어려운 고비는 다 넘었다 여겼을까. 이준식 교육부 장관은 지난해 1월13일 취임했다. 박근혜 정부의 세번째 교육부 장관이다.

이명박 정부의 장관 후보자 4대 필수과목이 병역비리, 세금탈루, 위장전입, 부동산 투기였다면 박근혜 정부 장관의 필수과목은 첫째도, 둘째도, 셋째도, 넷째도 ‘자기최면’이다. 이 장관은 여러 부처 장관들 중에서도 조윤선 문화체육관광부 장관과 함께 발군의 자기최면 능력을 보이고 있다.

역사교과서 국정화 고시는 이 장관이 취임하기 전 발표됐다. 이 장관은 정권이 만든 “검정교과서의 좌편향이 심각해 국정교과서가 필요하다”는 논리를 되풀이했다(그가 8종 검정교과서들을 읽어봤는지는 모르겠다). 편찬기준도 집필진도 비공개해 ‘복면집필’이라는 비판이 나오자, “<복면가왕>도 노래가 끝나야 가수얼굴을 공개한다”며 웃었다(요즘 말로 이런 걸 ‘×드립’이라고 한다). “국가가 역사관을 독점하는 것은 독재국가에서나 있는 일”이라는 지적엔, “교과서가 공개되면 논란이 사라질 것”이라고 자신했다. 여기까지가 “우리는 ‘올바른 교과서(정부가 지은 국정 역사교과서 이름)’를 만들고 있다”는 1차 자기최면이다.

이준식 사회부총리 겸 교육부 장관(오른쪽 두번째)이 지난달 28일 오후 서울 세종로 정부서울청사에서 기자회견을 열어 중학교 역사 1·2, 고등학교 한국사 등 총 3종의 국정교과서 현장 검토본을 공개한 후 기자들의 질문에 답변하고 있다. 왼쪽부터 김낙년 동국대 경제학과 교수, 이주영 건국대 명예교수, 최대권 서울대 명예교수, 이 부총리, 김정배 국사편찬위원회 위원장 정지윤 기자

2차 최면은 국정 역사교과서 공개 이후 시작됐다. “역사교과서 국정화를 강행하는 것이 아니다”라는 최면이다. 국정 역사교과서에서 편향과 역사왜곡에 더해 기초적인 사실오류까지 무더기로 발견되자, 장관은 국정교과서 수정적용안을 내놨다. 2018학년도부터 국·검정교과서를 혼용하며, 2017학년도엔 원하는 학교만 연구학교로 지정해 국정교과서를 쓰도록 하겠다는 것이다.

교육부는 연구학교로 지정되면 가산점과 연구비 1000만원을 주며 연구학교 지정을 거부하는 교육청은 제재하겠다고 밝혔다(다시 말하지만 절대 강행하는 것은 아니란다). 연구학교 신청과 지정은 오는 2월10일까지 끝내야 한다(지금 학교는 방학 중이다). 2018학년도부터 적용되는 개정 교육과정 교과목들은 2021학년도 수능부터 반영되지만, 한국사는 1년 앞당겨 2020학년도 수능부터 적용한다(수능으로 학생과 학부모를 겁준다고 생각하는 사람이 나쁜 사람이다). 국정화 강행이 아니라 ‘국·검정혼용’이라는 구색을 맞추기 위해, 최소 2년 걸리는 검정교과서 개발도 1년 안에 끝내라고 통보했다(개발시간은 줄었지만, 검정교과서 심사는 강화하겠단다).

이 장관은 “학교현장의 혼란을 막는 것을 최우선으로 생각했다”고 강조했다. 박근혜 정부 장관들은 단체로 부끄러움을 잊는 주사라도 맞은 걸까. 서울대 교수로 20년을 재직한 장관이 ‘혼란’의 말뜻을 모를 리 없다. 자기최면이 아니고서야, 시정잡배나 쓸 법할 억지를 멀쩡한 얼굴로 반복할 리도 없다.

장관은 시한부다. 학생들이 국정교과서 몇 단원을 다 배우기도 전에 이 장관은 자리를 떠나게 될 것이다. 역사교과서 국정화 강행 외에도 교육부는 ‘최순실 특혜’ 의혹의 중심인 이화여대에 대학재정지원사업 몰아주기, 청와대 입김에 따라 국립대 총장 지명 미루기 등 여러 논란에 휩싸여 있다.

내일이면 취임 1년. 이 장관은 장관직 제의를 받았을 때 품었던 꿈을 얼마나 이뤘을까. 그는 1년 전 취임사에서 “무엇보다도 국민의 목소리에 귀 기울이고 국민이 원하는 교육을 실현하기 위해 열과 성을 다하겠다”고 했다. “항상 멀리 내다보고 올바른 방향으로 나아가도록 조타수 역할을 하겠다”고 했다. 최면에서 깨어나 거울 앞에 홀로 설 장관의 속마음이 궁금하다.

장은교 정책사회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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교육부가 중·고교 검정 역사교과서 집필기준을 바꾸는 방식으로 모든 검정 역사교과서의 국정화를 시도하겠다는 의도를 드러냈다. 친일·독재를 미화해 폐기해야 마땅할 국정 역사교과서를 되살리기 위해 온갖 편법을 동원하고 있는 것이다. 이준식 부총리 겸 교육부 장관은 그제 “기존 검정 역사교과서가 좌편향 논란을 부른 것은 검정 절차 탓이라는 지적이 있어 심사기준을 강화하겠다”고 밝혔다. 내년부터 국정 역사교과서와 함께 중·고교에서 쓰일 검정 역사교과서가 집필기준에 미달하면 검정 심사에서 통과시키지 않겠다는 뜻이다. 특히 검정 역사교과서 집필기준의 큰 틀을 국정 역사교과서 편찬기준을 따르도록 해 검정 역사교과서를 ‘제2의 국정 역사교과서’로 만들려는 얄팍한 속셈을 드러냈다. 1948년을 ‘대한민국 정부 수립’이 아닌 ‘대한민국 수립’으로 기술하고, 박정희·이승만 관련 내용과 북한의 도발 사례를 대폭 늘린 국정 역사교과서 편찬기준을 따르지 않는 검정 역사교과서는 탈락시키겠다는 것이다.

한국교육과정평가원은 출판사가 심사본을 제출하면 교육부 지침에 따라 심사하는 과정을 거친다. 출판사들로서는 교육부가 제시한 집필기준을 따를 수밖에 없다. 탈락하면 교과서 개발비를 회수할 수 없기 때문이다. 따라서 검정 역사교과서 필진이 자기 검열을 통해 국정 역사교과서 편찬기준을 따를 개연성이 높다. 검정 역사교과서가 ‘제2의 국정 역사교과서’가 될 가능성이 커지는 셈이다.

한국사교과서국정화저지네트워크 등 시민단체 회원들이 지난달 27일 정부세종청사 교육부 앞에서 국정 역사교과서 강행 중단을 요구하고 있다. 연합뉴스

국·검정 혼용 방침에 따라 검정 역사교과서의 집필기준을 새로 마련해야 한다는 교육부의 입장은 자신들이 이미 만들어 놓은 ‘검정교과서 집필기준’을 적용하지 않겠다는 뜻이다. 자기 부정이자 무원칙의 극치가 아닐 수 없다. 2015 교육과정 개정에 따른 검정 역사교과서 집필기준은 2015년 8월에 만들어졌다. 당시 교육부 위탁으로 역사 교수와 중·고교 교사 13명이 참여해 ‘한국사 교과서 집필기준’을 만들어 공청회까지 거쳤다. 하지만 국정화 고시가 발표되면서 해당 집필기준은 시안으로만 남아있다.

시민에게 탄핵당한 국정 역사교과서를 되살려볼 요량으로 꼼수만 쓰고 있는 교육부의 기회주의적 행태에 말문이 막힌다. 교육부는 시대착오적인 검정 역사교과서의 국정화 시도를 즉각 중단해야 한다. 그것만이 교육현장을 혼란에 빠뜨리지 않고, ‘박근혜표 국정교과서’에 부역해온 잘못을 속죄하는 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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교육부가 국정 역사교과서 현장 적용시기를 1년 늦추고, 2018년부터 국·검정 교과서를 혼용하는 방안을 내놨다. 친일·독재를 미화하고 역사적 사실을 왜곡해 ‘함량미달의 불량 교과서’로 판명난 국정 역사교과서를 폐기하지 않고 최악의 선택을 한 것이다. 즉각 폐기를 요구한 시민들의 뜻을 거스르고, 차기 정부에 부담을 떠넘긴 교육부의 행태는 무책임하기 짝이 없다.

이준식 부총리 겸 교육부 장관은 어제 “2018학년도부터 국정교과서와 함께 검정교과서를 선택할 수 있도록 하겠다”며 국정화 강행 의지를 드러냈다. 이 부총리는 또 “2017학년도에는 국정교과서를 희망하는 모든 학교를 ‘연구학교’로 지정해 1000만원의 지원금을 주겠다”고 밝혔다. 국정화를 밀어붙인 박근혜 대통령과 함께 시민들에게 탄핵당한 ‘좀비 교과서’를 되살려 보겠다는 기회주의적 행태의 극치가 아닐 수 없다. 당초 교육부는 국정 역사교과서 적용시기를 1년 유예하는 쪽으로 방침을 정했다가 새누리당 친박계와 황교안 대통령 권한대행의 의지를 꺾지 못하고 막판에 국정화 강행으로 돌아선 것으로 알려졌다. 국정 역사교과서 즉각 폐기를 선언해도 시민들의 분노를 누그러뜨리지 못할 상황에서 교육 현장의 극심한 혼란을 부를 최악의 선택을 한 교육부는 정권의 시녀 부처로 전락했다고 해도 할 말이 없게 됐다.

한국사교과서국정화저지네트워크 등 시민단체 회원들이 27일 정부세종청사 교육부 앞에서 국정 역사교과서 강행 중단을 요구하고 있다. 연합뉴스

교육부가 차기 정부에 부담을 떠넘기는 꼼수 대책을 내놓기는 했지만 국정 역사교과서가 학교 현장에 실제로 적용될 가능성은 희박하다. 주권자인 시민의 3분의 2가 역사교과서 국정화에 반대하고 있는 데다 전국 교육청 17곳 중 14곳이 국정 역사교과서를 채택하지 않겠다고 밝혔기 때문이다. 특히 국정교과서 금지법안이 내년 2월 말 야당 등의 주도로 국회에서 통과되면 교육부 의지와 상관없이 국정화 자체가 법적으로 차단될 수 있다.

국정 역사교과서는 수많은 역사적 사실의 오류, 내용의 전문성 결여, 해석의 정치적 편향성 등으로 학교 현장에서 도저히 사용할 수 없는 수준 미달로 판명났다. 한마디로 독재자 박정희 정권의 과오는 축소·왜곡하고 업적은 과대평가한 ‘박정희를 위한 박근혜의 효도 교과서’에 지나지 않는다. 오죽하면 인명진 새누리당 비상대책위원장도 “국정화 정책은 시작 자체가 잘못된 것”이라며 국정 역사교과서 폐기를 촉구했겠는가. 그럼에도 교육부는 지난 2년 동안 자신들이 심사해 통과시킨 검정 역사교과서에 대해 좌편향 운운하며 역사교육을 이념대결로 몰아갔다. 이들의 뇌리에는 오직 박 대통령 한 사람만 있었을 뿐 친일과 독재를 미화한 국정 역사교과서로 피해를 입을 학생과 학부모, 교사 등은 안중에도 없었다.

교육부는 더이상 시민들을 기만하지 말고 국정 역사교과서를 즉각 폐기해야 한다. 교육 현장에서 빚어질 혼란은 아랑곳하지 않은 채 역사교과서 국정화를 강행하는 것은 반역사적인 죄악이다. 교육부가 역사교과서 국정화를 포기하지 않는다면 촛불민심은 황교안 대통령 권한대행과 이준식 부총리를 향할 것임을 명심하기 바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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탄핵열차가 종착역을 향해 달리고 있다. 국회는 9일 박근혜 대통령의 국정농단에 대한 탄핵소추결의안 표결에 나선다. 탄핵은 가변적이다. 하지만 탄핵 결정이 난 뒤에도 박 대통령은 헌법재판소까지 탄핵사건을 가지고 가겠다고 한다. 끝까지 해보겠다는 것이다. 탄핵 정국의 혼란이 조속히 마무리되기를 바라는 시민의 기대를 저버리는 것이다. 탄핵 이후에도 정국은 긴 안개 터널이다.

국가를 경륜한다고 하는 것은 자기 몸을 괴롭히고, 정신을 피로하게 하고, 몸은 나그네가 머무는 집 같은 데 두고, 입은 문지기 같은 음식을 먹고, 손은 노예와 같은 일을 하는 것이라고 했다. 통치자는 시민들의 눈높이에서 공감하고 소통해야 한다. 그런데 그는 시대·시민과 불화를 자초하며 싸움에 빠져들었다. 그는 대통령에 당선된 이후 역사·시민·시간과의 전쟁을 벌이고 있다. 그는 아버지인 박정희 전 대통령의 명예회복에 나서며 역사에 싸움을 걸었다. 아버지의 명예회복은 그를 정치에 입문시키고 대통령에까지 이르게 한 원동력이기도 하다.

그는 자서전 곳곳에 박정희를 ‘국가만을 생각한 위대한 애국자’로 기록했다. 그는 1979년 박정희 피격사건 이후 “아버지의 혜택을 보았으면서도 많은 사람들이 표변했다”며 ‘배신자’라고 적었다. 세상이 뒤집힌 뒤 아버지에 대한 사회의 냉소적 평가에 불만을 토로했다. 그리고 대통령이 되자 재평가 작업에 나섰다. 역사교과서의 근대사 부분이 전교조의 이념에 경도돼 있다고 했다. 국정 역사교과서 추진을 통해 역사와의 전쟁에 나선 것이다.

그는 “바르게 역사를 배우지 못하면 혼이 비정상이 될 수밖에 없다”며 국정화를 집권 후반기의 주요 정책과제로 밀어붙였다. 그러나 반대여론이 빗발치며 참여 학자들이 부족하자 깜깜이로 모집해 ‘몰래 집필’에 들어갔다. 결국 만들어진 교과서는 편향성 시비에 몰리면서 누더기가 됐다. 사초를 찢고 개칠을 해도 역사는 바꿀 수 없다.

그는 40여년 전 개발시대의 프레임에서 한 치도 벗어나지 못했다. 그는 박정희 생존 당시 가족모임에서 ‘새마을 노래’를 불렀다고 했다. 그리고 대통령이 돼서는 아버지의 유산인 새마을운동 전파에도 몰두했다. 하지만 시대에 뒤떨어진 장단에 맞추는 이는 손에 꼽을 정도밖에 없었다. 지속가능한 것도 아니었다.  

그는 시민들과 대화하지 않았다. 오히려 맞서고 있다. 지난 10월29일 첫 촛불집회 이후 6차례에 이르면서 함성은 커지고 규탄의 목소리는 강해졌다. 지난 주말 집회에는 조직적인 동원 없이도 232만명에 달하는 시민이 광장으로 나왔다. ‘퇴진’ ‘하야’에서 이젠 ‘구속’으로 강도가 높아졌다. 그러나 국정농단에 자신은 하나도 잘못이 없다고 한다. 국민들은 그에게 나라를 맡겼으나 그는 모르쇠다. 그는 국민들이 인간다운 생활을 하고 차별받지 않고 평등하게 살 수 있도록 할 의무를 방기했다. 그는 세월호가 침몰할 때 머리를 만지고 있었으며 최순실이 딸 정유라를 위해 갖가지 편법을 동원할 때도 이를 방치했다. 어린 학생에게는 노력하면 잘살 수 있다는 희망이 아니라 ‘돈도 실력’이라는 좌절감을 안겨주었다. 청소년들은 장시호와 정유라가 불법·편법으로 명문대에 진학하는 현실에 절망했다.

그는 시간과의 싸움을 하고 있다. 시간을 벌기 위한 버티기다. 232만 촛불이 시간이 지나가면 꺼질 한시적인 화풀이 정도인 것으로 인식하는 듯하다. 그는 1차, 2차, 3차에 걸친 대국민담화를 하면서 차일피일 퇴진을 미뤘다. 그리고 어제 “탄핵이 가결되더라도 헌법재판소의 결정 과정을 보면서 제가 할 수 있는 일을 다하겠다”고 했다. 헌재까지 가서 싸우겠다는 것이다. 안타깝게도 김종필 전 자민련 총재의 “5000만명이 반대해도 고집을 꺾지 못할 것”이라는 예견이 맞았다. 탄핵안 가결 후 헌재 결정까지 최장 6개월이 소요된다. 그동안 국정혼란은 불을 보듯 하다.

국가적인 위기 상태다. 박근혜·최순실 국정농단 사태로 국정이 제대로 돌아가지 않고 있다. 내년도 성장률은 올해보다도 낮게 예상되는 등 경제지표들도 하나같이 좋지 않다. 조류인플루엔자가 전국을 덮치고 있다. 그는 국가와 국민을 위한다면서 국민을 볼모로 잡고 실익 없는 싸움에 나섰다. 그는 스스로 1원도 챙기지 않았다며 버티고 있다. 솜털보다 가벼운 법률지식을 가지고 자신의 방어막을 치고 있다. 끝까지 사익을 추구하지 않았다고 한다. 그러나 역사에 거슬러 ‘효도 교과서’를 만들고 아버지의 명예회복에 나선 것, 그 자체가 엄청난 사익 추구다. 국민은 합법적인 구제수단으로 목적을 달성할 수 없을 때 권리와 자유를 위해 실력행사를 할 수 있다는 점을 명심해야 한다.

박종성 논설위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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박근혜 대통령이 촛불에도 막무가내로 버티는 것은 과도한 권력욕 때문인가. 납득할 수 없다. 아무리 권력욕이 강해도 이토록 몰상식하고 몰염치하고 비양심적일 수는 없다. 분명 권력을 통해서만 획득 가능한 다른 무언가가 있을 것이다. 대통령 권력마저 수단으로 삼는 그 무언가가 비밀의 열쇠다.

박 대통령이 국정에서 결코 양보하지 않는 3가지가 있다. 경제성장, 대북강경론, 그리고 아버지 박정희 전 대통령이다. 대통령에게 하나만 고르라고 하면 뭘 선택할지 물어볼 필요도 없다. 그는 박정희의 딸일 뿐 아니라 정치적 후계자다. 박정희가 아프면 대통령도 아프다. 대통령은 영원히 아프지 않을 수 있는 수단을 교육에서 구했다. 바로 중·고교 국정 역사교과서다.

고교 한국사 검토본을 보면 무려 9쪽에 걸쳐 박정희를 다루고 있다. 5000년 역사를 다룬 교과서 전체 분량이 293쪽이니, 과도하다는 표현이 무색하다. 반면 김영삼, 김대중, 노무현, 이명박 전 대통령의 서술은 4명 모두 합해 0.5쪽에 불과하다. 박정희 이름은 23회나 언급하면서 다른 대통령은 평균 2~3회만 언급한 것도 말이 안된다. ‘효도교과서’가 아니라 ‘박정희 위인전’ 수준이다. 진짜 위인들과 비교해도 터무니없기는 마찬가지다. ‘성웅’ 이순신 서술은 2쪽, ‘대왕’ 세종은 1쪽이다. 안중근 의사와 류관순 열사는 각각 단 두 문장이다. 박정희는 역사 속 위인 모두를 합한 것보다 더 걸출한 위인인 셈이다.

11월 9일 서울 광화문광장에서 ‘한국사국정화저지네트워크’ 회원들이 열을 지어 국정 역사교과서 폐기를 주장하는 패널을 들고 시위하고 있다. 이준헌 기자

내용은 훨씬 더 심각하다. 박정희는 사회 모순과 가난을 타파하고 산업화, 선진화를 이끈 인물로 그려진다. 5·16쿠데타 단원은 쿠데타의 동기와 명분을 평가 없이 자세히 설명하고 있다. 역사교과서가 아니라 홍보물을 연상시킨다. ‘유신헌법과 중화학공업 육성’이란 단원 제목에서는 왜곡의 냄새가 풍긴다. 민주주의 말살과 인권탄압의 원흉인 유신체제를 마치 중화학공업을 육성시킨 원천으로 오해하도록 교묘히 조작한 것이다. 박 대통령이 한국사를 수능 과목에 포함시킨 것은 박정희 우상화를 위한 역사조작의 마지막 한 수다. 학생들이 교과서를 달달 외우고, 박정희=절세의 위인이란 공식을 뇌리에 각인시키는 효과를 노린 것이다.

사실 박정희 위인 만들기는 국정교과서가 처음이 아니다. 경북 구미시에서는 매년 ‘탄신제’가 열리고, 생가에는 5m 높이 동상이 세워졌다. 기념박물관, 체육관이 건립되고 박정희 이름을 딴 소나무와 등굣길, 밥상, 곶감이 탄생했다. 구미시장은 박정희에 대해 “하늘이 내린 반인반신”이라며 신의 반열에 올려놓았다. 서울 광화문에 동상을 세우겠다는 추모단체도 나타났다. 이 정부 들어 박정희 관련 사업 투입 예산은 3000억원이 넘는다. 박정희 띄우기는 파생상품도 만들어낸다. 박 대통령이 최대 수혜자다. 울산시가 지난 여름휴가 때 다녀간 박 대통령의 산책코스에 ‘대통령님이 걸으신 곳’이라고 안내문을 설치한 게 대표적이다. 그를 다룬 책에는 “진짜 거인” “선덕여왕의 화신”이란 표현이 넘쳐난다.

지자체와 일부 시민사회, 출판계의 박정희 부녀 띄우기는 북한의 김일성·김정일·김정은 우상화를 연상시킨다. 북한에서는 곳곳에 동상을 세우고 화재가 나면 가족보다 김일성·김정일 초상화부터 먼저 챙기는 코미디가 연출된다. 함경남도 신포의 이준 열사 생가 마당에는 ‘김정일 장군님 발자국’까지 보존하고 있다. 이런 우스꽝스러운 촌극이 남한에서 현실화되지 않으리란 법이 없다. 지금 촛불 시민은 국정농단만이 아니라 박정희 망령과도 맞선 거대한 역사전쟁을 하고 있는 셈이다. 민주주의와 인권, 국가와 시민의 현재와 미래가 걸린 중대한 싸움이다. 절대 져서도, 질 수도 없다.

대통령에게 촛불은 다 된 밥에 재를 뿌린 원망스러운 존재일 게 틀림없다. 내년 박정희 탄생 100주년에 맞춰 교과서를 만들고 현장 배포를 코앞에 둔 지금 갑자기 나타나 앞을 막아섰기 때문이다. 촛불에 밀려 자칫 불명예 퇴진이라도 당하면 모든 게 수포로 돌아간다. 국정교과서가 폐기되면 머리카락 빠진 삼손 꼴을 면할 수 없다. 대통령 입장에서는 무슨 일이 있어도 이것만은 막아야 한다. 그러자면 가장 필요한 것이 시간이다. 최소한 교과서가 폐기되지 않도록 방안을 만들 때까지 버티는 수밖에 없다. 하지만 해는 이미 저물었다.

그제 사상 최대 230만 촛불은 대통령을 오갈 데 없는 구석으로 몰았다. 잔꾀와 말장난으로 버티지 말고 당장 물러날 것을 명령했다. 이게 정답이다. 파탄난 국정을 정상화하고, 나라 전역에 그림자를 드리운 박정희 망령을 걷어내는 길은 하나다. “아버지의 명예회복을 위해 정치를 한다”는 박 대통령의 정치생명을 중단시키는 것이다.

조호연 논설위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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교육부가 ‘올바른 교과서’라고 이름을 붙인 국정 역사교과서가 공개됐다. 그간 국민들은 역사학자 대다수가 집필을 거부한 마당에 국정 교과서가 제대로 쓰여질 수 있을까 우려했다. 이에 대해 교육부는 ‘내용을 가지고 평가해 달라’면서 서술 내용과 수준에 자신감을 보여 왔다.

국정 역사교과서라 하면 대부분은 한국사, 그중에서도 근현대사에만 깊은 관심을 가지는 경향이 있다. 하지만 이번에 국정화된 역사교과서에는 고등학교 <한국사>뿐 아니라 중학교 과정의 <역사>도 있다. 그리고 중학교 <역사>에는 한국사와 세계사가 모두 포함된다. 중학교 <역사>에서 세계사를 서술한 부분은 한국사 분량의 5분의 1가량이다.

중학교 과정에서 배울 <역사> 가운데 일부만 살펴보기로 하자. 중학교 <역사>의 제4장 제1절은 중국의 송·요·금 시대를 다루고 있다. 이 부분은 전체 200여쪽 가운데 4쪽에 불과하다. 하지만 이 적은 분량에서도 너무 많은 오류 내지 사실관계의 착오가 발견된다.

역사학자들이 11월 30일 서울 동대문구 역사문제연구소에서 국정 역사교과서 긴급 분석 기자회견을 하고 있다. 김창길 기자

우선 113쪽을 보면 ‘송은 거란과 화약을 맺고(전연의 맹), 평화를 보장받는 대가로 막대한 물자를 거란에 제공하였다. 11세기 후반 신종은 이러한 재정 부담을 줄이기 위해 왕안석을 등용하였다’는 내용이 나온다. 신종이 거란에 보내는 재정 부담을 줄이기 위해 왕안석을 등용하였다는 것이다.      

하지만 왕안석의 개혁은 거란에 보내는 물자(세폐)의 축소와는 아무 관련이 없다. 재정 적자 상황의 타개를 목표로 삼았을 뿐이다. 재정 적자를 야기한 주요인도 거란에 보내는 세폐가 아니었다. 서하와의 전쟁으로 인해 촉발된 군사비 부담이 가장 큰 이유였다. 오른쪽 보조단에는 ‘(전시에서) 황제가 합격자를 직접 선별하였다’는 내용이 나온다. 전시는 황제가 형식적으로 주관하는 시험일 뿐이다. 황제가 시험 과정에 구체적으로 간여하는 일은 극히 드물었다. 하물며 전시는 당락을 가르는 시험도 아니다. 합격자의 순위만을 정하는 시험이었다.

114쪽에도 부정확한 서술이 적지 않다. 넷째 줄에는 ‘송이 약속한 대가를 지급하지 않자 금은 이를 구실로 송의 수도 변경을 공격하였다’고 적혀 있으나, 이 또한 역사적 사실과 다르다. 금이 송을 공격한 것은 약속한 대가를 지급하지 않아서가 아니다. 송이 맹약을 어기고 금에 도발하였기 때문이다. 책은 바로 이어서 ‘금이 여진 문자를 사용하고 전통문화를 지키면서 한족의 문화에 동화되지 않고 정체성을 유지하였다’고 서술했다. 이 역시 사실에 반하는 내용이다. 금이 문화적 독자성을 유지한 것은 전반기까지이다. 12세기 후반을 넘어가면 여진족의 한족화가 심각하여 금 조정이 이에 대한 대책을 부심하게 된다.

더욱 심각한 것은 ‘패배한 남송은 금과 평화롭게 지내는 조건으로 매년 은과 비단을 제공하였는데, 이로 인해 부족해진 재정을 메꾸기 위해 강남 지역을 개발하였다’라고 서술한 부분이다. 강남 개발은 이미 2세기 후반부터 진행되고 있었다. 위진남북조와 수당을 거쳐 남송이 되면서 강남 개발은 사실상 일단락되기에 이른다. 강남 지역의 개발과 금에 대한 세폐의 제공을 연결시키는 것은 너무도 심각한 오류이다.

그 아래에 등장하는 ‘남방에서 새로운 품종의 벼가 도입되어 강남지역에서는 1년에 쌀을 두 번 수확하였다’는 서술도 대단히 곤란하다. 이곳에서는 남송 시기에 ‘남방에서 새로운 품종의 벼가 도입’되었다고 적고 있다. 하지만 남방의 새로운 벼, 즉 점성도(참파벼)는 11세기 초반인 북송시대에 도입되었다. 또한 북송과 남송을 통해 강남에서는 벼의 이기작이 거의 시행되지 않았다. 송대에 벼의 이기작이 있었던 지방은 양광(兩廣) 및 푸젠의 일부 지역이었다. 벼의 이기작이 이 시기 농업의 발달을 상징하는 것도 아니다. 이기작이 행해진 지역은 오히려 낙후 지역이었다.

중국의 송·요·금 시대에 대한 서술은 전체 교과서의 극히 일부분에 불과하다. 그럼에도 도저히 용인할 수 없는 심각한 오류가 너무도 많다. 역사교과서 내용은 이념적 편향 여부를 떠나 사실관계에서만큼은 오류를 범해서는 안 된다. 하지만 이번에 공개된 국정교과서는 적어도 중국사 부분에 관한 한 오류와 착오가 지나치게 많다. 약간의 수정을 통해 보완할 수 있는 수준을 벗어났다.

이근명 | 한국외대 사학과 교수·중국 중세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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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난 11월28일 교육부는 끝내 국정교과서를 공개했다. 국정교과서를 어떻게든 기정사실화하려는 속셈이다. 이는 국정교과서의 부당성을 규탄하며 국정화 강행이 가져올 혼란을 우려하는 국민에 대한 도전이다.

국정화는 시작되지 말았어야 했다. 역사 지식의 논쟁성, 해석의 다양성, 비판적 사고를 배운다는 역사 교육의 본질을 생각하면 국정교과서는 그 자체로 ‘반교육적’이다. 그런데도 박근혜 대통령은 역사전쟁을 불사하면서 국정화에 앞장섰다. 이번에 공개된 국정교과서는 박정희를 위한 교과서라 불릴 만하다. 현대사 서술이 많이 줄었는데도, 유독 박정희 정부 시기는 분량을 크게 늘렸고, 박정희와 직접 관련된 서술이 매우 많으며 그의 공적을 곳곳에서 기록하였다. 사진까지 신경 써서 5·16 쿠데타 때의 군복을 입은 사진을 뺀 대신 산업현장에 선 그의 모습을 실었다.

이 책은 은밀하게 되살아난 교학사 역사교과서로 불릴 소지도 많다. 두 책은 식민지 근대화론이나 친일 문제에서 많이 다르다. 그러나 건국절 논리를 전면화한 ‘대한민국 수립’이란 용어, 건국 아버지로 이승만의 공적 부각하기, 친재벌 교과서라고 불러도 될 정도로 성장일변도의 경제사, 냉전적 시각을 강화한 북한 서술 등은 매우 많이 닮았다.

이준식 사회부총리 겸 교육부 장관이 28일 서울 세종로 정부서울청사에서 국정 역사교과서 현장검토본을 공개하기 전 인사하고 있다. 연합뉴스

교과서라면서 정작 학생을 배려한 흔적을 찾기는 어렵다. 교과서는 학생들이 처음 만나는 역사책이며, 풍부한 학습자료와 다양한 학습활동을 담은 수업 안내서여야 한다. 그런데 이 책은 맥락 없이 나열된 수많은 사실, 본문과 연계되지 않은 사진과 자료들, 조악한 편집 등으로 도대체 읽기가 힘들다.

터무니없는 부실 교과서이기도 하다. 중학교와 고등학교 교과서에서 거의 똑같은 문장이 여러 곳에서 발견된다. 무엇보다 심각한 것은 오류다. 안중근의 동양평화론을 자서전이라 쓴 터무니없는 잘못을 비롯해 곳곳에서 사실의 오류가 확인된다.

편향과 부실은 예견된 재앙이다. ‘99.9%의 교과서가 편향되어 국정화가 불가피하다’는 총리의 주장을 기억해보자. ‘역사를 제대로 배우지 않으면 혼이 비정상이 된다’거나, ‘다른 민족의 지배를 받을 수도 있다’던 대통령의 발언은 또 어떤가? 애초부터 원하는 대로 써줄 필자만 필요했던 것이다. 그러니 신원을 철저히 감춰온 ‘복면집필자’ 31명 중 교과서 집필 경험이 있는 사람은 거의 없다.

복면집필자가 실제로 썼는지도 의문이다. 교과서라면 당연히 교육과정이나 편찬기준을 따라야 하는데, 이 책은 교육부가 법원의 판결을 받고서야 공개했던 편찬기준과 현저히 다르다. 그런데 그 편찬기준조차 애초에 만든 편찬기준과 또 달랐다. 더구나 공개 직전에 황급히 수정한 흔적이 곳곳에 역력하다.

누가 썼는지도 불분명한, 부실투성이 교과서. 은밀하게 되살아난 교학사 교과서이자, 박정희를 위한 교과서를 전면적으로 선포한 교과서. 아니 교과서란 이름이 아까운 이 책을 전국 모든 학교의 학생들에게 제공해야 할 것인가. 그렇게 하지 못하겠다는 선생님들이 불복종운동을 선언했다. 학생과 학부모의 반대도 거세다. 많은 중·고등학생들이 국정교과서 철회 운동에 나서고 있다. 학부모들도 국정교과서의 폐기를 요구하면서 교과서 구입 거부 운동을 공언하고, 교육청에서 학부모의 뜻을 존중하여 교과서를 개별구입하도록 제도를 바꾸겠다고 나섰다.

교육부가 국정화를 철회하지 않을 경우 내년 3월 학교 현장에서 일어날 일은 예측하기 어렵다. 이 책으로 공부한 학생들이 입시를 치르는 문제까지 감안하면, 국정화를 철회하지 않아 발생하는 혼란은 상상 그 이상이다.

국정화는 오직 한 사람, 박 대통령을 위한 일이었다. 그 한 사람을 위해 정부 기관과 공무원들이 공론과 민주적 절차를 부정하며 강행했다는 점은 2016년 가을 온 국민이 아프게 체험하는 사태와 본질적으로 같다. 이미 국정교과서는 국민들로부터 탄핵당했다. 국정교과서를 조건없이 폐기해야 옳다.

김육훈 역사교육연구소장·독산고 교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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교육부가 지난달 28일 공개를 강행한 국정 역사교과서 현장검토본이 역사적 사실을 왜곡하거나 기초적인 사실 오류가 수백건에 달할 정도로 함량 미달의 부실 교과서인 것으로 드러났다. 뉴라이트 시각을 반영하며 친일과 독재를 미화한 편향성은 차치하더라도 엉터리 국정 역사교과서를 제작한 것이다. 눈 뜨고 봐줄 수 없는 국정 역사교과서를 만들어놓고도 이준식 부총리는 “질 좋은 교과서”라고 했으니 교육수장으로서의 자격이 있는지조차 의심스럽다. 그런데도 교육부는 내년에 국정교과서를 채택하지 않기로 한  서울·광주·전남 교육청을 상대로 법적 조치를 강구하겠다고 했다. 적반하장이 아닐 수 없다.

역사교육연대 등 역사학회가 그제 국정 역사교과서 현장검토본을 분석한 결과를 보면 중학교 역사교과서의 오류가 한 쪽당 1.5건가량이고 1·2권을 합치면 400~500건에 이른다. 오류와 왜곡이 너무 많아 도저히 교과서로 쓸 수 없는 수준이다. 역사적 사실을 틀리게 기술한 것은 물론 최근 연구를 통해 오류로 밝혀지거나 학회에서 쓰지 않는 과거 사료가 들어간 사례도 허다했다. 인류 최초의 금속도구는 순동이란 사실이 밝혀진 지 오래인데도 <한국사>엔 청동기로 기재됐다. 중학생용 <역사2>에는 인류 최초의 법전이 ‘우르남무 법전’이 아닌 ‘함무라비 법전’으로 나와 있고, <한국사>엔 통합 임시정부 때 안창호의 직책이 노동국 총판 대신 내무총장으로 잘못 표기됐다.

28일 정부세종청사에서 교육부 직원들이 국정 역사교과서 현장검토본을 살펴보고 있다. 교육부는 대한민국 정통성을 분명히 밝히기 위해 ‘대한민국 정부 수립’ 대신 ‘대한민국 수립’이라 기술했다고 밝혔다. 연합뉴스

더욱 심각한 것은 역사 왜곡이다. 현대사 영역에서 박정희란 단어를 20회 이상 사용하며 박정희 정권에 대한 서술을 대폭 늘린 대신 1987년 6월항쟁 이후 30년간의 역사는 4쪽 안팎에 그쳤다. 친일파의 범위에서 군인, 경찰, 사법관료와 동아일보 김성수, 조선일보 방응모 등 언론 사주를 빼기도 했다. 또 집필진이 초고본에 “유신헌법이 민주화운동의 헌법적 근거가 됐다”거나 “외환위기의 원인은 파업”이라고 서술했다가 국사편찬위원회의 검토과정에서 빠진 것으로 확인됐다. 게다가 국편은 직원들이 교과서 내용을 수정했다는 논란을 가릴 증거인 초고본과 개고본을 모두 삭제해 공공기록물관리법을 위반하는 범법행위를 저질렀다는 의혹까지 사고 있다.

교육부는 함량 미달의 불량 국정 역사교과서를 즉각 폐기하는 것은 물론 수십억원의 국가 예산을 낭비한 책임을 져야 한다. 또 국편이 초고본과 개고본을 삭제한 경위도 낱낱이 밝혀야 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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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부가 어제 중·고교 국정 역사교과서 현장검토본을 공개했다. 교육부는 여론 수렴 후 내년도 학교 현장 적용 방안을 결정할 방침이다. 이준식 부총리는 “역사적 사실과 헌법가치에 충실한 국정 역사교과서를 편찬했다”고 설명했다. 그러나 현장검토본은 우려했던 대로 헌법가치를 부정하고 편향적 역사인식으로 가득 차 있다.

현장검토본은 1948년의 이승만 정부 수립을 기존의 ‘대한민국 정부 수립’ 대신 ‘대한민국 수립’으로 표현했다. 대한민국 건국이 1919년 상하이 임시정부가 아니라 이승만 정부라는 뉴라이트의 ‘건국절’ 주장을 반영한 것이다. 대한민국 임시정부의 법통을 강조한 헌법에 정면으로 배치된다. 친일파를 ‘친일세력’으로 완화하고, 친일 관련 서술을 줄인 것도 이해가 안된다. 정부가 앞장서 건국 97년의 역사를 68년으로 축소하고, 독립운동사를 부정하고 나선 셈이다. 반민족적, 반역사적 발상이 아닐 수 없다.

현장검토본은 또 이승만·박정희 정권의 독재를 옹호·미화하고 있다. 독재란 용어를 ‘권위주의 정권의 장기집권에 따른 독재화’로 바꾸고, 박정희 정권 시절을 다룬 단원 제목을 ‘냉전시기 권위주의 정치체제와 경제·사회발전’으로 정하는 식이다. 독재에 면죄부를 주려는 의도가 드러난다.

이준식 사회부총리 겸 교육부 장관이 28일 서울 세종로 정부서울청사에서 국정 역사교과서 현장검토본을 공개하기 전 인사하고 있다. 연합뉴스

5·16쿠데타의 경우 쿠데타 명분과 함께 개혁을 설파하는 ‘혁명공약’까지 따로 싣고 있다. 쿠데타의 정당성을 옹호하려 했다고 볼 수밖에 없다. 유신체제에 대해서도 아무런 문제의식 없이 “대통령의 권력을 강화한 독재체제였다”고만 기술했다. “대통령이 헌법 위에 군림할 수 있도록 했다”는 기존 교과서 기술과는 천지 차이다. 국가 비상사태 선포에 대해서는 마치 국가 안보를 위해 불가피했다는 식으로 오해할 수 있게 설명했다.

경제성장도 성과는 강조하고 문제점은 축소하는 편향적 서술로 일관하고 있다. 경제성장의 문제점과 관련해 ‘전태일 분신사건, 농민의 희생 등이 있었다’는 식으로 단순 사실만 나열한 것이 대표적이다. 새마을운동의 경우 비판적인 내용은 한 줄에 그치고 칭찬 일색으로 서술한 것과 대조를 보였다. 이 부총리는 “역대 정부 독재를 사실대로 서술하고 경제성장의 성과와 한계를 균형있게 서술했다”고 밝혔지만 낯부끄러운 얘기다.

국정교과서는 내용의 문제에 앞서 역사교육의 다양성과 다원성을 해치는 반민주적, 반헌법적 성격 때문에라도 폐기해야 한다. 정권의 입맛에 따라 교과서 내용이 뒤바뀔 수 있다는 점에서는 교육현장의 혼란과 갈등을 부추기는 결과를 초래한다. 또 뉴라이트 계열이거나 친정부 학자들이 다수인 집필진은 편향성 논란을 초래할 수밖에 없다. 정부가 편찬과정과 집필진을 투명하게 공개하겠다는 약속을 저버리고 밀실집필을 강행함으로써 국정화 정책의 공신력도 땅에 떨어진 상황이다.

박근혜 대통령이 자신의 아버지에 대한 역사적 평가를 바꿔보려는 단 하나의 이유 때문에 역사를 왜곡하려는 기도가 성공하도록 놔둬서는 안된다. 국정농단 주범으로 국정 운영의 권능을 상실한 대통령이 국정 역사교과서를 강행하는 것은 그 자체로 불법이자 반역사적인 폭거다. 이런 교과서로 국가의 미래인 학생을 가르쳐선 안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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중·고교 국정 역사교과서 현장검토본 공개가 임박했지만 국정화에 잇따라 제동이 걸리고 있다. 법원이 국정교과서 집필 과정의 불법성을 지적하고, 일부 일선학교는 교과서 채택을 거부하는 실력행사를 선언하고 나섰다. 전국의 교육감들은 어제 협의회를 열고 역사교과서 국정화 추진 중단 및 폐기를 촉구하는 성명을 냈다. 이런 반발과 혼란에도 국정교과서 정책을 강행할 것인지 교육부에 묻고 싶다.

서울행정법원은 어제 민주사회를 위한 변호사모임 소속 조영선 변호사가 교육부 장관을 상대로 낸 역사교과서 정보 비공개 처분 취소 소송에서 “집필기준을 공개해도 집필 및 심의업무의 공정한 수행이 지장받을 것이라는 개연성이 없다”며 원고 승소 판결을 했다.

정부의 국정교과서 집필 과정이 불법적이라는 것이다. 이처럼 불법성이 입증된 역사교과서라면 학생들에게 가르치는 것 역시 용납해선 안될 일이다. 헌정 사상 초유의 박근혜·최순실 국정농단 사태로 대통령과 정부 정책에 대한 시민의 분노와 불신이 극에 달한 상태에서 ‘피의자 대통령’이 추진한 교과서라는 것만으로도 국정화는 이미 교육적·윤리적 정당성을 상실했다고 볼 수 있다.

9일 서울 광화문광장에서 ‘한국사국정화저지네트워크’ 회원들이 열을 지어 국정 역사교과서 폐기를 주장하는 패널을 들고 시위하고 있다. 이준헌 기자

광주시의 모든 중학교는 내년에 1학년 국정 역사교과서를 채택하지 않기로 결정했다. 중2, 3학년은 기존의 검정교과서를 그대로 사용할 것이라고 한다. 상당수 시·도 교육청도 이 방안을 검토하겠다고 밝혔다. 교육부는 내년에 중1 대상으로 국정 역사교과서를 주문하도록 일선 학교에 공문을 보냈지만 일선 학교들이 실력행사로 맞서면서 실현 가능성이 의문시된다. 시·도 교육감들은 어제 협의회에서 정부가 국정교과서를 강행한다면 모든 방안을 강구해 대처하겠다고 강력 경고했다. 내년부터 모든 중·고교에서 국정 역사교과서를 가르치겠다는 정부의 계획은 파행을 면치 못할 게 불 보듯 뻔하다.

이는 기본적으로 시민 다수가 반대하는 역사교과서 국정화를 밀어붙인 정부가 자초한 것이다. 자유발행제를 채택하는 세계적 추세 속에서 국가가 지정한 단일한 역사관만을 주입하겠다는 시대착오적 역사교육은 결코 성공할 수 없다는 것을 교육부는 명심해야 한다. 역사교과서 국정화 추진을 중단하고 포기하는 것만이 역사와 시민 앞에 죄를 짓지 않는 길이다. 지금도 늦지 않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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비선 실세 국정농단의 몸통은 결국 박근혜 대통령이었다. 정치적으로, 박근혜 ‘대통령’은 이미 없다. 법적으로만 간신히 대통령직을 유지하고 있는 본인만 이 현실을 거부하고 있다. 대통령이 불법과 비리를 지속적으로 저질러온 정황이 명백히 드러났으니, 그동안 온갖 의혹과 반대에도 대통령이 앞장서 밀어붙였던 정책들은 전면 재검토되어야 한다. 그런데도 문제의 정책들은 이전과 변함없이, 아니 더욱 신속히 진행되는 것 같다.

교육부는 국정 역사교과서를 예정대로 28일에 공개하겠다고 한다. 국정화 추진은 학생과 교사, 대부분의 역사학자를 비롯한 수많은 국민의 분노와 저항을 불러일으켰던 사안이다. 그리고 국정화의 선봉에는 대통령이 있었다.

지난해 12월 일본군 위안부 밀실·굴욕 협상은 외교부 장관이 반대했지만 대통령이 밀어붙인 정황이 드러났다. 대통령의 행태를 보면 충분한 개연성이 있지만, 외교부 당국자는 사실무근이라며 시치미를 뗀다. 여성가족부는 반성과 사과가 먼저라는 비판은 외면하고 피해 할머니들에게 위로금 지급만 서두른다. 환경부는 강원 양양군의 설악산 케이블카 사업 환경영향평가서를 통과시켰다. 국회 환경노동위원회가 국정감사에서 반려하라는 결론을 내린 조작·부실 평가서였다. 국회의원, 양양군, 한국환경정책평가연구원이 공동 현장검증을 실시한 지 이틀 만이었다. 설악산 케이블카는 사업신청서가 제출되기도 전에 대통령이 두 번씩이나 적극 추진을 지시했다.

최재경 청와대 민정수석과 김현웅 법무부 장관의 사의 표명이 알려지고 새누리당 김무성 전 대표가 탄핵 주도를 선언한 23일 서울 광화문 사거리 뒤편으로 청와대 본관 건물이 보이고 있다. 서성일 기자 centing@kyunghyang.com

한·일 군사정보보호협정은 여건 조성이 우선이라는 입장에서 돌변해 국무회의 의결과 대통령 재가, 양국 서명을 순식간에 해치워버렸다. 지난 이명박 정부 때도 밀실협상 논란으로 막판에 무산됐던 사안이다. 대통령이 진두지휘했던 갑작스러운 ‘사드’ 배치 결정은 도저히 납득할 수 없는 일이었고, 그만큼 격렬한 반발과 분노를 샀다. 하지만 국방부는 롯데의 경북 성주골프장과 경기 남양주의 국유지를 맞바꾸면서 사드의 조기 배치에 열을 올리고 있다.

지난 21일 검찰은 민주노총 한상균 위원장의 항소심 결심공판에서 징역 8년을 구형했다. 1심 형량인 징역 5년이 너무 가볍다는 것이다. 작년 민중총궐기의 근원이었던 박근혜 정권 폭정의 실태가 훤히 드러난 지금도 검찰의 현실 인식은 여전하다.

아우슈비츠의 생존자 프리모 레비의 말이 떠오른다. “괴물이 없지는 않다. 그렇지만 (중략) 그보다 더 위험한 것은 평범한 사람들이다. 의문을 품어보지도 않고, 무조건 믿고 행동하는 기계적 인간들 말이다.”(홍세화, <생각의 좌표>) 눈에 띄는 괴물이라면 맞서 싸울 수는 있다. 하지만 괴물을 무조건 추종하는, 눈에 띄지 않는 수많은 ‘기계적 인간들’과 일일이 싸울 수는 없다. 이런 절망적 현실 때문에 지옥에서도 살아남았던 레비가 노년에 자살했는지도 모르겠다.

우리 사회 현실도 썩 달라 보이지 않는다. 괴물을 따르는 평범한 사람들이 땅에서 갑자기 솟아날 리 없다. 이들도 결국 교육의 결과다. 대입과 취업이 지상 목표가 되어버린 교육 현실에서, 아이들은 자기 생각이 아니라 주어진 문제의 ‘정답’을 맞히는 능력을 키우도록 강요된다. 자율적·비판적 사고 능력은 퇴화되고, 지시받은 업무를 충실하고 효율적으로 수행하는 ‘실무형’ 인간이 만들어진다. 자기가 노예이면서도 노예인지 모르는 인간 말이다.

이런 현실을 감안하면, 요즘 광장에서 만나는 우리 아이들의 모습은 참으로 놀랍고, 반갑고, 고맙다. 무엇보다 미안하다. 이제는 정말 학교 교육의 패러다임을 바꿔야 한다. 부패한 권력일수록 학교 교육을 통제해 아이들을 기존의 현실에 순응하는 ‘기계적 인간들’로 키우려 한다. 자유롭고 비판적 사고의 숨통을 옥죄는 학교, 영혼을 없애는 교육에 우리 아이들을 더 이상 맡겨 놓을 수는 없다. 광장에서 아이들이 보여준 놀라운 가능성을 직접 만나고 돌아올 때마다 드는 간절한 바람이다.

조현철 서강대 교수·신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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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osted by KHross

도널드 트럼프는 지난 8월 자신의 트위터에 “오바마 대통령은 미국 역사상 최악의 대통령으로 기록될 것”이라는 글을 올렸다. 오바마는 최근 한 방송에 출연해서 이 글에 대해 “적어도 나는 대통령으로 기록될 것”이라며 트럼프에게 일침을 가했다. 트럼프가 대통령이 될 가능성이 작다는 점을 비꼰 동시에, 자신의 대통령직 수행에 대한 자신감을 드러낸 말이다.

대한민국 제18대 대통령 박근혜. 이 사실에는 변함이 없다. 박 대통령 역시 대한민국 대통령 중 한 명으로 역사에 기록될 것이다. 그런데 만약 트럼프가 박 대통령에게 저 말을 한다면 박 대통령은 오바마처럼 응수할 수 있을까. 그러기 어려울 것 같다. 박 대통령은 “대한민국 역사상 최악의 대통령” 중 한 명으로 기록될 가능성이 매우 커졌다. 미래의 역사교과서에 박근혜 대통령의 이름과 비선 실세의 이름이 나란히 쓰이게 될지도 모를 일이다.

10월 25일 박근혜 대통령이 '최순실 의혹'과 관련한 대국민사과를 한 뒤 돌아서고 있다. ㅣ청와대사진기자단

하지만 지금 진행되고 있는 이야기는 역사교과서의 한 대목이라기보다는 어느 추리소설의 후반부처럼 느껴지기도 한다. ‘최순실’이라는 퍼즐 조각 하나를 집어넣었을 뿐인데 거짓말처럼 모든 일이 맞아떨어지고 있다. 문제는 이것이 하나의 꾸며진 소설이 아니라 현재진행형의 역사라는 데 있다. 국정농단의 장대한 플롯을 접하며 우리가 느끼는 감정은 지적 흥분이 아니라 크나큰 허탈감과 수치다.

무엇보다 당혹스러운 것은 대통령이 알고 보니 주체성이 부족한 연약하고 의존적인 존재였다는 사실이다. 대통령은 최태민 일가가 조종하는 줄에 매달린 꼭두각시처럼 그려지고 있다. 다들 이 정도일 줄은 몰랐다는 반응이다. 지금 국민이 보는 대통령은 자신의 의지대로 움직이는 개인이 아니다. 짜인 각본 안에서 남이 써준 대사를 앵무새처럼 읊는 무기력한 연기자다. 그것도 평생을 그렇게 살아온 것처럼 보인다는 데 문제의 심각성이 있다.

어디서부터 잘못된 것일까. 정신분석학에서 이야기하는 ‘자기대상(selfobject)’ 개념을 잠시 빌려와 보자. 자기대상은 타인이 온전히 자신의 일부도 아니고 그렇다고 완전히 분리된 것도 아닌 관계를 설명하기 위해 정신분석학자 하인즈 코헛이 고안한 용어다. 자기대상의 발달은 유아기에 시작한다. 유아는 충분히 안정된 자기를 확립하지 못한 상태여서 성숙하기 전까지 정신구조의 일부 기능을 대신 맡아줄 사람을 필요로 한다. 어려서는 부모가 이 역할을 한다. 모든 것을 아이에게 맞추고 아이를 적절히 진정시키며 아이의 생각과 감정을 거울처럼 일일이 반영해준다. 이를 통해 아이는 일종의 전능감을 맛보게 된다. 코헛은 이러한 공감 경험이 건강한 자기애의 근간이 된다고 보았다. 하지만 세상은 언제까지고 자기 뜻대로 움직여주지는 않는다. 현실 속에서 단계적으로 적정 수준의 좌절을 경험하면서 유아의 자기대상은 원시적인 형태에서 더 성숙한 형태로 점차 발전해 나간다. 이것이 코헛이 말하는 심리적 성숙이다.

하지만 어떤 이들은 이런 과정을 정상적으로 겪지 못하면서 살아가게 된다. 가령 양육자의 공감이 현저히 부족했거나 심각한 트라우마가 있었다면 심리적 발달이 저해된다. 또는 수족처럼 모든 것을 알아서 해주는 존재가 계속 곁에 있을 경우에도 유아기적 전능감은 적절히 포기되기 어려울 수 있다. 장기간 고립되어 지내는 것도 자기대상의 원만한 변형과 발전을 어렵게 한다. 부모에서 친구로, 연인에서 배우자로, 스승이나 동료, 때로는 자식에게로 자기대상의 초점이 자연스럽게 옮겨가는 과정이 결여되기 때문이다.

돌이켜보면 최태민과 그의 자녀들, 그중에서도 최순실은 오랜 세월 박 대통령의 자기대상 역할을 해온 것으로 보인다. 그것도 건강하지 못한 자기대상이었을 공산이 크다. 박 대통령과 최순실의 관계는 정신분석학에서 말하는 모자공생을 연상케 한다. 이런 밀착된 관계에서는 자기 생각과 타인의 생각, 자기 감정과 타인의 감정이 쉽게 구분되지 않는다. 대통령의 주체성이 심각하게 훼손된 것도 이런 맥락에서 이해해볼 수 있을 것이다.

박 대통령이 대국민 사과에서 언급한 ‘순수한 마음’은 현실의 복잡다단함을 제대로 대면하지 않고 모든 것을 자신에게 맞춰주기만을 바라는 유아기적 욕망에 가깝다. 대통령의 생각이 여전히 ‘순수’에 머물러 있다면 이는 개인의 불행이자 시대의 비극이다. ‘가장 개인적인 것이 가장 정치적인 것’이라는 말이 있다. 이제라도 박 대통령이 국가 통치에 앞서 자기 자신을 책임지는 개인으로 다시 태어나 정치의 전면에 설 수 있기를 바란다. 그런 용기와 결단력, 사고력이 대통령에게 남아있을까. 알 수 없다. 하지만 기대는 크지 않다. 심리적 성숙은 그리 단기간에 이룰 수 있는 게 아니기 때문이다.

김성찬 | 소아청소년정신과 전문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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