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민의 대표자로 권력을 위임받은 사람은 사고력, 판단력, 표현력을 두루 갖춰야 한다. 정치인은 직무와 관련된 결정과 행위를 논리적으로 철저히 시민들에게 설득할 준비가 돼 있어야 한다. 그것은 위임받은 권력을 통치행위로 행사하는 정치인들이 갖춰야 할 최소한의 자격이며 도리이다. 직무 수행이 온전치 못했거나 판단 착오를 범했을 때, 더욱이 그것이 법규 위반으로 이어졌을 때는 그에 대한 입장 또한 명료한 언어로 밝혀야 마땅하다.

오늘의 정국은 권력이 우리 사회에서 의미하는 바를 숨김없이 드러냈다. 권력은 사적인 삶을 위한 도구로, 권력을 가진 자를 법치영역의 예외자로 만드는 일탈적 힘으로 사용되었다. 그리고 그것은 가치의 공유를 가능하게 하는 상식적 언어의 변질, 부재라는 현상으로 적나라하게 노출되었다. 언어는 외적 대상을 지시하기만 하는 수단이 아니다. 언어는 인간의 심리적, 정신적 본질을 드러내는 통로이자 내용이며, 공동체의 합리적 일상을 가능하게 하는 공적 기반이다. 사고의 훈련은 그래서 언어를 사용하는 방식을 배우고 다듬는 훈련과 불가분의 것이다.

대통령은 자신이 법으로부터 예외적인 존재라고 굳게 믿는 것으로 보인다. 그 법에는 문법도 포함된다. 대통령의 발화는 늘 문장구조가 부정확하고 지시대상과 표현이 불분명하다. 오죽하면 ‘박근혜 번역기’라는 패러디 게시물들이 인터넷에서 회자되겠는가. 탄핵정국 이후 신년의 이른바 기자간담회에서 일방적으로 내놓은 입장표명도 마찬가지였다. 끝이 없는 비문들로 늘어놓은 부인과 해명은 법적 책임의식이나 윤리적 성찰의 흔적을 보이지도 않았고, 논리적 정당성을 확보하지도 못했다. 최순실이 고친 연설문이 국정농단 사태 폭로의 발단이 된 건 우연이 아니다. 그러나 속속 공개되는 최순실의 말주변, 글솜씨는 또 어떤가. 그들의 두서없는 말을 이해하기 위해 녹취를 했다는 대통령 비서관의 증언은 이 사태의 핵심적 아이러니다. 대통령이 주장하는 ‘철학과 소신’이 그에게든 최순실에게든 있다면, 어법에 맞지 않는 말의 파편들을 조리없이 나열하는 발화가 바로 그것의 실체다. 철학은 언어 밖에서는 존재하지 않는다.

국회의 ‘최순실 게이트’ 청문회가 계속되는 동안 최고권력을 사유화한 이들은 법적 책임을 추궁당하는 엄중한 상황에서도 윤리적 주체로서의 발언은커녕 최소한의 성의조차 보이지 않았다. 국회의 소환에 불응하다 겨우 출석한 전·현직 공무원들은 ‘모른다’와 ‘기억나지 않는다’는 말만 태연히 늘어놓으며 법치영역의 예외자로 행세했다. 무한 반복되는 그 말들은 민의를 위임받은 국회 청문회 자체를 무의미하게 만들어 시민들을 모욕했다. 헌법재판소 탄핵심판의 변론을 위해 대통령 변호인단이 구사하는 언어도 마찬가지다. 청와대를 비롯한 최고위 권력층에서 동원하는 논리와 표현 수준은, 그들에게 권력을 맡겼던 시민들에게 수치와 모멸감을 느끼게 한다. 부끄러움이 위반한 자들의 몫이 아닌 시민의 몫이라는 점 역시 견디기 힘든 부조리다.

국정농단 사태가 드러나기 시작한 지 어느덧 석 달이 지났다. 하지만 대통령과 비선 관계의 실제 내막과 뇌물 수수의 규모, 대통령의 7시간, 대통령의 성형시술 의혹을 비롯한 비선 의료진의 존재, 청와대의 비아그라와 향정신성 의약품 다량 구입, 문화계 블랙리스트의 진상 등은 여전히 의문투성이다. 검찰 수사가 있었고, 청문회에 이어 헌재의 탄핵심판과 특검이 진행 중이지만, 정확한 사실관계가 드러나지도, 납득할 만한 해명이 제시되지도 않고 있다. 참으로 불가사의한 일이다.

이 상황에서 수없는 추측성 가설들과 믿고 싶지 않은 가상의 시나리오들이 시중에 유통되는 것은 어쩌면 당연하다. 이것들은 물론 음모론의 일환이다. 하지만 음모론이야말로 가장 비합리적인 것처럼 보이면서도 실은 가장 합리적인 충동의 대중적 발현이다. 합리성의 영역에서 도저히 설명할 수 없는 현실을 어떻게든 이해가능한 논리로 언어화하려는 필사의 시도라는 점에서 그렇다. 이런 현상은 현 정권 출범 이래 두드러졌다. 세월호 사건이나 메르스 사태 때도 정부의 적절한 대처와 납득할 만한 해명이 없었다는 사실과 무관하지 않다. 그러나 현 정권은 유신시대 공안정국을 떠올리게 하는 ‘유언비어’라는 낡고 낯선 말로, 끊일 날 없었던 시민들의 불안감과 의구심을 위축시키는 데만 골몰했다. 표현의 자유를 통제하고 말의 소통을 막으려고만 했다. 하지만 정윤회 문건을 ‘지라시’ 수준의 유언비어라고 규정했던 정권의 실체야말로 비선의 농단이었다. 유언비어란, 말이 있으되 말이 안된다는 뜻이다. 그렇다면 과연 유언비어가 누구의 입에서 나오고 있는지 묻지 않을 수 없다. 지금 가장 비논리적인 언어로, 가장 비합리적인 이야기를 하는 사람은 누구인가.

윤조원 고려대 영문학과 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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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호성 전 청와대 부속비서관이 그제 ‘박근혜·최순실 게이트’ 국정조사특위 위원들과의 접견에서 “박근혜 대통령의 말씀 발표 자료를 보내주면 최순실씨가 밑줄을 치면서 수정했다”고 말했다. 인사 발표 내용에 대해서도 “(최씨의) 수정을 받을 필요가 있었다”고 밝혔다. 이 밖에도 “2015년에도 (자료를) 조금 전달한 게 있다”고 말했다. 박 대통령은 최씨가 대통령 연설문을 사전 열람했다는 내용이 JTBC에 보도된 다음날인 10월25일 1차 대국민담화에서 “(최씨는) 지난 대선 때 주로 연설이나 홍보 등의 분야에서 개인적인 의견이나 소감을 전달해주는 역할을 했다. 청와대 보좌체계가 완비된 이후에는 그만뒀다”고 했다. 그러나 정 전 비서관에 의하면 연설문 외에 인사 자료까지 최씨에게 건네졌고, 취임 3년차인 지난해까지도 이런 자료 유출이 이뤄졌다는 사실이 확인됐다. 1차 대국민담화부터 박 대통령은 거짓으로 위기를 모면해볼 생각이었던 셈이다.

청와대 문건유출 등 혐의로 구속된 정호성 전 청와대 부속비서관이 20일 새벽 검찰 조사를 받은 뒤 서초동 서울중앙지검을 나와 호송차에 오르고 있다. '국정농단' 의혹을 수사해 온 검찰 특별수사본부는 최순실 씨와 안종범 전 청와대 정책조정수석, 정 전 청와대 부속비서관을 11월 20일 기소한다. 연합뉴스

지난달 4일 발표한 2차 대국민담화도 거짓이었다. 박 대통령은 “어느 누구라도 잘못이 드러나면 책임을 져야 하고, 저 역시 검찰 조사에 성실하게 임할 각오”라고 했지만 정작 검찰이 청와대 압수수색과 대통령 대면조사 등을 요구하자 수사 자체를 거부했다. 급기야 세월호 참사 당일 집무실에 출근하지도 않았으면서 박 대통령은 헌법재판소에 “청와대에서 정상 근무하면서 피해자 구조에 최선을 다하도록 지시했다”고 답변하는 일까지 벌어졌다. 사실 박 대통령의 거짓말은 이전부터 일관됐다. 지난 9월 언론과 야당이 미르·K스포츠 재단에 관한 의혹을 쏟아내자 박 대통령은 “비상시국에 난무하는 비방과 확인되지 않는 폭로성 발언”이라고 했다. 이제는 콩으로 메주를 쑨다고 해도 박 대통령과 청와대의 말을 믿을 수 없다. 참담한 것은 대통령의 거짓말이 놀랍지 않고 시민들도 대통령의 거짓말에 충격을 받지 않을 정도로 나라가 엉망이 됐다는 사실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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국정농단 세력들이 전면적인 반격을 시도하고 있다. 최순실씨는 그제 열린 첫 재판에서 모든 혐의를 부인했다. 검찰의 공소사실 가운데 8가지는 박근혜 대통령과 공모했다는 것인데 공모 사실 자체가 없으니 무죄라는 논리도 폈다. “죽을죄를 졌으니 용서해 달라”며 검찰청에 들어서면서 머리를 조아리던 게 불과 50일 전 일이다. 앞서 박 대통령은 헌법재판소에 낸 탄핵심판 답변서에서 ‘헌법·법률 위반은 모두 사실이 아니고, 최순실의 비리를 전혀 몰랐다’며 국회가 제시한 13가지 탄핵 사유를 모두 부인했다. 몇 차례 반성하는 대국민사과를 일방적으로 하고 눈물도 흘리는 듯하더니 이제 와서는 ‘내가 무슨 잘못을 했느냐’는 식이다. 갖은 비리에 찰떡궁합을 과시하던 두 사람은 기억상실증도 동시에 걸리는 모양이다. 최소한의 양심마저 내팽개친 이들의 행태에 분노가 치민다.

[김용민의 그림마당]2016년 12월 21일 (출처: 경향신문DB)

박 대통령의 헌재 답변서와 최씨의 재판 발언, 최근 불거진 새누리당 친박계와 최씨 측근의 국정조사 말 맞추기 의혹 등을 종합하면 모든 것이 치밀한 각본에 따라 이뤄졌다는 의심이 든다. 박 대통령은 헌재 답변서에서 최씨와 안종범 전 정책조정수석, 정호성 전 비서관 등의 1심 재판 완료 후에 헌재 결정이 내려져야 한다고 주장했다. 최씨가 재판에서 혐의를 부인하는 등의 방법으로 시간을 끌고, 이를 이용해 헌재의 탄핵 결정도 최대한 늦추겠다는 의도로 보인다. 국정혼란이 길어지든 말든 자신의 몸을 건사해 반전의 기회를 엿보겠다는 심산이다. 새누리당 친박 의원들이 ‘박근혜·최순실 게이트’ 청문회에서 대통령 연설문 등이 들어있던 태블릿PC가 최씨 것이 아니라는 심증을 시민들에게 퍼뜨리려 한 것도 작전의 일종이다. 최씨는 이 태블릿PC가 자신의 것이 아니라며 재판부에 검증을 요청했다. 하지만 태블릿PC가 최씨 소유가 아니라고 해도 비선에 국민주권이 훼손되고 국정이 유린된 이 사건의 본질은 달라지지 않는다.

박 대통령과 최씨의 본심이 확인된 만큼 박영수특검팀은 만반의 준비를 해야 한다. 특검팀은 20일의 준비기간을 마치고 오늘부터 본격적인 수사에 착수한다. 특검팀은 박 대통령의 뇌물죄 입증 등에 수사력을 집중하면서도 김기춘 전 대통령비서실장과 우병우 전 민정수석 같은 이들의 비리도 밝혀야 한다. 범죄 소굴이나 마찬가지인 청와대 압수수색을 실수 없이 마쳐야 함은 물론이다. 헌법재판소는 최대한 신속하게 재판 절차를 진행해 탄핵 결정을 늦추려는 국정농단 세력에 경종을 울려줘야 한다. 법원도 매일 재판을 연다는 각오로 국정혼란의 조기 수습을 바라는 시민들의 기대에 부응해야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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노무현 전 대통령과 곧잘 비교됐던 미국 대통령은 앤드루 잭슨(1767~1845)이다. 미국 제7대 대통령이었던 잭슨은 정규교육을 받지 못했지만 독학으로 변호사 자격을 취득한 비주류 출신이다. 정치조직을 활용하지 않고 유권자를 상대로 유세를 벌여 당선된 최초의 미국 대통령인 잭슨의 지지계층은 노동자·농민 등 서민이었다. 하지만 주류 정치인들은 그를 ‘서부 출신 촌뜨기 대통령’으로 경시했다. 그래서였을까. 잭슨은 대통령 취임 이후 자신과 대립각을 세운 각료들을 제쳐두고 측근들과 국정을 논의했다. 이에 반발한 각료들은 잭슨이 ‘키친 캐비닛’(주방 내각)을 운영한다고 비난했다.

 

미국 가정에선 일반 손님은 응접실(Parlor)까지만 들이고, 친한 사이만 주방(Kitchen) 출입을 허용한다. 이에 빗대 미국 정가에선 잭슨 대통령 재임 이후 공식 내각을 ‘팔러 캐비닛’, 비공식 자문위원을 ‘키친 캐비닛’으로 부른다. 대통령에게 격의 없는 조언을 하는 키친 캐비닛은 임명직이지만 보수는 없고, 1년에 4차례 백악관에서 모임을 갖는다. 존 F 케네디 대통령은 친동생인 로버트 케네디를 법무장관에 임명하기 전 키친 캐비닛의 일원으로 활용했다. 오바마 대통령도 방송인 오프라 윈프리와 재일동포 출신 이홍범 박사 등을 임명했다.

 

박근혜 대통령이 지난 16일 헌법재판소에 제출한 탄핵소추안 답변서에 ‘키친 캐비닛’이란 용어가 느닷없이 등장했다. 박 대통령의 법률대리인단은 “박 대통령이 최순실에게 연설문을 고치게 한 것은 ‘국민 눈높이 자문’을 받은 것이며, 이를 속칭 ‘키친 캐비닛’이라고 한다”고 했다.

 

그러자 “미국 따라하려면 오바마처럼 세월호 참사 당일에 뭐했는지 분 단위로 공개하라”는 등의 비난여론이 쏟아졌다. 민병두 더불어민주당 의원은 페이스북에 “둘(박근혜와 최순실)의 관계는 치킨 캐비닛이란 표현이 더 정확하다. 국민은 치킨 캐비닛에 권력을 위임하지 않았다”고 썼다. 우상호 민주당 원내대표는 “최순실이 ‘키친 캐비닛’이라니, 프로포폴 전담 캐비닛이었느냐”고 했다. 박 대통령은 서민 대통령으로 미국인의 존경을 받으며 20달러 지폐 앞면에 인물초상이 새겨진 잭슨과 자신을 동일시하려는 것 같다. 미국 시민이 알까 걱정이다.

 

박구재 논설위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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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5년 1월, 임신한 아내를 위해 크림빵을 산 뒤 길을 건너던 남자가 뺑소니차에 치여 숨졌다. 소위 ‘크림빵 뺑소니 사건’이다. 범인은 도주했다가 수사망이 좁혀지자 자수했는데, 그는 한사코 ‘사람을 친 것을 몰랐다’라고 주장했다. 술에 너무 취해 정신이 없었다는 게 그의 변명이었다. 사고 직후 그가 골목길에 들어가 한참을 숨어 있었다든지, 정비소에 가는 대신 직접 부품을 구입해 부서진 차를 고치려고 한 일 등으로 미루어 볼 때 그는 사람을 쳤다는 걸 알고 있었던 게 분명하다. 그럼에도 그가 시종 ‘몰랐다’라고 주장한 이유는 그편이 뺑소니보다 형량이나 사회적 비난이 작을 것이라고 착각했기 때문이다.

최순실 의혹이 불거진 지난 한 달여 동안, 우리 국민들이 가장 많이 들은 말은 “몰랐다”이다. 청와대 경호 담당자는 최순실이 출입기록도 남기지 않고 청와대를 출입하는 것을 몰랐고, 측근을 관리해야 할 우병우 전 민정수석은 그녀가 저지르는 국정농단을 알지 못했다고 당당히 말했다. 김기춘 전 비서실장은 최순실의 청와대 출입은 물론 그녀의 이름조차 들어본 적이 없다고 했다. 그는 이것 말고도 모르는 게 한두가지가 아니었는데, 그중 세월호 사건 당일 대통령이 7시간 동안 어디서 뭘 했는지 몰랐다는 건 그가 대통령을 보필해야 하는 비서실장이라는 점에서 황당하기 그지없다. 최순실을 모르는 건 소위 문고리 3인방도 마찬가지였다. 정호성 전 비서관은 최순실에게 대통령 보고 자료를 전달하는 역할을 담당했으면서도 그녀를 모른다고 했고, 이재만 전 비서관 역시 최씨를 만난 기억이 없다고 한 바 있다. 오랫동안 박 대통령을 모셨던 이들이 박 대통령이 죽고 못 사는 최씨를 모르는 게 과연 가능할까 싶지만, 측근들은 하나같이 모른다며 입을 모은다.

일러스트_ 김상민 기자

이쯤 되면 최순실이 과연 존재하는 사람인지 의심이 간다. 언제든 모습을 감출 수 있고 순간 이동이 가능한 게 아니라면, 어떻게 아무도 그녀를 못 볼 수 있을까? 대통령보다 높은 ‘VVIP’라 생각했기에 감히 얼굴을 쳐다볼 엄두를 못 낸 것일까? 청와대 거주민 중 유일하게 최순실을 아는 박 대통령 역시 그녀가 연설문을 잘 쓰는 것만 파악했을 뿐 내면이 탐욕으로 가득 차 있다는 사실을 알지 못했다는 뉘앙스를 풍긴다. 11월4일 대국민담화 때 “개인적 인연을 믿고 제대로 살피지 못한 탓”이라며 눈물을 흘리던 박 대통령의 모습은 친박의 수장 이정현 의원과 몇몇 박사모의 마음을 촉촉이 적셨다. 그러니까 박 대통령은 기업을 협박해 돈을 뜯어내고, 최씨를 위해 이권을 챙겨주는 그 순간에도 그게 국가를 위한 선의에서 나온 행동이라고 굳게 믿었던 모양이다.

이들은 도대체 왜 이리 모르는 게 많은 것일까? 뺑소니보다 만취 상태를 선택한 크림빵 가해자처럼, 이들은 안다고 시인해서 범죄자가 되는 대신 무능한 공직자로 남는 게 더 좋다고 판단한 것 같다. ‘무식한 건 죄가 아니다, 다만 부끄러울 뿐이다’라는 말이 있다. 내가 늘 하는 말인데, 위에서 예로 든 분들은 그 부끄러움을 감당할 뻔뻔함이 있었기에 기꺼이 무능을 택했다.

지난 9월 말부터 발효된 김영란법(청탁금지법)은 공직자가 금품을 받은 경우 대가성 여부에 상관없이 처벌한다는 취지를 담고 있다. 그간 수많은 정치인과 공직자가 돈을 받은 뒤 대가성을 부인해 처벌을 받지 않는 광경을 지겹게 봐왔던 터라, 여론은 이 법을 압도적으로 지지했다. 그런데 뻔히 아는 사실을 몰랐다고 함으로써 혐의를 벗으려는 공직자들은 대가성을 부인하는 공직자보다 덜 나쁜 것일까? 직급이 낮은 분들이야 조금 무능해도 괜찮겠지만, 높은 직급에 있는 이들의 무능은 사적으로 금전적 이득을 취하는 것보다 국가적으로 훨씬 더 큰 해악을 끼칠 수 있다. 특히 국정의 최고 책임자인 대통령의 무능은, 지금 우리가 목격하고 있는 것처럼 국가를 파멸로 몰고 갈 수도 있는 중대한 범죄다.

그래서 난 국회가 소위 ‘김기춘법’을 만들어 줄 것을 제안한다. 고위공직자가 자신의 직책상 반드시 알아야 할 사항을 모른다고 우기면 알고 범죄를 저지른 것보다 훨씬 더 높은 형량을 선고하자는 취지다. 법안을 처음 제안한 내 이름 대신 ‘김기춘법’이라 명명한 까닭은 그가 “모른다”는 말을 단기간에 가장 많이 한, 후안무치한 분이기 때문이다.

김영란법이 공직사회를 변화시킨 것처럼, 김기춘법도 시행만 된다면 공직자들의 언행을 순식간에 변화시킬 수 있을 것 같다.

“최순실씨 잘 알죠. 하도 자주 와서 주민등록등본을 아예 청와대로 옮기라고 농담한 적도 있어요.”(안종범)

“안 수석은 가만있어요. 최순실씨를 저만큼 자주 본 사람이 또 어디 있다고 그래요? 매일같이 보고서 갖다 준 사람이 바로 납니다.”(정호성)

“사실 그날 대통령이 사생활이라고 들어오지 말라고 했는데, 문밖에서 코를 대보니 희미하게 프로포폴 냄새가 나더라고요. 그래서 생각했죠. 아, 대통령께서 사생활을 누리고 계시는구나.”(김기춘)

어디까지나 예를 든 것이지만, 상상만 해도 신나지 않은가? 김기춘법이 하루빨리 시행돼야 할 이유다.

서민 | 단국대 의대 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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검찰이 돌아섰다. 검찰이 등을 돌린 것은 시민들에게 총을 겨눈 군과 경찰이 시민의 편에 선 것과 같다. 살아 있는 권력에 굴종하고 죽은 권력만 물어뜯는다는 ‘하이에나 검찰’의 재빠른 변신이다. 검찰은 촉이 빠르다. 검찰의 표변은 박근혜 대통령이 더 이상 살아 있는 권력이 아니란 뜻이다. 오동잎이 떨어지면 가을이 온 것을 안다.

국정복귀 일성으로 던진 ‘엘시티 철저 수사’ 지시는 지금 박근혜가 갖고 있는 패가 흑싸리 껍데기만큼 보잘것없다는 것을 만천하에 공개한 꼴이 됐다. 특검 후보로 반짝 거론된 채동욱 전 검찰총장은 엘시티 이영복 회장과 친분이 있다. 부산의 룸살롱 마담이었던 그의 내연녀 임모씨(혼외아들의 생모)에게 레스토랑을 차려준 사람이 이영복이다. 하마터면 채동욱에게 조사를 받을 뻔한 박근혜는 ‘채동욱 특검’ 시나리오를 좌절시켰다. 대통령의 엘시티 발언은 김수남 검찰총장을 겨냥한 것이란 얘기도 나왔다. 김 총장도 이영복과 잘 아는 사이라는 것이다. 서초동 법조타운에선 최순실 국정농단 수사를 총지휘하고 있는 검찰총장에게 보내는 모종의 메시지란 얘기가 돌았다. 문재인·김무성 연루설까지 더하면 1타3피, 1타4피라 할 수 있다. 대통령이 국정에 고심하는 수준이 이 정도다. 김 총장에게 물어봤다.

박근혜 대통령이 18일 청와대에서 열린 신임 정무직 임명장 수여식에 참석하고 있다. 청와대사진기자단

- 이영복 회장을 아시는가.

“그렇잖아도 범정(범죄정보기획관실)으로부터 그런 첩보 보고를 받고 깜짝 놀랐다. 얼굴을 본 적도, 통화한 적도, 악수 한번 한 적도 없다. 난 부산에서 근무한 적이 없다. 전혀 모른다.”

- 대통령의 철저 수사 지시는 뭔가.

“아마 대통령도 비슷한 정보보고를 받은 것 아닌가 싶다.”

- 검찰총장을 염두에 두고 한 얘기인가.

“그렇게 생각하고 싶지는 않다.”

- 문재인·김무성 연루설은.

“지라시로 먹고사는 사람들이 써대는 소설이다.”

박근혜는 쓸 수 있는 카드는 다 던지고 있다. 최순실을 덮으려 개헌을 꺼내든 것을 보면 그의 심리상태가 얼마나 비정상인지 알 수 있다. “거짓 자기를 스스로 자기라 믿으며 마음의 평화를 지켜가는 리플리 증후군과 비슷하다”(소아청소년정신과 전문의 서천석 박사)는 의학적 소견은 그래서 더 무겁게 들린다. ‘리플리 증후군’은 현실을 부정하고 허구의 세계만을 진실로 믿으며 상습적으로 거짓된 말과 행동을 일삼는 반사회적 인격 장애다. 미국의 여류 작가 퍼트리샤 하이스미스가 1955년에 쓴 범죄 소설 <재능 있는 리플리씨(The Talented Mr. Ripley)>에서 유래했다. 주인공 톰 리플리가 재벌 아들인 친구를 죽인 뒤 대담한 거짓말과 행동으로 그의 인생을 대신 살아간다는 내용이다. 자기 말이 탄로날까봐 불안에 떠는 단순 거짓말쟁이와 달리 리플리 증후군을 보이는 사람은 자신의 거짓말을 완전한 진실로 믿는다.

박근혜의 거짓말은 리플리의 수준을 넘어섰다. 최순실 보도에 대해 “사회 혼란 일으키는 유언비어”→“일고의 가치도 없는 허위사실”→“연설문 도움받은 정도”→“선의로 한 일”이라고 말을 바꿨다. 새로운 사실이 밝혀질 때마다 또 다른 거짓말을 내놓는 식이다. 최순실 국정농단 감찰에 나선 이석수 특별감찰관을 ‘국기문란’이라며 내쫓았던 그다. 이제 와선 “나도 최순실에게 속았다”고 한다. 나는 잘못한 게 없으니 대통령으로서 국정을 계속 맡아야 한다는 자기방어 논리는 이렇게 만들어진 것이다. 비정상적 자기합리화, 자기왜곡, 공감능력 상실이다. 100만 촛불민심 앞에서 뻔뻔할 수 있고, 어떤 위기에서도 멘털 갑으로 버틸 수 있는 이유다. 불행히도 김종필 전 총리의 “5000만명이 시위해도 박근혜 대통령은 절대 물러나지 않을 것”이란 예언은 점점 맞아가고 있다. 의학 교재엔 리플리 증후군의 위험성도 쓰여 있다. ‘본인의 상습적인 거짓말을 진실인 것으로 믿게 되면 단순한 거짓말로 끝나지 않고 타인에게 심각한 피해를 입힐 위험이 높아진다.’

지금 박근혜에게 나라를 맡기는 건 위험천만한 일이다. 미친 마부에게 말을 맡기는 것과 진배없다. 리플리는 소설 속 주인공이지만, ‘재능 있는 박근혜씨’는 현실의 대한민국 대통령이다. 그의 거짓말 릴레이와 막가파식 버티기는 앞으로도 계속될 것이다. 검찰 수사도 못 받겠다고 하더니 국회 추천 총리도 철회하겠다고 한다. 중대범죄의 주범이 청와대를 진지 삼아 농성 중이다. 성(城)안에 갇힌 줄 모르고 성 밖 시민을 상대로 결사항전 태세다. 자기 살겠다고 나라야 결딴 나든 말든 상관없다는 짓이다. 내일은 또 뭘 꺼낼지 짐작도 할 수 없다. 무엇을 상상하든 그 이상일 것이다. 아무래도 우리 대통령은 치료를 받으셔야 할 것 같다.

박래용 논설위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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박근혜 대통령이 최순실씨 국정농단에 연루된 청와대 참모진을 사퇴시킨 데 이어 총리 등 인적쇄신책을 강구하고 있다는 소식이다. 31일에는 일정을 비우고 쇄신 방안에 대해 홀로 심사숙고했다. 정연국 청와대 대변인은 국정 공백 우려에 북핵 문제 등 주요 외교·안보 사안을 흔들림 없이 일관성 있게 추진해 나갈 것이라고 말했다. 새누리당은 거국내각을 제안하며 구체적인 총리 후보까지 거론하고 있으며 최씨를 소환한 검찰에 조속하고 엄정한 수사를 촉구했다. 최씨와 몇몇 청와대 참모들을 희생양으로 삼아 서둘러 파문을 덮으려는 심사이자 박 대통령이 국정에서 손을 떼라는 시민 요구에 아랑곳하지 않고 있음을 보여주는 장면들이다.

‘비선 실세’ 최순실씨가 31일 오후 서울 서초동 서울중앙지검에 출석하면서 울먹이고 있다. 이석우 기자 foto0307@kyunghyang.com

시민이 선거로 위임한 통치권을 아무런 공직도 맡고 있지 않은 일개 민간인에게 넘긴 사람은 바로 박 대통령이다. 최씨가 재단 설립에서부터 대통령 연설문, 경제, 문화 등 온갖 분야의 국정에 맘껏 개입할 수 있도록 길을 터준 사람이 박 대통령이다. ‘최순실 게이트’가 아니라 ‘박근혜 게이트’가 사안의 본질이다. 시민들은 최씨가 국정 시스템을 유린하도록 허용한 박 대통령에게 분노하고 배신감을 느끼고 있다. 왜 대통령이 선을 넘어야 했는지 진상을 알고 싶은 것이다. 따라서 박 대통령의 진솔한 설명과 사과가 절대적으로 필요하다. 그럼에도 박 대통령은 지금까지 단 한번도 그러질 않았다. 최씨를 둘러싼 숱한 의혹 제기를 비상시국에 난무하는 비방과 확인되지 않은 폭로성 발언으로 일축했고 연설문 유출의 구체적 증거가 제시되자 형식적으로 사과했을 뿐이다. 박 대통령의 인식은 지금도 전혀 달라지지 않고 있다.

결국 독립적인 수사 주체가 박 대통령을 성역없이 수사하지 않는 한 진상을 파헤칠 수 없는 상황에 처한 것이다. 현직 대통령은 형사소추 대상이 아니라는 설득력 없는 논리로 수사를 꺼리는 현재 검찰로는 진상 규명이 어렵다. 수사는 기소 전 단계에서 이뤄지기 때문에 박 대통령에 대한 수사는 아무런 법적 문제가 없음에도 정부·여당은 대통령 비호에만 급급해하고 있다. 헌법학자 출신의 새누리당 정종섭 의원도 자신의 저서에서 ‘대통령이 내란 또는 외환의 죄에 해당하지 않는 죄를 범한 경우에 수사기관은 수사를 할 수 있다’고 적고 있다.

대통령의 지지율이 30% 미만이면 정상적인 국정운영이 어렵다고 하는데 박 대통령의 지지율은 10%대에 불과하다. 사실상 국정수행이 불가능한 상황이다. 박 대통령은 내치 외치 모든 국정에서 손을 떼고 이선으로 물러날 것을 선언한 다음 특검 수사를 받아야 한다. 그래야 나라도 살고 자신도 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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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두망찰’이라는 말은 정신이 얼떨떨하여 어찌할 바를 모르는 모양을 나타내는 부사어다. 황망한 나머지 얼굴이 바래지고 아무 생각도 떠오르지 않을 때 곧잘 쓰인다. 시쳇말로 ‘말문이 막히는’ 지경이다. 노벨 문학상 수상자로 지명된 뒤 수상 여부에 대해 침묵하던 밥 딜런이 엊그제 한림원 사무총장과의 전화통화에서 “상을 받을 거냐고요? 당연하죠”라고 말했다. 그는 그간의 묵묵부답에 대해 “그 뉴스가 나를 ‘말문이 막히게(speechless)’ 만들었다”고 했다. 흔히 말문이 막히는 것은 놀라는 경우다. 딜런의 말문 막힘은 놀랍고 믿기 어려운 소식에 대한 영광의 여운일 테다. 반면 한국 시민들은 딜런과 정반대로 믿기 힘들 정도로 화나는 소식에 말문이 막힐 지경이다.

최순실씨가 2014년 11월3일 서울 강남 신사동의 한 의상실에서 녹색 재킷을 들어보이고 있다(왼쪽 사진). 일주일 뒤 박근혜 대통령이 중국 베이징TV와의 인터뷰 때 이 옷을 입고 있다. TV조선 화면 캡처

박근혜 대통령은 기자회견에서 최순실씨와의 관계를 ‘의견을 묻고 도움을 받는’ 정도로 설명했지만 연설문 수정은 말할 것도 없고 주요 인사 개입, 문화·체육 분야는 물론 외교·안보 정책에 이르기까지 광범위하게, 또 깊숙하게 이뤄진 국정농단 의혹에 숨쉬는 것조차 힘겨울 지경이다. 박 대통령을 두고 최씨의 ‘꼭두각시’ ‘아바타’라는 표현이 예사로이 쓰이는 현실이다. 사태 이후 모르쇠로 발뺌하는 청와대 비서관들의 모습, 그 와중에도 “대통령이 가장 힘들 것”이라며 머리를 조아리는 얼빠진 모습도 말문을 잃게 한다. 박 대통령과 최씨의 관계를 두고 사교(邪敎) 얘기가 나돌고, 최씨의 남자는 호스트바 출신이라는 보도까지 떠올리면 우리가 숨쉬는 한국이 맞는지 의심스러울 정도다.

버락 오바마 대통령의 부인 미셸은 도널드 트럼프의 성추문 폭로 등 막장 드라마로 치닫던 미 대선을 “그들(트럼프 진영)이 저급하게 갈 때 우리(힐러리 클린턴 진영)는 품격 있게 간다”는 말로 정리했다. 이후 이 표현은 미 대선의 상징어가 됐다. 최순실 사태를 어디까지 봐야 하고, 실망해야 할까. ‘최순실 게이트’는 이제 단지 개인의 비리가 아니라 한국의 비극이 될 수 있는 상황으로 치닫고 있다. 이 우두망찰 상황에서 품격을 지키며 담대하게 대응할 수 있을까. 최씨의 막장 드라마를 끝내고, 시민의 분노와 상처를 치유하는 것은 사태의 직간접 당사자인 대통령에게 오롯이 달려 있다.

박용채 논설위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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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순실씨의 국정농단 의혹을 수사 중인 검찰이 최씨와 연루된 청와대 참모진을 대상으로 압수수색에 나섰으나 청와대의 거부로 실패했다. 최씨가 국정을 맘 놓고 주무를 수 있도록 도와준 대통령과 청와대는 민심을 몰라도 너무 모르고 있다. 청와대는 검찰 수사의 대상일 뿐이다. 국가비밀 보호 운운하며 검찰과 대치하거나 협상을 벌일 위치에 있지 않다. 시민들의 더 큰 저항을 부를 행태만 보이고 있다.

박근혜 대통령이 25일 청와대 춘추관에서 ‘비선 실세’ 최순실씨에게 각종 연설문과 발언자료 등을 유출한 것을 인정하며 대국민 사과문을 발표한 뒤 고개를 숙이고 있다. 청와대사진기자단

검찰은 지난 29일 안종범 정책조정수석, 정호성 부속비서관 등의 청와대 사무실을 대상으로 압수수색에 나섰다. 청와대는 법률상 임의제출이 원칙이라며 자료 제출로 맞섰다. 검찰은 자료가 부실하다며 사무실 압수수색을 시도했으나 실패했다. 30일에도 상황은 달라지지 않았다. 형사소송법은 공무상 비밀이라도 국가의 중대한 이익을 해하는 경우가 아니라면 압수수색을 거부하지 못하도록 하고 있다. 청와대에 비밀문서가 보관돼 있어 압수수색이 불가능하다는 청와대 논리는 코흘리개에게도 통하지 않을 망발이다.

최씨에게 대통령 연설문과 국가 주요정책 등 극도 보안이 요구되는 자료가 흘러가도록 도왔고 그가 청와대 인사권까지 휘두를 수 있도록 방기한 청와대가 검찰의 압수수색을 거부한 것은 말이 안된다. 민간인 최씨의 권력이 검찰 수사권보다 센 것이냐는 질문에 무어라 답할 것인가. 최씨의 국정농단은 과거 대통령 주변 인사들의 권력형 비리와 차원이 다른 전례 없는 국기문란 행위다. 시민들이 대통령 하야, 탄핵을 요구하며 분노를 분출하고 있는 것도 바로 대통령이 몸통 역할을 했기 때문이다.

청와대 눈치만 보는 검찰의 수사의지도 빈약하기 이를 데 없다. 미르·K스포츠 재단에 대한 고발이 이뤄진 지 27일 만에야 수사에 나섰고 청와대 눈치만 보다 압수수색에 나선 것으로 의혹의 핵심 당사자인 우병우 민정수석은 대상에 포함되지도 않았다. 자료 협조에 소극적이라며 청와대에 목소리를 높이다 돌연 “청와대가 적극 협조하겠다는 의사를 밝혔다”며 갈등 진화에 나선 건 청와대에 굴복한 것과 마찬가지다. 안 수석과 우 수석, 문고리 3인방이 30일 물러났기 때문에 검찰은 한시라도 빨리 이들이 사용했던 청와대 사무실과 자택에 대한 압수수색을 실시해 관련 자료를 확보해야 한다. 청와대의 증거인멸 시도를 도와주다간 어떤 수사결과를 내놓아도 시민은 믿지 않을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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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니 땐 굴뚝에 연기 날 리 없다. 세간에 회자된 모든 의혹이 속속 근거 있는 사실로 밝혀지고 있다. 권력서열에 관한 얘기, 연설문 수정 의혹, 십상시와 팔선녀 등등. 비서실장만 몰랐던 듯 ‘봉건시대에도 있을 수 없는 얘기’라고 못 박아 부정했지만 며칠이 걸리지 않았다. 명명백백한 증거가 노출되기까지. 역사의 시계가 ‘잃어버린 몇 년’ 정도가 아니라 지금 우리를 봉건시대로 되돌려 놓고 있다. 대통령은 최순실 관련 의혹 제기를 두고 ‘비상시국에 난무하는 비방과 확인되지 않은 폭로성 발언들’로 깎아내리고, 국민과 언론의 근거 있는 의혹 제기를 비방과 유언비어, 괴담으로 매도하고 불법과 무질서로 낙인찍었다.

그러나 여느 피의자처럼 물증을 들이대니 시인하고 말았다. 그러나 그것도 ‘과거 어려움을 겪을 때 도와준 인연’에게 연설과 홍보 정도 의견을 구했다는 선에서, 사과 시점까지 드러난 물증에 맞는 맞춤형 사과였다. 그러나 물증은 거기까지가 아니었다. 최씨의 비선 비서실은 의견을 구하고 옷을 골라주고 연설문을 수정한 정도가 아니라 국정 전반에 걸쳐 손댄 흔적이 드러났다.

JTBC가 최순실씨 컴퓨터에서 입수했다고 24일 공개한 박근혜 대통령의 연설문. 제목 옆에 ‘신문용‘ ‘재수정’ ‘프롬프터’ 등이 쓰여 있어 대통령 발언 이전 받은 초고임을 알 수 있다. JTBC 제공

대통령의 사과로 통치자로서 능력 없음이 드러났다. 보좌진이 정비되지 않은 시기까지 절친의 도움을 받았다는 대통령의 해명은 준비 안 된 대통령임을 실토한 것이나 마찬가지다. 청와대 비서실 시스템조차 갖추지 못하고 비선의 도움으로 출범한 박근혜 정부가 대한민국을 이끌어 왔기에 지금 나라 꼴이 이 모양이었던 것이다.

국민에게 전할 대통령의 말씀이 아무런 공적 직책도 없어 책임도 물을 수 없는, 그저 수십 년 친하게 지내온 사람에 의해서 주물러졌다는 사실에 온 국민은 충격과 분노에 휩싸였다. 우리가 들었던 대통령 연설문이 공적 시스템에 의해서 완성돼 대통령의 입을 통해 국민에게 전달된 것이 아니었다. 국정운영 능력이나 시스템은 구멍가게 수준이었다. 비선 실세의 의견을 듣고 마련한 자료를 수석비서관회의나 국무회의에서 일방적으로 읽어 가면 고개 숙여 받아 적기 바빴던 장면이 국정운영의 모습이었다. 묻지도 따지지도 말고 내 말을 따르라는 봉건영주의 독주는 국민이 부여한 권력을 행사하는 민주공화정의 모습은 아니었다. 퍼스트레이디 시절과 정계입문 과정에서 도움을 받은 친한 몇 사람에 둘러싸여 불통 대통령이 되어갔던 것이다.

언론보도에 따르면 청와대 비서실이 그들의 활동공간인 강남으로 이전한 모양새다. 대통령 보고 자료가 전달돼 국정 전반을 논의하는 비선모임이 열리고 행정관들이 드나들고 상왕 실장인 최씨가 둥지를 튼 곳이 바로 비선 청와대 비서실이었다. 대통령 사과 당시 도열한 비서실장을 포함한 수석비서관들은 이름뿐이었다. 국민이 준 권력을 사유화해 비선에게 국정운영을 맡긴 꼴은 대통령이 즐겨 쓰던 ‘비정상’ 바로 그 자체였다. 이토록 비선 실세가 호가호위하도록 방조한 것은 대통령이다. 국정을 농단하도록 힘을 건네준 이도 대통령이다. 특별감찰관을 해임시킨 이유가 비선 실세의 걸림돌이었기 때문이었던 것이다. 민정수석조차 비선 실세의 손에 의해 추천되고 대통령이 받아들였다고 하니 최씨를 포함한 비선 실세들은 날개를 단 듯 국정을 농단했다. 그러고도 최씨와의 관계조차도 부인하고 최씨와 관련한 의혹 제기를 비방과 폭로성 발언, 괴담 수준으로 치부했다. 그래서 대통령의 언어는 단 한마디도 신뢰를 얻을 수 없고 씨알도 먹히지 않는 상황이 돼버린 것이다.

그야말로 비정상이 난무하는 비상시국이다. 비선 실세를 키워 불법과 무질서가 판칠 수 있도록 부추기고 방조한 장본인이 바로 청와대와 대통령임이 드러났다. 대통령은 경찰의 날 축사에서 ‘불법과 무질서가 용인되면 사회의 발전도, 미래도, 희망도 없다’고 했다. 그 말의 첫 적용대상자가 청와대와 대통령이 될 상황이다. 이 사태를 그대로 덮어두고 책임 있는 자의 사법적 정치적 책임을 묻지 않으면 대한민국의 발전도, 미래도, 희망도 없다.

국가지도자와 정치인은 신뢰를 먹고 산다. 법을 위반하면 법적 책임을 물어 교도소로 보내야 하고, 국민의 믿음을 얻지 못하면 유권자의 심판을 받거나 자리에서 물러나야 한다. 정치적 책임이 바로 그것이다. ‘무늬만 대통령’에 대한 국민의 분노, 불신임은 정점으로 향하고 있다. 국회 청문회를 통하든 특별검사의 수사에 의하든, 비상거국내각을 구성하든 민주주의와 법치국가의 틀 안에서 비정상이 정상화돼야 한다. 먹고 살기 바쁘고 살인적 물대포도 두려운 시민들을 더 이상 아스팔트로, 광장으로 내몰지 않았으면 하는 바람이다.

하태훈 고려대 법학전문대학원 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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