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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 2017.10.30 [창간기획-혐오를 넘어]타인이 되어보기- 상상력을 막는 이기심

중국계 혼혈 배우 클로이 베넷은 헐리우드에서 아시아계가 겪는 캐스팅 불이익 때문에 아버지의 성을 버렸다. 본명은 클로이 왕이다. 미국에서 아시아계 연기자가 따낸 주연급 배역은 1%에 불과하다. 명백한 인종차별로 보이지만 이런 반론도 있다. 주관객층이 백인인 헐리우드 영화의 주인공 가운데 백인이 많은 것일뿐, 돈으로 움직이는 헐리우드에서 우수한 배우를 마다할 이유가 없다는 것.

그 변명은 검증 실험을 통과하지 못했다. 중국의 액션배우 이연걸과 미국의 팝스타 알리야가 주연을 맡은 영화 <로미오 머스트 다이>에는 남녀 주인공의 키스 장면이 들어있었다. 시사회에서 야유를 받은 탓에 키스 장면을 잘라낸 새로운 편집본이 전세계 극장에 걸렸다. 관객의 비위를 맞추기 위해 ‘아시아계 남성 로미오’를 제거해 버린 것이다. 영화 제목 그대로! 관객들이야 “없는 편이 영화적으로 더 나았다”라고 말하면 그만이다. 편견은 부정과 함께 완성된다.

영화 <엑스맨>의 한 장면. 돌연변이들은 주류 사회에서 끊임없이 배척당한다.

한국에선 어떨까? 방송 프로그램에서 여성 출연자의 비율은 30%대에 머문다. 인기 예능은 출연자 대부분이 남성이다. 성차별 캐스팅 탓이 아니라, 남성이 많이 나오면 시청률이 높아지는 것이라는 반박도 있다. 그게 사실이라면 차별의 책임은 방송국이 아니라 사회 전체가 지게 된다. 미국의 인종차별은 심각하지만 한국에는 성차별이 없다고 말하는 사람들로 인해 한가지는 분명해진다. 감정이입의 차이는 세계관의 차이를 만들어내는 마법이다.

공무원시험의 여성합격률이 70%에 육박한 뒤로 시행된 공무원 양성평등 할당 제도의 수혜자는 남성이다. 지난 6년간 정원외 합격자 616명중 458명이 남성이었다. 남성 ‘역차별’을 막기 위해선 불가피한 제도였을까? 판사의 약 70퍼센트, 국회의원의 83퍼센트, 400대 부자의 92.5퍼센트가 남성이라는 사실을 지운다면 그렇게 보일 수도 있다. 반론은 다시 자리를 옮겨 미국에서 받으려 한다.

미국의 아시아계 인구 비율은 5.6퍼센트이지만 지방법원 판사의 3퍼센트, 의원의 2.6퍼센트만이 아시아인이다. 아시아계 학생들은 아이비 리그 명문대학에 합격하기 위해 SAT에서 백인보다 무려 평균 140점을 더 받아야만 한다. 성적이 너무 높아 명문대학들이 사실상의 ‘인종 할당제도’를 적용해 합격권 아시아계 학생들을 탈락시키기 때문이다. 약자들이 불평등한 권력차를 피해 몰려간 곳에서는 평등의 이름으로 능력차를 보정해 버리고 있는 것이다. 아시아계 미국인들은 이를 두고‘대나무 천장’이라고 부른다. 사회적 약자를 짓누르는‘유리 천장’이 우리 사회에 존재하지 않는다면, 아시아인을 짓누르는‘대나무 천장’도 미국 사회에 존재하지 않는다고 말해야 한다. 비록 우리가 차별이 만연한 세상에 살고 있지만, 각각의 차별마저 차별하는 세상에 살 수는 없다.

영화 <엑스맨>에는 돌연변이를 차별해야 한다고 주장했던 한 상원의원이 고준위 방사선에 노출된 뒤 돌연변이로 변하는 장면이 나온다. 상원의원은 스스로 엑스맨이 된 뒤에야 혐오가 몰이해의 다른 이름임을 받아들인다. 하지만 타인이 되어보려고 방사선까지 쬘 필요는 없다. 상상력이라는 더 효과적인 수단이 있기 때문이다. 상상력은 우리가 언제든지 타인이 되어볼 수 있도록 도와준다. 이 간편한 교차성의 다리를 막는 유일한 장애물은 이기심이다.

엘리자는 이탈리아 요리사였다. 태국의 정글에서 만난 그녀로부터 달이 기운 밤 동안 조국의 이야기를 들었다. 성희롱이 일상인 직장, 남편에게 두들겨 맞는 아내들, 응답없는 길거리 시위. 조국을 떠나 백인 히피 공동체에 합류한 뒤에야 자기가 살던 세계의 문제를 똑바로 직시할 수 있게 되었다. 나는 그 풍부한 언어와 상상력, 눈앞에 그려지는 과거와의 전쟁에 완전히 매료당했다. 그녀가 반쯤 감은 눈꺼풀을 굳이 손가락으로 찢어가며 이렇게 말하기 전까지. “너무 졸려. 더 있다가는 아시아인이 되어버리겠어!” 나를 홀린 상상력은 거기까지였다. 세상을 바라볼 수 있는 현명한 눈을 얻은 사람조차 스스로를 극복할 수는 없었던 것이다. ‘엑스맨이 되어보기’가 그토록 어렵다.

<손아람(소설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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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osted by KHross