영화 <1987>은 어떤 관객들에겐 다른 중요한 효용이 있다. 이른바 586세대로 하여금 ‘그날’로부터 지금까지 삶의 의미를 심문·성찰하게 하는 것이다. 필자도 그 세대의 일원이지만 그 광경은 자못 흥미롭고 문제적이다. 약간 슬프고 우스꽝스럽기도 하다. 죄책감과 회한에 젖어 눈물을 흘리고, 후배와 아이들에게 뻐기며 자랑스러워한다. 이 집합적 ‘증상’은 한 사람에게 동시에 일어날 수 있는 것이다.

TV프로그램에 출연한 이한열의 선배 우상호 의원이 박종철의 선배 박종운씨를 꾸짖은(?) 일도 그중 하나였다. 그는 “박종운, 우상호 같은 사람들은 죽음을 안고 살아야 하기 때문에 선택의 자유가 없다”며 ‘종운이’는 ‘정치를 안 했으면 좋겠다’는 충고를 했다. 근래 박씨는 ‘박종철이 죽음으로써 지켜주려 했으나 배신자가 된 사람’으로 새삼 세간의 조명을 받고 있다.

영화 <1987>은 전두환 정권에 항거해 민주주의를 쟁취하려는 사람들의 열망을 담았다. CJ엔터테인먼트 제공

이에 대해 어떤 누리꾼들은 우 의원의 그간의 어떤 실책들을 들며 ‘도긴개긴’이라는 식으로 냉정하게 말한다. 일리가 없지 않겠지만 그리 간단한 문제도 아닌 듯하다. 이런 장면은 꽤 깊게 철학적이고 또 정치적이다. 30년 시간은 무엇이며, 87년체제에서의 사람됨이란 무엇인가? 6월항쟁의 주역들을 갈라지게 하고 그중 어떤 이들을 ‘배신자’ ‘변절자’ 같은 무서운 말을 듣게끔 만든 벡터는 무엇인가?

1980년대는 험악한 시대였다. 그러나 무려 30년이란 시간이 쌓였으니 20대 때 누가 무엇을 어쨌다는 것 자체가 어불성설인지도 모르겠다. 6월의 군중이 하나가 아니었고 세계사의 물줄기도 바뀌었으니, 누군가가 ‘괴물’이 되건 자유한국당이 되건 다 가능한 일 아닌가? 사람 사는 세상을 만드는 방법론도 하나가 아니니 큰길에서 우리는 모두 하나인가? 현실정치와 속인의 삶은 사실 다 ‘그렇고 그런’ 상대성의 세계에 있지 않은가?

그러나 이상하게 우리는 어떤 국면에서, 삶과 인간을 전혀 그런 방법으로 인식하지 않는 것이다. 박종철·이한열의 삶·죽음 같은 것이 준거라는 것이다. 젊은 의기와 희생이, 또 어떤 이념이 절대적인 진리 같은 걸 담고 있다는 것이다. 그래야만 어떤 사람들을 ‘변절자’나 ‘인간도 아닌’ 자라는 식으로 비판할 수 있겠다. 그렇다면 결국 한 존재가 ‘계속 사람’일 조건은 정치 또는 정파와 깊은 관계를 갖고 있다 봐야겠다.

하지만 ‘계속 사람’인 문제는 죽는 날까지 완결되지 않아서 또 문제다. 그래서 <1987>은 무섭고도 무겁다. 그것은 과거·현재는 물론 미래마저 심문한다.

그 시절 아마 그들·우리는 일면 매우 정말 순수했고, 또 일면 생경한 이념에 들떴을지도 모른다. 그러나 그 행동과 이념이 세계에 대해서나, 자기 생에 대해서나 어떤 의미를 가진 것인지 정확히 알 수 없었다. 그러면 이제는 50·60쯤 먹었으니 ‘객관적으로’ 평가할 만한 어떤 확고한 입각점과 세상을 통달한 경륜을 갖게 됐는가? 전혀 아니기 때문에 영화 하나에 울고불고 뻐기고, 위로받고 그랬을 것이다. 인생은 계속 ‘진행 중’이고, ‘박종철·이한열 정신’도 유효할 것이다. 이 점 ‘배신자’나 누구에게나 동등하다. 구원과 멸망의 가능성은 여전히 열려 있어, 끝없는 성찰과 다른 실행이 필요할 뿐이다.

엊그제 열린 ‘1987 박종철거리 선포식’에서도 눈을 붙잡는 장면이 있었다. 박종철과 같은 운동 서클(패밀리·대학문화연구회) 선배였던 김민석 민주당 민주연구원장은 “박종철이 살아 있다면 촛불도 같이 나가고, 세상이 바뀌는 것도 함께 봤을 것”이라고 했다.

이제껏 그런 상상의 어려움에 대해 말해왔는데, 팩트만 말하면 이렇다. 박종철이 살해된 것은 개헌 문제를 둘러싼 공방이 치열하던 정국에서였다. 청계피복 노동자들과의 연대투쟁 때문에 이미 구속된 적이 있는 박종철은 CA(제헌의회)라 불린 정파 계열 학생조직의 일원이었다. 박종철 개인이 얼마나 그 노선에 깊이 동의했는지는 알 수 없으나, 그 그룹은 ‘호헌 철폐 독재 타도’에 만족하지 않았다. 그들은 정파들 중에서 가장 급진적이어서 관념적이라 비판도 받은 ‘제헌의회 소집’을 주장했다. 6월항쟁이 불완전한 승리를 거둔 뒤에도 계속 ‘파쇼하의 개헌 반대’를 외쳤다. 민중의 변혁을 통해 내용에서나 절차에서나 근본적으로 민주적인 헌법을 만들자는 것이었겠다. 실제로 1987년 가을의 헌법 개정은 시민 참여가 제한된 가운데 양김과 군부 간의 타협을 배경으로 ‘8인 정치회담’이라는 정당 엘리트의 손으로 급하게 이뤄졌다.(‘역사비평’ 2017년 여름호 참조)

그의 기일에 생각한다. 이제 우리는 어떻게 고문·용공조작 없는 나라를 확고하게 하고, 또 어떤 헌법을 어떻게 가져야 할 것인지? 30년 묵어 너덜너덜한 이 헌법과 체제를 고치자는 데 반대하는 세력도 여전히 크다.

<천정환 | 성균관대 교수·국문학>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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며칠 전 영화 <1987>을 보았다. 필자에게 있어서 1987년은 아주 특별한 한 해이기도 하고, 전두환 정권에 의해 고문당하고 살해된 학생 박종철은 필자가 대학시절 이끌었던 ‘대학문화연구회’의 후배이기도 하다. 그래서 영화 개봉 소식을 듣고는 곧바로 극장을 찾았던 것이다.

우리나라의 민주화 과정에 관심이 있는 사람이라면 모두 박종철과 이한열의 죽음이 얼마나 지대한 영향을 미쳤는지를 잘 안다. 광주민주화운동을 무자비하게 진압한 전두환 정권은 1987년이 다가올 때까지 정보기관과 경찰을 장악하여 정권에 저항하는 민주세력을 효과적으로 제압하고 민주화운동을 질식시켰다.

영화 <1987>의 실제 모델인 안유 전 영등포교도소 보안계장(오른쪽)과 한재동 전 교도관이 지난 4일 서울 용산구 박종철기념관 5층에서 얘기를 나누고 있다. 과거 치안본부(현 경찰청) 대공분실이었던 이곳에서 1987년 1월14일 박종철씨가 물고문을 받던 도중 숨졌다. 김영민 기자

그러나 1987년 벽두에 터져 나온 박종철 고문살해사건은 전두환 정권의 잔혹성을 모든 국민의 뇌리에 뚜렷하게 각인시켰고, 민주인사들뿐만 아니라 평범한 시민들까지 정권퇴진운동에 발 벗고 나서는 계기가 되었다. 그러다 그해 6월9일 이한열이 경찰이 쏜 최루탄에 피격되어 사망하는 사건이 발생하자 마침내 전두환 정권은 더 이상 견디지 못하고 6·29 항복 선언을 하였다.

오늘날 우리 국민이 비록 완전하지는 못하지만 이 정도로나마 민주시대를 구가할 수 있게 된 것은 박종철과 이한열의 고귀하고 안타까운 죽음 덕분이다. 그들의 죽음은 민주적 정당성을 갖지 못한 정권이 정권유지를 위해 저지르는 극단적인 만행을 잘 보여주었고, 이러한 만행을 생생히 목격한 평범한 시민들의 총궐기로 세상이 바뀐 것이다.

그런데 박종철과 이한열 외에도 전두환 정권에 의해 목숨을 빼앗긴 수많은 사람들이 있다. 그들의 죽음은 대부분의 국민에게서 잊혀졌고, 외면당하고 있는 상태다. 물론 그들은 촉망받는 학생이 아니었고, 경찰이 직접 고문하다가 죽이거나 최루탄을 쏘아 죽인 것도 아니었다. 그러나 그들은 분명히 전두환 정권에 의해 타살되었다.

전두환은 무자비한 군사반란과 내란을 통해 집권한 후 정권을 스스로 미화하는 일에 크게 공을 들였다. 전두환은 취임사에서 국정지표의 하나로 ‘복지사회 실현’을 내세운 후 전두환식 복지사회 실현에 매진하였다. 그는 1981년 4월10일 총리에게 지시하여 전국의 부랑인들을 모두 잡아가두라는 특별지시를 내렸다. 길거리의 부랑인과 노숙인을 깡그리 잡아가두고 나면 대한민국의 길거리는 모두 말쑥한 차림의 선남선녀들로 넘쳐날 것이다. 그에게는 이것이 바로 복지사회가 제대로 실현된 나라였다.

형제복지원은 3000여명이 수용되어 있는 전국 최대의 부랑인시설이었다. 말이 부랑인시설이지 부랑인이 전혀 아닌 멀쩡한 어린아이들과 사회인들도 수백명이 영문도 모른 채 끌려왔다. 그들은 외부와 단절된 채 기약 없는 강제노동과 영양실조에 시달리고 병사하였다. 그뿐이 아니었다. 그들은 수시로 맞아 죽었으며, 죽지는 않았어도 정신과 육체에 심각한 장애를 얻었다.

필자는 울산지청 검사로 재직하면서 1987년 1월17일, 그러니까 대학 동아리 후배 박종철이 전두환에 의해 살해당한 날로부터 3일 뒤 형제복지원 원장 박인근 일당을 특수감금 혐의 등으로 구속하였다. 그때로부터 5개월 남짓 뒤 박인근은 1심 재판에서 징역 10년과 벌금 6억8178만원을 선고받았지만, 그 뒤 이어진 재판에서 대법원은 전두환 정권의 충견 역할을 자임하여 특수감금 혐의에 대해 무죄를 선고하였고, 박인근의 형량은 2년6월로 줄었다.

형제복지원에서 1985년과 1986년에만 각각 90명 정도가 죽었다. 필자는 검찰지휘부의 악랄한 수사방해 때문에 그 진상을 밝힐 수는 없었으나 여러 가지 사정에 비추어 볼 때 그 절반 또는 그 이상이 맞아 죽은 것으로 판단한다. 필자가 한참 사건을 수사 중일 때조차 형제복지원에서 폭행치사 사건이 2건 발생했다. 형제복지원 등 부랑인시설은 물론 민간업체가 운영한 시설이었다. 그러나 그런 시설의 운영은 위헌적이기는 하지만 내무부훈령이라는 국가의 법령에 따른 것이었고, 운영비 전액을 국가가 지원하였고 국가의 감독을 받았다. 전두환 정권은 그런 시설을 전국적으로 확대하여 설치하였으며 수용자 수를 기하급수적으로 늘렸다.

전두환 정권 때 전국의 부랑인 수용시설은 전두환식 ‘복지사회 실현’에 크게 기여했다. 그런 시설들 덕분에 길거리에서 노숙인이나 부랑인을 찾아보기 힘들었고, 세상은 그 허울이 아름답게 비쳤다. 우리는 전두환 정권 시절 전국의 부랑인수용시설에서 발생한 잔혹한 인권유린에 대하여 지금까지 외면하고 있다. 참으로 부끄러운 일이 아닐 수 없다. 우리 사회에서 가장 힘없고 소외된 사람들이 전두환 정권의 부랑인시설에 끌려가 희생되었다. 그런 사람들이야말로 우리 사회에서 가장 크게 보호를 받아야 했던 사람들 아닐까. 지금이라도 특별법을 제정하여 진상조사와 함께 적절한 보상을 실시해야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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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0년대 대학가에도 운동권이 있었다. 학생회는 때가 되면 4·19를 기념하고 6월 항쟁을 기념했다. 과거 민주화를 위해 피땀을 바친 선배들, 시민과 노동자를 기리는 집회에서 외쳐진 구호 중에는 “김대중 정권 퇴진” “노무현 정권 퇴진”도 있었다. 이와 함께 짝을 맞춰 외쳐진 구호는 “비정규직 철폐” “신자유주의 철폐” 같은 것들이었다. 김대중 정권에서 추진하던 민영화에 반대하며 파업을 벌이던 발전노조 조합원들은 경찰을 피해 학교로 숨어들었다. 노무현 정권에서 노동계의 반대에도 불구하고 통과된 기간제법은 비정규직을 대량 양산할 것이란 우려를 현실화시켰다. 학생들은 시설노동자(청소노동자)들의 파업에 연대해 집회를 벌였다. 2000년대 초반의 대학가에서 외쳐지던 구호들은 현재진행형이다.

<영화 1987 > 연희역 김태리

10년도 더 된 기억을 꺼내든 것은 6월 항쟁을 그린 영화 <1987> 때문이다. <1987>이 뜨거운 반응을 얻고 있다. 정치권에서도 인기다. 김부겸 행정안전부 장관 등 내각 인사들이 영화를 관람했고, 문재인 대통령도 지난 7일 이한열 열사의 영정을 들고 노제에 참여했던 우상호 의원(당시 연세대 총학생회장)과 나란히 영화관을 찾았다. 이한열 역의 강동원씨와 나란히 무대에 선 문재인 대통령은 “6월 항쟁을 완성시켜준 게 촛불 항쟁”이라고 말했다. ‘87년 6월 항쟁=2017년 촛불 항쟁=문재인 정권’의 등식이 완성되는 순간이었다. 

마음이 불편한 것은 그 때문이다. 1987년부터 2017년까지 30년 동안 무슨 일이 벌어졌던가. 민주적 정권 교체가 이뤄졌음에도 불구하고 우리 삶은 꾸준히 나빠져왔다. 전 정권이 물려준 외환위기의 유산 속에서 김대중-노무현 정권은 신자유주의적 재편에 충실했다. 비정규직은 양산되고, 일자리는 사라졌다. 젊은이들의 삶은 88만원세대에서 77만원세대로 추락했다. 

‘꾸준한 나빠짐’의 결과 1987년 투쟁이 그토록 열망했던 직선제에 의해 이명박-박근혜 정권이 들어섰다. 이명박은 우리가 상상 못한 스케일로 국토를 망쳐놨고, 박근혜는 우리가 상상 못할 수준으로 권력을 사적으로 유용했다. 더 이상 나빠지는 삶을 용인할 수 없었던 시민의 힘에 의해서 촛불항쟁이 이뤄지고 그 결과 정권교체가 이뤄졌다. 우리가 청산해야 할 ‘적폐’ 속에는 30년간 해결하지 못한 과제들도 포함돼 있다. 30년 전 거리에서 민주화를 외쳤고, 지금은 우리 사회 기득권이 된 386들이 해결 못한 ‘미완의 과제’들인 것이다. 

영화 <1987>은 두 가지 지점에서 문제적이다. 하나는 1987년 항쟁을 특정 사건과 인물들의 영웅적 스토리로 요약해버리는 데 있다. ‘연희’로 여성의 역할이 제한적으로 표현되지만, 노동자의 존재는 거의 드러나지 않는다. 다른 하나는 87년 항쟁이 현재 완성된 듯한 착시현상이다. 영화는 이한열 열사의 노제에 모인 사람들이 ‘그날이 오면’을 열창하는 가운데 구름이 걷히고 햇살이 내리비치며 막을 내린다. 6월 항쟁의 결과로 ‘그날’이 기어이 오고야 만 것 같다. 이 착시현상은 영화 자체의 태도이자 <1987>을 소비하고 추억하는 386세대의 태도이기도 하다. 

우리는 박종철·이한열 열사, 그리고 우리가 알지 못하는 숱한 죽음들을 기억하고 추모해야 한다. 열사를 추모한다는 것은 그들이 구현하고자 했던 가치를 현재적으로 해석하고 싸움을 이어가는 것이다. <1987>은 아쉽게도 우리에게 현실의 어떤 문제도 환기시키지 못한다. 한상균 민주노총 전 위원장은 아직도 차가운 감옥에 있고, 우리 사회의 소수자들은 아직도 차별에 시달리며 기본권 보장을 위해 싸우고 있다. 불안정 노동이 일상화된 현실에서 청년들은 여전히 미래를 꿈꾸기 힘들다. 성소수자는 아직 ‘반대’되는 지위에 머물러 있다. 그러니 <1987>을 보고 추억에 빠지기엔 이르다. 이 문제들을 바로잡기 위한 개혁과 싸움들을 계속해 나가는 것이 1987년을 기리기 위한 올바른 방법이 아닐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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