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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 2015.03.18 ‘예술인간 시대’와 오디션인간

여행에서 찍은 멋진 풍경사진을 자신의 페이스북에 게시하거나 촌철살인 공감을 불러일으키는 글들을 블로그에 포스팅하고, 자신이 직접 노래하거나 연주하는 동영상을 인터넷 플랫폼으로 공유하는 등의 일은 이제 더 이상 특별한 재능을 갖춘 사람들에게만 허락되는 것이 아니다. 관습적 의미의 ‘예술가’는 아니지만 일상에서 예술을 실천하는 사람들, 즉 우리 모두는 ‘예술인간(homo artis)’이다.

예술인간이란 조정환이 자신의 최근 저서에서 탈산업화 사회가 탄생시킨 새로운 인간형을 가리키기 위해 쓴 용어다. 그에 따르면 오늘날은 ‘예술인간의 시대’로 ‘누구나 예술가가 될 수 있는 시대’다. 이 시대는 우리에게 감성적 풍요를 안겨주고 있을까? 꼭 그렇지만은 않은 것 같다. 예술인간의 시대는 이전에는 상품이 될 수 없었던 감정, 상상력, 기분 등에 새롭게 경제적 교환가치가 부여되는 지식정보화 사회를 배경으로 하고 있다. 이 시대는 ‘창조경제’의 시대, ‘창조하지 못하는 자 먹지도 말라’는 암묵적 명령이 관철되는 시대이기도 하다. 평범한 개인에게 이러한 시대를 맞이하는 일이 그저 반가울 수만은 없다. 이전 시대라면 예술가가 도맡아주었던 창작의 고통을 이제는 우리 스스로 일상 속에서 느껴야 하기 때문이다.

텔레비전 서바이벌 오디션 프로그램은 예술인간이 처한 이러한 딜레마를 당혹스러우리만큼 노골적으로 보여준다. 아마추어 음악가였던 평범한 참가자들이 프로그램 속 피 말리는 경쟁 속에서 창조하고 또 창조해야 하는 것이다. 오디션 프로그램은 직업음악가를 향한 진입 문턱을 현저히 낮추는 효과를 가져 왔다. 하지만, 그러한 진입 장벽이 허물어지고 프로와 아마추어 사이의 경계가 흐려질수록 직업음악가의 입지 또한 약화되기 때문에, 그것은 일종의 제로섬 게임이 된다.

유명 연예기획사 대표들이 직접 심사에 나서는 지상파 오디션 프로그램도 있다. 이들은 각자의 기획사에 영입할 연습생들을 선발할 것이라는 의도를 프로그램 시작 때부터 명확히 드러낸다. 시청자들은 연예기획사의 연습생 선발 과정을 겸한 홍보의 시간을 무려 90여분 동안이나 숨죽이며 지켜보게 되는 셈이다.

기획사와 방송제작자, 그리고 시청자 사이에서 이런 식의 이해관계가 조율될 수 있다는 사실이 그저 신기하기만 하지만, 어쨌든 예술인간은 이쯤에서 다른 이름으로 불릴 필요가 있어 보인다. 그것을 오디션인간으로 부르기로 하자.

예술인간은 자율적일 수 있지만 오디션인간은 그렇지 않다. 예술인간은 스스로 듣지만 오디션인간은 들려질 뿐이다. 누군가의 평가와 선택을 통해서만, 그리고 경쟁에서의 승리라는 비교우위를 통해서만 존재가치를 증명할 수 있는 존재, 그것이 오디션인간이다.

‘슈퍼스타K6’의 심사위원 중 한 명인 윤종신 (출처 : 경향DB)


오디션인간은 대중음악의 본질과는 대체로 무관하다. 오히려 오디션인간은 ‘제도적 예술’인 클래식음악계에서 일찍이 출현했다. 클래식 연주자들의 길고 긴 프로필을 장식하는 화려한 콩쿠르 입상 경력은 오디션인간으로서의 자기증명이다.

최근 국내의 유명 오케스트라들에서 모든 단원을 오디션인간으로 길들이려 하는 것도 이 점에서 뜻밖의 일이 아니다.

오디션인간은 신자유주의적 모범으로서의 경쟁력 있는 개인을 표상한다. 이러한 오디션인간이 예술인간을 대체하려 들기 때문에 이 시대의 감성은 활력을 찾기보다는 쉽게 피로감에 빠진다. ‘창조경제’라는 용어가 주는 불편함도 마찬가지다. 그것은 경제를 예술화한다는 구실로 예술을 경제화한다.

예술인간의 시대에 오히려 오디션인간들이 득세하는 것은 무엇보다 예술이라는 개념이 깊이 오염된 탓이다. 돌이켜보면 여러 세대에 걸쳐 한국의 제도는 예술가와 예술작품을 점수로 키우고 점수로 평가했다. 그 결과 ‘예술적’이라는 말은 ‘고득점’과 거의 같은 뜻이 되었다. 그러니 어쩌겠는가. 제도가 가르쳐준 적 없는 ‘삶의 기술’을 독학한 예술인간들이 ‘예술적’이라는 단어의 뜻을 제자리로 돌려놓아 주기를 바랄 수밖에. 그리하여 평범한 개인들 사이의 예술적 소통이 자기배려의 일상적 미학 속에서 빛나게 될 그날까지는 춘래불사춘, 예술인간의 시대는 아직 예술인간의 시대가 아니라 오디션인간의 시대일 것이다.


최유준 | 전남대 HK교수·음악학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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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osted by KHross