북핵 문제는 상당 부분 북·미 간 문제다. 북·미 간 타협과 갈등으로 점철된 북핵 문제의 긴 역사가 잘 말해준다. 그런데도 오바마 정부는 북한의 목줄을 쥐고 있다는 이유로 중국이 쉽게 끝낼 수 있다며 중국에 떠넘겼다. 그런데 그건 미국에도 해당되는 말이다. 미국은 선제타격으로 북한을 무릎 꿇릴 수도 있고, 대북 경제 지원으로 북한 태도를 얼마든지 바꿀 수도 있다. 하지만 중국과 마찬가지로 미국도 그렇게 하지 않았다. 모두 그게 전략적 이익이 없다고 판단했기 때문이다. 이게 바로 오바마가 북핵 문제를 북·중 간의 문제로 바꿔치기하려 갖은 노력을 했음에도 실패한 이유다.

문제 해결의 출발점은 문제를 직면하는 것이다. 그런 점에서 김정은과 트럼프의 움직임은 주목할 만하다. 김정은은 손을 뻗어 트럼프의 옷깃을 건드리는 데 성공했다. 김정은이 신년사에서 대륙간탄도미사일(ICBM) 발사 시험 단계에 있다고 발표하자 트럼프는 “그럴 일 없을 것”이라고 즉각 반응했다. 그리고 제임스 매티스 국방장관을 한국과 일본에 보내 북핵을 주요 위협으로 다룰 것임을 분명히 했다. 북·미가 신호를 주고받은 것은 미·중이 서로 책임전가하며 시간을 낭비한 것보다는 나아 보인다. 그러나 이건 두 거친 남자가 치명적 무기를 다루는 일이다. 김정은은 정말 ICBM을 발사하거나 6차 핵실험을 할지 모른다. 트럼프와 네오콘 못지않은 그의 주변 인물들도 어떤 카드를 꺼낼지 알 수 없다.

이런 정세에서는 종잇장 차이로도 험한 대결과 큰 거래라는 상반된 결과를 낳을 수 있다. 김정은·트럼프 간 교신이 반가우면서도 마음 한구석에서 불안감이 가시지 않는 이유다. 김정은과 트럼프가 협상을 한다 해도 마찬가지다. 두 사람의 예측불가능성과 불확실성은 잘 알려져 있다. 안 그래도 불안정한 게 요즘 한반도 주변 정세다.

제임스 매티스 미국 국방장관(오른쪽)이 2일 정부서울청사에서 황교안 대통령 권한대행을 예방하기에 앞서 한민구 국방부 장관(왼쪽)과 악수하고 있다. 청와대사진기자단

2016년 한국 국방백서는 미국이 군사 우위를 지키는 가운데 중국, 러시아, 일본이 해·공군 중심의 군사력을 경쟁적으로 증가시키고 있다고 밝혔다. 2016년 1월 기준 미국, 중국, 러시아, 일본, 한국의 군사비 합계는 세계 군사비의 57.6%다. 동북아는 이미 세계에서 가장 많은 군비를 쓰고 가장 치명적인 무기로 상대를 겨누는, 세계 최고의 중무장 지역이다. 이런 긴장 상태라도 대화와 교류가 활발하다면 위기감이 그렇게 크지는 않을 것이다. 그러나 남북, 북·미 사이뿐 아니라 한·중, 한·일, 북·중, 중·일 사이를 채우고 있는 것은 깊은 불신과 적대감이다. 이런 상태에서 고고도미사일방어체계(사드) 배치를 결정, 불에 기름을 부은 형국이 되었다.

한반도와 주변에 지금 모자란 것은 군비, 무기, 적의가 아니다. 부족한 건 대화다. 급한 것도 대화다. 그렇다면 정당하다는 이유만으로 상대가 수용하기 어려운 요구를 하는 건 피해야 한다. 북한이 수용할 것 같지 않은 당위적 주장보다 북한이 원하고 한·미가 들어줄 수 있는 현실적 대안이 필요하다. 바로 한·미 연합훈련 일시 중단이다. 북한은 연합훈련을 일시 중단하면 핵실험도 일시 중단하겠다고 줄기차게 제안했지만 한·미는 일관되게 거부했다. 결과는 핵전력을 총동원한 더 강력한 훈련, 북핵 개발의 가속화, 한반도와 주변에 만연한 위험과 불안이다. 그럴수록 한국은 중국을 겨냥한 한·미·일 3각 협력체제에 깊숙이 끌려들어갔다. 그렇게 해서라도 한반도에 평화가 온다면 다행이지만 현실은 정반대이다.

훈련 일시 중단은 비핵화에 관한 북한 태도가 변하지 않으면 아무것도 안 하겠다는 낡은 도그마를 깨는 선제적 조치다. 그건 북한을 대화의 마당으로 이끌어낼 수 있을 뿐 아니라, 한반도 문제와 북핵의 핵심에도 다가가게 해준다는 점에서 상당한 파급력을 갖고 있다. 북핵은 평화의 부재가 낳은 것이다. 과감하게 군사 문제로 대화의 물꼬를 튼다면 정전체제를 평화체제로 전환하는 문제로도 진전시킬 수 있다. 미·중에 휘둘려 갈피를 잡지 못한 채 수렁에 빠진 한반도 상황을 탈피하고 싶다면 한국이 군사적 긴장 완화와 군비통제에 주도적으로 나서야 한다.

서울에 온 매티스는 북핵 문제에 관해 A부터 Z까지, 24시간 365일 긴밀히 소통하고, 3각 협력 및 연합훈련을 강화하겠다고 밝혔다. 더 강력하게 한국을 미국의 손안에 틀어쥐고, 북한과 중국에 맞서겠다는 말로 들린다. 다음 한국 정부가 너무 나서지 못하게 미리 쐐기를 박아 놓자는 것일 수도 있다.

김정은의 무모한 모험을 부추겨도 안되고, 트럼프의 변덕에 휘둘려도 안된다. 그러자면 선택해야 한다. 김정은·트럼프가 추는 지뢰밭 위의 탱고를 구경만 할 것인가. 아니면, 한반도 운명의 주인으로서 나설 것인가.

이대근 논설주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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청와대가 대통령의 독서목록을 공개한 것은 김대중 정부 때부터였다. 책 읽는 대통령을 부각시키려는 뜻도 있었겠지만 실제로 김대중 전 대통령은 폭넓은 독서편력으로 유명했다. 3만여권의 장서를 보유했던 그는 “책을 맘껏 읽을 수 있다면 감옥에라도 가고 싶다”고 말할 정도였다. 책을 읽을 때 밑줄을 긋고, 모퉁이에 글을 적었다는 김 전 대통령은 평생을 두고 읽어야 할 책으로 갤브레이스의 <불확실성의 시대>, 피터 드러커의 <단절의 시대>, 박경리의 <토지>, 변형윤의 <한국경제의 진단과 반성> 등을 꼽았다.

다독가였던 노무현 전 대통령은 공직사회 분위기를 바꾸고 싶을 때 책을 활용해 보수언론에게 “‘독서정치’를 한다”는 비판을 받기도 했다. 그는 감명 깊게 읽은 책의 저자를 발탁해 중용하기도 했다. <변화를 두려워하면 1등은 없다>를 쓴 오영교 전 행정자치부 장관, <드골의 리더십과 지도자론>을 펴낸 이주흠 전 리더십비서관이 대표적인 경우다.

2016년 5월 1일 일반인들에게 첫 공개된 경남 김해시 진영읍 본산리 봉하마을 고 노무현 전 대통령 사저에서 관광객들이 창밖에서 서재 내부를 구경하고 있다. 연합뉴스

이명박 전 대통령은 대기업 최고경영자 출신답게 독서스타일도 실용적이었다. 종이책보다는 ‘e북’(전자책)을 즐겨 읽었던 그는 마이클 샌델의 <정의란 무엇인가>와 피터 언더우드의 <퍼스트 무버> 를 청와대 참모진에게 추천하기도 했다.

미국 역대 대통령 중에선 잠자기 전 책 한 권을 읽었다는 존 F 케네디가 독서광의 반열에 올라 있다. 20일 퇴임하는 오바마 대통령도 케네디에 버금가는 애독가로 알려져 있다. 오바마는 뉴욕타임스와의 인터뷰에서 “8년간의 백악관 생활에서 생존한 비밀은 독서에 있다”고 했다. 그는 “연대감을 느끼고 싶을 땐 링컨, 마틴 루서 킹, 마하트마 간디, 넬슨 만델라의 책을 읽었다”고 밝혔다.

그렇다면 ‘관저 유폐’ 중인 박근혜 대통령은 어떤 책을 읽으며 ‘생존’하고 있을까. 박 대통령의 독서목록을 단 한 번도 공개하지 않았던 청와대가 지난 10일 “클라우스 슈밥의 <제4차 산업혁명>을 읽고 있다”고 밝혔다. 그러자 유승민 바른정당 의원이 “4차 산업혁명에 대해서는 서울대 공대 교수들이 펴낸 <축적의 시간>이 낫다”고 넌지시 조언하기도 했다. 하긴 평소 책 읽기보다는 TV시청을 즐겼다는 박 대통령에게 제대로 된 독서목록이 있을까 싶기도 하다.

박구재 논설위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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미국 대선에서 도널드 트럼프의 승리가 확정되던 날, 인터넷에는 ‘6자회담 가상도’라는 그림이 큰 반향을 일으켰다. 북핵 문제 해결의 가장 합리적 해법이 되어야 할 6자회담의 참석자들을 사진과 함께 올린 것인데, 다 아는 내용이지만 막상 모아놓고 보면 한숨이 나온다. 트럼프, 시진핑, 푸틴, 아베, 김정은, 그리고 박근혜. 시진핑 정도가 예외랄까, 도무지 제정신으로 보이는 사람이 거의 없다는 것이 중론이었다. 심지어 이 맥락에서는 아베가 몹시 멀쩡해 보인다는 평도 있었으니 말이다. 이들이 모여서 회담을 한다면 북핵 문제의 합리적 해법은 고사하고 당장 3차대전이라도 시작하지 않을까 걱정이 될 지경이다. 왜 이렇게 된 걸까.

세계로 눈을 돌려보면 이건 6자회담 참가국만의 일이 아니다. 히틀러의 고향인 오스트리아는 유럽 최초의 극우 대통령을 뽑기 일보 직전까지 갔었다. 2차대전 이후 나치의 잔당들이 만든 극우정당인 자유당의 대선후보 노르베르트 호퍼가 작년 4월 대선에서 1위 당선자를 0.6% 차이로 추격했던 것이다. 놀란 가슴을 채 쓸어내리기도 전에 부정투표 논란이 불거졌고 대법원은 재투표를 결정했다. 불과 한 달 전인 작년 12월4일 이루어진 재투표 직전까지 호퍼는 여론조사에서 계속 앞서갔고 당선이 확정적인 것처럼 보였다. 실제 재투표에서 경쟁자인 판 데어 벨렌이 이긴 것은 다행스러운 이변이었다. 하지만 이걸로 끝이 아니다. 의원내각제인 오스트리아에서 대통령은 명예직에 가깝고 실제 권력은 총리에게 주어진다. 호퍼는 자유당의 진짜 실세인 슈트라헤의 꼭두각시에 불과하다는 것이 중론인데, 현재의 정당 지지율이 유지된다면 2018년 총선에서 슈트라헤는 오스트리아의 총리가 될 것이다.

영국은 이미 브렉시트로 세상을 놀라게 했지만 그 결정의 유일한 승자는 유럽연합(EU) 제재에 균열을 내는 데 성공한 러시아뿐이다. 프랑스는 어떤가. 올해 4월로 예정된 대선 가도에서 현재 1위를 달리는 후보는 역시 극우정당인 국민전선의 마리 르펜이다. 그녀는 스스로를 “마담 프렉시트”라고 부른다. 영국에 이어 프랑스도 EU에서 탈퇴하겠다는 뜻이다. 오스트리아의 호퍼가 “오엑시트”를 내세웠던 것은 물론이다.

세계는 오바마를 잃었지만 그래도 아직 메르켈이 있지 않으냐고? 하기야 트럼프 당선 이후 세계가 하도 엉망으로 돌아가니 메르켈이 4선을 고민한다는 보도도 있기는 했다. 그러나 작년 9월 지방선거에서 메르켈의 기민당은 극우정당인 ‘독일을 위한 대안’에 메르켈 본인의 지역구를 내주어야 했다. 올가을 치러질 총선에서 독일은 극우정당의 연방하원 입성을 허락할 수밖에 없을 것으로 전망된다. 그렇다면 마지막 희망은 연대와 관용의 복지선진국 스웨덴일 터. 그런데 최근 여론조사에 따르면 신나치주의와 연계된 극우정당 스웨덴 민주당의 지지율이 25%를 넘어서 단연 1위를 차지했다. 불과 5년 전 이 정당의 지지율은 5%였다.

세계가 증오의 정치로 몸살을 앓고 있다. ‘증오로 하나 된 세계’라 해도 손색이 없을 판이다. 유럽에서 퍼지는 증오의 큰 원인은 난민 문제인데, 난민이 거의 유입되지 않는 헝가리 같은 나라도 장벽을 쌓고 있고 몇몇 나라들은 기독교도만 받아들이겠다고 공언했다. 하기야 난민이 아예 없는 필리핀의 두테르테는 (어디서 많이 들어본) 범죄와의 전쟁이란 미명하에 자국민을 죽임으로써 정치적 정당성을 만들어내기도 한다. 기술의 변화로 일자리는 점점 줄어들고 글로벌리제이션으로 그나마 있는 일자리는 다른 나라로 옮겨가거나 혹은 이민자들이 뺏어간다는 것이 증오의 정치를 뒷받침하는 논리이다. 실제로는 이민자들이 빼앗아가는 일자리는 미미하거나 혹은 자국민들이 채우지 않는 일자리를 채운다는 연구결과는 부풀려진 증오 앞에 별 힘을 쓰지 못한다. 경험적 연구에 따르면 기존의 사회구성원들이 동질적일수록, 그런 사회에 소수자 집단의 유입속도가 빠를수록 증오는 커지고 거기에 비례해서 극우정당 득표율은 가파르게 상승한다.

한국은 이 조건에 딱 들어맞는다. 그게 왜 그리 중요한지 모르겠지만 수십년간 반복 주입되어온 단일민족 이데올로기는 사회구성원의 동질성을 극단적으로 강조한다. 지금은 조선족과 외국인노동자, 그리고 북한이탈 주민에 한정되어 있지만 통일이 가시화되기라도 한다면 소수자 집단의 유입속도는 엄청나게 빨라질 것이다. 증오가 폭발하고 극우정치가 판을 칠 조건이 갖춰지는 셈이다. 일부 학자들은 막스 베버 이후 금과옥조로 여겨지던 이성의 시대는 끝났다고 단언한다. 바야흐로 광기의 시대가 우리를 기다린다는 것이다. 1000만 촛불로 열린 광장의 결실이 대선 결과로만 판단되어서는 안되는 이유이다. 광기의 시대에도 온전히 우리를 지킬 수 있는 이성과 관용의 제도화가 그 결실이 되어야 한다.

장덕진 | 서울대 교수·사회학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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도널드 트럼프는 지난 8월 자신의 트위터에 “오바마 대통령은 미국 역사상 최악의 대통령으로 기록될 것”이라는 글을 올렸다. 오바마는 최근 한 방송에 출연해서 이 글에 대해 “적어도 나는 대통령으로 기록될 것”이라며 트럼프에게 일침을 가했다. 트럼프가 대통령이 될 가능성이 작다는 점을 비꼰 동시에, 자신의 대통령직 수행에 대한 자신감을 드러낸 말이다.

대한민국 제18대 대통령 박근혜. 이 사실에는 변함이 없다. 박 대통령 역시 대한민국 대통령 중 한 명으로 역사에 기록될 것이다. 그런데 만약 트럼프가 박 대통령에게 저 말을 한다면 박 대통령은 오바마처럼 응수할 수 있을까. 그러기 어려울 것 같다. 박 대통령은 “대한민국 역사상 최악의 대통령” 중 한 명으로 기록될 가능성이 매우 커졌다. 미래의 역사교과서에 박근혜 대통령의 이름과 비선 실세의 이름이 나란히 쓰이게 될지도 모를 일이다.

10월 25일 박근혜 대통령이 '최순실 의혹'과 관련한 대국민사과를 한 뒤 돌아서고 있다. ㅣ청와대사진기자단

하지만 지금 진행되고 있는 이야기는 역사교과서의 한 대목이라기보다는 어느 추리소설의 후반부처럼 느껴지기도 한다. ‘최순실’이라는 퍼즐 조각 하나를 집어넣었을 뿐인데 거짓말처럼 모든 일이 맞아떨어지고 있다. 문제는 이것이 하나의 꾸며진 소설이 아니라 현재진행형의 역사라는 데 있다. 국정농단의 장대한 플롯을 접하며 우리가 느끼는 감정은 지적 흥분이 아니라 크나큰 허탈감과 수치다.

무엇보다 당혹스러운 것은 대통령이 알고 보니 주체성이 부족한 연약하고 의존적인 존재였다는 사실이다. 대통령은 최태민 일가가 조종하는 줄에 매달린 꼭두각시처럼 그려지고 있다. 다들 이 정도일 줄은 몰랐다는 반응이다. 지금 국민이 보는 대통령은 자신의 의지대로 움직이는 개인이 아니다. 짜인 각본 안에서 남이 써준 대사를 앵무새처럼 읊는 무기력한 연기자다. 그것도 평생을 그렇게 살아온 것처럼 보인다는 데 문제의 심각성이 있다.

어디서부터 잘못된 것일까. 정신분석학에서 이야기하는 ‘자기대상(selfobject)’ 개념을 잠시 빌려와 보자. 자기대상은 타인이 온전히 자신의 일부도 아니고 그렇다고 완전히 분리된 것도 아닌 관계를 설명하기 위해 정신분석학자 하인즈 코헛이 고안한 용어다. 자기대상의 발달은 유아기에 시작한다. 유아는 충분히 안정된 자기를 확립하지 못한 상태여서 성숙하기 전까지 정신구조의 일부 기능을 대신 맡아줄 사람을 필요로 한다. 어려서는 부모가 이 역할을 한다. 모든 것을 아이에게 맞추고 아이를 적절히 진정시키며 아이의 생각과 감정을 거울처럼 일일이 반영해준다. 이를 통해 아이는 일종의 전능감을 맛보게 된다. 코헛은 이러한 공감 경험이 건강한 자기애의 근간이 된다고 보았다. 하지만 세상은 언제까지고 자기 뜻대로 움직여주지는 않는다. 현실 속에서 단계적으로 적정 수준의 좌절을 경험하면서 유아의 자기대상은 원시적인 형태에서 더 성숙한 형태로 점차 발전해 나간다. 이것이 코헛이 말하는 심리적 성숙이다.

하지만 어떤 이들은 이런 과정을 정상적으로 겪지 못하면서 살아가게 된다. 가령 양육자의 공감이 현저히 부족했거나 심각한 트라우마가 있었다면 심리적 발달이 저해된다. 또는 수족처럼 모든 것을 알아서 해주는 존재가 계속 곁에 있을 경우에도 유아기적 전능감은 적절히 포기되기 어려울 수 있다. 장기간 고립되어 지내는 것도 자기대상의 원만한 변형과 발전을 어렵게 한다. 부모에서 친구로, 연인에서 배우자로, 스승이나 동료, 때로는 자식에게로 자기대상의 초점이 자연스럽게 옮겨가는 과정이 결여되기 때문이다.

돌이켜보면 최태민과 그의 자녀들, 그중에서도 최순실은 오랜 세월 박 대통령의 자기대상 역할을 해온 것으로 보인다. 그것도 건강하지 못한 자기대상이었을 공산이 크다. 박 대통령과 최순실의 관계는 정신분석학에서 말하는 모자공생을 연상케 한다. 이런 밀착된 관계에서는 자기 생각과 타인의 생각, 자기 감정과 타인의 감정이 쉽게 구분되지 않는다. 대통령의 주체성이 심각하게 훼손된 것도 이런 맥락에서 이해해볼 수 있을 것이다.

박 대통령이 대국민 사과에서 언급한 ‘순수한 마음’은 현실의 복잡다단함을 제대로 대면하지 않고 모든 것을 자신에게 맞춰주기만을 바라는 유아기적 욕망에 가깝다. 대통령의 생각이 여전히 ‘순수’에 머물러 있다면 이는 개인의 불행이자 시대의 비극이다. ‘가장 개인적인 것이 가장 정치적인 것’이라는 말이 있다. 이제라도 박 대통령이 국가 통치에 앞서 자기 자신을 책임지는 개인으로 다시 태어나 정치의 전면에 설 수 있기를 바란다. 그런 용기와 결단력, 사고력이 대통령에게 남아있을까. 알 수 없다. 하지만 기대는 크지 않다. 심리적 성숙은 그리 단기간에 이룰 수 있는 게 아니기 때문이다.

김성찬 | 소아청소년정신과 전문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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임을출 | 경남대 극동문제연 연구교수



 

북한의 3차 핵실험이 끝난 지금의 상황은 그야말로 ‘멘붕’이다. 한국은 물론 미국, 중국 등 주변국들 내부에서는 대북정책 패러다임을 전환해야 한다는 목소리가 여기저기서 터져 나온다. 북한은 장거리 로켓에 이어 한층 증강된 핵능력을 과시하면서 핵보유국의 자리에 성큼 다가섰다. 더구나 북한은 미국이 제재 강화 등 적대시정책을 지속할 경우 제2, 제3의 대응조치를 취하겠다고 한 마당이다. 이 때문에 이제껏 해왔던 안이한 임기응변식 조치로는 상황관리조차 제대로 할 수 없게 되었다. 매우 신속하게, 그러면서 보다 근본적인 해법을 모색해야 하는 시점인 것이다.

북한 핵실험 강행에 대한 국방부 발표 (경향신문DB)


북한은 미국의 오바마 행정부가 그간 ‘전략적 인내’ 운운하며 기존 대북 적대시정책을 유지해온 것에 대해 이제는 ‘말’로 해결할 단계가 지났다고 판단한 듯하다. 며칠 전 조선중앙통신은 “핵실험보다 더한 것도 해야 한다는 것이 오늘 우리가 도달한 최종 결론이고, 이것은 민심의 요구”라며 “우리에게는 끝장을 볼 때까지 나가는 길밖에 다른 선택이란 없다”고 ‘배수의 진’을 쳤다. 따라서 지금 한국, 미국 등이 고려하고 있는 더 강력한 제재가 현재의 위기 상황을 완화시킬 가능성은 거의 없어 보인다는 점에서 현 위기 성격은 이전과는 판이하다.


북한 김정은 체제의 의도는 분명해 보인다. 이제 핵보유국으로서 한반도 평화체제 문제를 미국과 담판 짓겠다는 것이다. 평화협정 체결이 단기간에 이뤄지기 힘든 것이라는 점은 북한도 잘 알고 있을 터이므로 최소한 북한 경제를 옥죄는 제재라도 완화되면 북한은 미국의 적대시정책 변화 가능성을 긍정적으로 평가할 것으로 보인다. 하지만 지금 분위기로 봐서 미국이 북한의 요구를 귀담아들을 가능성은 거의 없다. 이미 북한 정권에 대한 신뢰가 바닥까지 추락한 마당이어서 어느 나라 지도자도 먼저 나서 경제제재 완화는 물론 군사적 접근 일변도가 아닌 포용적 접근도 언급할 수 없을 것이다. 미국이 대북 제재를 완화할 경우 핵공갈의 위협에 굴복하는 모양새로 비칠 것이기 때문에 나라 안팎의 비난을 감수하고 이런 결단을 내리기는 쉽지 않다. 이는 새로 출범하는 박근혜 정부도 마찬가지다. 안보를 중시해온 박 당선인의 스타일을 볼 때도 당장 회유책을 꺼내 들기는 쉽지 않을 것이다.


그럼에도 지금은 평화적 해법을 포기해서는 안된다. 단기적인 강경대응에 몰두하기보다는 ‘핵무기와 북한 정권은 운명공동체’라는 현실을 인정하면서 감정에 치우치지 않고 침착하게 비핵화와 평화체제 및 경제협력 증진 등을 함께 발전시킬 수 있는 전략적 패키지 딜을 모색해야 한다. 한국과 미국을 비롯한 국제사회는 상황을 더 악화시키는 결과를 충분히 예측할 수 있는 더 강력한 제재 방식을 고민하기보다는 북한의 핵도박을 제어할 수 있는 제재가 아닌 다른 수단도 동시에 찾아야 하는 것이다. 이런 패키지 딜 구상도 너무 뻔한 접근을 하기보다는 북한 지도부의 허를 찌르는 새로운 접근이라면 더욱 좋겠다. 설익은 견해이기는 하지만 북한 내부에서 핵실험을 반대하는 강력한 목소리가 나오도록 명분을 제공할 수 있는 제안들이 대안으로 고려될 수 있을 것이다. 김정은 정권이 강조하고 있는 주민생활 향상에 초점을 맞추면서 개방효과가 큰 경제협력의 추진도 유용한 카드가 될 수 있다.


아이로니컬하게도 제재의 수준과 북한의 미사일, 핵능력 증강 수준이 비례해왔다는 점, 국제사회의 제재는 북한 주민들의 고통만 가중시켜온 점 등도 세심하게 감안해야 한다. 또한 정부는 우선 강력한 억제력을 토대로 북한의 비핵화를 위해 노력하면서도 핵문제 해결의 열쇠를 쥐고 있는 북·미 양자대화의 조기 성사를 적극 지원함으로써 실질적인 주도권을 갖는 노력도 필요해 보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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