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명박 정부 시절 여론조작을 위해 민간인을 동원해 댓글부대를 운영한 민병주 전 국가정보원 심리전단장이 19일 새벽 구속됐다. 원세훈 원장 시절인 2010~2012년 외곽팀을 운영하면서 불법 선거운동과 정치관여 활동을 하도록 하고 수십억원의 활동비를 지급한 혐의다. 그는 2013년 박근혜 정부 검찰 수사에서 구속을 면했지만 4년 만의 재수사에선 벗어나지 못했다. 이명박 정권 때 광범위하게 진행된 추악한 여론 공작 실태는 도대체 그 끝이 어디인지 알 수가 없다. 이번엔 2012년 총선·대선을 앞두고 김관진 당시 국방부 장관이 국군 사이버사령부의 댓글작업을 직접 지시하고 보고받았다는 증거가 담긴 군 내부 문건이 새롭게 공개됐다. 국방부 2급 비밀문서인 ‘2012 사이버 심리전 작전 지침’이란 문건에는 ‘총선·대선 개입’이라는 활동 목표가 분명히 적시돼 있다. 국정원 외에 국방부 장관까지 군 댓글공작을 진두지휘한 것이다.

박원순 서울시장이 19일 오전 서울시청 브리핑룸에서 가진 민주당 적폐청산TF(태스크포스) 회의 관련 기자간담회에서 이명박 전 대통령을 고소·고발한 취지를 밝히고 있다. 연합뉴스

이런 수준일 줄은 몰랐다. 블랙리스트에 포함돼 알몸 합성사진에 얼굴이 오른 배우 김여진씨는 “그 추함의 끝이 어딘지 똑바로 눈뜨고 보고 있기가 힘들다”고 했다. 시민들의 생각도 그와 똑같다. 국정원 심리전단은 합성 사진 제작·유포 계획을 상부에 보고하면서 ‘특수공작’이란 표현까지 썼다. 좌파 낙인을 찍은 문화예술인을 지원대상에서 배제하는 방식의 박근혜 정부 블랙리스트와는 전혀 다른 악질적 행태이다. 시민 세금으로 민주주의의 기초를 파괴하고 시민의 기본권을 난도질했으니, 국가기관의 탈을 쓴 범죄집단이었다고 해도 할 말이 없을 것이다.   

그런데도 이명박 전 대통령 측은 “무슨 법적 권능과 근거로 국정원 기밀사항을 뒤지느냐. 제대로 하려면 국정원이 도청했던 이전 정권 때 일도 공개해야 한다”며 반발했다고 한다. 적반하장도 유분수다. 지금까지 드러난 사실로만 봐도 청와대와 국정원의 일사불란한 움직임은 대통령의 지시가 없었다면 실현 불가능하다는 것을 알 수 있다. 국정원의 문화예술인 퇴출공작은 ‘VIP(대통령) 일일보고’ 형태로 청와대에 보고된 사실도 드러났다. MB의 수족인 원세훈 전 원장은 이런 혐의로 이미 징역 4년을 선고받고 법정구속됐다. 도대체 뭐가 더 나와야 순순히 범죄를 인정할 것인가. 재임 중 입만 열면 ‘국격’ 타령이더니 정작 자신이 나라를 망신시킨 대표로 역사에 기록될 수 있다는 것을 모르는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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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국가정보원 댓글’ 사건으로 기소된 원세훈 전 국가정보원장이 파기환송심에서 정치개입과 선거개입 혐의가 모두 유죄로 인정돼 징역 4년을 선고받고 30일 법정 구속됐다. 당초 2심의 징역 3년형보다 처벌 수위가 높아진 것이다. 사필귀정이다.

파기환송심을 맡은 서울고법 형사7부(재판장 김대웅 부장판사)는 원 전 원장 재직 당시 국정원이 장기간 조직적으로 정치·선거에 관여했다는 검찰의 기소 내용을 받아들였다. 헌법 제7조는 공무원을 국민 전체에 대한 봉사자로 규정하고 있다. 공무원은 직무 영역에서 지위 고하를 불문하고 정치적 중립을 반드시 준수해야 한다. 국정원도 예외일 수 없다. 특히나 국정원은 막대한 예산과 광범위한 조직을 거느린 핵심 정보 기관이다. 국정원이 정치적 중립을 잃는 순간 민주주의는 위기에 빠진다. 그러나 원 전 원장은 정치적 중립 의무를 저버리고 이명박 정부와 여당엔 유리하고, 야당에는 불리한 내용을 인터넷에 전파하며 여론을 조작했다.

원세훈 전국가정보원장이 30일 서울 서초동 고등법원에서 대선개입 사건에 대한 파기환송심에서 징역 4년을 선고받고 법원 호송차량으로 향하고 있다. 원세훈 전 국가정보원장이 30일 서울고등법원에서 열린 국정원 대선개입 사건 파기환송심에서 징역 4년을 선고받고 법정 구속돼 구치소 호송차량으로 향하고 있다. 김창길 기자

대선을 앞두고는 야당 후보 낙선 운동까지 벌였다. 2012년 말에 치러진 18대 대선에서 여당인 박근혜 후보와 야당인 문재인 후보 간 득표율 차이는 3.6%포인트에 불과했다. 원세훈 국정원의 불법 활동이 민의를 왜곡해 선거 결과에 결정적인 영향을 미쳤을 가능성을 배제할 수 없다.

재판부는 이날 판결에서 공무원 정치 관여 행위의 기준을 제시했다. 국정홍보성 글이나 현직 대통령을 옹호하는 게시글이어도 특정 정당이나 정치인에 대한 지지·반대로 이어지면 정치관여 행위에 해당한다는 것이다. 이에 따라 인터넷 커뮤니티 ‘오늘의 유머’에서 특정 게시글에 찬성·반대를 클릭한 행위 1200회, 이외의 인터넷 게시글과 댓글 2027회를 정치관여 행위에 해당한다고 봤다. 또 국정원 심리전단 직원들이 사용한 인터넷 사이트 계정과 트위터 계정에서 이 같은 글 게시와 찬반 클릭이 장기간 반복된 것으로 볼 때 불법 행위가 능동적·계획적으로 이뤄졌다고 판단했다.

원 전 원장은 이런 불법을 저지르고도 북한 선전선동에 대응해 국가안전을 지키기 위한 사이버활동이라고 궤변을 토했다. 문제의 인터넷 글에 대해서는 모르는 일이라며 1심부터 파기환송심까지 내내 부하들에게 책임을 떠넘겼다. 이런 인물이 국정원장이었으니 ‘자유와 진리를 향한 무명의 헌신’이라는 원훈에 따라 국가와 시민에게 진실로 충성한 국정원 직원들은 이명박 정부 내내 좌절감이 컸을 것이다.

댓글 사건은 원 전 원장의 범죄 가운데 일부에 불과하다. 검찰은 국정원 직원 외에 민간인 댓글부대 운용 등에도 원 전 원장이 개입했다고 보고 있다. 원 전 원장의 배후에는 이명박 당시 대통령과 청와대가 있을 가능성이 높다. 국정원 댓글공작을 한 민간인들의 상당수는 ‘늘푸른희망연대’ ‘한국자유연합’ 등 이명박 전 대통령과 친분이 있는 인사가 설립하거나 이 전 대통령을 지지했던 관변단체들인 것으로 이미 드러났다. 박근혜 정부 초기 검찰의 국정원 댓글 수사를 방해한 세력에 대한 수사도 필요하다. 당시 수사팀장이었던 윤석열 서울중앙지검장은 좌천됐고 채동욱 검찰총장은 내밀한 사생활이 언론에 폭로되면서 사퇴했다. 국정원 적폐청산 TF가 진상조사 중인 이명박·박근혜 정부 국정원 당시 적폐는 13건에 이른다. 성역은 있을 수 없다. 검찰은 국정원의 정치공작을 철저히 파헤쳐 지위 고하를 막론하고 엄벌해야 한다. 그것이 국정원을 바로 세우고, 추락한 검찰의 명예를 회복하는 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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불법 정치관여, 대선개입 혐의를 받은 원세훈 전 국정원장에게 서울중앙지법이 ‘정치행위는 유죄, 선거개입은 무죄’라는 판결을 내린 것은 정의의 여신 유스티치아(Justitia)의 안대를 벗기고 양손에 든 칼과 정의의 저울을 내팽개치는 참으로 희한하고도 코미디 같은 판결이 아닐 수 없다.

국가 안보 수호와 국익 증진을 위해 일해야 할 정보기관이 독재에 앞장서고 국민을 탄압하던 태생적 추잡함과 권력욕의 달콤함을 끊지 못하고, 대통령 선거를 앞둔 시점에서 자행한 행위는 박근혜 후보를 두둔하고 문재인·안철수 후보를 비방하는 내용의 댓글을 여기저기 퍼뜨리는 것이었다.

소위 엘리트라고 하는 국정원 요원들이 조직적으로 PC방 폐인들처럼 몰래 야당 후보를 음해하는 글들을 쓰고 앉아 있었다는 것은 정보기관은 물론 대한민국 정치에도 먹칠을 하는 창피하고 부끄러운 일이다. 그런데 법원은 특정인을 거론하지는 않았다며, <개그콘서트> 유행어처럼 “누가 봐도” 한 쪽에 상처를 주려고 온갖 잡스러운 글들을 올리고 퍼나른 행위를 두고 정치행위는 유죄인데 선거운동은 아니니 무죄라는 판결을 내렸다. 이거야말로 코에 걸면 코걸이고 귀에 걸면 귀걸이인 정치적 이해득실을 고려한 판단으로 보지 않을 수 없다.

서울 서초동 대법원 청사 로비에 있는 '정의의 여신상'. 왼손에는 법전을, 오른손에는 엄정한 판결을 상징하는 저울을 들고 있다. (출처 : 경향DB)


언제부터 국정원이 선거운동을 하는 집단이었나. 특정인을 지지하지 않았으니 무죄라면, 국정원이 사람을 특정하지 않고 선거운동을 해도 된다는 뜻인가. 죄는 분명해 보이는데 무죄라고 하면 너무 말이 안될 것 같고, 유죄라고 하자니 꺼림칙하니 적절한 선에서 궤변의 저울을 정의의 판결이라고 포장해도 되는 것인지 묻고 싶다.

국정원의 망동은 선거에 개입해 특정 결과에 영향을 주려던 것이 너무도 명백하다. 그럼에도 선거법 위반이 아니라는 판단은 땅에 내동댕이쳐진 유스티치아의 칼을 국민이 다시 들어 사법부에 겨눌 수밖에 없는 심각한 대국민 테러 행위임이 분명하다.

도대체 그들이 섬기는 정의의 여신은 어디로 간 것일까. 그들이 섬기는 칼은 누구를 향하는 것이며 그들이 저울질하는 정의는 도대체 누구를 위한 저울일까.


이영일 | 자유기고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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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당한 언설을 늘어놓는 일은 언론의 역할이 아니다. 하지만 상식이 외면받는 시대엔 어쩔 수 없다. 진부한 당위라도 재론해야 한다. 기소권을 독점하는 검찰이 1심 재판에서 무죄를 받았다면 항소하는 게 상식이다. 사회적 파장이 큰 사건이라면 더 말할 나위 없다. 그런데 검찰이 상식과 다른 태도를 보이는 모양이다. 원세훈 전 국가정보원장의 공직선거법 위반 혐의 무죄에 대해 항소 여부를 망설이고 있다고 한다. 반면 환호작약해도 모자랄 원 전 원장은 “국정원법 위반 혐의도 무죄를 받겠다”며 일찌감치 항소장을 제출했다. 누가 범죄를 저지른 사람이고, 어디가 범죄를 처벌하는 곳인지 헷갈릴 지경이다.

대선 개입 혐의로 기소된 원세훈 전 국가정보원장이 11일 서울 서초동 서울중앙지법에서 열린 1심 재판에서 징역 2년6개월 집행유예 4년을 선고 받은 뒤 취재진을 피해 법정을 나서다 기자들에 둘러싸이고 있다. (출처 : 경향DB)


지난 11일 ‘원세훈 대선개입 무죄’ 판결이 내려진 후 검찰은 별다른 입장을 밝히지 않았다. “판결문을 분석한 뒤 항소 여부를 결정하겠다”는 원칙론이 전부였다. 앞서 검찰은 추석 연휴 전날 ‘직파간첩 사건’ 홍모씨에게 무죄가 선고되자 즉각 항소 방침을 밝힌 바 있다. 심지어 증거조작으로 무죄가 선고된 유우성씨 사건도 대법원에 상고했다. 원 전 원장 사건을 둘러싼 검찰의 침묵은 극히 이례적이다. ‘청와대 눈치보기’라는 인상을 지우기 어렵다. 원 전 원장의 대선개입 인정 여부가 박근혜 정부의 정당성과 직결되는 만큼 수뇌부가 부담스러워하는 듯하다. 원 전 원장을 법정에 세운 ‘채동욱 검찰’이 찍혀나간 뒤 ‘김진태 검찰’이 공소유지에 별 관심 없었던 걸 생각하면 놀랄 일도 아니다.

그러나 기본적 상식까지 배반해선 안된다. 검찰의 기소권은 주권자로부터 위임받은 권한이다. 자의로 공소를 제기할 권리가 없듯이 자의로 공소유지를 포기할 권리도 없다. 검찰이 항소를 포기하면 자기부정이자 직무유기가 된다. 정권을 대놓고 비호한다는 비판도 면할 수 없다. 검찰은 항소해야 마땅하다. 다만 여론에 밀려 ‘무늬만 항소’하는 식이 돼선 곤란하다. 원 전 원장의 선거법 위반 혐의에 반드시 유죄를 받아내겠다는 의지와 복안이 뒷받침돼야 한다. 1심 재판부는 판결문에서 “피고인의 행위가 ‘선거 또는 선거결과에 영향을 미치는 행위’에 해당할 여지가 있음은 별론으로 한다”고 밝혔다. 검찰이 적용한 선거법 85조(공무원의 선거관여 금지) 위반 혐의에 무죄를 선고하면서도, 86조(공무원의 선거에 영향을 미치는 행위 금지) 위반 가능성은 남겨둔 것이다. 검찰은 86조까지 추가로 적용해 항소해야 한다. 검사는 특정 정권의 수족이 아니라 ‘공익의 대표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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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한민국의 민주주의는 민주시민의 피와 땀으로 이루어낸 역사다. “주권은 국민에게 있고, 모든 권력은 국민으로부터 나온다”고 헌법 제1조는 규정하고 있지만, 건국 이후 오랜 기간 이 규정은 독재자들의 칼날 앞에 무력했다. 독재자의 하수인으로 그 칼자루를 들고 설친 것은 무소불위의 권력을 행사한 정보기관이었다. 중앙정보부를 필두로 이름만 바꾸어온 이 정보기관은 선거 때마다 정치공작을 감행함으로써 주권자인 국민을 모독했다. 민주화의 성과로 이런 범죄행위는 사라진 듯했으나 2012년 국정원은 인터넷 강국 대한민국의 기술 수준에 맞는 역사적 사건을 일으켰다.

지난주 목요일 서울중앙지법 형사21부는 국정원 댓글사건의 판결을 선고했다. 재판부는 검찰이 기소한 여러 범죄사실을 증거불충분으로 인정하지 않았지만 204쪽이나 되는 방대한 판결문 곳곳에 국정원이 현실정치에 개입하여 국민의 여론 형성을 어떻게 왜곡했는지를 보여주었다. 재판부는 대통령 선거 시기 국정원 직원들이 정부의 정책이나 국정 성과 등을 홍보하는 댓글과 대선 후보자와 소속 정당에 대한 반대·비방 취지의 글을 상당수 작성하여 사이버 공간에 게시했다는 사실을 인정했다. 그럼에도 재판부는 원세훈 전 원장을 비롯한 피고인들에게 국정원법 위반으로 유죄를 인정했을 뿐 공직선거법 위반에 대해서는 무죄를 선고했다. 이 판결은 결과적으로 정권의 정통성에는 일조하였지만 사법정의의 외피를 쓴 정치판결로 역사에 기록될 것이다.

선거 시기에 국정원의 정치개입을 인정하였다면 공직선거법상 금지되어 있는 공무원의 지위를 이용한 선거개입이라고 보는 것이 법률가의 경험칙과 국민 일반의 법 상식에 부합한다. 선거 국면에서 국정원이 여당에 유리하고, 야당에 불리한 정치댓글 작업을 조직적으로 한 것이 밝혀졌다면, 그것을 여당 후보자를 위한 비밀 선거운동 외에, 달리 무엇으로 설명할 수 있겠는가.

백보를 양보하여 국정원법에 의한 정치개입만 유죄를 인정한다고 해도 피고인들에게 집행유예를 선고한 것은 전형적인 솜방망이 처벌이다. “국가기관이 특정한 여론을 조성할 목적으로… 국민들의 자유로운 여론 형성과정에 직접 개입하는 행위는 어떠한 명분을 들더라도 절대로 허용되어서는 아니된다.” “이 사건 범행은 민주주의의 근간을 뒤흔드는 것으로 그 죄책이 무겁다.” 이렇게 말한 것은 다른 누구도 아닌 재판부 자신이다. 그럼에도 재판부는 피고인들 전원이 법정 밖으로 유유히 걸어나가도록 했다. 국기문란의 주범이라 훈계하면서, 한편으론 이런저런 이유를 들먹이며, 선처에 선처를 한 것을 어느 누가 사법정의라 운운할 수 있을까.

취재진에 둘러쌓인 원세훈 전 국정원장 (출처 : 경향DB)


더 묵과하기 힘든 것은 재판부가 피고인들에게 공직선거법 무죄를 선고하면서도 또 다른 공직선거법 위반 가능성을 버젓이 거론했다는 점이다. 공직선거법이 공무원의 ‘선거개입 행위’와 ‘선거 또는 선거결과에 영향을 미치는 행위’를 구별하여 규정했음에도, 검찰은 오로지 선거개입 행위만 기소했다. 재판부는 전자에 대해선 무죄를 선고하였지만, 후자의 경우는 공직선거법 위반을 인정할 여지가 있다고 하였다. 검찰은 주위적으로 주장하는 공소사실이 무죄가 될 경우를 대비하여 유죄가 될 수 있는 다른 법조 적용을 예비적으로 청구할 수 있다. 그런데 어찌 된 영문인지 공판이 종결될 때까지 그런 조치는 없었다. 검찰의 공소유지 의지를 의심할 수밖에 없는 대목이다. 이런 경우 재판부는 검찰로 하여금 적용 법조를 바꾸도록 요구할 수 있음에도 판결문에서 검찰에 훈수하는 정도로 그치고 말았다. 믿고 싶지 않지만 민주주의 유린사건에 대한 사법부의 단죄 의지는 고작 이 정도에 불과했던 것이다.

만일 이 판결이 그대로 확정된다면 대한민국 민주주의는 조종을 울렸다는 평가를 받아 마땅하다. 항소심에서 이를 바로잡지 않을 경우 주권재민을 선언한 우리 헌법은 또다시 위기에 봉착할 것이다.


박찬운 | 한양대 법학전문대학원 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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현직 부장판사가 원세훈 전 국가정보원장에 대한 법원 판결을 비판하고 나섰다. 김동진 수원지법 성남지원 부장판사는 법원 내부게시판에 올린 ‘법치주의는 죽었다’는 글에서 원 전 원장의 선거법 위반 혐의에 대한 무죄 선고를 신랄하게 꼬집었다. 김 부장판사는 “국정원이 2012년 대선에 불법 개입한 점은 삼척동자도 다 아는 사실이다. 그럼에도 서울중앙지법 재판부만 선거개입이 아니라고 한다”며 이번 판결을 ‘궤변’으로 규정했다. ‘정치관여는 했지만 선거개입은 안 했다’는 모순적 판결이 법원 내부에서조차 비판받기에 이른 것이다. 한국 사법의 슬픈 현주소다.

우리는 원 전 원장에 대한 판결을 두고, 상식적으로 납득할 수 없는 판결이라 밝힌 바 있다. 김 부장판사의 비판 역시 일반인과 동떨어진 어려운 법이론이 아니라 평범한 상식에 기초하고 있다. 그는 2012년은 대선이 있었던 만큼 선거개입과 무관한 정치개입이 원천적으로 불가능했다는 점을 지적했다. 그러고는 재판장에게 물었다. “원 전 원장에게 선거개입 목적이 없었다니…. 스스로 가슴에 손을 얹고 양심에 따라 독백할 때, 정말로 그렇게 생각할까?” 담당 재판부는 대법원 판례를 인용해가며 ‘선거법 무죄’를 설파했으나 동료 부장판사조차 설복하는 데 실패한 것이다.

대선 개입 혐의로 기소된 원세훈 전 국가정보원장이 11일 서울 서초동 서울중앙지법에서 열린 1심 재판에서 징역 2년6개월 집행유예 4년을 선고 받은 뒤 법정을 나서며 취재진의 질문에 답하고 있다. (출처 : 경향DB)


대법원은 전산망 운영지침과 법관윤리강령 등에 따라 김 부장판사의 글을 직권삭제했다고 한다. 공무원의 정치적 중립성을 침해하고, 다른 법관의 사건을 공개적으로 논평하지 못하도록 한 규정을 어겼다는 것이다. 징계위원회 회부설까지 나오는 걸 보면 내부의 비판론 확산을 조기에 차단하려는 조치로 짐작된다. 그러나 대법원이 할 일은 따로 있다. 김 부장판사가 밝혔듯이 “국민의 상식과 순리에 어긋나는 지록위마(指鹿爲馬·사슴을 가리켜 말이라 함)의 판결”이란 비판이 왜 끊이지 않는지 성찰하는 게 먼저다. 대중에게 낯선 법리와 판례를 교묘한 언설로 짜맞춰오지는 않았는지 겸허하게 돌아봐야 한다. 사법시스템의 존재 이유를 스스로에게 다시 물어야 한다.

선거는 대의민주주의를 지탱하는 핵심적 장치다. 선거의 공정성을 아무리 강조해도 지나치지 않은 까닭이 여기에 있다. 힘있는 국가기관이 선거의 공정성을 훼손하는 것은 특히 심각한 문제다. 선거제도에 대한 대중의 불신을 키우기 때문이다. ‘원세훈 대선개입 무죄’ 판결의 의미는 단순히 원 전 원장이나 국정원에 면죄부를 준 데 그치지 않는다. 선거의 공정성이란 가치를 폄하함으로써 대의민주주의의 기반을 흔드는 사태를 야기할 수도 있다. 사법부의 맹성을 촉구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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