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리 역사에서 국호로서 한국이란 명칭의 정체성은 어떻게 형성된 것인가. 조선시대로 거슬러 가면 조선이란 국호보다 ‘동국’ ‘해동’ ‘대동’이란 명칭을 주로 사용했다. 중국의 동쪽에 있는 나라라는 뜻이다. 중국을 큰집으로 여기며 살던 습관에서 붙여진 이름이었다. 그러다가 1897년 대한제국을 수립하고, 서대문에 독립문을 지으면서 독립국임을 공표했다. 독립문은 오랫동안 청과의 사대관계를 청산하려는 의지에서 세워진 것이다. 이후 국권의 주체로서 조선 대신 한국이란 명칭이 부상했다. 1909년 안중근 의사가 스스로 ‘대한국인’이라 부른 것 역시 그 같은 맥락에서였다.

그러나 대한제국이 1910년 멸망하고, 식민지 통치체제에서 ‘대한’ ‘한국’이란 명칭은 사라져야 했다. 국권과 주권을 상징하는 ‘대한’ ‘한국’이란 용어를 일제가 철저하게 말살했기 때문이다. 대신 조선총독부를 비롯해 조선군, 조선은행 등 모든 식민기관과 단체의 이름은 ‘조선’으로 대체되었다.

일제가 의도한 ‘조선’이란 명칭은 조선이란 나라를 뜻하는 것이 아니라, 영남이나 호남처럼 지역을 가리키는 명칭일 뿐이었다. 일본 사람들이 한국인을 비하해 흔히 부르던 ‘조센징’이란 말 역시 조선 지역에 사는 사람들을 멸시해서 생겨난 것이었다. 식민지 지배에 놓였던 국내에서는 1945년 광복 때까지 한국과 한국인이란 존재할 수 없었다. 그것이 식민지의 현실이었다.

반면 독립운동계는 국내외를 막론하고 한결같이 한국의 정체성을 발전시켜 나갔다. ‘민족의 혼과 얼’을 강조하면서 1915년 박은식은 <한국통사>를 짓고, 신규식은 <한국혼>을 간행하면서 한국 독립운동의 정신을 밝혔다. 미주에서는 대한인국민회, 연해주에서는 대한광복군정부 등을 세워 한국인의 독립운동을 세계에 알렸고, 국내 독립운동계는 대한광복회와 같은 혁명단체를 만들어 민족혁명을 전개해 갔다. ‘대한’과 ‘한국’은 곧 독립운동의 상징이자 정신적 뿌리를 이루는 것이었다. 그리하여 1919년 3·1운동에서 독립을 선언하고, 대한민국이란 국호를 선포할 수 있었다. 3·1운동은 가히 ‘혁명’이라 이를 만했다. 독립운동의 힘으로 대한민국을 세운 것이었다. 비록 영토와 국민적 요소를 채 갖추지 못했지만, 대한민국임시정부는 우리 민족의 주권 의지를 대표하는 것이었다.

1일 서울도서관(옛 서울시청) 전면 외벽에 유관순 열사의 유언과 사진이 걸려 있다. 서울시는 3월 한 달간 이 대형 전시물을 게시할 예정이다. (출처 : 경향DB)


대한민국임시정부 수립 이후 독립운동계에서는 대한독립애국단, 대한국민회, 대한민국애국부인회 등 수많은 비밀단체가 생겨나면서 ‘대한’과 ‘한국’이란 명칭이 더욱 확산되었다. 한국독립군, 한국혁명당, 한국독립당, 한국국민당, 한국광복군 등 한국을 표방하는 독립운동단체가 수백개에 달했다. 식민지 통치체제에서는 용인되지 않았던 한국이란 명칭을 독립운동계는 국권의 주체로서 광복 직전까지 계승 발전시켜 갔던 것이다.

오늘날 우리가 대한민국 국민으로 살아갈 수 있는 역사의 원동력은 이런 독립운동의 과정에서 마련된 것이었다. 그리고 한국의 정체성을 정립한 독립운동은 한국 근현대사의 본류를 이루는 것이었다. 이 때문에 대한민국임시정부의 법통성은 대한민국으로 이어지면서 역사의 승계를 이루어 나갔다. 대한민국 헌법에 ‘대한민국임시정부의 법통성을 계승한다’는 내용을 명문화하고, 이승만 초대 대통령이 1948년을 건국으로 보아서는 안된다고 강조하면서, 1948년의 정부 수립을 ‘건국절’이 아닌 ‘대한민국 정부 수립 국민축하식’으로 거행한 것도 그런 역사 의식에서 비롯됐다.

대한민국 정부가 관보(官報)를 1948년 9월1일 처음 발행할 때, 대한민국임시정부가 수립된 1919년을 원년으로 삼아 ‘민국 30년 9월1일’로 간기를 정했던 것 역시 대한민국임시정부의 법통성을 존중한 것이었다.

광복 70주년을 맞는 오늘날 독립운동의 역사가 대한민국의 역사로 제대로 이어지지 못하는 것은 안타까운 일이 아닐 수 없다. 어떻게 대한민국이 1948년에 갑자기 생겨난 나라일 수 있는가. 그리고 1948년 8월15일을 건국일로 삼을 수 있는 것인가. 이는 역사의 무지에서 오는 단견을 넘어, 역사의 단절을 꾀하는 편견에서 비롯한 것이라 아니할 수 없다. 독립운동의 역사를 폄훼하는 것은 민족의 역사를 팔아먹는 것과 다름없음을 우리 모두 명심해야 할 것이다.


장석흥 | 국민대 교수·독립기념관 한국독립운동사연구소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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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osted by KHross

1970년대 박정희 정부 당시 국정 고교 교과서에도 유관순 열사에 대한 서술은 없었다. 뜬금없이 이 얘기를 하는 이유는 때아닌 유관순 열사 논란 때문이다.

조선일보는 지난 28일 지난해 검정을 통과해 올해부터 사용 중인 고교 한국사교과서 8종 중 4종에 유관순 열사의 이름조차 나오지 않는다고 지적했다. 유관순 열사처럼 중요한 사실이 빠진 교과서로는 역사를 제대로 배울 수 없다는 메시지도 내놓았다. 이 상황을 국정교과서 전환의 지렛대로 사용하려는 뜻이 엿보였다. 기사를 쓴 기자는 전날 정부세종청사에서 열린 황우여 교육부 장관과의 기자간담회 때 “유관순이 없는 교과서가 문제 있지 않으냐”고 질문했고, 황 장관은 “문제가 있다”고 답했다.

기사는 황 장관의 발언을 “국정 발행을 추진하는 쪽에 무게가 실렸다”고 해석했다. 이후 다른 보수언론에도 유사한 논조의 기사·사설이 이어지고 있다. 유관순 누락은 검정체제의 문제인가.

충청남도 천안시 서북구 쌍용동에 있는 유관순 열사의 동상


경향신문이 29일 국사편찬위원회가 제공하는 우리역사넷(contents.history.go.kr)을 확인한 결과, 유관순 열사는 해방 후 발행된 1차(1956년)·2차(1966년) 교육과정 교과서는 물론 1979년 유신정권에서 발행된 고교 국정교과서에도 전혀 서술이 없었다. 1982~1996년 발행된 4~6차 교육과정 교과서에선 3·1운동 부분의 각주에 “유관순의 순국 사실은 이를 잘 말해주고 있다”는 짤막한 문장으로 서술됐다. 2002년부터 사용된 7차 교육과정의 마지막 고교 국정 교과서에선 유관순 서술이 다시 빠졌다.

교육부가 현행 교과서를 만든 각 출판사·저자에게 전달한 <고교 한국사교과서 집필기준>에는 3·1운동과 관련해 ‘3·1운동의 전개 과정을 파악하고, 이를 바탕으로 수립된 대한민국 임시정부의 역사적 의의를 이해한다’고 돼 있다. 집필 기준 전체를 봐도 유관순을 비롯해 다른 특정인물을 넣으라는 지시는 어디서도 찾을 수 없다. 저자들은 이에 맞춰 교과서를 썼고, 검정을 통과했으며, 교학사 교과서의 오류 논란 속에서 유례없이 대대적인 수정·보완 권고와 수정명령까지 끝난 후 교육부의 최종승인을 받았다. 수정·보완 당시 교육부는 출판사에 오·탈자까지 수십~수백개의 수정·보완사항을 지시하면서도 유관순 서술이 빠졌다는 지적은 하지 않았다. 유관순 논란이 벌어지는 지금 교육부가 침묵하는 이유일 수도 있다.

조한경 전국역사교사모임회장은 “우리 교과서 체제는 학생들의 발달단계에 맞춰 초등학교에선 유관순 등 인물 중심으로 3·1운동을 배우고, 중·고교에선 더 확장시켜 전체 역사 속에서의 맥락을 파악하도록 구성돼 있다”고 말했다. 보수언론이 유관순 서술이 없다고 비판한 천재교육의 중학교 교과서엔 여성 독립운동가 4명을 집중조명하는 부분에 유관순이 자세히 서술돼 있다.

보수언론들은 유관순을 싣지 않은 출판사와 저자를 탓하지 말고, 유관순이 빠진 교과서를 승인해 준 교육부에 질문해야 한다. 황 장관은 정말 문제 있다고 생각한다면, 유관순이 빠진 교과서를 수차례 검증하고 승인한 교육부의 잘못을 먼저 사과해야 한다. “유관순이 빠진 교과서가 역사왜곡”이라는 보수언론들은 정작 과거 국정교과서엔 유관순이 빠져 있었다는 점을 돌아봐야 한다. 4종이라도 유관순이 실릴 수 있는 현재의 검정 체제에 오히려 고마워해야 하지 않을까.


송현숙 정책사회부 song@kyunghyang.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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