하마터면 박근혜-트럼프 조합의 이중 위기에 처할 뻔했다. 미국 우선주의, 예측불가의 도널드 트럼프는 20일 미국 대통령으로 취임한다. 그런데 한국 외교를 벼랑으로 몬 박근혜 대통령은 탄핵 직전이다. 덕분에 박근혜 리스크와 트럼프 리스크가 동시에 발호하는 최악의 상황은 피할 수 있을까.

한국 외교의 재앙적 상황이 해소된 건 아니다. 박근혜 리스크는 유령처럼 여전히 활개치고 있다. 김관진 국가안보실장은 고고도미사일방어체계(사드) 배치 방침을 확인하면서 “중국이 반대해도 상관하지 않겠다”고 말했다. 불에 기름을 끼얹자는 것인가. ‘사드 보복’ 행태는 불만스럽지만 공연히 중국을 자극할 필요는 없다. 당장 “한국에 배신감을 느낀다”는 반응이 부메랑으로 돌아왔다.

유일호 경제부총리가 트럼프의 ‘경제교사’로 알려진 스티븐 슈워츠먼 블랙스톤 회장을 만나 “대미 무역 흑자를 축소해 나갈 방법을 검토 중”이라고 밝힌 것도 부적절하다. 고도의 외교적 전술인지는 모르겠지만 미국의 공식 요구가 없는데 먼저 한국의 입지를 좁힐 필요가 있는 건지 의문이 든다. 지난 연말 “미국의 주한미군 방위비 분담금 인상 요구를 받아들일 수밖에 없는 상황”이라고 말해 “알아서 긴다”고 지적받은 장명진 방위사업청장이 떠오른다. 이 정도의 역량과 인물로 국제질서의 대변환을 예고하는 트럼프의 대외정책을 감당해야 한다니 답답하다.

도널드 트럼프 미국 대통령 당선자가 플로리다 팜비치에서 기자들의 질문을 듣고 있다. ㅣAP연합뉴스

트럼프의 아시아 전략은 전임자와 마찬가지로 부상하는 중국 견제다. 하지만 방법은 크게 다르다. 오바마는 한·미·일 삼각동맹 구축을 견제 수단으로 삼았지만 트럼프는 러시아를 끌어들여 중국을 견제하는 이이제이(以夷制夷) 전략을 동원하고 있다. 미·소 냉전 시절 리처드 닉슨이 핑퐁외교로 중국을 끌어들여 소련을 압박한 바로 그 수법이다.

문제는 이 전략이 미국을 강하게 만들지는 몰라도 국제사회 규범과 상식에 반한다는 것이다. 러시아 고립정책을 펴온 유럽연합과 미국의 관계는 복잡해질 수밖에 없다. 영원한 적도 영원한 친구도 없는 게 국제관계라지만 그것이 원칙은 될 수 없다. 우크라이나 군사개입 등 러시아의 ‘나쁜 행동’에 보상을 하는 것도 곤란하다. 한국으로서는 기존 미국과 중국의 G2 체제에 러시아가 가세하는 G3 체제로 바뀌는 국제질서의 지각변동 움직임이 더 절박한 문제다. 이런 중대한 변화가 국제사회 평화와 안정보다 이해당사국들의 이익보호 차원에서 안배되는 퇴행성도 비정상이다.

트럼프는 국내외 정책에서 ‘미치광이 전략’을 구사한다. 예측불가능하고 통제불능의 미치광이처럼 행동하면 겁먹은 상대가 알아서 긴다는 전략으로, ‘하나의 중국’ 정책 흔들기가 대표적이다. 중국이 타협하거나 양보할 카드가 아니라는 걸 알면서도 핵심 이익을 건드려 협상에서 유리한 고지에 서기 위한 포석으로 활용하고 있는 것이다. 그는 대선 기간 중에도 한밤중에 트위터를 날리고 수시로 정책적 입장을 바꿨다. 충동조절을 못한다거나 자기절제를 안 한다는 비난이 쏟아졌지만 눈 하나 깜짝하지 않았다. 동맹국이건 적대국이건 협상 파트너들은 불확실성에 혼란을 느껴야 한다는 게 그의 주장이다. 

취임 전 지지율이 44%로 역대 대통령 당선자 중 최저이고, 취임 축하 노래를 할 가수를 구하지 못해 망신당하는 트럼프는 현실의 반쪽 모습일 뿐이다. 워싱턴의 희극적인 풍경과 별개로 자국 이익만 생각하며 국제사회적 책임은 회피하는 ‘트럼프 리스크’가 한국과 세계를 점점 옥죄고 있다.

이 중차대한 시점에 한국 외교 자산의 곳간은 텅 비어 있다. 대외관계의 지렛대인 남북관계는 진작에 파탄났고, 균형외교의 핵심 축인 한·중관계는 사드 한 방에 험악한 분위기로 돌아섰다. 한·일관계 역시 미래로 나아가지 못하고 여전히 과거에 묶여 있다. 북한은 핵보유 완성 단계로 달려가고 있다. 외교 역량을 북핵에 올인하면서 전략적 카드를 소진했지만 결과는 이처럼 초라하다. 박 대통령이 위기 때면 동원하는 ‘이순신의 배 열두 척’ 전략도 별무소용인 형국이다. 천재 전략가인 이순신 장군인들 배 한 척도 없는 상황이라면 어찌해볼 도리가 없지 않겠는가.

게도 구럭도 다 잃은 한국 외교의 출구를 유일호식 저자세 외교, 김관진식 호기 외교에서 찾아서는 안된다. 대변환이 필요하다. 갈라진 국론을 결집하는 작업이 최우선이다. 사드, 위안부 합의, 북핵 모든 현안을 광장에 펼쳐놓고 토론하는 것이다. 대외 협상력은 국민적 공감대에서 나온다. 소통과 통합, 박근혜 정부가 가장 소홀히 한 바로 그 지점이 새로운 외교의 출발선인 것이다. 어디로 튈지 모르는 트럼프 리스크의 맞춤 대처법이기도 하다.

조호연 논설위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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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부는 어제 유일호 부총리 주재로 국무회의를 열어 야당과 시민이 반대하는 한·일 군사정보보호협정안을 의결했다. 협정안은 박근혜 대통령의 재가를 거쳐 오늘 한·일 양국의 서명으로 체결·발효된다. 중대 안보 사안을 지난달 27일 국방부의 협상 재개 발표 이후 한 달도 안되는 기간에 군사작전하듯 처리했다. 이런 협정안 의결은 사실상 무효다. 무엇보다 범죄 피의자로 국정 책임자로서의 정당성을 상실한 식물대통령과 문민통제를 거부하는 군부의 결정에 대한 권위를 인정할 수 없다. 대통령도 총리도 아닌 부총리가 주재하는 국무회의의 효력 자체가 의심스러운 상황이다. 단 한번의 공청회도 열지 않고 협정을 강행한 정부의 결정을 신뢰해야 할 이유도 없다. 대통령이 이 협정을 단지 외국에 자신의 건재를 과시하는 수단으로 삼은 것이라는 분석도 나온다. 사실이라면 결코 용납할 수 없는 일이다.

시민단체 회원들이 22일 오전 국무회의가 열리는 정부서울청사 앞에서 기자회견을 열고 한·일 군사정보보호협정 의결 중단을 촉구하고 있다. 정지윤 기자

국방부는 북한의 핵·미사일 위협에 효과적으로 대응하려면 한·일 간 직접적인 정보 공유가 필요하다고 말한다. 하지만 일본의 정보는 기존의 한·미·일 군사정보공유약정을 통해서도 얻을 수 있다. 그보다는 이 협정이 일본 자위대의 한반도 진출 빌미가 될 수 있다는 점을 우선 고려해야 한다. 일본의 아베 정권은 ‘전쟁할 수 있는 일본’을 추구하고 있다. 일본이 북핵 위협을 이유로 자위대의 북한 지역 접근을 시도할 경우 이를 막을 수 있는 제어수단이 마땅치 않다. 이에 대한 면밀한 고려 없이 덜컥 협정부터 맺은 것은 위험한 선택이다. 북핵 대비용이라고 하지만 영토 관련 사안을 이토록 허술하게 처리할 수는 없다.

중국이 협정을 미국 주도의 미사일방어체제 편입으로 보고 있는 것도 심상치 않다. 최근 중국의 한류 규제 강화도 보복성 조치일 가능성을 배제할 수 없다. 미국의 새 행정부 출범 후의 안보 지형을 감안하지 않고 협정을 체결한 것도 성급해 보인다. 협정 체결로 인한 동북아 정세의 변동성을 절대로 가볍게 봐서는 안된다.

한·일 군사정보보호협정 같은 갈등적 사안은 통치권 붕괴 상황에서 강행하지 말아야 한다. 그런데 정부는 오히려 중단했던 협상 재개를 선언하고 기습작전하듯 처리했다. 시민 반대를 묵살한 채 밀어붙인 협정은 향후 안보의 중대 위협요인으로 작용할 가능성이 크다. 시민들은 협정을 주도하고 동조한 모든 책임자들을 똑똑히 기억하고 책임을 물을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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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제 국무회의는 유일호 부총리 겸 기획재정부 장관이 주재했다. 박근혜 대통령은 검찰의 ‘피의자 대통령’ 수사 발표 이후 여론을 의식해 불참했다고 한다. 황교안 국무총리는 대통령을 대신해 페루에서 열린 아시아·태평양경제협력체(APEC) 정상회의에 참석 중이다. 그러다보니 교체 통보를 받은 유 부총리가 부총리직을 계속 수행하는 것도 모자라 국무회의까지 주재하는 비정상적 상황이 벌어진 것이다.

국무회의에서 장관들은 국가 최대 현안이라 할 수 있는 최순실 국정농단에 대해선 꿀 먹은 벙어리처럼 한마디 언급도 없었다고 한다. 보다 못한 박원순 서울시장이 “국민과 대통령 중 누구 편에 설지 결단하고, 황 총리를 포함해 국무위원들은 책임을 지고 사퇴하라”고 요구하는 일까지 벌어졌다. 지금 내각 꼴이 이렇다. 총리부터 짐 보따리를 쌌다가 다시 풀었고, 김병준 총리 지명자는 잊혀진 이름으로 전락했다. 경제는 두 명의 부총리가 어정쩡한 동거를 하고 있다. 박승주 국민안전처 장관 내정자는 자진사퇴했다. 문화체육관광부는 최순실 개입 정황이 속속 확인되면서 쑥대밭이 됐다. 강은희 여성가족부 장관은 최순실 딸 정유라 문제가 불거졌을 때 “이 선수 관련 얘기는 허위사실”이라고 비호한 사실이 드러나 ‘보은 인사’가 아니냐는 의혹을 받고 있다.     

유일호 부총리 겸 기획재정부 장관(왼쪽에서 두번째)이 22일 정부서울청사에서 국무회의를 주재하며 의사봉을 두드리고 있다. 연합뉴스

장관들이 자리를 잡지 못하고 있으니 공직 사회 전체가 너나없이 손을 놓고 무력감에 빠져 있다. 사실상 ‘식물정부’ 상태다. 박근혜 정부의 국정 동력은 소멸된 것이나 다름없다. 경제위기 상황 속에 당장 내년 경제에 막대한 영향을 미칠 400조원 규모의 예산안 처리, 세법 개정안 등이 올스톱됐다. 컨트롤타워의 부재로 내년도 경제정책 기조조차 정하지 못하는 상황이다. 도널드 트럼프의 미국 대통령 당선으로 어느 때보다 한반도 정세의 불확실성이 높아졌지만 외교안보 현안의 추동력도 꺼진 상태다. 공무원들 사이에서는 “지금 누가 무슨 일을 하겠느냐”는 분위기가 팽배하다고 한다. 필요한 공문마저 제때 내려가지 못한다는 말이 나돌 정도다.

박 대통령의 지도력은 물론 정부 신뢰가 추락한 상태에서 국정 추진력 회복을 기대하기는 힘들다. 청와대는 업무수행 기능이 마비됐고 부처 간 정책조율도 난항을 겪고 있다. 온 나라가 ‘최순실 블랙홀’에 빠져 허우적거리고 있는데 박 대통령은 장기전 태세다. 지금 같은 국정 마비 상태를 계속 끌고 갈 작정이라면 끔찍하다. 툭하면 ‘애국심 타령’이었던 그가 일말의 책임이라도 느낀다면 망가지고 있는 나라 걱정부터 해야 마땅하다. 도대체 언제까지 국정이 표류하게 내버려 둘 건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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국회는 유기준 해양수산부 장관 후보자와 유일호 국토교통부 장관 후보자의 인사청문 경과보고서를 청문회 당일인 지난 9일과 다음날인 10일 연속으로 채택했다. 새정치민주연합 인사청문위원 중 반대 의견을 밝힌 의원은 한 명도 없었다.

인사청문회 전날인 8일 새정치연합 서영교 원내대변인은 브리핑에서 “호락호락 넘어갈 수 없다. 국민의 시각에서 이미 후보자들은 부적격”이라고 밝혔다. 하지만 야당 말을 믿었던 사람들은 인사청문회 결과가 실망스러웠을 것 같다.

새정치연합 우윤근 원내대변인은 이런 상황을 의식한 듯 10일 원내대책회의에서 “해수부 장관 청문보고서 채택은 공석 2개월이 너무 길다는 일부 우리당(내) 의견이 있어서”라고 해명했다. 당 대변인이 ‘국민 입장에선 부적격’이라고 한 게 불과 이틀 전인데 그사이에 말이 달라졌다.

유기준 해양수산부장관 후보자에 대한 인사청문회가 9일 국회 농림축산식품해양수산위원회에서 열리는 동안 해수부 소속 공무원 등이 청문회장 밖에서 모니터를 통해 청문회 과정을 지켜보고 있다. (출처 : 경향DB)


국민들은 어떻게 생각할까. ‘역시 국회의원들끼리는 통하는 게 있구나’라고 생각하지 않았을까. 새정치연합 소속인 김우남 농림축산식품해양수산위원장은 9일 유기준 후보자 청문회를 이렇게 정리했다. “18대(국회)에서 유 후보자와 상임위를 2년 같이 해봐서 인품·능력·비전을 잘 알고 있다.”

박근혜 대통령이 현역 국회의원을 국무위원으로 줄줄이 지명하는 이유가 있다. 바로 ‘팔이 안으로 굽는 식’의 의원들끼리 통하는 ‘현역 의원 불패신화’에 대한 믿음이 있었기 때문일 것이다. 이완구 국무총리 후보자가 어렵사리 국회 청문회를 통과하자 한때 그의 협상 파트너였던 제1야당 원내대표는 눈물을 훔쳤을 정도니 말이다.

야당이 국민 앞에 ‘동료의식’을 둔다면 앞으로 최소한 입에 발린 ‘원칙’을 이야기하지는 말아야 할 것이다. 호언장담이 며칠 만에 앞뒤 다른 ‘허언’으로 바뀔 수 있기 때문이다.


박영환 정치부 기자 yhpark@kyunghyang.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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