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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 2014.08.11 정금나무
  2. 2014.08.04 동백나무


정금, 나직이 불러보면 시골 초등학교 동창생 가시내 이름 같기도 하고 다시 정금, 중얼거리면 입에 침이 가득 고인다. 박수근 그림의 바탕이 되는 회백색의 질감은 우리나라 어디에서나 흔한 무른 바위의 거친 표면을 아주 닮았다. 어릴 적 고향 뒷동산에서 뛰놀 때 부드럽게 휘어진 능선을 돌아들면 굵은 소금 같은 알갱이로 부서지는 다정한 바위들. 그 가까이에 주로 자라는 나무가 있었다. 정금나무였다.

소 먹이러 갔을 때 후두둑 깜보랏빛으로 익은 열매는 늘 우리들 차지. 정금나무의 키는 내 머리통에 수박 하나를 얹은 것과 어금버금해서 겨드랑이에서 팔을 쭉 빼면 딱 따먹기 좋은 위치였다. 어느 땐 익기를 기다리지 못해 초록의 띵띵한 열매를 훑기도 했다. 깨물면 퍼지는 시금털털한 맛도 얼굴 한번 찡그리고 나면 뒷맛이 이내 좋았다.

경상남도와 전라북도를 하나로 꿰매는 육십령에서 출발해 덕유산에 올랐다. 한식이나 벌초하러 오고 갈 때마다 별렀던 산이라 감회가 새로웠다. 땀을 쏟고 능선에 올라 산세를 거머쥐고부터는 자주 오른쪽을 보았다. 농도를 달리하여 배열되는 산 너머너머에 내 고향이 숨어 있는 것이다. 덕유, 조용히 부르면 집에서 통하는 이름이 덕순이었던 친척 누이가 생각나고 덕유, 다시 부르면 덕이 여유롭게 흘러넘치던 동네가 떠오른다. 그리고 한번 더 덕유, 중얼거리면 이 모두를 다 품는 저 후덕한 덕유산!

할미봉을 지나 어느 바위틈을 돌아들자 붉게 상기된 듯한 나무가 있었다. 정금나무였다. 귀밑머리 솜털처럼 잎에는 잔털이 송송하고 가장자리엔 핏빛이 감돈다. 열매만 탐했던 터에 이제야 비로소 꽃들도 눈으로 들어온다. 소 턱 밑의 작은 워낭처럼 아래를 향해 달려 있는 꽃. 톡 건드리면 딸랑딸랑 워낭소리가 울려나오고 그 소리 끝을 따라가면 내 잃어버린 것들이 딸려 나올 것 같은 정금나무의 정다운 꽃, 꽃, 꽃, 꽃, 꽃. 진달래과의 낙엽 관목.


이갑수 | 궁리출판 대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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권위 있는 연구자에 따르면 김수영 시인은 자유가 아니라 꽃의 시인이라고 해야 마땅하다고 한다. 시인이 남긴 작품을 조사해 보면 꽃이란 시어를 무려 127회나 부렸다는 것. ‘꽃’ 하나로 ‘꽃의 시인’의 지위를 누렸던 김춘수 시인이 듣는다면 뭐라고 하실까. 이제 시의 업(業)에서 홀가분하게 벗어나 고인(故人)의 반열에 드신 분들이니 그게 무슨 대수랴 싶기도 하다.

꽃이 홀연 자취를 감춘 계절. 가로수 줄기 끝에선 꽃잎 대신 매미소리가 펄, 펄, 펄 떨어져 내린다. 시인들은 이 수상한 시절을 어찌 견디고 있을까 궁금해졌다. 여름에 발표하는 시를 살피면 그 속내의 한 자락이라도 혹 알 수 있지 않을까. 종로도서관에서 계간지를 일별해 보았다. 내 수준을 함부로 벗어날 순 없고 그저 작품 속의 구체적인 나무나 꽃을 조사했다.

<논어>를 보면 공자는 제자들에게 <시경>을 읽으라고 한다. 조수초목지명(鳥獸草木之名), 즉 새와 동물, 나무와 풀의 이름을 많이 알 수 있기 때문이라는 것이다. 우리 시인들도 그런 영향을 암암리에 받은 것일까. 골짜기를 헤매듯 잡지를 뒤적이자 의외로 많은 동식물이 등장하였다. 그렇게 시의 생태계를 살피는데 문득 드는 생각. 나무 하나 들먹이지 않고 시를 생산하기가 힘들 듯 욕 한마디 없이 이 시절을 건너기도 참 어렵겠군. 그런 참인데 어느 페이지를 넘기자 내 마음을 딱 헤아리기라도 했다는 듯 이런 동시 한 구절이 있지 않겠는가. “아아아아아아아/ 시이이이이이이/ 가안시인배애가트은/ 어얼빠아지인노옴가트니이”(서정홍, 욕 공책)

4종의 계간지에서 확인한 것은 총 31그루. 반갑게 해당화도 있었다. 원예종을 제외하고 거의 알겠는데 모르는 나무가 하나 있었다. 왕동백나무였다. 시에 따르면 지옥에서 피는 나무라 했다. 내 근처에도 살 법했건만 도감을 보니 이승에는 없는 나무였다. 어쩌나. 시인들의 시상에 큰 도움을 준, 한겨울에 피었다가 ‘눈물처럼 후두둑 지는’ 동백나무를 여기에 심어 갈음하기로 한다. 차나무과의 상록 교목.


이갑수 | 궁리출판 대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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