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5년 1월, 임신한 아내를 위해 크림빵을 산 뒤 길을 건너던 남자가 뺑소니차에 치여 숨졌다. 소위 ‘크림빵 뺑소니 사건’이다. 범인은 도주했다가 수사망이 좁혀지자 자수했는데, 그는 한사코 ‘사람을 친 것을 몰랐다’라고 주장했다. 술에 너무 취해 정신이 없었다는 게 그의 변명이었다. 사고 직후 그가 골목길에 들어가 한참을 숨어 있었다든지, 정비소에 가는 대신 직접 부품을 구입해 부서진 차를 고치려고 한 일 등으로 미루어 볼 때 그는 사람을 쳤다는 걸 알고 있었던 게 분명하다. 그럼에도 그가 시종 ‘몰랐다’라고 주장한 이유는 그편이 뺑소니보다 형량이나 사회적 비난이 작을 것이라고 착각했기 때문이다.

최순실 의혹이 불거진 지난 한 달여 동안, 우리 국민들이 가장 많이 들은 말은 “몰랐다”이다. 청와대 경호 담당자는 최순실이 출입기록도 남기지 않고 청와대를 출입하는 것을 몰랐고, 측근을 관리해야 할 우병우 전 민정수석은 그녀가 저지르는 국정농단을 알지 못했다고 당당히 말했다. 김기춘 전 비서실장은 최순실의 청와대 출입은 물론 그녀의 이름조차 들어본 적이 없다고 했다. 그는 이것 말고도 모르는 게 한두가지가 아니었는데, 그중 세월호 사건 당일 대통령이 7시간 동안 어디서 뭘 했는지 몰랐다는 건 그가 대통령을 보필해야 하는 비서실장이라는 점에서 황당하기 그지없다. 최순실을 모르는 건 소위 문고리 3인방도 마찬가지였다. 정호성 전 비서관은 최순실에게 대통령 보고 자료를 전달하는 역할을 담당했으면서도 그녀를 모른다고 했고, 이재만 전 비서관 역시 최씨를 만난 기억이 없다고 한 바 있다. 오랫동안 박 대통령을 모셨던 이들이 박 대통령이 죽고 못 사는 최씨를 모르는 게 과연 가능할까 싶지만, 측근들은 하나같이 모른다며 입을 모은다.

일러스트_ 김상민 기자

이쯤 되면 최순실이 과연 존재하는 사람인지 의심이 간다. 언제든 모습을 감출 수 있고 순간 이동이 가능한 게 아니라면, 어떻게 아무도 그녀를 못 볼 수 있을까? 대통령보다 높은 ‘VVIP’라 생각했기에 감히 얼굴을 쳐다볼 엄두를 못 낸 것일까? 청와대 거주민 중 유일하게 최순실을 아는 박 대통령 역시 그녀가 연설문을 잘 쓰는 것만 파악했을 뿐 내면이 탐욕으로 가득 차 있다는 사실을 알지 못했다는 뉘앙스를 풍긴다. 11월4일 대국민담화 때 “개인적 인연을 믿고 제대로 살피지 못한 탓”이라며 눈물을 흘리던 박 대통령의 모습은 친박의 수장 이정현 의원과 몇몇 박사모의 마음을 촉촉이 적셨다. 그러니까 박 대통령은 기업을 협박해 돈을 뜯어내고, 최씨를 위해 이권을 챙겨주는 그 순간에도 그게 국가를 위한 선의에서 나온 행동이라고 굳게 믿었던 모양이다.

이들은 도대체 왜 이리 모르는 게 많은 것일까? 뺑소니보다 만취 상태를 선택한 크림빵 가해자처럼, 이들은 안다고 시인해서 범죄자가 되는 대신 무능한 공직자로 남는 게 더 좋다고 판단한 것 같다. ‘무식한 건 죄가 아니다, 다만 부끄러울 뿐이다’라는 말이 있다. 내가 늘 하는 말인데, 위에서 예로 든 분들은 그 부끄러움을 감당할 뻔뻔함이 있었기에 기꺼이 무능을 택했다.

지난 9월 말부터 발효된 김영란법(청탁금지법)은 공직자가 금품을 받은 경우 대가성 여부에 상관없이 처벌한다는 취지를 담고 있다. 그간 수많은 정치인과 공직자가 돈을 받은 뒤 대가성을 부인해 처벌을 받지 않는 광경을 지겹게 봐왔던 터라, 여론은 이 법을 압도적으로 지지했다. 그런데 뻔히 아는 사실을 몰랐다고 함으로써 혐의를 벗으려는 공직자들은 대가성을 부인하는 공직자보다 덜 나쁜 것일까? 직급이 낮은 분들이야 조금 무능해도 괜찮겠지만, 높은 직급에 있는 이들의 무능은 사적으로 금전적 이득을 취하는 것보다 국가적으로 훨씬 더 큰 해악을 끼칠 수 있다. 특히 국정의 최고 책임자인 대통령의 무능은, 지금 우리가 목격하고 있는 것처럼 국가를 파멸로 몰고 갈 수도 있는 중대한 범죄다.

그래서 난 국회가 소위 ‘김기춘법’을 만들어 줄 것을 제안한다. 고위공직자가 자신의 직책상 반드시 알아야 할 사항을 모른다고 우기면 알고 범죄를 저지른 것보다 훨씬 더 높은 형량을 선고하자는 취지다. 법안을 처음 제안한 내 이름 대신 ‘김기춘법’이라 명명한 까닭은 그가 “모른다”는 말을 단기간에 가장 많이 한, 후안무치한 분이기 때문이다.

김영란법이 공직사회를 변화시킨 것처럼, 김기춘법도 시행만 된다면 공직자들의 언행을 순식간에 변화시킬 수 있을 것 같다.

“최순실씨 잘 알죠. 하도 자주 와서 주민등록등본을 아예 청와대로 옮기라고 농담한 적도 있어요.”(안종범)

“안 수석은 가만있어요. 최순실씨를 저만큼 자주 본 사람이 또 어디 있다고 그래요? 매일같이 보고서 갖다 준 사람이 바로 납니다.”(정호성)

“사실 그날 대통령이 사생활이라고 들어오지 말라고 했는데, 문밖에서 코를 대보니 희미하게 프로포폴 냄새가 나더라고요. 그래서 생각했죠. 아, 대통령께서 사생활을 누리고 계시는구나.”(김기춘)

어디까지나 예를 든 것이지만, 상상만 해도 신나지 않은가? 김기춘법이 하루빨리 시행돼야 할 이유다.

서민 | 단국대 의대 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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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osted by KHross

‘귀하신 몸’이라는 유행어를 남긴 ‘가짜 이강석’은 자유당 시절을 풍미했던 유명한 사건이다. 이강석은 당대 권력자인 이기붕의 아들로 뒤늦게 이승만 대통령의 양자로 들어가 무소불위의 권력을 휘둘렀다. 그를 닮은 가짜 인물이 경북 일대를 휘젓고 다니며 지방 유지들에게 융숭한 대접을 받았다가 들통 난 게 이 사건의 실체다. 가짜인 줄도 모른 채 “나 이강석인데…”라는 말 한마디에 부패한 지방 관료들은 버선발로 쫓아 나와 그에게 수재의연금까지 털어 바쳤다.

반세기 만에 비슷한 사건이 재연됐다. 어제 검찰에 구속된 조모씨(52)는 이재만 청와대 총무비서관을 사칭해 대기업을 농락했다. 검찰의 공소장을 보면 조씨는 지난해 7월 대우건설 박영식 사장에게 전화를 걸어 “이재만입니다. 조모씨를 보낼 테니 취업을 시켜주면 좋겠다”고 했다. 이튿날 박 사장을 찾아간 조씨는 별다른 절차 없이 회사에 취직해 1년간 부장으로 일했다. 이 회사를 그만둔 뒤에는 KT 황창규 회장에게 같은 수법으로 전화를 걸어 취업을 부탁했다. 황 회장은 직원들에게 조씨의 취업 절차를 밟으라고 하면서 청와대에 확인 전화를 해보라고 지시했다고 한다.

'가짜 이강석'이 아직도 통하는 사회 (출처 : 경향DB)


결국 사기행각이 드러나긴 했지만 개탄스럽기 그지없다. 청와대 금고지기인 이 비서관은 자타가 공인하는 박근혜 정권의 실력자 중 한 명이다. 총무비서관 전화 한 통화에 모든 게 일사천리인 세태는 뭘 말하는가. 박 대통령은 취임 후 청와대 직원들에게 청렴과 봉사를 강조했지만 청와대가 불미스러운 사건에 등장했다는 사실 자체가 수치다. 더구나 가짜 실력자에게 놀아난 대기업들은 또 뭔가. 대우건설과 KT는 민간 기업이지만 주인 없는 회사라는 점에서 경영진 선임 과정에 청와대의 입김에서 자유로울 수 없는 게 현실이다. 그런 면에서 더 뒷맛이 개운치 않다.

조씨는 구속됐지만 의문점이 한둘이 아니다. 그가 생면부지라는 이 비서관의 전화번호를 어떻게 알고 실력자 행세를 했는지 의문이다. 대기업 최고경영자가 전화번호도 다른 가짜 인물에게 속아 별다른 확인 절차 없이 일자리를 알아봐줬다는 것도 납득하기 어렵다. 혹 이 비서관 주변 인물이 개입했다면 그냥 넘길 일이 아니다. 검찰은 보강 수사를 통해 진상을 철저히 규명해야 한다. 청와대도 이번 사건을 성찰의 계기로 삼아야 한다. 비단 공기업뿐 아니라 멀쩡한 민간기업들마저 “청와대 민원만 없으면 회장 노릇 할 만하다”는 소리가 왜 나오는지 귀 기울여 보기 바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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